열린 예배는 대안 예배로 기능하는가?
1.예배인가 공연인가
뉴욕의 한 유수 일간지에는 소속 여기자의 기고한 글을 실었는데, 그 글에서, 가자는 어느 교회의 ·열린 예배·에 참석하고 나서, “기독교의 예배는 천주교의 예식에 비해 경건미가 떨어진다” 고 자기 느낌을 말하였다.
예배에 동참한 이로서, 자기가 익숙지 않은 다른 예배형식에 대한 몰이해를 탓하기보다, 그 여기자가 지적한 대로, ‘예배인지 공연’ 인지 혼동을 일으킬 만큼, 너무나 활짝 열어젖혔다고 말했으니“ 우선 그 ‘열린 예배의 진면목이 자못 궁금한 이들도 있겠으나, 그만큼, 최근 개신교 예배형식이 얼마나 시류에 편승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열린 예배' Contemporary Worship)는 전통적인 예배형식에서 소위, 노래와 무용, 마임과, 영상을 보이면서 대중의 참여를 이끄는 소위 개방형의 예배 스타일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이다.
대표적인 열린예배는 시카고의 윌로우 크릭교회를 창설한 빌하이블 목사(William Hybels(1951-,Kalamazoo, MI)가 대표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는 주로 초신자들에게 친숙하도록 독특한 극장식 공연형식을 가미한 예배를 도입하여, 매주 토요밤에 초신자를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또 주일에도 비슷한 형식으로 예배드리는데, 출석인원이 2만명에 이르는 대형교회로 성장한 것이다.
그 교회의 예배형식은 초신자들에게 거부감이 없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예배인도자가 가운을 하거나 정장대신에,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나올 정도로 개방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새신자에게는 물론 헌금을 강제로 걷지 않으며, 교회라는 이름 대신에 ·캠퍼스·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재론의 여지없이 열린 예배·라는 퓨전형식의 예배가 전세계적으로 들불처럼 유행하게 된 것은 윌로우크릭교회가 그 동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1980년대 이후 급격하게 교회예배의식 중에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악기와 찬양단과 무용수들이 동원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되었다. 심지어 ‘몸 찬양’ 이란 이름으로 ‘단극’이나 ‘마임’도 참여시키고, 예배중에 동영상과 그림을 보이는 등, 듣는 예배에서 보고 참여하며 즐기는 소위 ‘공연식 예배’라 할 만큼 큰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심지어 율동교사를 양성하는 신학교와 찬양신학교가 창설되었으며, 국악찬양과 전문찬양선교단, 선교성극단이 운영되고, 성가사, 찬양치료사 등의 새로운 직임도 창출되었다. 이제는 교회마다 찬양팀을 운영할 정도로까지 소위 열린 찬양과 열린 예배에 대한 관심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대표적인 무용이 가미된 예배형식으로는, 1983년도 7월,카나다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WCC)개막예배에서 한국교회의 대표로 참여한 정아무개교수가, ·소복차림으로 나와창호지에 불을 붙이고는 제단주위에서 춤사위를 펼치면서, 초혼의식을 선보였다‘ 는데, 그 대회이후 ‘종교다원화’가 공론화되었고, 심지어 종교혼합주의로 기울고 있는지에 대한 많은 의문과 논란이 일게 된 것도 사실이다.
2. 문화적 쏠림현상의 배경
현대 젊은이들은 점차 전통적인 가족교회를 떠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대형교회를 찾아가는 경향이 있다. 곧 책임지는 것은 멀리하고 자기를 드러내기 보다 익명을 원하는대신,개인취향에 따른, 영적인 필요만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아예 기독교회를 떠나서 동양의 불교와 도교 및 힌두교의 요가수련에 몰입현상에 대해서도 간과 할 수 없는 통계자료도 보고되었다.
수년 전, 타임 매거진에 의하면 미국내 요가수련원에 등록된 미국인들이 무려 200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상당수 젊은이들이 전통적인 가치개념을 부정하고, 자유섹스를 받아들이며, 각종 환각제, 각성제를 남용하는가 하면, 가족의 해체를 방관하고, 마약과 동성애와 환각에 취해 간다고 보도 하였다.
이처럼, 젊은이들의 감성이 빠른 비트의 롹-음악(Rock Music)에 심취되는가 하였더니, 어느 틈에 뉴 에이지라는 서정적이고도 은밀한 자아망상철학에 수많은 젊은이들의 영혼이 빠져들고 있다는 지적도 들린다. 벌써 그들은 이미 서구적 기독교 가치관에서 떠나 초월명상을 통해 동양적 신비를 체험하고자 애쓰고 있다고 한다. 소위 자연주의 사상에 심취하며, 현재의 전통적 합리적 가치관을 부정하되 기존질서의 파괴를 당연시 하며, 미래를 부정하는 경향과 인류의 미래를 파괴적으로 인도하는 아노미 철학이 도전하게 된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징후와 현상들이 나타난 것은 196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전세계를 휩쓴 히피문화를 이식하게 지 않을 수 없다. 히피문화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하여 뉴욕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퍼지게 된 젊은이들의 문화현상이었다. 곧 장발과 청바지와 통키타로 대표되는 시대적 문화현상으로도 기억된다.
1969년 8월 어느 날, 미국 뉴욕주 캐스킬 지역의 한 거대한 농장에서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소위 ‘평화와 사랑’을 주장하는 40여만명의 젊은 이가 모였다고 하는데, 이름하여 ‘우드스탁 페스티벌’이다.
우드스탁행사는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전 세계가 다 아는 이름이 되었는데, 전세계에서 모여든 젊은 이들이 ‘전쟁대신에 평화와 사랑’을 주장하였다는 것은 당시 참신한 의미로 부각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우드스탁은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단순한 공연행사라기 보다 한 시대의 문화적 단면을 대표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것은 혼돈과 격변의 1960년대 말, 우드스탁에 도착한 젊은이들 대부분은 전통과 권위를 거부하고 전쟁에 반대하며 오직 사랑과 평화를 절대가치로 주장하였던 캐치프레이즈와는 달리, 그들은 실로 현실적 어려움을 이상적 대안사회와 새로운 공동체로 대치한다는 목표를 추구하였으나, 실상 우드스탁에서의 3일만에 전격 강제중단되고 말았다. 그 행사는 그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치닫고 말았다. 마침내 재해지역으로 선포될 만큼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곧 사랑과 평화를 외친 사람들은 환각에 빠진 채, 진흙탕 속에서 징난질이나 하고, 나체로 수영을 하거나 벌거벗은 채 거리를 돌아 다니며, 주위 사람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극단주의적 이기적 행동을 보였으니, 결국은 무정부주의와 반인류적 무질서한 쾌락주의가 가져온 방종의 대표적 폐해사례로 기억되는 것이다. 목적에 이반한, 실패한 행사였다는 진단도 결코 지나치다 여기지 않는다. 환각에 취한 젊은이들이 저지른 무정부주의적 아노미현상의 폐해를 똑똑히 보여준 것이다.
이처럼 타락한 문화에 뿌리를 둔 세속주의 향락문화가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까지도 미혹하고 있는데, 어느새 우리 쳥년들은 히피문화와 록음악 그리고 뉴에이즈 철학과 세속적 다위니즘과 진화론적 과학만능주의에 길들여지고, 세속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져 흐느적거리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들은 아무 대책도 내놓지 못하였으니, 머뭇거리는 사이, 무기력한 교회 안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 바로 ‘경배와 찬양’, 곧 ‘열린 예배’라는 퓨전스타일의 유행에로의 쏠림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키타와 드럼으로 열린 찬양에 심취되고 춤을 추며 열띤 찬양을 드린 젊은이들이, 말씀과 기도와 헌신은 물론, 개인의 경건생활은 물론, 가정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물론, 복음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봉사하는 삶에서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면 우려할만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자칫 혼합적인 예배형식으로, 과연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인간의 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공연수준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재료를 준비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3. 참된 예배의 의미
우리말로 ‘예배’의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께 절을 올리는 예식’ 이다. 이는 천지의 주재와 조상님에게 ‘예(禮)로써 절을 올린다’는 뜻이다. 이 예배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되, 말과 노래와 춤과 제물을 드림으로, 가능한 모든 정성으로 지극한 헌신의 예(禮)를 표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초창기 기독교 전도자들은 우리의 전통의식을 이해하되, 교회의 예배의식에는 하나님께 ‘큰 절’ 올리는 예식만은 생략하였다. 아마도 큰 나무나 바위 및 사람이 만든 인형에게 절하며 복을 빌던 이들에 대하여 초기 전도자들이 모세의 율법을 떠올리고, 저들에게 우상숭배를 방지하고자 일단 금한 것으로 짐작된다.
조상님의 산소에 절하는 행위, 신주에 절하는 행위, 이러한 모든 절하는 풍습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의식임에도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선교사들이 예배형식에서 제외한 것을 탓할 바는 아니다. 이는 중세기 제단과 십자가 앞에 절하고 성상에 입맞추는 것을 반대하였던 개혁자들의 입장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는 교회제단에서 십자가를 아예 철거하였고, 그 앞에 절하지 말도록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성전제단을 향하여 무릎 꿇고 기도드리는 행위는 허락하였으니, 그 예배행위 현장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심을 믿는 까닭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제단 앞에 네 몸을 보이라” 명하셨고, “거기서 만나주시겠다” 약속하셨다(출25:22).
영어로 번역된 예배worship service의 문자적 의미는 worth(가치됨)과 service(봉사)를 합한 뜻이다. 즉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소유된 바 가치있는 것이 되는 것이니,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생명’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피’와 ‘희생’을 예물로 드리도록 명하였다.(레17:11, 히9:22) 이는 하나님께 드릴만한 가치 있는 예물이 되려면, ‘마음’과 ‘뜻’과 ‘정성’이 담긴 생명의 예물이 인정됨을 의미한다. 결국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란 생명이 담긴 희생제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기의 재능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건물을 지어 봉헌하기도 하고, 또는 음악이나 춤으로 표현도 하며, 특히 몸으로 땀 흘려 봉사하고, 매일의 고난 중에도 묵종하는 인내의 삶과 생명을 헌신하는 제자의 삶과 순교적 헌신을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제물로 인정되며,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려 드리는 찬양의 행위가 된다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하고, 또 감사와 찬송으로 제사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예배의 의미를 바로 알고 참 예배의 대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 예배자는 자기 자신을 성결한 제물로 헌신하는 마음자세로 예배에 임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대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 간혹 예배 중에 찬양대나 독창자의 찬양에 대하여 지나친 찬사는 아꼈다가 개인적으로 격려함이 마땅하며, 찬양대와 독창자에 대하여 회중이 아낌없는 칭찬의 박수를 보내는 경우도 그 의미를 충분히 살펴져야 하리라 믿는다. 사실 예배 중에 사람들 앞에서 찬양대가 마주서서 음악회를 열듯이, 찬양하는 모습도 과연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찬양인지도 돌아보는 것이 마땅 할 것이다.
4.열린 찬양을 예배로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까닭이라 할 것이다.
시편기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선포하였다 (시150편). 우리 찬송가에서도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 (통일33장) 하였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은 ‘영혼구원’ 외에, ‘찬양의 제사’ 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24장로들은 대주재께 찬송하기를,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며 주를 찬양하였다.(계7:12)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으로 하나님의 노래를 부르게 하시고, 또 그 사람들의 찬송을 받고자 창조하셨다” 고 증거하셨다(사43:7, 21).
분명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22:3).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중에는 ‘입술의 열매’ 곧 ‘찬미의 제사’ 가 포함된다(히13:15). 시편의 수많은 찬양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어들이며, 다윗과 아삽 등은 영장으로 시를 지었고, 하나님께 시편의 노래를 드렸다고 증거되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하늘의 천사들이 찬양하였는데(욥기38:7),그 크신 일을 찬미하였다.
다윗 왕의 경우 법궤 앞에서 속옷이 다 드러날 정도로 큰 춤사위로 기뻐 춤을 추었다고 하였으나, 이는 하나님의 법궤를 시온성에 들이게 됨을 환영한다는 표현이었다. 이를 두고 제사장이 드리는 예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사장의 무리들은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보는 앞에서 저희들의 신을 하루 종일 부르며, 자기 몸을 상해하고, 또 뛰놀며 진언(嗔言)도 말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들 이방종교의 예배의식의 단면을 보여 준다. 그러나, 거짓된 종교의식에 대하여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나지 않자,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거짓선지자들에게 달려들어 모조리 처단하였다(왕상18:26-29).
어떤 조사에 의하면 321명의 유명 롹스타들의 평균수명은 36.9세였다고 하며, 모두가 질병과 술과 마약남용, 자살 등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세계적인 롹-음악의 스타로 알려진 Kurt Cobain(Nisrbana),Sid Vicious(Sex Pistol), Jimi Hendrix등은 마약중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http://www.av1611.org).
5.마무리하는 말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열린 예배”는 너무나 활짝 열어 제침으로, 소위 퓨전음악 스타일로 여겨지니, ‘입술의 열매로 드리는 찬양의 제사’와 ‘경배와 찬양’을 드린다는 명목으로, 사람의 놀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열린 예배라는 이름은 도도하게 흘러가는 시대적 물결 속에서 교회를 위한 하나의 ‘대안예배’로서의 자리매김이 가능한 지, 어떤지 이제 성서적 신학적 이해가 더욱 긴요한 때가 되었다 여기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향하여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사람앞에서 발표하는 ‘공연예술의 한 쟝르’ 로 변형시키는 것을 기뻐하시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행여, 고대 디오니소스 신을 위한 축제와, 고대 바벨론의 말둑과 고대 이집트의 이시스 신들을 위한 광란의 종교예식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며, 엘리야 선지자가 철저하게 배격했던 바알신이나 아세라 여신을 위한 ‘뛰노는 춤’과 관련하여, 한국의 무속인들이 굿판을 벌이면, 온 동리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며 즐기며 모습과 유비되니, 자칫 종교혼합주의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경계해야 마땅한 것이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빠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몸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전도서1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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