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A. 연구의 동기와 목적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귀한 가치를 돌려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예배에 의해서 존속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또한 예배는 분명히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중 최우선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한국 개신교 예배는 초기 한국 교회에 복음을 전한 경건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의식(Liturgy)없는 메마른 예배를 드림으로써 귀중한 기독교 유산인 성만찬 의식을 경시해 왔다는 사실이다.그리하여 신앙 공동체 의식도 고취되지 못하고 오직 말씀 중심의 예배로만 치우쳐 온 까닭으로 예배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의식이 없는 불균형적인 예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만찬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본다.또한 성만찬의 예배로의 회복을 통하여 예배가 갱신되고 교회가 성장되며 신자들의 신앙 생활이 더욱 성숙을 통하여 예배가 갱신되고 교회가 성장되며 신자들의 신앙 생활이 더욱 성숙애 지리라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예배에서 시행되어지고 있는 형식적이고 무의미한 성만찬 의식은 올바른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 원인이 있다.그러한 관점에서 한국 개신교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의미와 가치를 살피며 이를 실제 예배에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함이 본 연구의 목적이 될 것이다.
B. 연구 방법과 범위
본 연구에서는 논문과 서적들을 참고하여 이론적인 기초와 실제를 서술하고자 한다. 제 1 장에서는 연구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방법과 범위를 서술하고, 제 2 장에서는 한국 개신교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과 관련한 문제점들을 서술할 것이며, 제 3 장에서는 현대 각 교파 및 교회의 예배순서 중 성만찬의 실시 현황을 살펴보고, 제 4 장에서는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 갱신을 위한 실제적 제언과 성만찬 예전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제 5 장에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개신교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문제점
선교 2C를 바라보는 한국교회는 오래지 않은 선교의 역사를 거치면서 초창기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과 그들의 신학적 배경과 한국 민족의 종교심성등으로 기독교 예배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이로 인해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국 개신교 예배에 있어서 나타난 뭍제점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본으로써 갱신�져야 할 요소들을 예배학적 관점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A.예배의 문제점
1.설교위주의 예배
한국의 개신교는 복음을 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말씀의 사역에힘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열정을 쏟아왔다.그 결과 선교의 기적을 이룩하는 양적 부흥의 결실을 낳았고,세계의 관심을 모으는 교회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씀 중심만의 뜨거운 열저의 목회가 한 세기에 걸쳐 계속되어 오는 동안 잃어버린 것들도 실로 적쟎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서 목사의 설교가 예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는 예배 예전의 내용이나 그 형태가 너무 빈약해서 개신교의 성도들은 단지 ‘교회에 가는 존재’(Church-Goer) 또는 ‘설교를 들어보는 존재’(Sermon-Hearer)로 머물게 되었다. 대조적으로 구교의 성도들은 주일이면 출발부터 마음의 준비를 작춘 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교회를 찾아 나서게 되었고 그 예전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경험하는 흐뭇한 삶을 생활 속에 까지 지속시켜 왔다. 이와 반대로 한국 개신교의 예배는 설교 중심의 예배이기 때문에 설교 이전의 순서는 대소롭지 않게 생각하는 설교파 교인도 있다고 하며, 설교만 들으면 예배가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설교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강단의 위치는 점점 높아지고 설교자는 그 높은 강단에서 축복과 저주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다. 한국교회가 이와같이 설교 위주의 예배가 된 것은 한국에 들어온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예배 형식과 복음이해, 그리고 신앙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일때마다 설교만을 위한 모임으로 형태를 갖추어 왔고,목사는 예배의 집례자의 위치를 망각하고 설교자로서만의 준비에 급급해 온 실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성례전 없는 설교중심의 예배를 일년 내내 계속하면서 그것이 예배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성례전은 일년에 봄,가을로 두번만 치르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 양 착각을 하고 있고 나아가 성례전 없는 예배가 신학적으로 뿐만아니라 표면적으로도 불완전한 예배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 교회의 예배가 예전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은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던 것이다.그리스도교 예배는 말씀예배와 성례전 예배가 올바른 균형을 이룰때 비로서 온전해 진다고 본다.이러한 의미에서도 한국교회의 설교중심의 예배는 하루속히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2. 성례전 격하의 예배
많은 개혁신앙의 대부분의 신조에서는 언제나 말씀의 선포 다음에는 성례전의 올바른 집례가 행해지는 곳이 교회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성례전이란 보이는 말씀이요 구원의 언약을 확인해 주는 실로 소중한 것이다.개혁가들이 카톨릭의 7성례중 성만찬과 세례만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 자체에서도 그 중요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가들의 절대수가 매주일의 성례전 거행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그러나 쯔빙글리는 말씀중심의 예배와 성례전 중심의 예배를 분리시켰고 성례전 예배는 년중 4회로 성만찬의 의미는 단순한 기념서로만 확정했었다. 그 결과는 예배의 깊은 의미와 듣는 메시지와 보는 메시지와의 균형을 잃어버린 예배로 퇴보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성만찬이 개신교 교회의 예배에서 밀려나온 까닭으로 성례전이 개신교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카톨릭 교회가 말씀없는 희생을 매일 드린다면 개신교는 희생이 없는 설교만의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일년에 봄과 가을 두차례의 상찬을 거행하는데 그친다. 그리고 성찬을 맡아 주관하는 목사와 거기에 참여하는 교인들이 성찬에 대한 이해가 너무 박약하다.성찬이 내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희생,감사,친교,주님의 재림의 대망과 임재등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무시하고 다만 그리스도의 죽으신 사실을 기념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포사이드(P.T.Forsyth)는 ‘교회 생활의 중심은 성만찬에 있으며 성만찬이 성도를 결속시키는 역활을 하는 데,현대 개신교 교회에서는 저녁식사모임,위원회모임을 통해서 교회의 결속을 도모하려한다’고 지적한다.그로인해 성찬예식이 성스럽게 집행되지 못하고 있어 수찬정지를 시키지 않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온전해 분별치 못하는 살과 피인 떡과 포도주의 성찬에 참예를 허락하고 있고,주관적의적 요소가 강하여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실체보다 내적 경험인 영적인 체험을 더 중요시하는 반마술적의식을 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비추어 오늘의 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성례전이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보면, ‘나를 기념하라’는 언어적인 뜻 이상의 신학적인 의미부여에 무관심한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더우기 개신교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조차없는 지극히 형식적 순서로써 끝마쳐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B. 성만찬에 대한 이해
1. 카톨릭의 견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그리스도께서 ‘이것은 내 몸의 상징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다만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셨다고 한다.또 그리스도는 ‘이 안에 내 몸이 있느니라’ 또는 ‘이것과 함께 내 몸이 있느니라’고도 말씀하시지 않고,절대적으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명백하게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성찬의 화체설은 9세기초에 정식으로 제안되고,12세기에 정의를 받아 화체의 교리로 지명되고, 13세기의 제4차 라테란 회의에서 정식으로 채용되었으며,16세기 트랜트 회의에서 최정범식의 작성을 보았던 것이다. 중세 카톨릭 교회의 성만찬은 화체설과 더불어 예배에 있어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집례되었기 때문에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그리고 매주일 예배에서 빠짐없이 집례되어졌으나 불행하게도 사제의 행위에 머물렀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설교가 경시되어졌다.
2. 루터의 견해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즉 주님의 몸이 성찬 물질의 안에,밑에,함께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14세기에 있었던 오캄의 유명론에서 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루터는 믿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질 수 있도록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의 지역적인 임재를 믿었고,‘공간속에 연장된 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개 대문에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도 피를 흘리셨던 것이라고 했다.그러므로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들을 제외시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권한은 천사에게도 없고 교항이나 공의회의 권하에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루터는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사제가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루터의 신학은 전통적인 카톨릭 사상과 매우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그의 강조점은 희생적인 미사가 아니라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에 있었다.그러나 그는 거룩한 교제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에 동참한다고 주장하였다.
3. 쯔빙글리의 견해 쯔빙글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예배에 임재하신다.하지만 그의 몸과 피곧 그의 인성은 하늘 곧 아버지의 우편에 제한되어 계신다. 성만찬은 우리가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회고하는 점에 있어서 그것에 감사하는 ‘기념’일 뿐 이라고 하여 기념설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성만찬을 단지 기념적 행위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념과 신앙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써 단순화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하고 말았다.그래서 그는 성만찬을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지 않고 기념적 행사로 간주하여 년 2회로 함이 좋다는 견해를 펴 성만찬 예배의 경시 현상을 개신교에 유산으로 물려주고 말았던 것이다. 4. 칼빈의 견해 칼빈은 성만찬에 있어서 쯔빙글리와 루터 사이의 중간 위치를 취하였다. 칼빈은 성찬은 주님이 우리 마음에 인쳐 주시는 외적 표시로써,우리에게 향한 그의 선한 뜻의 약속으로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북돋아 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물질적 요소인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표상과 상징에 불과하며,그리스도는 떡의 물질에 부가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성령의 힘에 의해 성례는 일어남으로 우리들의 마음으로는 그는 이해할 수없고,신앙으로 받아들일 뿐이라고 했다.성찬의 효과는 말씀에 달려있고,말씀과 하나님의 약속과 물질들을 분리시킴은 잘못이라 했고 성례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신앙을 봉헌하는 것이고,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칼빈과 루터가 쯔빙글리보다도 성찬의 진정한 의미를 보다 잘 파악했다. 칼빈과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은 과거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현재적 사건이기도 하다. 성찬은 단지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총의 방편이기도 하다.떡과 포도주는 하나의 상징이지만,그것은 상징이 나타내는 실체에 참여하는 상징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외적인 상징이 아니라,효력 있는 상징인 것이다.성령으로 말미암아 떡과 포도주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를 전달한다.쯔빙글리의 중요한 공헌은 성찬을 교제의 식사 및 그리스도께 재헌신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한 데에 있다.
C. 성만찬의 의미 성만찬은 신학적 의미보다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대하는 감격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수있도록 해주신 구속의 사랑 때문이므로 초대교회에서 부터 성만찬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험하는 데에 기독교는 최우선적인 신학적 관심을 두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성례전 전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오는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고 반복되는 예전으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신학적 의미는 어떤 면에서 카톨릭의 화체설보다 더욱 깊은 뜻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내용이라 하겠다. 또한 우리가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의 형을 대신 지시고 희생하신 주님의 구속사건에 대한 철저한 회상을 요구하는 예전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의 거행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그 지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 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다는 깊은 �의 실현이 가져온 결과적 현상인 것이다.곧 세계 어디서나 성례전을 행하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이 성만찬 안에서 진지하게 인식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현대 각 교파 및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실제 A. 각 교파의 성만찬 순서 천주교회 동방교회 루터교 한국기독교장로회 성찬의 전례 성 찬 식 성찬에관한말씀 성 찬 사 봉 헌 송 성찬준비기도 주 의 평 화 성 찬 예 물 빵 의 봉 헌 송 가 하나님의 어린양 봉 헌 송 포도주의봉헌 제 정 사 성 찬 분 배 제정의 말씀 신자들의기도청함 성 찬 봉 헌 눈크,디미티스 성 찬 기 도 봉 헌 기 도 에피클레시스 감 사 성 찬 분 배 감 사 송 기 도 기 도 감 사 기 도 성 찬 기 도 배 찬 기 도 찬 송 파 견 의 예 배 성 찬 식 주 기 도 축 도 결단의 찬송 평화의 기도 분 병 분 잔 묵 도 파 견 사 영 성 체 설 교 축복의 기도 영 성 체 송 배 찬 영성체후 기도 감 사 기 도 폐 회 식 축 도 폐 회 남은 빵 분배
B. 예배당 내부 구조(설교단,성찬대,세례대 중심)23) 1. 로마카톨릭교회 성찬대 카톨릭교회는 성찬대를 벽에서 떼어놓았고 좌측에 독서대에서 복음서독서대 독서대(구약,서신서) 사제가 복음서를 평신도가 구약및서신서를 낭독한다.
2. 성공회 성찬대 성공회는 성서 봉독에서복음서봉독과 서신이나 구약 서신,구약봉독대 복음서봉독,설교대 봉독과는 차별을 두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3. 루터교회 성찬대 루터교회는 카톨릭교회의 예배전통을 복음에 위배되지 않는 한 성서봉독대 설교대 그대로 존속시키려 했다.
4. 장로교회 설교대 성서봉독대 장로교회는 설교대를 우위에 둔듯하다.장로교헌법 6조4항에 성찬대 성만찬은 1년에 1-2회 이상 거행하도록 되어 있는 점을 보면 성만찬의 비중을크게 두지 않는 듯하다.
5. 침례교회 침 례 탕 침례교회에서는 설교와 전신침례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강 대 상 성만찬은 위의 것과 비교할 때 비중이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성 만 찬 있어 신학적으로 적절치 못한 것이다.
6. 감리교회 : 한국 감리교회는 강단구조에 있어서 통일성이 없는 실정이고,성만찬 집례에 있어서 분급의 방법도 다양하여 통일성이 없다. 그러나,강단구조는 대체적으로 설교대를중심으로하여 그 앞 (낮은 곳으로서 회중석 가까이 )에 성찬대를 경향이다.
7. 강단 배치 문제 : 성찬대를 중심으로 좌우에 설교대와 낭독대를 설치하여 예배의 중심에 성만찬을 놓은 형태(루터,카톨릭,영국성공회 등)와 설교대 중심으로 좌우에 성찬대와 낭독대를 배치하여 예배의 중심을 설교에 비중을 둔 형태(장로교회,회중교회,침례교,감리교 등)를 교회들은 취하고 있다. 8.강단배치에 대한 원칙적 제시(1604년 퓨어턴 백;Joseph Furteenback) 1) 성찬대는 카톨릭처럼 희생제단이 되지 않도록 벽면에서 떼어 놓아 목사 가 성찬대 뒤에서 회중석을 바라 보며 성만찬 예전을 집례할 수 있게 한다. 2) 설교대와 성찬대,세례대는 강단위에 같은 높이로 가까운 곳에 근접 배치됨으로써 동일한 위치에서 조화를 이루게 한다. 3) 낭독대의 자리는 낭독대위에서 세례대를 배치해 두려고 함 한국교회에서 낭독대의 자리를 사회대로 그 기능이 변형되고 말았는데 이 자리를 세례대를 대치하고 말씀 봉독은 설교대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 성가대석은 강단의 측면에서 강단을 바라보며 찬양할 수 있도록 배치한다.
C. 실 례(광암교회) 광암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교단의 예식서에 준하여 성만찬 예식을 실시하고있다. 성찬예식은 봄과 가을 1년에 2회로 하고 있다. 이 때 유아세례와 학습, 입교, 세례예식을 겸하여 실행하고 있다. 성찬예식은 세례,입교예식이 끝난 후에 성찬식을 하고 있으며,분잔과 분병은 회중이 직접 성찬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성찬위원인 교역자나 장로가 잔과 떡을 회중석으로 가서 분급하고 있다. 이것은 출석교인이 750명정도여서 시간은 절약하기위해서 이런 분급을 실시하고 있다. 성찬대는 설교단과 봉독대의 하단에 위치하여 전통 장로교단의 강단을 따르고 있으며,참여 자격은 세례받은 교인은 모두 참여하도록 집례자가 안내있고,평소의 신앙생활 중에서 온전치 못한 행실로 인해 수찬정지자의 명단을 호명하는 일은 없고,단지 마음에 꺼리끼며 자신의 판단에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경우에 함부로 거룩한 성찬의 떡과 잔을 범하지 말것을 권하면서 되도록이면 다 참여할 것을 권면한다. 여기서 광암교회가 예배중에 실행하고 있는 성찬예식을 통합교단의 예식서에 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묵도-> 예배의 말씀-송영-기원-식사-찬송-기도-성경봉독-권면-찬송-기도와 신앙고백-성찬식 [전주->송영-예배의 말씀(마11:28)-찬송-연도-기원과 고백-찬송-기도-성경봉독-찬양-설교-찬송-식사-성경봉독(고전11:23-24)-권면(성찬의 목적과 의미와 자세)-신앙고백(사도신경)-성찬-분병(떡을 나눔)-기도- 분잔(잔을 나눔)-기도->주기도]-찬송-축도-후주->폐회
성만찬의 실제적 제언
A. 성만찬 예배의 과제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몸된 교회에게 주신 예식의 하나이며 말씀과 더불어 에배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이다.그런데 한국 개신교 예배에서는 설교가 중심이 되어 성만찬의 의미와 효과가 무시된 채 설교 중심의 예배드려 왔다.이제 설교중심의 예배에서 탈피하여 성만찬의 의식을 예배의식 안에 회복시켜서 되도록 자주 거행하여 예배를 온전히 드려야 할 것이다. 폰 알멘은 예배에 성만찬이 필요한 것인가를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는 데,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정되었고,명령되어졌기 때문이요,복음서가 결국은 머릿말이 덧붙여진 수난사 이듯이 설교도 성만찬에 이르러 완성되기 때문이며,성만찬은 사람으로 하여금 설교를 듣고 말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고,세상과의 분계선을 넘어 복음적 삶으로 뛰어 들게하며 결단을 촉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칼 바르트가 ‘설교가 성만찬의 틀에서 벗어나 성만찬 없는 설교가 될때 전혀 다른 성격과 내용이 될 수 있으므로 예배는 매주일 설교와 성례전을 포함해야 한다’고 한말을 인용하면서 우리에겐 주님의 만찬을 예배 가운데로 재통합 시키는 일이 없이 혹은 예배를 주의 만찬 가운데로 재통합 시키는 일이 없이 우리의 예배를 계속할 권리가 없다고 하였다. 칼빈과 루터는 매주일마다 성찬식을 갖도록 권하였고,오늘날 예전운동의 선봉에 서 있는 사람들 역시 매주일마다의 성찬식을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너무 자주 있어 형식적인 진부한 상태에 빠지는 것도 문제가 있으므로 조심스러운 준비가 필요하다.그리고,성찬이 없이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성찬으로 예배가 풍성해질 수는 있지만,예배행위를 완성시키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그리고 무분별한 성찬식을 반대하면서 다른 교파의 신도들과 함께 성만찬을나누는 것이 필요하며,성만찬은 모든 교파의 세례받은 신자들에게 개방되어야 한다.그래서 성찬예식은 교회의 화해를 위한 매개체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희생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모든 기독교인들이 재결합하는 것을 가로 막는 주요한 문제들의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교회의 예배는 성만찬이 있는 예배,성만찬에서 그리스도와 만나지고 복음이 결정적으로 체험되어지는 예배로 갱신되어져야 한다. B. 성만찬 예전의 모델 전 주 - [찬양과 고백] : 예배의 부름-찬송-언약의 확인-자비의 기도-기도송-고백의 기도-사죄의 확신-영광송- [말씀의 선포] : 구약의 말씀-특별찬양-신약의 말씀-말씀의 증언- [주님의 성만찬]: ( 성찬식 말씀교독 - 초대와 선언 - 찬 송 - 신앙 고백 - 성만찬 말씀 - 기 도 - 분 병- 참례선언 - 분 잔 - 참례선언 - 기 도 ) - [감사와 응답]:기 도 - 주님의 기도-찬 송-[오늘의 위탁과 축도]-오늘의 위탁-축복의 기도-광고
결 론
한국 교회는 복음이 전래되는 과정에서 경건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다.그 영향의 결과로서 성례전 의식이 결핍된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오직 말씀 중심의 예배만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은 말씀 중심의 예배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예배에서 설교만을 강조하게 되므로서 성례전이 격하되게 된 것이다. 성례전은 기독교 예배의 귀중한 유산으로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만찬 예배와 말씀의 예배를 균형있게 드려왔던 것을 볼 수 있다.그런데 한국 개신교예배는 서안찬 의식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채 일년에 한 두번 정도의 행사로서 무의미하게 그치고 만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절정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찬송가와 신조로고백된 복음의 표증이며 인증이다. 또한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에 대한 새 언약이며 보증이다. 루터와칼빈은 말씀이 없는 중세 교회의 예배를 비난하면서 초대 교회의 예배와 같은 말씀과 성만찬이 병합된 예배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였다.그러나 불행하게도 개혁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한국 개신교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은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아‘기념설’에 머물고 있으며,그 의미와 가치를 깊이있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성만찬은 오늘의 예배 현장에서 자주 행해져야할 것이며, 최소한 매달 한 번은 시행되어져 그 의미와 자치도 함께 인식되어져야한다. 즉 그리스도의 현존이 성만찬을 통해 감사의 예전으로서,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서,회상으로서,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와같이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가 균형을 이룰 때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과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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