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리스도의 임재와 관련하여 주의할 점(2) / 휴 마틴
3) 그리스도의 임재와 인간성
그리스도의 임재가 '인간성(인간 고유의 구별된 본성적 특징)'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인격이 내주하심으로써 마치 우리의 본성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거나 더욱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특별한 주의점으로 시간을 지체하기보다는 일련의 논리적 완성을 위하여 글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 정도에서 이와 같은 잘못된 개념이 주는 폐단에 대해서만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인간보다 우월하면서도 하나님보다는 열등한 본성이나 아예 인간과는 전혀 다른 본성으로 피조된 존재가 내 안에 들어와 산다면, 그것은 확실히 나의 본성의 본질적인 요소를 위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우 양자 사이에는 적지 않은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였습니까? 진정 그것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까? 실제로 그런 상황을 상상해 본다면, 아마도 인간성의 근본적인 특징이 사라지고 그 대신 인간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무엇인가 초인적이고도 특별한 존재로 대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살아 계신 분은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은 나의 인간성을 창조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나의 인간성을 온전히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것을 존중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것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셨던 그분이 내 안에 계셔서 오직 '그리스도의 임재'로 나를 가득 채우실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4:13) 이르도록 인도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초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인성은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것과 다르지도 않습니다. 그분의 인성은 가장 진실하고도 참되며 왜곡되지 않은 온전한 인성입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롬8:29)인 자신을 따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을 모든 왜곡과 타락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성의 진정한 능력과 가능성을 이끌어 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성령의 거하심이 무엇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무엇이 성취되는지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성령으로 자신이 이룬 것을 어느 정도 우리 안에서 이루실 것이며, 이미 성령으로 이룬 것을 순종을 통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에 두셨던 법을 우리 마음에도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을 살리실 것입니다'(롬8:11 참고).
이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하실 것이며, 우리의 몸을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간성 전체를 구속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흥미로운 의문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습니다.
4) 그리스도의 임재와 신자의 개성
그리스도의 임재가 신자의 독특한 개성을 제한하거나 가로막지는 않습니까? 각 사람에게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다양성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독특한 개인적인 특성을 소멸시키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아 제한되거나 사라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것이 아닌 잡다한 것들은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거짓되고도 간교한 이전의 인간 잡동사니들이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아 말끔히 사라져야 합니다. 그때 도덕 세계에 존재하는 강력한 분리의 장벽과 자연 세계에 존재하는 바다와 산과 강조차도 완전히 와해되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시114:5-7).
시간과 공간, 지구의 직경이나 수천 년의 역사에 의한 분리, 계급이나 신분, 언어나 민족, 혈통이나 인종에 의한 분리가 동일하신 그리스도의 영의 능력 있는 생명과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구속적 사랑의 절대적 주권 앞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
특히 왜곡된 개성과 색다른 것을 추구하는 성향, 과격하고 신경질적이며 형제에게 상처를 주고 상호 불신을 조장하는 성격,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기보다는 경계하고 의심하며 시기하게 하는 모난 성격은 그리스도의 임재가 풍성 할수록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요구한 조화입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4:4).
그렇다면 이 말씀이 다양성을 부인합니까? 과연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절대적이고도 피동적인 획일성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가 원하는 바가 모든 사람들이 판에 박은 듯 동일해지는 것일까요? 그가 말한 한 성령, 한 몸이 과연 그런 의미일까요? 바울이 몸과 성령과 소망과 믿음과 세례가 하나일 뿐만 아니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그 가운데 계신 만유의 아버지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엡4:6 참고) 독특한 은사나 취미나 재능이나 성격 등 모든 다양한 개성을 다른 지체들을 위해 포기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했을까요? 과연 그의 의도가 그것을 인정하거나 권장하는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마치 그러한 결론을 미리 차단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4:7).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문맥상으로 보아 이것은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라는 문장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앞뒤를 바꾸어 봄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나타낼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은 하나이나 은사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가 사람들을 구속하거나 제한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개성이 위선적이거나 왜곡되어서 한시라도 빨리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창조하신 분으로 인해 위축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분을 마음에 모신다고 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다양성을 원하시며, 이러한 개성을 통해 사람들을 특별히 구별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개성을 지닌 채로 그분에게로 나아갑니다. 죄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피조물로서 '있는 모습 그대로' 그분에게로 나아갑니다. 모든 사람이 그분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셨음을 믿고 그분에게 그 영혼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수학적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개체일 뿐만 아니라, 복잡하고도 다양한 유기체를 구성하는 독특하고도 구별된 지체라는 점에서 모든 것이 구속자의 사랑과 관심의 대상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몸의 한 지체로서 너무나 위대한 시간과 영원 속에서 주어진 일에 헌신합니다. 이 헌신은 단지 늘어난 한 사람(한 명의 지체 또는 일꾼)의 몫에 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오직 우리만이 감당할 수 있는 개인적 헌신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임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개성이 제한되거나 위축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 가치가 처음으로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지금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마21:3 참고). 실제로 개성이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이제 곧 드러나고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는 우리의 개성을 모든 왜곡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전적으로 순종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개성을 창조하고 완성하고 온전하게 하실 창조주께로 그것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지으신 그분의 손에 개성을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그것을 왜곡되지 않은 본래의 참된 성향과 기질과 독특한 특성을 가진 모습으로 되돌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우리의 개성에 대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계획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모방하여 따르는 개성의 굴욕적인 복종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교제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것은 마땅히 그분에게 해야 할 복종을 제한하는 것이며 일종의 배교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모든 형제들이 맏아들을 온전히 본받되 그들의 다양성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러할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와의 관계 형성과 관련된 모든 일에 그 아들을 본받음으로써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천부적 재능이나 섭리적 훈련, 은혜로운 의사소통 등 모든 것을 보존하고 온전하게 할 것입니다. 또한 이 모든 다양성을 받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으로 그것을 가득히 채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것을 믿지 못합니까?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살아 계신 분이 단지 사람이라면(자체적인 모순이 없다는 가정하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도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신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성령 하나님을 통해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분 안에 한량없이 계셨던 성령이, 인간의 본성 속에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과 한량없이 함께하셨던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모든 인간성을 풍성히 채우실 것임을 확신하십시오. 그분은 참으로 우리의 독특한 성격과 개인적인 은사와 능력을 잃게 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것들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어떤 편향됨이나 유별남이나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나 특이한 성격이나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잡다한 개성 같은 것이 없습니다.
신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특별한 은사나 은혜나 재능이나 독특함은 모두 각자의 분량대로 받은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4:7).
그러나 이 말은 모든 '동료보다 뛰어나신' 그분에게는 결코 해당되지 않습니다(시45:7 참고). 그분은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3:34).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4,16).
그분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4:10).
또한 같은 서신에서 우리는 동일한 맥락의 언급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엡1:20-23).
그분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분의 충만함입니다. 그분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함께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계14:1)과 그 숫자가 상징하는 바 아무도 셀 수 없는 허다한 무리 안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거룩한 공동체, 영광으로 온전하게 된 유기적 조직 전체가 그리스도로 충만해질 것이며, 그리스도가 그들 모두 안에 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의 충만함'의 표현으로서, 그분이 '장차 올 세상에 나타내실'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영광스러운 사도들, 선지자 무리, 순교자 행렬, 교부들과 청교도, 신앙고백자와 개혁자들,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는 신앙인들, 한마디로 아브라함의 후손 모두가 빛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오, 그들이 함께 모일 마지막 날 영광의 별들로 충만해질 하늘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하늘 역시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15:41)라는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와 생명으로 모신 하나의 유기체인 교회 안에 존재하는 놀라운 다양성은 매력적인 논제입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로 밀미암아 각 지체의 특별한 기호나 능력이나 지위가 손상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본받되 자신만의 전형이나 특유의 방식을 지향하지 못하게 하거나 자신만의 특별한 은사를 자유롭게 개발하지 못하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자리를 묵묵히 지키면서 그분의 말씀의 교훈과 성령의 지혜를 따라 우리의 개성에 합당하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의 자리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 일에 만족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만약 그 일을 벗어던진다면 몸의 기능이 약해지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몸의 지체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고전12:15,16).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은 만일 모든 기능이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한다면 도대체 몸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고전12:17-19)
다만 많은 지체가 있을 뿐 성령이 하나이기 때문에 몸은 하나입니다. 말하자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고전12:13)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각자의 개성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보호하고 지키시며, 마음껏 펼치고 발휘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십니다. 그분의 임재로 말미암아 모든 지체의 개성이 존중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동시에 하나의 유기체로서 동일한 성령 안에서 동일한 생명의 전율을 느끼며,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시며 만유의 생명이요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붙들게 됩니다.
여기서 간단하면서도 매우 가치 있는 한 가지 적용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앞에서 그리스도의 임재가 책임감을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성시키고 일깨워 준다는 사실을 통해 살펴본 바 있습니다.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마음 판에 새겨질 때 우리는 내적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거듭난 심령은 깨끗해진 양심의 요구를 기꺼이 수용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자극하는 율법은 밖에서 우리에게 명령하는 율법과 동일합니다. 이 아름다운 조화는 우리의 속사람에게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하며, 언제나 미래지향적이고도 풍성한 소망으로 넘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생명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개인적 재능과 자신만의 색깔, 취향이나 특색이 최대한 발휘되고 드러나야 하며, 그것을 위한 환경과 여건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두 번째 의미에서의 자유, 즉 개성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종종 가장 필요한 형식(demanding form)을 통해 성취되곤 합니다. 그것이 언제나 친절하고도 깍듯하며 사랑스러운 젊은이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며, 정신적 성숙이나 불굴의 의지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친절함이나 지혜, 또는 정신적 성숙과 같은 요소를 배제한 채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논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이러한 자유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인식되어 왔더라면, 그래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는 살아 있는 신앙이 어떻게 선하고도 의로운 규제 속에서 이러한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지금까지 기독교가 기독교의 실제적 모범과는 부당하게 또는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우리를 속박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다소 성가시게 하고 짜증스럽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편협하거나 균형감을 잃어 버리기도 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열정이나 능력이, 또 한편으로는 조용하고도 진지한 규제가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성장의 지연이나 불균형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관용과 친절이 부족하여 냉정하고도 엄격하게 오직 원리만을 내세우기도 했을 것이며, 또 힘과 용기가 부족하여 한없이 나약하기만 한 친절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분발시켰던 모범적 신앙의 전형 속에서 자신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는 어떤 식견이나 열정을 발견하지 못하여 그것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을 전적으로 바쳐서 기꺼이 헌신할 만한 일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우리는 공의를 행하거나 자비를 베푸는 등 자신이 기독교의 몇 가지 형식을 싫어할 뿐 기독교의 본질적인 정신에 적대감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믿게 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싫어하는 특정 형식을 굳이 받아들일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아직 어리거나 젊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진지하고도 강한 의심에 사로잡혀 있거나 특별한 개인적 재능에 도취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의 놀라운 세계나 깊은 사색에 빠진 사람이나 예술적 열정이나 사업적 기질이나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 기독교는 결코 할머니에게나 어울릴 만한 경건을 강요하거나 촉구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러한 경건의 형식이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친절한 권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성격과 세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루 종일 난로 곁에서 조용히 찬송가를 흥얼거리는 동안 우리는 치열한 삶의 현장과 맞서야 하며, 다른 사람이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불안한 생각과 의심과 두려움을 헤쳐 나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경건의 정신이나 본질을 싫어한다면 그 형식이나 전형을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정신을 존중한다면, 결코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경건의 정신만큼은 존중해야 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난 그였기에
이해력도 떨어지고 지혜도 없었지만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똑똑한 프랑스인은 그것도 모릅니다.
특권을 받은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하늘의 보화에 관한 글을 읽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기호와 재능과 과학과 예술과 사색에 대한 진보와 기쁨의 성향을 그 발아래에 내려놓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그의 정신의 일부분과 바꾸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고도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받았던 것과 동일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모든 취미와 재능과 기술과 과학과 탐구를 유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받은 모든 학위는 그것을 겸손히 사용하라고 제공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와 우리의 모든 개성 위에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전적으로 채우고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인격 안에는 조금도 구속되거나 위축된 성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임재로 인하여 구속되거나 위축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특별한 지체'인 우리의 모든 마음과 영혼을 자신의 임재로 채우고 회복시키며,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능을 치유하고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선하고도 온전한 정신적 은사를 필요에 따라 공급해 주십니다. 그분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들이 무엇을 배워야 하고 어떻게 온전해질 수 있으며 또 그분의 나라를 위해 어떠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그들에 대한 그분의 인식은 합당합니다. 그분은 오직 그들을 창조하신 분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움과 관심으로 그들을 대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그들을 절대 억압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대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을 그분에게 전적으로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그분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전적으로 만족시키실 것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모든 시대를 꿰뚫어 보시는 그분이 우리의 개성에 적절한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자신을 내주신 그분이 자유롭고도 건전한 동인을 부여하고, 확고한 행동과 풍성한 열매와 앞으로 해야 할 일과 그 결실에 대한 위대한 소망을 주실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곻3:17) 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장 분명한 결론입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분은 바로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휴 마틴의 [그리스도의 임재]_10. '백성들 안에 임재하신 그리스도' 中에서 발췌(257-270p)
출처 자기부인/rmf/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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