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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약에 나타난 믿음과 행함

하나님아들 2017. 7. 18. 22:50

신약에 나타난 믿음과 행함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믿음과 행함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 것일까? 아니면 행함도 있어야 하는 것일까? 로마가톨릭에서처럼 ‘믿음과 행함’(믿음 +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일까? 또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현재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행함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소위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로 논란이 많다. 특히 소위 ‘믿음’은 좋은데 ‘행함’이 엉망인 목사들과 성도들 때문에 상처받고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신교를 비난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행함’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행함을 강조한다. ‘믿음’만 있어서는 안 되고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신학자들은 ‘믿음’뿐만 아니라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으며 ‘행함’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듣고 배운 것은 ‘오직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 맘 착해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어린이 복음성가가 말해 주듯이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인데, ‘행함’이 있어야 천국에 간다고 하니 우리의 신앙에 큰 혼란이 오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것이 옳은가? 무엇이 진리인가? 이에 대해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이신칭의” 교리가 무엇인지, 종교개혁의 구원 교리가 무엇인지, 칼빈의 성화론이 무엇인지 등등 교의학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평신도들에겐 너무 어렵고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래서 필자는 성도의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성경’에서 주석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믿음과 행함과 관련하여 오해되고 있는 대표적인 몇 구절을 택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I. 마태복음 7장 21절

 

마태복음 7:21은 행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인용하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기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 +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여기의 “주여 주여”란 표현을 긍정적으로 보고 ‘믿음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앞뒤 문맥을 보면 “주여 주여”란 말은 매우 부정적이다. 우선 “주여 주여”란 반복이 그것을 시사한다(흐로쉐이드). 그리고 앞 구절들에 보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여기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뿐 아니라 그와 같은 모든 위선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리고 22절에 보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며, 거짓 믿음의 사람들이다. 처음에 믿음이 있었는데 나중에 행함이 없어서 천국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신다(23절). 여기에 우리말 성경은 “도무지 알지 못하니”로 현재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원문은 “우데포테 에그논”(oudepote egnon)으로 아오리스트(과거)이다. 따라서 “결코 알지 못하였다” 즉 “너희를 한 번도 안 적이 없다.”는 뜻이다. 영어 성경에는 다 과거로 번역되어 있다(I never knew you). 즉,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한 번도 안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전에는 알았다가 이제는 모른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안 적이 없다고 하신다. 곧, 처음에는 ‘믿음’이 있어서 알았는데 나중에 ‘행함’이 없어서 모른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몰랐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처음부터 ‘(참) 믿음’이 없었으며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참 믿음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 참 믿음이 있는 자는 거짓 선지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행함은 믿음의 열매요 믿음의 증거이며 믿음의 표현이다.

 

 

II. 로마서 2장 13절

 

로마서 2:13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롭다 함을 얻을 것이다’(dikaithēsomai, 미래)는 표현은 로마서 3:24, 28의 ‘의롭다 함을 얻는다’(diakioomai, 현재)는 표현과 가리키는 바 내용이 다르다. 앞의 것은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 받을 것을 말하지만(미래 칭의; cf. 롬 2:16), 뒤의 것은 현재 이 세상에서 의롭다 함 받는 것을 말한다(현재 칭의).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한다(롬 5:1).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는 원리와 근거는 같다. 둘 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현재 칭의는 ‘믿음’으로 받고, 미래 칭의는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하는 자’란 율법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듣고 행하는 자 곧 참 믿음이 있는 자를 가리킨다. 참 믿음이 있는 자는 율법을 행하게 된다. 물론 100% 다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함에 휩싸여 있다), 최소한 율법을 지켜 행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럴 때에도 의롭다 함을 받는 근거는 그 사람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과거), 현재 의롭다 함을 받은 존재가 되었으며(현재), 또 앞으로 마지막 날에 의롭다 함 받을 것이다(미래). 이런 사람이 율법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말할 때에 단지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를 가리켜 말할 때에 성경에서 다르게는 ‘의인’, ‘의로운 자’, ‘정직한 자’, ‘겸손한 자’, ‘선을 행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내적 관계는 ‘믿음’이며, 눈에 보이는 외적 모습은 ‘행함’이다.

 

이처럼 우리가 경우에 따라 여러 관점에서 다르게 말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의롭다 함 받고 구원받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이며, 그 공로를 받는 수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따라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행 15:11; 엡 2:8; 딤후 1:9; 딛 2:11; 3:7; 롬 3:24).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하게 된다. 100% 다 지킨다는 말이 아니라 지켜 행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는 거룩하게 살려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심으로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대적하고 ‘선한 일’을 원하게 된다(갈 5:16-17). 따라서 이런 사람은 차츰 차츰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갈 5:22-23). 이것도 순전히 나의 노력으로 맺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맺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뿐만 아니라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된다.

 

 

III. 로마서 3장 28절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8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한다. 여기서 ‘인정하다’(logizomai)는 것은 ‘생각하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바 내용을 직역하면 “사람은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가 된다. 율법의 행위들을 배제하고서, 율법의 행위들이 전혀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allein durch den Glauben)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원어에 ‘오직’에 해당하는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 때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라고 했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오직 믿음으로’의 뜻은 우리의 행위들이 배제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공로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곧, 의롭다 함 받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행 15:11; 엡 2:5, 8; 딤후 1:9; 딛 3:7).

 

 

IV. 야고보서 2장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는 서신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너무 강조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행함’이 소홀히 여겨지는 경향이 있어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야고보가 ‘행함’을 강조하는 서신을 써서 보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로마서보다 후에 기록되었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이신칭의 때문에 행함이 약해졌다는 근거도 없다. 오히려 야고보는 믿음과 동떨어진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 곧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것을 2장 1절에서 알 수 있다. 우리말 성경(개역개정판)에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우리말 번역에 의하면 이제 ‘믿음’은 있으니 ‘올바른 행함’을 가지라는 의미로 들린다.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외모 취함으로 가지지 말라.”가 된다. 즉, 야고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여전히 ‘믿음’이다. 올바른 믿음은 ‘외모 취함’ 곧 사람 차별로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13절은 “외모로 취하지 않는 믿음”(차별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 말하고 14-26절은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에 대해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야고보서 2장에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14절에서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고 말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 사이의 대비에 대해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이 있노라 하고”에서 ‘하고’(legē)는 ‘말하고’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대비는 ‘믿음’과 ‘행함’의 대비가 아니라 ‘말함’과 ‘행함’ 사이의 대비이다. 즉, ‘말뿐인 신앙’과 ‘행함 있는 믿음’ 사이의 대비인 것이다. 참된 믿음은 말만 하고 마는 신앙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나는 신앙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21절에서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21절)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행함으로’(ex ergōn) 의롭다 함을 받았다니?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이 강조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가르침 곧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pistei, ek pisteōs) 된다는 것(롬 3:28; 5:1)과 충돌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야고보는 바울과 다르게 “행함으로 의롭다 함 받는다”고 가르쳤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두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用語)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dikaioomai)는 단어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 바울과 야고보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 단어로써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이 사실을 바로 파악하는 것이 야고보서와 로마서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그러면 그 개념의 차이란 무엇인가? 먼저 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진다는 의미이다(롬 3:25-26). 그러나 야고보는 이 용어를, 어떤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다’는 의미로, 곧 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믿음이 이 행동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의미이다(창 22:12). 이처럼 두 사람에게 있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행함’(erga, 행위들, 일들)의 개념도 서로 다르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의 ‘행위’ 또는 ‘행함’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 받으려고 하는 노력으로서의 인간의 행위들을 가리킨다. 곧,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노력들을 가리키는데, 이런 것들은 의롭다 함을 받는 데 있어서 아무런 공로가 될 수 없다. 이에 반해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행하는 행위들, 곧 믿음에서 나오는 행위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함이며, 이것이 있어야만 참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바울과 야고보가 동일한 ‘행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할지라도, 그 담고 있는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행함의 ‘시점(時點)’도 서로 다르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라고 말할 때의 ‘행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기 전(前)의 모든 인간의 노력들을 가리키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後)에 행하는 모든 믿음의 행위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야고보는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 문장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함께 일하였다’는 말은 마치 ‘신행합력설’(synergism)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만일 처음 믿을 때에 칭의의 근거로서 믿음과 행함이 함께 역사했다면, 그것은 신행합력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런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함께 일하였다’(sunērgei)는 동사의 시상(時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시상은 ‘미완료’로서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낸다. 곧, 믿은 순간부터 그 후로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시간의 경과’가 요구된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부분이다. 여기서 ‘온전케 되었다’(eteleiōthē)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에 대해 남아의 플로어(L. Floor) 교수는 ‘충만한 발전에 이르렀다’고 해설하였다(Jakobus, 110). 전에도 아브라함에게 믿음은 있었지만 아직 초보적인, 유아적인 믿음에 불과했는데, 이제 이러한 순종을 통하여 그의 믿음이 성숙한 단계, 견고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야고보는 하나님을 처음 믿는 그 순간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나서 그 믿음이 성장하는 전(全) 과정을 염두에 두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23절에서 다시 말하고 있다.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먼저 야고보가 창세기 15:6의 말씀 곧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을 알고 있었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바울이 그의 이신칭의 교리를 위해 즐겨 사용하던 것인데, 야고보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야고보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몰라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23절에서 또한 엿볼 수 있는데, 야고보는 여기서 창세기 15:6의 말씀이 창세기 22장의 사건에서 ‘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응하였다’(eplērōthē)는 말은 ‘충만해졌다’는 의미로, 앞의 ‘온전케 되었다’(eteleiōthē)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곧, 창세기 15:6의 ‘의롭다 함 받은 것’이 창세기 22장의 순종으로 ‘충분히 드러나고’ 하나님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야고보에게 있어서 중요하게 부각된 구절은 창세기 22:12이라고 생각된다. 곧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말씀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내가 아노라”(yadatti)라는 단어를 가지고 야고보가 오랫동안 묵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곧, 야고보는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가운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드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았다’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창세기 15:6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전개한 바울의 주장이나 창세기 22:12에 근거하여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한 야고보의 주장이나 둘 다 근거가 있고 옳으며, 각각 나름대로 진리의 측면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과 야고보 모두에게 감사해야 하며, 이 두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더욱 풍부하게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다.

 

 

V. 구원받은 자의 행함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우리의 행함은 믿음에서 나오는 열매가 된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마 7:17)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선한 일을 하게 된다. 빛이 자연스레 양사방으로 비춰나가듯이 세상의 빛 된 우리는 주위에 선한 일을 행하게 된다(마 5:14).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엡 5:9).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하게 된다(마 5:16).

 

이것을 다르게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갈 5:6).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役事)한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총괄이며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참된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 번 구원 받은 자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런 자들은 자기에게 참된 믿음이 없으며 자기가 ‘나쁜 나무’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7:16).

 

물론 우리의 선행도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으며 여전히 허물과 부족함이 많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114문에서 이렇게 질문하고 답한다. “하나님께 회개한 사람들은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아니오. 이생에서 가장 거룩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이 순종의 조그만 시작만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뿐이 아니다. 우리가 행하는 조그만 순종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성령이 도우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를 인도하시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갈 5:22-23). 따라서 개혁주의 교의학에서는 ‘성화(聖化)’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이 세상에서 맺는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지극히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율법을 다 이루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의 공로(완전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롭다고 칭함 받았다(법적 의미). 우리 자신이 의롭게 변화된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 의롭다고 칭함(선언)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롭다 함 받은 우리가 성화(聖化)의 노력을 기울일 때에도 여전히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루는 성화는 지극히 작고 구원 얻기에는 턱 없이 모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화’(거룩하게 됨)의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깨끗하게 하신 목적이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같은 맥락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권면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따라서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내가 잘 났다는 교만이 아니라 또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정죄가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조그만 성화도 다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임을 고백해야 한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건강,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해야 한다. 따라서 ‘교만’이 들어올 공간이 전혀 없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행해야 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10)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날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의 큰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살리신 하나님의 큰 은혜에 보답하여 드리는 조그만 감사의 표시이다. 예수님의 탕감 비유에 나오는 것처럼, 일만 달란트(약 3~6조원) 빚진 종이 갚을 것이 없는 고로 주인이 불쌍히 여겨 빚을 다 탕감해 주었는데, 그런 큰 은혜를 받은 종이 100 데나리온(500~1,000만원) 빚진 동료 종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한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하나님의 큰 은혜에 대해 ‘빚진 자’의 심정으로 드리는 조그만 보답이고 감사의 표시이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해 다룰 때에 ‘우리의 감사’라고 제목을 달았던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여기에 우리의 공로는 전혀 없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값없이 우리에게 전가(轉嫁)된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의 의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우리의 행함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현재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 천국은 ‘믿음 + 행함’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 천국이든 미래 천국이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감사함’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의 큰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감사함으로 행한다. 따라서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구원받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처럼 우리가 미래에 구원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 행함이란 것도 순전히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행한 선행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가며, 천국에 가서도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혜로 살 것이다. (2015년 3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 성경대학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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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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