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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기독교의 역사

하나님아들 2017. 6. 15. 23:35

 일본 기독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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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독교의 역사

 

'가톨릭으로 시작된 선교역사..핍박 속에서도 열매 맺어'

1549년 인도에서 3년 동안 선교사로 일한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일본으로 발을 돌려 예수회선교단을 설립했다. 이것은 남큐슈 지방에 3명의 일본인 선교사와 두 사람의 목사에 의해서 로마 천주교의 첫 깃발을 올리는 효시가 되었다. 비록 자비에르는 일본에 2년밖에 체류하지 않았으나 일본선교에 대한 불붙는 열망과 헌신적인 봉사로 군부와 평민들의 호응을 받아 포교에 전력하였다.



당시는 장기간의 내란과 불교계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용기와 살 기력을 잃었던 일반시민들에게 무엇인가 희망을 주는 변화가 절실한 시기였다. 불교는 평민들의 이러한 요구를 채워 주지 못했음으로 이 천주교는 새로운 약속을 주게 되었다. 이 천주교 선교사들은 신선한 종교관과 또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것들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천주교가 소개된 이래 30년간 천주교는 과격한 방법으로 교세확장을 시도하였다. 즉 그들은 불교와 신도를 이용하여, 영주들로 하여금 서로 경쟁하게 하여 훈장을 수여함으로 천주교를 믿게 하여 소위 기리스탄(중세 일본의 가톨릭 신자)을 만들었다.



1582년 권력을 잡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기 시작하여 1587년에는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하였다. 이후에 히데요시는 조금 누그러져 너무 과격하지 않는 한 묵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6년후 도미니칸과 프란시스칸 선교사들이 마닐라에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천주교 포교금지령을 무시하고 일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간에 싸움이 시작되자 히데요시는 다시 이들을 엄하게 다스리게 되었다.



이 때 스페인 함대가 영토확장을 노린다는 소문을 퍼뜨림으로 히데요시는 전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 26명의 신자가 십자가에 처형되어 순교했다. 그 후 30년 간 계속 박해와 처형이 있었다. 1614년에서 1635년 사이 28만명의 신자가 처형당했다.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고 다시 불교로 돌아갔다.



1637년 시마바라에서 종교탄압에 대한 농민들의 봉기가 있었고, 그 결과 37만명의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도쿠가와 장군시대에는 특별순찰대가 조직되어, 자기 지역에 크리스천이 있는 지 없는 지 조사하여 불교 승려들을 통해 보고하도록 하였다. 신자들은 예수님이나 마리아의 사진을 밟고 신앙을 버리든지 아니면 처형당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250여 년 동안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853년까지 로마 가톨릭교는 일본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1853년 페리 제독이 들어왔을 때 일본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1858년 미국과 상업조약이 체결되었고, 1859년 외국의 배에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4개월 후 7명의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오게 되었다. 아직도 외국문화에 대해서는 폐쇄적이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1872년 요코하마에서 첫 세례식이 있었다. 1873년 개신교의 모든 교단은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기독교 금지령이 해제된 후였으므로 주로 몰락한 사무라이들과 중상류층에게 전도하였다.



1883년에서 1889년 사이에는 개신교의 급성장이 있었다. 그들은 성경과 기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반서구운동으로 주춤하는 곳도 있었다. 또한 신신학과 이성인본주의의 도래로 다소 시련을 겼었으나 오히려 바로 믿고자 하는 자들을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하였다. 금세기 초 3차 선교사 회의에서 각 교단 사이에 서로 협력과 화해가 이루어졌다. 1911년 기독교단이 설립되었으며, 개신교는 새로운 성장기를 맞았다. 1930년 극우파와 과격파 군부에 의해 기독교는 또 다시 시련을 맞게 되었다. 그 결과 1940년대에는 많은 목사들과 지도자들이 투옥되었다. 1941년에는 정부의 탄압에 의해 각 선교 교단의 관계가 두절되었고, 일본기독교단이 형성되었다.



1945년 패전 후 일본은 사상 처음으로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점령군의 통치와 천황의 신 부인으로 인해 기독교회는 새로운 성장기를 맞이했다. 이 때부터 일본은 천주교를 포함하여 34만명의 신자가 매년 4%씩 증가 추세를 보였다. 지금은 신구교 합쳐서 약 100만명의 신자가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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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독교 역사,

박해와 비전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온 것이 1549년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이였다. 당시 세력가인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서 비교적 자유롭게 받아졌는데 70년후 기독교가 금지될때까지 80만명의 신자로 불어났다. 당시 일본의 인구가 1500만에서 2000만으로 생각한다면 놀라운 숫자의 크리스챤이였다.

일본은 죠몽시대에 선조숭배라는 독특한 영혼순환개념을 형성하게 되면서 매우 독특한 민족성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 러나 이러한 사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전래 70년만에 80만명이나되는 신자로 부흥된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그후 전대미문의 기독교 박해를 통하여 일본은 두번 다시 일어설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가 파괴되고 말았다.당시 기독교 박해의 이유를 여러가지로 생각할수 있지만 기독교 국가인 서양제국의 침략을 두려워한것과 기독교가 세상의 지배력을 최종적으로 부정한것에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즉 기독교가 들어옴으로 인하여 당시 일본문화와 사상이 와해되고 국가 지배체제가 붕괴되고 나아가 일본 정체성 자체가 소멸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였다.



역사로 본 일본인



박해로 인한 순교자가 20-30만명정도 나왔다는 것은 당시 크리스챤 3명중 1명이 순교를 당한샘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볼때 일본 크리스챤들도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일제군국시대 신사참배에서는 한명의 순교자가 없었는가? (간접적으로 순교한 사람들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저항해서 순교한 사람은 없음) 그 이유는 도꾸가와 막부의 철저한 기독교박해의 정책에 있다고 할수 있다. 세계교회사에 그 예를 볼수 없을 만큼 잔인한 박해가 무려 300년 계속 되었는데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박해 때문에 일본인의 심성이 현재의 일본인처럼 이상하게 변해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박해의 5가지의 방법



1) 테라우게제도 : 모든 주민은 종교와 관계없이 절에 소속 되어야 했다. 등록한 절에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증명을 받아야 했다. 이 제도가 무려 300년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러한 습관이 남아있다.



2) 종문 개명 : 테라우게제도와 함께 지역별로 종문개명장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을 여기에 기록하게 되었다. 절의 허가가 없이는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기독교 박해 정책에 의해서 불교도의 국가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3) 후미에(그림밟기) : 매년1회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초상을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을 적발 해내려는 것이였다. 이 제이처럼 잔인한 박해가 없었다. 어떤 선교사는 고문과 박해로 말미암아 신앙을 버리고 불교도가 되어버린 자들도 있었다



4) 5인조제도 : 농민들 5가구를 한조로 조직하여 세금 범죄등을 감시하고 기독교를 감시하는 제도로 서로 감시하여 밀고와 연대책임을 지게하였다. 일본인의 심성이 깊이 상처받은 제도였다. 일본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혼내(마음)와 다테마에(외면)가 다르다. 희노애락의 표정이 없다고 표현되는 것이 이로 부터 생겨났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5) 기리시단(크리스챤)류족 개명 : 만약 기리시단이 발견되었을때 그의 친족들도 기리시단과 동일하게 보고 남자의 경우 7대까지 여자의 경우 4대까지 일반인들과 구별하여 특별감시하에 두었다. 무라하찌분 이라고해서 장례식이나 화재가 났을 경우만 제외하고 사람들과의 접근이나 교제를 금지시킨 제도이다. 사회로부터의 완전 따돌림. 이웃과 일절 교제가 단절 된다는것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에 있어서는 매우 가혹한 형벌이 아닐수 없다. 흔히 이지메(따돌림)라고 하는것이 바로 이 형벌에서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이때의 영향으로 오늘까지 일본인의 심성에는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비젼



세계기독교 역사상 이 처럼 박해당한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쇄국정책이 끝나고 다시 서양인들이 들어왔을때 일본에는 기리시단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가꾸레 기리시단 이라고 하는데 숨어 지낸 크리스챤들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무려300년 동안 몰래 신앙을 지켜왔던 것이다.



이러한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볼때 일본은 분명히 복음의 씨앗과 순교의 피가 뿌려진 나라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씨앗을 추수하는 기쁨을 우리세대에 주실것으로 믿고, 오늘도 희망속에서 일본선교의 가능성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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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독교적의 역사



   (도히 아키오 일본 기독교 역사 기독교문사,1984년 일본 기독교사 홍성사 1993년 참고

   흔히들, 일본에 무슨 기독교 역사가 있는가 라고 질문을 듣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그리스도의 인구가 1%벽을 넘지 못하는 까닭에 기독교의 입김도 약하고, 표면적으로 이렇다고 내 세우지는 못하지만, 내면 깊이 들어가면, 기독교의 역사가 일본의 근대화 시킴에 크게 공헌했음을 여기저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순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큐슈지방의 나가사키에는 온통 기독교 문화가 살아 쉼쉬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현재 오끼나와에서는 크리스천 인구가 3%의 벽을 넘어서 거리에 큰 교회가 보이기도 한다. 지식있는 일본인들은 현재 일본 기독교에 영향이 컸음을 인정한다.



  (1) 개신교 이전의 천주교 접촉



     천주교가 한국보다 일본에 먼저 들어 왔다. 흔히들 한국 기독교에서 최초의 기독교의 만남을 임진왜란(1592년-1598년)시 일본주재 스페인 선교사 세스페데스 선교사가 일본 장군 고니시(古西)의 요청을 받고 고니시 부대의 미사를 행했던 일이 이었다. 이 때 일본 군대의 전부가 기독교는 아니었지만, 기독교 부대로 편성된 부대가 고니시 부대였다. 이러한 기독교 부대가 편성되기 까지는 일찍이 기독교가 일본나라에 깊숙히 파고 들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인도에 관심이 있었던 포르투갈의 선박이 그들이 동양에 관심이 있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오다가 우연히 도착한 곳이 큐슈(九州)의 카고시마(鹿児島)DML 타네코시마(種子島)라는 섬이였다. 이 때가 임진왜란 일으키기 50년 전1542년이었다. 일본이 지금까지 보아온 것은 중국이나 조선뿐이었는데, 포르투갈을 통하여 유럽에 존재한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더욱 놀라게 된 것은 유럽의 문명이었으며, 사무라이들이 놀란 것은 대포라는 무기였다.



그 이후 1549년8월15일에 카톨릭교의 예수교파 프란시스코 사비엘 선교사가 일본의 야지로 라는 사람의 인도를 받아 일본에 첫발을 내 딛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임과 동시에 일본선교의 실패의 시작이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순수한 전파로 인한 기독교의 전래가 아니었던 것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일본국과 접촉하면서 식민지 정책을 사용했고, 이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했던 것이다. 또 카톨릭의 실수는 사비엘 선교사가 천황에게 기독교를 전하려고 하다가 천황이 너무 초라한 모습을 보고, 그냥 돌아서 버리고 야마구치(山口)라는 지역에 머물면서 다이묘(大名:일종의 성주)에게 기독교를 전하다가 조선을 거쳐서 중국으로 가 버리게 된다.



그 이후 전국을 통일한 오타(大田)장군이 불교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개방하고, 기독교의 세력을 확장하고 신학교까지 설비하여 신부를 양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세력에 의해서 몰락한다. 그맇아 토요토미는 7년 후 1592년 지금까지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수입해 온 대포와 총을 가지고 기독교를 몰아내기 위해서 국내에 핍박을 가하면서 그들은 십자가를 앞장 세우서 조선 임진왜란의 전쟁으로 내몰게 된다. 이때 엄청난 천주교의 순교자가 생기는데, 일설에 의하면 전국에 80만 명의 신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20만 명(당시 동경지역 전체가 20만 명 살았다고 함)이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그런 후 70년 지나 에도시대(1612-1868 지금의 조선시대와 같은 왕조)가 열리게 되는데 그 시대에 약300년 동안 토쿠가와(徳川)왕조에 의해서 종교 탄압(조상숭배- 신사강요)을 받아 철저히 몰살을 당한다. 그로 인하여 기독교는 지하로 잠적하게 된다.



 (2) 개신교와의 일본과의 만남



    A 미국도 다른 서구제국 처럼 무력으로 개방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본도 미국의 위협 속에서 흑선ㅇ르 타고 500명의 군사을 몰고 온 페리제독과 1854년3월에 화친을 맺으면서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을 요꼬하마에 상륙시킨다. 이 일로 미국은 군인과 관리와 직원들의 신앙을 지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1959년 북 장로교의 의료선교사 햅번을 비롯해서, 미국 성공회의 윌리암스, 미국개혁주의 교회 브라운, 벌벡크 등이 차례로 상륙했다.



 이 후에 일본에 명치유신(明治維新)가 1870년대 일어나게 된다. 이 때는 일본나라 전반이 뒤 바뀌는 시대이다. 무사계급 주도권에서 천황 주도권으로 넘어가게 되고, 지방의 다이묘들은 몰락의 길로 걷게 된다. 여기서 귀족의 자녀들이 새로운 문화를 접촉하게 되고, 선교사들이 교육을 권장함으로 귀족의 청년들이 서양 선교사들이 운여하는 학교에 입학하게 됨으로 신학문을 배우게 되는데 이들에게 1872년에 기도회에 참석하도록 권장함으로, 이들 가운데 많은 젊은이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서약함으로 그들 중심해서 요꼬하마에 개신교 교회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유명한 카이간(海岸)교회이다.



 1873년 서양문명의 자유물결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던 메이지 천황이 기독교 자유를 허락하게 되는데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흔히 당시 요꼬하마 신앙을 주도했던 그룹을  가리켜 요꼬하마 밴드(横浜Band)라고 부르며, 이 그룹 중심으로 후일 장로교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 유명한 인물이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라는 학자이다.



  또한 큐슈지방에도 쿠마모또(熊本)부호들이 미국의 젠슨 이라는 선교사를 초청하여 구마도 서양학교를 설립함으로 서양문화를 접하게 된다. 이 때 존슨씨는 아침마다 영어 성경을 가르치는 중에 학생들 전원이 예수를 믿겠다고 하자 그들의 서약을 받고 여기서 졸업했던 학생들이 교또(京都)의 동지사(同志社 자유 신앙의 역사가 깊은 대학)이 동지사 대학은 일본의 이이지마( 新島) 가 미국의 조합교회(쿠미아이,組合)에 파송을 받아 구마모토의 젊은이들에게 신학을 배우게 한 다음, 첫 목사를 배출하여 일본 조합교회의 지도자를 탄생시킨다. 이를 두고 쿠마모또 밴드( 熊本 Band) 라고 한다.  이 교단은 훗날 한국의 교회를 침략하는데 압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



다시 일본에선 홋가이도(北海道)를 개척하기 위해서 홋가이도 농업국립학교를 설립하게된다. 이 학교에 미국의 유명한 농업학자인 클라크 박사를 초빙하고자 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국립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초빙을 거절하겠다는 제의로 국가에서 인정을 하고 그들 초빙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침마다 학생 섲원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도 학생 전원이 예수를 믿고 개종하겠다고 하여 서약을 베풀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삿뽀로 밴드(札幌Band)리고 부르게 된다. 여기에서 유명한 우찌무라 간죠 (内村鑑三)가 탄생되며, 후일 무교회 주의의 본산이 된다.



B 기독교와 정부의 충돌



  삿뽀로 밴드의 출신인 우찌무라는 동경대학의촉탁 교수로 봉직하게 된다. 당시 교

육치어가(황제 숭배 교육)이 발표될 때, 약간 반대했다고 극우파였던 요꼬이 라는 교수의

주장에 의해서 퇴출을 당한다. 그리하여 요꼬이 교수는 기독교는 천황제를 반대하는 그룹이다 라고 선포함으로 당시 대부분 천황을 하나님의 신앙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그 때에 큰 충격을 받음으로 기독교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비난의 여론 속에도 미션계통의 학교는 복음전파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청일 전쟁 때, 많은 기독교가 침략성을 정당화 하는데, 심지어 기독교가 앞장 서기도 하였다. 하지만 로일 전쟁 때에는 일부 지식인이 저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미 침량전쟁을 성전(聖戦)으로 몰고 감으로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여기에 끌어 들이게 된다. 틁히 일제 말엽에 모든 교파를 하나로 묶는 일본 그리스도 교단을 강제로 출범시키게 된다. 이와 함께 한국 기독교도 영향을 받아 일본 기독교에 예속이 되고 만다.



     C. 해방(일본은 종전이라고 함) 후의 기독교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후, 미국의 통치를 받게 되자,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앞을 다투면서 선교를 재개하게 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하나로 묶어 있던 교파들이 많이 탈퇴하여 자기의 교판를 형성하게 되어지며,여기에 우리 고신교단과 신앙의 맥을 같이하는 일본 개혁파 교단도 탄생한다. 그러나 부흥 초기에는 평신도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일본 평신도 전도함으로 교리적인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우찌무라 간죠도 정부의 핍박을 패해 가면서 성경공부를 하였고, 시골 시쯔오카 후츠시 타케오까 라는 곳에서 성경공부를 하여 마을 전체100% 예수를 믿게 하여 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하였으나, 기존 교회에 대항하는 정신이 커져서, 눈에 보이는 지상교회를 반대함으로, 교회를 세우는데 많은 지장을 가져왔다. 아직도 일본에는 그룹으로 모이는 무교회주의적 모임이 많다.



 이와 같은 일본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부흥하는 한 때가 없지 않았으나, 건전한 신앙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어려운 시대가 반복되었으며, 건전한 신앙을 가진 교회, 성령의 역사를 맛보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불행한 기독교의 역사가 아닐 수가 없다.

   

 (1) 일본의 선교역사

       1859년부터 기독교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약 148년의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 있다.

   (2) 일본 교회의 수

       약 9287개소 (개신교 8182개소 카톨릭 1029개소 성공회 76개소)

   (3) 교파 수 234교파

      교회 수는 작아도 모든 교파가 일본에 들어와 있다고 보면 된다.

   (4) 크리스천의 인구수

       2005년 통계에 1,083, 362명으로 기독교 연감에 등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중에

     이중으로 등록된 신자도 있고, 카톨릭이 포함되어 있으며, 심지어 한국인 수효도 들어

     있다고 생각되어져서, 순수한 일본 개신교 신자는 60만 정도로 보고 있다.(0.5%)

      따라서 한 교회 평균 35명 정도로 볼 수가 있다. (일본인 교직자 수는 1100명 정도)

   (5) 교회가 없는 곳

       약 5만 명 이상 사는 도시에 교회 없는 곳이 8개 지역이며, 인구가 2-5만 사는 곳에 교회가 없는 곳에는 무려 1800군데나 된다.



  (6) 일본에 사역하는 외국인 선교사

      정식 등록된 단체는 124개 단체이며, 비 등록하여 활동하는 단체를 포함하며 약 140여 단체로 추정하며, 한국인 선교사는 약 85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외국인 선교사 2344명으로 등록되고, 비공식적인 선교사를 합하면 약 3000명으로 볼 수 있는데, 한국인 선교사가 약 1/4 정도 차지 하고 있다고 추정된다.일본에서 외국에 최소한 일본인 선교사는 50여 단체에서 16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를 비교해 보면 비교가 안될 정도로 외국인 선교사가 일본에 머물고 있는 셈이다. 아직도 일본에는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유치원, 보육원이 많으며, 특히 나가노 현을 중심 해서 운집하고 있으며, 루터 교파가 기독교 교육적인 면에 많이 투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7) 일본선교가 어려운 이유



    A 천황제도의 유지



       동경 중심부에 황거(皇居)가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국회의사당이 있다. 현재도 새로운 내각이 조직이 되면 황제에게 알현을 하러 가며, 황제가 수상에게 임명장을 수여한다.

황실을 유지하는 하나의 기구(황내청)이 있으며, 왕과 왕태자가 움직이는 모든 것을 공무라고 인정하며, 반드시 재난이 있을 때, 왕은 그 곳을 위로하러 찾아간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일본의 모든 정치/경제적인 인맥이 황실 중심으로 20%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에는 천황이 살아있는 신으로 믿고 고백하는 모습을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지만, 일본의

신사제도의 최고의 존재가 천황이며 살아 있는 신(現神人)인정한다.



B 신사(神社)제도



   신사는 불교, 천주교, 토착종교의 혼합물 종교이며, 일본의 범신론 사상을 대표한다.

그들은 신사는 인간이 위폐(位牌)를 모시고 있으며 뚜렷하게 보이는 신의 형상물, 우상

이 없다. 하지만, 이 신사에는 신사에서 신궁까지 단계가 있으며, 이것이 일본 전역에 20만개 정도 있다고 자랑한다. 각 작은 마을마다 건립되어 있으며, 마을마다 축제가 열릴 때 신사에 안치해 놓은 가마(미꼬시) 장정들이 매고 마을을 배회한다. 이 신이 자신들의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C 마을조합(토나리 구미)제도



  일본의 최소한 단위 (5가 작통법- 다섯가정이 한 조가 되어 서로 연락망을 취하는 제도)

 로 작용한다, 그래서 마을 단위의 모임이 있으며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제도이다.

이것은 일본인들과 오래 살지 않으면, 그들과 접촉하지 않으면,, 즉 외국인으로 살면 잘 보이지 않는 제도이다. 이 모임 때문에 일사불란하게 한 자치구, 자치시에서 무슨 축제가 일어나며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으며, 여기서 거두워지는 모금으로 마을 축제를 운영하며 20%를 신사에 바치며, 그것이 전 신사 상위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막대한 자금이 축적되게 되는 제도이다. 이 제도로 인하여 시골에서는 기독교인 된다는 것은 마을의 단체에서 거부 당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D 일본은 철저히 다신론 주의와 물질주의가 잘 결합된 현실주의 사상을 가진 민족이다.

   일본은 현실에 부함하지 않는 종교는 좀처럼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 따라서 온 갖 이단들과 신흥종교가 일본에서 일어나며, 기독교도 현실종교와 도덕종교로 믿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악령의 움직임이 강하게 작동하는 지역이다. 여기서 깊은 기독교의 사상이 침투해 가면 반드시 상충이 일어나는 나라이다.

 

 (8) 한국선교사가 일본 선교를 담당해야 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많은 기독교를 전하기가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역사는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그들을 관심 밖에 두어서는 안된다.



A 지리적인 이유

      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나라이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고 있다. 특히 한류 붐으로 인하여 왕래가 더욱 잦아졌다.

B 역사적인 이유

   고대부터 한국에 문화가 꽃을 피웠을 때, 일본으로 그 문화가 전승되었다. 그렇다면

   복음의 꽃인들 왜 일본에 왜 못 피우게 하겠는가?

C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말씀 때문에

  일본은 과거 한국을 침략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복음의 사랑으로 안아야 한다.

  선교의 명령과 사랑은 분리할 수 없다(마태복음5장44절, 요나서)

D 민족적인 이유

   일본인들의 피 속에는 한국인 백제 피가 많이 흐르고 있다. 재일동포의 과거의 아픔

   을 누가 치유할 것인가?

E 전략적인 이유

   아직도 일본은 경제대국이다. 일본은 동양의 로마이다. 일본이 복음화가 되면 얼마든지 동남아를 더불어 책임질 수 있다.

F 북한선교의 디딤돌이다.

   언젠가 남북한은 통일 될 것이다. 일본 선교의 어려움을 극복하면 북한 선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문화는 북한으로 파급되어 갈 것이다.

G 현재 신자의 수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일본 교직자들은 일본 크리스천의 인구5%의 벽만 넘는다면 자생적으로 일본이 세계

   기독교에 공헌할 것이라고 조망한다. 이를 위해 우리들의 작은 희생이 필요하지 않는가

H 일본 교회는 한국선교사들을 원하고 있다.

   한국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한국 문화가 일본으로 파급됨으로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는 한국이 이제는 파트너로 인정하게 되었다. 여기에 영적인 한국인 선교사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I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일본은 합법적인 서류만 갖추면 종교 3년 기간의 비자가 허락된다.  그리고 전도로 인

하여 해외에 추방하는 일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전도의 열의만 있다면 언제나 복은 전도는 가능하다

J 동일한 문화권을 가지고 있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며, 현재 한국, 중국, 일본에 한자를 같은 문자를 만들어 서로 통용하자는 학자들의 움직임이 있다. 따라서 언어 습득이 비교적 용의하며, 한국인이 일본 전도에 쉽다.

K 세계에 흩어진 일본인들이 많다.

      지금 선교의 파라다임이 바뀌고 있다, 나라에서 종족으로 바뀌고 있다. 일본인들도 세계에 많이 흩어져 있다.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말할 것도 없고, 동남아시아 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에 일본인들이 퍼져 가고 있다. 일본에 물가가 비싸서 말년을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외국에 나가 있는 회사들도 많다. 해외에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국내에 많은 유수한 일본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서 활약하도록 우리들은 그들을 도와야 한다.

 

 

<4>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은 17세기 초 일본 기독교인들의 순교와 배교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고뇌를 처절하게 묘사했다. 그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앙을 끝내 지키고 순교하는 사람들과, 후미에(십자가를 밟고 지나감으로서 배교를 인정하는)를 하게 되면 다른 신도들은 살릴 수 있다는 상황 속에서 고민하던 선교사가 끝내 후미에를 하게 되는 상황에 대한 묘사는 우리로 하여금 숨 막히게 하면서 안타까운 눈물을 자아낸다.

 

1549년 일본에 기독교 전래, 1587년 금지시킴



일본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549년 9월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카고시마에 도착한 후부터이다. 당시 진취적인 인물에 속했던 전국 시대의 실권자 오다 노부나가는 총과 무역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기독교가 초창기에는 아무 방해 없이 나가사키를 거쳐 오사카와 사카이 그리고 당시의 수도인 교토 지방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코니시 유키나가와 같은 다이묘들도 기독교로 개종하는 등 교세가 활발하게 불어났다. 그 중에서도 큐수 지방의 나가사키 현의 시마바라 반도와 오-무라 지방 그리고 아마쿠사 제도와 고도 제도에서 기독교가 활발하게 퍼져 나갔다. 기독교가 전래된 지 불과 30년 사이에 일본의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5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현재의 일본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하여 100만 명이 조금 넘는다). 당시의 교통과 통신의 상황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 속도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나가사키 현의 시마바라 반도에는 세미나리오(초등 신학교)와 콜레지오(고등신학교)가 있었을 정도며, 기독교의 왕국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에 의해서 급서(1582년)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았다. 세력이 공고하지 못했던 그는 오다 노부나가 가문 중이었던 기독교인과, 코니시 유키나가와 같은 기독교인 영주와의 관계 때문에 기독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의 본거지였던 큐슈마자 평정하자, 1587년 반천련(포루투칼어의 파르테의 일본식 한자) 추방령을 내리고 기독교를 금지시키기 시작했다.



반천련 추방령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일본은 神國(신도의 나라)이므로 기독교국에서 사법(邪法)을 전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2. 그들이 일본인을 신자로 하여 신사(神社), 불각(佛 閣 )을 파괴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다.

3. 반천련(파르테-신부)이 그 지혜의 법(기독교 교리)으로 자유로이 신자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본의 불법(佛法)을 파괴하는 이상, 일본 땅에 그대로 둘 수 없다.



변덕스럽고 갑작스런 ‘반천련추방령’의 동기에는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무역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 아리마령(나가사키 시마바라)에서 기독교인 여자를 하룻밤 노리개로 구하려다가 창피를 당한 일, 큐슈의 기독교 세력의 확대를 무서워한 것, 나가사키 오-무라의 영주가 나가사키를 교회령으로 기증한 사실과 당시 일본의 국교나 마찬가지인 불교도들의 선동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의 지배령 내에 이질적인 신을 섬기는 기독교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즉 ‘반천련추방령’은 봉건체제를 굳혀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 다음해인 1588년에 ‘칼 몰수령’을 내린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천련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기독교 탄압은 시행되지 않았다. 1592년부터 1597년까지의 임진왜란이 실패로 끝내자, 기독교인들을 그 희생양으로 삼아 본격적인 박해와 탄압을 시작하게 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일본의 기독교 순교역사



이와 함께 기독교의 순교의 역사는 시작된다. 즉 임진왜란이 막바지인 1596년 12월에 포르투칼 신부 6인과 일본인 신자와 수사 20명(어린이 3명)을 교토에서 체포했다. 그들을 전국을 구경거리 혹은 반항에 대한 본보기로 삼아 수천 리를 끌고 다니다 1597년 2월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한 사건을 시작으로, 약 40년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순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 아들이 일시 정권을 잡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 전투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일본을 완전 장악하게 되는 1612년까지는 박해 속에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이때 7만 명이나 되는 신자가 늘어났다. 그러나 1612년 이후로 일본의 기독교는 암흑시대를 맞이하였다. 161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독교 금교령,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전국에 걸쳐서 기독교를 철저히 단속하였다.



일본 기독교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히데다다 시대인 1619년 교토에서 50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을 화형시킨 것으로 시작된다. 1623년 나가사키에서의 160명의 순교가 있는 등 유명, 무명의 사람을 합하여 약 4~5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다. 이 중에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명의 한국인 순교자만도 28명에 이른다. 무명의 순교자들을 합하면 최초의 한국인 기독교 순교자들도 족히 1000명은 넘으리라 짐작된다.



그들은 당시의 기독교인을 색출, 고문, 박해의 형태도 여러 가지로 연구해 철두철미하게 기독교 박해를 행했다. 즉 십자가나 예수나 마리아 상을 세긴 동판이나 목판 위를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후미에 제도는, 1629년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걸쳐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후미에를 거부하면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 즉각 처형되었다. 그 처형의 방법에는 처음에는 단순한 십자가형이나 화형을 행했다. 그러나 고통이 적은 급작스런 죽음을 기독교인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영광으로 생각하자, 90도가 넘는 부글부글 끓는 운젠의 유황 열탕에 오랫동안 손가락을 자르고, 이마에 화인을 찍은 뒤에 거꾸로 매달아 오랫동안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거나 물을 온몸에 조금씩 부우며 배교를 유인하는 방법, 거꾸로 매달아 구멍에 머리가 들어가도록 하여 오물을 넣은 구멍 달리기 고문, 바다에 십자가를 두고 밀물 때에 목에까지 찰 정도로 메달아 몇 날 며칠을 특히 밤에 고통 중에 울부짖게 함으로써 아직도 남아 있을 지 모를 기독교인들에게 공포심을 전달하게 하는 등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고문은 당연히 기독교인이 가장 많은 나가사키와 오우라, 시마바라 지방에서 더 잔혹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끝내는 배교를 하였는데, 우리는 그들의 고뇌와 절망을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생생히 체험할 수 있다.

기독교를 금지하고 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사종문(邪宗門)이라는 교육을 전국에 걸쳐서 철저히 시행하였으며, 기독교인을 고발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일종의 5호작통제를 전국에 걸쳐 실시하여 서로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해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표시로 전 국민이 ‘후미엷를 실시하도록 하였으며, 모든 국민은 불교 신도로 절에 등록하고 그 절로 하여금 철저히 생사와 일상에서 종교적인 생활을 철저히 관리하게 했다. 기독교의 그림자조차 허용하지 않는 거의 완벽한 기독교인 박멸체제를 이루어, 1643년 마지막 순교자를 끝으로 일본에서는 기독교인들은 표면적으로는 그림자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기독교가 번성했던 큐슈의 여러 지방에서 기독교인의 단속은 더욱 엄격해서 로마 교황청에서도 일본에는 이제 더 이상 기독교인이 없음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은 200여 년이 계속되었다. 일-불 수교 조약이 체결되어 불란서의 선교사가 통역원으로 일본에 오게 되어 주재원과 선원들을 위한 예배당을 나가사키의 오우라에 세울 때가지 하나님의 이름은 불리지 않는 것처럼 되었다.



‘기독교의 부활’…하나님도, 기독교인도 침묵하지 않음이 밝혀짐



그러나 1865년 3월 17일에 하나님도, 기독교인들도 침묵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기독교 세계에서은 하나님이 보내줄 목자를 기다리고 있던 수천 명의 일본 기독교인들이 존재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1865년 나가사키의 오우라 교회당이 낙성되어 그곳에 프랑스 신부가 상주하게 되었다. 그 소문을 들은 몇 십리 밖의 우라카미 지역의 신도 10여 명이 밤에 그 교회당을 찾아가서 ‘우리들의 신앙은 당신과 같습니다’, ‘우리들도 데우스(하나님)를 믿습니다’, ‘당신은 독신의 신부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7대에 걸쳐 숨어서 그들을 인도할 목자(신부)가 올 것을 믿고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가족들이라는 것을 밝히고 기뻐하여 돌아갔다.



그 이후로 우라카미 지역과 고도 제도의 신도들이 몰래 찾아오고 신부도 몰래 밤에 심방을 가면서 이러한 기독교인들을 로마에 보고해 당시 기독교계를 놀라게 하였는데, 이들을 일컬러 잠복 기독교인들이라고 한다. 1868년 당시 나가사키에 사역하던 신부의 보고에 따르면, 나가사키 부근에 2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 일본 기독교회사는 ‘기독교의 부활’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철저한 색출과 박해의 시대에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유지해왔을까? 그것은 일종의 신비이자 신앙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성경과 찬송가도 없던 시절, 목자도 없던 시절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해왔다는 것은 일종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겉으로는 신도나 불교 신자인 것처럼 가장을 하면서 내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본 기독인들의 몸부림



후미에(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는 것)를 강요당하면 그들은 밟았다(후미에 전날 발을 깨끗이 씻고 후미에를 했으며, 후미에를 하고 집에 돌아 와서는 울면서 회개기도를 했다고 한다). 단나사(개인이 의무적으로 등록된 절)에 등록하여 불경의 독경에도 참여하고. 신도의 신사참배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이었고, 그들은 정기적으로 불교의 주연(酒宴)을 가장하여 기독교 집회를 몰래 가지곤 했다고 한다. 집회 때 비록 성경은 없었지만, 몇 대에 걸쳐 몰래 부모로부터 배운 기도문과 주기도문, 사도신경과 회개송과 아베마리아송 등을 라틴어와 포루투칼어 등이 섞인 일본어로 암송하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제도상 반드시 불교승을 불러 불교의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 동지들끼리 불승이 오기 전에 간단히 몰래 기독교 의식을 행한 후에 불승을 불러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불교식의 장례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음 아픈 일이었으므로 중이 독경을 할 때에 밀실에서 기독교인들은 ‘독경 지우기’의 기도를 외우고 회개의 콘치리산을 기도했다고 한다. 이와 아울러 시체는 화장을 하여 불교식 ‘어계명(御戒名)’을 받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기독교인의 묘에는 이 ‘어계명’과 함께 기독교인의 세레명을 동시에 세겨넣는다던지 아예 침묵의 저항으로 ‘어계명’을 일절 달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비록 신부는 없었지만 지도자들이 물주기 즉 세례를 계속하여 왔다. 이 세례가 잠복 기독교인들의 조직을 더욱 굳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일본교회사가들은 이야기한다. 이들은 또한 성서(성경이 없단 시절이라 기도문 혹은 찬송시)와 성물을 소중히 보존했으나 더 이상 보존할 수 없는 탄압과 색출이 잇따르자 신상이나 불상에 십자가를 새겨 넣거나, 미륵상에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세겨 넣음으로써 기독교인임을 들키지 않고 나름대로의 신앙의 정체성을 지켜왔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타협적인 신앙의 유지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는냐는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다. 그러나 그 혹독한 박해의 시대와 금교의 시대의 잠복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법을 오늘날과 같은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시대를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이 바람직한 가에 대해서는 필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고 안타까워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200년 7대에서 10대에 걸쳐서 철저한 기독교 금지의 시대, 선교사와 목자가 없던 시대, 외부 기독교 세계와의 일체의 연락이 폐쇄되어(공산주의 시대에도 그리고 지금의 북한마자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며 그 기간도 훨씬 짧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에, 그것은 민중의 지혜가 짜낸 신앙의 한 형태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250년을 기다려온 기독교인들이 다시 나타나자 일본 쇼군 정부는 다시금 기독교를 탄압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순교당하거나 귀향 보내졌다가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서 서방세계의 강력한 항의에 의해 1874년에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889년과 1890년에 걸쳐서 일본의 반동적 제국주의적 국가주의와 애국주의가 성행하면서 일본의 교회의 성장은 정지되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2차대전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은 그렇게나 탄압을 견뎌온 기독교인들의 후손이 살고 있고 다니던 우라카미 교회당을 중심지로 떨어졌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김재일/ 예장생활협동조합 대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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