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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도 시대 이후의 배도의 역사

하나님아들 2012. 9. 14. 17:50

사도 시대 이후의 배도의 역사
과거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합쳐지지 않았던 두 줄기가 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팽팽히 두 선을 그리며 흘러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두번째 강림이 있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은혜와 지혜를 통해서 그 두 줄기의 끝을 우리로 하여금 정확히 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 중에 어떤 진실한 이들은 그 두 줄기의 과거 역사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외치고 있다. 여러 독자들은 이 두 줄기 중 어느것을 선택하며 살아왔는가? 또 어떤 줄기를 믿으며, 그것을 붙잡고 서있는가?
여기 독자들 앞에 제시하는 두 줄기의 흐름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줄기의 시작과 끝을 크게 뜬 눈으로 쳐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뻗쳐 있는 한 줄기를 굳게 잡아야 한다.

약 2000년 전에 기독교 시대가 시작된 이후의 첫 10년 동안은 그리스도 교회 안에 순결함과 진리와 의가 충만하였던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단은 사도들이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초기 그리스도 교회를 함몰시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6-8. 또한 요한은 그 배도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와같이 경고하고 있으며, "이와 같이 너희들에게도 (내가 미워하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2:15 (영어 성경 참조). 유다는 배도에 대한 그의 염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돌리고 홀로 하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서 1:4.

제자들이 순교와 죽음으로서 그들의 최후를 마치게 되자, 사도 시대에 이미 뿌려졌던 배도의 씨앗은 좀더 성숙해진 이설의 형태로 급속히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교의 초기 역사 가운데에서도 이교의 잘못된 사상의 잠입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가 점점 세속화됨에 따라 오류의 침입에 대해서 점점 더 개방적이게 되었고, 사도 시대의 교회가 지니고 있던 단순성은 파괴당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배도와 안디옥의 충절
일찌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한 사회가 형성되었는데, 이 사회는 후에 배도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는 중심지가 되었다. 오늘날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된 철학적인 배도와 시리아의 안디옥에 있는 교회가 가지고 있던 사도 시대의 순수 정통 진리를 찾아내어 비교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은 제2세기 경부터 기독교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안디옥이 진리와 의의 상징이 된 것처럼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배도의 상징이 되었다.

안디옥이 사도 시대의 가르침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당시 안디옥은 로마의 행정구역이었던 시리아의 수도였는데, 그리스도 교회의 총본부가 있던 예루살렘이 파괴되자 당시 그리스도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으로 피신하였고, 그들은 모슬렘(회교)에 의해서 그 지역이 점령될 때까지 그곳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앗시리아의 Edessa 역시 사도들의 가르침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는 요새이었다. 시리아는 그 지역에 모슬렘(회교)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세계를 향해서 복음을 전하는 가장 위대한 전도 기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파송된 복음 전도자들은 멀리 페르시아, 인도, 그리고 중국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안디옥이 활력있는 복음 전도 기지로서, 그리고 강력한 말씀의 전파 기지로 알려진 반면에, 알렉산드리아는 철학적이고 인간의 지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 가르침과 연합하도록 이끌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은 기독교를 주도하는 두 대표 주자가 되었다. 안디옥의 참된 진리와 알렉산드리아의 배도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계곡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의 증가하는 간격이 좁혀진적은 결코 없었다. 4세기 경에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사이의 논쟁과 쟁투는 매우 심화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비유적인 해석을 신봉한 반면에 안디옥은 그들이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취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우리가 신실한 교인이라면,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안디옥의 정통적인 신앙 자세에 일치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알렉산드리아의 이설과 유전에 대해서는 완전히 분리된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사도들의 죽음 이후 얼마 안되어서 신약성경은 옛 시리아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에 페쉬타(Peshitta)라는 표준 시리아어로 다시 개역되었다. 그 페쉬타 어의 영어 해석판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그중 가장 원어와 가깝게 해석되어 있는 것이 영어 성경 중에서 킹 제임스 역(King James Version)이다. 킹제임스 역의 신약 성경 내용이 이토록 페쉬타어로 된 신약성경과 놀랍도록 근접한 번역을 유지하고 있는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모든 개혁 번역판(Reformation version)들 처럼 킹 제임스 역도 동(東 ) 시리아-희랍어로 된 신약 성경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면에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신학교들은 당시 영지주의에 의해서 심각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영지주의는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발생된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헬레니즘의 철학을 합병시킨 것이다. 또한 영지주의는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기원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다고 주장하는 이원론을 받아들였다. 3세기 경, 당시 페르시아에서 마니교라는 종교가 번성하였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교와 이방 종교의 혼합물로서 특히 고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트교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로마의 신학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뻗어내려온 신비적인 신학적 줄기였다. 이리하여 서로마 교회와 동(東 ) 시리아 교회 사이의 신앙적 갈등과 갈라짐은 점점 심화되었다. 그러나 고려되어야 할 또 다른 영향력이 있었다.

갈라디아와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
서쪽에 있는 교회들에게 잠입하여 들어오는 이교의 영향력에 대하여 저항하는 동쪽에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극서쪽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우리들은 신약 성경을 통해서 바울과 베드로가 갈라디아 지방에서 설교하였던 사실을 알고 있다.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키 지역으로서 시리아나 그리스나 로마와는 완전히 다른 인종들이 살고 있는데, 이 소아시아 지역에는 켈트(Celt)족이 일찌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영국, 웨일즈, 그리고 프랑스의 일부 지역에서 사용하는 동종의 언어를 사용했는데, 그 증거로서 영국과 프랑스 지역은 갈라디아의 켈트족에 의해서 그리스도교가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때 당시 프랑스와 영국 웨일즈와 갈라디아 지방 사이에는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켈트족은 전쟁에서 상대편을 무섭게 할만한 강하고 공격적인 성격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게 되자 그들의 그러한 불굴의 용감한 정신은 새로운 선교지를 향한 지칠줄 모르는 노력으로 표출되었다. 갈라디아 지방의 신자들과 시리아 지역의 신자들 사이에는 밀접한 유사성이 있었는데, 그 둘 사이의 유사성은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 더욱 분명해져 갔다. 후에 시리아와 갈라디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영향력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로마 천주교회의 배도에 대하여 끊질기게 저항하는 굳건한 요새가 되었다.

 

신실한 시리아인, 켈트족 그리스도인과 이단적인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인 사이에 존재했던 실제적인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갈라디아(지금의 터키) 지방에 살던 켈트족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동쪽에 살든지, 서쪽에 살든지 간에 성경을 그들의 유일한 권위로서 인정하고 받들었다. 이와 비슷하게 시리아 지방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의 최상권을 공언하였다. 그러한 그들의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시리아-희랍어로 되어있는 성경 원본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 오늘날 그들이 보존한 성경 원본이 성경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번역이 정확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아프리카와 로마는 이교의 철학에 의해서 강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빛으로 취급되었다. 시리아 인들과 켈트 족은 성경에 쓰여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으로 믿었으나, 반면에 성경을 논리화하고 철학적인 것으로 만들었던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에 있어서 성경은 매우 인기있는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행습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성을 감소시키게 하였고, 그 결과로서 신약 성경의 기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원본에 대해서 많은 삭제와 변화를 일으키도록 유도하였다.

2. 성경
그리스도교를 믿는 시리아인 학자들은 성경을 사도들에 의해서 기록된 그대로의 신약을 성결히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3세기 경, 시리아에 있는 교회를 주도하는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루시안(Lucian, 서기 250-312) 이었다. 당시 안디옥의 수도에서 태어난 이 헌신한 학자는 놀라운 분별력을 소유한 그리스도인 이었다. 루시안은 윌킨슨(B. J. Wilkinson)이 표현한 바대로 기독교계에 두 줄기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다. "한 쪽은 진리를 버리고 그대신 이교의 가르침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 반면에 다른 한쪽은 그리스도 신앙의 깊은 토대 위에 그들의 기초를 세우고 있다." 윌킨슨 저, 진리의 승리, 46.

그러나 이즈음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는 깊은 동맹 관계에 있었다. 이미 저스틴 말터와 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 등은 로마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클레멘트는 그리스도교와 이방 철학을 혼합하지 않는 한, 더 이상 그리스도교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대담해져 있었다. 루시안은 이 무서운 이방 오류의 침공에 대해서 저항하며 일어섰다.

루시안의 진리와 의를 위한 결정적인 외침은 결과적으로 로마와 동방의 교회들 사이의 전면적인 전쟁을 유발케 하였으며, 말씀에 대한 그의 견고한 충절은 로마의 교회와 켈트족, 왈덴스인들, 위그노 교도를 포함하여 유럽에 있는 신실한 신자들 사이에 격돌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3. 전통을 권위로 주장함
서로마 교회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이 후퇴되자, 교회 신조에 대한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통과 유전을 중시하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3세기 초기에 터툴리안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일 그대들이 그러한 규범에 대한 성경 상의 확고한 근거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대들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전통은 다만 전통의 창시자로서의 인간적인 명예, 힘으로 지켜지는 관습, 그리고 그러한 준수자들이 소유하게 되는 습관적인 믿음 등을 그대들에게 가져다줄 뿐이다." 터툴리안 저, 염주와 촛대, 제4장.

이 글을 통하여 터툴리안은 죽은자를 위한 헌금이나 앞 이마에 십자가를 표시하는 행위, 그리고 침례 대신에 세번 물을 떨어뜨리는 것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과거에 로마 교회가 만들어낸 관습들이 오늘날 전 기독교계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4. 안식일
예배를 위한 특별한 날로서 첫째 날의 준수를 가르치는 어떠한 성경 구절도 우리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3세기 이전에 이미 첫째날의 성결성을 주장하는 무리들이 존재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편견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유대인에 대한 잔혹한 박해가 있었는데, 유대인들과 동일한 토요일을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들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겨서, 비록 그들이 이방인일지라도 매우 심각한 어려움을 받아야했다.

 

둘째, 그당시 일요일은 이방인들의 예배일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예배일로서 일요일을 선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세째, 서로마 교회가 가지고 있던 신비적이고 철학적인 신앙은 성경을 다시 번역하도록 유도하였고,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일요일을 신성시 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기원전 321년 경에 콘스탄틴 모든 노동으로부터 쉬는 날로서 태양의 날을 공포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못해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사단은 하나님의 지배권을 격멸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일환으로서 어떤 일부 교회들로 하여금 휴식과 예배의 날로서 안식일과 일요일을 함께 준수하도록 유도하였다. 물론 일주일에 2일을 예배를 위해서 따로 떼어놓는 것은 하나님의 더 큰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사단은 자신의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해 나갔다.

결국, 한날은 축제일로, 다른 한날은 금식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일요일의 신성성을 주장하던 자들은 일요일을 축제일로서, 안식일을 금식일로서 주장했다. 그당시 사람들이 금식일보다는 축제일을 압도적으로 좋아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일로서 일요일을 지키고 있었지만, 4세기 말경에 밀란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안식일을 예배일로서 준수하고 있었다. 로마는 일요일 신성성을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에게 강요하였는데, 그것은 사단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 7세기가 되어서야 스페인이 일요일 신성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기 664년, 윗비(Witby) 종교 회의에서 놀텀부리아(Northumbria) 국가의 왕과 왕비에 의해서 강요당하여 일요일을 예배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당시 놀텀브리아는 영국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는데, 11-12세기 경에 웨일즈와 스코트랜드에 의해서 정복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후까지도 유럽의 이곳 저곳에 흩어져있던 성경을 사랑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제칠일 안식일을 유일한 예배일로서 인정하며 살았다.안식일의 변경과 함께 영혼이 불멸한다는 교리는 그리스도 교회로 침입한 이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상징이 되었다.

5. 교회와 국가의 연합에 대한 개념
콘스탄틴은 그리스도교를 포용한 첫번째 로마 황제가 되었다.

그는 예배일에 대한 결정을 포함한 칙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으로 인해서 교회와 국가의 동맹은 한 단계씩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서기 533년, 로마 제국이 쇠퇴해가던 때, 저스틴 황제는 당시 로마의 주교였던 요한 2세에게 폰티펙스 맥시머스라는 제위를 부여함으로써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 버질리우스 교황이 모든 권력을 떠맡게 됨으로써 교회와 국가의 연합은 완성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로마의 주교는 종교적-정치적 주교가 되었으며, 교황권의 지배 권력이 확보되었다.

6. 오류의 변천과정과 그 창시자, 어거스틴.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방 종교의 영향력이 증폭되는데 있어서 어거스틴(Augustine)이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그가 젊었을 때 받아들였던 이교의 사상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도 완전히 저버리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당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신학자로서 그리스도 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신학적 오류 중에서 상당 부분은 어거스틴에 의해서 시작되었거나, 그를 따르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되었는데, 그들은 어거스틴의 이설을 보충하고 공식화하였다.

어거스틴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던 이교 사상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자유 선택에 관한 개념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이고 완전한 지배자로만 보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은 그에게 이해될 수 없는 분이었다. 그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구원을 받아 하늘 왕국을 기업으로 받고, 어떤 이들은 멸망을 받아 잃어버린바 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러한 진리를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학적 개념에 끼워맞추기 위해서 예정론의 교리를 도입하게 되었다. 예정론의 교리는 그가 생존해 있을 당시에도 상당한 도전을 받았었는데,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서 어거스틴은 우리 중의 어떤 사람도 구원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허물이 많은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파멸로서 우리들의 운명을 미리 결정짓는 당신의 공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할 아무런 자격도 없다고 말하였다.

예정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오류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라는 또 다른 오류를 논리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절대적이고 변할 수 없는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구원받게 될 자들을 당신 임의대로 결정하시는데, 이런 식으로 일단 구원받은 자들은 다시는 잃어버린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파멸로서 운명지워진 자들은 결코 구원의 반열에 들어 올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들이 구원받은 것으로 미리 예정되었다고 믿는 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기만적인 안전감을 갖도록 유도한다.

또한 이러한 개념은 복음 전파의 필요성과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의문점들을 던져준다. 각 개인의 운명이 하늘에서 이미 다 결정되어졌는데 기별을 전해야 할 필요성이 무엇인가? 세상의 복음화의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종교를 개종할 이유는 무엇인가?

어거스틴의 논리대로라면,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관계는 구원에 있어서 부수적인 것이 되고 만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once-saved-always-saved)는 잘못된 교리는 또 다른 오류인 "죄짓고-살고의 신학" (sin-live theology)을 낳게 되는데, 이러한 논리의 흐름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이기만 한다. 그리하여 구원 문제에 있어서 죄에 대한 승리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중세 시대의 잘못된 개념을 근원으로 해서 출발한 논리가 계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와 결국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신학적 바탕을 이루는 "죄는 이길 수 없어, 그저 죄짓고 사는거야"라는 도덕적 패배주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어거스틴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 처럼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라도 죄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 선택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믿는 이방 종교의 가르침을 근거로 했던 어거스틴의 잘못된 전제로 부터 시작된 논리의 전개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비성서적인 결론으로 수 많은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어거스틴은 또한 원죄설에 대한 개념을 대중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아담이 지었던 바로 그 죄 때문에 정죄받는다고 주장했다. 죄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모독과 범함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상태 그 자체가 죄인데, 이 죄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타나는 행위에 의해서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고 논리를 전개했다. 초기에는 그는 성(sex)을 원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오랫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적인 욕망과 투쟁하였는데, 그의 그러한 성적 욕망은 본처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서자를 갖도록 하는 결과에 이르도록 하였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연약함은 자신의 죗된 경험에 대한 신학적인 변명을 만들어 내도록 이끌었다. 그리하여 그는 후에 원죄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다른 부류의 범죄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육체와 영혼 사이에는 해결할 수 없는 투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그는 자신의 육에 대한 영의 승리를 결코 체험하지 못했다. 원죄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어거스틴의 개념은 육체를 취하시고 이 땅에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마다 그를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죄인이 된다면, `그리스도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셨다고 추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나실 바 거룩한 자." 누가복음 1:35.

그리스도를 매우 죗된 인간으로 결코 묘사할 수는 없었다. 어거스틴은 억지 논리로서 결론 짓기를 그리스도는 인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본성을 취하셨다 라고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을 것이라고 가정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는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있는 가장 명백한 증거들을 무시하게 된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주장하였음으로 인해서, 천주교회를 참람된 교리인 '무염시태설'을 신봉하도록 인도하였던 것이다. 이 교리는 19세기가 되어서야 천주교회의 교리로서 완전히 인정되게 되었다. 신학적인 논리의 계단에 의해서,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잘못된 신학들은 수많은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만들어내게 되었고, 그러한 것들은 결국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르침으로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통의 가치를 중요시 하는 천주교회, 특별히 서쪽에 있던 그리스도 교회들은 더욱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된 교리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딜레마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상위의 본성을 가지신 윗자리를 차지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보자로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어거스틴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우리가 시험받고 유혹받은 것과는 같지 않는 방법으로 시험받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라도 인간은 죄에 대한 정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어거스틴이 가정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보다 열등한 인성을 가졌다면, 인간이 예수께서 지상에 계신 동안에 가지셨던 것과 같은 죄에 대한 계속적인 승리의 경험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거스틴의 관점은 그리스도께서 죄없는 생애를 성취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우리 인간보다 죄의 문제에 있어서 큰 잇점을 가지고 있으며, 반면에 우리는 타락한 본성으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를 그치시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시험받는 자들을 그 시험으로부터 구해주는 위치에 계시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이외의 다른 중보자들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게 되었는데, 그 중보자들은 다른 인간들 처럼 유혹을 느끼며, 고통당하며, 그리고 그 유혹에 굴복하는 남녀들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후에 교회는 예수의 어머니를 중보자로서 주장하게 되었고, 그런 다음 수많은 성인(saint)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으며, 그들 또한 중보자로서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의 교구에 있는 모든 신자들처럼 모든 사소한 점에까지도 죄에 대해서 동일한 생애를 살아가는 사제들에게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보하는 중보자의 역활을 부여했다. 잘못된 이방 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교회는 논리적 이끌림에 의해서, 그리고 어거스틴의 잘못된 전제를 메꾸기 위해서 한번에 한계단씩 오류에 오류를 더해갈 수 밖에 없었다.

원죄는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킨다라는 것은 곧 교회의 가르침이 되었다. `임신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인간은 영원한 고통의 정죄를 받게 되었다. 원죄라는 잘못된 개념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질문을 자아내게 한다. "어떻게 하면 원죄에 대한 죄책감을 제거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얻어낸 결론은 침례라는 행위를 통해서 죄책감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해결책에 대하여 또 다시 뒤따르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그렇다면 침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답변은 끔직한 것이었는데, 침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불이라는 것이었다. 침례를 받지 못한채 죽음에 들어간 유아를 가진 부모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그러한 선언이 주었을 충격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유아의 사망률은 매우 높던 때였다. 자신들의 어린아기가 영원한 불에서 고통당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고뇌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교회는 즉각적으로 교인들의 그러한 고뇌를 해소시킬 수 있는 어떠한 해결책을 강구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연옥이라는 기상천외한 것이 발명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연옥은 하늘에도, 지옥에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중간적인 위치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제시하는 이러한 견해도 부모들의 고민을 해소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천주교회의 신조 가운데 유아세례라는 예식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방 종교에 원조를 가지고 있는 로마 천주교회의 대다수의 교리는 분명 5세기 말엽에 완전히 발전되었다.

그 이후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신실했던 남녀들은 로마의 강압적 지배에 굴복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로마와 그들의 배도와 이방종교적인 행습에 굴복하기를 거절하였던 자들은 쫓기고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결코 로마는 진리의 토대를 짓밟을 수 없었다. 마침내 영국의 위클립, 보헤미야의 제롬과 허쓰, 독일의 루터와 멜랑톤, 스위스의 쯔윙글리와 칼빈, 스코틀랜드의 낙스와 같은 개혁자들은 로마 천주교회의 멍에를 쳐부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일지라도 로마의 모든 오류를 깨달을 수는 없었는데, 그들이 개혁하지 못한 오류와 잘못된 행습들은 그들의 다음 세대들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우리가 사도 시대부터 개신교의 개혁시대까지의 길고 긴 영적 암흑의 기간을 되돌아 볼 때, 신실한 교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교황권의 권위에 무릎을 꿇지않았던 가치있고 용감한 신앙 선조들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들의 모본은 지구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소유해야 될 흔들리지 않는 증언이 되어야한다. 과거에 외쳤던 그들의 증언처럼 우리도 하늘이 흔들려도 진리에 대해서는 굳건히 일어서야 하며, 원칙에 대해서는 나침판이 남과 북을 가리키듯 항상 진실하여야 한다.

  

출처 : ♡진리의 길♡
글쓴이 : 튼튼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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