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마라나타!!!

[스크랩] 천상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하나님아들 2017. 3. 25. 14:55

천상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계 4:1-11)

 

 

Ⅰ. 도입

계 1-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사도 요한을 통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보낸 주님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특별히 일곱 교회에게 주신 주님의 메시지는 계시록 전체를 통해 네 차례에 걸쳐 보여준 ‘성령의 감동’을 통한 환상 군(1:10, 4:2, 17:3, 21:10)의 첫 번째(1:10)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환상 군을 통해 계시된 중심 주제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인자의 모습”과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주님의 메시지”로 요약됩니다. 이 두 주제가 의미하는 바는 교회의 머리 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친히 세우신 종들을 통해 몸 된 교회를 눈동자와 같이 돌보시며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지상의 교회가 어떤 열악한 환경과 상황에 처해진다고 할지라도 결코 쇠할 수 없으며 오히려 위로와 격려를 받는 가운데 힘과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일곱 교회에게 주신 메시지의 주된 성격이 이런 사실과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도 지역교회 속에서 성령의 임재와 다스림을 통해 당신의 남은 구속사를 집행해 가십니다. 일곱 교회의 형편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필요 적절한 메시지를 선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마감하시며 다시 한번 청종할 것을 강조하시는 이유가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의 영광을 회복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성령의 인침과 내주와 보증의 사역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속적으로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진리의 영으로 오신 성령께서 교회를 돌보시는 수단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교회의 생명보존과 생명활동의 근간으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해 주심으로 구원의 역사와 진리 안에서 자라가는 역사를 주관해 가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교회 중에 모성애적 역할을 수행하심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 가심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주님의 명령과 당부 속에 담긴 본의가 이런 사실을 함의합니다. 이때 성령께서 말씀을 방편삼아 역사하시는 방식은 친히 교회 중에 은사와 소명의 확증을 통해 세우신 사자 곧 말씀의 수종자들을 통해서입니다. 일곱 별로 상징되는 교회의 사자와, 일곱 금 촛대로 상징되는 교회와 이를 총체적으로 주관하시는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 등 삼자(三者)간의 일체성과 통일성의 원리 속에 담긴 계시의 비밀이 이렇습니다.

 

한편 계 4-16장 끝까지(21절)는 제 2 환상 군(群)을 이루고 있으며 계시록 전체에서 본론 부분에 해당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본 제 2환상 군의 중심내용은 일곱 개의 각기 다른 세 재앙 곧 일곱 인(印)재앙, 일곱 나팔재앙, 일곱 대접재앙과 이들 세 재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몇 개의 삽입계시(7장, 10-11장, 12-14장)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일곱 인 재앙은 6장을 중심으로 소개되고, 일곱 나팔재앙은 8-9장 및 11:15-19에 걸쳐 소개되며, 일곱 대접재앙은 마지막 심판재앙(15:1)으로 15장의 준비를 거쳐 16장에서 집중적으로 기술됩니다.

 

이들 세 일곱 재앙이 소개되는 과정에서 7장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를 총칭하는 ‘땅의 십사만 사천명’과 ‘하늘의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대한 환상이 첫 번째 삽입계시로 등장합니다. 이는 6장의 인 재앙과 관련된 삽입환상으로 인 재앙으로부터 구원받을 자가 누구인 지를 보여주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계 6:17에 언급된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의 질문과 연관시킴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즉 7장의 삽입환상은 6:17의 질문에 대한 답변형식으로 주어진 삽입환상계시란 사실입니다. 10-11장에서는 교회로 대표되는 요한과 교회로 상징되는 두 증인의 복음사역이 두 번째 삽입환상으로 소개됩니다. 이는 8-9장에 기술된 나팔재앙과 관련된 삽입계시로, 나팔재앙을 통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우상숭배에 적극성을 띠는 패역함을 보이는데(9:20-21), 이런 패역함을 돌이킬 수 있는 길은 재앙이 아니라 교회를 통한 복음전파밖에 없음을 10-11장의 삽입환상계시가 강력히 시사해 줍니다(11:13). 이런 사실은 노아의 홍수심판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생육하고 번성한 사람들이 전혀 회개할 기미가 없었다는 창세기 기자의 지적을 통해서도 확인한 바 있습니다(창 8:20-21). 이런 패역의 징후는 이 세상 끝 날에도 동일하게 발생하게 될 것을 성경은 재차 경고해 줍니다(눅 17:26-30). 이후 계 12-14장에 소개된 삽입환상계시는 특별히 11장에 소개된 두 증인을 통한 교회의 증거사역과 악의 세력들과의 충돌사건을 좀 더 심화, 발전시킨 삽입환상의 성격을 띱니다. 나아가 12-14장 환상은 세 번째 삽입환상을 구성하면서 마지막 일곱 대접 심판재앙(11:15에서 도입되고 15:1에서 선포되며 16:1-2에서 시행됨)으로 교회가 환란(12-13장)을 당하게 될지라도 결국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을 14장의 십사만 사천명의 인(印)맞은 자의 삽입환상계시를 통해 총괄적으로 확증시켜 줍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전개는 6장의 인 재앙심판에도 불구하고 7장의 ‘십사만 사천명’과 어린양의 구속을 받은 ‘큰 무리’ 삽입환상계시와 본질상 동일한 맥락 속에서 기술된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구속사적 선언의 연장선상에서 말입니다.

 

특별히 계 4-16장에 소개된 제 2 환상 군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 종류의 각기 다른 일곱 심판재앙들이 4-5장에서 보여주는 ‘하늘 보좌환상’을 중심으로 관장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잠시 일곱 교회를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소개된 제 1 환상 군(群)과 제 2 환상 군(群)과의 불가분의 관계성을 통해 요한이 증거하려는 몇 가지 신학적 명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역사가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의 절대주권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늘 보좌가 계시록에 기술된 다양한 심판과 재앙의 발원지이며 동시에 우주 만물과 만사의 통치와 권세의 중심이 되고 있음을 명백히 시시합니다. 둘째로 이로 인해 지상의 교회가 환란과 핍박과 고난이 불가피할지라도 궁극적인 구원과 승리가 보장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이상의 사실들을 보증하기 위해 천상의 보좌에 관한 묘사가 교회가 경험하게 될 다양한 환란과 핍박의 예언보다 앞서 소개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위로와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것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상의 신학적 맥락에 근거해 우주 만물과 만사의 통치의 중심을 소개하는 4-5장의 하늘 보좌환상을 먼저 살펴봅니다.

 

Ⅱ. 전개

 

계 4-5장의 중심주제는 하늘보좌입니다. 그러나 이 두 장은 각각 강조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4장은 절대주권자인 창조주 하나님께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반면에 5장은 구속주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에 앵글이 맞춰 집니다. 그런가 하면 하늘 보좌 앞에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묘사된 성령님의 모습도 확인됩니다(계 4:5).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로 하늘에 계신 성삼위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을 통해 계시해 주실 뿐 아니라, 둘째로 구약 시대부터 전개시켜 나오신 하나님의 구속사를 계속 집행해 가시는 가운데 종말론적으로 성취하실 것에 대한 의지의 표명을 보여주시는 환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특별히 6-16장 사이에서 보여주는 세 개의 각기 다른 일곱 재앙들로 말미암는 우주적 심판과 교회공동체에 대한 구원사역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철저하게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종말론적 성취를 향해 여전히 집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합니다.

 

1. 하늘 보좌 환상(4:1-3)

계 4:2부터 제 2 환상 군이 소개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1절은 도입부분에 해당됩니다. 요한은 1절상에서 “이 일 후에”라는 표현을 통해 독자들을 제 2 환상에로 인도 합니다. 여기서 “이 일 후에”라 함은 단순히 일곱 교회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2-3장의 제 1 환상 내용을 본 직후라는 시간상의 순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장면의 전환을 나타내는 묵시문학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본 절 외에도 본 서 전체를 통해 네 군데서 이런 표현을 발견하게 됩니다(7:1, 9, 15:5, 18:1). 한 결 같이 앞의 사건이나 장면과 관련해 새로운 장면의 전환이란 성격을 띠고 쓰여 진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장 이후의 환상은 2-3장의 일곱 교회 메시지와 관련해 시간적 성격상 현재에서 미래로 전환된 사건임을 증시하며 장소 또한 지상에서 천상에로 바뀌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절에서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이리라’ 등의 표현들이 이런 사실을 확증시켜 줍니다. 1:19에서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언급하는 데서도 당시 일곱 교회들 입장에서 봤을 때, 4장 이후의 환상내용은 미래적인 사건과 밀접하게 결부돼 있음을 문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습니다. 이 소리는 1:10에서 일곱 교회에게 메시지를 보내라고 요한에게 말씀하셨던 동일한 음성입니다. 이 음성의 주인공은 인자(1:13, 18절)로서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에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 1 환상 군의 내용을 통해 이런 사실이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하늘에 열려진 문’이 있는데 그 열려진 문을 통해 하늘로부터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늘이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처소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는 표현은 실재적인 모습이라기보다 천상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보여주기 위한 것과, 계시전달의 확실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열려진 하늘에 관한 계시사건은 신약에서도 종종 사용되는 표현입니다(마 3:16, 요 1:51, 행 7:56, 10:11, 고후 12:1-4). 특별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 머리 위에 머물렀다”(마 3:16, 요 1:32)고 했으며,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로 기록한 것을 봅니다. 후자의 경우는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하란에 있는 삼촌 라반 집으로 도피하던 중 벧엘에서 경험했던 소위 ‘사닥다리 꿈’ 사건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것을 가리킵니다(창 28:10-12). 요 14:6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선언하심으로 스스로를 하나님 곧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구원의 통로(중보자)가 되심을 증거해 주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결과로 종말이 왔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으며, 죄로 인해 막혔던 에덴에로의 길이 다시 열렸음을 시사합니다. 이로 보건대 계 4:1상에서 하늘에 열린 문이 있다는 표현은 단순히 은유적인 표현을 넘어 기독론적인 재해석이 함의돼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나아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때, 하늘과 땅이 하나로 일치되고 통일되는 새 창조의 완성을 전망케 한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2006, 240-241).

 

요한은 다시 한번 성령의 감동을 입고 하늘 환상을 통해 천상의 광경을 목도합니다. 요한이 목격한 하늘에 대한 환상체험은 자칫 곡해의 소지가 있듯이 입신의 경험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통제 하에 주어진 것이기에 비몽사몽간의 상태가 아닌 그 진실성과 확실성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계시록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 안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남은 구속계시를 성경독자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띠고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절을 통해 요한은 하늘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석이미지를 통해 목격합니다. 물론 여기서 하늘 보좌란 실제로 하늘에 하나님의 보좌가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보좌를 본 것은 환상입니다. 그러기에 하늘 보좌의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해석해야 합니다. 보좌가 담고 있는 이미지는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통치권의 위엄과 영광과 권세의 발휘 및 심판권의 엄중한 행사를 가리킵니다(사 6:1, 겔 1:26-28, 단 7:9-10). 특별히 본서에서 나머지 환상 군의 제반 구속사적 사건들을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곧 보좌 중심의 통치권의 발휘를 통해 이런 성격들이 총체적으로 부각됩니다.

 

환상으로 보여주신 하늘 보좌에는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십니다(3절).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은 벽옥과 홍보석 같고 보좌 주위에 무지개가 둘려있는데 모양이 마치 녹보석 같다고 묘사합니다. 이 또한 동일하게 상징적인 묘사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각각의 보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밝히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 보석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특징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총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 보석들이 의미하는바 하나님의 속성이란 전체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위엄과 영광 및 거룩과 순결 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보좌에 둘려진 녹보석 모양의 무지개 환상은 겔 1:28하에서 지적하는 대로 “여호와의 형상의 모양”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런 광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지개는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심판 이후에 피조세계의 보존을 약속하는 언약의 징표로 주어집니다(창 9:12-17). 이때 영원한 언약의 증거로 주신 무지개 속에 담긴 본의는 단순히 홍수로 말미암는 물 심판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만을 제한적으로 가리키지 않습니다. 보다 본질적인 관점에서 노아의 보존언약에 담긴 구속으로 말미암는 미래의 새 창조에 대한 확신을 전망케 하는 기능과 역할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하늘 보좌는 우주 만물과 만사의 경영과 운행의 중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구속사 진행의 경륜이 보좌에 좌정해 계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음을 봅니다.

 

한편 위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보석 모티브는 겔 28:13과 출 28:10, 17-20절 및 사 54:11-12을 통해 에덴과 성전 및 새 예루살렘의 영적 속성을 설명하는데 동일한 맥락 속에서 반복해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상의 성경 구절들은 위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했던 보석 모티브란 공통적인 주제를 통해 에덴동산과 성전과 새 예루살렘이 상호 밀접하게 내적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확증시켜 줍니다. 이는 에덴동산과 성전과 새 예루살렘이 함의하고 있는 영적 원리와 성격이 본질상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의 임재와 연합과 통치와 교제를 총괄적으로 함의하는 임마누엘 신학의 원리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중심을 상징하고 있는 하늘 보좌는 보석 모티브를 통해 본질에서 에덴동산과 성전과 새 예루살렘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통일되게 하는 중심축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상게서, 244-245).


2. 하늘보좌에 부속된 환상들(4:4-8상)

요한은 열린 하늘 문을 통해 하늘 보좌 환상에 이어 24장로들과 번개,음성,뇌성 및 일곱 영, 그리고 수정 같은 유리바다와 네 생물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들 환상들 또한 상징적 묘사로 해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들 제반 하늘의 환상들이 하늘 보좌를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보좌 곧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과 만사의 경영과 운행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관장하시며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보좌에 앉은 24장로 환상

요한은 4절에서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24 보좌가 둘려있고 보좌에 앉아 있는 24장로들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들의 모습은 한결 같이 흰 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24장로에 대한 환상은 대상 24:3-19에서 아론의 반차를 좇아 백성들을 대표해 뽑힌 24명의 제사장들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본문의 구약을 배경으로 한 24장로들의 제사장적 사역의 성격은 계 5:8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담긴 대접을 어린양 앞에 올려드리는 역할과 계 4:10 및 5:9-10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통해 밝히 드러납니다.

 

나아가 구약의 제사장의 직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한 헌제사역을 통해 실체화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성도들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왕 같은 하나님의 제사장의 신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벧전 2:9). 따라서 24장로의 환상은 모든 시대를 총 망라하는 성도의 총화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총화의 수를 왜 굳이 24란 숫자로 표기했을까요. 계 21장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종결로 말미암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이로 인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완성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표상을 통해 설명합니다(21:1-2). 이때 요한은 새 예루살렘 성의 성격과 특징을 각종 보석 모티브를 통해 기술하는 가운데 특별히 성곽의 열두 문과 열두 기초석에 관해 부연 설명합니다. 즉 열두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열두 기초석 위에는 어린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고 말입니다(21:12-14). 여기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이름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요, 어린양의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를 대표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2+12=24란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결국 본 24장로의 숫자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는 신구약 시대를 망라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총체적으로 계수한 숫자인 사실을 충분히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창세 이래로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교회공동체의 총화를 상징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본서에서 교회공동체를 상징하는 묘사는 4장의 24장로란 표현 외에도 7:9-17의 흰 옷 입은 셀 수 없는 큰 무리, 14:1-5에서 머리에 어린양의 이름이 쓰여 진 십사만 사천명, 15:2-4절에서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승리한 자들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정체성은 한결 같이 하늘 보좌와 관련돼 하늘에 속한 천상적 존재들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록에서 교회의 정체성은 이중 구조적으로 묘사됩니다. 땅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하늘에 속한 자들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4장의 24장로에 대한 환상은 천상적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은 계 21-22장의 새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상징을 통해 절정을 이루며 마침내 완성되기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24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계시록에서 흰 옷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입는 특별한 복장으로 묘사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하늘의 성도들을 흰 옷 입은 자들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하나님의 친 백성들을 가리킵니다(7:9-14). 여기서 흰 옷은 칭의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둘째로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 곧 성도의 옳은 행실을 지칭하기도 합니다(19:7-8). 계 14:4-5에서는 이마에 인침을 받은 자들로 어린양과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을 언급하는 가운데 이들을 가리켜 ‘여자로 더럽히지 아니하고 믿음의 정절이 있는 자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며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로 묘사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의 본질을 좇아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가운데 믿음의 정절과 순결을 지킨 충성된 종들이란 사실입니다. 옳은 행실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철저히 계시의존 사색신앙으로 일관함으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오직 섭리의존 순종신앙을 견지해 나갔다는 관점입니다.

다음으로 머리에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경기에서 이긴 승리자를 지칭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24장로들이 신앙경주에서 최종 승리한 교회의 대표들임을 시사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각 교회를 향해 이긴 자에게 특별한 약속들을 보증해 주셨습니다(2:7, 11, 17, 26-28, 3:5, 12, 21절). 그런 의미에서 머리에 면류관을 썼다는 것은 교회들을 향해 이긴 자에게 약속하셨던 내용들이 24장로들의 상징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면류관이 상징하는 실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곱 교회를 통해 이긴 자에게 약속해 주신 내용들의 총화가 다름 아닌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과 영생으로 말미암는 영적 축복의 향유’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 이들 면류관의 성격을 규명하면서 ’의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약 1:12),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등으로 세분화시켜 설명해 줍니다. 결국 24장로들이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는 것은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종말론적인 교회의 승리와 완성을 통해 최종 성취된 것을 가리킵니다(골 3:4, 롬 8:18, 고후 4:17, 벧전 1:6). 이런 사실은 24장로들이 앉아 있는 보좌들이 하나님의 보좌와 동질성을 띠고 있다는 설명을 통해 다시 한번 재확인됩니다(4절상).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특별히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에서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3:21상)고 이미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4장로가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환상은 이기는 자에게 보증하셨던 모든 약속들이 천상의 교회를 통해 총체적으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동시에 땅의 교회의 정체성이 하늘의 교회와 본질상 동질성을 띠고 있으며, 동일시되고, 나아가 통일되고 있음을 명백히 시사합니다. 참된 교회에 속해서 말씀의 본질에 바르게 접촉돼 이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은 천국의 삶을 이미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2) 번개와 음성과 뇌성의 환상(5절상)

요한은 24장로의 환상에 이어 하늘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발생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들 환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구약에서 이들 환상의 현상들은 하나님의 장엄하신 현현하심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출 19:16, 욥 37:1-4, 시 18:7-14, 29:3, 겔 1:13-14). 이상의 구절들을 배경으로 ‘번개와 음성과 뇌성’은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증거하는 결정적인 표징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4장의 하늘 보좌에서 발생한 동일한 현상들이 계시록 다른 곳에서는 말세를 만난 세상을 향해 부어지는 일곱 인 재앙(8:5)과 일곱 나팔재앙(11:19) 및 일곱 대접재앙(16:18)과 밀접하게 연관돼 보다 발전된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은 이런 사실들을 통해 하나님의 엄위하신 현현하심이 마귀와 그를 추종하는 흑암의 세력들과 회개를 모르는 불신자들에게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심판을 의미하는 지를 강조해 증거하고 있는 셈입니다.

 

본 종말론적 심판과 관련해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각의 일곱 심판재앙과 관련해 표현되고 있는 번개와 음성과 뇌성 및 지진과 우박 등의 종말적 현상이 하늘 보좌로부터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종말론적 심판의 발원지가 다름 아닌 하늘 보좌인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우주 만물과 만사의 경영과 통치가 보좌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해 섭리적으로 관장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메릴 C. 데니, 1993, 81-82/윌리엄 헨드릭슨, 1981, 98-99/이필찬, 2006, 250-252). 주기도문에서 지적하는 대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먼저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이에 근거해 피조 세계 속에 펼쳐진다는 섭리역사의 원리처럼 말입니다. 특별히 이필찬은 그의 요한계시록 주해서에서 8:5, 11:19, 그리고 16:18에 명기된 종말적 현상을 통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상호 비교를 통해 기술합니다. 첫째로 번개, 음성, 뇌성, 지진, 우박 등이 공통적으로 일곱 번째 재앙과 관련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인(印)재앙/나팔재앙/대접재앙이 공통적으로 종말의 심판 때를 지향하고 있음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음을 확증합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재앙들이 인 재앙으로부터 시작해 나팔재앙을 거쳐 대접재앙으로 진행 할수록 심판의 강도가 강화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내가 속히 오리라, 251). 이는 대접재앙과 관련해 마지막 재앙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요한의 지적을 통해 확인됩니다. 15:1입니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본문의 일곱 재앙의 정체성은 이어서 진행되는 16:1에서 “....하나님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는 명령을 통해 일곱 대접재앙인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이런 식으로 일곱 대접이 마지막 심판재앙의 성격을 띠고 주어지며, 특별히 일곱 번째 대접재앙(16:17)이 부어지는 것을 계기로 4장의 하늘 보좌로부터 발원된 종말적 심판은 마침내 일단락되기에 이릅니다. 때를 맞춰 큰 음성이 성전의 보좌로부터 나서 ‘되었다’고 하는 선언함으로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3) 보좌 앞의 일곱 등불과 일곱 영(5절하)

요한은 하늘 보좌로부터 종말적 현상인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발생하는 것과 더불어 보좌 앞에 일곱 등불 곧 일곱 영의 환상을 봅니다(5절하). 본문에서 일곱 영은 1:4에서 이미 확인한 대로 성령을 묘사하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성령께서 보좌 앞에 계심을 보여주는 것은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사역과 통치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삼위하나님께서 동시적으로 참여하고 계심을 증거해 줍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본서에서 왜 계속 성령님의 모습을 일곱 영으로 묘사하고 있을까요(1:4, 4:5, 5:6하). 이는 이미 살펴본 대로 스가랴 4장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는 새 성전 계시의 배경 속에서 그 본의를 확인해야 합니다. 슥 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곱 등불(슥 4:2)은 성전 안을 가득 비추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슥 4:2의 일곱 등불을 슥 4:10에서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일곱 눈’으로 재해석합니다. 이는 성령의 사역과 관련된 표현으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는 일과 관련해 성령님의 편재성과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라도 통달하시는 무한한 지혜와 통찰력의 발휘를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곱은 하나님의 완전수로 일곱 등불, 일곱 영, 일곱 눈 등의 표현을 통해 성령의 온전하고 충만한 사역의 확증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령의 역사를 일곱 영으로 환언해 표기하는 요한의 기술은 성전회복과 관련한 스가랴의 관점처럼 자못 의도적인 처사란 지적입니다(이필찬, 상게서, 48-49, 252-253). 왜냐하면 스가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명실상부하게 확증하게 될 새 성전의 건축과 관련해 이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일곱 등불의 표상을 통해 상징되는 성령의 역사를 ‘하나님의 신’의 역사로 바꾸어 설명합니다(슥 4:6). 동일한 맥락 속에서 요한은 스가랴의 관점을 좇아 흑암의 세력들과의 치열한 전투에 직면해 있는 지상의 교회공동체가 이 영적 싸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과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일곱 영이란 표상을 통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수정 같은 유리바다(6절상)

요한은 보좌 앞에 일곱 영으로 표상된 성령님의 임재와 더불어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보좌 앞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의 수정 같은 유리바다는 겔 1:22에 언급된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과 병행을 이루는 가운데 약간의 변형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전자의 궁창이 후자에서는 유리바다로 변형됩니다. 이는 요한이 구약적 배경을 의식하면서 본문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나타내려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왕상 7:23과 대하 4:2에는 솔로몬이 성전제사와 관련된 각종 성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바다에 대한 제작내용을 기술합니다. 바다(sea)란 일종의 제의(祭儀)용 기물로서 제사장들이 몸과 손을 씻고 희생제물을 씻기 위해 물을 담아 놓는 큰 용기(대하 4:6)로 바다 모양을 놋으로 형상화시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늘 보좌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는 것과 관련시켜 볼 때, 솔로몬의 지상 성전이 하늘 성전을 반영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하겠습니다. 나아가 솔로몬 성전에 안치된 바다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제사와 관련된 제물을 씻거나 제사장의 손과 몸을 씻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성물입니다. 이로 인해 바다는 지상 성전의 정결함과 성결함을 보존하기 위한 용기로 성전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겔 1:22의 수정 같은 궁창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왕상 7:23과 대하 4:2의 바다와 관련된 기사를 병행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때, 본문의 바다는 제의적 의미를 가지면서 하늘 성전의 거룩성을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이필찬, 상게서, 255). 후에 요한은 본문의 ‘수정 같은 유리 바다’란 표현을 15:2에서 ‘불이 섞인 유리 바다’란 표현으로 바꿔 사용합니다. 이는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넘으로 바로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고 구원의 승리를 만끽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이란 심판을 의미하며 곧 바로와 애굽 군대가 홍해에 수장돼 심판받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곧 ‘바다’의 개념을 ‘홍해’와 관련시켜 상징화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5) 네 생물(6절하-8절)

요한은 계속해서 네 생물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네 생물은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네 생물이 보좌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 생물은 각각 사자, 송아지, 얼굴이 사람 같은 생물, 독수리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들 네 생물의 특징은 앞뒤에 눈이 가득했으며, 각각 여섯 날개를 갖고 있으면서 안과 주위에도 눈이 가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특징들을 가진 네 생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물론 다른 환상들과 더불어 네 생물도 상징임에 틀림없습니다. 먼저 이 생물들의 구약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에 근거하면 본문의 네 생물들의 배경은 에스겔서의 그룹들 가운데서 선지자가 본 네 생물의 형상(겔 1:10)과 이사야서의 스랍(사 6:2-3)들을 유사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본서의 네 생물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혹자는 상기 선지서에 언급된 그룹과 스랍에 근거해 천상에서 하나님께 수종드는 천사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5:11에서 보좌와 네 생물들과 장로들과 함께 둘러선 많은 천사의 무리가 인봉한 책을 펴기에 합당하신 어린양께 영광과 찬송과 존귀를 돌려드리는 모습을 볼 때, 네 생물이 천사의 무리를 대표한다는 해석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결국 네 생물이 의미하는 바는 네 생물의 형상을 통해 추정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필찬은 그의 계시록 주해서에서 네 생물들을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용해 해석합니다(상게서, 257). 그래서 사자는 길짐승의 왕으로, 독수리는 날짐승의 왕으로, 송아지는 가축을 대표하는 짐승으로, 그리고 사람은 만물의 영장인 피조물의 면류관으로 부각시켜 설명합니다. 이상의 관점을 고려하면 네 생물의 이미지 속에 담긴 특징은 피조물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이때 ‘넷’이라는 숫자는 동서남북의 네 방향 곧 우주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피조세계에 대한 상징적인 숫자로 차용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포진하고 있다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잘 시사해 주는 장면입니다. 곧 모든 피조물은 본질상 하늘에 종속돼 있으며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찬양과 경배 및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란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어서 보여주는 하나님을 향한 24장로와 네 생물 및 수많은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통해 확인됩니다(4:8하-11, 5:11-14). 이는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천상의 예배광경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들 네 생물들의 앞뒤와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6:1-8에서 처음 네 개의 인 재앙심판을 주도하는 것과 관련해 이들의 탁월한 지혜와 통찰력으로 세상을 살피며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여섯 날개를 가졌다는 것은 네 생물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수종드는 과정에서 기동성의 정확성과 신속성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3.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경배(4:8하-11절)

요한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24장로와 네 생물의 찬양과 경배의 환상을 기술합니다. 24장로는 신구약시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총칭하는 상징적인 표현임을 살펴봤습니다. 네 생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을 대표하는 자들임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24장로와 네 생물이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로 연합해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천상의 예배광경을 묘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완성된 교회를 통한 에덴과 성전의 회복을 시사하는 것으로 계 21-22장에서 승리한 교회를 표상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상징은 이런 사실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결국 계 4-5장을 통해 하늘 보좌 환상이 의도하는 중심주제는 첫째로 하늘에 삼위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이요, 둘째로 우주만물과 만사의 통치와 보존과 섭리의 주권이 하나님께 의존돼 있다는 사실이며, 셋째로 이상의 사실로 인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세세토록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을 증시해 주려는데 집중됩니다(롬 11:36).

 

(1) 예배자

계 4-5장에서 삼위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찬양과 경배의 주인공들은 24장로와 네 생물과 수많은 천사들로 확인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로 그 중에서 24장로들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들 곧 교회공동체는 단연 예배자의 중심에 위치합니다. 바로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며(7:14),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창조의 면류관들이기 때문입니다(창 1:26-28).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은 모든 피조물이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드려야하는 존재 이유이며 당위로 기능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습니다(시 49:20).

 

(2) 예배의 자세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 찬양을 드립니다(8절하).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배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과 통치의 근원이 되시는 분으로 홀로 영광과 찬송과 존귀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입니다(엡 1:6, 롬 11:36, 고전 10:31, 전 12:13, 사 43:21). 피조물의 존재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의 심정으로 드려야합니다(요 4:24, 창4:4). 이는 성도가 드릴 마땅한 예배 자세이며 열납되는 예배의 성격을 규정하는 전제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구속의 경륜을 깊이 깨닫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데서 동기 유발 된 기쁨과 감격의 예배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삶은 곧 예배적 삶으로 정의돼야 합니다. 신앙과 생활이 유기적으로 조화되는 전인적 신앙생활 말입니다(롬 12:1).

 

요한은 특별히 24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하고 머리에 쓴 면류관을 벗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드리는 예배광경을 목격합니다(10절). 하나님을 향해 엎드린다는 것은 부복(俯伏)하는 자세로 절대복종과 겸손과 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을 창조주와 구원자로 인정하며 감사하는 데서 나오는 지극히 당연한 신앙적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전인적으로 경외하며 신앙하는 데서 표출되는 도리입니다. 무익한 종의 심정과 태도가 이런 사실을 웅변적으로 대변해 줍니다(눅 17:10). 면류관을 벗어 드리는 모습은 구속사역의 성취로 말미암는 교회의 최종 승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의 결과임을 상징적으로 증거하는 행위입니다. 면류관 모티브 속에 담긴 의미는 본질에서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딤후 4:8, 벧전 5:4, 약 1:12). 그래서 마땅히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란 사실을 면류관 이미지를 통해 강조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예배의 내용

하나님께서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적 주권성, 전능성, 거룩성, 영원자존성 및 신실성 등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고 기술한 로마서 기자의 선언을 통해 명백히 확증됩니다. 본문이 가리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며 처음과 나중 되심’으로 만물과 만사가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시작되고 진행되며 마감될 것임을 확증시켜 줍니다(계 21:6). 따라서 성도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에 포함될 내용은 구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창조주 하나님을 비롯한 삼위하나님께 창조와 구속과 관련된 제반 그 분의 속성을 전인적으로 인정하며 믿음으로 수납해 표출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벨의 제사에 담긴 예배의 본질이 이상의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아벨의 예배가 상대적으로 열납 된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창 4:4-5). 가인은 계시 의존적이 아닌 자의적(恣意的)인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마치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 곧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분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레 10:1-2). 자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은 인간의 타락한 속성상 근본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 10:2-3, 마 7:21-23, 렘 17:9, 창 6:5). 인간의 종교성은 타락한 본성상 성령님의 인침과 조명을 받지 못하면 자신의 생각을 앞세운 나머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자의적 숭배신앙관을 형성하기 마련입니다.

 

Ⅲ. 결론

 

계 4-5장은 하늘 보좌 환상을 보여주면서 4-16장까지 진행되는 제 2 환상 군의 도입과 토대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면은 땅에서 하늘로, 시간은 현재서 미래로 내용과 성격이 바뀌는 계시전환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4-5장의 하늘 보좌 환상은 제 2 환상 군과의 관계 속에서 우주 만물과 만사의 통치의 중심이 다름 아닌 하늘 보좌에 의해 좌우되고 있음을 명백히 시시합니다. 이런 사실은 6-16장까지 시행되는 각기 다른 세 일곱 심판재앙 중 특별히 종말적 현상을 표상하고 있는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보좌로부터 발원되고 있음이 이런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4:5, 8:5, 11:19, 16:18). 나아가 세 종류의 심판 환상 군에 앞서 하늘 보좌가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본서의 편집 구도가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세 종류의 일곱 심판재앙으로 인해 비록 교회가 한시적으로 환란과 핍박과 고난 중에 처해진다 할지라도 하늘 보좌에 의해 철저히 보호와 인도와 다스림을 받게 됨으로 교회의 최종 승리가 보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늘 보좌 환상을 통해 24장로로 표상되는 신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 곧 모든 교회공동체가 승리를 상징하는 면류관을 벗어 보좌에 않으신 이에게 드리며,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드리는 천상적 예배환상이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확증시켜 줍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4장의 강조점은 하늘 보좌에 초점이 맞춰지고, 5장은 구속주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집중됩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를 일곱 등불, 일곱 눈, 일곱 영 등으로 묘사함으로 하나님의 본의를 통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세상역사 속에 펼치시며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으로 기술합니다(슥 4:6). 나아가 24장로와 더불어 네 생물과 수많은 천사들이 보좌를 중심으로 포진해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줍니다.

이상의 환상들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늘에 삼위하나님께서 계시고, 삼위하나님께서는 친히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영광과 찬양과 경배와 존귀를 받으시기에 심히 합당하신 분이란 사실입니다. 본서는 4-5장의 하늘 보좌의 환상의 내용이 21-22장의 새 예루살렘 표상을 통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완성으로 최종 성취되는 것을 확증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증거하셨던 구속사적 선언이 계시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죤.웨슬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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