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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7장. 인류 구원과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아들 2017. 8. 13. 23:26

제17장. 인류 구원과 예수그리스도.


가. 1. 인류 구속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 위치.


  인류 구속 역사에서의 예수 그리스도 위치는 대속주<代贖主>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사하여 주었고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고 알고 있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속주<救贖主> 또는 세상을 구원한 구세주<救世主>라고 명칭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는 비논리적이고 비 성경적이다.


(1) 1) 비 논리성.


  인류 구속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물<예수>과 메시야 <중보자-그리스도>로 오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구속을 위한 <대속죄 예물-예수>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고 연결시키는 <중보자-그리스도>이시며, 인류 구속의 <법적 행정적 근거-로고스>이시다. 논리적으로 정리할 때에 <대속죄 예물-예수> <중보자-그리스도> <법적 행정적 근거-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인류의 죄를 용서하고, 세상을 자유하게 하는 권한<사면권>이 없다. 그러한 권한은 오직 절대적 주권자이신 성부 하나님에게만 있다.


(2) 2) 성경의 증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하나님의 종> <비하의 신분>으로 표현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모든 주권과 영광을 성부 하나님의 것으로 선포하였다. 이와 같은 성경의 표현과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구속주<救贖主> 또는 구세주<救世主>가 성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나. 2. 대속주<代贖主>에 대한 명칭들.


(1) 1) 예수.


  예수라는 명칭은 히브리어 “예호수아” <צושׁוהי-여호수아> <수1:1> <슥3:1> 나 “예수아”에 대한 헬라적 명칭으로서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라는 명칭이 대속주로서의 직무에 적용될 때에는 단순히 제물의 성격을 갖는다. 반면에 제물로서의 예수는 <완전한 제물>로서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의를 갖는다.   


(1) 완전한 인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은 반드시 인간이어야 했다. 인간의 죄는 인간 자신이 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의 동물 제사가 계속적으로 반복되면서도 인간의 죄를 사함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동물이 인간의 죄를 대신할 제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었다. 기독교 역사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실제적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가현설> <현현설> <환상설> 등등을 주장하였지만, 성경은 예수가 실제로 인간이었음을 증명하며 로마 역사도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증명한다. 로마 제국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카에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식민지에 대한 호구조사를 실시한 것<눅2:1-2>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로마 제국을 통하여 입증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2) 무죄한 제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은 전혀 무죄한 제물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죄로 오염된 제물은 자신의 죄 조차도 사함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처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태어났기 때문에 죄로 오염된 인간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았으므로, 죄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으로서 완전한 제물이었다.


(3) 무흠한 제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은 전혀 무흠한 제물이어야 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은 원죄와만 무관해서는 안 되고, 일상적인 죄와도 전혀 관계없는 완전무흠의 사람이어야 했다. 예수는 일생동안 단 한번의 죄도 경험하지 않은 완전무흠의 사람이었다. 당시에 예수를 제거하려는 자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으나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아무 흠도 찾아내지 못했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역시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아무 흠도 찾아내지 못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운명할 때에도 하나님께 자신을 모함한 자들을 용서해 달라는 탄원을 함으로서 자신의 무흠을 입증하였고, 그리하여 예수를 모함한 자들도 예수를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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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라는 명칭의 신학적 의미를 모르는 자들은 예수라는 명칭에 보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예수를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 <주> 등등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라는 명칭의 종교적 의미인 <구원자>를 높이 받들어 그의 지위를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표자> <주> 라고 하는 것은 비 신학적 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며, <주>도 아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될 때에 비로소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명칭 상으로는 다만 <제물>일 뿐이지만,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에는 <제물>로 정립되지 않고 메시야로서 <대속주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다.


다. 2) 그리스도.


  예수가 제물로서 메시야의 개인적인 명칭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중보자 메시야의 공적인 명칭이다. 이 명칭은 구약의 “마쉬아흐” <חישׁט, חשׁמ-기름부음을 받다 .에서 유래됨>와 동일하며 따라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한다. 구약시대의 선지자, 왕, 제사장들은 부름 받아 세워 질 때에, 반드시 기름부음 받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출29:7><fp4:3><삿9:8><삼상9:16,10:1><삼하19:10>. 그러나 선지자, 왕, 제사장 등등이 기름부음 받은 것과,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 받은 것은 전혀 다르다.

  선지자, 왕, 제사장 등등이 기름 부음 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영원한 선지자, 영원한 왕,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기름 부음 받은 것에 대한 예표와 상징이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메시야<그리스도>라는 명칭이 부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메시야로서 기름 부음 받았다. 때문에 <그리스도> 라는  명칭은 영원 전부터 오직 그에게만 부여된 유일한 고유적 명칭이었다.

예수라는 명칭은 단독적으로 <주-主>가 될 수 없는 반면에,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단독적으로 <주-主>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 자로서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한 대속주<代贖主>이기 때문이다.


라. 3)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메시야로 선포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의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한 것은 메시야가 갖추어야 할 필연적 자격 때문이다. 메시야는 인류 구원의 구속주<救贖主>가 아니라 대속주<代贖主>이다. 따라서 메시야는 인류 전체에 대한 대속죄제<代贖罪祭>를 치루어야 할 제물<祭物>로서의 자격과 대속주<代贖主>로서의 자격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자격을 갖춘 자는 인간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러한 자격을 갖고 계시다. 반면에 대속주<代贖主>는 구속주<救贖主>를 전제로 하여 존재한다. 구속주<救贖主> 없는 대속주<代贖主>는 전혀 의미가 없다. 이때에 대속주<代贖主>는 당연히 하나님이어야 하지만, 구속주<救贖主> 하나님과 의 사이에는 어떤 질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질서는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성자 하나님>보다 더욱 훌륭한 질서는 없다. 왜냐하면 대속주<代贖主> 하나님은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을 초월하지 않는 질서 안에 하나님이셔야 하는바, 그러한 존재는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성자하나님>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구속주<救贖主>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성자 하나님>


(1) 4) 인자.


  인자라는 명칭은 예수께서 가장 통상적으로 사용하신 자기 칭호 <自稱> 이다. 인자라는 명칭은 구약에서 <시8:4><단7:13><에스겔서> 등등에 나타나며,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라는 명칭을 40회 이상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일단의 학자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근거로 하여 그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 직분을 들어내시지 않고 의도적으로 은폐하려 하였다고 한다. 반면에 어떤 신학자들은 인자라는 명칭에 신적 권위를 포함한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어진 주장들이다. 인자라는 명칭은 문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자라는 명칭에 어떤 특별한 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비 진리이며 오류이다.

  반면에 우리는 구약 성경이 이미 메시야의 존재를 인자라고 선포하면서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했던 이유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면서 한편으로는 사람의 아들로 선포했던 것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 사이에는 연계될 수 없는 간격이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인 반면에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의 존재를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 선포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미 앞장에서 정립한 바 있거니와 메시야는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사람이어야 하는 특별성을 필연적으로 요구 받는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어야 하고,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신성>과 사람에게만 있는 <인성>을 다함께 소유해야 한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 <예수>로 오심으로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어야 하고,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하는 필연성을 모두 충족시킨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의 제반 여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정립해 주셔야 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따르기보다는 의심과 거부를 먼저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것을 조직신학적으로 정립할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예지하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의심과 거부로 인한 신학적 투쟁을 오랫동안 전개하였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적 속성에 대비하시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또한 사람의 아들이라는 점을 조직신학적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그를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인자>로 선포한 것이다.


  한편 인자라는 명칭은 문자상으로는 다만 <사람의 아들>일 뿐이지만, 그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에는 일반적인 사람의 아들로 정립되지 않고 메시야로서 하나님에 의해 <취하여진><사람>이 된다. 그는 일반적인 사람과 관계없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처녀의 몸을 빌리어 출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2) 5) 메시야<Μεσαις-Messias>


  메시야라는 명칭은 구약의 “마쉬아흐” <חישׁט, חשׁמ-기름부음을 받다>에 대한 헬라어 명칭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직분적 명칭이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메시야 직위에 세움을 받으셨고 성령으로 잉태 되었을 때와, <눅1:35> 세례 받으실 때에 <마3:16><막1:10><눅3:22><요1:32, 3:34>기름부음을 받으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수행 하셔야 할 사명에 대한 직분적 자격의 수여였다.


(3) 6) 주 <主-κυριος>


“주” 라는 명칭은 70인 역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 적용된다.


(1) 여호와와 동일한 명칭으로.

(2) 아도나이<ינדא>에 대한 표현으로.

(3) 하나님께 적용된 인간의 경의적 칭호에 대한 표현으로

    <주로 아돈-נדא>으로 적용된다<수3:11><시97:5>.


  신약 성경에서는 “주” 라는 명칭이 그리스도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적용 된다.


(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중하고 경의적인 인사의 형식으로.

    <마8:2; 20:33>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소유권과 권위의 표현으로. <마21:3; 24:42>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권위에 대한 최고적 함축어로서

<막12:36,37> <눅2:11; 3:4> <행2:36> <고전12:3> <빌2:11>


<주> 라는 명칭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질 때 그것은 그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주> 하고는 다른 것으로서 신적 권위자에 대한 종교적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주> 라고 부르도록 종용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계속하여 선포한 것을 근거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 로 부르도록 종용한 것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라고 가르쳤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계속하여 선포한 것이나, <아버지의 영광이 곧 자신의 영광> 이라고 주장한 것은, 자신이 <주> 라고 추대되어지기를 원함이 아니라 메시야에 대한 신학적 선포 들이며,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 이신 성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선포 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버지 안에 자신이, 그리고 자신 안에 아버지가 계시다>라는 선포를 통하여, 보다 확실하게 증거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 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를 즐거워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주> 라는 명칭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것은 사람의 종교적 관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의 결과라는 결론을 주저 없이 내린다.


(4) 7) 중보자<仲保者>


  중보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역할에 대한 용어다. 그러나 중보자라는 명칭은 종교적 명칭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때문에 일반 종교에서는 중보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중보자가 없기 때문이다. 중보자라는 명칭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명칭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화해-연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적, 직무적 명칭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중보적 직무를 수행했다고 믿으며, 특히 모세나 사무엘 같은 대선지자들이 중보적 직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아브라함도 언약의 당사자로서 중보적 직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한다.

  현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주장들을 더욱 발전시켜 목사들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중보 한다고 하여 목사를 중보자라고 하는가 하면, 이것을 오해한 자들이 전도하고 도고<禱告>하는 것까지도 중보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라고 선포한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이와 같은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근거로 한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구약시대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중보적 직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직무를 예표 한 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일시적으로나마 중보적 직무를 수행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성은 그 의미를 잃게 되며 따라서 그는 중보자로 오실 이유가 없었다. 특히 목사들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를 중보 한다고 하는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유일한 중보를 거부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유일한 중보를 목사들이 가로채려는 악행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유일한 중보는 거부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가로챔 당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이외에 더 있을 수 없으므로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오신 것이다.


(5) 8) 로고스<λογος-logos>


  로고스라는 용어는 말<언어>을 의미하는 헬라 철학적 용어인데, 헬라 철학이 말하는 로고스는 일반적인 언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권위를 갖는 법적 언어를 의미한다. 요한 사도가 로고스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자 하나님>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법적 권위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비롯한 모든 사역은 로고스<하나님의 절대적, 법적> 권위에 의하여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유효하다.


마. 3.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1) 1) 성육신의 주체.


  비하의 신분으로 강림하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 이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육신의 주체를 <로고스-logos>라고 선포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로고스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 이신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고유적 이면서도 특별한 명칭이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선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면서 아버지의 영광이 곧 아들의 영광이요 아들의 영광이 또한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선포함으로서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이 동일하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선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동일하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한편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선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법적, 행정적, 권위와 권세를 선포한 것이다.


(2) 2) 성육신의 필요성.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다음과 같은 절대적 필연성을 갖는다.


(1) 하나님의 영광 회복.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기쁨이 훼손되었으므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속죄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그 속죄의 제물은 죄로 오염된 피조세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성자 하나님께서 완전무결한 제물로 강림하시기 위하여 성육신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2) 하나님의 섭리 회복.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하나님의 공의적 징계가 내려짐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에 차질이 발생하였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인간의 속죄가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그 속죄의 제물은 죄로 오염된 피조 세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성자 하나님께서 완전무결한 제물로 강림하시기 위하여 성육신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3) 3) 성육신의 방법.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1) 동정녀 탄생.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반드시 정상적인 인간으로 출생해야 한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인간의 자연적 생산법칙에 의존할 수가 없다. 그것은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 출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성령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리어 이루어졌다.


(2) 이스라엘 왕가<王家>의 후손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이스라엘 왕가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으로 강림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다윗 가문의 후손인 요셉의 가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예수 그리스도 출생 당시의 이스라엘 왕은 헤롯이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두매<에돔>인으로서 로마의 분봉왕이었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은 그의 가문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없다.


(3) 대제사장으로서의 출생.


  예수 그리스도는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해야 하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서 출생해야 하지만, 아론의 반차를 따를 수 없었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예표하고 상징하는 것일 뿐,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인간인 아론의 대제사장직과 무관한 것으로서 영원한 것이어야 했다. 때문에 성경은 멜기세덱이라는 특별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직의 영원성과 완전성을 선포하였다. 성경은 멜기세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7:2-3>


  이 성경말씀은 멜기세덱이 실제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직을 예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와 관계없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 출생하신 것이다.


(4) 겸손한 출생.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으로 강림하시지만, 그는 모든 것을 완성하기 전에는 비하의 신분<하나님의 종의 신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때문에 그의 출생은 겸손과 검소의 상태로 출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이스라엘의 작은 고을 베들레헴으로 예고된 것<미5:2>과, 예수 그리스도가 마굿간에서 출생하였던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종의 신분으로서 겸손과 검소의 출생이어야 하는 제반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었다.


(4) 4) 성육신에 의한 변화.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신학적 과제이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변할 수 없는 신적 특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따라서 성육신으로 인한 하나님의 어떤 변화는, 그 논증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어떤 변화가 발생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초대교회의 어떤 신학자들은 이러한 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성육신을 하나님의 실제적인 성육신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영적 현현으로 대체 하였고, 또 어떤 자들은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실 때에 신성을 하늘 보좌에 두고 오셨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육신은 분명히 하나님의 실제적인 성육신 이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하나님 속성의 불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본질이나 속성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본질이나 속성은 절대적인 완전성과 영원적인 불변성을 소유하고 계신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본질적인 변화나 속성적인 변화가 발생되지 않는 것이다.


(2) 삼위일체 하나님 지위의 불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 할 때에, 세분 하나님 중에 한분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셨음으로 하늘 보좌에는 두 분 하나님만 계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삼신론<三神論>으로서 하나님을 셋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삼위일체론에서 이미 논증되었지만 하나님은 세분이시지만 결국은 한분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에 위<位>라고 표현하는 것은 세분 하나님이 실유로 존재하시지만 셋이 아니라 한분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할 때에 한분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 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 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를 사양하시고 비하의 신분으로 성육신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강림하셨기 때문에, 성자 하나님의 신성을 하늘 보좌에 두고 오셨다는 주장은 자신의 신학적 무지를 스스로 증거 한다. 기독교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정립하였으며, 그러한 신학적 정립은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은 두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만약에 신성을 하늘 보좌에 두고 오셨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일 수도 없고, <그리스도>로서의 능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5) 5)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1) 예수그리스도 고난의 성격.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 종들의 고난에 대한 예표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메시야로서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고난이었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는 섭리적 도구들로서, 그 사역을 감당함에 필요한 연단과 훈련이 요구되어 진다. 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연단과 훈련의 과정은 그들의 삶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고난의 과정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매우 다양하면서도 특별한 방법으로 연단시키시고 훈련시키신다.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의 삶은 일반 성도들의 삶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던 것은 그의 삶이 하나님의 종들의 삶에 대한 예표였기 때문이다.


(2) 예수그리스도 고난의 직접적인 사례들.


① 유년시절의 고난.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그의 공생애적 고난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증거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미 출생 때부터 시작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유추 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베들레헴의 마굿간 에서 출생하여 말구유에 뉘어졌다.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은 이미 출생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는 헤롯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했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부유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했다.


② 사단의 시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그의 본격적 고난은 사단의 시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사단의 시험은 그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최악의 상태였을 때 찾아왔다. 성령께서는 사단의 시험에 대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강건하게 무장시키지 않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최악의 상태로 인도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인도되어 40일 간의 금식을 한 후에 굶주린 상태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았다고 증거 한다. 사단의 시험은 당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상태로서는 가장 넘어지기에 적합한 것들이었다.<마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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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에 대한 고난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상 사단의 시험을 받아야 할 이유와 명분이 없었다. 그는 사단에 의하여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분 이었고, 그에게 존재하는 신성은 사단의 시험 따위를 받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단의 시험을 받았다. 그것도 최악의 상태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았으며, 그 최악의 상태는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서 결과된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서 여러 가지의 모순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진행된 사건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하의 신분인 <종>의 신분으로 시험을 받은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과 그 시험에 대비하는 성령의 준비하심은 하나님의 종들이 반드시 거쳐야하는 시험에 대한 전형적인 과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받게 될 시험에 관한 명분과 종류와 상태와 심각성을 계시 하셨고, 그 시험에 대처하는 방법과 자세를 또한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어지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결과를 또한 선포하셨다<마4:1-11>.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종들에 대한 계시적, 교육적 차원에서 시행된 것이었다.


③ 광야적 삶.


  예수그리스도의 공생애 삶은 거의가 광야적 삶이었다. 그에게는 밤이 되어도 돌아갈 만한 지정된 처소조차 없었다<마8:20><눅9:58>. 그는 언제나 빈들에 있었으며 광야에 있었다. 팔레스틴의 광야는 아라비아 사막과는 다른 것이지만 사람의 거주지로서는 적합할 수 없는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광야에서 자신의 공생애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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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광야적 삶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고난을 대신하기 위하여 오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광야적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의 고난은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고난으로 종결 되어질 것이며, 그 죽음이 그가 받아야 할 형벌의 궁극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그의 삶은 너무도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섭리에 의한 삶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하의 신분 곧 하나님의 종의 신분으로 왔다. 그리고 종으로서의 삶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살았다. 그의 삶은 바로 하나님의 종의 삶의 전형이었고 원형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종들이 살아야 할 삶의 원리였고 실제였던 것이다. 그는 섬기는 자의 원리와 위치와 삶의 정도<程度>를 논리적으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제적 삶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쳤다.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의 종들이 살아야 할 삶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교육이었고 교훈이었다.


④ 로마 법정에서의 재판.


  예수그리스도께서 로마 법정에 서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고난의 수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과 죽음은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가야바 대제사장이나 헤롯 대왕<헤롯.안디바-Herod.Antipas> 에 의하여 진행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과 죽음을 로마법정에 맡겼다. 만약에 가야바 대제사장이나 헤롯대왕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재판과 죽음이 맡겨졌다면 어떤 결과가 발생 하였을까? 그들은 틀림없이 예수그리스도를 정죄하였을 것이고, 자신들의 방법대로 목을 베거나 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살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고된 메시야의 재판과 죽음에 조화되지 않는다<신21:23><마20:19>.

  예수그리스도의 재판과 죽음은 무죄한 자로서의 정죄에 의한 죽음이어야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재판을 로마 총독에게 맡기셨던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의 로마법정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충족시켰다. 당시의 로마법은 매우 공정했으며, 따라서 로마의 재판에 대한 권위는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본디오 빌라도의 로마법정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함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정죄 받았고 로마법에 의하여 정죄되었다.


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나무 십자가에 의한 죽음이었다. 성경은 나무 위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적 죽음으로 선포한다<신21:23>.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라 하여 금기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훼손된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시키는 법적 공의에 의한 심판적 죽음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무<십자가>의 속죄적 죽음이어야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형제도는 유대적인 것이 아니라 로마적인 것이었다. 십자가의 사형제도는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이었고 치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 시민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정복지에서도 가장 비천한 죄수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 십자가에 의한 죽음은 일반적으로는 유대교와 로마제국 정부의 종교적 정치적 입장이 묘하게 연합된 결과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결과였던 것이다.


A.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범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곧 죽음이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인 반면에 그리스도는 로고스<성자 하나님>이시다. 인간 예수는 죽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로고스-성자 하나님>은 죽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별된다. 예수는 실제로 죽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죽음은 실제적인 죽음이지만 예수와 같은 죽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중보적 죽음으로서 사망 권세를 이기기 위한 사역적 죽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들의 죽음과 같은 차원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전제로 하는 죽음으로서 <생>과 <죽음> 두 가지를 모두 초월한 차원의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잘못 이해하여 실제적인 죽음이 아니라 형상적인 죽음, 가시적인 죽음, 환상적인 죽음, 신화적인 죽음, 등등으로 인식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히 실제적인 죽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을 초월한 죽음이다. 신학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신적 속성과 신적 능력과 신적 섭리에 의한 죽음으로서 부활을 전제로 한, 그리하여 <생사를 초월한> 죽음이라고 정립한다.


B. 삼일간의 장사.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는 아리마대 요셉에 의하여 치루어졌다<마27:57-60>. 본래 유대인들의 장례기간은 그의 신분에 따라 다르지만 팔레스틴의 기후가 몹시 덥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사망 당일에 장례를 치루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서 삼일동안 장사 지내어져 있었다. 이러한 삼일간의 장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예고한 장사 기간 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기까지 삼일간이나 무덤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그의 사역적 차원과 그의 신적 속성으로 볼 때에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자신의 장사 기간을 삼일이라고 선포했던 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확실성을 증거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부하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히 죽지 않았고, 따라서 장사된 후에 제자들에 의하여 치료된 후 건강이 회복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당시에서부터 제기되었던 주장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일간의 장사는 이러한 거짓 주장에 대한 대비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를 언급함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히 기념하라고 분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베다니의 시몬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을 때에,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당시로서는 최고급품 이었던 <나드> 향수 한 근을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을 씻기었다<마26:6-13><막14:3><요12:3-8>. 제자들, <특히 가롯 유다>는 이와 같은 마리아의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비난 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놀랍게도 평상시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마리아의 자기 섬김을 칭찬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서 반드시 함께 전하고 기념하라고 분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답지 않은 분부는 그리스도의 장례와 관련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향유를 통한 자기 섬김을 자신에 대한 장사로 선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장례에 대하여 어떤 분부도 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장례에 대한 분부를 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뜻밖에도 마리아의 행위를 자신의 장사에 대한 것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에 대한 장례의 의미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장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로고스로서의 장례>이고, 또 하나는 <예수로서의 장례>이다. 로고스로서의 장례는 부활이며, 예수로서의 장례는 매장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을 전제로 한 것이었음으로 죽음 자체로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는 것이며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으로서 어떤 죽음과도 비교 될 수 없는, 웅장하고도 장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장례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고 후례도 없을, 그러한 장례가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비하의 신분으로서 그런 장례를 용납 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장례에 대한 사실상의 최고성을 선포 하면서도 또한 가장 조촐한 장례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C. 음부에 내려가심.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전 3일 간의 활동에 대한 비 진리적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신학을 모르는 몇몇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장사된 후 3일 동안 음부 <지옥>에 내려가 노아시대에 죽었던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 했다고 주장 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 정죄되고 퇴출되었으나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에 의하여 근래에도 여전히 주장되고 있다. 저들의 주장은 다음의 성경을 근거로 한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 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하시니라.-벧전3:18,19>


<이를 위하여 죽은 자 들에게도 복음이 전파 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4-6>


저들의 주장대로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a. 그렇다면 죽은 자 들에게도 다시 한번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

b. 뿐만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도 음부 <지옥>에 갈수 있다.

c. 노아의 시대에 죽은 자 들에게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형평의 원칙에 위배된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은 매우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이 성경이 증거 하는 것은 그와 같은 것 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외적 소명>을 말하는 것이며,  노아 시대에 살았던 자들에게도 이미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⑤ 제자들의 배신.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제자들의 배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경을 괴롭게 했음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야바에게 심문당할 때에 그의 곁에는 놀랍게도 단 1명의 제자조차 없었다. 언제나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던 제자들이 단 1명도 없었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심한 배신감과 외로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베드로의 배신 행위였다. 그는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고 결국에는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를 배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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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제자들의 배신 기사를 통하여 적어도 두 가지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종들은 아무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의 배신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사람은 믿고 의지 할 존재가 아니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더욱 중요한 또 하나의 교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결코 버리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들을 버린 제자들을 일일이 찾으셨고 그들이 끝내는 하나님을 위하여 목숨조차 버릴 수 있도록 다독여 주셨다.

  하나님의 종들은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 어떻게 선, 후배, 및 동료, 동역자들과 협력을 유지해야 하는가를 정립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은 물론이고 동역자들간에 관계에서도 배신행위를 하지 말아야 하며, 반면에 어떠한 배신행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포용하고 관용하여 아름다운 결과를 이루어야 한다.


바. 4.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1) 1) 하나님 나라 선포.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먼저 전개한 사역은 하나님 나라 선포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지금까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된 하나님의 약속을 메시야 직분으로 확증하고 보증하는 것이었다.


(2) 2) 메시야 선포.


  예수 그리스도가 두 번째로 전개한 사역은 메시야 선포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선포는 지금까지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된 메시야 선포를 메시야 직분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3) 3) 보혜사 선포.


  예수 그리스도가 세 번째로 전개한 사역은 보혜사 성령의 사역에 대한 선포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보혜사 성령의 존재와 그의 사역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 직분으로서 자신이 부활 승천한 후에 하나님의 섭리를 적용하게 될 보혜사 성령의 존재와 그의 사역을 선포한 것이다.


(4) 4) 제자훈련.


  예수 그리스도가 네 번째로 전개한 사역은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고 교육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종 세움과 교육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승천한 후에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계속하여 진행하게 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앞으로 교회가 계속하여 하나님의 종을 세우고 교육하는 것에 대한 모범적 규례를 정해주신 것이다.


(1) 하나님의 종 세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을 세움에 있어서 지위, 권세, 권력, 명예, 학력, 경력, 등등을 고려하지 않는 전례를 세웠다.


(2) 하나님의 종 교육.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들을 교육함에 있어 신학, 신앙, 인격, 사명, 등등을 교육하였으며 이론적인 교육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실제적 삶을 통하여 완전하게 교육하는 전례를 세웠다.


(5) 5) 성례 제정.


  예수 그리스도의 다섯 번째 사역은 성례<세례, 성찬> 제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례 제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과 직무에 대한 영원한 기념으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과 직무에 대한 영원한 인정과 순종<신앙>에 대한 명령이었다.


(6) 6) 십자가 대속죄제.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사역은 십자가 대속죄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역을 마친 후에 드디어 자신의 본례적 사명인 십자가 대속죄제를 하나님께 드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지금까지 선포된 메시야 직무에 대한 실행<實行>으로서 기독교의 근본원리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점을 오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 이전에는 기독교의 근본 원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미 앞장에서 정리한바 있거니와 기독교의 근본 원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신적 작정하셨을 때에 이미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는 그것을 인간에게 확인시켜 주고 보장해 주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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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1) 1) 부활의 의의.


  현대 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의 차원 높은 인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의 부활에서 어떤 신학적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으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아예 거부하거나 아니면 관념적인 차원에서의 부활을  거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또는 거부하느냐? 하는 것에 달린 문제가 아니며, 또한 신학자들이 그것을 어떠한 차원에서 어떻게 정립하느냐? 하는 것에 의존 하지도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필연적인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그것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지 않고 다만 묵묵히 그것을 선포한다. 우리는 성경이 선포하는 바에 따라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이행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 이래 성자 하나님과의 구속언약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은혜언약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인류구원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요3:16> 에 집약 되어진다. 성부 하나님의 이와 같은 약속은 결국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통하여 완성 되어졌고, 그와 같은 완성의 결과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증명 되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언약의 이행을 증거 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섭리역사에 의한 결과이며 결론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구속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완전하게 완성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종결 된다면 인류의 구속은 실패로 끝난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활만을 선포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부활을 약속하고 선포하였다. 성경은 이와 같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고전15:20><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 -골1:18> 등등으로 선포한다. 성도의 부활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보증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도 부활에 대한 약속과 선포는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증거 되었으며, 당시의 성도들의 부활을 통하여서도 증명 되었다.<마27:52-53>


(4)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증거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그가 다시 살아나서 육체와 영혼이 재결합 되어졌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지 그와 같은 상태적인 의미에서 끝난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로운 피조물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니고데모>에게 거듭난 자를 설명한 것<요3:1-8>과 사도들이 계속하여 선포한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중생 되어진 성도들의 신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기능을 갖춘 새로운 영적, 육적 존재 <현세의 것과는 전혀 다른>를 의미하는 것이다<고후5:17><갈6:15><엡4:24><골3:10>.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전혀 새로운 상태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속죄함을 받은 영혼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의 삶에 합당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은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인간의 부활은 자체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부활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성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부활에 참여 하는 것-빌3:10; 계20:6>으로 선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역사의 출발이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여 이제 옛것을 벗어버리고<고후5:17><빌3:10> 새 하늘 새 땅 <계21:1> 에서 영원무궁한 삶을 살게 된다.


아. 2) 부활의 창시자.


  예수그리스도는 자신을 부활과 생명으로 선포하였고<요11:25>, 자신이 성전, 그, 자체임을 선포하셨다. 자신이 그것을 헐었다가 다시 세울 것 이라고 호언함으로서 자신의 부활을 선포하며<요2:19-21>, 심지어는 자신에게는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선포 한다<요10:18>.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선포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단독적인 능력적 역사로 인식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의 능력적 역사로 증거 한다<행2:24, 32; 3:26; 5:30><고전6:14><엡1:20>. 특히 <롬6:4><갈1:1><벧전1:3> 등등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성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선포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 할 때에 성부 하나님의 단독적인 역사하심을 말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삼위일체적 역사하심을 선포한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1) 3) 부활의 범위.


  어떤 학자들은 예수는 제물로서 취함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 대속죄제를 완성한 후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죽음으로 종료되었으며 메시야인 그리스도만 부활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고 증거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의 활동을 통하여 증거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한 후에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먹으므로 자신의 완전한 부활을 증거 하셨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고 메시야인 그리스도만 부활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의 부활을 보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4) 부활 교리에 대한 오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대하는 자들은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 인간의 신체는 사후<死後>에 자연적으로 부패되어 붕괴되어짐으로 특히 3일이나 경과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체가 다시 복원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매킨토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예수의 지상적 몸을 구성했던 탄소, 산소, 질소 및 여타의 원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편 래쉬달 박사<Dr.Rashdall>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이보다 50배나 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초자연적인 가설도 그리스도의 부활보다는 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과학을 초월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도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실제이다.


(1) 부활의 사실을 교묘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들.


① 허위 설<The falsehood theory>


  허위 설은 제자들이 무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도적질해 간 다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고 거짓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허위 설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 대표자격인 켈서스<Celsus>는 예수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허위 설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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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부하는 주장들 중에 제일 먼저 제기된 것이 허위 설이다. 허위 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에 의하여 즉시 유포되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일 두려워한 것은 가야바를 비롯한 제사장들과 헤롯, 및 바리새파 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수시로 선포한 자신의 부활을 믿지 않았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그의 부활이 사실로 나타날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다. 때문에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봉쇄하도록 요청하였고, 빌라도가 그것을 거절함에 자신들의 병사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였고, 이에 당황한 그들은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허위 설을 유포시킨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병사들의 허위 설 보다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소식이 더욱 강하게 전파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에 의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유대는 물론이요 사마리아를 비롯한 근동 일대에 순식간에 전파되어진 것이다. 결국 허위 설을 유포한 자들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나, 유대교도들은 자신들의 자존심 때문에 허위 설을 억지로 믿었다.


② 기절 설. <The swoon theory>

                 

  기절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아예 3류 소설을 써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한 상태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여자들이 병사들이 졸고 있을 때에 그의 시체를 훔쳐내어 치료함으로 다시 살리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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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절 설은 많은 반대를 받았다. 여자들 몇몇이 어떻게 무덤 문을 막고 있는 그 큰 돌을 굴려내고 예수그리스도의 시체를 훔쳐 낼 수 있었을까?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반대와, 병사들의 창에 의하여 물과 피를 거의 다 쏟아 버린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완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었을까? 하는 것과, 만약에 살아있었다 할지라도 어떻게 3일 만에 회복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등등의 반대를 받은 것이다.


③ 환상설.<The vision theory>


A. 주관적 환상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오직 구세주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구세주가 약속한대로 돌아오실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자신들이 구세주를 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구세주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신앙으로 인하여 신경과민 상태에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러한 환상적 현상이 일어났고 그 환상의 불길이 다른 제자들에게도 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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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환상설도 많은 반대를 받았다. 먼저, 제자들이 구세주에 대한 그토록 강한 믿음을 가졌다면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행동을 보여주었을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잡혀 갔을 때 제자들이 한결같이 배반하고 도망한 것을 증거하며, 그들이 일상적인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 간 것을 또한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지키며 애통해 했던 것은 오직 여자들 몇 명뿐 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과연 그렇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동일한 내용의 환상적 현상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또한 그러한 현상이 3일 만에 일률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다.


B. 객관적 환상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복음 전파를 계속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이적적인 환상들을 제공하시어 제자들이 그, 환상을 보게 하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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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관적 환상설은 주관적 환상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기되었으나 역시 많은 반대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한 초자연적 현상들을 제공 하셨다면 어찌하여 보다 실직 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 <부활>을 택하시지 않고 그보다 약하고 속임수에 불과한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인가? 하는 반대를 받은 것이다.


④ 신화설.<Mythical theories>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반대하는 새, 신화학파<new mythiccal school>가 일어났는데, 이 학파는 환상설이나 유령 설을 부정하였다. 저들은 바벨론이나 동양의 여러 나라로부터 전달되어진 전설적 이이야기들을 도입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의 신화적 전설로 만들었다. 저들이 제기한 신화 설은 몇 가지 형식으로 조성되었으나 모두가 황당한 것으로서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로부터의 지지도 받지 못하였다.


자. 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사역.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후에 사십 일간 현세에 머무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 하였고, 제자들을 독려하였으며 특히 베드로를 통하여 사랑의 목회원리를 세워주셨다<마28장><막16장><눅24장><요20-21장><행1:1-9>,


차. 7. 그리스도의 승천.


  그리스도는 부활한지 사십일 후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부활만큼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충분하게 증거하고 선포한다<막16:19> <눅24:50-53><요6:62;14:2,12;16:5,10,17,28;17:5;20:7><행1:6-11><엡1:20; 4:8-10><딤전3:16><히1:3; 4:14; 9:24>.

조직신학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승귀의 신분>이라는 주제 하에 다음과 같이 정립한다.


(1) 1) 승천의 의의<意義>.


(1) 부활에 대한 보증과 완성.


  예수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에 대한 보증이며 완성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다 높은 영광의 생애에로 이전 하신 것은 부활에서 시작되고 승천에서 완성되었다.


(2) 성육신의 종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후에도 여전히 인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역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제자들과의 남은 교제<마무리>를 위해서였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인성을 제하여 버린 상태로 제자들을 찾으셨다면 그들은 그를 자신들의 스승으로 인정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는 승천하기 까지는 인성을 소유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승천하면서 성육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제하였다. 이제 그에게는 성육신으로서의 잔존함이 전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제물의 필요성 때문에 <취하였던> 예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므로 제한 것이다.


(3) 로고스<성자하나님>의 복귀.


  중보자로서의 모든 사역을 완성한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제 지상의 생활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로고스 <성자 하나님> 으로의 복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로고스 복귀가 승천이라는 가시적인 방법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로고스 복귀는 어떤 절차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시적인 승천은 어떤 면에서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전설적, 또는 신화적 방법이었다. 그리스도의 로고스 복귀가 가시적인 승천이었던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였다. 인간의 유한성은 언제나 가시적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유한성은 가시적인 승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로고스 복귀를 믿게 되며, 자신들의 승천을 확신한다. 그리고 또한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게 된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로고스 복귀는 가시적인 것이 되었으며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1>라는 천사들의 선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승천한 로고스는 우리에게는 영원히 구주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그리스도를 로고스 <성자 하나님>으로 말하지만 구원과 관계된 로고스를 말할 때에는 로고스, 또는 성자 하나님으로 말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한다. 그는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이시며 교회의 영원한 머리이시며, 장차 심판주로 재림하실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신, 인 예수 그리스도<神人-God man-Jesus Christ>가 아니라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Logos-Jesus Christ>이시다


(2) 2) 승천의 범위.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메시야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었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메시야의 승천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메시야의 부활과 승천은 다르다. 메시야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지만 메시야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승천이다. 예수는 제물로서 취함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 대속죄제를 완성한 후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나 성도의 부활을 보증해야 하기 때문에 부활까지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메시야의 승천은 성자 하나님으로의 복귀이기 때문에 예수의 승천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 승천의 주체<본질>은, 신인<神人-God man>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로고스 <성자 하나님> 이시다.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도들의 승천을 확증시켜 주고 보증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따라서 거기까지만 예수의 사역이 진행되었고 그리스도가 성자 하나님으로 복귀하실 때는 예수는 포함되지 않는다. 예수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취함 받았다가> 사명을 다한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운명 하실 때에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였다<눅23:46>.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승천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승천하였다면 성자 하나님 안에 인간 예수가 존재한다. 그렇게 되면 성자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는 승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부탁한 영혼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 영혼은 과연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스도는 일위<one Person> 안에 2성<two Nature>을 소유하셨지 2영혼<two Spirit>을 소유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 부탁한  그의 영혼은 인적 영혼<Human Spirit>이다. 그리고 그, 인적 영혼은 자연적인 출생에 의하여 존재하는 일반인들의 영혼과 같은 영혼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 특별한 영혼이었다. 조직신학은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취했다>라고 표현한다. 그 영혼은 그리스도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의 과업을 완수 했을 때 임무를 다하였음으로 더 이상 존재할 명분이 없게 됨에 따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혼이 소멸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성육신이나 부활 같은 역사적 사건들은 성령 하나님에 의하여 발생하고 종료 되어지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섭리들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과 섭리에 전혀 결례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취했다>라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등등의 표현을 적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한편 우리는 그렇다면 그리스도에게는 신적 영혼<Divine Spirit>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라는 의문에 대하여 대답해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존재하는 신적 영혼<Divine Spirit>이란 결국 성령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대답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신적 영혼, 곧 성령 하나님은 결국 유일하신 한분 하나님이시다. 유일하신 한분 하나님은 시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신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신학적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편재하심> 또는 <하나님의 편만하심>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육신하시기 전이나 성육신하신 후에나 동일하게 <영>으로 존재하신다. 성육신하시기 전의 성자 하나님과 성육신하신 후의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는 동일한 성자 하나님 곧<로고스>이신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 하였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대답해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립된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실제로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 중보자로서 <다 이루어진-요19:30>자신의 사역완수를 주권주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보증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며.

둘째. 중보자<대표자>로서 자신의 대속죄제를 통하여 구원받는 모든 자들의 영혼을 사면권주 이신 성부 하님께 맡기는 것이다.


카. 8.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예수 그리스도는 가야바 대제사장 앞에서 자신이 장차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되실 것을 선포 하였다<마26:64>. 베드로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선포를 주제로 하여 아름답고 멋진 설교를 전개한다<행2:33-36; 5:31>. 이외에도 성경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에 대하여 여러 차례 선포하고 있다<엡1:20-22><히10:12><벧전3:22><계3:21; 22:1>.


(1) 1)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의 의의.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심 이라는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마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매우 훌륭한 옥좌<玉座>를 놓고 그 위에 위엄을 갖추어 앉으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시, 공간을 초월하여 편재, 편만하심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그와 같은 개념은 성립조차 될 수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로고스적 직무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단순히 신적인 권세와 위엄과 영광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의 중보적인 사역을 계속하신다.


(1) 제사장으로서의 사역.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 하셨을 때에, 그 <다 이루었음>은 그의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무를 다 이루었음이 아니라 그의 성육신을 통한 지상에서의 직무를 완성했다는 것이었다. 성자 하나님으로 복귀한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영원히 수행한다. 그는 하나님과 백성들의 교제를 연결하며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하여 언제나 간구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안전하게 보호되도록 하나님께 서원하며, 하나님의 종들의 수고와 충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영원히 중재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제사장 직무를 다음과 같이 증거 한다<슥6:13><히4:14; 7:24,25; 8:1-6; 9:11-15,24-26; 10:19-22><요일2:2>. 성도가 하나님께 진정과 신령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기 때문이다.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응답받는 것은 영원하고 완전한 중보자<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기 때문이다.


(2) 왕 으로서의 사역.


그리스도는 우주적인 만왕의 왕으로서 다음과 같은 통치권을 행사한다.


A. 천군 천사들을 지휘하고 통치한다.

B. 우주만물의 생성과 결실을 주관한다.

C. 그의 성령으로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을 통치하고 보호한다.

D. 지상의 세계 만국을 통치한다.


(3) 선지자로서의 사역.


  그리스도는 또한 성령을 통하여 그의 선지자적 직무를 계속한다. 그는 승천에 앞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교육을 시행하였고 그들에게 복음전파를 비롯한 교회의 직무를 부여하였으며, 제자들이 그 직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약속하였다<요14:26; 16:7-15>. 그리스도의 약속은 오순절 날에 성취되었고 그날 이후로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자신의 선지자적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2) 2) 로마 카토릭의 오류.


   로마 카토릭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가 지상의 권력자들처럼 옥좌에 앉아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저들의 그와 같은 어리석음은 마리아 승천 설에서 절정을 이룬다. 저들은 마리아의 위상을 드높여 영원한 동정녀의 위치에 좌정시켰고, 성모<聖母>라는 호칭을 부여하였으며,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드디어는 마리아를 불사신으로 추대하여 살아 승천한 것으로 조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의 옥좌를 그리스도 우편에 마련하였고, 그가 그리스도의 직무에 직, 간접 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로마 카토릭이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욱 효과가 있다는 저들의 허무맹랑한 교설 때문이다. 로마 카토릭은 마리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가설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 처녀설, 마리아 무흠설, 마리아 승천설이다.


(1) 마리아 무흠설.


  저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에게 죄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여 마리아 무흠설<무죄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리아 무흠설<무죄설>은 마리아의 실존성을 부인하는 동시에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를 거부하는 결과를 도출한다. 아담의 후손 중에 죄 없는 자는 없으며 따라서 마리아가 죄 없는 존재라면 그는 실존재가 아니라  <어떤 존재>의 현현이나 임재가 되고,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도 <현현>이나 <임재>가 되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2) 마리아 처녀설.


  저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가 인간과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여 마리아가 영원히 처녀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들을 마리아가 낳은 자들로 보지 않고 요셉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이복형제로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역시 전혀 비성경적이며 비논리적이다.


(3) 마리아 승천설.


  저들은 마리아의 무죄설을 옹립함과 동시에 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마리아는 죽을 수 없는 성스러운 존재이므로 죽지 않고 승천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편에 앉아 예수 그리스도의 정사를 돕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리아<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이 추가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낳으신 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하여 그를 죽음 가운데 버릴 수 없었으며 따라서 마리아가 죽지 않고 살아서 승천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승천 할 때에 하늘로부터 땅에까지 황금빛 주단이 내려 깔리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옥좌에서 내려와 마리아를 영접하여 자기의 옆에 마련해 놓은 보좌에 앉혔다는 것이며, 효성이 지극한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이 기도 할 때에 들어주지 않으려 하다가도 옆에서 마리아가 들어주라고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하고 들어준다는 것이다. 때문에 로마 카토릭은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 더욱 효과가 있다하여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것이다.<그러나 현대의 카토릭 사제들 중에는 이와 같은 사상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주장들은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며 일반종교 <특히 불교>에서 도입한 것으로 일종의 우화나 전설과 같은 3류 소설에 불과한 것이다.


 

출처 : 복있는 그리스도인
글쓴이 : 예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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