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문서와 외경
사해문서(死海文書, Dead Sea Scrolls)
1947년 5월의 어느날, 무하마드라는 베드윈(Bedouin) 소년이 염소의 수를 헤아리다가 한 마리가 부족한 것을 알고 염소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사해 서쪽 해안 절벽 지대의 한 동굴을 발견하고 혹시나 염소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확인해 보았다. 입구는 좁았지만 굴은 들어갈수록 넓어졌다. 동굴은 길이 8.5m, 폭 3m, 높이 3m나 되는 꽤 큰 공간이었다. 그 동굴의 한쪽 구석에는 높이 60cm, 지름 25cm의 큰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무하마드와 그의 친구 아메드는 조심조심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폭이 44cm, 길이가 1~8m나 되는 양피지의 두루마리가 들어있었다. 뭔지 모를 글자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는데 골동품상에 팔면 푼돈은 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한 소년들은 그 두루마리 8개(무하마드가 5개, 아메드가 3개)를 들고 동굴을 나섰다.
두 소년은 베드윈 족장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다. 아메드는 한 골동품 가게에서 싼값으로 두루마리 3개를 팔고 돌아갔다. 무하마드와 족장은 돈을 더 받을 욕심에 여러 가게를 기웃거렸다. 아주 귀한 것이라고 우기는 족장의 말에 상인은 알아보고 나서 값을 매기자고 하였다. 족장과 무하마드는 그 상점에 두루마리를 맡기고 마을로 돌아왔다. 상인은 그 길로 이스라엘의 성 마르코 수도원으로 대주교 마르아타나시우스 사무엘을 찾아갔다. 한동안 두루마리를 살피던 대주교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다. 대주교는 두루마리에 쓰여진 글은 히브리(헤브라이)어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5파운드에 그것을 사겠다고 말했다.
사무엘은 이것이 어쩌면 구약성서의 원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약은 유태인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경전이다. 이것은 야훼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인 이스라엘과 맺은 약속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야훼의 계시를 담고 있다. 그때까지도 그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예루살렘의 아메리카 동방 연구소의 트레버 박사를 찾아갔다. 확대경으로 두루마리를 관찰하던 트레버는 그것이 틀림없는 구약성서의 원본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때까지 서기 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Leningrad Codex)이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였으며 이 사해 사본은 그보다 무려 1100여년이나 앞선 서기 100년을 전후하여 기록된 것이었다.
그들은 두루마리를 잘 다듬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무려 아홉 달이나 걸렸다. 1948년 2월, 그 사진은 저명한 고고학자들에게 보내졌다. 그후 한달 쯤 지난 3월 15일, 사무엘 대주교는 미국 존 홉킨스 대학 고고학 교수인 알브라이트 박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편지에서 그것이 구약의 원본이며 기원전 100년에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그 무렵 유명한 성서 학자인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장 E. 수케닉 박사도 두루마리 3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메드가 판 두루마리였다. 그 또한 그것이 구약 원본임을 알고 있었다. 나머지 두루마리들만 손에 넣는다면 이것이 구약 원본임을 증명하는 일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 때 나머지 5개를 사무엘 대사교가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두 사람이 만나 8개의 두루마리를 가지고 두 달 동안 샅샅이 조사를 하여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수케닉은 그것이 구약의 이사야 서 원본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에세네 파의 공동체 계율, 빛의 아들과 어둠의 아들 싸움, 감사 찬미가 모음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 후 두루마리의 가치가 인정되었으나 1948년 초에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이 동굴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를 할 수 없었다.
1949년, 중동전쟁이 끝나고 사해지방은 요르단의 땅이 되었다. 그 해 2월 15일, 요르단 고고학연구소의 L.하딩과 예루살렘에 있던 프랑스 신부 R. 브오(R. De Vaux)가 사해 일대 탐험에 나섰다. 브오 신부는 무하마드와 아메드를 데리고 두루마리를 발견했던 쿰란(Qumran) 동굴로 갔다. 브오 신부는 그 곳 주위에 에세네파가 살았던 자취가 남아 있을 것이며 그런 보물을 한 군데의 동굴에만 감추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했다. 중요한 것일수록 만일에 대비하여 여기저기 흩어 놓았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브오 신부의 짐작은 적중했다. 탐험대는 동굴을 열 개나 더 찾아냈고 그 안에서 수백개의 두루마리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바위 아래 깊은 땅 속에서 옛 도시의 흔적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두 겹으로 된 성벽 안에는 저수지와 급수시설,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곳이 요세푸스를 비롯한 고대의 역사가들이 언급하고 있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의 집단 생활지역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 곳에는 키르바트 쿰란(Khirbat Qumran)이라 불리는 수도원 건물과 대형 식당, 주방, 성서를 베끼는 필사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에세네(Essenes)파는 바리사이파나 사두가이파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한 갈래였다. 이 무리는 "정의의 스승(Teacher of Righteousness)"이라 불리는 사람이 이끌었으며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가 율법과 제사 등 형식과 권위에 치우친데 비해 에세네파는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을 내세워 유대 율법서를 지키고자 했다.
이들은 재산과 예배, 독서와 식사를 모두 함께 했다. 초기 기독교의 형태가 스님들이 머리를 깎고 수도에만 정진하던 것과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에세네파의 생활이 그랬다. 대부분이 남자인 신도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세상의 종말에 대비해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다. 윤리와 종교적 순수성을 중시하는 엄격한 삶이었다.
이들은 최후의 심판의 날이 오면 '빛의 아들'들이 '어둠의 아들'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고 믿었다. 흰색 복장에서부터 종교 의식까지 이들의 모든 일상사는 다가올 최후의 결전에 맞추어졌다. 영광스런 새 시대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그들은 200년동안 금욕, 기도, 하나님의 말씀 전달과 읽기만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던 세상의 종말은 끝내 오지 않았다. 서기 68년, 그들은 로마군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무참히 짓밟고, 끝까지 항거하는 마사다 요새를 무너뜨린 뒤 유태인들을 수천년 방랑의 길로 내몰았다. 사해문서들은 이 때 로마 10군단을 피해 동굴에 감춰진 것으로 보인다.
사해문서 중 완전한 것은 6권, 비교적 잘 보존된 것은 10개뿐이었다. 나머지는 수천 개의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이들 중 약 1/4이 구약 사본이며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여 있었다. 대부분이 양피지 위에 잉크로 쓰여져 있고 파피루스에 쓰여졌거나 동판에 새겨진 것도 있다. 이 두루마리들에는 에스더(Esther) 서를 뺀 구약성서가 모두 들어있다. 메시아의 서, 하박국의 주석서(註釋書), 계율의 지도서, 라메크의 묵시록 등도 수록되어 있었다. 이 사본들은 제목만 알려졌고 실물은 사라졌던 것이다. 이 곳에서 나온 구약성서는 오늘날의 것과 거의 같다.
이 두루마리들이 쓰여진 연대가 문제가 되자 여러 고대 문헌을 통해 연대를 추정하는 한편 양피지에 대한 화학 분석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략 기원전 400~5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사용된 언어는 기원전 100년의 것이었다. 게다가 쿰란에서 에세네파를 이끌었다는 '정의의 스승'이 누구인지 아직까지 수수께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라고 보기에는 연대의 차이가 확연하다. 그렇다면 예수가 단 한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일까? 어떤 사람은 그 구세주가 세례 요한일 것이라고 하지만 어떠한 증거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나 예수도 이 종파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크리스트교가 예수라는 한 인물에 의해 성립되었다기 보다는 오랜 세월 축적된 에세네파의 교리를 예수가 받아들이면서 성장한 것일 수도 있다.
사해문서는 수케닉 박사의 아들이자 1963년 마사다 요새를 발견한 야딘(Yadin)이 사무엘 대주교의 두루마리를 25만 달러에 사들여 그 모두를 이스라엘 정부에 기증했다. 사해문서 중에서 주요한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의 "성서관(聖書館)"에 수장, 전시되어 있다.
내용출처 : http://chunma.yu.ac.kr/~m0015182/faith/dead_sea_scrolls.htm
희랍(헬라)어 성서와 제1, 제2경전
이스라엘 역사는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구원의 역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의 역사 중 B.C1000년경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이 죽자 이스라엘은 두 왕국으로 분리됩니다. 북쪽은 이스라엘이고 남쪽은 유다인데 유다는 정통 다윗 왕가를 계승한 나라이지만 이스라엘은 다윗 왕가를 이탈한 나라가 됩니다(Ⅱ열왕기 17장).
그 이후 이들은 야훼를 배반한 죄로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패망하고 유다는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해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Ⅱ열왕기 25장). 이것이 곧 바빌론 유배입니다. 이때 성전은 폐허가 되었고 예배 의식도 중단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까닭이 계약에 불충실한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자기네 죄를 깨닫고 물려받은 유산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과 주석가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성서에 등장하는 율법학자 즉 랍비들(개신교: 서기관)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유배 기간 동안 자기들의 죄를 통회하는 랍비들에 의해 그들의 성서는 계속 기록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후 B.C333년 희랍의 알랙산더 대왕은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소위 세계를 통일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지중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공용어로서 희랍어를 사용하게 되지요.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때부터 랍비(서기관)들에 의한 성서 기록은 히브리어뿐 아니라 희랍어로도 쓰이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나라를 잃고 떠돌이 하던 유다인과 알랙산드리아 지방에 이민해 온 많은 유다인들과 특히 그 후손들은 히브리말을 잊어 버리고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어 버리게 됩니다. 더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들이 자기 민족을 구원하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뿌리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졌으므로 원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할 필요가 절실히 요구되어 B.C250년경 희랍어에 정통한 유다인 학자 70명이 알랙산드리아에 모여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하게 되어 완성한 후 이를 70인역이라 부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순수 히브리어 성서에서 희랍어로 번역된 39권과 희랍어로 쓰여진 7권을 합쳐 총 46권의 성서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 340여년간 사용해 오던 이 성서는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AD(주후)70년에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티나에서 쫓겨난 후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여긴 율법 학자들은 AD90년경 유대인들이 율법을 간직하고 유대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려는 취지에서 히브리 언어를 강조한 40권의 히브리어 성서 중 원본을 찾지 못한 1권을 제외한 39권만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희랍어로만 쓰여진 7권의 성서는 정경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이때부터 구약성서의 정경이 두 종류가 나타나게 됩니다.
* 팔레스티나 유대인 정경 : 제1정경(히브리 정경)
* 헬라(희랍)문화권 유대인 정경 : 제1경전 및 제2경전이라 불리는 정경 목록 - 바룩서, 토비트서, 유딧서, 마카베오 상․하, 집회서, 지혜서 (7권)
* 이중 마카베오 상권은 원래 히브리어로 쓰여졌으나 원본이 분실되고 희 랍어 번역본만 남아 있다고 하여 이것마저 제1경전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집센 유다인의 한 모습을 또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과 사도시대 교부들 중 누구도 제 2경전이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원래 제2경전이라는 용어는 중세기에 시에나의 식스토(1528-1569)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고 초기 교부 시대에는 제1경전, 제2경전 구분 없이 그저 “교회의 책들(Libri ecclesiastici)”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소위 종교 개혁자들은 16세기 이르러 제 2경전을 성경에서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또 1534년 독일어로 번역한 구약성서 끝에 제2경전을 "외경(Apokrypha)" 으로 간주하여 부록으로 붙여 놓았습니다.
원래 외경이란 용어는 “감추어진” 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희랍어, Apokryphos)에서 나온 말로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감추어진”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이것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정경(즉 교회의 책들)이외에 유다인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던 책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을 “외경”이라고 하며 신앙생활에 유익이 된다고 믿고 있으나 개신교에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를 “위경(僞經)” 즉 “거짓된 책(Pseudepigrapha)” 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이 성서에 관하여 현재까지 가톨릭과 개신교간에는 그 용어상 차이가 있어 여기에 표시합니다.
가톨릭 신교
제1경전 정경
제2경전 외경
외경 위경
※최근 꿈란동굴에서는 히브리어로 쓴 제2경전이 일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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