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
Ⅰ. 들어가는 말 성경의 여러 주제들 중에서 최우선 가는 주제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신명론을 들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야말로 기독교 최대의 메시지이며 영적 생명력의 원천인 만큼, 기독교인들은 소금에 절어진 채소같이 그 이름이 체질화되어 있어야 하고, 신앙의 본질로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과연 성경의 증거대로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가 그의 이름에 있는 만큼, 그 이름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믿고, 신앙해야 할 것이다.
Ⅱ. 하나님의 이름 7대 주제 1.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출3:13-15) 주제- 하나님 이름의 실체에 대하여 : 그 이름에 대한 영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분의 이름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하신 이름이요, 신령한 이름이요, 절대적인 이름이다.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해 계시는 자시오, 만유의 창조자시며 주관자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거룩한 영적 존재이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이름으로 계시함으로써 다른 영적 존재와 스스로 구별되셨다. 즉 그는 이름을, 자기가 지은 천사나 인간에게 자신의 정체성(Identiy)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표시로 삼으신 것이다. 따라서 천사와 인간은 더듬어 찾아도 만날 수 없었던 하나님을 그가 계시해 주신 이름으로 만나게 되었고, 그의 일에 동역함으로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받게 되었다. 여호와, 그만이 자존자요,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비존재”(죽음이 있는 것들)이다. “I am that I am", 즉 자신만이 자존자라는 선언 자체가 이미 다른 피조물들을 정죄하고 들어가니 두려운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그 이름에 의해 인간은 정죄받고 또 쫓긴다. 하나님의 일에 동역할 이스라엘을 이끄실 때도 그분은 자기의 이름을 “여호와”,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출3:18,5:3,7:16,9:1,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출3:15-16)등으로 거듭 계시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막고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게 하신 것이다. 십계명의 첫머리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시고, 우상을 금하시고, 그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못하게 하신 것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처방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 이름은 죄인에게 자유를 주는 이름이요, 의로우신 분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고백하며 나오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는 이름이다. 이렇게 한 분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여호와라 부르며,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라 부른다. 예수 이름을 영접할 때 그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이 내주하신다(요14:26). 하나님의 이름을 모신 곳이 성전인데(대하6:5-6:20), 성도의 몸을 성전이라 하신 것은(고전3:16-17) 예수 이름으로 오시는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과 성령의 불가분성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그 이름과 함께 계시듯 성령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충만이란 그 이름으로 완전히 지배당하는 상태, 즉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요17:4). 예수가 교회의 길이라면 그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성도의 과업 역시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 외에 달리 찾을 것이 없지 않겠는가? 그 지상 최고의 과업을 위해 적극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고, 찬양하고, 의지할 대 그 이름의 영광 또한 찬란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지 말라(출20:7) 주제-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신 이름이다. 따라서 결코 피조물의 이름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자기 이름을 아끼시는 그분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자.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그분의 자의대로 계시하셨다. 그분은 이름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 성품, 뜻, 하실 일 등을 나타내 보이셨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 앞”과 “하나님의 이름 앞”을 서로 같은 수준에 두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은 그 실체 앞에 무릎을 꿇은 것과 같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만유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계명' '복 ' '약속' 등도 그 이름을 위해서 주셨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 이름을 망령되이 취급하면 영원한 죄에 처해진다. 천사와 인간의 타락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데서 비롯되었다. 전자는 불신앙이요, 후자는 불순종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죄와 성령 훼방 죄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다(마12:31-32). 그 죄는 어느 한 날에 같은 보응을 받을 것이다. 예수의 사역은 그 이름을 모독한 마귀를 진멸하고, 인간의 불순종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신 기도에서도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라고 가르쳐 주셨고,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라고 하셨다. 성령 또한 예수 이름의 승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 이름으로 오셨다. 성도는 그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고 영화롭게 함으로써 신유의 능력도 나타낼 수 있다.
3. 하나님은 거룩한 이름을 아끼신다(사48:11, 겔36:21-23) 주제 - 이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기 이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분은 자의로 계시하신 이름에 스스로 제한 받으실 만큼 자기 이름을 자신보다 더욱 아끼신다.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이 스스로 “내 거룩한 이름”, “나의 큰 이름”이라 밝히셨으니 만유 가운데 그보다 더 크고 거룩한 것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와, 영광과, 권세가 응집돼 있는 이 크고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기 위하여 만유를 창조하시고 운행해 가시기에,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役事)를 규제한다. 피조물은 그 이름을 통해서만 절대자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25:11)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8:11)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 너희가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겔36:21,23)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9:19) 이스라엘의 거듭되는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인도하신 것은 그 이름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이 친히 자기 이름을 지키시니 아무도 그 이름을 침해할 수 없다.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라고 강조하신 말씀을 보아도, 그 이름의 영광이 다른 존재에게 옮겨가는 것을 용납지 않으시려는 그분의 확고한 의지와, 자신이 직접 그 크신 권세로 이름을 지키시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심감하게 한다. 아담 이후 거듭되는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그들을 붙드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시더니, 마침내 독생자를 죽는 데 내어 주시면서까지 그 이름의 명예를 회복하신 것을 볼때, 그 이름에 대한 그분의 열정과 집념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 자를 멸하기 위해서 피 흘리까지 대항하셨다. 성령도 성도로 하여금 그 이름을 기억나게 하고, 그 이름으로 살며,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도록 이끄신다. 따라서 성도는 예수 이름을 부르되 그분이 자기 이름을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것 같은 그러한 영감을 갖고 불러야 한다.
4.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시29:1-2, 시96:7-8, 대상16:28-29) 주제 -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매우 소중히 여기신다 : 그분의 모든 역사의 초점이 이름에 있는 만큼 그 이름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 진실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합당한 영광’ 이외의 모든 것은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모든 역사를 이루신다. 만유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것이나 그것을 사용하는 목적 체계, 곧 모든 피조물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은 예수를 위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 역시 영광으로 가득 찬 그 이름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천사와 인간 같은 피조물들에게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직분을 주시고, 그 이름에 순종하여 살게 하셨다. 이 창조 목적에서 벗어나서 그분과 동등해지려 한다거나, 그 이름에 불순종하게 되면 사망을 피할 길이 없다.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고, 망령되이 취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매우 겸손해야 한다. 만일 이 말씀을 들을 때 ‘이기적이며 독선적인 하나님’이 연상된다면, 그것은 조물주와 피조물을 대등한 관계로 착각한 연고이다. 하나님은 자애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할 만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 자신밖에 없다. 예수는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 표본이시다. 그는 아버지 품속에서 나오셨기에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알고 계셨으며, 겸손과 순종으로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으셨다. 성령은 성도에게 에수의 본을 좇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그가 받으신 영광에 동참케 하신다. 따라서 성도는 전적으로 성령께 순종하고 의지함으로 그분과 일체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에수의 본을 좇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에게 임할 저주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자의 받을 축복을 비교해보자(말2:2-3;4;2)
5. 예수 이름을 믿고 영접하라(요1:12) 주제 - 하나님의 이름과 성전의 경륜 : 하나님이 이름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셨고 그가 아버지께 받은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남겨 두셨다. 예수 이름을 믿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의 경륜이 하늘에서 광야의 성막으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성도들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서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그의 자손들과 영적 동행을 위해서 광야에 하늘에 모형인 성막을 짓게 하시고, 그곳에 “여호와”란 이름을 두셨다. 그 이름은 섬기는 이름일 뿐 개인이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섬길지라도 자기 영혼에 속죄, 거듭남, 구원 등을 체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 되신 하나님의 아들은 그 안에 ‘예수“란 이름을 담고 오신 하늘의 참 성전이다. 참 것 앞에서 모형과 그림자는 마땅히 사라져야 하기에 ”이 성전을 헐라“ 하심으로 손으로 지은 성전의 효력을 없이하시더니, 이제는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을 성전 삼으시고 그 안에 성령으로 내주하신다. 에수 이름을 믿고 영접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얻는다.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에 좌정하셨으니 영접할 수 없으나, 그가 두고 가신 이름을 믿고 영접하면 실체이신 그분을 모신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자기 본위적인 신앙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신 성전답게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고 그 이름의 영광을 드러낼 때, 영적 생명력이 샘솟듯 할 것이며, 악의 세력들을 능히 물리칠 것이며, 증언된 직분도 잘 감당케 될 것이다.
6. 예수 이름으로 간구하여 권능을 받으라(요14;12-21) 주제 - 신앙의 대 전제, 신앙의 지상 목표 :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받은 자라면 반드시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입에서 귀로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심령까지 파고들어 생명력을 발휘해야 한다. 무능한 것을 정상으로 아는 것은 마귀의 미혹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전도는 빗나갔다. 그 이름으로 능력을 행사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그가 곧 예수의 제자이다. 전도란 불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동정심의 발로가 전도의 동기일 수는 없다. 멸망하는 인간이 불쌍해서 하는 인본주의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영광의 찬란함 때문에 그 이름에 압도되어 외치고, 부르짖고, 증거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아서 하는 그것이 바로 올바른 전도이다. 전도의 효과가 적은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수준이 그만큼 낮아서 그렇다. 인간 구원은 목적이 아니라 은혜(선물)이다. 인간의 공로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분 보시기에는 여전히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유한한 인간의 대단한(?) 몸짓조차 언제나 제로일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격이시다’라는 말을 곡해하여 그분의 속성을 인간의 속성 정도로 비하시켜서는 안 된다. ‘인간보다 나은 하나님’ 정도로 알고 있기에 몹시 이해 타산적이며, 교만에 빠진다. 은혜는 전적으로 그분의 권한이다. 그분은 “은혜 줄 자에게 은헤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출33:190 또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신다”(롬9:18). 과연, 아들의 목숨까지 주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소유물 중 무엇을 드린다한들 그 교환조건으로 그분을 흡족해 하실만한 것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참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분의 이름을 무시한 사랑은 헛것이다. 그 이름을 위한 사랑만이 그 날에 진가를 인정받을 수 있다. 박애주의자들은 그 이름의 의도를 무시한 채 오로지 사랑만을 지상(至上) 과제로 삼음에 따라 진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누구를 사랑할 만한 존재가 못된다. 그 이면에는 위선과, 거짓 사랑과, 외식이 가득차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목적이 담긴 사랑, 곧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만이 참사랑이라 하겠다(마22:39).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구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 이름 드러내기를 원하셨으면 주신 기도의 처음부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했겠는가! 신자는 그분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광 받으시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해야 한다. 그분이 원하시는 분량만큼 그 이름의 역사가 나타날 것을 사모하고 적극적으로 구하여, 그 이름이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 신앙 생활은 자기 영혼의 유익을 도모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영혼에 가장 큰 유익을 가져다 줄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가장 먼저, 제일 많이, 끊임없이 간구하는 것! 그것이 자기 영혼을 도모하는 최선의 방책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했다. 생명이 있는 곳은 언제든지 적극적이며, 자발적이며, 동태적이다. 그런데 게을러서 간구하지 않는 것, 무사안일에 빠져서 중간 상태나 유지하려는 것 등은 그 자체가 죄악이다. 신앙 생활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마12:30). 하나님은 게으른 것과 악한 것을 동일하게 보시고 저주하신다. 그러니까 열심히 기도하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또 한 번 구한 것에 대해서는, 그분의 명예를 걸고 기도한 것인 만큼 그 결과에 관심을 갖고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 한다. 응답에 무관심한 것은 그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는 증거이다. 그 이름으로 구한 것에 대한 영광을 경험하기까지 포기하지 말고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응답된 기도는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처음 구할 때의 자세를 변질시키지 말고 그분과 약속한 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신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케 될 것이다.
7. 예수 이름을 알게 하라(마28:18-20) 주제 -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가 그 이름을 전한다. 예수 이름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그 이름을 최고로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모든 일의 지상 목표는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므로 다른 어떤 계명도 이보다 우선할 수 없다. 그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하는 일이야말로 으뜸가는 계명이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요, 믿는 자에게 허락된 최고의 특권적 직분이다. 하나님이 거룩하고 영원하신 이름을 전파하는 일을 사람에게 맡기신 것은, 성령으로 그 이름의 영광을 체험한 자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셨기 때문일 것이다. 전하는 자가 하나님의 이름에 감격하여 억제하지 못하고 터처 내는 생명의 발로가 전도이기에 천사가 아닌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없는 천사는 신자들에게 있는 무거운 심정을 영원히 가질 수도, 맛볼 수도 없다. 주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은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고 마지막 소원도 그 이름을 천하 만민에게 전파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성도의 최고의 봉사는 그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다양화되고 급변하고 있으니, 영원히 변함 없는 그 이름과 말씀을 전하는 증인들의 발걸음도 빨라져야 하고 그 일에 목숨을 다해야 할 것이다.
Ⅲ. 결론 예수의 임하신 목적, 그가 하신 일들이 모두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었건만, 장작 그의 제자이기를 갈망하는 우리들의 뒤를 돌아볼 때, 그분의 관심사와는 상관없이, 그저 헛된 영광을 취하여 서로 격동하고 투기하며, 자기 욕심에 이끌려 다니기나 한 것이 아니었는지 두렵고 떨린다.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를 성령 훼방 죄를 동일시하시고,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않고, 남발한 모든 행위들이 실상은 그 이름의 거룩함을 거스리는 것이라는 말에 우리의 지난 삶들을 더듬어보지 않을 수 없다. 성도에게서는 주님이 거는 기대가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러한 이적들이 동일한 이름을 기업으로 받은 우리들에게서도 속출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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