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예배
거룩하게 되는 방법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 대화에 거룩하게 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 하류 부근에서 세례를 베푸신 후 갈릴리로 가시고 싶어했습니다.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거쳐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 땅을 밟는 다는 것이 더러움과 수치를 느끼게 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그리고 그 두 왕국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 가게 되었습니다. 주전 721년에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을 때 사마리아에는 여러 잡다한 이방인들이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에 많은 이교적인 것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 갔던 남왕국 사람들은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왕 고레스에 의해 고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성전건축도 허락 받게 되었습니다(대하 36:22, 스 1:1-8). 귀국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건축을 협력하기 원했지만 이교화 되었다는 이유로 함께 성전 짓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화가 나서 성전건축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바사국 높은 사람에게 뇌물을 주기까지 했습니다(스 4:1-6). 또한 그리심산에 따로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이런 반목이 계속 되자 결국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는 서로 상종을 꺼려하게 되었고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지름길이 되었지만 돌아가는 것이 그 당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사마리아 땅 한 가운데로 지나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남의 눈치도 그러했지만 본인들 스스로 가기를 꺼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승이 가는데 제자가 어찌 그 길을 마다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신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 여인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여인을 만난 곳은 우물이었습니다. 여인이 우물에 물 길러 온 시각은 아침시간이 지난 뜨거운 햇빛이 쬐는 시간이었습니다. 날씨가 뜨거워지는 시간엔 아무도 물 길러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일부러 그 시간을 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 길러 온 여인에게 “내게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보아하니 유대인의 남자 같은데 이방여인에게 서슴없이 물을 달라 한 예수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 보았습니다. 그리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요 4:11)라고 되물었습니다. 사실 우물에는 물을 길을 수 있도록 바가지가 걸려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수돗물이 공급되기 전에는 마을마다 우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엔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바가지가 줄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우물에도 공용으로 사용되는 바가지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바가지가 없다고 딱 잡아 뗐습니다. 여인은 ‘어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바가지에 입을 대겠습니까?’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생수에 대해서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그 ‘생수’가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마시는 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 4:15)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말씀을 하셨지만 여인은 육적인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대화가 순조로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육적인 생각을 영적으로 바꾸셨습니다. 여인의 생각이 육적인 것에서 영적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여인의 죄를 들춰냈을 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마음에 숨어 있는 죄를 들춰내길 원하셨습니다.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요 4:17)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즉시 여인의 죄를 밝히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7-18)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송두리째 다 알고 계심을 인식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죄를 숨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되었을 때 여인에게 나타난 반응은 부끄러움도 아니었습니다. 수치도 아니었습니다. 육적인 생각이 영적으로 바뀐 것뿐입니다.
사람에게 들춰진 죄는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러난 죄악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기 이전에 영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 받게됩니다. 방언을 받을 때에는 반드시 회개의 역사가 있습니다. 방언을 받을 때에도 회개의 역사가 필요한데 성령의 불을 받기 위해선 회개가 얼마나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께서 여인의 죄를 들춰냈을 때 여인은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될 때 비로서 거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거룩하기 위한 준비작업입니다. 거룩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죄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영과 육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것인데 이것은 영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예배가 아닌 영적인 예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에 많은 혼돈과 오해를 가져 옵니다. 어떤 교파는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 다른 교파는 하나님께서 찬양을 좋아하시므로 찬양을 드리는 것만이 예배의 전부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으로 예배를 받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예배당에 옵니다. 육체가 가는 곳에는 영도 함께 동행합니다. 왜냐하면 영을 담을 그릇은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육체 없는 영은 거할 곳이 없지만 영이 없는 육체는 죽음뿐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살 먹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을 때 누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신대”(눅 8:54-55)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멋진 표현입니다. 영이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이전에 그 아이의 육신 속에 거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영이 떠나면 사람은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영은 육체와 함께 동행을 합니다. 육체가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함께 갑니다. 육체가 술집에 가면 영도 함께 술집에 갑니다. 육체가 성적인 타락을 범하면 영도 함께 그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염두 해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육체와 함께 거하는 영은 성령이 아닌 인간의 영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영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스스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로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영 스스로도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
우리의 육체 안에 거하는 영은 두 가지 선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사탄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이 그 육체 안에 거하게 되지만 반대로 사탄을 선택하게 되면 사탄의 영이 그 육체 안에 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늘 우리 육체 안에는 하나님의 영과 사탄의 영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17-24)
바울이 깨달은 법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평생에 걸쳐 이 ‘영적 전쟁’을 하였고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길 원합니다.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길만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성령의 불을 받는 길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내 영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것을 받아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되고 성령의 불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적 예배
영적 전쟁에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는 무엇입니까? 회심 후 평생토록 영적 예배를 드렸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영적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적예배는 이런 예배를 말합니다. 첫째, 영적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여야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예배여서는 안됩니다.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예배여서도 안됩니다. 둘째, 영적예배는 거룩한 제사여야 합니다. 거룩한 예배는 죄가 없는 예배입니다. 온전히 지은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영적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영적예배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지난 날에 아무리 열심히 헌신했어도 지금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예배는 현재형입니다. 지금 영적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 예배는 육적 예배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영적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예배이고 육적 예배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예배를 드릴 때 영적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육적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거룩한 제사를 드리지만 육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더러운 제사를 드립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제사는 살아있지만 육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제사는 죽어 있습니다. 영적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는 사람도 기뻐하지만 사람이 기뻐하는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육적예배를 드렸던 사람 중 하나는 사울왕입니다. 육적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에게서 성령을 제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삼상 16:14)
육적예배의 최후는 이런 것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죄를 범했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적 예배만이 우리로 하여금 영적 전쟁에서 승리케 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받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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