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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스라엘의 결혼제도

하나님아들 2017. 11. 11. 01:03

 이스라엘의 결혼제도



 

1. 일부일처제인가 일부다처제인가?
성경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였으며 이 둘의 하녀들과 성적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성경시대 이스라엘에서 일부다처제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한 명 이상의 부인을 거느릴 수 있을 정도로 부의 여유가 있을 경우에만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다. 많은 부인을 둘 수 있는 것은 왕실 정도에 불과하였다. 다윗은 미갈, 아비가일, 밧세바 등의 여러 부인을 거느렸고, 솔로몬 역시 부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많은 왕비들을 두었다.

비록 성경에서 일부다처제도가 허용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결혼의 원칙은 일부일처 제도였다. 최초의 인간 창조와 관련된 성경 내용에서는 일부일처제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제도임을 밝히고 있다 (창 2:21-24). 셋 계열의 가장들은 모두가 한 아내를 두고 있다. 예를 들면, 노아의 아내는 하나이다 (창 7:7). 일부다처제도는 타락한 가인의 계열에서 나타난다. 라멕은 두 아내를 두었다 (창 4:19).

아브라함 역시 한 아내를 두었다. 본처 사라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였지만 그것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라의 제안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창 16:1 이하). 아브라함은 그두라와 결혼하였는데 (창 25:6), 그것은 사라의 죽음 이후이기 때문에 그두라는 아브라함의 합법적인 아내로 볼 수 있다. 창세기 25:6에서 아브라함의 첩을 복수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갈과 그두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구약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한 명의 부인만을 두어야 했다 (레 21:13-14). 노아, 이삭, 요셉, 모세 등과 같은 구약의 다른 중요한 지도자들 역시 일부일처제를 지켰다. 유대인 랍비들은 한 명 이상의 부인을 두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야기 시킨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창세기 30장의 레아와 라헬; 사무엘상 1장의 한나와 브닌나).

<하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본처가 아이를 갖지 못할 경우 남편은 첩을 둘 수 있다. 그러나 본처의 여종을 첩으로 둘 경우 남편에게는 다시 첩을 둘 권한이 없다. 본처에게 자녀가 있다 하더라도 남편은 첩을 둘 수 있는데, 첩은 언제나 하나만 둘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 첩은 본처와 동등한 권한을 갖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와 왕조시대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모든 제한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기드온은 많은 부인들과 최소한 한 명의 첩을 두었다 (삿 8:30 이하). 두 명 이상의 아내를 맞이하는 중혼은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었고 (신 21:15 이하), 왕들은 후궁들이 기거한 거대한 후궁실 (Harem)을 두기도 하였다. 탈무드에 따르면, 일반인들은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었고, 왕들은 18명의 아내를 맞이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중혼제도의 확대는 몇 가지 원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 번째는 유익성의 고려이다. 즉 여러 명의 부인을 둠으로 가정일을 분담할 수가 있었다. 두 번째는 많은 자녀를 두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이었다. 자녀를 많이 두는 것을 큰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세 번째는, 고대 근동지방에서 여자가 너무 일찍 결혼하기 때문에 일찍 노쇠하여 여자의 미모가 빨리 사라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일반 가정에서는 일부일처제도가 지배적이었다. 왕조시대 전체를 통하여 사무엘의 가정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중혼의 경우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당시 사회상을 드러내는 지혜서에서도 일부다처제도를 말하고 있지 않다. 여인들이 가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언급하고 있는 여러 구절에서 엄격한 일부일처제도의 배경을 찾아 볼 수 있다 (잠 5:15-19; 31:10-31; 전 9:9 등).

2. 결혼을 위한 중매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결혼은 결혼 당사자들이 상대방을 결정하는 제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결혼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사랑이 따라오는 결혼제도 임을 보여준다. 성경시대의 결혼에서 남녀간의 사랑보다는 의지가 더 중요시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는 비교적 안정된 결혼 본보기(패턴)를 지니고 있었다 (창 24:67). 에서는 부모의 뜻에 거슬리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켰다 (창 26:34-35). 중매제도의 결혼이긴 했지만 부모가 자녀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거나 (창 24:58) 결혼 전에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창 29:10-20).

신랑을 따라온 친구 (요 3:29)는 신랑과 신랑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신부의 아버지가 보낸 대표자와 협상을 벌린다. 이들이 벌리는 협상의 대상은 여자의 가족에게 지불할 보상금(모하르)와 신부의 아버지에게 지불될 결혼 지참금이다. 신부의 아버지는 신의 받게 되는 결혼 지참금의 이자를 활용할 수는 있었지만 그 지참금을 쓸 수는 없었다 (창 31:15). 이 지참금은 딸이 과부가 되거나 이혼을 당하게 될 경우를 위해 보관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신랑이 가난하여 돈을 지불할 형편이 안되면 일로 봉사하는 것 (창 29:18)이나 원수들을 죽이는 일 (삼상 18:25) 등과 같은 다른 방법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결혼 지참금의 일부는 동전으로 지불하여 여자의 머리장식에 붙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동전들은 결혼 반지와 같은 상징물이 되었음으로 이런 동전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눅 15:8-10). 결혼 준비의 하나로서 신부의 아버지는 신부에게 결혼 선물을 주기도 하였다 (창 24:59-61; 삿 1:12-15)
결혼은 가능한 한 같은 동족 내에서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한 배우자를 그의 동족에서 구하기 위하여 그의 종을 보냈었다 (창 24:3-4). 야곱 역시 아내를 얻기 위하여 같은 장소로 보내졌었다 (창 28:2; 29:19). 삼손의 부모가 걱정하였던 것은 삼손이 자기의 동족에서 아내를 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삿 14:3). 때로는 결혼이 동족 이외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창 41:45; 룻 1:4). 이러한 결혼은 통상 정치적 이유 때문에 있게 되었다 (왕상 11:1; 16:31). 그러나 이러한 결혼은 결코 용인이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른 종족에서 온 사람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며 이러한 일들이 종교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왕상 11:4). 가족 내에서의 친족간 결혼은 금지되었다. 가족간의 근친결혼을 금하는 법들은 레위기 18:6-18에 제시되어 있다.

3. 약혼제도
결혼을 위한 중매가 일단락 되면 뒤이어 약혼이 이루어진다. 유대인의 약혼은 오늘날의 약혼과는 달리 훨씬 더 구속력을 갖는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약혼한 남자의 경우,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군 징집에서 면제가 된다 (신 20:7). 여자가 약혼을 한 이후 다른 남자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면, 그 여자는 약혼 이전의 여자처럼 (신 22:28-29) 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약혼한 그 여자는 약혼한 남자에게 이미 소속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면 죽음의 벌을 받게 된다 (신 22:23-27). 그런 강간사건이 성안에서 일어나면 남녀 모두 돌에 맞아 죽게 되고, 그 사건이 성밖의 외딴 곳에서 일어나면 남자만 사형을 당하게 된다.

약혼은, 다윗과 미갈이 약혼할 때 사울이 한 말처럼, “You shall be my son-in-law" 라는 공식적인 선언으로 이루어진다 (삼상 18:22). 약혼은 법적인 처리에 의해서만 파기된다. (약혼이 파기되는 것은 실제적으로 이혼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약혼 파기가 있을 수 있는 근거는 간음이다 (신 22:24). 약혼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양가 부모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모하르’ 액수의 결정이다. 일반적으로 모하르의 액수가 결정되면 즉시 그 금액을 지불하였던 것 같다. 약혼기간은 대략적으로 1년 정도 지속된다. 이 기간동안 남자는 집을 준비하게 되고, 여자는 결혼예복을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신부 집에서는 결혼 잔치를 준비한다 (참조. 요 14:1-3).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상태에서 마리아가 잉태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요셉은 공개적으로 마리아의 잉태된 사실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요셉에 의한 잉태가 아닌 것이 드러나게 되면 마리아는 간음한 여자로 몰려 돌에 맞아 죽게 된다.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요셉의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꿈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성 때문이었다. 이런 성품과 신앙을 갖춘 요셉을 하나님은 선택하셔서 예수의 양육을 맡기셨다 (마 1:18-20).

4. 결혼식
결혼식에는 몇 가지의 중요한 요소가 있었다. 결혼 자체는 신랑과 신부에게 주어지는 축복문(창 24:60)을 제외하고는 비종교적 행사였다. 순수 민간 행사였던 결혼을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언약’(베리트)과 연결시켰다. 말라기는 결혼한 여자를 ‘맹약한 아내’라고 불렀다 (말 2:14). 잠언에서도 결혼을 ‘하나님의 언약’(잠2:17)이라고 칭하였으며 에스겔은 시내산 계약을 결혼계약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겔 16:8) 그러므로 결혼식에는 결혼 계약문을 만들어 그것을 받아들이는 행사가 포함되었다. 이 계약문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성경은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엘레판틴에서 발견된 결혼계약서(주전 4세기경) 내용에 따르면, 그 내용은 ‘그녀는 나의 아내요 나는 영원히 오늘부터 그녀의 남편이라’ 이다. 또한 유다 광야에서 발견된 내용에 따르면 (주후 2세기), 그 내용은 ‘너는 나의 아내가 되라’ 이다. 이러한 절차는 오늘날의 유대인 결혼식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놀라운 사실은 랍비나 제사장이 결혼식에 필수적으로 참석하는 일이 요구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는 점이다.

결혼식은 결혼 예복을 입는 일이 포함된다. 신부는 실제적으로 여왕처럼 치장을 하였다. (계 21:2) 신부는 목욕을 하고,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나 혹은 이웃에게서 빌릴 수 있는 만큼의 보석으로 머리를 장식하였다. (시 45:14-15; 사 61:10; 겔 16:11-12) 신부는 또한 면박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4:1, 3; 6:7) 이 면박은 결혼식을 올리는 장내에 들어갈 때까지 벗을 수 없었다. 그래서 리브가는 자기의 신랑될 이삭을 만나게 되자 곧 면박을 꺼내어 얼굴을 가리었다. (창 24:65) 야곱의 첫 결혼에서 라반이 라헬을 대신하여 신부를 레아로 바꿀 수 있었던 것도 면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 29:23 이하) 신부의 얼굴을 가렸던 세마포 면박은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도 벗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야곱은 날이 밝을 때까지 신부가 라헬이 아닌 레아임을 알지 못했다. (창 29:3) 신부에게 옷을 입혀 주었던 여자들은 신부의 친구들로서 신부를 호위하여 따라간다. 신랑 역시 아름다운 옷을 입고 머리에 보석으로 장식한 관을 썼다 (아 3:11; 사 61:10). 그리고 신랑의 주변에도 신랑의 친구들이 따라온다 (요 3:29). 결혼식 예복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이다. (렘 2:32) 신랑과 신부는 모두가 왕과 왕비처럼 행동한다.

결혼과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낮이 끝날 무렵 있게 되는 결혼 행렬이다. 신랑은 신부를 신부의 집에서 자기 집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자기 집을 출발한다. 이때쯤 신부는 면사포를 쓰고 있다. 이 면사포는 적당한 때에 벗겨서 신랑의 어깨 위에 올려놓게 된다. 그러면서 ‘다스림이 신랑의 어깨에 있도다’ 라고 선언하게 된다. 행렬은 신부의 집에서 다시 두 사람의 새 집으로 나아가게 된다. 어두운 길목은 결혼식 손님들이 들고 있는 등잔들로 밝혀지게 된다. 예수의 비유 속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예상보다 늦게 도착되어 등잔의 기름이 다 말라버리게 되었다. 오르지 기름통에 기름을 예비하였던 사람들만이 자기들의 등잔에 기름을 보충할 수 있었고 신랑과 신부를 영접할 수 있었다 (마 25:1-13). 행렬이 진행되는 동안 노래와 음악이 계속된다. (렘 16:9) 그리고 종종 신부 자신도 춤추는 일에 참여하기도 한다. (아 6:13).

5. 결혼잔치
새 집에 도착한 신랑과 신부는 작은 천막 모양의 차양 (canopy) 밑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그들은 주로 먹고 마시는 일로 이루어지는 결혼잔치를 주관하게 된다. (아2:4)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예수는 120갈론의 포도주를 손님들에게 공급해주었을 때, 손님들은 이미 많은 술을 마셨다. 그래서 잔치를 맡은 연회장은 좋은 포도주를 늦게까지 남겨놓은 일을 애석하게 여겼었다. (요 2:6-10)

결혼잔치는 종종 7일간 지속되었으며(삿 14:12), 그보다 더 오래 잔치가 벌어져 두 주간동안 계속되기도 하였다. 결혼잔치는 일반적으로 신랑의 집에서 베풀어졌다. (마 22:2) 그러나 구약성경에 언급된 결혼잔치는 신부의 집에서 있었는데 (창 29:22; 삿 14:10), 그것은 특수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 같다.
잔치에 참가하는 손님들은 결혼 성립의 증인 역할을 하였다. (창 29:22-23) 신부가 처녀이었음을 밝히는 과정으로 피가 묻은 침대 요를 손님들에게 내보이기도 하였다. (신 22:13-21)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님의 축복이 두 부부에게 내려지기를 기원했으며, 이러한 축복을 위하여 예수께서 가나 혼인잔치에 초청이 되었다. 부자집의 잔치인 경우에는 손님들에게 미리 준비해 둔 결혼 예복이 제공되었다. (마 22:12)

6. 이혼
결혼은 중도에 파기될 수 있었다. 남자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사유는 ‘수치되는 일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었다. (신 24:1) 유대인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하여 각기 다른 해석을 내렸었다. 예수 당시의 샤마이 학파에서는 그것을 음행이나 잘못된 성적 행위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힐렐 학파에서는 그 구절이 저녁상을 망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시대의 사회에서 남자가 아내와 이혼할 때에는 단순히 이혼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면서 ‘이혼증서’를 건네주는 것으로 이혼이 성립되었다. 이혼증서를 가지고 있는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이 가능하였다. (신 24:1-2) 그러나 전에 강간을 당했던 남자와 결혼하게 된 여자는 그 남자로부터 이혼 당할 수가 없었다. (신 22:28-29) 결혼할 때 자기 아내가 처녀가 아니라고 거짓 모함하는 남자도 이혼할 수 없었다. (신 22:13-19) 만일 이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살다가 그 남편이 죽었을 경우, 그 여자는 원래의 남편과 다시 결혼할 수 없었다. (신 24:3-4) 만일 이혼한 여자가 재혼하지 않고 살고 있을 경우에는 전 남편과 다시 결혼할 수 있다. (호 3장) 이혼은 하나님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말 2:16) 예수께서도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마 5:31-32; 19:6) 여자는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7. 시형제 결혼 제도
시형제 결혼제도는, 형제가 함께 살다가 그 중 하나가 남자 후손을 두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생존한 형제 중 맏이 미망인이 된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게 하는 제도이다. 이 때 태어난 아들은 법적으로 죽은 자의 아들이 된다. 만약 시동생이 장로들 앞에서 시형제 결혼의 포기를 선언하면 시형제 결혼의 의무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시동생은 위신을 잃게 되고 모욕을 당하게 된다. 수모를 당한 과부 형수는 시동생의 신발을 벗기고 그의 빰을 때린다. 그것은 그가 자기 형의 집을 다시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 25:5-10)

시형제 결혼과 관련된 실화들은 다말의 이야기(창 38:6)와 룻의 결혼 이야기(룻 4:5-17)이다. 다말의 이야기 중에서 시아버지인 유다와의 성관계는 더 이상 관계를 갖을 시동생이 없을 경우 그 의무는 시아버지에게 돌아간다는 당시대의 관습과 관련이 있다. 룻의 이야기에서는 시형제 결혼이 고엘 (속량자)에게 부과된 상환 (속량)의 의무와 결부된다. 신명기 25장의 내용은 여기에서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룻에게 더 이상의 시동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룻이 가장 가까운 친척과 일정한 규정에 의하여 결혼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당시의 특수한 환경을 보여준다. (룻 2:20; 3:12) 다시 말하여, 시형제 결혼제도가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씨족간의 문제로 확대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죽은 자의 이름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룻 4:5, 10; 참조 2:20) 시형제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는 시형제 자신의 아들이 된다. (룻 4:6; 비교 4:17)

<이스라엘 이웃국가에서의 시형제 결혼제도: 하무라비 법전에서는 이 제도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앗수르의 법전에는 이 관습에 대한 조항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이러한 조항들은 과부에게 자녀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없어진 부분에 언급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앗수르 법전은 이 제도를 약혼관계에 까지 소급하여 적용하고 있다. 즉 신랑이 죽으면 신부는 죽은 자의 형제와 결혼해야 한다. 헷 족속의 법률에도 시형제 결혼제도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세부사항에 관한 내용이 빠져있다. 누지문서(호리족)에서도 시형제 결혼제도가 등장하고 있다. 아마도 엘람에서도 이 제도가 시행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우가릿에서도 이 제도가 확인되고 있다.>

시형제 결혼제도의 중요성은 여러 관점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혹자는 조상숭배의 연속성에서 그 중요성을 찾으려 하고 있으며, 혹자는 장자권 제도의 사회적 형태에 대한 암시로 이해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이 제도에 대하여 보다 분명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 결혼제도의 본질이 남자의 후손을 남김으로서 그 ‘이름’과 그 ‘집’을 계속 살아 남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형제 결혼제도를 통하여 태어난 아이는 (아마도 첫 번째로 태어난 아이에 한하여) 죽은 자의 아들이 된다. 동시에 집안의 유산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룻기에서 토지 상환의 권리가 과부인 룻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연결된 것에서도 확인이 된다. 또한 희년 규정(레 25장)과 상속권이 없는 딸들에 대한 율법(민 36:2-9)에서도 확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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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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