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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관상에 대한 성서적 이해 /토마스 머튼

하나님아들 2017. 10. 6. 19:09


복음서에서 관상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본문 몇 곳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이며, 또 성경에 쓰인 대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결국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30, 36~3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요10:30, 36~38)


요한복음 8:12~58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12) ……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16)……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23)……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25)……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26)……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8)……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42)……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54)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55)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58) (요 8:12~58)


요한복음 14:6~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9)……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0). (요 14:6~10)


이 말씀들은 지난 20세기 동안 아주 명백한 의미로 동일하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음으로써 기독교적 묵상이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고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셨으니 이제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아득한 천국에 계신 그분과 우리 사이에 생긴 간격을 어떻게 메울 수 있겠습니까? 답은 아버지께서 주신 복음이 끊어지지 않는 연결고리가 되어 주며, 예수께서 우리 세상 속에 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세상의 창조주로서 자연에 내재하시지만 거기서 나아가 세상의 구주, 구속자, 사랑으로서 살아 움직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요지는 그분의 우주 안에서 그분과 접촉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를 어떻게 영접할 수 있을까요


그는 믿음을 답으로 내놓았습니다. 권위에 복종하는 형식적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세상에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에 우리 자아 전체와 삶 전체를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헌신은 보이지 않는 인격을 향한 사랑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분은 그 선물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 안에 임재하시는 말씀과 우리 마음, 영, 삶의 연합은 성령으로 효력을 발합니다.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유언인 최후의 만찬 강화에1) 명백히 나타납니다. 첫째, 주님의 육체적 임재와 새롭고 더욱 친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임재를 구분합니다. 전자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제자들과 거하시는 동안 그들과 친숙해졌던 임재이고, 후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그분 나라를 세우실 때 취하신 임재입니다.



(요 16:7, 13~14)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7)……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13)……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7, 13~14)

이 말씀은 요한일서를 덧붙여 설명하면 완성됩니다. 성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 2:20, 27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 (요일 2:20, 27)


이렇듯 성령은 우리에게 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선물(Domum Dei altissimi)입니다. 성 도마의 말대로 그분은 진정 우리의 소유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자신의 영이 되어 우리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영적·신적 자아가 되며, 성령의 임재로  감화 받음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이며,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로 행동합니다. 그분을 통하여, 그분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변화됩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서신서에 분명히 나타난 대로 성령은 초자연적 질서 속에서 사랑하시고 활동하시는 인격적 원동력입니다. 그 힘이 우리에게 임해 예수 안에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관상의 삶은 인간적 기술과 훈련이 아니라, 영혼 깊은 데서 성령을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관상가의 본분은 자기 삶에서 천하고 시시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려면 겸손과 순종, 자기 불신, 분별력을 훈련해야 하며, 무엇보다 믿음을 꾸준히 훈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모든 회심자들이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대로 살기를 바랐습니다.

고전 2:7, 10~12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 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2:7, 10~12)


이것은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 관상에 관한 증거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내적 자아의 증거를 통해서만 자신을 알듯이 하나님도 당신 영의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십니다. 하나님의 영 덕분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의 실체와 임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령은 우리의 내적 자아와 긴밀히 연합되어 있으며,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존재는 나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로 만듭니다.


이것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께서 제자들과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입니다. 위 성경 본문을 비인격적 의미로만 대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물론 성령은 먼저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이어서 교회로 전해졌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잘못된 교리와 도덕관념으로부터 교회를, 그리고 특히 사도들의 계승자를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은 교회 각 개인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각자의 초자연적 운명으로 이끄시며, 눈을 열어 자기 삶 속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의 신비를 보게 하십니다.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 강화에서 구주는 계속 한 주제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 안에 성령으로 사시려고 세상의 육신을 거두어 그들을 떠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단지 어떤 추억이나 귀감으로 남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천사들을 통해 그저 멀리서 그들을 인도하고 통치하실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충분히 모든 자연 세계를 무한히 초월하실 수 있지만,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격은 성육신으로 메워졌고, 우리 안에서는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메워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임재하십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생생히 임재하십니다. 우리 각자가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적 자아에 성령이 임재 하셨으니, 외적이고 이기적이며 허구적인 자아에 대한 집착만 벗어버리면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발견이란 바로 영적 체험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시겠다고 하신 성령은 이런분입니다.


요한복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요 14:26)

요한복음 14:21, 23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 (요14:21, 23)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신 지식과 사랑은 복 있는 자들이 천국에서 누리는 복과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영생이란 아버지께서 보내신 주님과 말씀 안에서 우리를 아버지와 연합시키시는 성령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보내심' 또는 사명으로 집중됩니다. 묵상은 아들과 성령의 사명을 의식적·체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요, 우리에게 생명으로만이 아니라 빛으로 보내주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 안에 '영접된' 말씀을  충만히 아는 지식은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타자(他者)'로, 신(神) '당신'으로 알고 우리 영의 모든 존재가 그분을 향하지만,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 내면의 '나'와 긴밀하게 연합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보다 더 참으로 우리의 자아가 되십니다.


관상하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성삼위일체와 말씀의 성육신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예수를 아는 긴밀한 지식에서 무한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관상가의 기쁨은 온전한 연합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요 17:22~23)

이 숭고한 삶의 씨앗은 세례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심겨집니다. 하지만 결실을 거두려면 씨앗이 자라고 발육해야 합니다. 자기 몸 안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품고 살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을 전혀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자기 정체를 모릅니다. 자신과 자신의 참된 존엄성을 알려고 하지는 않고, 안타깝게도 부족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기에만 급급합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 성격이 폭력과 기교, 정욕과 탐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영혼에 심겨진 관상과 거룩함의 씨앗은 그저 잠만 잘 뿐입니다. 싹을 틔우지 못하니 자랄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성화(聖火)의 은혜가 그들 영혼에 깃들어 있기는 하나, 그것이 흘러 넘쳐 그들의 기능과 지식과 의지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영혼들에게 자신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세상 양쪽에 발을 디디고 서 있습니다. 그들은 외적 자아 안에서만 편안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더 깊은 내면은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 영혼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 두면서도, 생각과 갈망은 환각과 욕망을 좇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한 하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비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영에 눈을 뜨지 못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들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관상의 선물로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단, 받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주어지지만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성령이 거부될 것입니다. 성 토머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요한복음(14장) 말씀을 주해하면서 둘의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관상은 사람이 '세상'에 속하는 만큼 비례하여 거부될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일시적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자들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이신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대로 "동일 주제 안에 두 반대 명제가 동시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듯이 말입니다.

사람이 성령과 그분의 사랑을 받고자 자신을 준비하려면 세상이 내놓는 야망과 외적인 활동, 일시적 관심사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세상적인 것들을 비우지 않는 한 영적인 것들을 분별하거나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퀴나스는,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알고자 갈망하지 않으므로 성령 또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을 시시한 것들로 채우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갈망은 관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갈망 없이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 선물들을 절대 받지 못합니다. 아퀴나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전혀 모르는 것을 갈망할 수는 없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실제로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다만 얼마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연합을 갈망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소외된 인간, 외적 활동과 일시적 관심사에만 몰두하는 그리스도인은 관상을 갈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관상의 기쁨을 조금이라도 발견하는 길은 체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선하신 분임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아퀴나스는 세속적인 자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미각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환자의 혀가 진미의 맛을 모르듯이 ‥‥ 세상의 타락에 감염된 영혼도 천국이 주는 기쁨의 맛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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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묵상의 능력에 "관상이란 무엇인가?"가  처음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관상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성구들이다. 그리고 이글 들은 머튼의 저서 "명상이란 무엇인가?"에서 가져 왔으며 "명상의 씨"로 전개된다. 
 

토마스 머튼

출처 : 보좌로부터흐르는생명수
글쓴이 : 하늘산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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