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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큐메니칼 운동(교회론)

하나님아들 2012. 7. 25. 15:29

에큐메니칼 운동


들어가는 말

  <복음주의 신학사전>에서 시카고 대학교 교회사교수 웨버(T.P.Weber)는 에큐메니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의 모든 신자들의 협력과 일치를 가져오려는 조직화된 시도이다."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라는 말은 헬라어(오이쿠메네)로부터 왔다. 그 단어의 뜻은
사람이 거주하는 전체 지구(모든 땅)를 가리킨다(the entire inhabited earth,참고.
행 17:6,마24:14;히2:5).

  그리스도인의 일치의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요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마찬가지로 바울도 성도의 일치를 권면하고 있다(엡 4:3-5). 바울은 신학적 의견분열과
교회의 내적 분열에 직면하는 경우,교회의 통일성을 지속시키려고 노력했다(갈라디아서,
골로새서/고린도전후서).

  오늘날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1910년에 시작되었다. 미국의 감리교도 죤 모트(1865-
1955)의 지도 아래 1910년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한 수천명의 대표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일치에 대한 비젼을 품었다. 20세기 에큐메니즘의 여러 징후들은 수많은 큰 교회회의들에서
뿐만 아니라 종파들 간의 수많은 실제적인 연합사업들에 나타나 있다.

  John H.Gerstner에 의하며면, 에큐메니칼 운동은 협력집단들의 파열을 막기 위해
그들의 다양한 신학들을 비현실적으로 그리고 추상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베이커
신학사전 참고). 새로운 에큐메니칼적 복음주의 잡지인 <Christianity Today>는
그리스도인의 연합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1.  에큐메니칼

 <오이쿠메네>라는 단어는 고전 헬라어에 사용되었으며 신약성경에도 나와있다.
이 단어는 20세기에 들어와서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는 지리적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이 단어는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후에
이 단어는 문화적인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즉 교양있고 세련된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15회 사용되었다. 이것은 보통 지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사람이 사는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 이 복음은 온 세상
(오이쿠메네)에 전파되어야 한다. 천하(오이쿠메네)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된다.
  사도 시대 이후로 기독교회의 다양한 지파들이 이 용어를 사용해 왔다. 로마 카톨릭은
그들의 교회회의를 에큐메니칼 회의라고 칭하고 있다.  또한 복음주의 교회들은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아다나시우스 신조 등을 에큐메니칼 신조들이라고 말한다.


    2.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적 배경

        - 종교개혁 시기부터  1910년까지 -

(1)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과 연합의 이념

    김명혁 교수에 의하면,"종교개혁자들은 결국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의 분열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한편 과격 개혁운동의 분파주의를 심각하게 공격하면서  교회의
일체성을 높이 세웠다."  개혁자들은 불가견적 교회의 본질을 가견적 교회 안에서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들은 상호간의 교리적 차이를 무리하게 단일화하지 않으면서도
신앙과 진리를 근거로 하는 연합을 이루기를 염원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을 비롯하여 니케아신조,아다나시우스 신조 등 초대교회의
신조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초대교회와의 싱앙적 일체성을 강조했다.

    1540년 칼빈은 Bullinger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주님이 그의 교회 안에 책임을 맡기신 모든 사람이 참된 연합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우리 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에 해당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들 모두와의 연합과 교제를 의식적으로 그리고 조심스럽게 증진
시켜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항상 노력할 것이다."


(2) 독일 경건주의의 연합의 이념

    독일 경건주의의 아버지 스페너(1635-1705)는 할레에 대학을 설립하고,유럽
각지로부터 오는 젊은이들을 교육시킨 후 다시 돌려 보내어  그들로하여금 각국에서
선교 및 연합운동을 전개하게 했다.
    스페너가 내세웠던 기독교 공동체 및 연합의 이념은 특수한 신앙고백이나
국가교회의 개념 위에 세워지는 연합의 이념이 아니었다. 그는 회심의 내적 체험을
가진 성도들의 자발적 연합의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 이념은 현대 선교와 개신교
연합운동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념은 그의 후계자 프랑케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프랑케는 할레를 선교와 연합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이 이념은 진젠돌프(1700-1760)에 의해 보다 구체적이고 포괄적으로 계승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교회와 교파로부터 좋은 점을 배워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즉 로마 카톨릭으로부터는 영혼의 청빈을, 칼빈주의자드로부터는 선택의 교리를,
루터파로부터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자비 및 성례를 통해 얻어지는 참된 위로의 교리를,
퀘이커파로부터는 개인 양심의 자유를 그리고 메노파로부터는 엄격한 윤리생활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교리의 차이는 신자들의 교육과 개발을 위한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방편인데 하나님의 자녀들 간의 완전한 연합이 회복될 때까지는
계속 존속하게 된다고 했다.

(3) 영국과 미국의 복음적 각성운동

    독일에서 발생한 경건주의의 여파는 영국에서 복음운동(복음주의적 각성운동,
Evangelical Awakening)을 초래했고,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대각성운동을
가져왔다.
    영국의 복음적 부흥운동과 미국의 대각성운동은 선교적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자발적으로 생겨난 선교단체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전도 및 선교사역을 위해 하나로
뭉쳤다. "이 복음주의적 부흥운동들이 연합운동을 하나의 목적으로 내세웠던 것은
아니지만, 이 운동에 가담했던 개인들이 각기 동일한 회심 체헌을 가졌다는 일체적
의식과  복음전파에 관한 공동적 사명의식은 결과적으로 <연합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하겠다.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케리(1761-1834)가 인도에서 보낸 첫 편지는
런던에 새로운 선교운동을 일으켰다. 1795년 영국 선교협회가 조직되었다.
영국 선교협회는 선교사역에 있어서 다른 교파 그리스도인들과의 연합과 우호적
교제를 강조하였다.

     윌리암 케리는  1806년 친구 앤드류 풀러(Andrew Fuller)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현대 에큐메니칼 선교운동의 형태를 태동시켰다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생각을 밝혔다.
즉 교파를 초월하는 선교대회를 매 10년마다 개최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이러한 선교
연합대회를 매 10년마다 개최하므로 선교사들에게 크 ㄴ혜택과 격려를 주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 풀러는 케리의 제안을 '마음이 들뜬 사람의 멋진 꿈'에
불과하다고 논평했다. 그러나 캐리의 꿈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꿈은 19세기 중엽부터
세계 각 곳에서 실현되기 시작했고, 100년 후인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서
완전히 실현되었다.


(4) 19세기의 특징

   라토렛 교수는 19세기를 가리켜 '가장 위대한 세기'라고 했다. 그 이유는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이르는 한 세기 동안 '기독교의 가장 광범한 지리적 확장'이 이루어졌고,
기독교의 내적 생동력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에 개신교 기독교는 남북미,
호주,아프리카를 비롯하여 태평양의 군도들과 아시아 각국의 부족들에게 까지 깊숙이
미치게 되었다. 라토렜 교수에 의하면,19세기 중에 기독교는 온 세계,모든 민족,모든
국가,모든 종족 그리고 모든 문화에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고, 세계의 이념들과
습관들과 제도들을 새로 형성해 가게 되었다.

   19세기에 일어난 복음의 불길과 선교운동은 기독교 안에 연합운동의 분위기를 조성
하였다. 18세기부터 생겨난 선교단체들은 19세기에 들어와서 급증했다(참고. 김명혁,
현대교회의 동향,27-29쪽).

   19세기 중엽부터 선교단체들 간의 연합 및 협동운동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연합운동은 결국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를 초래케 했고, 20세기의 선교 및
교회 연합운동을 가져오게 했다. 라토렛 교수가 지적한 대로 에큐메니칼 운동은
주로 선교운동의 산물이다.


    3.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1910)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159개 선교단체가 파송한 1200명 이상의 세계선교 관련자들이
참석하여 개최된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는 19세기 선교 및 연합운동의 총 결산이요
20세기 선교 및 연합운동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현대교회의 동향,41쪽).
   대회는 날마다 15분간의 기도회로 시작하였고, 정오에는 30분씩 선교사역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렸다. 특히 중보기도의 시간은 참석자들로하여금 형제애와 그리스도 안
에서의 하나됨을 깊이 느끼게 했다.
   죤 모트 의장은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간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평신도요 인도주의자였다.
라토렛 교수에 의하면 에딘버러 선교대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선교단체의 공식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이전의 선교대회에서는 대부분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2) 연구와 협의에 중점을 둔 모임이었다. 이전의 모임들은 선교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3) 범세계적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고,이를 위한 연합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4) 신생교회 지도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5) 이전의 어떤 선교대회보다 더 많은 교파를 포괄하게 되었다.
6) 에큐메니칼 운동을 이끌어갈 인물을 훈련시키는 마당의 역할을 하였다.
7) <계속위원회>를 조직하여 대회에서 논의된 문제들을 계속 연구하고 수행하였다.

   에딘버러 대회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김명혁 교수는 세 가지 문제점을 들고 있다:

1)  평신도가 대회를 이끌어 갔다.
2)  자발주의의 문제점.
3)  의식적으로 교리문제를 무시하고 모였음. "교리적 차이를 무시하고 함께 수행하는
    복음주의적 선교나 연합운동이 참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

    4.  세계선교대회 이후

    <세계선교대회>의 결과로,1921년 <국제선교협의회>가 창설되었다. <국제선교협의회>는
에딘버러 대회와 마찬가지로 전인류를 향한 복음전파의 의무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협의회는 교리적 문제나 교회론적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논의나 결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국제선교협의회는 초대 회장에 죤 모트,총무에 올담과 완슈이스를 선출했다.
본부 사무실은 영국에 그리고 제 2 사무실은 뉴욕에 두었다. 임원들은 세계 각국을
방문하여 각국의 선교단체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면서 세게선교를 위한 연합전선을
이루는데 괄목할만한 공헌을 하였다.


    5.  <국제선교협의회>의 문제점

     1920년대부터 교리적 논쟁이 일어나면서, 일부 선교단체는 <국제선교협의회>로부터
탈퇴했다. 또한 여러 선교단체들이 선교연합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교리적 일치없이 선교연합운동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1923년 옥스포드에서 모인 <국제선교협의회>는 교리적인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었다. 그들은 교리적 문제에 별로 저촉되지 않는 사업들에 힘쓰기로 했다
(통계수집,마약퇴치운동,성경번역,기독교서적 출판,학교와 병원의 설립 등).


    6.  예루살렘  I.M.C. 대회(1928)

    세계 50여개국으로부터 231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그 가운데 52명은 신생교회를
대표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김활란 여사가 참석했다. 예루살렘 대회는 신생교회의
지도자들을 동등한 지위의 동역자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대회를 지배한 주요 관심사는 <기독교의 메시지>였다. 선교사가 선포해야
할 기독교의 독특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 대회는 <기독교 메시지>를 채택하였다.
"우리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동기이며 우리의 목적이다.
우리가 전해야 할 것은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예루살렘 대회는 또한 복음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의 영혼을 위한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들이 살고 있는
사회기구와 경제관계로 구성된 세계를 위한 메시지도 포함하고 있다."
    예루살렘 대회가 표명한 사회적 관심은 맹렬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유럽의 신학자들과 영미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예루살렘 대회가 교묘한 방법으로
현대주의와 혼합주의를 감추고 있다고 비판했다. 화란의 신학자 헨드릭 크래머는
"신학적 절충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7. 위기의  10년

    예루살렘대회 이후 1938년까지 10여년 동안 <국제선교협의회>와 세계선교운동은
위기에 봉착했다. 칼 바르트는 선교의 동기와 방법을 심각하게 비판했다.
    세계 전역에 걸친 경제공황과 전운은 낙관주의적 선교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선교자금은 줄어들고 따라서 선교활동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한편, 하바드 대학교의 학킹(W.E.Hocking)은 인도,중국,일본 등지의 선교활동을
조사하고 재평가했다. 그의 절충주의적 선교평가는 공격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의 보고서는 기독교 선교의 과업을  타종교와 함께 진리를 공동으로 추구하는
것이라고 피력했기 때문이다. "비기독교적 종교체제를 공격하는 것이 기독교 선교사의
의무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종교 체제 안에서 의를 실현시키고 있는 세력들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간주해야 한다." 그의 견해는 전통적인 선교개념을 전적으로
뒤집어 놓았다.


    8. 탐바람  I.M.C. 대회(1938)

    세계 69개국으로부터 471명의 대표 참석했으며, 그 가운데 반 이상이 신생교회들로
부터 왔다. 대회의 주제는 교회였고 특히 신생교회들을 강화하는데 주요 관심을 기울였다.
이 대회는 교회야 말로 복음화를 수행하는 최상의 기구라고 선언하였다. 또한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분열은 신도들에게는 거치는 돌이요 불신자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된다.. 세계 각 곳에 존재하는 간절한 열망은 교회의 가견적 연합이다."


    9. 휫트비 대회(1947)

    40개국으로부터 12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제2차 대전 후 처음으로 개최된
개신교 세계선교대회였다. I.M.C.는 그 초창기부터 W.C.C.가 조직된 1948년까지
세계기독교연합운동에 큰 공헌을 했다.  휘트비 대회는 복음전도가 교회의 근본과업임을
재확인했다. 학생자발운동의 정신으로 이 대회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복음이
세계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10. 빌링겐 대회(1952)

     독일에서 모인 이 대회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아울러 연합의 필요성을 재확인했다.
또한 선교수행에 있어서 신생교회의 참여를 강조했다.
     빌링겐 대회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채택했다: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연합의 과업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서 비롯한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과  말과 행위로 온 세상에
그의 복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예배와
연합과 선교의 3중 응답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교회의 3중 응답은 상호의존적인데,
서로 분리될 때 이것들은 모두 부패하고 만다. 교회의 분열은 전도와 설교를 망치고
교회의 본질을 깨뜨려 버린다."

      특히 빌링겐 대회는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소개했다. 선교는 교회 자체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선교 개념은 현대 선교신학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참고. 게오르크 휘체돔,하나님의 선교,대한기독교출판사).
      또한 이 대회가 해외 선교에 있어서 평신도 선교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강조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11. I.M.C.와 W.C.C.와의  통합

      1961년 뉴델리에서 양 기구는 통합을 정식으로 채택했다. I.M.C.의 일부
회원은 통합을 반대하고 탈퇴했다(신학지남,183호 참고).

 

   12. 세계교회협의회의 조직(1948)

   1948년 8월 22일 화란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44개국 147개 교회로부터 온 351명의
대표들을 비롯한 다수의 참석자들이 함께 모여 <세계교회협의회> 개회예배를 보았다.
   참석한 대표들은 세계교회의 죄악을 뉘우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연합을
이룩하여 세계에 대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을 다짐하였다.

   13. 에반스톤 W.C.C. 총회(1954)-2차 총회

   161개 회원 교회들로부터 온 502명의 대표 참석.
   주제- 세상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

   <에반스톤 메시지>는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소망임을 강조하면서 교회는 정치적 및
사회적 불의와 대항해서 싸우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 메시지는 선교적 사명에 대해서는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다만 다음과 같이 간단히
언급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14. 뉴델리 W.C.C. 총회(1961)-3차 총회

   174개 교회로부토 온 582명의 대표 참석.
   주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다.
   (참고. 신학지남,184호)

   뉴델리 총회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채택하여 회원 교회들에게 보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을 위한 인간들의 진지한 추구 그리고 가난과 억압과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추구를 함께 한다...오늘날 우리는 구체적인 형태의
기독교 봉사를 생각해 내야 한다. 모든 종류의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보다 더 크고 효과적인 봉사는 없다... 우리는 모든 인종에게 가해지고 있는
불의에 대항해서 싸워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연합의 완성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

   뉴델리에서 보편주의적 내지 혼합주의적 선교의 개념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해가 지나갈 수록 더욱 심각하게 나타났다.

    15. 웁살라 W.C.C. 총회(제4차 총회,1968.7.4.-20)

    주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독일의 바이엘하우스 박사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을 비판하면서, 다른 대학
교수들과 함께 선언문을 검토하고, 다소 수정한 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그것이
바로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에 대한 가장 큰 도전은 1974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던
<세계복음화 국제대회>였다. 150여개국으로부터 2400여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이 모였다.

    16. 나이로비 총회(제5차 총회,1975)

    주제: 예수 그리스도는 해방하고 연합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와 해방은 대체로 정치적 사회적 구조악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의 복음은 이 구조적 죄악,사회부정의 압박으로
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선포한다."


    17. 카나다 뱅쿠버 총회(제6차 총회,1983)

    주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생명.

 

맺는 말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고전적 선교의 개념을 주장한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을 증거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구원의 열매로서의 사회적인
봉사도 강조한다.

    <로잔 언약>(1974)은 인류의 2/3 이상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ㅕ 세계선교의 시급성을 강조하였다.

    바이엘하우스 박사는 전통적 보수주의 선교개념을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다:

1) 이원론적 세계관- 이 세계를 죄악시하며 세계사를 무의미하게 본다.
2) 자기 교파와 교회만이 참 교회라는 태도.
3) 대화의 유익을 부인하는 잘못.
4) 수직적 구원만을 강조하고 수평적 사회적 구원을 간과하는 잘못.

 

참고문헌

김명혁,현대교회의 동향,성광문화사,1987
바빙크.선교학개론,성광문화사,1991
바이엘하우스,선교정책원론
죤 스토트,현대기독교선교,성광문화사,1981
아더 죤스톤,세계복음화를 위한 투쟁,성광문화사,1983
김명혁,'현대 에큐메니칼운동의 역사적 배경',신학지남(1978.7)
송광택역,교회사핸드북,생명의 말씀사


[출처] [본문스크랩] 작성자 칸나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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