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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6장. 하나님의 인류구원.

하나님아들 2017. 8. 13. 23:26

제16장. 하나님의 인류구원.


가. 1. 인류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선택>.


(1) 1) 예정<선택>의시기.


  하나님께서 구원자들을 선택한 시기는 인간이 범죄 한 이후가 아니라 창세  전이다. 하나님의 예정<선택>은 하나님의 섭리 전체에 대한 신적 작정이 이루어졌을 때에 함께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시작에서 종료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 섭리 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셨고 따라서 모든 것에 대한 섭리를 계획하고 준비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문제도 모두 알고 계셨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작정<예정-선택>도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 놓으셨다.<마13:35> <마25;34> <눅11:50> <요17:24> <엡1:4> <벧전1:20>


(2) 2) 예정<선택>의 범위.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구원 계획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 중에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신적 작정하신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지 않고 그중에 일부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러한 하나님 작정을 <하나님의 예정 또는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하며 예정된 자 또는 선택된 자들을 <구원받은 자>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


(3) 3) 예정<선택>의 조건.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에 몇몇을 <구원받은 자><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신 것은 그들의 어떤 조건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적 주권에 의한 것이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롬9:11-13><롬11;6><엡1:4-12>.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신앙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인도 보호하심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실을 선포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믿음조차도 우리에게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하사 하신 것 이라고 증거하고 있다<엡2:8>. 기독교 신학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예정 또는 선택>을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고 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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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성경의 증거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어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확실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가야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성경적 진리를 전혀 모르는 초신자들에게 처음부터 <당신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자녀였다>고 가르치는 것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과연 누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 되었는지를 구별할 수 없는 일반적인 상황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이니 교회로 오시오 >라는 전도를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예수 믿고 천국가자>라는 보편적인 전도방법은 일반적인 전도의 방법으로는 타당 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안에서의 교육이나 설교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은 일단 하나님의 자녀라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교육과 설교가 실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언제 무엇을 근거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에 대한 것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과 의무와 사명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교육과 설교가 실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4) 4).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대한 반대.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은 오랫동안 많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어 왔으나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신학자는 16세기 기독교 개혁의 선구자였던 프랑스 신학자 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었다. 당시의 모든 교회들은 칼빈의 <하나님 주권에 의한 예정론>을 가장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칼빈이 사망한 후 16세기 네델란드의 신학자였던<알미니우스-James Arminus-1560-1609>에 의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원교리가 반대되었다. 알미니우스는 인본주의자로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한 예정론을 반대하면서 5개 항목으로 구성된 인본주의적 예정론을 제기하였다. 알미니우스의 인본주의적 예정론은 당시에 종교회의 <돌트회의>를 통하여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인본주의자, 자유주의자, 등등에 의하여 더욱 오류 되었으며 현대 기독교에서도 침례교를 비롯한 많은 교파들이 여전히 추종하고 있다.


(1)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예지 예정론>


  알미니우스는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으나 구원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또는 거부하느냐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일 자들을 미리 아심<예지하심>으로 그들에 대한 구원을 결정하셨다고 주장하였다. 때문에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을 <예지 예정론>이라고 한다.


(2) 예지 예정론의 중심 내용.


① 자유의지 또는 인간의 능력.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여 오염되었지만 인간의 영혼은 전적으로 무능하지 않다. 인간은 여전히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인의 선물이며 구원에 대한 인간의 공헌이다.


② 조건적 선택.


  구원에 대한 선택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구원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구원하시기로 예정<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가 응답할 것을 미리 예견하신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 것이다.


③ 보편적인 구속, 또는 일반적인 속죄.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어 그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구원을 선택할 수 있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나 모든 사람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구원받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고 받아 드리는 자들에게만 효력이 있다.


④ 성령은 충분히 저항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부르신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로 성령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인간에게 구원을 이루기 위한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다.


⑤ 은혜로부터의 탈락.


  믿고 구원을 받아들인 자들이라고 해서 구원이 반드시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도 자신의 구원을 지키는 것에 실패하여 중도 탈락하는 자들이 있다. <현대 알미니안 주의자들 중에는 구원의 중도 탈락을 반대하여 구원을 선택한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중도 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3)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들의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롬11: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딛2:11>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벧전1:2>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4) 돌트 기독교 회의의 결정.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론에 반대하면서 구원이 인간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주장을 제기함에 따라 당시의 교회들이 심한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때까지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성에 의하여 완성된 것으로 믿어 구원에 대한 확신적 신앙을 가졌던 기독교인들은 구원이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다고 주장됨에 따라 구원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되므로 심한 혼란과 갈등을 겪게 된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기독교 회의를 소집하였고 1618년 11월 13일, 네델란드의 돌트에서 국제 종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84명의 네델란드 신학자들과 독일, 신성 로마제국, 스위스, 영국에서 27명의 신학자들이 참석하였으며 네델란드 정부에서도 18명의 위원들이 참석하였다. 돌트 회의는 하나님의 예정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냐 하나님의 예지에 의한 것 이냐 하는 문제를 정립하기 위하여 성경을 면밀히 검토하였다. 신학자들은 7개월간에 걸쳐서 154차례 회의를 열었고 드디어 1619년 5월 9일에 결론을 발표하였다. 돌트 회의가 내린 결정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인간의 행위를 예지하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며 예지 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훼손시키는 이단적 교리다.>


  이때에 돌트회의는 알미니우스 주의자들의 교리가 다시는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알미니우스의 <5개 항목>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변증하였고 그것을 <칼빈주의 5대 강령>으로 선포하였다. 돌트회의의 결정이 <칼빈주의 5대 강령>으로 선포된 것은 그것이 이미 칼빈에 의하여 정립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5) 칼빈주의 5대 강령.


① 전적 타락.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관한 영적 영역을 완전히 몰수당했다. 때문에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하시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알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으므로 자력으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악한 본성에 억눌려 있기 때문에 마음은 죄를 싫어하면서도 욕심의 유혹에서 자유하지 못한다.

<창6:5; 8:21><전9:3><렘17:9><막7:21-23><요3:19; 8:44><롬8:7-8>

<고전2:14><엡2:1-2; 4:17-19; 5:8>


②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상태 하의 인간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 중에 몇몇을 아무 조건 없이 선택하시어 구원하셨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선포한다.

<출33:19><신7:6-7><대상29:10-12><욥42:1-2><시115:3><단4:35><마20:15><요15:16><행13:48;18:27><롬9:11-13,16;10:20;11:4-7,33-36> <고전1:27-29><엡1:5,12;2:10><빌1:19;2:12-13><살전1;4,5><살후2:13,14><딤후2:10><약2:5>


  따라서 구원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자의적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하사하신 신앙에 의한 것이다. 성도의 신앙은 그들 자신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다.


③ 제한적 속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출33:9><신7:6-7><시33:12><마20:15><막13:20><눅18:7>


④ 불가항력적 은혜.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부름<소명> 받아 교회<하나님께>로 나오며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따라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앙적 삶을 살게 된다. 성령 하나님은 거부당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따라서 인간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거부할 수 없다. 특히 구원 받도록 선택된 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절대 저항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거부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대죄이다. 거부되는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은 거부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⑤ 하나님의 견인.


  하나님의 구원은 그분의 절대성과 완전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영원히 유효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을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보장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고 선포한다.

<사43:1-3; 54:10><렘32:40><마18:12-14><요3:16,36; 5:24; 6:35-40,47; 10:27-30;17:11,12,15><롬5:8-10; 8:1,29,30,35-40><고전1:7-9; 10:13>

<고후4:14-17><엡1:5,13,14; 4:30><골3:3,4><살전5:23,24><딤후4:18><히9:12,15; 10:14; 12:28><벧전1:3-5><요일2:19-25; 5:4,11-13,20><유다1:24,25>


  인류 구원이 완전한 보장을 받는 것은 그것이 불완전한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에 의하여 중도에 탈락될수 있다는 것은 감히 하나님의 약속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이다.


나. 2. 구원의 서정<단계>.


  구원의 서정은 구원의 순서 또는 구원의 단계를 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서정에 대한 교리를 논증함에 있어 먼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구원의 서정을 단계적으로 구분하여 논증 하고자 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적용의 역사를 논증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이 반드시 그러한 시간적, 또는 단계적 과정을 거쳐서 완성 된 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완성되어진 것이며 그것이 개인에게 적용 되어질 때도 경우에 따라서는 오랜 시간과 절차가 적용 되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순간적으로 적용 되어질 때도 있다.


(1) 1) 소명<召命>


(1) 소명의 정의.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녀와 종들을 <부르시는>것이다.


(2) 소명의 필요성.


  성도들은 영적 무지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된 것을 전혀 알 수 없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불러 내시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게 한다.


(3) 소명의 종류.


① 외적 소명


외적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외향적인 모든 방법을 말한다. 외적 소명은 선택받은 자와 유기 된 자 모두에게 구별 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소명> 또는 <보편적인 소명>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따라서 반드시 유효하지 않다.<마10:15; 11:21-24><마22:2-14><요3:36><요5;40; 16:8-9><행13:46><살후1;8><요일5:10>


② 내적 소명


내적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시는 내향적 사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그리스도가 완성한 구원을 각 개인들에게 적용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말한다. 내적 소명은 구원의 적용에만 한정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당신의 종들을 부르시는 것에도 적용되어진다. 이와 같이 내적 소명이란 성령의 초자연적인 특별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을 부르시는<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신학적 용어인 것이다. 한편 내적소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 또는 하나님의 종으로 선택 받은 자 들에게만 적용되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유효하며 따라서<유효적 소명>이라고 정의되기도 한다.<행13;48><롬8:30;11:29><고전1;23-24> <살후2;13-14><딤후1:9><엡1:17><벧전2:9>


(5) 소명의 방법.


① 외적 소명.


A. 대자연을 통한 부르심.


  우주 만물의 질서 정연한 존재 자체와 그들의 생성과 결실의 반복과정 속에 나타나는 아름답고 신비하고 오묘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의 비상함을 충분히 증거하고도 남는다. 바울은<롬1:20>을 통하여 이와 같은 진리를 선포하고<저희가 핑계치 못 할 것이라>고 단언 한다. 우주 만물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결국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B. 실제적 삶을 통한 부르심.


  인간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환경들과 경험들과 사건들과 변화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인식하게 된다<시19:1-4><행16:16-17;17:27><롬1:19-21;2:14-15>. 이와 같은 인식들은 하나님의 보통은혜를 통하여 비롯되어지는 것으로서 결국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C. 복음 전파를 통한 부르심.


  복음 전파를 통한 부르심은 TV, 라디오, 문서, 등등의 각종 전도와 전도자들에 의하여 진행된다.


D. 찬양을 통한 부르심.


  아름다운 찬양은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찬양을 들으면서 그 찬양의 가사 내용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가사내용에 전혀 관계없이 그 찬양의 곡조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그것이 찬양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기에 일어나는 결과들이다.


E. 성도들의 신앙적 삶을 통한 부르심.     


  외적 소명 중에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통한 부르심이다. 사람들은 성도들의 고결하고 아름다운 신앙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에 의하여 현세적인 모든 욕심에서 초월되는 고결한 신앙적 삶을 영위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도 하나님 나라를 동경하게 되며, 성도들이 하나님의 형이상학적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흠모하게 되며, 성도들이 이웃과 사회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버리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알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의 진리적인 신앙적 삶은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② 내적 소명.


A. 성도 각자의 삶을 통하여 부르신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 들의 삶 속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어 구체적인 역사를 전개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깨달아 하나님께 나오게 한다.


B. 언제나 유효적이다.


  내적 소명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적용되며 또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적용되기 때문에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유효하다.


C. 권고적이다.


  성령 하나님은 택함 받은 자들의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인 요소들을 자극하여 그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신다. 택함 받은 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을 차츰 인식하게 되고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차원에서 스스로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느껴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D. 인격을 존중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의 인격을 존중하여 그들이 하나님께 기뻐하는 마음으로 나올 수 있도록 그들을 인격적으로 인도하신다. 성령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을 강제적이거나 강압적으로 휘몰아쳐서 하나님께로 인도하시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기뻐하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들을 제공하시며 기다려주시며 참아주시며 인도하시는 것이다.


E. 개성과 특성을 존중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의 특성과 개성을 존중하여 그들의 특성과 개성을 자극하고 조명함으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즐거이 나올 수 있도록 계기와 방편을 마련하여 주신다. 그들에게 부여되어진 개성과 특성들을 개발하게 하시고 또한 재능과 은사들을 부여하시어  그들이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시며 또한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F. 때로는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인도한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 할 때에 다양한 고난과 역경을 제공하여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심을 받은 자들은 처음에는 그 고난과 환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지만 결국은 그 고난과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알게 됨으로서 하나님께 나아오게 된다.


G.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적용된다.


  소명은 성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개인적 성격과 특성과 인격, 기호, 취향, 등등을 존중하신다. 따라서 그들을 강제적으로 무릎을 꿇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기다리신다. <물론 그러한 지경을 만들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일단 부르심에 응하여 하나님 앞에 나온 자들 중에도 쉽게 신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갈등을 겪는 자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기다리시며 그들이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여 주시고 사건을 만들어주시며 그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스스로 순종하게 만드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때이다.


H. 강제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머뭇거리거나 불순종하면 강압적으로 역사하시어 그들을 하나님께로 불러들이신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깨닫는 것에 몹시 둔하거나 또는 의심이 많아 쉽게 따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 들은 성령하나님의 다양한 조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아니하고 머뭇거리거나 또는 여전히 저항하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시어 그들을 강하게 휘몰아치심으로서 그들이 하나님께 굴복하고 두 손 들고 나아오게 하신다. 이때에 있어서 성령하나님의 강력한 휘몰아치심은 대부분 그들의 가장 약한 부분에 적용되어진다.


(2) 2) 중생


(1) 중생의 의미.


① 신분적 중생.


  신분적 중생이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이 취득한 법적, 행정적, 자격을 신분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죄제를 통하여 죄인의 신분에서<무죄한 신분>으로 변환된다. 따라서 신분적 중생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무관한(죄책으로부터 면죄 되어진) 새로운 피조물의 신분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거듭나다><새사람><새 출발><새로운 피조물><소생> 등등으로 표현한다<마19:28><딛3:5><요1:13; 3:3-8><벧전1:23><요일2:29; 3:9;4:7;5:1,4,18><약1;18><고후5;17;갈6:15><엡4;24><엡2;5><골2:13>


② 상태적 중생.


  상태적 중생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하고 인격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서 <완전한 성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신분적으로는 완전한 중생을 이루지만 현세를 사는 동안에는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므로 상태적 중생<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거듭난 삶<상태적 중생>을 이루려는 노력 속에 사는 것이다.


(2) 중생의 원리.


  중생의 법적, 행정적 원리는 성부하나님의 신적 작정이다. 성부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택<작정>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취득한 새로운 신분은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에 의하여 취득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하사된 것이다.


(3) 중생의 근거.


  중생의 법적, 행정적 근거는 로고스 곧 성자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대속 죄제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이 수없이 오직<예수 안에서>를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완성자 이심으로 모든 것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4) 중생의 적용.


  중생의 적용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 개개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성부 하나님의 중생을 일일이 부여하신다. 이와 같은 중생의 적용 역사에 있어서 사람의 협력이란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성령 하나님께만 허용 되어지고 일임 되어진 독단적, 고유적 사역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람의 상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스스로 감지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하심도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서만 비로소 깨닫게 되어 있다. 따라서 사람은 중생을 다만 수혜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뿐이지 성령의 중생역사에 아무런 협력도 할 수 없다.


(5) 중생의 완성 시기.


  성도가 중생을 하사받는 시기는 법적 행정적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택정하신 순간이다. 따라서 그것은 창세전이다. 이러한 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완전성과 속성적 완전성과 섭리적 완전성에 의하여 보증된다.


(6) 중생의 필요성.


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중생은 절대 필요하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요3:3>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죄인의 신분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죄인의 신분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성립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와 무관하신 분으로서 죄인과 교제하시지 않으시며, 또한 죄인들과 교제하실 수도 없는 분이시다. 아담과 하나님의 밀월 관계가 종료되고 아담이 에덴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담이 범죄 하였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 이래 단절 되어진 하나님과 사람의 교제가 회복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절대적인 것은, 사람이 죄인의 신분에서 벋어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들에 대한 대속 죄제를 치르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회복을 위해서 사람들을 죄로부터 해방시키어 그들이 죄인의 신분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벋어나게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②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중생은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로부터 자유한자, 즉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무죄한 자들만의 세계이다. 따라서 죄인의 신분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들에 대한 대속 죄제를 치르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유 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③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중생은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죄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유 하여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들에 대한 대속 죄제를 치르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유 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④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 중생은 절대 필요하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으려면 죄인의 신분에서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벋어나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사람들에 대한 대속 죄제를 치르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자유 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7) 중생에 대한 오류.


① 세례 받을 때 중생된다는 개념.


  성도가 중생을 하사받는 시기를 세례 받을 때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개념은 중생이 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개념으로서 로마 카토릭과 영국의 성공회, 그리고 루터파 교회의 공통된 개념이다. 따라서 저들은 구약시대 성도들의 중생을 거부한다.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죄제 이후에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② 계속하여 중생된다는 개념.


  성도의 중생이 계속하여 반복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개념은 성도들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형성되었다. 때문에 저들은 성령 충만, 성령 세례를 강조하면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중생의 거듭>을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중생은 신분적으로는 완전을 이루지만 상태적<완전 성화>으로는 완전을 이루지 못하므로 계속하여 중생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자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③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한다는 개념.


  성도의 중생을 완전한 것으로 주장하여 중생된 자는 하나님께서 범죄 하기 이전의 첫 사람 아담과 같은 상태의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때문에 이러한 주장자들은 성도는 죄와 무관한 의인으로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명백한 오류다. 성도의 중생은 신분적으로는 완전하지만 상태적으로는 완전하지 못하므로 항상 범죄하고 실수하며 산다.


(3) 3) 회심.


(1) 회심의 정의.


  회심이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회심은 회개하고는 다르다. 회개는 과거의 비 진리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되어지는 후회이며 앞으로는 그러한 후회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회개는 또한 비 진리적인 과거로부터의 탈출이며 그것에게로 되돌아가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결국 회개는 비 진리로부터 분리되어 지는 경계선이며 진리 안으로 들어서는 출발선이다. 반면에 회심은 죄악된 삶으로부터 마음을 완전히 돌리어 오직 하나님께 귀의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은 회개의 결과로서 다시는 범죄 하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2) 회심의 필요성.


  구원은 사람의 어떤 요소와 전혀 관계없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다. 그러나 죄인에 대한 사면에 있어서 죄인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통회 자복하며 개정<改訂>의 자세를 갖추지 않는다면 사면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회심은 성도들의 신분에서도 절대적,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택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하사받기 위해서는 회심이 절대적,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려놓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인치심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는 회심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3) 회심의 특성.


① 회심은 신자들을 새로운 삶으로 출발 시킨다.


  회심은 신자들로 하여금 옛사람을 벗어버리게 하며 죄를 회피하게 하고 그들이 새 사람으로서의 아름답고 거룩한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다. 신자들은 회심을 통하여 의식적으로 이 전의 죄악 된 생활을 벗어버리고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충성하는 헌신적, 신앙적, 생활로 나아가는 것이다.

회심은 신자를 하나님에게로 안내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다.


  일반적인 회심은 인간들이 어떤 계기를 통하여 스스로 마음을 바꾸는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기독교의 회심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어 택한 자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려놓는 것이다. 기독교 회심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역사를 통하여 신자들을<종교적인 존재>,또는<종교적인 개념><종교적인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회심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마음을 죄악 된 것에서 완전히 돌이키게 하심이며 그들의 삶과 의식자체를 죄악 된 것에서 돌이키어 영원히, 완전히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은 법적, 행정적인 것이 아니라 상태적인 것이며 실제적인 것이다.


③ 회심은 일회적이며 반복될 수 없다.


  회심은 단 한번으로 완성되어지며 따라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서 비롯되어지는 회심은 수없는 반복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회심은 단 한번으로 완성되어 진다. 엄격한 의미에서 말 할 때에 사람에 의하여 비롯되어지는 회심은 후회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반면에 하나님에 의하여 비롯되어지는 회심은 후회를 포함하지만 영적 각성 속에서 새로운 심령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심령은 하나님의 완전성에 의하여 단 한번으로 완성되어짐과 동시에 전혀 변질되지 않고 영원히 유효하다. 성도들이 때때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회심의 변질이나 무효가 아니라 <방황> 또는 <미혹에 빠짐>으로서 신앙 궤도에서 잠시 이탈하는 것이다.


④ 회심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 과정이다.


  인간적 입장에서 회심은 때로 돌발적 일 때도 있고 점진적 일 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서 즉시 회심하는 돌발적 회심을 하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같은 사건을 여러 번 경험하면서 서서히 회심하는 점진적 회심을 하기도 한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경우들을 근거로 하여 돌발적인 회심과 점진적인 회심을 구분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레미야, 세례요한, 디모데>같은 경우는 점진적인 회심이었다. 반면에 <삭개오, 바울, 루디아>같은 경우는 돌발적인 회심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회심은 법적 행정적으로는 단 한번으로 완성되지만 적용과정에서는 점진적이다.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때로 돌발적인 회심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에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의 회심을 즉각적인 것으로 이루시지 아니하시고 점진적인 것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자녀들의 개성과 특성들을 존중하시어 그것에 맞게 적용하시기 때문이다.


(4) 회심의 중요성.


  회심의 필요성에서 이미 밝혔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서정에서 회심은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단계적으로 진행이 될 때에 모든 단계적인 것들은 이전의 것과 또 다음의 단계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한결같이 중요한 것임으로 어떤 단계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듯이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도 모든 단계들은 곧 다음 단계를 완성하는 절대적인 요소들로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회심의 중요성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회심은 신앙을 촉진<促進>한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신앙은 회심을 전제로 한다. 회심이 없으면 신앙이 형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신앙은 일반 종교적인 신앙과 달라서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것이어야 하며 또한 진실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회심<과거의 죄에 대한 무한한 통회자복과 미래의 삶이 오직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것이어야겠다는 확고부동한 돌이킴>이 없이는 형성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회심은 신실하고 절대적인 신앙을 촉진시키는 필연적인 요소인 것이다.


② 회심은 중생과 신앙을 연결하는 필수적인 고리이다.


  법적으로 새로운 신분이 된 신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것은 새로운 신분에 적합한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는 이제 오직 하나님만을 앙망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 삶은 그들이 죄악 된 삶에서 내적, 외적으로 완전히 돌아섰을 때에 비로소 형성되어 진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 역시 사람들에게서 자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만약에 신앙이 사람으로부터 자생되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죄악 된 것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이 형성될 수 없는 것이지만 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되는 것일 때에 죄로부터 아직 돌아서지 못한 자에게 부여되는 신앙은 뚜껑 닫힌 항아리에 물을 붙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회심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신자들의 구원의 서정은 신앙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중생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5) 회심의 조성자.


① 회심의 조성자이신 하나님.


  회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의하여 작정된 하나님의 필연적 역사이다 따라서 회심의 조성자는 당연히 오직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이와 같은 원리를 다양하게 증거하고 선포한다.


* <시85:4>에서 시인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라고 기도한다.

* <렘31:18>에서 에브라임은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라고 기도한다.

* <행11:18>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다.>고 선포한다.


  죄인의 회심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은 일반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율법을 통하여 회개를 일으키시고 <시19:7><롬3:20> 복음을 통하여 신앙을 촉구하시며<롬10:17> 또한 초자연적으로 신자들의 마음을 주장하시어 그들의 회심을 이루시는 것이다.


② 회심에 대한 인간의 협력.


  회심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강제적인 것이나 또는 법적, 행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자들의 자발적인 응답 속에 이루어지며 신자들의 자발적인 응답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눈물어린 감동과 그 감동에 의하여 발생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감사에 의하여 비롯되어진 결과이다. 하나님께서는 회심을 강제적으로 집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적극적인 그리고 감동적인 참여를 통하여 완성하시는 것이다. 신자들은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저절로 감격하여 눈물과 회한의 심정으로 회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사람이 협력했다 하여 회심에 대한 사람의 공로를 내세우면 안 된다. 사람의 행동이 회심에서 매우 활동적인 것은 분명하지만<사55:7><렘18:11><겔18:23,32;33:11><행2:38;17:30>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활동에 불과하다.<애5:21><빌2:13>


(4) 4) 신앙.


  신앙에 대한 교리는 구원의 서정론에서 중심적인 의의<意義>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신앙은 회심을 불가분리의 대 전제로 하면서 또한<칭의>교리와 절대 불가분리의 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신앙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 <이신칭의-以信稱義-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교리로 논증하게 된다.


(1) 신앙의 조성자.


  신앙의 조성자에 대한 역사적 개념을 고찰해보면 대략 세 가지이다.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을 신앙의 조성자로 보았고, 어떤 학자들은 사람을 신앙의 조성자로 보았으며 또 어떤 학자들은 신앙의 조성자를 하나님과 사람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조성할 수 없다. 따라서 신앙의 조성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신앙은 하나님에 의하여 심기어지고, 가꾸어지고, 열매 맺어진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인간의 노력적인 참여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배려하심 속에서의 참여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란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2) 신앙의 필요성.


① 구원의 서정에서.


  신앙은 구원의 서정에서 회심 다음이며 칭의 직전의 위치에 있다. 회심과 칭의 사이를 연결 하는 하나의 고리인 것이다. 신자들은 회심 다음에 중생에 근거한 법적, 행정적 칭호인 <거룩한 자>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신자들이 거룩한 자<의인>의 칭호를 받기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다. 거룩한 자란 하나님의 법 안에서의 거룩한 자이며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거룩한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의 거룩한 자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이 있어야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자라는 칭호<칭의>를 부여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이신칭의-以信稱義-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가 정립된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앙이 없는 자는 곧 하나님과 무관한 자임으로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자라는 법적, 행정적 칭호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의 신앙은 그들이 하나님께 법적, 행정적으로 거룩한 자라는 칭호를 받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전제가 되는 것이다.


② 신자들의 삶에서.


  신자들은 법적, 행정적으로만 <의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실제적으로 거룩한 자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나라의 백성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종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적 삶을 살아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들이 자신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요구 되어진다. 하나님의 법과 섭리와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의지와 순종의 신앙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지는 것이다.


(3) 신앙의 중요성.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과 동시에 또한 매우 중요하다. 신앙의 필요성은 구원과 사명에 관계되는 반면에 신앙의 중요성은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과 관계된다. 신자들의 삶은 그들 자신의 신앙 형태와 수준에 크게 영향 받는다. 그들의 신앙의 형태와 수준에 따라 그들의 삶의 형태와 수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신자들의 신앙에 의한 삶의 형태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신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의 차이에 따라 신자들의 삶의 형태가 달라진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절대적인 사람은 현세의 삶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현세의 삶을 전혀 무시한다거나 또는 과소평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현세의 삶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사명의 현장이며 기회라는 점을 중요하게 여기어 하나님께 감사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현세의 삶을 살아간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되 현세의 것에 대한 미련과 욕심을 갖지 않으며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기뻐하며 때로, 고통과 고난과 슬픔과 애통의 순간이 닥쳐올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그것을 인내하고 견디며 극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약한 사람들은 그와 전혀 상반되는 삶을 산다. 언제나 현세의 삶에 연연하여 현세의 것에 대한 미련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들의 포로가 되어 그것들에 집착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 전혀 하나님의 사람답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 더 높은 것을 얻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언제나 불만과 다툼을 일으키는 가운데 작은 실패에 스스로 좌절하고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는 삶을 산다.


②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신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을 소유한 자들은 언제나, 그리고 무슨 일에나 자신만만한 삶을 산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리고 무슨 일에나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자신 있고 진취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던지 할 수 있다는, 될 수 있다는 긍정적 사고 안에서 적극적인 삶을 살며 또한 대부분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와 반대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은 언제나 무슨 일에나 부정적이고 자신이 없으며 따라서 매우 미온적이며 소극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게는 대부분 승리의 삶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승리의 허락이 유보되어지기 때문이다.


③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이 신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 하게 되며 또한 현존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저들은 사랑의 원리를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방법을 알며 사랑의 실체를 알기 때문에 영원히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저들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용서하며 모든 것을 사랑으로 이해하며 또한 모든 것을 사랑으로 인내하고 아우르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듯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저들은 사랑을 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또한 사랑을 받을 줄도 알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일들을 할 줄도 안다. 이와 같이 사랑 속에 사는 저들의 삶은 언제나 기쁨과 평안이 넘치며 화평과 행복이 쏟아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한다. 저들은 사랑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받기를 원하며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며 사랑할 줄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수 있는 일을 할 줄도 모른다, 그리하여 저들의 삶 에는 언제나 진정하고 영원한 기쁨과 평안이 없으며 따라서 삭막하고 적막하다.


(5) 5) 칭의.


(1). 칭의의 정의<稱義>


  칭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에 대한 법적, 행정적, 선포이다. 즉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 받은 자들에게 <의로운 자>란 법적, 행정적인 신분을 부여하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부여된 칭의는 믿음<신앙>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자들은<믿음으로 의롭다.>는 칭호를 받았다는 차원에서 칭의를 <이신칭의-以信稱義> 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2) 칭의의 부여자.


   칭의는 성도들의 법적, 행정적인 신분에 대한 법정적 부여임과 동시에 선포이다. 죄인 된 자가 죄인의 신분에서 벋어나 죄와 무관한 새로운 <의로운>신분이 되었음을 부여하고 선포할 수 있는 법정적 권한은 절대적 주권자에게만 존재한다. 따라서 칭의의 부여자는 당연히 성부 하나님이시다.


(3) 칭의의 근거.


  칭의는 인간의 어떤 덕목이나 선행을 통하여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덕목이나 선행에 의하여 발생하는 의는 불완전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성령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순전한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칭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그리스도의<의>가 죄인에게 전가 되어지는 것이 유일한 칭의의 근거인 것이다.


<롬3:24; 5:9,19; 8:1; 10:4><고전1:30; 6:11><고후5:21><빌3:9>


(4) 칭의 부여의 시기.


① 그리스도 부활시의 칭의.


  죄인들이 그리스도 부활 시에 칭의 된다는 사상은 일부 율법 폐기론 자들과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근거들에 기초한다.


A. 그리스도는 속죄 사역을 통하여 백성을 위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켰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할 때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요구가 선택 된 자들을 위하여 이루어졌다고 공적으로 선포하셨으며 따라서 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셨다.


B. <롬4:25>의 증거><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C. <고후5:19>의 증거.<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 하셨느니라.>


② 신앙에 의한 칭의.


  칭의가 성도의 신앙을 근거로 하여 부여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경의 증거들을 근거로 내세운다. <롬3:25,28,30; 5:1><갈2:16><빌3:9>이 성경 구절들은 대체적으로 성도가 <믿음으로 의롭다는 칭함을 받는다.>고 증거 한다. 또한 <롬4:3,9,22><갈3:6> 등등은 아브라함의 신앙이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으며 <약2:14-26>은 성도의 행위가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증거하고 있다. 로마 카토릭은 이러한 성경의 증거들을 근거로 하여 칭의가 신앙을 근거로 하여 부여됨으로 칭의의 시기를 세례 받을 때라고 주장하였고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칭의가 성도 개인의 신앙에 의하여 부여됨으로 반드시 세례 받을 때 칭의가 부여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여 칭의 시기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③ 영원전의 칭의.


  칭의의 시기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선택하셨던 그 때<영원 전>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자녀로 예정 하셨다는 것은 그들의<의로움>을 전제로 한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이미 그 때에 법적, 행정적으로 의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칭의의 시기는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영원전이 된다.


(5) 칭의의 영역.


① 법적 칭의.


  법적 칭의는 하나님에 의하여 선포 되어지는 법정적인 것으로서 하나님 자녀들의 신분에 대한 칭의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법정적 선포에 따라 영원 전부터 죄인의 신분이 아닌 의인의 신분으로 존재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인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 <의로운 자>로 불리어진다. 이러한 호칭은 원죄는 물론 일반적인 죄와도 관계된 호칭들이다. 즉 원죄와 일반 죄 모두<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면 받은<거룩한 자> <의로운 자>인 것이다.


② 실제적 칭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법정적 선포에 의하여<거룩한 자><의로운 자>가 되지만 그것은 신분적인 것이지 상태적으로 <거룩한 자>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상태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신앙적 삶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들은 현세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나라에 입국할 때 까지는 실제적인<의인>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죄인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성도들은 칭의를 부여 받은 이후에도 계속하여 범죄 한다. <약3:2> <요일1:8>


(6) 칭의의 성질과 특징.


  칭의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에 관한 율법의 모든 요구들이 만족되어 졌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이다. 칭의가 구속역사의 적용에 있어서 특이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 즉 죄인에 관한 선언이며, 중생이나 회심, 성화와 같은 갱신<更新>의 행동이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칭의는 죄인과 연관되어 있지만 그의 내적 생활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이것은 죄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의 신분에 영향을 미치며, 그 점에서 구원의 순서의 다른 모든 중요한 부분들과 다르다. 칭의는 죄의 용서와 신적 은총에로의 회복을 내포하고 있다.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며 <롬5:1-10>, 또한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되는> 것이다<행26:18>


(7) 칭의의 필요성.


  칭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절대적인 필연성을 갖는다 .죄인들이 죄로부터 면책되어 지는 것으로서 모든 것이 마무리 된다면 칭의는 필요 없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적인 결과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나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거룩한 자><의로운 자>라는 법적 신분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다만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요구되어지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갖는 것이다.


(6) 6)  양자.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물론 이것은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신자들이 본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 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본래 하나의 피조의 위치로 창조되어 졌다.<우리가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다면 우리는 본래적으로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택하여 주신 것이다.

<출4:22-23><신14:1><사63:8><렘10:20><렘31:20><잠14:26><마6:32><요1:12><롬8:15><고후6:18><엡1:5><갈4:6><히12:6>


(1) 양자의 근거.


  신자들이 죄인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근거는 칭의이다. 죄인의 신분으로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거룩한 자. 의로운 자라는 칭의가 부여된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의 반열에 서게 된다. 그러나 칭의는 예수그리스도의<의>에 의하여 부여된다. 따라서 결국 양자의 궁극적인 근거는 예수그리스도이다.


(2) 양자의 시기.


  신자들은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에 몇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그 작정 속에는 이미 그들에게 자녀의 권세를 줄 것까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양자의 시기는 성부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택정 하셨을 때이다. 결국 신자들은 창세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처음부터 무죄한자의 신분으로 창조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인의 신분으로 창조되어진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창세전<영원 전>에 그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으로 현세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바꾸어진 의인의 신분에 의해서, 현세에 의인 곧<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3) 양자의 특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권들이 주어진다.


1>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롬8:15><갈4:6>

2> 하나님의 절대적 보호를 받는다.<애3:31>

3> 구하는 대로 얻게 된다.<마6:30-32>

4> 하나님의 약속 안에 산다.<히6:12>

5>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가 된다.<벧전1:3-4>


(7) 7) 성화.


  성화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의 심령과 삶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의 심령과 삶으로 변화되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성화를 <상태적 중생-거듭난 자의 삶>이라고도 한다.


(1) 성화의 창시자.


  성화는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창시되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자들의 현재적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자녀적 삶이 될 수 있도록 작정하신 것이다.


(2) 성화의 조성자.


  로마 카토릭, 알미니안 주의자, 및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성화가 인간의 신앙적 노력에 의한 업적으로서 신앙적 공로라고 주장한다. 특히 미국 기독교 성도들 중에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사람의 행위를 높이 평가하는 행동주의<Activism>자들은, 성화를 신자들의 신앙적 열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화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 출발하고, 진행되고, 완성된다. 따라서 성화의 조성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 자녀들의 과거 신분을 <옛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되어 새로운 신분을 하사받은-<롬6:6>, 그들에게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라-골3:9>고 명령한다. 옛 사람이란 죄로 인해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롬6:6><갈5:24>.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육신의 행위와 성령의 역사를 대조시키며 <예수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선포한다. 이와 같은 선포는 성령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영혼을 지배하신다는 것에 대한 선포로서,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 본성의 부패와 타락을 점진적으로 제거 하신다는 것이다. 성화는 칭의의 열매이며, 칭의 없는 성화는 절대 불가능하다. 칭의와 성화는 다 함께 죄인들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들인 것이다. 신자가 성화에 협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성령하나님께서 날마다 순간마다 그들에게 주시는 능력에 힘입어 그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신자의 영적인 발전은, 그들 자신의 인간적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한편 사람은 자신의 성화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회개와 자성<自省>과 자숙<自肅>을 계속하면서 성화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성화에 협력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하여 내 세울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겸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사람이 협력하는 것까지도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기 때문이다.


(3) 성화의 특성.


① 성화는 인간의 전역

     <몸, 영혼, 지성, 감성, 의지>에 영향을 준다.


  성화는 인간의 내면적인 삶<심령>에서 발생하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인간의 전역<全域>을 변화시키게 된다. 인간의 심령 변화는 그의 내적인 부분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외적인 부분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그의 육체적 건강에까지 변화를 주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진리를 분명하게 선포한다.    <겔36:25-27><롬6:12><고전6:15,20><고후5:17><살전5:23><갈5:24>

   <빌2:13> <딛1:15> <히9:14>


② 성화는 신자들이 참여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사역이지만 신자들이 성화에 참여한다. 그러나 신자들이 성화에 참여하는 것을 오해하여 신자들이 성화에 독립적으로 참여 한다고 생각함으로서 성화를 두 부분, <하나님의 사역과 신자의 행위>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신자의 참여란 엄격하게 말하면 성령의 역사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4) 성화의 완성.


① 성화는 현세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성화는 신자의 일생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긴 과정이며, 현세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현세에서는 아무도 죄에서 자유 할 수 없다.>고 증거하며 <왕상8:46> <잠20:9> <롬3:10,12> <약3:2> <요일1:8>, 또한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증거한다<롬3:10>. 신자의 성화가 현세에서 완성되지 아니하는 것은 신자들의 부패된 본성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그 원인이 있다. 신자들의 성화가 현세에서 완성된다면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완전무결한 <범죄 하기 이전의 아담과 같은 존재>가 된다. 신자의 그와 같은 상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조화되지 못한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현세에서의 신자들에 대한 완전한 성화를 허락하시지 않는 것이다.


② 성화는 영혼의 죽음과 동시에 완성된다.


  신자의 성화는 현세의 육체적 죽음과 동시에 완성된다. 성경은 신자들의 성화가 육체적 죽음과 동시에 완성된다는 사실을 <완전케 된 의인의 영들-히12;23> <흠이 없는 자들-계14:5>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는<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계21:27>는 선포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과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1>는 선포를 통하여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5) 성화의 방편<수단>.


① 하나님의 말씀.


  성령께서 신자들의 성화를 이루어 가실 때에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거룩한 실천과 행위들에 대한 모든 객관적 조건들을 제시하는 유일한 진리이다. 그러나 진리 <말씀-성경>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말씀-성경>진리가 성령에 의해서 사용되어질 때에 그 진리 앞에 들어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무릎 꿇지  않는 것이 없다.


② 섭리적 인도.


  말씀을 통한 성령의 사역과 연관되어 하나님의 섭리는 신자들의 내적 감정과 심령에 자극을 주며, 따라서 그들을 차원 높은 신앙적 열매들에게로 인도 한다.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다양함이 존재한다. 부드러움이 있는가 하면 강함이 있고, 자율적인 인도하심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절대적 강제성이 있는 것 이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부드러운 인도하심과 자율적인 인도하심이 있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저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강한 인도하심과  절대적 강제성 인도하심이 있는 것이다.


(8) 8) 성도의 견인<牽引>


(1) 견인의 정의.


  견인이란 성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견인은 성부 하나님의 은혜, 자비, 사랑, 등등으로 표현되지만,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성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한 신적 작정이다.


(2) 견인의 완성자.


  견인이 성부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한 신적 작정인 반면에 그것을 진행하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견인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고유적인 사역이며 또한 특별한 사역인 것이다.


(3) 견인의 방법.


  성령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심령 안에 내재, 내주하시면서 그들의 심령에 자극을 주시고 조명을 주시어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 하게하며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한 본성의 발동으로 인하여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저항하거나 불순종하고, 특히 그 틈을 노리고 유혹과 미혹의 역사를 전개하는 사단의 활동에 의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정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려놓으신다.


(4) 견인에 대한 신자들의 협력.


  이미 여러 차례 밝힌바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주권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전개하시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강권적, 독재적인 역사를 진행하시지 않으시고 자녀들과 종들의 인격을 각별히 존중하시고 예우하시면서 그들과 함께 기뻐하시고 즐기시는 역사를 전개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 섭리는 성도에 대한 견인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 하게하시는 역사를 전개하시면서도 그와 같은 섭리의 결과를 하나님 자신의 것으로 하시지 않고 성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공로로 하사하시어, 그들을 기뻐하시고 자랑하시면서 상급과 면류관까지 예비하시는 은혜의 극치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견인하심에 협력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되게 하며 하나님의 자랑스러움이 되게 하는 것이다.


다. 3. 구원의 완성.


(1) 1) 구원의 완성시기.


  지금까지 교회가 가르치고 전해온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것은 알미니안 주의적인 것으로서 성경의 증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인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작정하셨을 때에 이미 완성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에 가기 위한 자들>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천국 백성이 된 자들>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작정 그 자체로서 유효하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자녀는 창세전에 결정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자는 그가 출생 하였을 때에나, 그가 신앙생활을 시작 하였을 때나,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에나, 그가 세례를 받았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작정에 의하여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있었다<마13:35><마25;34><눅11:50><요17:24><엡1:4><벧전1:20>.


(2) 하나님의 자녀는 창세전부터 의인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가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했을 때나, 그가 세례를 받았을 때나, 심지어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대속죄제를 드렸을 때를 기점으로 하여, 죄가 용서되어지고, 그리하여 그 때를 기점으로 하여 죄인의 반열에서 의인의 반열로 옮기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의인의 반열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고 작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 2) 완성된 구원의 적용.


  성부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영원히 완전한 구원은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통하여 각 개인들에게 적용 되어진다.<특별은혜> 또는 <특별사역>이라고 정의 되는 성령의 적용은 구원의 서정 8 단계를 통하여 개인들에게 적용 되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우편 강도의 경우에서처럼 일순간에 적용 되어지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수십 년의 오랜 과정을 통하여 적용 되어 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구원의 적용과정이 길다고 해서 구원의 완성 자체가 오래 걸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완성된 것이며, 다만 그 완성된 구원이 적용되는 과정이 길수도 있고 짧을 수 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하여 왜? 그렇게 되는 것이냐?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것이 하나님의 지고하신 사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일률적으로 강제적으로 오직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의하여 당신의 역사를 휘몰아치시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천태 만별인 자녀들의 속성과 상태와 의지를 존중하시어 그들의 입장에 맞는 시간과 방법을 통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적용 하시는 것이다.


(3) 3) 완성된 구원의 상태<영화>


(1) 영화의 차원.


① 법적, 행정적 완성.


  영화를 구원의 완성이라고 정립함에 있어 영화를 이루기 이전의 상태를 구원의 미완성 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자들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그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이미 완성 되어졌다. 때문에 그들은 영원 전부터 이미 법적 행정적으로 영화로운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현세에서의 삶을 사는 동안에 완전한 성화를 이루어 영화로운 상태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의 구원이 미완성 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② 영적 부활에서의 영화.


  하나님의 자녀들은 현세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않기 때문에, 법적, 행정적으로는 분명히 영화로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상태적으로는 영화로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의 영화는 그들이 현세의 삶을 종료하고 죽음의 과정을 거쳐서 부활하는 순간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때의 영화는 영적 상태의 영화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적으로 영화로운 존재가 되어 장차 육신의 부활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37은 이와 같은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신자가 죽을 때에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 중에 들어가고, 그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부활 할 때까지 무덤에서 쉰다.>


③ 영화의 최종.


  하나님 자녀들의 영화의 최종은 그들의 육체가 부활하여 영혼과 연합되어 완전한 실체가 되어질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전, 피조 세계를 심판하시기 전, 그들의 육체가 부활되어져서 영혼과 연합하여 완전한 실체를 이루게 될 때에, 그들의 영화는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2) 영화의 상태.


  성경은 하나님 자녀들의 영화로운 상태에 대하여 어느 정도만 언급하고 있을 뿐,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삼가고 있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실제성을 거부하는 주장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오해이다. 제한된 우리의 지식과 지혜로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서의 영화로운 상태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정확하게 인식 할 수없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곳에서의 우리들의 영화로운 상태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완전성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구체성을 명확하게 계시 하시지 않는 것은, 아무리 그것의 실제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도 우리가 그것을 이해 할 수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화로운 상태에 대하여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장차 우리가 이루게 될 영화로운 상태는 범죄 하기 이전의 아담의 상태보다도 더욱 완전한 상태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라. 4.구원의 완전성.


  오늘날 교회에서 교육되고 설교되는 것 중에 또 하나의 심각한 오류는, 우리가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죄악 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의 반열에서 낙오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 설교를 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성경은 주로 야고보서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교육과 설교로 인하여 구원의 확신을 소유하지 못 하고 있으며, 때때로 불안과 좌절에 빠져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와 교육들로 인한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완전성이 거부 되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섭리에 의하여 영원히 유효하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는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구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언약을 수 없이 선포 하셨고,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절대적 속성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지켜지게 된다. 앞장에서 이미 밝혔듯이 하나님의 구원의 근거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로고스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무결하게 영원히 유효 한 것은, 구원의 근거가 곧 영원히 완전무결하신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칫하면 구원의 반열에서 낙오될 수 있다는 식의 개념을 갖게 하는 교육과 설교들은 잘못 된 것이다.

  야고보서가 말 하고자하는 것은, 구원이 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거나 존속 된다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 사도가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약2;26>라고 준엄하게 선포하는 것은 행위적 신앙이 뒷받침되지 않는 신앙, 즉 신학적인 것에 불과한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러한 신앙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의 반열에서 낙오되어 진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히브리서 바로 뒤에 연결  시킨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된다. 대체적으로 히브리서는 신학적인 요소를 다루고 있으며, 야고보서는 신앙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기독교의 신앙은 신학적<이론적>인 신앙과 인격적<실천적>인 신앙이 연합하여 조화를 이룰 때에 비로소 온전한 신앙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원리에 의하여 히브리서와 야고보서를 나란히 연결하여 배열하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차원의 문제를 교육하고 설교 할 때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물론 시도 때도 없이 나태해지고 강퍅해지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교회적 고충은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리를 왜곡 할 수는 없다. 교회는 마땅히 하나님 구원의 영원한 완전성을 가르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만을 신뢰하고 믿으면서, 안심하고 태만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부응하는 신앙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육하고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http://www.제자훈련교회.com

출처 : 복있는 그리스도인
글쓴이 : 예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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