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들에게 보내는 글
1-교회의 뿌리를 흔들고 있는 사단의 공격
우리는 여러분의 졸업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입과 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진리가 나오는 모습을 듣고 보게 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는 이상한 설교와 가르침을 너무나 많이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세속을 결정적으로 포기할 것을 촉구하는 호소를 듣는 대신에 이상한 의(義)를 제시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죄와 세속은 가지고 살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우리의 삶을 인정하실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드는 가르침들을 듣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에 걸쳐 서서히 변경된 설교와 가르침 속에서 살아오면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대표할 만한 인물들로 길들어져 왔습니다.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자유주의 복음과 신신학은 이제 어디를 가도 쉽게 접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복음의 진수를 지키고 있어야 할 신학대학 안에도 정통 복음과 신신학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바른 복음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신신학을 따라가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신학생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바른 신앙이고 무엇이 신신학인지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아직 여러분이 그 둘을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깊이 잠자고 있거나 진리에 대한 무지 내지 무관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른 신학과 신신학 사이에 존재하는 투쟁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 투쟁 때문에 수많은 자영 선교 기관들이 생겼고, 가정 교회들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실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투쟁의 중심은 누가 재림의 시기를 정했는가가 아닙니다. 투쟁의 중심은 십사만 사천은 실제 숫자인가 상징인가가 아닙니다. 투쟁의 중심은 누가 교회를 비난하는가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투쟁의 중심으로 만들고 싶어하지만, 결코 그것은 투쟁의 중심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신학을 전공하는 성경 학도로서 투쟁의 핵심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누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으며, 교회는 왜 신신학을 지지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해야만 이 문제의 핵심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대를 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일으키셔서 예언의 시작과 성취를 알리는 기별을 전하도록 섭리하였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예언인 2,300주야 예언을 주실 때도 그렇게 섭리하셨습니다.“그가 내게 이르되 2,300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함을 입으리라 하였으니.”(단 8:14)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가장 긴 예언인 2,300주야 예언을 다니엘 선지자를 통하여 주셨습니다. 2,300주야 예언은 몇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부분의 예언이 끝나는 때마다 예언의 성취를 알리는 선지자를 부르셨고 또한 그에게 기별을 주셔서 전파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69주일 예언이 끝나는 시점, 즉 예수께서 침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때를 알리는 예언이 성취되었을 때에는 침례 요한을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기별을 전파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또한, 70주일의 예언이 끝나는 해에는 바울을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이 끝나고 복음이 이방인을 향하여 전파될 것이라는 기별을 주셨습니다.
현시대에도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외칠 하나님의 바른 종들이 필요합니다. 누가 이 시대의 참된 하나님의 종들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과 사명을 완수하게 될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지막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종일까요? 성소를 정결케 하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 시대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종들입니다.
사단은 무엇을 공격할까요?
요한계시록 12장 17절에는 마귀가 여자의 남은 무리를 공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 12:17) 마귀는 교회를 공격할 때 무엇을, 어떻게 공격할까요? 물론, 마귀는 하나님께서 2,300주야 예언이 끝나면서 마지막 남은 무리에게 주신 성소 정결의 복음을 공격할 것입니다. 마음 성소를 정결케 하는 복음을 공격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사단은 마음과 삶이 정결함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복음을 교회 안에 퍼트려 왔습니다.
다니엘 8장에서는 마음과 생애를 정결케 하는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요한계시록에는 마지막 시대의 여자의 남은 자손의 정체를 설명하면서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여자의 남은 무리의 정체가 나오고, 14장에도 짐승의 환난을 극복하고 짐승의 표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체가 나타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요? 그들 역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의 복음은 계명을 지키게 하는 복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넷째 계명인 안식일 계명을 포함한 십계명 준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마음 성소의 정결과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참된 중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마음에 계명이 새겨짐으로 순종의 생애를 살게 되고 이로써 마음 성소는 정결해집니다. 마지막 시대에 사단의 공격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단은 일반 기독교계에 계명이 십자가에서 폐해졌다는 가르침을 퍼트림으로써 성소 정결을 막았으며,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가르침으로 성소 정결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한 번 믿기만 하면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받게 된다는 바벨론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들어왔는데, 그것은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명에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순종을 부인하는 복음은 성소를 정결케 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소를 더럽히도록 유도하는 가르침입니다.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것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연결되고 그것은 마음 성소를 죄로 더럽히도록 인도하는 가르침입니다.
왜 사단은 교회 안에 신신학을 퍼트릴까요?
신신학은 성소를 정결케 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사단이 신신학을 교회 안에 그렇게 열심히 퍼트리는 유일한 이유는 마음 성소의 정결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은 마지막 시대에 “성소 정결”이라는 2,300주야 예언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절대 원치 않습니다. 만일 성소를 정결케 하는 복음이 교회 안에서 퍼지면, 이 복음에 의해서 십사만 사천 인이 준비되어 그들에게 늦은 비 성령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는 세 천사의 기별을 통하여 온 세상이 복음으로 환하여져 각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게 될 것이고, 지구를 위하여 주어진 은혜의 기간이 끝나면서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며, 사단 자신과 악한 천사들은 천 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유황불 못에 태워질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성소를 정결케 하는 복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성소를 결코 정결하게 만들 수 없는 복음”인 신신학을 교회 안에 슬며시 넣었던 것입니다.
사단은 어떤 교회에서는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완전주의다.”라는 말로서 성소 정결의 복음을 부인하도록 만들었고, 어떤 교회에서는 “누가 죄를 완전히 이길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로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주눅이 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간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가 율법을 범하면서도 그분의 은총을 계속해서 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굳게 붙들고 죄짓기를 중단해야만 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누가 아는 죄를 계속해서 품고 있을 수 있을까요? 누가 감히 죄를 품고 거룩한 하늘 진주 문을 들어가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 아는 죄를 모두 버리게 되는 “완전”의 경험은 주 안에서 참된 거듭남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게 되는 경험입니다. 완전은 모르는 것에 대한 완전히 아닙니다. 그것은 아는 죄를 버리고, 알고 있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께서 양심 속에서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시고 감동하실 때 그분의 음성을 따르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경험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애란 말입니까?
완전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경험이지만, 참된 중생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경험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완전의 경험을 인간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환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단은 그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율법주의자요, 완전주의자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완전에 대해서 말하는 것조차 이상한 극단처럼 보이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에서 사단은 신학대학의 신학자들을 이용했습니다. 신신학자들은 먼저 죄의 정의를 “죄로 인한 타락한 상태”로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죄로 인하여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이라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논리하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도 정죄 받은 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옥불의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의 원조인 천주교회는 중세기에 영아 세례라는 비성서적 관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중세기에 수많은 아기가 전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어머니들은 죽은 아기를 품에 앉고서 신부를 찾아와 “내 아기는 구원받았습니까? 내 아기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울부짖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세례를 베푸는 신학적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천주교회에서 세워진 원죄론을 받아들인 개신교회도 이제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침례를 베풀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의 정의를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타락한 상태(본성)”로 규정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육신 하실 때에 타락한 인성(sinful nature)을 취하셨다고 하면, 예수님을 정죄 받은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리적 귀결 때문에 천주교회는 무염 시태설이라는 신학을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와는 다른 인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신교회의 신신학자들도 예수님을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신학적 변질 때문에 교회에서는 두 종류의 복음이 생겼고 그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각 국면에서 논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2-두 복음의 투쟁이 시작된 배경과 그 과정
지금은 늦은 비를 받는 백성을 준비하기 위한 때입니다. 늦은 비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복음으로 세상 역사를 마치고 예수 재림을 촉진하는 한 백성을 준비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생애의 빛에서 “어떤 사람들이 늦은 비를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루었을 때, 다음과 같은 투쟁이 생겼습니다.
생애의 빛: “예수께서 곧 오십니다! 정치와 종교와 지구 환경 가운데서 일어나는 징조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일요일 휴업령이 내려지고 짐승의 표가 강요될 수 있는 긴박한 상황에 살고 있습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마지막 환난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받고 늦은 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과 늦은 비는 죄에 대하여 완전하게 승리한 자들에게만 허락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 이것이 늦은 비를 받는 조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알고 있는 죄를 완전히 이기고, 알고 있는 계명을 완전하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중 아무라도 우리 품성에 하나의 점이나 흠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더러움에서 영혼의 성전을 깨끗게 하기 위하여 우리 품성 가운데 결점을 고쳐야 할 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 날 이른 비가 제자들에게 내렸던 것처럼 늦은 비가 우리에게 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남녀가 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의 충만함을 구하여 우리 앞에 세워놓은 그 목표, 즉 그리스도의 품성의 완전을 향하여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백성이 이 목표에 도달할 때, 그들은 그들의 이마에 인침을 받게 될 것입닏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될 것이요, 그때 기록하는 천사는 ‘다 이루었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 편에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늦은 비가 임하여 그들의 과오를 제거해 주고 그들의 잘못을 시정해 주기를 기다리고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서 육체와 정신의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고 셋째 천사의 큰 외침에 가담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면, 그들은 부족함이 발견될 것입니다. 유쾌함 또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일, 곧 육체와 정신의 모든 더러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중에 거룩함을 완성하는 일을 행함으로써 그것을 받을 준비를 갖춘 자들에게만 임하는 것입니다.”
신신학: “아니,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완전한 순종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완전주의는 이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어주시는 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은 공로나 행함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이죠.”
생애의 빛: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억하세요! 알고 있는 죄를 품고 있고, 알고 있는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늦은 비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선구자들이 전한 복음입니다. 물론, 구원은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고 있는 죄를 품고 있고, 알고 있는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서 칭의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신학: “여하튼, 우리는 죄를 완전히 승리할 수 없고, 계명에 완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생애의 빛: “만약 우리가 계명에 완전히 순종할 수 없다면, 왜 우리는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죄로 오염된 인성을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셨고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께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승리하셨으므로 우리도 성령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입니다.”
신신학: “죄를 승리하는 면에 있어서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근본부터가 다른 분이니까요. 그분은 죄로 인한 오염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셨습니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처럼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다고 주장하면 그분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럴 경우 그분은 결코 인간의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생애의 빛: “타락한 본성을 갖고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범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의도적 불순종”이라는 것이 선구자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서 죄된 인성을 취하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취하셨지만, 죄는 없으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어린아기는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선택한 것도 아닌데, 부모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았다고 해서 지옥불의 정죄를 받는 죄인으로 태어난다면, 그것은 너무나 억울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노예로 살면서 평생동안 자신의 뜻과 의지를 사용하는 기회를 얻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 선구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신신학: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갓 태어난 아기라 할지라도 정죄 받은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기도 구세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생애의 빛: “내가 십자가를 믿고 받아들여야 구원받는 것처럼, 내가 죄를 범하기로 선택해야만 지옥불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은 죄를 범한 결과로 생긴 것이지 죄 자체는 아닙니다. 죄의 결과인 타락한 본성은 유전되지만 죄 자체는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선구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물론, 갓 태어난 신생아에게도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아기에게 죄가 있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류에게 두 가지를 주었는데, 하나는 죄의 용서이고, 다른 하나는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한 번 태어나서 살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심판을 받고 영원한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고, 아담의 후손들은 이 땅에 태어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류를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한 번 태어나서 각자에게 정해진 기간 동안 살면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린아기에게도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행 17:26-27)
신신학: “빛은 점차로 밝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진보된 신앙 원리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행함과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으로부터 이제는 빠져나와야 합니다.”
생애의 빛: "선구자들이 믿던 복음은 행함과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선구자들이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중심에 둔 참된 복음이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다음과 같은 복음의 균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빛은 점차적으로 밝아져야 합니다. 그러나 빛이 밝아진다는 의미는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버리고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사야의 가르침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복음과 일치해야만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여러분이 주장하는 신신학이 “진보된 신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진리로 인정받은 복음과 일치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신신학은 이러한 성경의 바른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신학적으로 분석할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6가지 면을 살펴봅니다. 1) 죄에 대한 정의, 2) 원죄, 3) 그리스도의 인성, 4) 칭의와 거듭남, 5) 성화와 죄의 승리, 6) 구원이 확정되는 시기. 이 6가지 기준을 통해서 볼 때, 신신학은 복음과 단 한 가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르지 않은 교회의 복음과 6가지 모두 일치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신학은 그 뿌리를 바벨론의 복음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습니까? 신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신신학: “어떻게 생애의 빛은 자신들처럼 믿어야 구원받고, 자신들처럼 믿어야 남은 무리에 속하는 것처럼 말합니까? 당신들의 그런 독단적 주장이 얼마나 교회에 해를 끼치는지 아십니까?”
생애의 빛: “생애의 빛은 한 번도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세 가지 증거 ,즉 1) 하나님의 계명, 2) 예수의 증거, 3) 예수 믿음을 가지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마지막 시대의 남은 무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남은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이 3가지를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내에서는 이 3가지 모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계명에 완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완전주의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의 증거”인 계시록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버리려고 하는 움직임이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셋째, 예수 믿음이란 예수를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 이상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 믿음이란 예수께서 가지셨던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겼던 것처럼 마지막 성도들도 믿음을 통하여 알고 있는 죄를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버릴 때, 결과적으로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처] 24.신학생들에게 보내는 글|작성자 isr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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