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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약성서의 새로운 이해

하나님아들 2017. 7. 18. 23:27

신약성서의 새로운 이해


제1장 신약성서의 배경

신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서뿐만 아니라 구약성서가 완성된 이후 신약성서가 기록되기까지 약 사백년의 역사와 신약성서가 다루고 있는 시대와 장소의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1. 역사적, 정치적 배경

기원전 587년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모든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그곳에서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살았던 유대인들은 이국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좌절하거나 동화되지 않고, 야훼를 믿는 전통과 신앙에 기초한 미래의 희망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과거를 반성하고 신앙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율법을 편찬하고 준수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였다. 이 움직임을 ‘메시야 대망 사상’이라고 부른다. ‘메시야(Messiah)’란 히브리어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구약성서에서 왕이나 제사장에게 ‘기름부어’ 임직(任職)하게 하였던 전통에서 유래하는데, ‘민족을 구원해 줄 임무를 띤 사람’이라는 뜻이다.

기원전 539년 바빌론제국이 무너지고 페르시아 제국이 수립되었을 때 잡혀간 유대인 중 일부가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수리하고 다시 쌓으며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독립을 얻지는 못했다. 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독자적인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는 있었지만, 적지 않은 세금을 지배자들에게 바쳐야 했고, 군사적으로 무장할 수는 없었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점점 큰 꿈으로 부풀어갔다.

기원전 332년 그리스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전역을 정복하고 대 헬라(Greece) 제국을 세움으로써 유대인들은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 이외에 헬라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이 상황은 예수 시대까지 계속된다. 헬라 풍의 도시 문화와 오락, 군사 문화가 팔레스틴에도 파급되었다.

기원전 175년 셀류커스 왕조의 안티오커스 4세가 유대땅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한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안티오커스 대왕은 이스라엘 지역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지역을 강력하게 장악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종교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에 기원전 167년 맛다디아라 불리우는 한 시골 제사장이 중심이 된 반란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164년 가시적인 군사적 승리를 얻음으로써 마침내 정치적인 독립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142년 유대인들은 세금 면제의 혜택을 받았고, 기원전 104년 드디어 왕이란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스몬 혹은 마카비(Maccabees) 왕가가 탄생한 것이다.

 

마카비 가문이 쟁취한 이 정치적 독립은 메시야 대망 사상에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을 낳았다. 이 사건을 그들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에,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한 메시야 대망 사상은 몇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조건이 현실에서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다윗 왕의 후예가 아니라 마카비 가문 출신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리 현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그들의 현실을 메시야 대망의 꿈이 실현된 것으로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더 절박한 민족적 희망으로 계속 자랄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64년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왕위 승계 문제로 첨예한 대립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지중해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고 있었던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Pompeius)에게 중재를 요청했고, 로마군이 예루살렘에 무혈 입성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은 유대인들에게 대제사장 이상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에 유대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방인 출신의 헤롯 가문을 ‘유대인의 왕’으로 등장시켰다. 이 후 종교적으로는 유대인 대제사장이, 정치적으로는 헤롯 가문이, 군사적으로는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로마 제국이 팔레스틴을 지배하는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시저가 살해당한 후 로마의 쌍두 통치 체제를 형성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3년 헤롯 대왕을 ‘유대인의 왕’으로 임명했다. 헤롯 대왕은 한 때 쫓겨나기도 했지만 이 두 친구들과 로마 군대의 도움으로 기원전 37년부터는 확고하게 유대인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는 한 편으로는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야(헬라어로 ‘그리스도’)의 출현을 불안해하면서 늘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존경심을 살 만한 인물은 가차없이 살해하는 한 편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그들이 존경하던 마카비 가문의 한 공주와 정략적으로 결혼했다. 그가 거금을 들여 예루살렘의 성전을 수리, 증축한 것도 이런 정황에서 비롯된 사업이었다.

기원전 4년 헤롯 대왕이 병으로 죽자 그가 다스리던 팔레스틴은 크게 셋으로 분할되었고 로마 원로원에 의해 헤롯 대왕의 세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팔레스틴의 노른자에 속하는 유대 지역과 사마리아 지역은 아켈라오스라는 아들이 상속받았으나, 그는 서기 6년경 폐위되었다. 이때부터 이 지역에는 로마 황제가 직접 총독을 파송하는 황제 소유영(所有領)의 총독 정치가 시작되었고 치안을 위해 황제의 근위대가 파견되었다.

서기 26년에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로마의 군대를 앞세운 완고한 군인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로마의 법과 권위를 세우려고 했다. 필요할 때는 언제나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을 행사했다. 필라투스를 임명한 사람은 당시 황실의 근위대장이었던 세자누스였는데 그는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강력한 정적이기도 했다. 서기 31년 세자누스가 반역모의로 처형당한 후부터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자누스와 관련있는 인물들을 모두 경계하고 있었다. 필라투스 총독의 임기 후반기는 이렇게 지지기반을 잃은 지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율리우스 시저의 지중해 통일 이후 다른 민족들보다는 비교적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통일을 결정지은 알렉산드리아의 전투에서 유대인들이 율리우스 시저를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립국가를 형성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계속되는 강대국의 지배에 굴복해야만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이방인들에 대해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한 편으로는 현실적 절망감이, 다른 한 편으로는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 점점 커가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감정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때로는 무기를 들고 지배국에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서기 65년 유대인들 중 과격한 일부 열심당원들이 무기를 들고 로마에 대항하여 잠시의 승리를 자축하기도 하지만, 서기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대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산산이 파괴되었다. 그 후 사방으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서기 135년경 다시 한 번 거국적으로 모여 군사 행동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현대 이스라엘이 탄생하기까지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지역 특히 예루살렘 부근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고대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사라져 갔지만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을 계승한 것으로 한 민족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범세계적 종교로 인식되었다. 예수의 생애와 활동이 그 전환기 역할을 했다. 서기 70년의 유대 민족의 몰락은 유대 사회의 마지막을 의미하지만,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세계 종교로 도약하는 획기적인 전기였다. 기독교의 세계적인 색채는 사실 구약성서에도 폭넓게 표현되어 있다. 다만 유대 사회가 한 민족 사회로 자리잡고 있는 동안 그들의 고유 신앙인 것처럼 인식되었을 뿐이다.

 

 

2. 사회-문화적 배경

 

1) 기원후 1세기의 팔레스틴의 사회-문화적 분위기

 

예수님과 기독교의 탄생은 아무런 사회적 배경이 없는 문화적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와 그의 사역, 그리고 그의 사역의 결과로서 생겨난 원시(原始) 그리스도교는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틴의 특수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정체와 그의 사역의 본질 그리고 초대교회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틴의 정황(情況) 속으로 여행을 떠나야만 한다.

 

주후 1세기의 팔레스틴의 전체 인구는 150만-2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유대인은 50만-6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팔레스틴의 남부인 유대지역에 살았으며, 수도 예루살렘의 인구는 수만에 불과했다. 예수께서 ‘천국운동’*의 대부분을 보낸 갈릴리 지역은 비유대인들이 유대인들보다도 훨씬 많이 살았기 때문에 종종 “이방인들의 갈릴리”(Galilee of the Gentiles, 사9:1, 마4:15)라 불리었다.

 

  *예수의 사역(전도사업)을 「천국운동」이라 부르기로 한다. 천국운동은 성서- 성경의 주제이며, 성서-성경의 종교가 지향(指向)해야 할 목표이기 때문이다.

 

주후 1세기 로마 제국의 변방인 팔레스틴 지역은 로마의 총독이 관할하는 속령(屬領)이었지만, 곳곳에서 발생했던 반란들을 보면, 정치적 및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유대 사회에 만연한 ‘메시야 대망 사상’이 그것을 반증하는바,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여 부와 권력을 움켜쥔 일부 상류층과 이름뿐인 신정정치를 표방하고 성전제도에 매달려 군림하는 종교지도층은 그 시대와 그 정황을 환영했겠지만, 대부분의 유대의 민초(民草)들*은 가지가지로 수탈당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도리 없이 받아들이는 형편이었다.

 

  *당시 인구의 9할이 넘는 “땅의 백성들(am ha-ars)”을 말한다. 예수가 천국운동을 벌여나가면서 함께 했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요7:49)”들이다.

 

 

2) 예수 시대의 유대 사회의 제 당파들

 

신약성서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원, 헤롯당 등의 다양한 분파들이 서로 경쟁하며 또 때로는 서로 협력하는 관계에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1) 바리새파 사람들(Pharisees)

이들은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율법에 대해 보다 엄격한 해석과 실천을 내세우던 “하시딤”(경건한 자들) 학파에 속하던 사람들이다. 소수였던 이들은 대다수인 유다인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며, 모세의 율법을 모르며 그것을 엄수하지 못하는 자들을 멸시하고 적대시하였다. ‘분리된 자들’이라는 의미가 있는 ‘바리새’라는 말이 그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바리새’는 성서에 95회나 나오는데, 이들은 대부분 예수님과 격렬히 대적하는 자로 등장한다. 이들은 영혼의 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믿었으며, 이 세상에서 선한 삶을 산 사람과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게는 내세의 보상과 징벌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들은 운명론자(예정론자)였다. 세상만사는 운명(예정)과 하느님에게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2) 사두개파 사람들(Sadducees)

이들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경에 있었던 유다교의 한 당파이다. 그들은 솔로몬 시대 제사장 사독(Zadok)의 후예로서 보수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상류 계급이다. 전에 셀류커스 왕조에 의한 팔레스틴의 헬라화 작업에서 외세와 거래함으로써 세력을 키워온 대제사장들의 후예였던 그들은 마카비에 의해 변절자요 배반자로 낙인찍히기도 하였다(마카베오 상1:15). 이들은 율법 연구와 그 엄격한 준수를 목표로 하는 중산층 바리새파와는 반대로, 정치적 권력이 신장됨으로 종교적 관심을 약화시킨 유대의 지주였고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중시하였고, 죽은 자의 부활, 영혼과 천사들의 존재 등은 부정하였다(행 23:8; 4:1-2). 복음서에 기록된 대제사장들이란 이들 종파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3) 에세네(Essenes)파 사람들

 

신약성서에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이 에세네파는 아마도 ‘하시딤’에 뿌리를 둔 것 같은데, 바리새파보다도 율법에 더 엄격했다. 그들은 대부분 결혼도 하지 않고, 재산을 공유하며 동굴 등에서 기도와 경전연구에 몰두하는 공동생활을 하였다. 예루살렘 제의와 예배는 타락했다고 보았기 때문이 참석하지 않았다. 이들에 의해 기록되고 보존되던 경전인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이 20세기 중반에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유대교와 성서연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 절제와 금욕을 실천하며 임박한 종말을 믿었던 에세네파 공동체는 제1차 유대전쟁의 패전과 함께 사라졌다.

 

(4) 열심당(Zealots) 혹은 혁명당원들

열심당(熱心黨)은 혁명당원들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유대 민족의 자주독립에 ‘열심인 사람들’ 말한다. 열심당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외세에 협력하는 동족 유대인도 가차 없이 살해하였다. 그들은 항상 칼을 품고 다녔으므로 자객으로도 불리기도 하였다(행 21:38 참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열심당은 주후 6년에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갈릴리 사람 유다에 의해 창설되었다고 한다(행5:37 참조). 요세푸스는 그들을 당시 유대교의 3대 분파였던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에 이은 제4의 당파라고 불렀으며, 주후 66~70년 동안의 제1차 로마반란을 선동한 폭도라고 규정하였다. 이들은 제1차 유대전쟁을 주도하여 마사다(Masada) 요새에서 3년간 버티다가 전멸하였다.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시몬이 열심당원이었다(눅 6:15 참조).

 

기원 1세기 유대 사회에 각기 영향을 끼치던 여러 당파들은 알렉산더 이후 시작된 헬라화(Hellenization)에 대한 반동으로 출생하였다. 헬라화에 대한 찬반 그리고 그 정도에 따라서 그들의 입장은 각기 달랐다. 신약성서에는 위에 열거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열심당, 에세네파 말고도 헤롯당이 언급되기도 한다. 그런데 헤롯당은 어떤 정해진 분파가 아니고 헤롯 왕가를 지지하며 그에 기대어 사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3) 기원후 1세기 팔레스틴 안팎의 종교적 배경

 

예수사건(예수운동)은 팔레스틴 내에서만 일어났었다. 그러나 그 운동을 계승한 초대교회(원시기독교)는 팔레스틴 즉 유대 땅을 넘어서 로마의 세계로 재빠르게 뻗어나갔다. 그리고 그 재빠른 확장의 과정과 결과로서 지금 우리들이 신약성서라는 이름으로 읽고 있는 문서들을 생산해 내었다. 신약성서의 문헌들은 주후 1세기의 팔레스틴을 포함한 로마세계의 배경 하에서 기록된 것이다.

 

(1)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예배의 종말 그리고 그 평가

 

예루살렘 성전이야말로 유대인의 하나님 예배의 “가시적인” 구심점이었다. 주전 10세기에 솔로몬에 의하여 건축되었던 제1성전은 주전 586년 바빌로니아의 침공 때 무너졌고, 고레스의 칙령으로 주전 515년에 복구된 제2성전은 제1성전에 비해 규모와 웅장함이 덜했다(스3:12). 그래서 헤롯대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힘을 기울인 것이다. 주공사는 십년에 걸쳐 완결하였지만, 이 헤롯성전의 재건사업은 기원후 6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헤롯성전마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에 의해 그야말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막13:2)”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다(마12:4; 23:17,21),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의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다고 선언하셨다(막11:17). 예수님은 성전을 향한(성전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그의 열심을 성전정화를 통해 보여주셨고(요2:13-17), 마침내는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시기도 하였다(막13:2). 초대교회에서도 관습적인 성전예배는 계속되었다(행2:43, 3:1이하). 그러나 새로운 ‘영적 종교’는 과거의 ‘물적 종교’에 연연할 수 없었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였던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영적 종교)로 승화하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철저한 파괴’라는 물리적인 계기가 필요했다. 이제 「예수 따르미」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했다(고전3:16)

 

(2) 기원후 1세기의 로마세계에서의 종교적 사상적 상황

알렉산더 대제 이후로 그의 후계자들도 그의 세계융합주의 정책을 계승했기 때문에 헬라화는 전 유럽세계로 확장되었다. 그리이스의 뒤를 이어 세계 제국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의 세계에서도 헬레니즘(Hellenism)은 모든 도시들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로마 시대의 어느 도시든지 전세계로부터 유입된 사상들의 교환 창구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발흥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본래 예수운동은 팔레스틴의 시골 갈릴리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지방의 유대 전통에 근원을 둔 많은 사상들을 간직하였다. 그러나 <예수운동이 그리스도교화>*하여 로마의 넓은 세계로 나온 마당에는 유대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 신앙운동은 헬레니즘적 사상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었고 점차 헬레니즘적 사상으로 동화되고 개조되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선포하던 분이 선포되는 분으로 되었다”라고 한다. 예수는 본래 ‘하느님나라’를 선포했는데, 초대교회는 ‘예수’를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리이스-로마 시대의 상류 지식층은 전통적인 종교를 버리고 대신 스토아(Stoa) 철학 등 철학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세상과 자연과 인간이 신적인 이성, 즉 로고스(Logos)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고 믿었는데, 이 로고스 사상도 신약성서와 초대교회에 유입되었다. 또한 이때 유행한 플라톤(Platon)적인 이원론에서 강조하는 영혼의 불멸, 가시적인 지상적 영역이 천상적인 영역의 그림자라는 것들은 신약성서에 반영되어 있다. ‘개’(kyon)라는 말에서 유래한 견유학파(Cynicism)는 “방랑설교자”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들은 세속적인 쾌락과 사회적 제도들을 거부하고 아주 검소한 구도자적인 삶을 살면서 길거리에서 가르치기를 즐겨하였는데, 학자들은 이런 “방랑설교자”들과 사도행전의 복음전도자들과의 유사성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민들은 동방에서 유래된, 신비적 의식(儀式)이 가미된 감정적 종교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조로아스터(Zoroaster)교의 분파인 미트라교는 광명의 신 미트라(Mithra)를 신앙한 밀의(密儀) 종교로 윤리적이면서도 내세에서의 구원을 보장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전파되어 있었다.

 

(3) 디아스포라 유다교와 70인역

 

전술한 바와 같이 주후 1세기의 팔레스틴에는 50-60만 명 정도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인들의 전부는 아니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로부터 바빌론은 물론 동부 지중해 도시들 전체에 퍼져 있었다. 유대인들의 대규모 해외 정착은 바빌론 포로 때에 시작되었다. 고레스의 귀환 칙령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남아 있었는데 이것이 디아스포라(Diaspora)*의 시작이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더라도, 패전의 상처로 황폐된 팔레스틴 땅에서의 살림이 어려웠던 많은 유대인들은, 더 나은 정착지를 찾아 유대 땅을 떠나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 부른다.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타지(他地)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기도 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도 대체로 조상 전래의 신앙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제의적 종교생활은 불가능하여, 회당(Synagogue)*이라는 공동 집회처를 만들어 책 즉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점차 자신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주전 3세기 경, 가장 크고 유명한 도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공동체는 국가 안에 또 다른 국가를 형성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세계의 언어인 그리이스어(koine)로 사용했기 때문에 조상들의 성서인 히브리어 성서를 읽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이스어로 번역하기를 원했으며 그 결과로 탄생된 성서가 희랍어 성서인 70인역(LXX; Septuagint)이다. 알렉산드리아 정경(Alexandria Canon)이라고도 불린다.

 

  *후에 초기기독교는 대부분 이‘회당’을 통하여 선교활동을 수행하였다.

 

  *물론 이 성서는 오늘날 우리가 읽는 구약성서와는 여러 모로 달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구약성서가 ‘생성중’이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희랍어 번역인 알렉산드리아 정경(Alexandria Canon)은 이집트 프톨레미 왕(기원전 282-246년)의 명령으로 70여 명의 유다인 학자들(장로들)에 의해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전설 때문에 70인역(LXX)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70인역은 오경이 기원전 250년경에, 역사서와 예언서는 기원전 200년경에, 시서와 지혜서 및 기타 책들은 기원전 100년경에 번역됨으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70인역에는 히브리성서(MT)*에 없는 오늘날 우리 개신교가 외경(外經)이라고 부르는 부분 즉 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마카베오 상.하권의 일곱 권과 다니엘서 일부(3:24~90,13~14장), 에스델서 일부(10:4~16:24) 등이 추가되어 있다는 점이다.

 

  *히브리어 구약성서는 AD 500년까지 완벽한 모음체계가 없었고 본문은 유동적이었다. 주후 600-950년에 이르러 마소라(Masoretes)라고 일컬어지는 유대인 학자들이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서 완전한 모음체계와 악센트를 고안해내었으며, 본문을 표준화시키기도 하였다. 이 결과를 마소라 사본(Masoretic Text; MT)라고 한다.

 

본래 외경까지 포함하고 있는 70인역은 헬라적 유대교의 경전뿐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의 경전이었다. 신약성서에서도 구약성서 외경이 구약성서나 다름없이 인용된 예를 많이 볼 수 있다(고전2:9, 눅11:49, 요한7:38, 엡5:14, 약4:5~6, 유14~15). 유대교와의 갈등 속에서 계속 성장한 초대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어 구약성서에 더 의존하게 되고 그것을 경전으로 받아들이자, 유대교는 70인역을 버리게 되었다. 제롬과 그 이후의 몇몇 학자들이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우수성을 주장했으나 카톨릭교회(천주교회)는 실제로 70인역을 따랐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히브리어 성서를 대본으로 번역된 불가타성서(Vulgate; 라틴어 번역)에 70인역의 외경을 포함시켜 공인성서로 인정함으로써 70인역을 포함한 모든 책들을 경전으로 인정한 결과가 되었다. 개신교는 카톨릭교회와 갈라지면서 70인역 구약성서를 버리고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택했다. 따라서 초대 교회에서 읽혀지던 외경은 개신교의 경전 밖으로 축출당했다*.

 

  *오늘날 개신교의 구약성서의 범위와 구조의 문제는 커다란 신학적 문제이다.

 

<제2장> 예수의 생애 개요

예수의 생애와 그 가르침은 신약성서에 수록되어 있는 복음서들을 통해 전수되었다. 로마와 유대 역사서에 예수에 관한 간략한 정보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흔적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이 역사 자료들과 복음서를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예수의 생애를 비교적 생생하게 재구성할 수 있고, 신약성서를 통하여 예수의 가르침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배울 수 있다.

신약성서의 대략적인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기원전 수 년 전에 예루살렘 부근에 있는 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 이 때 로마 제국은 쌍두통치체제가 마감되고, 정적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여 일인통치시대를 시작한 직후였다. 팔레스틴은 로마의 분봉왕 헤롯이 다스렸다.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 살고 있었는데 전국에 내려진 황제의 호구조사 명령에 따라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했다. 이미 하나님의 이적적인 능력으로 혼인 전에 임신을 한 아내 마리아는 이때 만삭의 몸이었다. 고향에 도착한 그들은 빈방을 얻지 못하여 마굿간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고 이곳에서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낳았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목동들과 동방에서 온 점성술사들의 방문, 아기 예수를 죽이려던 헤롯왕을 피해 이집트로 도피한 것, 그곳에서 어느 정도 지내다가 귀국한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살았다는 것, 그리고 12살 때 있었던 성전 방문 사건뿐이다. 예수는 요셉을 따라 목수의 일을 하며 청년기를 맞았다.

서른 살쯤 되었을 때 예수는 자신의 삶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이 때 로마 황제는 티베리우스였으며 유대-사마리아 지역은 총독 필라투스(빌라도)가, 예수의 고향이 속해 있던 갈릴리 지방은 헤롯왕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고 있었다. 예수는 당시 유명한 광야 설교가요 세례운동가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한 후 사탄의 세 가지 의미있는 시험을 통과한 예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갈릴리 호수가의 가버나움에서 그의 선교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최초의 복음서라 인정된 마가복음서에는 요한이 잡힌 뒤에 비로소 시작된 예수의 최초의 선포가 기록되어 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장 15절; 표준새번역)

 

예수는 우선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를 자신의 제자로 불렀다. 이 제자들은 앞으로 예수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자들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 수가 대단히 많았다. 그러나 예수는 구약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따라 특별한 제자단을 열두 명으로 확정하였다.

예수는 병자들을 고치는 이적을 통하여 당장 유명해졌다. 그는 소경을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했으며, 문둥이를 고치는 등 그에게 오거나 데려 오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었다. 바다에 이는 풍랑과 파도를 잠잠케 하여 죽음의 위기에 몰린 제자들을 살려주었다. 죽은 사람을 살려 주변의 사람들에게 더 없는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기도 했다. 예수는 자신의 권위나 능력을 과시하거나 입증하기 위하여 기적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자신을 위해서 이적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 신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적은 모두 그가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그런 종류의 이적들이었다. 중요한 점은 예수가 이적을 행할 때 “믿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때때로 “믿음”은 이적의 조건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이적을 통하여, 예수를 특별한 사람 즉 구약성서에 예언된 바로 그 선지자 혹은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은 예수가 선포했던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는 가르침에 자극받은 것이었다. 적어도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믿었다. 이적은 그 증거였다. 예수의 소문은 순식간에 팔레스틴과 그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예수에게로 몰려들었다.

예수의 목적은 단순히 병자들을 고치는 것은 아니었다. 병을 고쳐줌으로써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벗겨주고 삶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으며,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한 것이 예수의 활동이었다. 꺼져가던 민족의 운명 속에서 절망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다시 눈을 뜨며 새로운 꿈에 빠져들었다.

예수에 따르면 -이것은 구약성서의 내용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우주와 세상, 그리고 인생의 배후에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법칙과 질서를 주셨다. 세상은 사람들의 세상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세계였다. 인류는 하나님의 세상에서 잠시 발을 붙이고 살다 가는 나그네였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토대로 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를 섬기며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대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 즉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었다. 예수는 이적과 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이 먹는 것, 입는 것만을 위하여 살지 말고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자극하고 요청했다.

예수는 이것을 "하나님의 나라"로 표현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이 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인생과 세상,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활동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교였다. 사람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의 왕이시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며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시며 구원하신다. 그리고 의와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자라게 하시며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신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섬기며 하나님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그분의 신성한 계획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사역(使役)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예수는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왕권이 이 세상에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설교했다. 예수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자신을 통하여 이 세상에 구현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일을 하는 자신의 삶을 새 시대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악과 사탄의 세계는 이제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죄는 인류의 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다. 이 새 시대에 사람들은 미움을 버리고 사랑을, 전쟁을 버리고 평화를, 폭력과 권위를 버리고 희생과 봉사를, 보복을 버리고 용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사람들은 예수의 이적과 교훈에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예수의 교훈과 사역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호기심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을 제쳐놓은 예수의 활동에 강한 반발을 하였다. 유대인의 특권을 무시하는 것 같은 예수의 범세계적 사고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지 않는 지배자들과 그 세력을 몰아내고 유대 민족에게 꿈에도 그리던 해방과 자유를 선사하리라 기대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굶주림에서 해결한 이적은 사람들에게 이런 희망을 부풀리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였다.

 

오해의 와중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인식을 점점 달리했다. 처음에는 예수를 병을 고치는 의원이나 이적을 행하는 사람 정도로 혹은 그들을 가르치는 스승 정도로 알고 있었으나, 그들은 곧 예수를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로, 인류를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고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그 모든 정신과 내용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유대교의 뿌리에서 나왔으면서도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는 유대교와는 다른 독특한 종교로 탄생한 것이다.

예수의 공개적 사역은 삼년 정도 계속되었다. 그 동안 활동의 중심지는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지역과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이와 함께 예수의 활동의 방향과 방법도 달라졌다. 예수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보다는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모이는 것을 기다렸고, 전혀 모르는 군중들에게 설교하기보다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명백한 표현을 쓰기보다는 비유라는 형식으로 설교함으로써, 한 언어를 가지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알리고, 자신을 믿지 않고 그저 따르는 사람들이나 오해하는 사람들과 적대자들에게는 자신의 정체와 교훈에 대하여 더 알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삼 년이 끝날 즈음 예수의 활동이 유대인의 핵심부, 즉 예루살렘과 그곳에 세워진 성전으로 옮겨오면서 예수의 사역은 체제로부터의 집단적인 반발에 부딪쳤다.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지도부는 예수가 그들의 전통과 기준에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것 때문에 그가 메시야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안식일 법을 범하며 병자들을 고친다는 것이 유대 사회를 혼란에 빠트린다고 생각하였다. 유대 지도부가 예수를 반대한 배경에는 그들의 정치적인 계산도 깔려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들이 수백년간 유지해온 전통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인 신앙을 요구하는 것은 오래 동안 외부의 지배세력과 결탁해온 그들의 지도력과 지지기반을 흔들어 놓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들의 현실적인 힘에 기대어 사는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그들의 손에 조금 쥐어져 있었던 권력의 약화나 이탈을 더 크게 염려하였다.

결국 유대인 지도부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를 죽이기 위해 이중의 죄목을 적용했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신성모독죄를 지었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이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찬동할 수 있는 이유였다. 또 하나는 예수가 자신을 유대인의 왕 즉 메시야라고 선전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로마의 고위 관리인 총독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예수의 죽음의 이유였다. 유대 지도부는 예수를 한 밤중에 체포했다. 예수의 제자였던 유다가 배신하여 예수를 팔아 넘겼던 것이다. 대제사장은 예수를 총독 빌라도 앞에 끌고 갔다.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언도하거나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대 지도부는 예수를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고소했다. 그들은 백성들을 충동질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게 했다. 한동안 예수에게서 해방과 자유와 이스라엘의 재건을 기대했던 군중은 용서와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외치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의 죽음을 원했다.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군중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소요사건으로 인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자신을 제거할 구실을 주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요구한 십자가형이란 통상 로마 제국에서 반역자들에게 집행하는 사형 방식이었다. 대략 서기 30년 봄쯤에 예수는 죄 없는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란 팻말이 박혀 있어 그의 죽음이 유대인들에게도, 당시 법을 중시하던 로마인들에게도 부적당한 것임을 말없이 항변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 체포되던 그날 저녁에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먹으며 자신의 죽음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요, 이것이 구약성서가 예언한 그 메시야의 길임을 설명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방법,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 그것은 죄인의 죄를 대신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비는 자신의 죽음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적절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은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한 보도로 채워져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바위 무덤에 안치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이 날은 일요일이었다- 군인들이 지키던 무덤은 비어 있었다. 시체에 향을 발라 죽은 자에 대한 마지막 사랑을 표현하려던 여인들이 시체가 아닌, 살아 계신 예수를 만났다. 두려움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는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의 활동과 교훈을 “복음”이란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부탁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메시아(Messiah)’란 히브리어 단어와 같은 의미의 헬라어 ‘크리스토스(christos)’를 중국인들의 발음에 맞추어 ‘기독(基督)’으로 표기한 단어에 ‘교(敎)’자를 붙인 것이 ‘기독교’가 되었다.

 

  *‘기독교인’ 혹은 ‘기독인’(基督人)이란 본래 ‘그리스도인’이라는 성서적 표현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표현은 사도행전 11장 26절에 처음 나오는데, 어원적 의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리스도인’을 ‘예수따르미’라고도 한다.

 

 

<제3장> 신약성서의 탄생

1. 초대교회의 성립과 신약문헌의 탄생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에 예수의 제자들은 다시 모였다. 부활한 예수는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많은 것을, 특히 자신의 죽음과 그 의미를 설명하고 하늘로 승천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50일이 되어 -이 날은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고 그들이 보고들은 예수의 활동과 교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제자들이 전하던 내용을 ‘복음’ 즉 ‘기쁜 소식’이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 믿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지시하던 것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실현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 활동과 생애까지 이 ‘복음’의 내용으로 포함시켰다. 처음에 모였던 제자들의 수는 120명쯤이었으나 갑자기 그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열 두 제자들 특히 최초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베드로와 요한이 지도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 승천한 예수가 성령을 통하여 여전히 그들을 직접 지도한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그 영향력 때문에 유대 지도부에 의한 공개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스데반이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 밖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흩어진 기독교인들은 가는 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 결과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 곳곳에 세워졌고, 서기 50년경 지금의 그리스 지역으로, 서기 60년경에는 로마 제국의 핵심부인 로마시와 이탈리아 반도로 기독교는 신속하게 퍼져 나갔다. 지중해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북부의 도시들에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이 -후에 바울로 개명함- 개종하고 복음 전도자가 됨으로써 이런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 현저한 공헌을 남겼다.

 

예수의 사역은 한마디로 말하면 “천국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허울뿐인 신정정치를 표방했던 당시 유대 땅에서 유대종교는 상류 지도자들의 권력과 이익을 위한 방편이었을 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상관이 없었고 오히려 일부 혁명주의자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예수는 권력과 제도에 의해 철저하게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통치를 가시적으로 실현하였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선악 간에 구별없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넓고도 크신 사랑을 몸소 보여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이 사역에 동참하기를 요청하였다. 그의 “천국운동”은 참으로 “나누어 먹는 현실”이었으며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당”이었다. 그리하여 이 예수운동을 계승한 초대교회도 그 맥을 같이하는 모습이었다;

 

“사도들을 통하여 기이한 일과 표적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 주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사도행전 2장 43-47절. 표준새번역)

 

기독교가 그 출발점에서부터 세계인의 종교로 인식되었던 것은 「놀라운 소식(이야기)」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기독교는 「놀라운 사건(실천)」을 가지고 세계로 달려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았다. 1세기 전반의 박해는 주로 기독교를 탄생시킨 유대인들로부터 가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1세기 후반부에서는 유대인의 박해는 줄어들고 그 대신 황제를 신으로 모시기를 촉구했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한층 더 강한 박해가 일어났다. 때로는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어떤 이들은 삶에 애착심을 가지고 박해를 피하려고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거나 동료 기독교인들을 배반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의 적은 외부에만 있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기독교 자체를 흔들어 놓는 소위 이단들이 출현했다. 예수에 대한 오해나 자의적인 해석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 교회를 지도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대면했던 예수의 실제 제자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들은 목격자들 혹은 증인이란 이름으로 구별되었다. 서기 50년경 교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이들은 여러 곳의 모든 교회에 방문하여 직접적인 지도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편지라는 형식으로 간접적으로 당면한 교회의 문제들에 답하며 교회를 지도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신약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편지들이다. 대개 고대의 서간문 형식을 띤 이 편지들의 송신자는 편지의 내용이 그들의 사견(私見)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예수의 뜻임을 알린다. 그들은 예수의 몸된 교회의 지도자로서 이 편지들을 보내고 있음을 확실하게 하려고 했다. 이 때 수신자들은 전도자들을 통해 이미 복음을 배웠고 알았고 받아들였던 사람들이다.

편지들보다는 조금 늦게 서기 70년경부터 복음서들이 기록되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에게서 듣고 본 것을 기록하기보다는 말로 전함으로써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몇 안 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목격자들을 통해 예수의 활동과 교훈을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다.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믿는 예수가 어쩌면 그들이 살아 활동하는 동안 다시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따라서 책을 만들기보다는 전도자로 활동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을 만든다는 것이 당시에는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왔다. 교회의 수는 점점 증가해 갔으나 목격자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가게 되어 목격자들의 증언과 설교에 의존하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동시에 구전(口傳)의 한계점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은 전달의 과정이 반복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목격자들이 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들이 보고 들은 것 즉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보전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뿐만 아니라 글이 전도와 교육, 예배에 획기적인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늘어나는 이단과 박해자들을 대항할 효과적인 자료가 필요했다는 사실도 마침내 복음서가 기록되도록 원인을 제공하며 또 재촉하였던 것이다.

 

 

2. 신약성서의 형성과 승인

 

1) 신약 문헌의 수집 과정

 

각 서신이 기록되어 교인들에게 보내졌을 때 그 교회는 한 권의 책을 가지게 되었다. 잠시 후 다른 교회에 다른 한 편지가 보내지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특정한 책을 가진 교회가 하나 둘 씩 늘어갔다. 교회 지도자들이 지명된 교회에 보낸 편지들은 예배 시에 낭독되었고 교회 안팎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다. 유사한 문제가 다른 교회에 발생했을 때 그들은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편지를 이웃 교회에 베껴 주기도 하고, 베껴가기도 하였다. 이런 필사과정을 통하여 한 편지 혹은 한 복음서의 많은 사본이 만들어지고 같은 책을 소유하는 교회가 늘어갔으며, 동시에 한 교회가 하나 이상의 책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27권의 책들이 자연스럽게 수집되었고 하나의 문집으로 완성되었다.

신약성서에서 최후에 기록된 것은 2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27권의 책이 모두 모아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때로는, 지역에 따라서 현재 신약성서에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 교회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런 책들을 우리는 ‘신약 외경’이라고 부른다. 신약성서 27권 중에 포함되어 있는 책들 중에서 어떤 것은 지역에 따라 교회가 사용하기를 꺼려했던 책도 있었다. 신약성서의 책들은 대부분 기록되었던 시기부터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과 삶을 위하여 사용하던 책들이었다. 늦어도 3-4세기 사이에 외경은 거의 제외되었고, 27권만이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2) 복음서의 형성과 집성

 

복음은 우선 구두로 전달되었고, 전도자들과 교사들에 의해서 직접 선포되었다. 그렇다면 복음서들이 오늘의 형태로 나타나기 전까지 어떤 형성과정을 거쳤을까? 아마도 복음서가 형성되기 전까지 예수의 교훈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자료 문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복음서들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최초의 자료를 ‘Q자료’라고 불렀다.

Q라는 것은 본래 자료라는 뜻을 가진 독일말 ‘Quelle’를 줄인 것으로, 공관복음 특히 마태와 누가의 두 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예수의 교훈이 어떤 동일한 자료에서 왔으리라는 생각에서 끌어낸 가상적 자료이다. Q외에 ‘증빙서’라고 하는 예수의 생애에서 성취된 구약 예언들을 모아 놓은 성구집이 있다. 이와 같은 자료 문서들 외에도 누가, 마태가 개별적으로 특별히 참고했던 자료집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복음서가 기록된 이후에도 많은 복음서들이 교계에 나돌았지만, 4 복음서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복음서 자체가 지닌 영향력과 가치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이 책들이 신앙공동체의 마음에 들었다.”(Brueggemann)

 

2) 그 밖의 책의 수집

 

누가복음의 후속편인 사도행전은 4복음이 따로 수집됨에 따라 분리되었다가, 복음서와 서신이 수집되던 중에 그 둘 사이를 연결을 지어주는 책으로 인정되었다. 공동서신이 한 그룹으로 모인 것은 2세기 말 이후의 일이었다. 묵시록(默示錄)들은 처음에 널리 알려졌고 인정되었으나, 2세기 후반 경에는 인기가 떨어져서 요한 계시록만이 교회의 광범위한 수락을 받았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정경으로 채택되어 견고한 위치를 얻기까지는 200년 이상이나 논쟁을 겪어야 했다. 실상 현대 교회에서도 여전히 그 책을 정경에서 제외하자는 주장이 있다.

 

3) 신약성서의 범위확정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의 책들이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인정받기까지200여 년 동안에 교회에는 많은 도전과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좀 더 명확하게 어느 책은 성경이고 어느 책은 성경이 될 수 없다고 하는 확실한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영지주의자인 말시온(Marcion)의 운동 때문이었다. 그는 주후 85년 부유한 집안의 한 주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교회에서 물의를 일으켜 추방당했다. 그 후 로마의 유력한 영지주의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말시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담는 포장품의 역할로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단적인 유대교의 창조설화 해석을 구약에 적용시키면서 구약과 신약의 신을 별개의 신으로 보고 신약 가운데서도 유대교 색채를 삭제시켜 "말시온 성서"를 만들었다. 말시온은 성서를 자기 나름대로 자르고 붙였던 것이다.

 

이때까지 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한 개인 말시온이 (신약)성서의 정경을 작성하여 발표하였으니 큰 문제였다. 그래서 교회는 정경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 결과 교회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무라토리 정경(Muratorian Canon) 목록이 탄생되었다. 이것은 주후 170년경에 작성되어 그 당시 교회가 성서로서 받아들인 책들이다. 그 목록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행전, 고린도 전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전후, 로마, 빌레몬, 디도, 디모데 전후, 유다, 요한1.2, 요한 계시록, 베드로 계시록 등이 포함된 것이었다.

2세기 중엽에 들어서 교회가 급속히 제도화 되었다. 사람들이 교회로 마구 밀려들어 세상과 교회의 차별이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기독교 윤리는 땅에 떨어지고 교회가 세속화되어 이방 문화와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이때에 몬타누스(Montanus; 126-180)라는 사람이 나타나 스스로를 약속된 보혜사라고 하며,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가지고 왔노라 하였다. 성서가 무한정 늘어날 위험에 처하여 기독교 교회는 원칙적으로 성서 산출(기록)이 이미 끝났다고 합의하게 되었다. 이때가 2세기 말이었다.

그 후 3-4세기 초에 걸쳐서 문제된 책들을 가려내는 과정이 있었다. 이때의 대표적인 인물은 가이사랴의 감독 유세비우스(Eusebius)인데 그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을 실질적으로 모두 정경 목록에 넣었다. 주후 367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여러 교회로 보내는 그의 부활절 서신에서 지금의 신약성서와 똑같은 내용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이 목록은 신약 정경 형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계점을 이루었다. 사실 이렇게 오늘날의 신약 목록이 확정되었던 것이다.

<제4장> 신약성서 각 책의 주요 내용

신약성서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실현(천국운동)”을 위한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알려주며, 또한 그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의 신앙과 실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즉 예수와 예수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그 중심 주제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다.

 

1. 신약성서의 구조와 일반적인 특징

 

신약성서는 27권이나 되는 서로 다른 책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기록한 복음서들, 초기 교회의 선교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 개인적인 사신(私信)인 빌레몬서, 교회들에게 회람(回覽)을 요청하는 공동 서신, 교리를 설명하는 서신들(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수사학(修辭學)적인 설교 형태의 서신(히브리서) 그리고 묵시록(계시록) 등의 형식과 분량은 물론 주제에 있어서도 다양한 문헌의 집성물이 신약성서인 것이다.

 

신약 27권의 책들은 또한 그 저자들마저 다양하다. 신약 기자들의 수효는 십여 명에 달하는데, 그 이름들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 베드로, 야고보, 유다 등이 알려져 있고 나머지는 익명(匿名)의 저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인간적인 그리고 신앙적이며 신학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나 누가처럼 상당한 학식이 있는 자도 있고, 베드로처럼 무학의 인물도 있다.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에 비하여 마태와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여러 권의 저서(서신)의 바울도 있고, 단 두 권의 저술로서 양적인 공헌을 한 누가도 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신약성서 27권의 순서는 그 문서들이 기록된 순서에 입각하여 결정된 것은 아니며, 교회의 역사에서 실용적이며 신학적인 이유로 된 듯하다. 마태복음이 분명 마가복음을 대본으로 하여 저술된 책이지만 신약성서의 제일 서두에 위치하게 된 것은 아마도 마태복음에 내장된 내용과 신학이 그런 위치를 차지할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요한의 계시록도 그 내용에 의해서 신약의 후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신약성서에 포함된 27권의 문헌들을 그 형태에 따라 분류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맨 처음에는 마치 예수의 전기(傳記)의 형식을 띠고 있는 4권의 ‘복음서’가 있는데 사실상 이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나 전기가 아니다. 이 복음서들은 예수의 행적과 교훈들에 대한 전승(傳承)들을 수집하여 그것들을 기초로 신앙교육적 혹은 선교적 목적으로 작성된, 일종의 설교문(케리그마; kerygma)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마치 초대교회의 발전 과정을 서술한 역사책처럼 보이는 ‘사도행전’이 있는데, 실제로 이 작품은 누가복음의 속편(續編)으로 누가복음에 직접 연결되어야 할 책이다. 이 사도행전도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신앙증거의 신학적인 문헌인데, 바울의 서신들에서 나타난 바울의 실제적인 모습과는 다른 모습의 바울을 기술하기도 한다. 다음에 자리하는 21개의 ‘서신들’은 대체로 새로이 형성된 초대 교회 안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신앙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저자들이 수신자-독자들에게 신앙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해 발송했던 ‘상황적합적’인 편지들이다. 마지막으로, 묵시문학의 일종으로 분류되는 ‘요한의 계시록’이 나온다.

 

<신약성서의 구조적인 분류>

 

Ⅰ.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요한복음

Ⅱ. 서신들-

     (1) 바울의 진정한 서신들- 데살로니가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2) 바울계 서신들- 데살로니가후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목회서신-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3) 일반서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 유다서,

 

Ⅲ. 묵시문학- 요한계시록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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