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의 기본틀(2): 인간 -인간의 창조와 그의 상태 변화
이 글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틀의 둘째 부분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과 그의 상태의 변화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온 창조물의 대표로 여겨지며 창조물의 지배자로 위임되기도 하였다. 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서 창조될 때부터 어떤 점에서 다른 피조물의 창조와는 달리 창조되었는지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 필자 주.
1. 인간 창조의 독특성 개관
첫째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가장 나중에 창조하셨다. 다른 모든 피조물을 다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는 먼저 이 세상 피조계를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태가 되게 하시고 서야 비로소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라는 관점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는 근원적 물질을 창조하신 다음의 상태가 아직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 말과 연관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맨 마지막에 창조하신 이유는 이 세상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미리 창조하신 후에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머레이가 잘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the crown of God's handiwork)으로서의 사람에 이르고, 사람의 형성이라는 극치에로 진전해 가는 질서 있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휴스의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인격적 피조물인 사람을 창조하기로 하신 하나님의 결정은 모든 창조 명령의 과정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순간'(the culminating moment)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는 창조의 극치(the summit of cre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음에 생각할 인간 창조 이전에 하신 말씀과 연관시켜 볼 때 더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먼저 인간을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일정한 방식으로 창조하시는 의지를 천명하시고(창 1:26), 이 의지와 말씀에 따라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 1:27). 물론 하나님의 창조는 그 무엇의 창조이든지 다 영원 전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작정, decree)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하실 것인지도 다른 피조물들의 창조에 대한 계획과 함께 이미 영원 전의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다른 것들을 창조하실 때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떤 방식대로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하실 것인지를 천명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자기 의논, 또는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선언으로 간주되는 창세기 1:26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이 말씀은 앞으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고찰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인간의 특성과 (온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담고 있는 매우 풍성한 선언이다. 이는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천명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상과 경륜의 독특한 관여"가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 나타난 "우리"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의논의 복수"라는 말도 하고 "왕적 복수"(royal we)라는 말도 하는 것이다.
셋째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남자와 여자로 만드실 계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남자만 만드시고(2:7) 그로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하게 하여(2:19-20) 일종의 심리적 준비와 필요를 가지게 한 후에 그를 잠재우시고 그의 몸의 일부를 사용해서 여자를 만드셨다. 사람을 창조하시는 데 일종의 과정이 있게 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이유를 느끼도록 하려는 배려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왜냐 하면 인간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을 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고(창 2:18) 말씀하신 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동물들의 이름을 짖도록 하신 데에는 문화 명령을 수행하도록 하는 목적 외에도 이 일을 수행하는 데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는 것과 동물들 가운데서는 아담을 도울 수 있는 그에게 적합한 배필이 없음을 드러내시며, 또한 아담으로 하여금 그 사실의 필요를 느끼게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모두 창세기 1, 2장의 기록이 역사적인 것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이라고 볼 때에야 주장될 수 있는 말이다. 이는 창조 일반에 대한 논의에서 이미 밝힌 바 있거니와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아주 필수적인 이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를 교회적 견해로 여기고 "과학적 견해의 승리"가 "교회적 견해의 필연적 멸망"을 가져 왔으므로, "첫 사람에 대한 역사적 그림 전부는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종국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파괴된 것이다"고 주장하는 에밀 부룬너의 견해와 같은 견해는 성경 기록의 사실성은 무시한 채, 그 의미를 찾으려는 견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사람의 기원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수 천년 전에 살았던 아담이라고 불린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 너 자신 그리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전통적 용어를 유지하되 그 의미를 바꾸어 사용하는 것은, 휴스가 잘 표현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혼동스러울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 비윤리적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역사성을 부인하는 태도를 모두 주의해야만 한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 복음 19:4이나 마가 복음 10:6에서 하신 말씀은 분명히 창세기 1:27과 5:2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며 그것을 반영하는 말씀이며, 마태 복음 19:5과 마가 복음 10:7에서 하시는 말씀은 창 2:24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 한 바울이 디모데 전서 2:13에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말도 창세기 2:7을 역사적으로 받아들이며 하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적 이해의 빛에서 인간의 독특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2. 인간의 독특성: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독특하게 창조된 인간은 과연 어떤 특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될 수 있을까? 창세기 1장의 기록에 유의하면서 인간의 독특성을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2-1. 인간이란 무엇인가?(1): 하나님의 형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in God's image), 하나님의 모양대로(after God's likeness) 창조하셨다(창 1:26, 27). 다른 것들을 창조하실 때는 "그 종류대로"(after its kinds or to its kind) 창조하신(창 1:11, 12, 21)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의 모양대로"(after God's likeness) 만드신 것이다(창 1:26). 바로 이 점에서도 다른 피조물들과는 다른 인간의 독특성이 아주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에 대한 지적인 반응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하는 찬송과 환호에 찬 반응일 뿐이라는 머레이의 주장은 아주 예리하며 적절한 것이다. 여기서 "형상"(imago)이라는 말과 "모양(similitudo)이라는 말은, 그와 연관하여 두 가지 다른 전치사가 사용되었다는 이유와 함께, 이레니우스로부터 서로 다른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자주 있어 왔다. 그러나 그런 이전 교부들과 천주교 신학자들의 의견에 반해서 종교개혁자들이 옳게 지적한 바와 같이, "형상대로"라는 말과 "모양을 따라"라는 말은 일종의 병행법적인 표현으로(as a case of Hebrew parallelism)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창세기 1 장의 용례에서나 보다 넓은 용례에서나 이 두 가지 다른 전치사도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두 명사도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매우 풍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형상 됨은 인간 됨에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할 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말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원형(archetype)이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반영(reflection, image)이라는 뜻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원형 되심과 인간의 파생성과 의존성을 생각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원형이시다. 그가 중요한 것이다. (그럴 수도 없지만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이다. 이는 창세기 2:7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숨을 불어넣으신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숨을 불어넣으심(inbreathing)"이라고 표현하신 하나님의 생명의 전달로부터 생명이 파생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반영해야 한다는 인간의 존재의 이유와 사명도 함의하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무엇을 반영하고(reflect) 나타내야(represent)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몸이나 신체를 반영한다는 뜻일 수는 없으니 하나님은 영이시어 몸을 가지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피조물의 한도 내에서 반영하는 것임을 뜻한다. 이 반영은 우리의 존재 전체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으로 장식되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우리네 인간은 하나님의 복사 본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허상도 아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실제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반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역할을 제대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동사로서의 형상 됨의 의미를 중시해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원상의 인간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제대로 반영하고, 또 항상 그것을 제대로 반영하도록 요구받고 있었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잘 반영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어 가야 하는 사명 아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잘 반영하지 못하고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지위에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타락한 상태"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렇게 타락한 사람을 가리켜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한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9장 6절에서는 타락한 상태의 사람들이라도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하면서, 그 이유를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라고 제시하고 있다. 이는 사람을 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해하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 자신을 멸하려 드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야고보서 2:9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그런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구절 모두에서는 다 타락한 이후의 사람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됨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제거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휴스가 잘 표현하듯이, "사람은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피하여 도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형상 노릇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왜곡된 형상(deformed or distorted image of God)으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은 다 "왜곡되고 뒤틀린 '하나님의 형상'"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본래적 모습에 대해 모순된 것이다 (contradiction of himself). 그러므로 이런 타락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이기는 하나, 하나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그 형상이 회복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실 때 이 "형상의 회복"이 일어난다.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이루시는 이 구원 사역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형상"(deformed image)이 "개혁된 형상"(reformed image)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고후 4:4, 골 1:15) 우리에게 덧입혀 줄 때 일어나는 일이 이 형상의 회복이다. 그러나 이 형상의 회복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측면도 있고(중생, 즉각적 성화, 칭의),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점진적 성화). 그 점진적 측면은 이제 새로운 피조계에 참여하는 존재(따라서 그 형상이 단번에 회복된 존재)답게 날마다 하나님의 참된 형상으로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본 받아 가는 일로써 이루어진다. 이미 이루어진 형상의 회복은 우리로 날마다 그 형상을 새롭게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도록" 의도된 것이다(롬 8:29). 그리고 급기야 그가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는 그와 같아질 것이다(요일 3:2).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고 표현되기도 하고(엡 4:24),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골 3:10)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로부터 온전케 된 하나님의 형상은 참된 진리에 대한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확언할 수 있다. 이런 주해적 해석에 앞장 선 이는 칼빈이고, 그를 따르는 전통적 개혁 신학에서는 이것을 "좁은 의미[俠義]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러 왔다. 이런 온전한 지식과 의와 거룩함 본래 인간이 그런 지위에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원의(原義)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원의, 즉 "협의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타락할 때 온전히 상실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원의(原義)를 상실한 인간도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려진다. 그렇다면 "협의의 하나님의 형상" 외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전통적으로는 "넓은 의미[廣義]의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러 왔다. 이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모든 특성을 전부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휴스는 아주 폭 넓게 이를 인격성, 영성, 합리성, 도덕성, 권위 그리고 창조성이라는 범주로 말하고 있다. 물론 이런 "넓은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도 우리는 창조함을 받은 그 온전한 지위에 상응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것을 손상된 채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광의의 하나님의 형상"도 기형화된(deformed) 하나님의 형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형상의 회복이란 원의(原義)의 회복과 함께 하는 인간 됨의 모든 측면의 새로워짐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그 앞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을 내며, 하나님 앞에 구별된 그런 인간의 모습은 인간성의 모든 측면을 무시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모든 측면을 다 새롭게 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간 됨은 하나님의 형상 됨에 있기 때문이다.
2-2. 인간이란 무엇인가?(2): 사회적 존재, 교제적 존재로서의 인간
둘째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은 개별자로 있는 인간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인간이요, 더불어 사는 인간이다. 그루뎀이 말하는 대로, "모든 형태의 인간 사회 가운데서 인격간의 통일성(interpersonal unity)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만드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것이다(창 1:27). 물론 창세기 2장이 잘 말해 주고 있는 바와 같이, 남자가 먼저 만들어지고 여자가 그 남자의 일부로부터 만들어졌지만 성경의 본문은 그 둘의 동등성과 적합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남자와 여자의 창조는 한 쌍의 남자와 여자만이 아니라, 그들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될 모든 사람들의 함께 함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이 중요하고 똑같이 귀한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처음부터 동등한 존재들로서 함께 하는 존재로, 교제적인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이런 교제적 존재됨은 일차적으로 각 사람의 남자 됨과 여자 됨에 대한 충실성과 이로부터 기인하는 혼인 관계를 시사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 속에는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고 계신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이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나 문화가 그들 나름대로 규정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정형화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이 사회나 문화가 정형화된 형태로 규정하는 것(stereo type)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에 염두에 두고 계신 남성성과 여성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인간의 참 모습의 모든 측면에 충실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인간 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타락 이전의 상황에서는 이것이 인간의 혼인까지를 함의했고, 타락한 이후에도 특별히 은사를 받은 자들 외에는 모두가 다 혼인 관계 내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혼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서로 돕도록 하신 그 뜻에 충실하는 일의 한 측면이다. 사람은 이렇게 전인적으로 전폭적으로 함께 살도록 창조된 것이다. 여기에는 그 두 사람 사이의 영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정신적, 심리적 관계, 육체적 관계 모두가 다 포함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혼인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인간 됨의 모든 측면에서 함께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관계는 이 관계성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한 모두 거룩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의도성에서 떠나면 그 모든 관계는 아무리 영적인 것으로, 정신적인 것으로 제시된다고 해도 타락한 관계임을 모든 면에서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관계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전제하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에는 거룩하나, 그 관계성을 떠나면 다 추하고 더러운 것이다. 인간의 관계성을 하나님-관계 안에 있으며, 또 항상 그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온전한 결합의 열매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녀들을 선물로 내려 주신다. 그래서 자녀들은 태의 열매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은 것(벧전 4:7)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성도들의 온전한 관계 가운데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언약의 자녀들이요, 거룩한 자들로 간주된다. 심지어 한 편만 예수를 믿는 경우에도 그 자녀는 거룩하고 깨끗한 것으로 언급되는 것이다(고전 7:14). 타락한 인간들의 인격적 결합 가운데서도 자녀들이 생명의 열매로 선물로 주어진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일반적 은혜가 풍성히 나타나는 것이다. 가족의 함께 함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교제적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의 한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은 이런 가족의 함께 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잘 자라나 사회의 구성원들이 되는 것이다.따라서 인간이 교제적 존재요 함께 하는 존재라는 것은 결국 인간의 온전한 사회적인 삶 가운데서 잘 드러나게 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의 이웃이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는 존재들이고, 그들의 생명을 지키는 자로 서 있는 그들과 함께 하는 자들인 것이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 그들이 아주 나이 많은 사람이든지, 사회에 전혀 기여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든지, 어린아이든지, 태아든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장애가 잇는 분이든지를 막론하고 -- 이렇게 형상적 관점에서 관찰하고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들은 모두가 합해서 다음절에서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바와 같이 피조 세계를 발전시키고 지배하는 일을 함께 하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2-3. 인간이란 무엇인가?(3): 통치적,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
그렇게 함께 하면서 사람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불어 사는 것 자체도 매우 귀한 사역이고 고귀한 일이나, 그것을 포함해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하는 존재로 이 땅에 존재하도록 창조함을 받았다. 창조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으로 축복하셨다(창 1:28). 교제하며 함께 함의 결과로 "아이를 낳는 것"[生育]도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이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蕃盛]과 온 땅에 가득 차게[充滿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의 일 부분이며, 그리하여 그들이 땅을 정복하고, 온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게[統治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인간이 행할 사명이기도 하다. 사실 이는 창세기 1장 26절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는 목적으로 말한 바의 것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이 온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종교 개혁 시대에 소시니안 주의자들이 잘못 주장하였고 오늘날 어떤 이들이 말하듯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 아니고, 그 통치함에서 하나님의 형상 됨이 드러나는 것이다. 맥도날드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다스림이 형상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머레이도 같은 의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사람은 하나님과 비슷하게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잘 다스리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로 인해 그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 박사가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사람의 통치는 하나님의 형상 됨의 필연적 결과이다". 이것은 칼빈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형상됨과 통치의 관계를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통치를 형상 됨의 한 부분으로 보려는 벌코프나 후크마의 견해 보다 더 논리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로 최초의 통치 행위를 잘 이행하였다(창 2:19f.). 이 일에 있어서도 아담은 하나님께서 동물들에게 부여하신 성격을 따라 이름을 지어야 했던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자의적(恣意的)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다. 그 이름들은, 머레이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의적인 상징이 아니고, 지성적 지각과 관찰력을 가진 이만이 제공할 수 있는 사려 분별에 의해 선택된 이름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명식에서 피조계의 질서성(the orderliness of creation)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옳은 것이다. 그리고 아담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온 세상을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잘 파악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잘 다스려야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요, 이 세상을 통치하는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요, 부왕(副王)인 것이다.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통치적인 존재(dominion being)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린 다는 것은 결국 이 세상 안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문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문화는 많은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미들톤과 왈쉬가 잘 말하고 있듯이, "세상과 인간의 상호 작용, 혹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작은 언제나 문화를 이룩한다." 이렇게 인간이 창조함을 받은 인공적인 힘을 가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계에 하나님께서 원하 시는 문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피조계와 관련하여 인간은 자신이 부여받은 창조성과 창의성을 발휘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문화를 만들어야만 한다. 따라서 인간은 문화적 존재(cultural being)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뿐만 아니라, 그 관계의 특성도 탐구하고,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의 특성도 잘 탐구하며, 그것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의미를 잘 발견해 내고 그것을 발전시킬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각 피조물의 특성을 탐구하고 그것들 상호간의 관계를 살피는 것은 가장 단순한 형태로부터 아주 복잡한 형태의 탐구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 신학자들이 흔히 "문화 명령"이라고 지칭한 창세기 1장 28절 말씀에는 온갖 학문적 과업도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아주 흥미롭게 잘 표현해 낸 이가 프란시스 나이절 리 박사이다. 그는 도이베르트의 기독교 철학을 반영하면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이 모든 학문적 영역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아주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물론, 리 박사의 묘사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함의, 즉 인간은 처음부터 폭 넓은 문화적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그 생각은 분명히 성경적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리고 학문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의 형태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게 이 세상에 드러내는 일도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즉, "미술, 음악, 학문, 정치, 경제 생활, 교회 생활, 교육, 기술, 대중 매체, 결혼, 가정 생활, 광고와 오락 등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방향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미들톤과 월쉬는 "문화적이 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인간적이 되는 것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동의하면서 "문화명령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원래 계획의 한 부분이다"고 말할 수 있다.
3. 인간의 인간 됨의 기독교 세계관적 함의
인간이 이런 특성들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어떤 함의를 주는 것일까? 그것은 첫째로, 인간이 다른 동물들로부터 진화되었다는 모든 관념을 거부하게 한다. 이제까지 논의한 모든 측면, 특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었다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진화적 입장에 반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된 것이므로 그는 그 이하의 수준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는 머레이의 말을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머레이는 진화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라는 입장을 표한다.
둘째로, 이것은 하나님을 잘 반영하는 형상 역할을 잘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자신의 몸의 사용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다른 사람과의 교제 관계에 있어서 그러해야 하며, 피조계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다스리는 데서도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장식된 몸으로 여기며 잘 돌보고 유지하며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노릇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제대로 된 교제를 하지 못하는 것이나,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문화가 가득하게 하지 못하는 것도 결국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연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 됨은 인간의 큰 특권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큰 의무요 과제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대리하며 나타내는 존재가 된다는 그 놀라운 영광과 특권을 생각해야 한다. 피조물 가운데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로 서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여기에 우리의 위엄과 중요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우리의 사명 수행의 동기와 능력이 나오는 것이다.
셋째로, 이는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마치 인간이 최고의 존재인 양 생각하는 인간 중심주의(humanism)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관련해서 인간 중심주의를 주장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주의적 입장(theocentric position)을 견지해야만 한다. 같은 기독교적 사상 중에서도 우리는 강력한 하나님 중심 사상을 선택하고 그런 방향으로의 진전을 힘써 나가야만 한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 버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근본을 저버리는 것이며, 따라서 비인간화되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의 다른 피조계와 관련해서도 우리는 결코 인간 중심주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온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마구 파괴하며 인간이 원하는 대로 이 세상을 마구 파괴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 중심적 입장을 잘 유지하면 인간이 이 피조계를 자기를 마음대로 파괴하거나 착취할 수 없다는 결론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 피조계를 다스릴 때에는 결코 그런 잘못을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조계와 관련해서도 극단적인 인간 중심주의를 주장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피조계를 잘 돌아보고 경작하며 지킬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신실하기 위해서 땅에 대한 우리의 개발은 (마치 여호와의 언약적 통치가 그러하듯이) 선하고, 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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