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교회론
성기호(성결대 명예총장)
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양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선교 100주년을 맞이할 때는 기독교인의 비율이 1/4(25%)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개교회도 대형화 되어 세계적인 대형교회들이 탄생되어 세계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때 한국경제도 보릿고개를 극복하고 국민소득(GNP) 5,000달러를 상회하는 중진국의 상위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사회가 통제되고 언로(言路)가 봉쇄되었을 때 많은 국민들이 교회에서 얻는 영적인 자유와 해방감을 갈구하여 교회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80년대 말에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되고 국민소득이 5,000달러에 달하자 영적인 욕구보다 세속적인 일에 관심이 집중되고 과소비와 낭비, 사치와 쾌락의 물결속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은 정지되다시피 하고 있다.
20세기 마지막 10년을 마감하는 1990년대에 들어와 교인의 양적인 증가 뿐 아니라 교인의 질적인 성숙도에 있어서도 정체현상이 문제되고 있다.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이 둔화되는 현상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도 내일의 교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오늘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발견하여 치유할 문제점들을 찾아보고 내일의 교회가 걸어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해 본다.
1. 오늘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
1) 교회 규모의 대형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교회의 성장을 위해 기도와 희생적인 노력을 아끼지않는 목회자들의 수고가 교회의 규모를 키워온 것도 사실이고, 교회의 규모가 커야 많은 재정과 인적자원을 동원하여 효과적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도 적지않은 줄 안다. 그러나 교회가 대규모로 조직화될 때 부수되는 각가지 부작용들 때문에 교회의 대형화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교회가 대형화 되어 가는 이유들 속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큰 교회가 더 커지는 것은 조직이 세분화되어 연령층에 따라 또 전문 직종에 따라 동류의식을 느끼며 교제하고, 같은 수준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하는 장점을 꼽을 수 있겠다. 어린이 주일학교가 조직적으로 운영되고,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는 학생회가 잘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회나, 노인회 등 소속감을 느끼며 활동할 수 있는 대형교회가 선호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구조는 개인의 이익과 편의를 앞세우는 이기주의가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증거이다. 과거에는 개척교회나 어려운 교회, 규모가 작은 교회를 출석하며 봉사하고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정신이 신자들에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생활하기 보다는 자기 중심으로 편하게 교회생활을 하려는 풍조 때문에 건물이 완성되고 모든 시설이 갖추어진 대형 교회를 찾으려 한다. 요즈음의 개척교회가 의자는 물론 강대상과 피아노, 마이크 시설, 냉난방 기구까지 갖추어야 사람을 모을 수 있게 된 것이 이러한 신자의 경향을 잘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흔히 3D 현상이라고 부르는 힘들고(Difficult) 더럽고(Dirty) 위험한(Danger) 일을 회피하려는 개인주의적 안일함이 교회로 역류된 현상일 것이다.
대형교회가 선호되는 것은 개인의 사생활이 노출되지 않은 채 신앙생활에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내실 있는 신앙생활 보다 형식적인 교회출석에서 신자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기는 편의주의적 발상 때문이다.
교역자의 심방을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개인의 비밀이 노출될 수 있는 대화의 기회를 피하려 하는 신자들의 경향 때문에 정기적인 봄, 가을의 심방을 없앤 교회도 적지 않다. 너무 교회가 비대해졌기에 심방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으나 무명의 신자로 남아 개인생활에 무리됨이나 간섭받는 일 없이 교회에 출석하려는 이들이 대형교회를 찾아 왔기에 심방을 강행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교회가 대형화되는 것은 신자 개인의 이기적 사고, 대형교회에서의 무명성을 즐기려는 이유 외에도 인구의 도시집중화 현상으로 농어촌의 신자들이 유입되기 때문이다. 대형교회의 새 신자가 불신자의 전도로 말미암은 것보다 소규모 교회에서의 전입과 농어촌 교회의 이농(離農)현상을 힙 입은 것이 많은 것은 교회의 전도전략을 재검토해야 할 대상이다.
2) 소속 교인을 위한 편의시설과 부속기관은 얼마큼 갖추어야 하는가?
초대교회의 모이던 장소는 교회당이라는 건물이 아니고 개인의 다락방이나 사가(私家)이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시작되고, 빌립보 교회가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된 것이 좋은 예이다. 오늘날도 개인의 단간방에서 시작한 교회가 건물을 얻어 임대교회로 발전하고, 땅을 마련하여 자체 건물을 가질 수 있기를 목표로 삼지만 교회당을 소유한다 하여도 그것으로 발전계획이 끝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주일학교 교육을 위한 교육관 건축, 자가용을 가진 신자들을 위한 주차장 확보, 수양관 또는 기도원 장만, 교인묘지 구입 등 교회의 부속시설과 교인의 편의 시설이 한없이 갖추어져 가야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구제하고 선교하는 등 대사회적(對社會的) 봉사활동에 소극적이 되기 쉽다.
한국교회의 구제비가 재정의 9%를 넘지 못한다는 통계는 헌금의 대부분이 교회자체활동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선교비는 개교회의 유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대외적인 경비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교회는 월정의 소액을 보조하는 정도에 그치므로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도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3) 교회와 가정의 거리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빨리 왕래하는 것이 말세의 징조 중 하나라 하지만 교통의 발달이 교회와 가정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한다. 즉 가정과 교회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도 별불편없이 자가용이나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교회에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로 출석하기를 권하였지만 지금은 교인이 멀리 이사하여도 본교회로 출석하기를 권유하며 교통이 불편한 신자들을 위하여서는 교회가 교통수단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주변에 개척교회나 소규모의 교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형버스를 동원하여 신자를 수송하는 것은 교회관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우려해 본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를 머리로 섬기는 신자들의 집단이니 내 교회 뿐 아니라 모든 복음적 교회가 우리들의 교회인 것을 인정해야 할터인데 우주적교회(Universal church)에 대한 관념은 사라지고 내교회만 앞세우는 개교회(Local church) 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같은 교파에 속한 교인 간에는 거리에 따른 이명(移名)이 허락되어야 하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교회와 가정의 거리는 교회 버스로가 아니라 가까운 교회로 나가도록 지도함으로 좁혀가야 할 것이다.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5리)를 오늘에도 엄히 적용함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교회를 출석하도록 해야 할지 모르겠다.
2. 목회자와 관리자
1) 목회자와 목양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요 21:15, 16) 명하시는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이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요 10:1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교회가 비대화되었을 때는 목사가 신자들은 커녕 제직들도 다 기억할 수 없고 어느 교회에서는 장로님도 구별하지 못했다고 하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예루살렘의 초대교회가 3천명의 새신자가 들어오고 다시 5천명의 신자가 늘었지만(행 2:41, 행 4:4) 만여명이 되는 대형교회를 만족해 할 뿐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아가야 할 사명은 망각하고 있었다(행 1:8).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의 박해를 통해 사도들 외에는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조치하심으로 교회의 대형화를 원치 않으신 사건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행 8:1).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눅 22:32) 하시던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목회자는 신자들의 개인적 필요를 기도할 수 있는 목양자가 되어야 한다. 심방이나 상담을 통해 알게된 바 기도제목을 가지고, 신자 하나 하나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하는 것이 양을 인도하는 참 목자의 모습이다(히 13:17).
2) 목회자와 협동목회
교회가 대형화됨으로 비대한 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하여 유급(有給)의 많은 직원과 부교역자들이 있어야 하고 목회자는 양을 치는 목사라기 보다 설교하고 조직을 관리하는 경영인으로 인식될 소지가 많아진다. 교회의 관리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교회내에 또다른 귀족계층을 형성하여 교회의 이익보다는 자기들 집단이익을 앞세움으로 교회내에서 계층간의 위화감을 일으키고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목사가 반드시 고생해야 한다는 법도 없겠지만 "사장위에 회장, 회장위에 당회장이 있다"는 농담이 시사하는 것처럼 목사가 교회에 군림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교회도 하나의 조직임으로 각 부분을 맡아 일하는 담당자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 조직이 조직자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직만이어서는 안된다.
교회내의 조직은 기능의 분화에 따라 교육, 음악, 심방 등의 분화는 바람직한 협동이지만 부목이 수십명이 되고 구역담당 목사가 다수가 되는 등 소규모 교회들을 집합해 놓은듯한 형태는 협동목회의 본뜻을 이탈한 모습일 것이다.
3. 대외적 기능
1) 사회참여의 한계문제
성속(聖俗), 정교(政敎)의 분리와 상관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한마디로 대답하기는 쉽지않다. 교회는 거룩함으로 세속의 정치나 사회문제에 초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며 거의 무관심한 것이 보수적인 교회의 모습이라면, 정치나 사회문제 등도 교회의 사목(司牧) 현장인 것으로 인식하는 천주교나 진보적 교회의 형태가 극명히 대조되고 있다.
교황(敎皇)을 중심으로 유기적인 조직이 완벽한 천주교는 한 목소리를 내기 쉽고 또한 역사적으로 교권(敎權)이 속권(俗權)을 지배하려던 생리가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신교안에서도 교리적 차이를 무시하고 사회참여에 열심하는 몇개의 교단이 교회협의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교회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함께 공존하고 있으면서도 사회문제나 정치에 너무 냉담하여 교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의 어느 정당들 중 하나인 것같이 정치나 경제, 사회문제에 지나친 관심을 보여 매사에 시비를 가리며 자기들의 입장을 밝히려는 것도 마땅한 일이 아니다.
2) 사회적 책임
신자의 비율이 전인구의 1/4이니 네 사람이 모인 곳에 한 사람 꼴로 신자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인 곳에 여전히 불의와 불법이 성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속에 섞여 있는 신자들이 그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버스나 전철 안에서 소매치기나 폭력사건이 생길 때 모인 네 사람 중 하나가 교인이란 통계가 나오니 그 중에 있는 신자가 이런 일을 고발하고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신자가 자기의 신분을 감추고 모른체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자가 사회적 불의와 불법을 방관해서만이 아니라 죄된 일에 직접 가담하고 있기때문에 여전히 세상은 죄로 오염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겸허히 자성해야 한다. 과소비와 퇴폐적 향락에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지는 않는다 해도 소극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속사회에서 신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터인데 오히려 어둠과 부패의 동참자가 됨으로 사회 속의 교회가 그 역할을 다 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거나 희생이 있는 일을 피하다 보니 불의에 방관자 내지 동참자가 되는 것이다. 회사와 학교, 직장과 일터에서 신자들이 신자의 구실을 바로하고 있다면 훨씬 좋은 사회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3) 선교와 구제
어느 교회나 선교비와 구제비가 그 예산에 책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선교비와 구제비가 예산항목에 들어 있는가가 아니라 그 예산이 교회의 재정규모에 적합한가 하는 것이다. 즉 명목과 성과의 비교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경우를 지적하는 것이다.
한 교회에서 개척교회를 수십 교회 혹 수백 교회를 돕는다 해도 실질적 도움을 주는 것보다 실적을 올리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면 바람직한 선교라 하기 어렵다. 작은 금액을 여러 교회로 나누어 보내다 보니 외적으로는 화려해 보이나 실제로는 별로 큰 도움을 주지못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이런 식의 선교는 피선교지의 목회자가 활동하기에 따라 많은 지원을 중복하여 받게도 하고 그 반대로 소외된 곳에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며 고통을 당하게도 하는 모순을 가져올 수 있다.
교회가 모든 재정을 교회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것은 교회재정의 사회적 기여도가 낮기 때문이다. 혹 구제비를 세운다 해도 명목에 불과한 적은 액수를 책정하는 일이 많고, 예산에 책정되었다 해도 교회의 다른 필요에 의해 전용되는 부분이 구제비일 것이다.
교회에서 인건비, 집세, 이자 등과 같이 준 강제적 비용이 우선 지출되는 동안 경시되고 가장 잘 축소되는 것이 구제비이다. 비록 교회가 사회의 구제기관은 아니지만 교회의 구제기능이 무시되어서는 아니 된다.
4. 내일의 교회
바람직한 내일의 교회상을 그려보며 개교회의 모범적 운영과 연합사업의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1) 개교회주의와 연합사업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실적을 전시하기 위하여 여러 교회에 적은 금액을 분할하여 지원하는 것보다는 한 두 교회를 집중하여 자립하기 까지 지원하거나 아예 개척을 하여 교역자 파송과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는 개척선교가 바람직하다. 멀리 있는 교인을 자기 교회로 데려오기위한 노력보다 그곳에 신개척 교회를 세우고 봉사하게 하는 것이 신자 개인을 위해서나 모교회(母敎會)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교회를 개척하고 지원할 때 교회의 성장에 맞추어 선교비를 감축하는 것이 좋은데 첫 해에는 필요 경비 전부를 책임지고, 그 이듬 해에는 75%, 삼년째에는 50%를 지원할 수 있도록 피차 작정하고 실행함으로 신개척 교회의 자립을 도울 것이다. 그러나 주민의 숫자가 적고 재정상태가 호전되기 어려운 특수한 경우에는 계속 지원토록 해야 할 것이다. 주민이 얼마 안되는 낙도(落雁) 교회나, 지체부자유자들의 교회로 교인들의 생업이 변변치 않은 경우에는 모교회의 지원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2) 해외선교에 있어서
요즈음 한국교회는 21세기의 선교주역이 되어야겠다는 열의로 가득차 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전해졌던 복음을 한국교회가 받아 다시 서쪽으로 예루살렘까지 전달하는 선교의 마지막 주자(走者)가 되어야 하겠다는 각오이다. 현재 116개국에 25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데 짧은 선교의 역사 때문에 일어나는 시행착오가 없지 않다.
선교의 문이 열리는 공산권에 경쟁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불필요한 경쟁과 마찰이 생기게 되어 피선교국 정부의 경고가 나오든가 선교의 문을 다시 닫으려는 시도가 있다. 비록 공산권 선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제3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경우에도 사명감 있는 선교사 후보자를 골라 철저한 훈련과 관리를 함으로 현지에서의 마찰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선교본부를 통해 선교사 관리를 하고 선교비 지원과 선교전략의 공동개발 등을 통해 효과적인 선교를 해나가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것 보다 교단 차원에서 또는 연합 기구를 통해 선교사를 공동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개교회에서 지원할 경우에는 선교사 자녀의 교육이나 은퇴 후의 생활대책 등을 세우기는 벅찬 일이며 선교부나 교단본부에서 추진해야 할 사업이다.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공동으로 투자하여 학교를 세우든가 기존의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학교의 협조를 얻어 파송 선교사의 자녀교육에 어려움이 없게 해야 한다.
자녀 교육을 위해 선진국들이 시행하고 있는 가정학교(Home-schooling)제도를 도입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부모가 자녀를 데리고 있으면서 자기 자녀를 교육하고 정부의 평가에 합격하면 공립학교에서 베푼 교육과 같은 자격을 인정해 주는 제도이다.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을 때 고국에 돌아와 선교보고를 하도록 주선하는 일이나 은퇴 후에 거처할 숙소를 마련하는 일도 개교회적으로 하는 것 보다 단체가 맡아 효과적으로 진행해야 할 일일 것이다. 고국에 돌아온 은퇴 선교사가 선교기관이나 신학교에서 자기의 경험을 살려 봉사하게 하는 일이 선교사나 단체를 위해 필요하다.
3) 교육과 부흥운동
교회의 임무 중 교육하는 일이 중요한 일이기에 이를 위해 주일학교와 평신도교육을 개교회에서 힘쓰고 있다. 각종의 훈련과 성경연구 모임 등을 통해 평신도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개교회의 평신도 훈련을 성서대학이나 신학교란 명칭을 사용함으로 이 과정을 수료한 신도들로 하여금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교역자를 경시하게끔 하는 부작용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일학교, 평신도 훈련원, 구역 성경공부반 등의 평범한 이름으로 교육하는 것이 덜 현혹적이고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을 줄 안다.
과거에는 개교회별 부흥회가 그리 많지도 않았고, 한 교회가 부흥회를 개최하게 되면 이웃에 있는 교회들이 합심하여 참석하고 협력하였는데 요즈음에는 보기 어려운 현상이 되었다. 제직 수련회나 교사 강습회 등이 지방별, 교파적인 연합사업으로 이루어져 감과 같이 연합 부흥회도 성도의 결속을 다지고 경비를 절감하는 등 여러가지 이점을 살려 시행해야 할 일이다.
봄 또는 가을에 집중적으로 있는 부흥회가 같은 지역에서 중복되거나 시간적으로 연이어 시행될 때 신자들 편에서도 참석에 무리가 되고 교회는 교회대로 부담이 과중할 것이다. 지방회별로 시행하는 것이 무리가 있으면 감찰회별로 몇 교회가 연합하여 공동으로 강사를 초청하고 공동으로 집회 장소를 정하여 매년 다른 교회를 순회하며 집회를 가진다면 공동체 의식이 강해지고 성도의 교제가 활발해 질 줄 안다. 매번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봄과 가을의 부흥회 중 한번만이라도 시도해 볼 일이다.
5. 목회자상
1) 목자의 의무에 관련하여
“양을 치라”는 말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방법대로 양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낼 수 있는 친밀함을 내포한다. 목사는 조직의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라 양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목자의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목사는 목양(牧羊)의 책임 뿐 아니라 계대(繼代)할 후계자를 양성해야 한다. 대형교회가 능 력 있는 목회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적당한 후계자를 양성하거나 찾지 못해서 계대에 실패하는 일을 본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키우신 것같이, 모세가 여호수아를 가까이 두고 훈련한 것같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기의 직분을 위임한 것같이 자기의 뒤를 이을 후계자 양성을 위해 기도하고 많은 수고와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2) 목회자의 자질 향상에 관하여
신자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가고 영적 요구가 클수록 목회자도 끊임없는 기도와 연구로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군소 신학교에서 부실한 교육을 받았거나, 신학교를 졸업한 햇수가 길수록 계속적인 교육과 훈련이 요청된다.
개인적으로 경건 훈련과 연구에 게으름이 없도록 노력하여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자기 향상을 꾀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단적으로나 연합적으로 새로운 신학 사조를 소개하고 이에 대처할 방안을 강구하는 일이 요긴하다. 새로운 학문 뿐 아니라 이미 학습한 부분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교단의 교리나 문제성이 있는 부분들은 집중적으로 반복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일의 교회는 목회자의 권위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회자의 영적, 지적 권위에 의하여 존경을 받고 이끌림을 받게 될 것이다. 외적이고 현시적(顯示的)인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 신앙 인격과 목회자의 수준 높은 자질에 의하여 신자들의 평가를 받게될 터인즉 자기 갱신의 노력과 발전을 위해 애써야 하겠다.
3) 특색있는 목회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이 목회의 전부인 줄 아는 이들이 대형교회 목회자의 기도와 설교의 어투나 형식을 모방하려 한다. 주보의 순서도 대형교회를 모방한다. 그러다 보니 특색없는 모자이크식 목회를 하여 신자들의 손가락질을 받기 십상이다. 요즈음은 녹음 테이프가 유행이며 주보가 교회 전도지로 배포되고 있는데 자기 교회의 목사가 누구의 흉내를 내는 앵무새와 같다거나 주보와 교회 운영이 큰 교회의 모방일 때 반발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교단의 예배 모범을 따르고 자기가 존경하는 목회자의 스타일을 닮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도에 지나치게 모방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특히 교단 소속의 교회가 다른 교파의 예배순서에 따라 예배 모본을 바꾸는 일은 삼갈 일이다.
깊은 기도와 성경 연구에 따라 특색있는 자기의 목회 스타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성 시대에 알맞는 목회 방법을 개발함으로 밀접한 교회 속에서 생존과 발전의 길을 모색할 것이다. 예배시간 특히 설교시간이 짧은 것을 좋아하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예배드린 것 같지가 않아 짧은 예배를 싫어하는 이도 있을 수 있으니 특색없는 똑같은 교회 목회는 탈피하여야 한다.
5. 세상 속의 교회란?
1) 영혼구원과 사회윤리 문제
교회의 목적이 개인영혼을 구원하는데 있는가 사회변혁을 가져오는데 있는가 하는 질문은 교회의 노선을 가르는 중요한 질문이다.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에서는 개인영혼의 구원을 제1의 목표로 삼고 사회변혁은 구원받은 개인들이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의 본분을 다함으로 이루어지는 간접적 결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 참여를 부르짖는 자유주의 노선에서는 개인의 죄가 아닌 구조적 죄악을 청산하기 위한 사회 구원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정치 참여와 사회 활동을 선교적인 차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교훈과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교회가 직접 사회 참여나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거듭난 신자가 신앙 양심에 따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신자의 책임을 다할 때 그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날릴 것이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제일 목표는 영혼을 구하는 것이니 개인 구원에 촛점을 맞추어야 하겠고, 한편 신앙 인격을 갖추고 사회 불의와 부정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는 정의감에 넘친 신자들을 양육하여 사회에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나가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어두운 곳에 빛을 비취게 하고 썩어지는 곳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함으로 사회적으로도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회와 교인들은 교회의 대 사회적 영향력을 신자들을 통해 행사할 수 있도록 사회의 각 분야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협조해야 할 것이다. 불신사회를 향해 교회가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경고를 발하는 일도 필요하나 교회가 집단의 힘을 이용하여 정치, 경제, 사회문제 등에 직접 간섭하는 일은 본분을 벗어난 일이라 생각된다.
2) 사회의 기대
사회에서 소외되고 냉대받는 계층이 교회에 찾아와 도움을 청하며 교회가 직접 문제에 개입하여 자기들의 한(恨)을 풀어주기를 기대할지 모른다. 현실 사회 속에서 문제 의식이 없는 이가 없는만큼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교회를 향해 요청하는 그들의 소원이 있을 것이다.
교회가 모든 이의 다양한 요구를 다 수용하고 해결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교회 역시 세속 사회 속에서 박해받는 집단인 것을 깨달을 때(요 16:33),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감안할 때(요 18:36) 교회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영역이 제한적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각자의 문제를 안고 찾아온 각계 각층의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그들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같은 연련층(청년회, 신혼 부부회, 남전도회, 노인회 등) 또는 같은 이익집단(교수 선교회, 실업인 선교회, 의료선교회 등)끼리 서로 만나 대화와 상담,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지도해야 할 것이다.
심방을 통해서 또는 상담을 요청해온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삶의 지표를 제시하고 격려와 위로를 주는 일이 필요하다. 나이나 재산의 유무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교회에 찾아와 자기 문제를 털어놓고 이야기하며 주안에서 해결의 방법을 찾도록 교회는 다양한 조직과 전문 인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3) 교회의 사회적 역할
교회는 세상에 속한 조직이 아니지만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와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세상에 살며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상처와 슬픔이 있는 곳에 찾아가 위로하고 치료하며 함께 기도하는 일이며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제사장의 임무이다.
자기 지역 내의 사고나 애경사(哀慶事)에 교회와 신도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웃의 슬픔과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교회는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교회 자체 내의 일에만 집착할 때 교회 역시 집단 이기주의의 오류에 말려들고 말 것이다. 과감히 "우리"라는 이익 공동체의 두꺼운 껍질을 깨고 이웃과 사회의 아픔에 동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복음적인 교회들이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할 때 자유주의 계통의 교회들이 다른 복음을 가지고 사회에 침투하여 급진적인 인본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되며, 이단들이 소외된 집단을 겨냥하고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개인의 영혼을 사냥하게 된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며 가지는 또 하나의 역할은 선지자적인 기능이다. 즉 앞날을 제시하고 사회를 선도(先導)하는 기능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탁(神託)으로 간직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권위있게 책망도 하고 지시하는 책임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일반이 함께 겪는 고통에 대하여 교회가 관심을 표명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교회를 세상에 두신 뜻일 것이다. 교회와 교파에 따라 교리나 신앙 노선의 차이 때문에 공통의 입장을 취하기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환경문제나 반인륜, 비도덕적인 현상에 대하여 경고하고 정도(正道)를 제시할 책임이 교회에 있다 하겠다.
6. 맺는 말
교회는 교회다워져야 한다. 구속의 피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 교회이며 교인들이 구원의 확신과 바른 인생관을 갖도록 해야 한다. 교회와 사회의 다른 집단들이 존재하는 목적과 운영하는 방법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일을 다 맡아 해결하려드는 것은 무리이고 할 수도 없다. 다만 교회는 기도하고 가르치며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제사장적 선지자적 기능을 다하도록 할 것이다.
사회가 산업화 되고 전문화될수록 인간의 비인간화(非人間化)가 가속되어 집단 속에서도 소외와 고독을 느끼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이에 목회자와 신자의 인격적 교제가 더 깊게 이루어져야 하고 다양한 요구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준비를 교회는 갖추어야 한다.
교통의 발달로 교인의 분포도가 넓어지고 대형교회가 될수록 어린이 신앙교육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 목회자는 장년 신자 뿐 아니라 각 연령층의 모임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특히 교회와 사회의 내일을 담당할 어린이들을 좋은 일군으로 키워야 한다.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이 내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지교회로 세계 선교로 활용되도록 해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지역 특성에 따라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행 8:14 사마리아교회; 행 11:22 안디옥교회 등). 교회들이 직접 교회를 세우고 양육하는 지교회운동이 일어나야 하겠다.
세계적으로는 좋은 전도자(행 13:3)를 찾아 파송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기도와 물질이 뒷받침되어(빌 4:14, 15) 땅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의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 대형 선교 계획은 연합적으로 충분한 계획과 예측을 통해 협력선교가 이루어 지도록 해야 한다.
신자 개인이나 교회는 가루 서말 속의 누룩과 같이 사회 속에서 조용한 변화를 이루어내는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민감한 사회 문제에 대하여 교회의 입장 특히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의 입장을 밝혀 신자들로 하여금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인류의 장래와 지구의 미래를 내다보며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도 경고와 능동적인 대처를 해나가야 하겠다. 공산권 선교 특히 북한선교를 책임져야 하겠다는 한국교회의 책임의식 속에 장막속에 숨겨진 교회의 실상과 공산권의 선교전략을 수립하기 위하여 그 방면의 전문적인 인력을 양성하고 선교 후보자를 키우기 위하여 신학교에서 적절한 교과과목을 설정하고 대비하는 일도 긴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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