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 수 설 교 론
설교의 전달방식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설교의 형태를 만들어왔다. 당신의 설교를 다양한 설교의 틀에 실어 전달하라 |
정 인 교 지음
목 차
1장 고전적 찬송설교
1. 찬송설교의 개념적 이해
2. 찬송설교의 작성
3. 찬송 설교의 실제
2장 현대적 찬송설교
1. 현대적 찬송설교의 개념적 이해
2. 현대적 찬송설교의 작성
3. 현대적 찬송설교의 실제
3장 역할 설교
1. 역할설교의 개념적 이해
2. 역할설교의 작성
3. 역할설교의 실제(1)
4. 역할설교의 실제(4)
4장 스킷드라마(Skitdrama) 설교
1. 스킷드라마 설교란 무엇인가?
2. 스킷드라마 설교의 작성
3. 스킷드라마 설교의 실제
5장 낭독극 설교
1. 낭독극 설교란 무엇인가?
2. 낭독을 위한 대본
6장 대화 설교
7장 2인 대화 설교
1. 설교의 성격
2. 설교의 준비와 진행
3. 설교의 실제
8장 질의식 대화 설교
1. 설교의 성격
2. 설교의 작성
3. 설교의 실행
4. 질의식 대화 설교의 실제
9장 영상설교 - 연구 논문
부록: 오후예배 살리기
1장 고전적 찬송설교
1. 찬송설교의 개념적 이해
찬송설교(Liedpredigt)라는 개념은 경배와 찬양 그리고 열린예배의 영향으로 우리 강단에 익숙한 설교형식이다. 그러나 본래 찬송설교에 대해서는 그리 높은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한게 사실이다. 원래 찬송설교란 르네상스시대부터 유럽강단에 자리잡아온 방식으로 설교의 본문을 성경대신 특정한 찬송가로 잡는다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 사순절 기간이나 교회의 축제절기에 행해지는 전통이 있었으며 지금도 이런 경향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설교하면 성경의 일정부분을 본문으로 잡는 것에 익숙한 우리 실정이고 보니 찬송
가를 본문으로 설정하는 방식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찬송이란 무엇인가? 말씀으로 훈련받은 한 신앙인이 자신의 삶 가운데서 만난 하나님 혹은 그의 절박한 상황 또는 기쁨의 상황 그리고 잔잔한 일상가운데 감동된 내용을 가사화 하여 거기에 곡을 붙인 것이 아닌가? 따라서 성경말씀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찬송가사의 바탕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지 않는 기초를 이루고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그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삶에서 체험한 것이고 보면 이미 신적 차원이 인간의 차원에서 수용되고 경험된 것이 찬송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찬송은 인간의 경험 안에서 이미 한 단계 적용되고 경험되고 이해된 상태이기 때문에 간은 성상을 지닌 회중들이 수용하는데 있어 훨씬 유리한 장점을 지닐 수 있다. 동시에 설교에 회중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며 그 어느 설교보다 찬송이 가지는 정적인 터치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중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하는데 큰 장점을 가진다 할 수 있다.
2. 찬송설교의 작성
찬송 설교는 찬송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일반 설교보다 회중의 정적인 자극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만큼 그 작성에서도 나름대로의 특징을 갖기 마련이다. 주요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찬송설교는 특정한 찬송을 설교본문으로 설정한다. 즉 성경 대신 찬송가 한 장이 설교본문이 된다. 어찌보면 설교본문은 곧 성경이라는 도식에 익숙해 있는 입장에서는 생소한 것이 아닐 수 없고 일부 보수적인 회중들 입장에서는 찬송설교의 본문 설정에 극력 반대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설교 방식은 우리에게 설교를 전해준 서구 교회에서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즐겨 사용해온 방식이다. 또 설교의 역사를 보면 성경이 정경으로 확정되기 이전에는 상당 기간 동안 본문없는 설교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원론적인 면에서 찬송이란 한 신앙인이 자신의 삶 한가운데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 혹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말씀이 같은 성정을 가진 한 인간의 삶을 통해 한 번 적용되고 걸러졌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찬송의 가사는 각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담고 있기 마련이며 그 찬송이 계속 불려 지는 한 그 찬송이 담고 있는 신학 역시 그대로 보존되어질 수 밖에 없다. 일반 신학
이론이 부침을 계속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찬송은 그 어느 장르 보다도 신학의 보관함 구실을 톡톡히 한다고 볼 수 있다.
설교자는 본문이 찬송가 인 만큼 찬송가의 가사로부터 메시지를 추출해 내야 한다. 설교자는 성경본문과 씨름하던 그 수고를 이제는 찬송가사로 옮겨야 한다. 동시에 설교란 언제나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그것을 펼쳐나가는 것이므로 대개 3-4절의 가사로 이루어진 찬송가사를 놓고 어떻게 추출한 설교메시지를 디자인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둘째 특별히 찬송설교 시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찬송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본문설교에서 66권의 성경이 이론적으로는 모두 설교의 본문이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존재하는 것처럼 찬송 역시 이 일반룰의 적용을 받는다. 전술한 것처럼 찬송이 한 신앙인의 체험을 전제한 것이라면 가급적 설교에서 회중의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사연'을 지닌 찬송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말하자면 찬송가사로부터 메시지가 추출되지만 그것을 작시한 작사자의 신앙체험은 이 메시지의 경험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급적 평범하지 않은, 회중에 감동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더욱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맹인이면서 동시에 농아였던 3중의 중증 장애자였던 패니 크로스비가 작시한 찬송들은 그 어떤 곡보다 진한 감동과 신앙의 참 의미를 회중에게 전해 줄 수 있다.
세째 이러한 두 가지 사항 즉 메시지 추출과 작시자의 독특한 체험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메시지의 내용을 결정했다면 이제 찬송이 지닌 특징을 최대한 살려 설교를 어떻게 설교를 진행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대개 찬송이라는 것은 가사와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찬송을 노래하기도 하고 그 리듬만을 듣기도 한다. 이런 특징을 기초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방식을 설교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a.. 설교자와 온 회중이 함께 찬송하는 경우이다. 설교자의 의도에 의해 혹은 설교의 진행에 맞추어 찬송 전체를 부를 수도 있고 특정한 節만을 부를 수도 있다.
b. 설교자 혹은 회중 가운데 한사람을 지정하여(미리 약속된 인물을 의미) 독창하게 하는 방식이다. 또는 교회에 다양한 중창단이 조직되어 있는 경우에는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시키는 것도 바람직하다.
c. 찬송의 일정한 부분을 낭독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설교자가 맡을 수도 있고 회중이 참여할 수도 있다. 만일 다같이 읽는 경우가 아니라면 피아노 오르간 혹은 기타 등 악기주자와 미리 약속하여 낭독에 음악을 깔아주는 것도
전달에 효과적이다.
d. 피아노나 오르간 혹은 첼로나 바이올린 등 교회 형편에 따라 가용한 악기를 동원, 연주자로 하여금 그 곡을 연주하게 하여 찬송이 가지는 감미로운 음률만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제 요소들을 적절히 설교에 배치함으로 설교 진행의 다양성이 가능하게 되며 정적인 전달의 효과를 높일 수 있게 된다.
3. 찬송설교의 실제
제목: 그대 평생의 길!
본문: 찬송가 470장
관찰력이 있는 분들은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뭐 하나가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으레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자리잡는 성경봉독이 빠졌는데 그것은 결코 사회를 보는 분의 실수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찬송설교(Liedpredigt)라 불리우는 전혀 새로운 설교의 한 장르를 소개하려고 합니다.아니 그런 설교도 있느냐? -. 물론입니다.
찬송설교는 우리에게 무척 낯선 방식입니다마는 그러나 이미 르네상스시대에 생겨나서 오랜동안 서구 교회에서 사랑받아온 설교방식입니다. 찬송설교에서는 성경대신 특정한 한장의 찬송을 설교의 본문으로 잡습니다. 설교의 역사를 보면 본문이 없는 설교가 자리잡았던 시대도 있었으니까요.
찬송이라는 것은 한 신앙인이 말씀을 중심으로 살면서 그의 신앙고백을 가사와 음조에 실어 내놓은 것이거든요. 그래서 성경 말씀이 한 인격을 통과해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 삶에 가깝고 감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하는 설교의 본문은 찬송가 470장입니다. 우리 다같이 470장을 찬송하시겠는데 1절은 다같이 2절은 여성 3절은 남성 그리고 4절은 다같이 - 그런 방식으로 부르겠는데 자기 파트를 찾아서 부르실 수 있는 분은 그리 해주시길 바랍니다.
(찬송가 470장을 온 성도가 합창)
어떻습니까? 가사의 내용도 평화스럽지만 멜로디 자체도 마치 석양이 뉘엿 뉘엿 넘어가는 황혼에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위에 배 한척이 한가롭게 떠있는 듯한 평화를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아마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하나같이 바라는 삶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그런 그림이겠지요. 그걸 한마디 단어로 표현하라고 하면 '평안'(2번) - 평안일 겁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사람이 언제 노래가 절로 나오느냐 하면 마음이 평안할 때입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하는 사람을 보면 영락없이 별걱정 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그때도 노래합니다. 주로 기쁨 평안 행복... 노래는 주로 그런 단어들하고 연결되어있기 마련입니다. '아니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사람 죽은 것을 애도하는 조가라는 것도 있질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초상집에서도 음악은 울려나오니까요. 그러나 조가가 어디 노래입니까? 애인한테 발로 채여 술에 절어 부르는 게 어떻게 노래겠어요?그거야말로 비탄이요 한탄이요 푸념이요 절규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노래가 아닙니다. 요즘 가정들을 보세요. 기껏 해야 너 댓명 정도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열 댓명이 모여 살던 그 시절 보다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나요? 몇 명되지도 않는 가정인데 서로 제멋대로 입니다. 부부지간에 서로 사랑이 남아있질 않습니다. 부자지간에 서로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부부 싸움 하고 남편 밥도 안차려 주고 예배에 간 아내가 있다 칩시다. 가서 열심히 찬송은 부르겠지요. 그러나 그 찬송이 진정 찬송이겠어요? 적어도 그런 노래와 찬송은 전혀 연결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노래와 찬송이 죽어있는 집이 어디 한 두 군데이겠습니까? 여러분들 사시는 집도 장담할 수 없잖아요? 가정의 달이라는 오월에도 쌈질하는 부부들은 여전히 쌈질하고 있고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망가져 내팽개친 시계처럼 그렇게 널려 있는지요.
가정은 그렇다 치고 그럼 우리 사는 사회는 살 맛 나는 사회냐? - 제가 언젠가 "18초마다 당신은 위험하다"라는 신문기사 말씀을 드렸지요? 우리 나라에서 살인 사건은 9시간 5분마다 한 건이 발생하고 강도사건은 2시간 23분마다 한 건 강간사건은 1시간 28분마다 한 건, 절도 사건은 5분 49초마다 폭력사건은 2분 19초마다 한 건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18초마다 이 나라 어디에선가는 살인이든 강간이든 절도든 폭력이든 그 어떤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이거든요. 한해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는 인원이 우리 나라에서만 연 60만명을 넘어 전주시 인구가 일년마다 교통사고로 죽거나 장애자가 된다 그 말입니다. 제가 취재기자처럼 사건 사고의 현장만을 말했지만 어떻게 고통이 이런 종류만 있겠어요? 꿈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 배신당하는 고통, 인간관계가 어긋난 쓰라림... 일일이 열거하자면 하루가 모자랄 것입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이게 우리 사는 현장이에요. 제가 너무 비관적인 말만 했나요? 아니에요. 어린 아이들이 처음 유치원 갈 때 '차조심해라' 그 말을 들으며 인생을 시작해서 나이 60이 되어 집을 나설때에도 '차조심 하세요' -
그 이야기를 듣고 사는게 인생입니다. 평안이 없어요. 다들 긴장과 남모르는 어떤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표정이 굳어지고 말이 거칠어지고 태도가 냉냉해지는 것을 별 이상하게 생각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우면 신음하고 뜻대로 안되면 불평하는 것을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질 않습니다. 고통이 오면 절규하고 고난이 오면 불평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사는 모습입니다. 집안이면 집안 사회면 사회 직장이면 직장... 전부가 평안이니 행복이니 하는 단어와는 거리가 멉니다. 당연히 찬송이니 노래니 하는 단어들하고도 담을 쌓게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우리 현실을 바라보다가 오늘 찬송을 대하면 참 맞지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인가 별세계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자, 이 시간 우리 다시 한번 아름다운 첼로의 선율로 이 찬송을 들어봅시다.
(첼로로 1절만 연주)
어떻든 가요? 험악한 이 세상과 맞지 않지요? 아마 어떤 분은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찬송을 지은 사람은 정말 인생의 행복을 맛보며 살았던 사람일거야. 틀림없이 누구에게나 자랑할 수 있는 그 어떤 행복한 상황가운데 있었던 사람일 거야" -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롭기 그지없게 보이는 이 찬송, 평화로움이 감도는 이 찬송의 밑바닥에는 그러나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슬픈 사연이 숨기워 있습니다.
이 찬송의 가사를 작시한 사람은 게이츠 스패포드라는 교수입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스패포드 교수는 시카고에 있는 무디 교회의 회계집사요 주일학교교사였습니다. 그런데 1873년 일어난 시카고 대화재로 인해 무디교회가 전소되어 버렸고 당시 사업을 하던 스패포드의 사업역시 파산의 기로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니 재정집사로서 불타버린 교회를 재건하랴 불황에 빠진 사업 정리를 하랴 심신이 몹시 지친 상태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부인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더욱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마침 주치의가 부인의 건강을 위해 여행을 하는 게 좋겠다는 권고도 있고 해서 네 아이와 함께 부인을 여행길로 떠나보냈습니다. 스패포드를 뺀 온 가족이 '비르두 아베르'라는 초호화 여객선을 타고 1873년 11월 15일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1주일을 잘 순행하던 이 여객선이 11월 22일 새벽 2시 영국의 '록키안호'와 정면충돌을 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타이타닉 영화의 비극적 장면처럼 그 여객선은 채 30분도 되지 않아 226명의 목숨을 실은 채 대서양밑바닥으로 가라 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아비규환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도 나도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그 지옥 같은 현장에서 신실한 신앙의 소유자였던 스패
포드 부인은 물속으로 사라져 가는 아이들의 옷소매를 잡고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랑하는 네 아이들의 생명을 건져주세요".
그러나 그 기도도 헛되이 아이들은 하나둘 차디찬 대서양 물 속으로 사라져갔고 스패포드 부인만 기절한 채 록키호의 구조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패포드의 심정이 어떠했겠어요?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이런 재앙이 연이어 들이닥칠 수 있단 말인가?'
참담한 심정으로 영국으로 간 스패포드는 부인을 데리고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대서양 복판을 지나는데 선장이 이 부부에게 찾아와 이런 말을 합니다. "스패포드씨, 지금 우리는 당신의 아이들이 잠들어 있는 바로 그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참고 참았던 슬픔과 웬지 모를 분노가 가슴밑바닥으로부터 솟구쳐 올랐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홀로 선실로 돌아온 스패포드는 그 터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밤새 몸부림을 칩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안겨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 당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원망과 애원 좌절과 분노로 밤새 몸부림칩니다.
얼마나 됐을까- 선창너머 먼동이 터오를 무렵 이상하게도 스패포드의 가슴에 일던 분노의 격랑이 가라앉으면서 들릴 듯 말듯한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영혼이 평안하다"(2번) 여러분! 한없이 평화롭게만 보이는 이 찬송이 이런 애끓는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피아노 반주시작) 이 찬양 1절의 원가사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정해진 낭독자 낭독) "평화가 강같이 내 길을 따를 때나 슬픔이 파도처럼 굽이 칠 때, 내 운명이 무엇이든지간에 주께서 "평안하다 내 영혼이 평안하다"라고 가르쳐 주시네 -"
참 대단하지요? 스파포드 가정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보게되는 불화라든지 반목이라는 것은 복에 겨운것들에 불과합니다. 불행 불행해도 스패포드의 불행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이런 경우 스패포드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나간다 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평안하다. 평안하다"라니요. 믿음이 없는 상식으로 보면 이건 둘중의 하나입니다. 충격으로 정신이 돌았든지 아니면 아주 지독한 독설을 그런 역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이든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신앙의 도리를 배울때에 불행이면 불평하라, 행복하면 웃어라 - 그리 배우셨던가요?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위대한 말씀이 여러분이 갖고있는 성경에는 빠져버렸습니까? -
예수 믿는 이유가 언제나 인생이 순탄하기만을 바라는 부적심리 때문은 아니던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종교를 택해도 정말 잘못 택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와 함께 가는 길은 편편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골고다로 이르는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평안하다"(2번) 자식들 다 죽고 난 뒤 스패포드가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정신이 돌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 상식의 선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술입니다. 신앙으로 들어와야 신앙의 깊이를 체험한 자들만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비밀암호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한 음성으로 2-3절의 가사를 함께 읽어 보실까요?: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내 지은 죄 주홍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서 다 씻으사 힌 눈보다 더 정하겠네"
믿음이 무어냐 하면 불 신앙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영적인 전쟁을 보게 합니다.
우는 사자 같이 광명한 천사같이 간교한 뱀처럼 사탄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까지 파괴하는 자가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음을 믿음은 우리로 보게 합니다. 목욕하면 깨끗하다! 이런 상식 속에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서 얼마나 지독한 죄의 냄새가 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마는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은 일년 365일 목욕탕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서도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치고 살게 되어있습니다.
이 땅의 지혜 있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어려움이 올 때 그들이 하는 일들을 보십시오! 그 똑똑한 사람들이 운수와 재수 일진을 믿을 지언정 사탄은 믿지 않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치욕입니다. 오히려 고난의 순간이 오면 다른데서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더 많이 모으고 더 많이 갖고,... 사는 것은 전쟁이려니... 이기는 게 승리임을 신앙처럼 믿으며 눈에 불을 켜고 삽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절대 양보하면 안된다. 옆사람을 타고 누르더라도 어떻하든 이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 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쌓아놓고는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이리 말합 니다. "이리 살아야 평안한 거야!"(2번) -
물론 그것들이 가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결핍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진정한 평안일까요? 싸워서 쟁취하는 풍요가 진정한 행복일까요? 그렇다면 스스로 모든 것을 내놓고 당하지 않아도 될 고난을 자초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일까요? 악을 밥먹듯 행하는 사람이 아무런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 해서 그것
을 진정한 평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하나님이 포기하고 악한 사탄이 장담한 평안입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그 누군가가 내 무덤엘 와서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꽃 한송이 바치도록 삶을 사는 것도 매우 가치 있는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 영혼의 마지막 안식처가 하나님 없는 곳이라면 그 평안 역시 진정한 평안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 거룩한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땅의 그 어느 누구도 이 땅의 그 무엇도 우리에게 영생으로 인도하는 평안을 보장할 수는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영원한 평안으로 인도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그날, 그분 앞에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어야 그것이 진정한 평안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역경 속에서도 이 진리 위에 서있던 스패포드는 그래서 '내 영혼이 평안하다'(2번)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한다면 여러분 들 역시 스패포드가 했던 고백을 당연히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피아노 반주 및 낭송)
'내 죄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제는 더 이상 담당할게 없다는 것, 아, 내 영혼아 주를 찬양하고 찬양하라 주여 내 믿음을 보게 될 날을 서두르소서 두루마리처럼 구름을 접으시고 나팔소리 울려 퍼질 때 주께서 강림하시리니 그렇다해도 내 영혼은 평안합니다 -
우리 마음을 모아 3-4절을 함께 찬송하겠습니다: (함께 찬송)
2장 현대적 찬송설교
1. 현대적 찬송설교의 개념적 이해
찬송설교에 '현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변화된 세계상을 반영한다는데 그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 이미 서구 교회에서 사용되던 17-19세기에 만들어진 찬송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우리 찬송가는 시기적으로 볼 때 이미 지나간 과거의 곡이며 만일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면 골동품으로 취급받을 수 있을 만큼 시대적 감각에서도 맞지 않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미 서구 교회에서는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찬송가를 구시대적 유물(?)로 간주하여 현실과 괴리된 지루한 설교, 교회의 대 사회 적응성의 실패 등과 함께 교회를 떠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잡고 있은 지 오래이다. 이런 약점을 극복
하기 위해 기존 찬송가 외에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새로운 찬송 및 복음성가만을 새롭게 엮은 부록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게 서구 교회의 실정이다. 우리의 경우도 교회의 내일을 이끌고 가야하는 청년층 및 청소년층에서는 기존 찬송가보다는 CCM(Contempolary Christian Music)계열의 복음성가를 즐겨 부른다. 소위 권위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는 찬송가의 고수가 과연 이들이 주역이 되었을 때에도 오늘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찬송은 시대상을 반영해야 하고 다양한 주제를 내포함으로 그 활용의 폭을 넓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찬송은 이런 제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에 의해 작사작곡 된 곡이 다수를 차지함으로 문화와 정서가 전혀 다른 외국인의 삶에서 만들어진 경험과 신앙고백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이 신앙 체험을 글로 옮긴 후 그것의 빠른 전파를 위해 당시 유행하던 일반 곡들에 가사를 붙인 콘트라 팍타(Contrafacta) 형식의 찬송이 여전히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깊이 생각해볼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현대적 찬송 설교라는 것은 시대성뿐 아니라 형식성을 문제 삼는다. 고전적인 찬송 설교가 찬송가 한 장을 설교 본문으로 잡는다면 현대적 찬송 설교는 성경으로부터 본문을 잡는다. 성경으로부터 메시지를 추출한 다음 그것을 디자인 하는 과정에서 설교의 진행에 맞추어 찬송을 정한다. 물론 이 경우 오늘날 유행하는 CCM곡만을 설정 범위로 국한시킬 필요는 전혀 없으며 상황에 따라 기존 찬송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설교자가 주의해야 할 것은 본문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추출하는가 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디자인하여 적절한 곡을 삽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성경도 약화되고 다양한 곡을 사용하기 때문에 찬송도 약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설교자의 각별한 주의가 요청된다.
2. 현대적 찬송 설교의 작성
현대적 찬송 설교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계 및 주의가 요청된다.
첫째 현대적 찬송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 본문을 정해야 한다. 어떤 본문이 좋은가 하는 질문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사건을 담고 있는 서사 본문은 설교 과정에서 그 이야기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으며 경구나 교훈 위주로 되어 있는 본문은 설교자가 추출한 메시지를 중심으로 보다 자유롭게 설교를 디자인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중요한 것은 일반 설교와 마찬가지로 이 설교방식에서도 반드시 분명한 메
시지를 본문으로부터 추출해 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찬송이나 복음 성가의 사용은 철저하게 설교의 내용 진행에 종속되어야 한다. 가사내용이 설교 진행 시 강조하려는 포인트와 유리되거나 괴리가 생긴다면 설교는 자칫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셋째 합창이나 중창, 독창, 노래 말 낭독, 악기에 의한 연주 등 고전적 찬송설교 시 찬송을 설교에 조화시키는 방법은 현대적 찬송 설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넷째 현대적 찬송 설교에서는 한 설교에 대략 5-6편의 노래가 사용되기 때문에 설교 내용과 노래 가사의 조화뿐 아니라 노래의 보편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즉 회중이 전혀 모르는 노래라면 곤란하며 듣기는 들었는데 따라 부를 수 없는 곡이어도 안 된다. 그렇다고 일반 예배에서 복음성가 일변도로 곡을 배정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3. 현대적 찬송 설교의 실제
예배의 주제: 희망 그리고 비젼!
예배의 대상: 청소년
입안자: 김 호진(청소년 설교론 수강자)
(예배시간 15분전 사회자가 침묵기도를 하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이야기를 한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전부터 예비하시고 인도하신 은혜의 보좌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범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가 감히 주의 임재 앞에 와 있습니다.
(사회자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작은 목소리로 찬양의 고백을 드린다. 사회자가 한번 부른 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반주에 맞추어, 회중들도 자연스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몇 번 반복한다.)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네....♬
그렇습니다! 아무 공로와 노력이 없이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 시간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이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
혜라고 고백하시는 분들은 조용히 가슴에 두 손을 올린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감사의 고백을 우리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화요모임 테잎 중 "은혜로만 들어가네" 솔로 부분이 흘러나온다.)
♬은혜로만 들어가네 은혜로만 선다네
우리의 노력이 아닌 어린양의 보혈로
그분의 임재 가운데 오라 하시네
우리를 부르신 그 곳 은혜로 들어가네 그분의 그 은혜♬
(1절이 끝나갈 즈음에 테잎이 점점 작아지며 사회자가 마무리 기도를 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영원히 사망의 저주 아래 빠진 저희들을 건져주시고, 주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전에 빠졌던 죄와 사망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죄악의 저주를 끊고 완전한 자유를 주신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저희를 의롭다고 칭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있는 곳은 존귀한 주의 보혈 아래임을 기억하며 살게 하옵소서. 이 중에 여전히 우리가 죄의 속박아래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죄를 반복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히시사 눈을 들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는 죄악과 짝할 수 없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감사를 드리오며 죄악에서 날 살리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드럼과 베이스, 신디 등 모든 악기가 침체되었던 분위기를 기쁨과 환희의 분위기로 바꾼다. 반주에 맞추어 모두 자유롭게 찬양하게 한다.)
♬유월절 어린 약의 피로 나의 삶의 문이 열렸네
저 어둠의 권세는 힘이 없네
나는 주 보혈 아래 있네 그 피로 내 사했네
원수가 날 정죄 할 때에도 나는 의롭게 설 수 있네
난 더 이상 정죄함 없네 나는 주 보혈 아래 있네...♬
죄악의 저주를 끊고 완전한 자유를 주신 우리 주님 앞에 입술의 고백을 드리며 예배로 나아갑시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다같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한다.)
(신앙고백을 마침과 동시에 스크린에 박종호의 "에베소서2:8" 자막이 뜬다. 다같이 반주에 맞추어 찬양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곧이어 스크린에 성경 본문이 자막으로 뜬다. 성경본문은 로마서 5장 6절부터 10절 말씀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주제 : hope!
(회중들이 본문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읽고 뜻을 생각하는 동안 송정미의 "하나님의 사랑"이란 곡이 흘러 나온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아무 능력도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피조물이나
그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우리가 아직 죄 인되었을 때 우릴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 지극한 사랑
그 어느 것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우릴 끊을 수 없네
환난 핍박 곤고 닥쳐와도 루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네♬
(노래가 점점 작아지며 설교자가 앞으로 나온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십니다! (회중들이 참된 확신으로 아멘할때까지 반복한다.)
과거의 어떠한 죄와 허물도 더 이상 우리를 아프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법이 아니라 생명의 법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힘있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공의와 정죄, 그리고 그의 거룩한 율법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고...
우리는 전적으로 영적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기 구원에 관한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의로워진 다음에 그 의를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
신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 우리가 원수되었을때에..."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들을 주신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F. M. Lehman은 이런 찬송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늘이 양피지로 펼쳐있고,
세상이 모든 갈대와 나뭇가지, 칼이 펜이며
대양을 모두 잉크로 채우고
모든 사람들이 능숙한 서기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크신 영광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다 적을 수 없으리라
지극히 높으신 그분은 옛적에 홀로 땅과 하늘을 만드셨도다'♬
이 찬송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04장입니다.
(신디사이저 반주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며, 설교자는 오른손을 들고 3절을 부른다. 찬양단들 그리고 회중들 따라서 부른다.)
♬하늘을 두루 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아멘... 너무나 귀한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고, 또한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 그러한 사랑으로 인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들에 대해 바울은 1-5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얻는 유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화평과 즐거움과 소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6-11절에서 이러한 삶이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구요.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은 자인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소망 중에 주를 찬양하며 성령의 능력으로 담대히 살게 된 자는 오직 그의 은혜를 맛보고 그 은혜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뿐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지은 죄로 인하여 늘 우울하게 죄의 멍에를 메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지고 걸어가신 그 죄를 가지고 죄책감에서 살아간다면 주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굳게 잡고 승리하며 살아갑시다.
이 시간 3주 전에 우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신 김미정 자매님의 찬양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진실한 고백을 찬양으로 드릴 때, 우리 모두 함께 한 마음으로 드리는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하정의 나의 나된 것은 MR 반주로 자매님이 독창을 한다.)
♬만일 나의 생애 주님이 없었다면 지금 내 모습이 이대로 남아 있을까
끝없이 솟아나는 슬픔과 뜻 모를 외로움으로 내 영혼 어둠 속을 헤매고 있진 않을까
나는 아무 공로 없으나 주님은 나를 부르시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주시고...
나의 나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 나의 공로로 되어진 것이 전혀 없어라
이젠 나의 생명 나의 연혼 나의 모든 것 주님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 손뼉으로 영광돌립니다.
(회중 모두 "아멘"하며 박수를 친다.)
복음가수 김수지의 새 앨범 중에 설문이란 앨범이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널 위해 준비된 히나님의 크신 사랑...
너의 가는 길 주의 사랑 가득하기를 축복해♬
그 선물이 바로 우리에게 삶의 참된 의미와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온 세상 만물 다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이 감격 영원히 간직하며 주님 오시는 날까지 승리하며, 순결한 주의 신부로써 세상과 짝하지 아니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사회자 다시 나온다.)
할렐루야! 이렇게 좋은날 한 형제 자매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새로운 지체님들을 환영하겠습니다.
("이렇게 좋은날" 반주와 함께 자연스럽게 서로 인사를 나누며 자역스러운 찬양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좋은날 아름다운 우리의 만남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가득한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만남을 기뻐해요♬
우리 다같이 일어나셔서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찬양드리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녀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 주신다...♬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친다. 그리고, 부흥 테잎의 "파송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모두들 인사를 하며 교제와 받은 은혜를 나눈다.)
♬너의 가는 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가시리...♬
3장 역할설교
1. 역할설교의 개념적 이해
역할설교란 설교의 진행에 구체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 설교의 전달효과를 높이려는 설교방식이다. 원래 심리학자나 정신병리학자들이 역할연기라는 것을 이용해서 환자들의 치료에 사용하기도 하지만 설교에서의 의미는 이것과는 좀 다르다. 일반적으로 설교가 지식을 전하기 보다는 진리를 경험적 맥락에 접맥시킬 때 회중들의 수용력은 훨씬 배가되기 마련이다. 전통적으로 설교는 설교자 한 사람에 의한 구연으로 진행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왔다. 물론 이런 전통적 설교방식은 설교자 한사람의 -설교가 준비되고 훈련되어야 한다는 연설적 차원에서 볼 때 - 역량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설교가 시작에서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 내용의 설득력과 내용의 변이요인(본문다시 읽기, 본문같이 읽기, 경험적 진술, 논쟁점 도출, 예화등)외에 형식상의 변화를 기하기는 쉽지않은게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훈련되고 준비된 설교자라 하더라도 매번 설교를 성공적으로 이끈다는 것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전달의 다양성을 기하고 효과를 배가할 수 있는 방식가운데 하나가 역할 설교이다. 이 설교방식은 설교의 내용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관련된 내용을 설교자대신 실제인물을 등장시켜 그 부분을 담당하게 함으로 경험의 사실성을 높이고, 설교형식의 변화를 통해 회중의 집중력을 높이려는 방식이다. 따라서 역할 설교에서는 단순히 교리나 지식을 전달하는 대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경험 그들의 신앙적 실존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부각시킴으로 회중들과의 동질성을 추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수용의 필터를 확장시킬 수 있다. 결국 역할 설교란 진리를 경험적 차원으로 끌어내리되 이미 한 인격안에서 시도되고 경험된 그 진리를 회중에게 전달함으로 회중접합성을 배가시키려는 목표를 그 안에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역할설교의 작성
역할설교는 일반적인 목회설교에 포함되면서도 그 성격상 특정한 절기에 어울리는 설교방식이다. 이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설교내용속에 보조 설교자를 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보조 설교자란 설교중에서 다루어지는 어떤 인물의 역할을 입체적으로 대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광의적으로는 설교의 어떤 부분에 대한 대리 낭독등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역할 설교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구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할 수 있는 본문을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물론 현대인들의 견해를 대변한다든지 아니면 설교의 진행을 위해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할 수도 있지만 원론적으로는 인물들의 갈등이나 번민 문제등을 통한 주제의 진행이라는 맥락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성경 본문을 설정하는 것이 좋다.
둘째 역할을 맡은 보조 설교자는 가급적 3인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설교는 설교자가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너무 많은 보조 설교자가 등장하게 되면 설교자에 의한 주제의 심화가 심각한 지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원칙은 준수되는 것이 바람직 하다.
셋째 보조 설교자들에게 주어지는 내용은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양할 수 있는데 대체로 독백 형식 혹은 회중에 대한 호소나 변명 아니면 설교자를 향한 항변과 회중에 대한 호소등을 섞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분량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 하며 만일 내용의 전개 그리고 보조 설교자의 재능등이 잘 조화될 경우 내용전개에 맞는 찬양을 보조 설교자가 함께 담당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네째 설교자는 원고를 미리 보조 설교자에게 주어 내용을 숙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암기하여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 하지만 여건이 허락지 않을 경우에는 내용을 읽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다섯째 보조 설교자는 강단 아래 의자를 배열하여 설교시작부터 끝날 때 까지 그 자리를 고수하면서 자기 차례가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또는 성가대나 회중 석에 자유롭게 자리하고 있다가 자기 차례에 자리에서 일어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마이크로 폰의 이용에 적지않은 애로가 있을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역할설교는 일반적인 목회설교에 포함되면서도 그 성격상 특정한 절기에 어
울리는 설교방식이다. 이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설교내용속에 다양한 인물의 설정이 핵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 그인물은 일차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일 수도 있지만 설교자가 설교내용에 따라 임의로 설정한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킬 수도 있다.
3. 역할설교의 실제(1)
제목: 고난의 역설
본문: 막 11: 6-10
얼마전 아주 우연히 길거리에서 중학교 동창 하나를 만났습니다. 무려 25년만의 만남이고 보니 얼마나 기쁘던지요. 서로 근황을 묻고나서 그 친구가 대뜸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야, 자네 아직도 삭지않은 것 보니 젊은 물이 좋긴 좋구나" - 정말 그렇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젊은 학생들과 같이 호흡하다보니 몸도 젊은이가 되어가는 것 같고 마음도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생활하면서 여러분들만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젊음, 희망, 봄날, 미래 비젼... 뭐 그런 단어들입니다. 색으로 나타내면 푸른 색이고 공기로 따지면 이른 아침의 그 무공해의 상큼한 산소입니다. 도무지 어떤 회색빛 암울함이란 여러분과 도무지 어울리질 않습니다.
이걸 한마디 단어로 다시 요약하면 행복이라 할 것입니다. 행복! 그래요. 참 좋은 단어이고 모두가 바라는 단어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바라는 단어가 바로 행복 아니겠어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상태! 하고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상태 -
저 역시도 여러분 시절에 그런 행복을 꿈꾸었드랬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기를 바랬고 동시에 남자다움의 영원한 표상인 군인이고 싶었습니다. 이 두가지를 한꺼번에 충족시키는 것이 없겠나 하고 찾아보았더니 한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군목이 그것이죠. 군목시험에 합격하고 군대교회목사로서 전방부대에서 생활하는데 까지는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1989년 12월 9일 정말 꿈에도 생각지않은 사건이 저를 방문했습니다. 부대 관사에서 잠을 자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던 것입니다. 국군수도통합 병원까지 긴급 후송되었지만 군의관 마저 이미 늦었다는 진단을 내릴 만큼 가망이 없는 상태였습니다마는 아직 제가 갈 처소가 하늘나라에 준비가 덜 되엇던지 기적적으로 3일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마음을 다잡고 하나님을 위해 제대로 된 헌신을 다짐하게 된 것도 그 사건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 은혜인데... 그런데 그런 감사함과는 별개로 그 사건 때문에 저는 오랜 시간을 원치 않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장례치를 준비를 하라는 군의관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아내가 유산을 하였습니다. 퇴원을 하긴 했습니다마는 도무지 자율 신경이 말을 듣지 않는 겁니다. 설교를 하긴 해야겠는데 A4 한 페이지 분량의 설교를 무려 30분 이상 더듬거리며 해야 했습니다.
관사에서 직선 거리로 500m도 채 안되는 부대 회의실까지 가는데 무려 30분 이상이 걸리는가하면 가다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방료를 해서 가던 길을 되돌아 옷을 갈아입기를 여러차례 반복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저에게는 기적적으로 살았다는 감사는커녕, 군복을 쳐다보는 것조차 싫어질만큼 참기 힘든 시련의 시절이이었습니다.
역할 1) 듣고 보니까 목사님이 당하신 어려움도 적은 것은 아니었군요. 하지만 저에 비하면 목사님의 어려움이란 건 새발의 피입니다. 두 번 다시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지만 말이 나왔으니까 얘기를 하죠. 저요, 이래봬도 꽤잘나가던 사람입니다. 재산이면 재산, 가정이면 가정 학벌이면 학벌 아이큐면 아이큐- 뭐하나 빠지지않는 사람이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망할라니까 한 순간이더라구요.
그날도 사업 때문에 누굴좀 만나려고 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기사에게 운전을 맡기고 어제저녁 바이어 대접하느라 과음한 탓인지 머리가 아파서 눈을 감고 뒷자석에 앉아잇었는데 느닷없이 엄청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대형 덤프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 저희 차를 받아버린 거죠. 아, 와서 받는데야 어떻합니까? 운전기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차는 뺑소니치고 꼬박 3년을 병상에서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가장이 그꼴이 되다보니 사업이며 가정이며 무엇하나 남아있는 것이 없더라구요. 완전 풍비박산이 나버렸습니다. 사업은 남의 손에 넘어가 버리고 병원비 대느라 있던 집마저 날려버리고 집사람은 팔자에도 없는 파출부 생활을 하고 한참 에민한 사춘기를 지나던 아이들은 비툴어 나가고.... 그래도 목사님은 결과라도 괜찮지요 나는 이게 뭡니까? 이몸으로 할 수 있는게 도대체 아무 것도 없다 이겁니다.
여러분 잘 들으셨지요? 이분 말씀대로 차가와서 박는데에야 어떻게 하겠어요? 언젠가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일분에 한번꼴로 사고가
난다는 겁니다. 절도 강간 강도 차사고 폭력... 이것 저것 평균을 내보니까 일분에 한건씩 사고가 난다는 거에요. 불행이란 본디 눈이 멀어서 여기저기 가리지않고 방문하게 되어있습니다. 누구하나 환영하는 사람 없는데 그리도 용하게 찾아다닙니다.
이렇게 원치않는데 찾아오는 불행과 고통은 수동적인 고난입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잃은 여인네에게 부처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네가 다니면서 단 한번도 울음소리가 나지않은 집을 골라 이 바가지에 쌀을 가득 얻어오면 네 아들을 살려주겠다 - 아들 살려준다는 말에 하루종일 헤메고 다녔지만 단 한 알의 쌀도 구할 수가 없더라는 거지요.
이게 세상입니다. 이 땅에 원치않는 고통이 많은지 적극적으로 행복을 쟁취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발 이런 고통만 당하지않고 사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소리를 할 정도도입니다. 그러니 만일 누구라도 부러워할 행복의 조건을 다 갖고 있다면 얼마나 세상 살맛나는 일이겠습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데 모든 사람들이 생명처럼 아끼는 겉옷을 벗어서 길위에 깔고 호산나를 외치면서 환호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가득메운 사람들이 전부 쏟아져 나와 환호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겉옷을 벗어들고 환호하는 사람, 양손을 번쩍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 -
'이제 로마의 압제는 끝났다. 모든 불행은 끝났다. 이제부터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행복뿐이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이고 보면 충분히 흥분할만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들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흥분할 만한 일입니다.
역할 2)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다른 사람들도기뻤겠지만 정말 마음이 설렝던 것은 저희들,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아, 정말 황홀했습니다. 그건 마치 온 세상이 곧 내 것인 것 같았다니까요. 사실 삼년을 따라다니면서 찬이슬 마실때마다, 끼니를 굶을때마다 속으로 욕도 많이하고 투덜거린 것도 한두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 요한은 확신했었습니다. '아냐, 이 양반 예수를 보니까 분명이 뭔가 있어, 조금 고생되더라도 참고 견디면 분명 좋은 날이 올거야. 암 그렇고 말구 그날을 생각하면 이깟 고생이야 못견딜라구... 여러분도 명심하십시오. 미래가 분명하다? 그러면 오늘의 고통은 참으십시오. 암요 참아야 하구 말구요. 참고 견디는 자에게 행복이 온다니까요 -
요한이 참 좋은 말을 했습니다. 사람중에는 내일의 영광과 성공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밤을 새워 공부하는 학생, 밤늦도록 연구하는 연구원... 전부 내일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해서 견디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이런 부류에 해당될 겁니다. 당연하지요. 잠깐 어렵다고 쉬운 것만 찾다보면 딸 수 있는 열매는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요즘의 우리 나라가 왜 위기이겠어요? 고통없이 땀흘림 없이 열매만 가득 거둘려는 심보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것 아니겠어요?
복권이니 마권이니 증권이니... 이게 전부 적은 돈가지고 요행을 바라고 일확천금을 바라는 건데 전국이 이런 열풍으로 가득차 있으니 이게 나라의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미래의 영광을 위해 오늘의 고난을 참는 것, 그것은 역사가 보장하는 진리입니다. 그런 고난이라면 그런 고통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고생한 보람이 이 땅에서 나에게 영광으로 돌아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까지만 해도 우리 인간이 사람 도리를 다하는 것 같은데,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또 하나의 고난이 있습니다. 속 없는 사람들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예수님을 보고도 고진감래려니 영광의 대왕즉위식리려니 하고 그저 열광하기만 했습니다마는 만일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관찰력이 있다면 그 모습처럼 우스운 장면이 어디있겠어요? 다큰 33살의 청년이 이제 멍에를 한번도 지어보지않은 어린 나귀새끼위에 앉아 기우뚱거리며 들어온다? 힘에 부친 나귀가 하얀 콧김을 연방 내뿜으며 헐떡거리는데 메시야가 기다리던 왕이 그 연약한 힘에 부친나귀위에 엉거주춤 앉아있다? 이게 어떻게 왕입니까? 왕이라면 늠름한 백마를 타고휘황찬란한 자색옷을 입고 긴 보검을 차고 만조백관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와야지요.
역할 3) 나 참, 빈깡통이 요란하다더니 며칠전부터 시내에 메시야가 온다는 소문이 쫙 퍼졌드랬어요. 뭐 나사렛 출신 예수가 온다나? 나같이 술팔아 먹고 사는 년이야 메시야가 뭔지 별관심 없었지만 술마시러 오는 손님들마다 온통 에수 이야기뿐이더라구요. 자꾸 그러니까 나도 궁금해지대요. 그래서 길거리로 나가보았지요. 나참, 세상에- 그런 엉터리가 또 있을라구. 그 큰 등치의 어른이 연약한 나귀새끼위에 앉아 기우뚱거리는 꼴이라니... 그걸 보고 왕이라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그게 어디 제정신이겠어요?... 허기사 그 오랜 세월 남의 나라 종살이하느라고 지치다보면 약간씩 머리가 돌때도 됐지 암, 다 돌았어!"
그렇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의 모습, 그리고 그것을 보고 호산나를 외쳐대며 열광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엄밀히 말하면 삼류코메디의 한 장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이 코메디같은 장면안에 고난의 역설이 숨겨 있습니다. 그것은 피하려는데 억지로 와서 안겨버리는 수동적 고난도 아닙니다. 나의 영광된 미래를 위해 오늘의 고난을 마다하지않는 소극적 고난도 아닙니다. 그것은 - 이름하여 남을 위해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는 적극적인 고난입니다. 적극적 고난, 남을 위해 스스로 자원해서 받는 고난!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작품입니다.
여러분 가만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에 싸움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는 원인은 하나같이 서로 잘났다고 이기는 것이 곧 승리라고 믿기 때문아니던가요? 모두가 왕이 되길 원하고 더많이 갖길 원하고 더 높아지길 원해서 나타나는 현상아니던가요? 강한 것이 최고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강한 군대를 갖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마는 그러나 무력이 해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팍스 로마나! 무력으로 이룬 로마의 평화가 얼마를 가던가요?
여러분 사방을 둘러보십시오. 잘났다고 으스대는 사람은 총맞아 죽고 칼로 쳐 죽이는게 인간 역사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낮추고 스스로 종이되겠다는 사람에게는 누구도 돌을 던지지않습니다. 스스로 지겠다는 사람을 향해 이기겠다고 달려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을 위해 내 땀을 아무 대가 없이 바치는 사람, 남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기를 마다하지않는 사람, 그 사람은 더 이상 질것이 없는 사람이고 이 말을 뒤짚으면 이 사람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온유와 겸손이 세상을 이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결론입니다.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잠간동안의 고난까지는 참아내는 인간들아,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예수를 통해 이미 보았지 않느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내 아들 예수의 모습말이다. 너희가 예수를 믿는다구? 또다시 고난주간을 맞았다구? 올해는 어떻게 할 건데? 예수의 뒤를 쫓는다면서 그런데 왜 방향이 다르지? 그쪽은 골고다가 아니라 헤롯의 궁전인데..."
그렇습니다. 생명을 이어주고 전달하는 진정한 고난은 나귀를 타고 들어오면서 왕되심을 선포하신 예수처럼 우리의 이성에 어울리지않는 어색함입니다.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고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면 하나님이 인정하지않는 똑똑함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손뼉치고 좋아하시는 어리석음의 길을 가는 것이
제대로된 코스가 아닐까요? 자기앞날의 영광을 위해 고난당하는 그 긴 행렬로 이미 이 땅은 발디딜 틈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행복을 바라는 청년들이여, 우리의 짤은 한 평생, 이 역설적인 고난의 길에 승부를 걸어보시지않으시겠습니까? 예수처럼 말입니다.
4. 역할 설교의 실제(2)
제목: 그러면 우리는...
본문: 골 3, 15-17 (추수감사주일 역할설교)
독일어 가운데 Rasismus라는게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인종차별이라는 뜻인데 피부색을 가지고 인간을 판단하는 겁니다.
요즘 우주에 정거장을 세운다, 수억광년 떨어진 별나라까지 인공위성을 띠운다 - 야단인 시대인데, 그리고 이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존재가 인간인데, 이런 소위 위대한 인간들에게, 이 단어는 사실 대단히 부끄러운 치부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국민이 많이 가는 호주에서도 최근들어 백호주의라는 백인우월주의가 극성을 부린다고 하는데 정말 인간의 두 얼굴을 보는 것 같아 입맛이 쓸쓸 합니다.
더구나 그리도 인권을 외쳐대는 서구에서 이 단어가 만들어지고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이렇게 피부색으로 인간을 판단하고 편갈라서 만들어낸 게 전쟁과 살인, 미움과 다툼말고 더 무엇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해가지고는 무엇하나 선한 것을 절대 기대할수 없고 이리해서도 안되는데, 그런데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서는 안될 사람가르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하려고 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피부색이라든지, 가진 재산이 얼마냐, 어느 지방 출신이냐, 조상이 어떠했느냐, 얼마나 배웠느냐... 그래서 다툼만 만들어 내는 편가르기를 하자는게 아닙니다.
오늘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인데, 사람이 동물과 다른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감사하는 존재라는 건데 그래서 인간하면 사실은 모두가 감사하는 존재 - 이리 생각되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사실인즉슨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피부색처럼 당장 눈에 띠지는 않지만 피부색보다 더 선명하게 가슴속에 느낌으로 다가오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몇번만 만나보면 금새 가슴으로 와닿습니다.
우선 이런 사람이 와 닿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는길 이었습니다. 열차안이 어찌나 만원인지 도대체 옴짝달싹할 수가 없어요. 제 앞에는 이제 갖 돌이 지났을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그저 온 몸이 땀ㅇ오로 목욕을 했어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막 칭얼칭얼 대는게 울음보를 터뜨리기 일보직전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시지만 짜증나는 만원열차안에서 아이마저 울어대기 시작하면 참 지루하지 않아요. 그래 얼른 갖고있던 신문으로 부채질을 해주었습니다.
웬 낯선 미남 아저씨가 바람을 몰고오니 울고자 했던 마음이 좀 바뀌었는지 울지를 않더군요. 그 덕분에 이제 역전이 되었습니다. 어린아이가 흘릴 땀을 제가 몽땅 흘리면서 수원까지 꼬박 부채질을 하고 왔습니다.
그러면- 무려 한 시간이나 그리 고생하며 부채질을 해주었으면 아저씨 고맙습니다' - 인사라도 있어야지요, 인사가 다 뭡니까? 열심히 부채질하느라 보지도 않았던 신문을 저달라고 빼았는겁니다.---
어린아이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어린아이같은 사람이 하도 많아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세상을 산다는게 뭔고하니 어린아이가 맞았던 그 신문지바람처럼 누군가가 부쳐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사는 겁니다.
누가 보아도 감사할 일인데 그게 상식인데 그 감사를 못하고 사는 겁니다.
역할 1)
아 목사님, 지금 제 이야기를 그리 돌려서 하시는 겁니까? 괜찮습니다. 그냥 대놓고 하세요. 물론 제가 예수라는 양반에게 문둥병을 고침받은게 어디 작은 일 입니까? 그런데 사실은 실수를 한 거라고요.
사실 목사님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당장 가서 내 모습을 보이고 싶은 사람이 어찌나 많이 눈앞에 어른거리든지...
그 일 때문에 바쁘다보니 기회를 놓친 거 뿐입니다. 그리고 꼭 나에게만 뭐라할거 없다구요. 나만 안간게 아니지않습니까? 열명 가운데 아홉이 안갔으니 어찌보면 다수결 사회에서 감사하러 간 녀석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지요.
또 사실 이런것도 있어요. 꼭 세치혀로 말해서 맛이 아니잖아요. 살다보면 이리저리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을 텐데 그래서 갚으면 되지 뭐 특별하게 그런 감정때문에 빚진 심정으로 살 필요는 없는거 아닙니까? -
언뜻 눈에 띠지는 않지만 이런 사람은 에수님 시대에도 있었고 오늘 우리
시대에도 있습니다. 발을 밟아 놓고도, 미안하다는 말이 뭡니까, 왜 네발을 거기두어서 나로 불편하게 하느냐는 투로 오히려 짜려봅니다. 앞서 들어가면서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고 있으면 그거 고마운일 아니에요? - 그냥 횡하니 가요, 마치 무슨 호텔보이가 손님위해 문열고 서있는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지요. 이런 얘기는 얘기를 꺼내기조차 부끄러운 차원입니다. 사실은 가장 상식적인 건데 그 상식을 지키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미안하다, 고맙다는 인사를 잊고 사는 사람들 말이지요.
그러니 발을 밟아놓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안하는 사람이 남의 가슴을 밟는다해서 미안함을 알리 없습니다. 미안함을 모르면 감사 역시 모르게 되어 있어요. 오늘 우리 사회가 각박해지고 살기어려워지는게 먹을게 없어서가 아니지요, 살기가 불편해서가 아니지요. 이러한 상식이 무너져 가기 때문입니다. 고마운것을 고맙다고 말하고 감사한 것을 가슴으로 느끼며 가슴으로 전달하는 그 상식말이지요. 이런 부류에서는 사람과 금수가 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움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것보다 좀 나은 모습도 나옵니다.
역할 2) 시편 136편 낭독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이던가요?
내가 고통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 이 정도되면 얼마나 행복한 성도입니까! 하나님이 내편이시다-
이것 이상의 축복은 없습니다. 하는 일마다, 계획하는 일마다, 매시간마다,
발길가는 곳마다 나혼자가 아니요, 하나님이 함게 동행하신다- 이것처럼 신나는 일이 어디있겠어요?
여러분이 기도하고 하나님게 매달리는게 사실은 이런 것들이지요./ 아주 중요한 겁니다. 예수 믿으면 집안이 일어나야지요. 복음이 들어가면 집안이 행복하게 변해야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해야 정상입니다.
대개 우리 성도들이 감사하는게 이런 승리에 대한 부분입니다. 뜻대로 되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감사할 내용을 두고 감사하는거, 이것을 두고 상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눈이 있기때문에 시편기자의 감사처럼 하늘을 지으시고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내 지나온 발자취가운데 하나님을 생각해 내고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게획의 풍성함을 생각하면서 미리 앞당겨 감사하는게 바로 우리 성도입니다. 멋진 신앙입니다.
믿지않는 사람들 보다 한차원 높은 감사를 여러분은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모두가 다 감사할 조건이 있어서 감사하는겁니다. 감사할만 하니까 감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어떻게 합니까? 감사가 다 뭡니까, 되는 일마다 하는 일마다 시마다 때마다... 도대체가 내가 손을 댓다하면 되는게 없어요, 내가 나타났다하면 꼭 안좋은 일들만 생겨요, 그리도 기도했는데 내소원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만 생겨요...
이런 때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이 더 잘 알지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얼마나 감사라는 조건과는 거리가 먼 환경속에서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역할 3): 욥의 경우
그 문제라면 제가 좀 할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것처럼 저는 인간이 당할수 있는 고난이란 고난은 다 당해본 사람입니다. 동방의 의인 소리를 듣고 엄청난 부자로 살다가 하루 아침에 전 재산과 자식 모두가 죽어 나가질 않나 마누라도 도망치질 않나 몸에는 문둥병이 도지질 않나 ... 고생고생해도 이런 고생은 상상이 안갈겁니다. 제가 하나님을 몰랐냐구요? 이게 교만한 마음에서 드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저는 제대로 신앙생활한다고 했어요. 그건 아마 하나님도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미치겠더라구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벌이 내게로 오나- 그전까지는 부러운게 하나도 없었지요. 다 감사할 조건이었습니다. 헌대 조건으로 치자면 제가 당했던 악몽들은 다 저주의 조건 뿐이었습니다. 제 마음속의 갈등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상상이나 할수 있겠어요?
질문)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상황을 이길수 있었습니까? 우리같으면 당장 하나님이고 뭐고 저주하고 말았을 텐데요
대답) 저라고 왜 그런 마음이 없었겠어요? 마누라도 떠나가고 친하다던 친구들마저 오하서 한다는 이야기가 네가 뭔가 잘못이 있으니 하나님이 벌하시는거라고 불난집에 기름이나 붇고... 더 이상 볼 상황이라는게 없었지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 이런 신앙은 여전히 꺼지지 않았습니다. 내게 부귀영화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내 생명을 지으시이도 하나님 이시라면 결국은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겠나... 내가 그 뜻을 어떻게 막겠나. 하나님은 내게 닥친 상황보다 훨씬 큰 분이시니 상황은 다 잃었어도 그 하나님만 잃지 않으면 된다....
여러분 자도 여러분과 똑같은 인간입니다. 저 혼자 할수 있는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도 같이 만들어 갈수 잇는 고백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비로소 하나님을 귀로만 듣지 않고 직접 눈으로 보는 성숙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
4장 스킷드라마(Skitdrama) 설교
1. 스킷드라마 설교란 무엇인가?
스킷드라마란 일정한 시사적인 주제를 짤은 극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연극이 정통적인 의미를 갖고 극을 통해 인생을 표현하는 문화활동의 중요한 장르라면 스킷드라마는 약식의 의미가 강하다. 즉 일정한 주제를 간략한 대사와 동작을 주축으로 음악등에 실어 표현하며 스토리의 전개, 출연하는 인원과 소품에 있어 단촐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루는 주제들이 시사성과 현장성이 강하기 때문에 더욱 사실적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떤 극이든 다루려는 주제를 단순한 구연에 의지하지 않고 입체화된 극으로 옮겨 전달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전달효과를 갖기 마련이다. 즉 듣기만하는 설교를 보는 설교로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메시지의 형상화가 가능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장점이다. 회중은 머리속으로 드라마를 정리하는데서 벗어나 시각과 청각을 통해 메시지를 접할 수 있으며 드라마의 줄거리가 경험을 주축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메시지의 경험적인
맥락을 접할 수 있게 된다.
2. 스킷드라마설교의 작성
스킷 드라마에서는 2-5명의 등장인물과 탁자 전화기등 다루는 주제에 따라 간단한 소품을 무대에 올리지만 연극에서의 막의 전환처럼 장중한 무대설치는 하지 않는다. 특히 스킷 드라마를 설교에 접맥하는 것은 전통적인 듣는 설교에서 '보는 설교'로의 전환이라는 시대적인 흐름에 시의적절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스킷드라마 설교는 일반 설교에 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이 드는게 사실이다. 드라마 대본을 작성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나머지 시중에 나와있는 스킷드라마 대본모음 서적을 이용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단게이긴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설교자가 직접 대본을 작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킷 드라마를 작성할때에 유의할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한가지 주제를 정하되 그 소재는 경험적 맥락에서 회중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하라 2. 스킷드라마가 설교에서 어떤 역할을 차지할 것인가를 결정 하라. 3. 설교에서의 역할배정에 맞게 대본을 작성하라. 대개 설교의 도입에서 갈등까지를 드라마로 처리하고 설교자가 이어 갈 등의 해결과 종결까지를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4. 감동과 재미 그리고 메시지를 항상 생각하라 5. 무대가 교회이고 설교의 한 부분임을 기억하여 장면전환, 소품, 음악, 배우의 수, 언어사용등을 결정하라. |
3. 스킷드라마 설교의 실제
제목: 새술은 새 부대에
본문: 막 2, 17-22(해방절 기념 주일)
출연: 힌옷입은 사람(2) 속이 검은 사람(2)
해설: 아시아의 맨 동쪽 고요한 아침의 땅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 한국인이 조용히 등장하여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다.
그들은 언제나 힌옷을 즐겨입었고 맑은 심성과 해맑은 미소로 싸움을 싫어하고 서로 돕고 사는 평화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봄이오면 들에 나가 씨앗을 파종하고-씨뿌리는 동작- 여름한철 그 무더운 날에도 들판에 나가 열심히 농작물을 가꾸었습니다-피뽑는 동작-
가을이 되어 오곡백화가 만발하면 구슬땀을 흘리며 일년간 땀흘린 열매를 거두어 들였습니다-벼베는 동작.
그리고, 그 힘든 일년의 노역이 끝나면 언제나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했습니다. - 하늘향해 두손을 모음
풍성한 먹거리를 앞에 놓고 그들은 멋들어진 축제를 벌리고 가무를 즐기는 멋도 있었습니다-춤추는 동작.
그런데(배경음악)/신디사이저 -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면에 이들은 서로 하나가 되기 보다는 쉽게 분열하고 갈라서고 파당짓는 좋지못한 습성이 있었습니다-서로 삿대질하며 토라져서 서로 등을 지고 돌아선다 .
서로 자기 욕심만 챙기고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손으로 품을 움켜안은채 몸을 구부리고 자기것만 지키려는 자세.
그러던 어느날//(배경음악: 강하게 시작해서 사인나갈때까지 계속) 그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습니다. 이웃에 살던 속이 검은 사람들이 밀어닥쳤던 것입니다.-검은 사람들 의기양양하게등장
그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비를 걸었습니다.(시비거는 모습) 그들은 평화대신 정복을 꿈꾸고 그것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 왔기 때문에 그들의 기세는 실로 무서웠습니다(욱박지르고 자기 힘 과시하는 모습).
아무런 힘도 없었던 힌옷입은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부둥켜 안고 떨기). 속이 검은 사람들은 이들의 자유를 빼앗았고 꼼짝못하게 묶어 버렸습니다(준비한 올무를 씌우고 의기양양해 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절망의 올매속에서 몸부림치며 하늘을 우러러 절규하는 것 뿐이었습니다(몸부림치고 빠져나갈려 안간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은 더 이상 투쟁할 힘도 기도할 힘도 다 잃어버린채 아무 희망도 없이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넋을 잃고 멍하게 있는다).
어느날이었습니다! (배경음악)그토록 기세 등등하던 속이 검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습니다(드럼으로 리듬맞출 것). 무엇에 놀랬는지 허겁지겁 자신들이 씌워놓앗던 올무를 거두더니 혼비백산해서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놀래서 올무를 거두어가지고 도망치듯 퇴장
평화를 사랑하던 힌옷입은 사람들은 너무나 기뻤습니다. 만세를 부르고 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하
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차례대로 동작 연기
이제 그동안 못했던 김매기도 다시해야 하고 잡초가 무성한 집도 다시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처음에는 서로 잘 의논하는 것 같더니 무슨일때문인지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 시작합니다.-서로 말다툼하고 삿대질하는 장면
할 일은 너무도 많은데 싸움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원수를 대하듯 서로 뒤돌아서서 각각 제갈길로 가고 맙니다...(토라져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퇴장)
그때 허겁지겁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도망갔던 속이 검은 사람이 이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슬그머니 염탐하듯 무대 한편에 등장).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웬지모를 의미있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극이 끝나고 설교자가 설교시작)
여러분은 지금 한 편의 스킷 드라마를 감상하시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이 대륙진출을 노리는 일본에 의해 강점당하고 고통받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드라마인데, 이 드라마를 예배시간에 올린 이유는 오늘이 바로 광복 54주년을 맞는 뜻깊은 광복주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경험주의적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분들에게 식민지 생활을 체험하지 못한 저희 젊은 세대입장에서 무슨 말을 한다하더라도 그때의 아픔과 절망을 표현할 길은 없을 것입니다마는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한민족으로서 공유하는 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서 자기의 근본을 부인당하고 자기 문화와 자기 말을 쓰지못하고 이름도 갈아야 하고 성도 갈아야 하는 자기 부정의 역사, 그래서 인간이지만 인간으로 살지 못하고 자유하지만 결코 자유하지 못한 노에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가 보여주는 식민지의 모습이거든요.
우리가 하얀색 비닐끈으로 올무를 만들었지만 일본이 우리에게 쓰여준 올무는 쇠보다더 더 무겁고 칼날보다도 더 날이 선 올무였습니다. 우리를 옥죄는 올무의 무게와 뼈를 파고드는 칼날의 그 살을 에이는 고통이 무려 36년이나 계속되었던 만큼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독립이라는 것은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요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아니 그것은 단지 감정상의 문제나 기분상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회복이요 우리됨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소위 헌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이것을 신학에서는 뉴 에이온이라 부릅니다. 뉴 에이온에서는 이전 것은 전부 지나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이야기지요. 한 여인이 어느 남성하고 교제를 했습니다.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점차 가까워졌고 마침내 서
로 죽고 못사는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인의 집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갖은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완고한 부모님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요즘같으면야 야반두주해서라도 자기 사랑을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집에서 정해준 사람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 여인은 말하자면 지금 두 에이온을 거쳐 살고 있는 것이지요. 결혼전 애인이 구 에이온이라면 지금 신랑은 새에이온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겉으로는 신랑을 사랑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여전히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리고 그것을 비극이라 느낀다하더라도 일단 결혼을 했으면 자신의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지요. 간단합니다. 과거는 깨끗이 잊고 깨끗이 정리하고, 그래서 애인이 준 반지도 돌려주고 그에게서 받은 편지도 다 태워버리고 그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그리고 새로운 시대인 신랑에게 충실해야 거기에 행복이 있는 법이거든요.
똑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이날을 54년이 지나도록 잊지않고 또 앞으로도 이나라의 역사가 지속되는한 결코 잊지않을 이유는 단순히 광복이라는 것을 감정적 차원의 기쁨정도로 기념하려는데 있질 않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맞았으니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출발을 다짐하고 실행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제가 나라의 독립이라는 광복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마는 새로운 시대와 구 시대라는 이 구조는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동일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신구시대를 나누는 기준점이 무엇인고 하면 에수 그리스도입니다. 에수 그리스도이전까지를 구 시대 그리고 에수 그리스도이후 시대를 새로운 시대 이렇게 구분짓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서는 구시대에는 무엇을 했느냐하면 새시대를 기다리는 일에 온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씩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주에 우리가 읽었던 레위의 집에서의 식사가 바로 공교롭게도 이 금식하는 날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질문을 하는 겁니다. 아니 세레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꼬박꼬박 금식을 하는데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도 안하고 금식하는 날에 오히려 음식을 먹습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물은 것은 아마도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지 않앗기 때문에 금식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함께 19-20절을 한음성으로 읽도록 합시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잇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신랑이 왔다 잔치는 시작되었다. 금식은 그 신랑이 오기까지 준비로서 하는 것인데 이미 왓는데 더 무슨 금식이 필요하단 말이냐? - 그런 이야기이지요. 신랑이 오면 준비기간에 의미있는 일들이라도 다 폐지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아주 생생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은 분들도 많이 애용하는 표현이니만큼 우리 같이 읽도록 합니다. 21-22절입니다: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트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느니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그렇지요. 새시대가 오면 정리가 필요합니다. 종교도 그러하고 신부가 옛애인을 잊고 오직 신랑만을 생각하는 것처럼 개인의 생활에서도 그러하고 그리고 나라의 일도 그러합니다. 새시대가 왔는데 여전히 구시대를 청산하지 못하면 새시대는 진정한 의미가 없습니다.
지난 주 서점에 나가보니까 주섭일이라는 분이 지은 프랑스의 대숙청이라는 책이 눈에 띠었습니다. 독일에 점령당햇던 프랑스가 전후에 나치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하는 것을 다룬 책이었는데 우리 역시 프랑스와 같은 입장이고 보니까 무척 관심이 갔습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당햇던 것은 불과 5년에 불과했습니다. 36년이었던 우리나라에 비하면 정말 짤은 기간이었습니다마는 전후 프랑스에서 이 기간에 나치에 협력햇다는 이유로 숙청한 사람의 수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감옥에 보낸 사람만 99만명 사형에 집행된 사람이 760명 유기징역에서 종신징역에 처해진 사람이 4만명 그리고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된 사람이 3500명이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프랑스사람들이 애국심이 없는 민족으로 비쳐질지 모릅니다마는 그런 해석보다는 어떻하든 새롭게 시작하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국가의 기초를 튼실히 다지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잡겠다는 프랑스인들의 단호한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참 무서운 사람들이구나 참 철저한 사람들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우리 민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왔습니다. 연세 대학교 안용식 교수가 쓴 논문가운데 "우리나라 고급공무원의 일제관련 경력분석"이라는게 있어요. 그걸 들여다 보니까 참 기가 막히는 겁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직후 행정의 실제집행자였던 국장 과장의 55.2%가 일제시대에 관료를 지낸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무려 프랑스에 비해 7배의 기간을 식민지치하에 잇었지만 그리고 반민특위라는게 조직되어 일제시대에 대한 정리를 한다고햇지만 그 죄과를 물어 제대로 책임을 물은 사람은 단한사람도 없는게 우리의 실정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행정의 공백을 메울길이 없었
다는 주장도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문제는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시대를 맞으려는 의지가 우리에게는 없엇다는게 이게 문제입니다. 그런 추상같은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려는 의지가 없으니까 그후 광주 대학살극의 주범인 전두환 노태후도 버젖히 대통령이 뽑히는 웃지못한 희극이 연출되는 것이고, 몇십만원 사기친 사람은 옥살이시키면서도 정작 수십억원을 해먹은 김 현철이는 감방에 가지않아도 되는 고무줄 정의가 이나라의 최고 권부인 대통령으로부터 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프랑스는 철저히 새술을 새부대에 담았고 그리고 그 대가를 충분히 누리고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새술을 헌부대에 담았고 역시 정반대의 혹독한 대가를 여실히 치루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 세상사는게 다 예수님 말씀하신 것같아야 맞지않아요? 가령 새로운 양복을 한벌 맞추었다 칩시다. 그런데 신고잇는 구두를 보니까 발가락이 다 나온 형편없는 구두를 신고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 중에 그 사람을 멋쟁이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또 양복만 놓고서 멋지다고 그래서 양복까지만 보고 발은 보지않겠다 그러는 분은 도 누가 있겠습니까? 새 양복에 어울리는 새구두가 아니면 아무리 비싼 새양복이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 싸잡아서 촌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민족이 정말 오늘의 이 하나님이 주신 새시대의 기회를 진정한 새시대로 만들려면 구시대의 잔재에 대해 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대통령부터 정신 독바로 차리고 역사와 민족앞에 죄인이 되지않으려면 그리고 그가 믿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면 밀실 야합의 정치를 버리고 공의의 대도로 나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역사의 이 평범한 진리를 잊지말아야 합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은 기회주의자들을 같은 지역이라는 이유에서 몰표를 몰아주는 우를 또다시 범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앞에 그리고 민족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복절을 맞는 저와 여러분의 다짐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는 차원에서는 더더욱 애수님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가치관을 새롭게 갖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을 사는 목표의 질을 높인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가 행복해지기 원하는 개인적 심정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마는 그러나 신앙은 그 차원까지도 넘어서게 합니다. 그래서 설사 내가 행복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가져오고 그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기꺼이 우리의 수고와 희생을 즐거워하는 그런 수준까지 다가서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이야 말로 복음이라는 새술을 담는 새부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봉사를 이야기하고 살아가는 의미를질문하는데 자루된 나는 여전히 소유만 생각하고 나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새 술을 헌부대에 담고 잇는 것이고 생벼를 헌옷가지에 붙이고 잇는 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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