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역사의 남은 미래 특히 종말의 끝에 있을 특별 비밀을 알게 되고 준비하면서 결말을 승리의 삶을 살수있게 한다. 믿음의 승리 신부로서의 승리, 픽박과 환란에서승리, 비진리에서 사탄의 속임수에서 승리,
3) 영적 눈이 열리고 신앙인은 성경전체가 뚫리게 되고 영원천국에서 특별우대
요한 계시록의 해석 중대한 문제 세가지
이것을 규명할 수 있다면 절반은 다 해답을 얻을 수있다. 그리고 계시록의 전체해석의 단초를 제공하여주는것이다.
첫째: 전,후,무천기설중에 어느것인가?
둘째: 수자가 실제수인가 상징수이가? 또 실제 모습인가? 상징모습인가? 아니면 혼용되어졌는가? 그렇다면 어떤 원리가 숨어있는가? 그 기준은?
셋째: 이스라엘과 유대인 중심으로 해석해야하는가? 아니면 성도와 교회중심으로 인가? 아니면 혼용하였는가? 그렇다면 워던 원리가 있는가?
이는 명확하게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요한이 예수님과 더불어 유대주의에서 교회가 나왔고 예수님이 그들의 고소로 못박혀 돌아가시고 유대주의에서 교회가 이미 하나님의 나라로 형성되는가운데 잇다는것을 모를리가 없다. 중대한 박해시에 밧모유배중에 교회에대한 미래 염려를 하면서 기도하는중 계시를 받아 쓴것이 확실하다면 교회중심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처음 사도는 교회에 대하여 편지를 보내고, 주의날에, 교회를 염려하다가, 교회에 대한 성령의 음성을 들으라고 하였다. 교회의 미래에에 대한 집중관심과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는 대전재에서 볼 때 위의 모든 것은 유대인과 구약의 성전과 율법등을 근거로 하여 교회에 대하여서 클로즈 업 시키고 있다고 본다.
넷째: 교회의 미래종말의 차서에 관한 문제이다. 그 중에서 휴거는 어느 싯점에 일어나는가?
1) 환란전휴거=교회는 환란을 완전히 면한다.
근거-한번구원 받은자는 절대적인 보호하신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때문에 두번심판받지않는다. / 노아의 때와같이 8식구가 물심판에서 교회인 방주가 뜨 올랐기에(마24:37), 소돔고모라도 불심판전에 ../계시록4-19교회란 말이 한번도 안나오기때문에/ 깨어 있으라준비하고 있으라(눅21;34-)데려가겠다는 약속,살전1:10- 장래노함심에서 건지겠다. 계3:10 온세상시험에서 면하게 하겠다 ,
2) 환란중간 휴거= 교회는 환란을 절반 통과 한다. 하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 혼인잔치에 열처녀가 반은 들어가고 반은 못들어가듯이 중간에서 불시험을 통하여 시험중에서 알곡은 들어가고 쭉정이신자 준비되지못한 성도는 환란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
3) 환란후휴거 = 계19장에 근거, 전후반의 모든 세가지 재앙을 경험하고난후에 예수님재림직전에....교회는 환란을 완전 통해야 한다.
근거: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성도의인내가 여기있으니 ....
이는 전,후,무천기설과 관련이 깊은 것이긴하지만
◈계시록 전체의 주제 =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궁극적이 승리"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 때 박해를 받아서 외딴 섬 밧모에 유배되어 이 위대한 묵시의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환상을 통하여 주님은 여전히 살아계실 뿐 아니라 불꽃같은 눈으로 교회들을 지켜보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로마 당국은 무지막지한 짐승이요 음녀로 주의 백성들을 대적하지만 결국 주님의 능력으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묵시의 글과 최근에 비슷한 장르가 판타지 소설입니다. 판타지의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사람들이 새를 타고 날아가거나 불을 토하는 용과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묵시나 판타지의 중요한 공통점은 역시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해석의 주요한 열쇠 포인트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라='요한의 계시'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계시"란 말은 '아포칼립시스'는 '드러냄' '벗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금껏 그 어떤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해석하기 어려워 하였지만 지금은 확실한 말세로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있는 단계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계시록 만큼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많은 마귀와 이단의 미혹의 재료가 되고 성도를 미혹으로 빠지게 하여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 요즘 이미지 상징등의 풍부함으로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게시록의 이해는 몇가지 전제적 조건을 가지고 해석해야한다.
1. 요한이 이 책(편지)을 쓰게 된 그 시대적인 상황(1장에 나와있듯이)배경을 항상 기억하고 해석하여야한다.
-모든 성경의 저술이 그러하듯이 저자의 그 시대에의 때를 말하고(예-'웃시아의 죽던 해') 누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적시되어있다. 이로 보건데 지나친 공상과 지나친 초역사적 초월적인 영해나 자의적이고 풍유풍자적인 것으로 넘어가지 않아야한다. 역사적 문자적인 해석을 하여야한다.
1. 요한계시록은 성경전체의 역사드라마의 대종결편으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신구약전체의 흐름과 내용을 연결짓지 않고는 해석되어질 수 없다.성경예순다섯권에도 언젠가 이 땅의 역사는 끝나고 하나님의 게획하신 영원한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말씀이 부분적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흐름속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2. 특히 구약 선지자의 예언 이상과 환상 계시의 최후 완성이다,
그러므로 구약 예언선지자에게 주어진 근원에 연결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3. 성경전체가 말하는 주제로서 인류구원을 위한 배후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 삼위일체와 그 대적 사탄마귀 용과 적그리스도와 거짓선자의 대쟁투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따르는 충성된 믿음의 사람의 최후승리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역사가 마지막에 자신의 피로 세우신 교회라는 나라와 백성이 어떻게 승리하여 가는가를 확신시켜주고자 한다.
모든 성경이 메시야 대망에 맞추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모든 종말의 징조와 심판과 승리에 촛점이 맞추어져 잇다.
4. 비밀적인 숫자와 상징에대한 해석을 영적이고 성경적으로 풀어야한다. 기록당시의 황제숭배로 인한 픽박을 배경으로 주어진 미래의 계시이기 때문에 그릇된 해석 즉 문자적 해석이나 지나친 자의적 풍유적 해석등 과잉해석을 하지말아야 하고 오직 성경적이며 당시 유대적인 배경과 역사적 미래적인 것을 살펴야한다.
◈ 계시록이 쓰여진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들
-로마가 지중해 쪽 이스라엘나라를 중심으로 보면 전세계를 다 다스리는 때
-로마의 11대 황제 플리비아스 도미티아누스가 다스리던 때(A,D81~96)
-이전에 A.D64~68에 네로황제의 대박해가 지나고 2년후 티투스(티투)황제가 예루살렘성을 함락하고 성전은 불태웠는데 이 사람이 바로 도미티아누스의 형이다. 그들의 아버지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우스오 왕제이니까 3부자가 3대쩨 황제로 내려오던 이때까지 사도들은 거의 순교를 당하고 요한사도 혼자만이 남아서 교회를 지키다가
제2차 박해가 90-96년까지 7년간 일어나든 때에 기록된 것이다. 정배지에서 고독한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박해 -사도들과 중직자들이 체포대상 일순위 혹독한 고문과 죽음 - 장기고문 모든 고문기술은 로마에서 개발된 것들... 굶김, 사자밥, 화형, 재산 압류, 유리방황, - 성도들의 체포 이런 상황에서 두려움과 떨림과 근심과 의심에 쌓여있는 때....
-교회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때 사도 요한은 유배지에서 과거의 주님과 함께했던 일들과 약속들 그리고 이미 세워진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내가 죽고 사도시대가 끝나고 나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믿음의 씨들은 계속 살아 존재할 것인지. 주님은 언제 오시며 이 세상의 끝에는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마치 다니엘이 노인이 되어 바벨론 포로로 유수되어 힛데겔 강가에서 이 민족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하면서 기도하던 때에 저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계시를 전달하여 주엇던 것처럼 .... 이사야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 언제 계시다운 계시가 임하느냐 하면 나 걱정말고 교회와 주님 나라를 염려하고 깊이 고민하면서 애쓸때에 참다운 계시가 임한다.(루터도 ...)
재림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문제요 재림을 확신하여 대망하는 것도 문제로 포기할수도 나갈 수도.... 진퇴양란 에 처해 있을때 이제 10대 박해 중에 겨우 2라운드에 들어 섯는데 이때 하나님게서 천사들을 보내어 ......교회를 안정시키고자 잘 준비하고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천사가 잘 알아 보도록 미래게획의 되어질 일들을 찬란한 그림과 모양을 그려서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 요한 계시록을 쓰게 하신 목적 -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또 하나의 목적은 황제숭배의 강요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각종 핍박으로 부터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와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사람은 계시록을 보면 무섭다고 떨린다고 한다. 다른 예언서도 그러하듯이 죄인들은 경고를 받으면 떨리고 심판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랑의 편지가 되고 위로가 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요한 개인이 자의로 쓴 기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분이 백성들에게 보이시려고 요한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계시이다.(계 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시는 그 "속히 될 일"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특권이요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성경에 의하면 미래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미래를 성경의 예언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펼쳐 보이셨다. 성경에는 대표적인 두 권의 예언서가 있는데 구약에서는 '다니엘'이요,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다. 우리가 지금부터 연구하려는 책이 바로 신약 성경의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이다. 다니엘서는 바벨론으로 부터 페르시아, 헬라와 로마제국을 거쳐 현재의 세계 질서가 이루어지고 마침내는 지구의 종말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세계 역사의 대 파노라마를 예언하였다. 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 출생 이후부터 세계사와 교회사에 나타난 선악의 대쟁투와 특별히 세계 역사의 마지막에 나타날 사건들을 정확하
게 예언하였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연구함으로써 이 세상에 다가오는 미래를 알 수 있으며 이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가 어느 편을 선택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독특한 표상들과 상징적인 언어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신실한 백성들에게 많은 위로와 용기와 희망의 원천이 되어왔다.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 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은 여전히 해석할 수 없는 신비의 책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해석할 수 없는 책을 성경으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든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되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밝히 깨달아 알아서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부지런히 공부하여 마지막 선악간의 대쟁투에 대한 배경과 그 결과를 미리 알고 그 환난에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계시의 전체흐름을 주는 중요 그림들
-7인
-7나팔
-7대접으로 꼬리를 물고 진행된다.-요한이 본 중요 계시는 이 세가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 내용 개요분해
(1) 서언과 인사(1:1-8)
저자는 자기가 본 것을 전하는데 이는 예언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다(1-3). 편지의 인사말처럼 되어있는 1:4-6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다.
(2) 그리스도의 환상과 명령(1:9-20)
여시서 요한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계시를 받게 되었는가를 서술하고(9-10), 자기가 환상을 본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분의 명령에 대해 언급한다(11-20).
(3) 이제 있을 일(2장,3장)
아시아 지방에 있던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되어있는 이 단락에서 요한은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환상(1:12-16)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각 교회를 향하여 칭찬과 책망과 명령을 한다.
(4) 장차될 일(4:1-22:5)
심판(4-5장)과 보응(6장-19:5), 주의 강림(19:6-21)과 천년왕국(20:1-15),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21:1-22:5)을 다루고 있다.
(5) 맺음말(22:6-21)
계시를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속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즉 앞에서 미리 보여준 사건들이(4-22장) 속히 이루어딜 것임을 확증한다.역사의 길이에서나 영원에보면 이 '환란은 잠간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는 말과 축복과 기원으로 맺는다.
요한계시록의 해석 원리-서울중앙침례교회 피영민목사 요한계시록 1:1-3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1-3)
요한계시록은 큰 책이고 어려운 책입니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공부하면 안 됩니다.존 칼빈의 경우에도 다른 주석은 다 기록했지만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완전히 알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면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중요점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계시록은 한 사람이 다 알아서 파악할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이 상징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징이란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징은 시대에 따라 다른 깨달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출간된 요한계시록의 주석들을 보면 방향성에 따라 해석도 천차만별 달라집니다. 해석의 원리에 따라서 완전히 달라집니다. 1)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한 절, 한 절 연구하는 방식으로 가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 절씩 연구하는 것보다는 큰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 부분이 말하는 핵심을 공부하는 방식이 더 합당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너무 세세하게 공부하려다가 자칫 엉뚱한 길로 빠질 가능성이 많으므로 각 부분이 다루고 있는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전반적인 주제에 주목해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입니다. 2) 요한계시록은 대단히 어렵고 상징적인 책이지만 닫혀진 책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열린 책이지 닫힌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0절은 그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계시 받은 1세기에도 이 책은 인봉된 책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유배당했다는 밧모섬을 가보면 요한이 늙어서 힘이 없음에도 기도를 해서 기도하려고 일어날 때마다 손을 짚은 자리가 파여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위에 이마를 대고 기도해서 바위가 파인 곳이 있는데, 약간은 과장된 것 같지만 요한이 기도를 그만큼 많이 했음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요한에게 하나님이 하늘문을 열어서 계시록을 계시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1세기에 사도요한이 계시를 받았을 때에도 인봉된 것이 아닌 열려있는 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서 읽히고 삶에 적용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운 책이지만 못 읽은 책은 아닙니다. 즉 어렵다고 중도에 포기하고 공부하지 않아야 하는 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공부하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요한계시록은 먼저 혼자서 읽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제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듣고 지켜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읽고, 듣고, 지키는 세 가지 동사가 중요한데,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듣고 계시록의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동기는 충분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대할 때에는 세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은 해석을 한 가지 라인에서 하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며 광신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48년에 이스라엘 독립과 함께 예수님이 오신다고 한 사람들, 또 “한 세대가 지나고”라는 것에서 40년을 잡고 1988년에 오신다고 하거나, 1992년, 1999년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한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광신주의라고 합니다. 광신주의에서 나온 종말론을 통해서 이단들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날 이단들은 바로 이 종말론에서 가장 큰 문제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광신주의에서 나오면 안됩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으로 인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광신주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2)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덮어두고 공부하지 않고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책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인봉된 책이 아니라 열려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읽고, 듣고, 지킬 때에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무시하지 않고 광신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3) 필요한 자세는 요한계시록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교훈을 받아 삶에 적용하려는 책임성 있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책임성 있게 성실하게 적용하려고 하는 신앙적 태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시간이 지나며 시행착오를 겪어 가면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는 점점 깊어졌습니다. 1세기에도 열린 책인 요한계시록은 21세기인 지금도 열린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도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요한계시록의 몇몇 주제는 아무리 연구해도 모르겠다며 확실한 견해를 밝히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년왕국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했기 때문에 그 분의 설교는 어떤 때는 전천년주의자, 다른 때는 후천년주의자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인이 잘 모르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그 때, 그 때 달라지는 면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렇게 잘 몰랐던 것이 20세기에 조금 더 알게 되고, 21세기에는 조금 더 알게 되는 점진적으로 조금씩 깊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천 년동안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을 사람들이 많이 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세 가지 중요한 학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세 가지 중요한 학파는 과거주의자, 미래주의자, 역사주의자입니다. (1) 과거주의자는 요한계시록이 1세기에서 3세기 콘스탄틴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된 종교로 세우기 이전에 기독교와 로마와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를 핍박하던 로마제국이 멸망함으로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이미 과거에 다 실현된 내용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3세기 혹은 4세기 초에 관한 예언에 불과하고, 1세기에 예언되고 4세기에 지나갔으므로 요한계시록은 과거에 다 실현된 책이라는 입장이 과거주의입니다. (2) 미래주의적인 해석은 요한계시록은 모두 미래에 실행될 예언으로 봅니다. 1-3장에서 나오는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이 교회들은 1세기에서 21세기까지의 교회를 연대기적으로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4장 1절에 사도요한이 성령에 이끌려 하늘에 올라간 것을 교회의 휴거로 해석하고 4장 2절에서 19장까지 교회가 하늘로 휴거된 이후에 이 땅에 불림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대환란에 대한 얘기인데 교회는 아직 들림 받지 못했기 때문에 4장부터 19장까지의 얘기는 모두 미래에 일어날 얘기라고 합니다. 교회는 이미 하늘로 올라갔기에 대환란하고 아무 상관없으며 환란당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위에서 환란을 본다고 해석을 합니다. 교회는 환란을 통과하지 않으며 이 땅에서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앞으로 어느 7년에 있을 대환란에 대한 예언이며 미래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미래적인 해석입니다. 20장부터 22장은 미래에 다가올 천년왕국과 백보좌 심판, 그리고 새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이런 미래주의 해석 방법은 20세기에 만연한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의 해석방법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1세기 사람들에게 몇 천 년에 있을 일들을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3) 역사주의적 해석방법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교회 역사 전체에 걸쳐서 관련되어 있다.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사건이 1-22장까지 모든 내용이 연대기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과거주의 해석방법은 초대교회로 국한하고 역사주의적 해석방법은 교회시대 전체에 걸쳐서 연대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해석방법입니다. 이 세 가지 해석방법은 부분적으로 옳은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적용하면 무리를 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 가지 해석방법은 요한계시록에 전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부분은 옳지만 전체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방법은 부분적인 타당성은 있지만 전반적으로 타당하지는 않다고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가장 합당한 방법은 무엇입니까?점진적 해석 병행법이 가장 적절합니다. 이 방법은 윌리암 헨드릭스가 요한계시록 주해를 ‘넉넉히 이기는자라.’는 책을 통해 소개되었고, 지금은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요한계시록은 초림부터 재림까지가 아니라 초림과 재림이 일곱 번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자세히 보면 초림과 재림이 일곱 번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7”이라는 숫자는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숫자입니다. 완전수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숫자가 42회나 등장합니다. 일곱 별, 일곱 교회, 일곱 나팔, 일곱 금촛대, 일곱 인, 일곱 대접 등 계속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7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이 숫자는 일반적으로 완전수, 충만수, 완전, 완성수를 의미하는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심판도 일곱 번이나 나와 있는데 한 번에 몰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걸쳐서 나옵니다. 주님이 재림하셔서 악인을 심판한다는 메시지가 일곱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병행되어 나와서 병행법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병행되어 있는 이 일곱 번의 사건들이 점진적으로 의미가 깊어진다고 합니다. 일곱 번 중에 처음부터 세 번째까지는 교회가 핍박을 받습니다. 그리고 다른 네 가지는 교회가 핍박받는 이유가 사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와 사단과의 투쟁 때문에 교회엔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첫 번째부터 세 번째는 현상적인 얘기를 하고 있고, 네 번째부터 일곱 번째는 영적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가 현상적인 것에서 영적인 의미로 점진적으로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방법을 가리켜 점진적 병행법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방법이 점진적 병행법입니다. 이것이 역사주의와 다른 것은 역사주의는 1장부터 22장까지를 초림부터 재림까지 연대기적으로 보고 일회적으로 바라보지만, 점진적 병행법은 일곱 번 반복된다. 그리고 사건이 연대기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고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일곱이란 숫자가 많이 나오는데 인, 나팔, 대접 이런 순서로 나옵니다.
1-3장까지는 복음서 시대, 교회 시대에 나오는 다양한 교회 유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미래주의자들은 이것을 각 세기에 맞는 교회의 모습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은 맞지 않습니다. 교회가 각 세기에 따라 하나의 모습으로 정형화될 수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모두 미지근한 교회만 존재하는 시대는 없습니다. 오히려 일곱 교회는 전 모든 세대에 보여 지는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에베소 교회, 서머나, 두아디라, 라오디게아, 빌라델비아 교회 같은 곳들이 있습니다. 1-3장은 모든 시대에 존재하는 다양한 교회의 유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7장까지는 일곱 인의 재앙입니다. 천상에 계신 어린양 그리스도가 일곱 인을 떼는데 이것은 땅에 있는 교회가 받을 환란과 핍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곱 인을 뗄 떼마다 환란을 받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모든 환란을 이기고 어린양이 목자되시고 하나님이 눈물을 씻어 주시는 축복으로 끝납니다. 즉 교회는 환란을 당하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위로해주시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핍박자들은 6장 16절에 보면 어린양의 큰 진노를 받아서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 6:16)고 애원합니다. 한마디로 “바위야 내 위에 떨어져라. 내가 차라리 떨어지는 바위에 깔려죽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핍박자는 이렇게 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핍박받은 교회는 결국 환란을 이기고 어린 양이 목자되어 눈물을 씻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핍박받는 사람이 있다면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주시는 위로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8-11장은 일곱 나팔의 심판입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전쟁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즉 일곱 나팔을 분다는 것은 교회시대 전체에 걸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한 예언입니다. 전쟁과 전쟁이 일어나도 교회는 복을 얻고 전쟁을 통해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수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민수기에 나팔 규례가 나옵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전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나팔은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11장 18절을 보면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계 11:18) 전쟁을 일으켜서 땅을 망하게 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망하게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신다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상을 주십니다. 12-22장은 교회가 왜 지상에서 핍박을 받는지에 대한 영적인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핍박받는 이유는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이 교회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승리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11장은 제 1부로서 현상적인 사건이고,1-11장까지 교회는 지상에서 핍박을 받지만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2-22장은 제 2부로 영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초림, 재림을 반복을 하면서 의미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점진적 병행법이라고 말을 합니다.
12-14장까지는 용과 그 추종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다에서 땅에서 나오는 짐승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적그리스도들입니다. 정치적인 힘과 종교적인 힘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합니다. 사단은 정치적인 힘과 종교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강한 힘을 통해 교회를 핍박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핍박을 받고 끝나게 됩니다. 용들은 심판받고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15-16장은 진노의 일곱 대접에 관한 말씀입니다. 악인에게 하나님이 진노의 대접을 부으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일곱 대접 심판의 주제입니다.
16-19장은 바빌론의 멸망입니다. 바빌론은 큰 음녀이며 교회를 대적하는 종교적인 세력을 상징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바빌론은 멸망하고
20-22장은 이 짐승들, 바빌론의 머리인 용이 심판을 받고 무저갱에 빠지게 되고, 불 못에 빠지며 그들을 추종하던 사람들도 불 못에 빠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생을 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초림과 재림이 일곱 번 반복되면서 진행될수록 현상적인 의미에서 영적인 의미로 점진적으로 깊어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로마황제 도미시안이 통치하던 81-96년까지 밧모섬에 유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계시록을 쓸 당시에 성도들은 핍박을 받았고, 추방당했고, 투옥, 순교의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거짓 이단들이 출몰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 요한은 핍박받는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핍박자들은 아무리 강해도 심판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교회를 핍박하는 자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승리하게 될 것이다. 순교자들은 목베임을 당해서 망한 것처럼 보인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은 천상에서 왕노릇하는 교회의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승리하고 있음을 사도요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오히려 망한 자들은 교회를 핍박하고 악을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 못에 빠뜨려서 심판을 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말은 핍박을 받고 어려워도 신앙을 지키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굳게 지키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중심된 주제이며 목적입니다. 우리는 계시록을 읽으면서 신앙이 더욱 커지고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마틴 로이드의 건강한 요한계시록 해석법
생명의 삶으로 큐티를 하는 모든 분들이나 교회에 다 적용되는 얘기겠지만, 이번달에는 요한계시록이 주테마입니다. 따라서 많은 분들이 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고민이 있어 보입니다.
제가 소속된 소그룹모임에서도 요한계시록의 인상이 다음과 같습니다.
1. 두렵다
2. 어렵다
3. 뭔가 숨겨진 코드가 있을 것 같다
교회의 소그룹 리더 모임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주류였습니다. 더불어 666이나 144,000이 무슨 의미가 담겨있냐는 질문에 더불어 특정 상징이나 표징이 뜻하는 바가 뭐냐는 질문까지… 더불어 담대하게(?) 적그리스도는 오바마대통령이고 666은 현재 미군이 추진중인 바이오칩 사업이라는 주장까지.
뭐 그냥 .. “참 사람들 성경 별나게 해석하네”.. 하고 무시해 버릴 수도 있기는 한데.. 문제는 제가 거주하는 샌안토니오는 육해공해병 기지가 모두 있는 도시라 교회 청년중에 미군이 적지 않다는 거죠. 이들에게는 바이오칩 문제가 그냥 호기심많은 사람들의 가십꺼리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현실생활사이의 심각한 고민꺼리입니다. 실제로 신앙의 경력이 적지 않은 분들중에도 요한계시록을 현실의 특정 사건이나 인물과 연결지어 해석하는 분들이 적지 않고… 그래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교리강좌시리즈중에 ‘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중에 나오는 요한계시록 부분을 좀 정리해 봤습니다.
정리 내용은 전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영광스러운 교회와 아름다운 종말’에서 요약했습니다. 일단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3가지 해석법에대한 일반적인 소개로 내용을 시작합니다.
요한계시록의 3가지 해석법
1. 과거주의적 견해 – 요한계시록 내용이 이미 3세기경에 모두 현실화 되었다
2. 미래주의적 견해 – 요한계시록 내용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미래의 일이다
3. 역사주의적 견해 – 과거나 미래에 국한되지 않고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대한 예언
뭐 당연한 얘기지만 일반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요한계시록을 과거나 미래의 일로만 보지는 않겠죠.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중에 역사주의적 견해를 조금 더 세분화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역사주의적 견해
1. 교회 역사적 견해: 요한계시록은 교회 역사의 주요 단계들에 대한 개략 혹은 개관이다
2. 연속적 역사적 견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상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견해
3.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요한계시록은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의 삶과 역사를 지배하는 원리들에 대한 설명이지 현실의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예언이 아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 따르면 역사주의적 견해중에 '연속적 역서적 견해'와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가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받아들여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경우 '연속적 역사적 견해'는 옳은 견해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아래 계속해서 왜 '연속적 역사적 견해'가 옳지 못한지에 대한 설명을 추가합니다.
연속적 역사적 견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상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교회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견해
1) 6장 – 6개 인을 뗌, 8장 - 7번째 인 뗌, 8~11장 – 7 나팔, 16장 – 7 대접
이 내용들이 교회에 순서대로 일어날 일이라고 봄. 따라서 실제 나라들과 역사적 사건들과 일대일로 매치된다고 봄. (ex. 9장이 무슬림 왕조가 교회를 침공한 사건)
2) 문제점
ㄱ) 12장은 미래가 아닌 성육신 사건을 묘사함
ㄴ) 마지막장(22장)에 요한계시록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이 나옴 “또 내게 말하된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22:10)
ㄷ) 다니엘서와 비교 –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이라” (단 12:4) - 이 예언은 거의 5세기가 지난 후 일어남
ㄹ) 즉 500여년 후에 일어날 일들에 봉함을 명령하셨는데 요한계시록이 쓰여진지 거의 2천여년이 지난 지금 시각으로 보면 인봉하지 말라는 요한계시록의 명령을 역사적 사건으로 해석하기엔 문제가 있다. 즉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시점과 그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즉시 적용될 내용들이다.
연속적 역사적 견해에 대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해 주십니다. 이제 목사님이 옳은 해석이라고 보시는 영적 역사주의 견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
1) 요한계시록이 어떤 상세한 연속적 역사적 과정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주장
2)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의 삶과 역사를 지배하는 원리들에 대한 설명
3)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을 포함한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되었고 그들에게 적절한 것
4)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응시키는 것은 이 책의 영적 특성을 무시하는 행위라고 봄
이렇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영적 역사주의적 견해에 대한 대략적 소개 이후 이 견해에 대한 특징을 소개해 주십니다.
요한계시록의 특징
1. 요한 계시록은 교회를 향해 기록되었다 (계 1:11)
교회를 돕고, 위로하고, 자극하고, 세우기 위해 기록되었다
2. 도덕적 권면이 있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만이 아니라 또한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3. 계시의 책이다
특정한 일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갖게 한다
4. 상징과 표징을 사용하여 진리를 드러낸다
1) 시각적 상징 – 촛대, 인, 나팔, 대접, 짐승
2) 상징적 숫자 – 일곱 (54차례: 일곱 머리, 일곱 눈,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삼 년 반, 마흔두 달, 일백사십 사, 열, 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된다 (계 13:18 – 666)
기계적이고 문자적인 정확성이 아니라 상징적 방법을 사용해 원리와 진리를 전달
이즈음해서 다시 목사님은 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이나 숫자를 기계적으로 해석하면 안되는 이유를 요한계시록 자체의 내용을 통해 설명해 주십니다.
예) 계 7: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중에서 인 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 마지막 심판이 임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머리에 인이 쳐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안전하게 지켜질 것인데 결국 이스라엘 사람만 144,000명 구원 받는 것인가?
옳바른 해석-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따라서 4절에 나오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그것이 144,000명의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늘에서 영화롭게 된 모든 영혼에 대한 묘사이다.
참 깔끔하죠.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나오는 144,00명의 이스라엘 사라만 인침을 받는다는 내용을 기계적으로 해석하면 바로 5절뒤에 나오는 전세계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선다는 내용이 뻘쭘해지니까요. 이후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이유와 상징을 어떻게 건강하게 받아들여야 될지에 대해 설명해 주십니다.
5. 요한계시록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1) 흥밋거리를 제공하기위한 책이 아니다
2) 호기심과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관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책이 아니다
6.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1) 그들을 위로위안하고, 3) 교훈을 주고, 4) 권면하고, 5) 지지하기 위해 씌어졌다.
7. 사려깊은 상징성을 기억해야 한다
1) 이 책을 읽으면서 불건전하고 병적인 호기심을 갖는 것은 옳지 못하다
2) 현재 인물들과 사건들에 더 큰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3) 하나님이 온 세대를 지나 종말에 이르기까지 주님과 그 교회에 대해 가지고 계신 위대한 목적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
이후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의 개요를 설명해 주십니다.
요한계시록의 개요
1부. 1~3장: 교회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 (계 1:20)
일곱 교회 이야기 – 1)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 상태에 대한 묘사, 2) 오늘날 어떤 모임이든 그 안에는 일곱 교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존재
2부. 4~7장: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이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
4장 – 하늘에서의 위대한 장면
5장 – 하늘이나 땅에 능히 책의 인을 뗄 만큼 위대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à 주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주님만이 인을 뗄 수 있다.
6장 – 역사의 종말과 최후 심판
7장 – 구속받은 자들의 놀라운 모습
3부. 8~11장: 주님 교회, 교회에 일어날 일들, 최후의 심판, 구속 받은 자와 멸망한 자들 (8장 전반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간구와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놀라운 장면이 묘사됨)
4부. 12~14장: “아들”이라고 표현된 우리 주님의 탄생에 대한 묘사, 마귀, 마귀가 권세를 준 짐승, 바빌론같은 교회에 대적하는 원수들 등장. 즉시 최후의 심판. 구속받은 자들에 대한 놀라운 묘사
주의사항 – 더 깊은 차원의 투쟁, 즉 마귀와의 투쟁이 나오기 시작함
5부. 15~16장: 최후의 심판, 구속받은 자들과 최종적으로 멸망한 자들 사이의 구분
6부. 17~19장: 주님의 대적자들과 그의 구속된 백성에 대한 이야기
17, 18장 – 바벨론, 두 짐승과 추종자의 최종 멸망에 대한 기사
19장 – 백마를 타고 입에서는 검이 나오는 모습의 주님이 영광 중에 나타나심
7부. 20~22장: 마귀의 심판과 파멸, 이에 대비되는 교회의 최종적 승리, 영원한 영광의 도래,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성
2, 3, 4, 5, 6부에 반복적으로 최후의 심판과 구원받은 자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나옴
이렇게 요한계시록을 7개의 섹션으로 분류한 뒤에 이중에서 2부부터 6부까지 반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섭리를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환란중에서 신앙의 순결을 잃지 않은 이에게 어떤 영광의 순간이 도래하는지와 반대로 사탄에게는 심판과 멸망이 오리라는 도식이 5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옴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설명해 주십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을 무슨 정감록처럼 해석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 금방 깨닫게 해주죠. 이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결론을 살펴보도록 하죠.
결론
1.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와 마귀 및 그 권세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을 말해 주는 책.
2. 목적 –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확실하고도 확정된 최후 승리의 이야기
3.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실제적 교훈을 담고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교리강좌에 나온 내용정도라면 요한계시록을 무슨 계룡산 정도령의 도래를 알리는 정감록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일부 목회자들이나 신도에게 충분히 합리적인 설명과 함께 경고가 되리라고 봅니다.
“모든 惡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 승리가 잘 계시된 책”
세계 최고 요한계시록 전문가 美 그레고리 빌 교수가 말하는 ‘건강한 계시록 해석법
입력 2016-01-17 19:03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그레고리 빌 교수는 “요한계시록은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가 잘 계시된 책”이라며 “시대를 초월해 신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려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유튜브 동영상 캡쳐
최근 출간된 ‘그레고리 빌 요한계시록 주석’.
기독교 신자들에게 요한계시록 읽기는 쉽지 않다. 새해부터 성경통독을 결심하고 꾸준히 독파한다고 해도 계시록까지 오는 시간은 꽤 길다. 어렵사리 성경의 마지막 책까지 당도했더라도 문제다. 계시록 4장 이후부터는 난해하고 생경스런 표현이 연속되기 때문이다. 잘못 읽다가는 기상천외한 외계 공상 영화를 생각할 수도 있다. 가끔씩 들은 설교나 소설 내용까지 겹치면 끔찍한 종말만 연상되기 십상이다. ‘666’이나 ‘14만4000’ 등의 숫자는 마치 비밀 코드처럼 보인다. 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한계시록은 승리와 위로의 책=현존 최고의 요한계시록 전문가로 꼽히는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그레고리 빌(67) 교수는 이런 고민에 대해 시원한 답변을 제시한다. 우선 계시록에 대한 관점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미래의 마지막 시점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지 말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승리의 함성이다. 신약성경 중에서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가 잘 계시된 책이다. 계시록의 목표는 세상이 사탄의 명백한 지배권 아래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계신다는 사실을 전함으로써 시대를 초월해 신자를 위로하는 데 있다.”
빌 교수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류대 리처드 보캄 교수와 함께 개혁주의 신학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보캄 교수가 계시록의 신학을 체계화 했다면, 빌 교수는 계시록의 신학은 물론 주석까지 완성한다. 그는 구약과 유대교 문헌을 면밀히 대조하면서 개혁주의 성경해석을 견지한다. 학계에서는 ‘성경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게할더스 보스의 신학적 전통을 따른다는 평을 받는다. 신약에서의 구약 사용 전문가로도 정평이 나 있다.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가장 권위 있는 주석으로 알려진 NIGTC(어드만출판사) 시리즈의 ‘요한계시록 주석’(1999)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주석했다. 신약학자답게 ‘성전신학’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새물결플러스), ‘신약성경신학’(부흥과개혁사) ‘요한계시록’(CLC) 등 10여권이 넘는 대작들을 펴냈다. 최근엔 대표작 ‘요한계시록 주석’의 축약판인 ‘그레고리 빌 요한계시록 주석’(복있는사람)이 출간됐다.
계시록은 불경건한 세상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게 빌 교수는 주장이다. 그는 “요한계시록을 단순히 미래학 책으로 간주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라며 “계시록 사건들은 미래의 마지막 시점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교회의 실제 상황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건강한 계시록 해석의 도구들=계시록 이해를 위해서는
구약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빌 교수는 계시록 전체 404개 구절 가운데 278개 구절이 구약을 언급하며, 전체적으로 500회 이상의 구약 본문이 언급됐다고 분석한다. 구약의 예언적·묵시적 작품인 에스겔과 다니엘, 스가랴서 내용은 자주 확인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약 본문은 직접 인용된 것이 아니라 사도요한이 풀어쓴 일종의 ‘패러프레이징’이다. 빌 교수는 이를 ‘인유(allusion)’라고 했다.
해석 방법은 계시록 이해의 열쇠가 된다. 빌 교수가 제안하는 방식은 이른바 ‘구속사적 이상주의(상징주의)’라는 틀이다. 계시록이 교회사 전체를 통해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강요받지 않는 한 상징적으로 해석하라”고 주문한다. 가령 사자와 어린양, 짐승과 여자 등은 어떤 실재들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수많은 환상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계시록 해석은 전통적으로 몇 가지 틀에 따라 이루어졌다. 과거주의와 역사주의, 미래주의 등이다. 하지만 이들 해석방법은 단점이 많다는 게 빌 교수의 지적이다. 예를 들어 인 나팔 대접 심판은 교회 시대에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묘사한다고 해석하는데(과거주의) 계시록 어디에도 인과 나팔, 대접 심판의 순서가 교회 역사의 연대 순서를 가리키고 있지 않다. 또 미래주의(세대주의)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신들의 유형에 맞추려고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을 끊임없이 바꾼다. 또 이스라엘 땅의 지리적 회복이나 교회의 휴거를 강조하지만 계시록 안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전형적인 오해는 ‘적그리스도’ 해석이다. 적그리스도의 정체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히틀러 사담후세인 교황 대중 정치가 등이다. 빌 교수는 이에 대해 “성경 말씀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건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된다”며 “계시록은 모든 시대의 교회를 보편적으로 표상하는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그는 ‘반복이론’을 따른다. 계시록이 시간 순서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시록의 인과 나팔, 대접이 병행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같은 시기에 일어나는 일을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다고 해석한다. 인 다음에 나팔, 대접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전체에 대한 세 관점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계시록 20장의 해석에 있어서는 ‘무천년설’을 견지한다. 20장 4절의 1000년이 예수님 재림 이전이나 이후의 시간적 1000년이 아니라 교회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이라고 본다. 이는 리처드 보캄을 비롯해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계의 보편적 견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