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는 참된 표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영위(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지위., 일을 꾸려 나감)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죄 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회복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 자세로 견지하는 입장을 통하여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숙고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그 점을 인식하고 견지하지 않고서는 참된 구원을 향유하거나 자유로움을 만끽하거나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는 지각의 풍성함은 전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의 영적 침체이든지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좋은 방식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이며 어떠한 사람인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David Martyn Lloyd-Jones
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요한복음 1장 12-13절)
저와 여러분이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2-13절의 말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자, 우리는 주일 아침에 계속하여 이 구절의 말씀을 여러 가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주일 아침에는 이 진술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놀라운 메시지,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영접하고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명예와 특권을 주셨다'는 메시지의 입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사도 요한이 우리를 위하여 이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가장 먼저 표현한 것들 중 하나는, 우리로 하나의 중요한 문제를 상기하게 합니다. 곧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영위(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지위., 일을 꾸려 나감)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보편적으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며 우리가 어떠하여야 함을 마땅한 바대로 이해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복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무엇이 가능하게 되어 있습니까?
그래서 여기에 일종의 그리스도인 신앙의 진수에 대한 개요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여 이 땅에 오신 영광스러운 결과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그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너무나 사활을 좌우하는 중요한 것이기에 우리는 정말 견고하게 이 진리를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영광은 죄 사함에서 더 나가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단순하게 죄 용서를 받는 사람, 또는 용서받은 사람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든지 그저 그러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런 경향을 띠는 것은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이 기독교 전체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 용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너무 자주 기독교가 죄 사함에 대한 것만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오직 그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죄책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만을 제거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에 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메시지를 보고 기뻐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멈추어 버리고 마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진수는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하나의 기독교의 예비적인 단계입니다.
물론 죄 사함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목적은 죄 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회복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고난을 받은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 자세로 견지하는 입장을 통하여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을 사도는 우리를 위하여 여기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점을 숙고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그 점을 인식하고 견지하지 않고서는 참된 구원을 향유하거나 자유로움을 만끽하거나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는 지각의 풍성함은 전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상태와 입장에 대하여 대단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조건에 대해서 주관적인 느낌에 휩싸여서 시간을 소일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문제는 거의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존재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지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현상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어떤 이는 ‘영혼의 계절풍’(monsoon), 영혼의 변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지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다면, 어떤 유의 영적 침체이든지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가장 좋은 방식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이며 어떠한 사람인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방식은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도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무엇입니다. 자연인은 자기 나라와 가문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렵고 위기에 찬 시간에 그 사람을 항상 자극하고 분발시키는 것이 바로 그 긍지입니다.우리가 어렵고 위기에 찬 시기에 그 모든 것을 영적 수준으로 끌어 올리고 그것을 무한정하게 확대시켜 우리에게 적용하여 보십시오. 여러분도 보다시피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여기 본문에 우리를 위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요한 사도에 따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떠한 것이 가능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하느냐를 인식하는 방법은, 말할 것도 없이 무엇보다 먼저 이 영광스러운 성육신의 진리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일로 그 진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여기에 바로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도는 그 점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그 성육신의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사실을 먼저 인식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 시간에 존 칼빈의 말을 통해서 그 점을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고 죄 있는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여기 우리를 위하여 진술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마지못해 끌려가는 종교가 아니다
제가 볼 때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할 요점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정말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은택을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삶의 기쁨과 자유로움을 발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대한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그랬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임무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의무를 부과하려고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의지를 거스려서 행하거나 즐겁지 않는 것을 마지못해 하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단순하게 종교적인 사람의 힘든 자세 정도에 불과한 것이지요.
기독교는 느껴지고 누려지고 자랑하고 외쳐 찬미할 만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악성경 말씀을 떠올릴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는 것을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세상이 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사자에게 던져지는 형별을 내릴 때에,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자기들의 상급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지금 그런 자리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주 안에서 기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기뻐함이 우리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그러한 경우를 예외적인 성숙의 경우라고 간주하곤 합니다. 그런 식의 자세는 아마 다음과 같은 사실에 기인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고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지음을 받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나 진정한 인식이 부족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압니까? 그것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저 성경을 기계적으로 강해해 나가면서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저 이지적으로나 지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체험적인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이 문제에 있어서 마음이나 생각이나 삶에 대해서 본래부터 성숙한 자리에 있는 경우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한에서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여 봅시다.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신약의 시금석들
그런데 신약성경은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게 하는 정말 많은 시금석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을 점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신약성경의 책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것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복음서마저 그러합니다. 복음서는 세상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시켜주기 위해서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신서들도 필연적으로 그러합니다. 그래서 서신서 전체에서 우리에게 부단하게 적용시킬 시금석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해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신약의 어떤 책들은 다른 책들보다 더 이 문제를 철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일서의 경우입니다. 그 서신의 처음 부분을 읽어보면 그 서신 전체가 바로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쓰여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서신에 대해 주석하면서 삶에 대한 이 주석적인 시금석을 환기시켰습니다. 그 서신이 바로 우리가 함께 살펴볼 문제에 대해서 매우 많이 제시하고 있는 심오한 시금석을 말입니다. 우리는 1장과 2장을 읽어보기만 해도 여러 가지 연약함을 주목하게 됩니다. 거기 사도는 요한일서 1, 2장에서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는 하면서도 다른 것은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았고 하나님의 참다운 자녀가 아님을 고백하고 있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 가지 많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그 시금석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자, 이것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4절에서 분명하게 우리를 위하여 하나의 시금석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물론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을 예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여러 가지의 행실과 행동에 대한 호소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사도는 에베소서 5장 초두에서 “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호소합니다. 곧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돕고 어떤 일에는 서로 삼가야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자녀답게 행하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하려고 애쓰는 이 일에 있어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재료들은 정말 풍성하게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은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닌 예외적인 경우라고 얼른 둘러대려고 하지요? 그런 자세는 본성적인 노선을 따라서, 자아가 암시하는 인간적인 유추를 따라서 접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어떻게 시험해 봅니까?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또는 가족에 대해서 관계를 어떻게 시험해보는 것입니까?
좋습니다. 정말 분명한 시금석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적용할 시금석,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우리는 신약에 맞추기 위해서 이러한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이 분명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하는 첫 번째 방식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진 관계를 통해서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내셨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바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시작해야하는 이유는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행하지 않으셨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가진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핵심적으로 선포해 줍니다.
여기에 세 국면의 차원에서 그것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관원은 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영접합니까? 바리새인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알아보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그를 영접하였습니까?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정말 말하는 내용 그대로 그를 영접하였느냐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요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그분과 그분의 이름을 믿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5장1절에서 그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누구든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니.” 아주 분명하게 말해서 그 진술 속에 내용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메시아시고 구원자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고 할 때의 진정한 내용입니다. 물론 그것은 내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는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하는 식으로 하는 고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소망 없고 비열하며 저주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의라는 것이 더러운 넝마 조각과 같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영적인 가난뱅이요 자신의 의에 대해서 애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의에 대해서 주리고 목마르게 되고 아울러 자신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다고 할 때의 내용입니다. 그것은 그저 기계적으로 나는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이지적인 것을 말하는 것에 블과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그를 믿는다고 말하는 바 그대로, 진정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에게 자신을 말기고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만 소망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그런 식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마다 모두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자기 의를 의지하는 종교적인 사람은 주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선함을 의지하는 자, 자기의 행한 일과 공로만 의지하는 자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습니다. 그는 구주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가 다른 이들과 같지 않다고 하나님께 감사한 바리새인과 같습니다(눅18:9-12).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소망 없음과 전적으로 무능한 것을 진정 알고,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빌립보서 3장3절의 차원에서 표현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바로 그 구절 속에서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성령으로 봉사(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육체를 전혀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육체를 전혀 신뢰하지 아니하고 메시야이며 구원자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습니다. 온전히 그분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핵심적인 말씀을 가지고 견고하게 서야합니다.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오늘 아침에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내 소망의 반석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일세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 아니면
더 달콤한 친구도 신뢰하지 않아
오직 반석 되신 그리스도 위에만 서네
다른 모든 기초는 가라앉는 모래일세
만일 정직하게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선포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이 두 가지 요점, 곧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하는 것은 항상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가 아니면 누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겠습니까? 사람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가 아니면 앞에서 말한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거듭났다고 하는 사실은 그 사람이 하는 그런 말로써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린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가진 관계는 그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가진 관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제가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적용하고 싶은 시금석이 한도 없이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여러분에게 권면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점검하는 기회를 갖는 시간입니다. 오늘 아청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다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제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끝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을 생각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일입니다.
그럼 누구든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어떻게 시험합니까? 그 관계를 어떻게 시험합니까?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가진 관계에 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물어야 할 것은 자녀이면 '자기가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의식이 있는데, 그것이 있습니까? 모든 자녀들은 자기가 아버지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 가족에 속하여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는 자기 자신에게 바로 그 사실을 설득하여 확신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는 안에서 느낍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는 아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다른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부모와의 관계와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의식 속에 깊이 숨어 있는 무엇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먼저 해당되는 요점입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여러 신들 중에 하나의 신에 불과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융통성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더라도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고,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갖고 있는 의식과 느낌을 논리적으로 표현하거나 이해하기 쉽게 분석적으로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표현이 많습니다. 제가 볼 때 시편 73편에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시편 기자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으며 시험을 받고 있었습니다. 불행감이 그를 온전하게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사오며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결국 이 시편 기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자들이 아무리 잘 살고, 살찜으로 건강하게 서 있고, 죽을 때에도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전혀 당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게 있어서 오직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뿐이다. 하나님이 바로 그 분이시다. 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있겠는가?내게 있어서 주를 떠나서는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사람 마음속에 이런 근본적인 의식과 느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압니까? 여러분은 또한 자신이 그러한 맥락과 내용 속에 전적으로 들어 있다는 것을 압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 되십니다. 어떤 이가 여러분을 따돌립니다. 그런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한 신령한 두려움에서 주님께 맞춰 나가기 위해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않던 경우들을 상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자녀의식
여러분도 알겠지만 자녀의 관계와 자녀로서의 역할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힘 있고 능력 있는 세속 임금과 강한 신복과 보통의 시민 사이에 가진 외적이고 법적인 관계 같은 차이입니다. 그것은 자녀 관계라기보다는 하나의 역할 관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방식입니다.
이 두 번째 시금석을 좀 더 정교화 시켜 보겠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 전체를 하나님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자녀의 삶은 그것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입니다.곧 아버지께로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녀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유유상종입니다.
가장 광범한 형식으로 그것이 사도 바울이 헬라의 아덴에서 한 말을 통해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철학적인 것인데, 자녀가 아버지보다 더 나아가는 일이 없습니다. 자녀가 그 사실을 철학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의 삶, 그의 모든 것을 그의 아버지의 차원에서 행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자녀가 닮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보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러한 형식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의도하는 바는 기본적이고 원리적으로 경건에 대한 것인데, 우리가 흔히 잊기 쉬운 것입니다. 저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실상 모든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차원에서 봅니다. 이것이 바로 사물을 접근하는 기본적인 접근방식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에 삶에는 사실상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내 삶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것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상에서 행해지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고 하나님의 조정에 의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주님께서 친히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는 것이 그 점을 보여줍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하는 일은 내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사 그렇게 말하라 하셨기 때문이며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것들이다.”
그분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분명히 아버지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모든 방면에서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가 왔을 때에도 그렇게 두려워 떨면서도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분량에 따라서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그 점이 필연적으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는 다시 그 점을 그의 요한일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이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같이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반드시 비열하고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죄를 짓는 자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극히 높은 추앙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세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에 속한 자이며,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안중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이성과 더 나은 인간의 지식과 학식을 의지하며 생각합니다. 이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는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외인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이 넘어지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의 삶 전체는 하나님에 의해서 통제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봅니다. 이 세계를 보더라도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는 방식대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을 이기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가진 관계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이상 그러한 것을 놀라운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 놀라운 것이 무엇이며 정말 영광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사고의 추세가 어떠한가
하지만 여러분의 보편적인 사고와 생각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생각의 추세는 어떠합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서 좀 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는 갈수록 더 깊은 인상을 가집니다. 사람이 특별한 ‘진술을 하는 것’과 ‘생각을 가지고 실제 일하는 것’ 사이의 차이로 인하여 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이들은 눈에 보이는 진술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되며 참 하나님의 자녀라고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구절을 배우고 반복하여 마치 앵무새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사고방식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사고방식과 자세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고방식과 자세를 가지는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실수하고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회개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녀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의식이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귀신도 믿고 떱니다. 마귀도 하나님을 믿으나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거듭나지 않은 마음(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께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적대적인 방향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자녀는 사랑합니다.
자녀도 잠시 느슨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을 인하여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사 우리의 구주로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을 믿는다면, 어찌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온전하게 갖지 않고 절반만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대해 가진 관계는 습관과 관습이나 율법의 실제나 두려움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며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점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너는 말한다. 그러나 나도 안다. 네가 여러 가지의 일들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시금석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네가 어떠한 사람인지 네 삶의 방식을 통해서 선포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지각을 가지고 매우 많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느낌이 어떠한가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이 시금석을 적용하여 보기를 원합니다. 단순하면서도 가장 심오한 그리스도인이여,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느낌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러분의 대답이 무엇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이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불만이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사랑이 약하고 희미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오 은혜로우신 주여,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녀의 표현입니다.
그 사랑이 아무리 희미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존경심이 있는가
이 신비로운 태도에 있어서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존경의 시금석입니다. 이것은 정말 불가피한 요소입니다. 여러분이 참 하나님께 대해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또한 자녀에 합당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아울러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가 어떠한 계명과 명령 중에 싫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사랑합니다. 매우 가난한 아버지에게도 그 가난한 자녀는 중심에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옛 설교자들의 사고 구조를 오늘날 이 세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바울 사도는 "하나님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엡 1:3)라는 구절을 다루면서 어째서 그냥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곧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했습니까? 옛 설교자가 한 설교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옛 설교자는 ‘성령의 숙고하심과 섬세함이 그렇게 하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불행하게도 이 세대의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가정과 '아버지'를 생각할 때에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과 배려와 공의와 친절과 긍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버지라는 말만 떠올리면 술주정뱅이가 생각나곤 합니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아버지께서 누구시며 어떠한 분이신지를 묘사합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사도로 하여금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그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그러하면 아버지도 그러하니, 하나님이 구주 예수님의 아버지시라면, 그 분이 나에게 있어서 어떠한 아버지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중요한 요소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세대의 삶의 실제에 있어서 아버지 상과 아들 됨의 정신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분명히 훈육에 있어서도 중대한 파국이 일어나게 됩니다.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아버지들을 존경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른이 젊은이들의 비행을 나무라고 있지만, 젊은이들이 행실에서 실패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부모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 문헌들이나 신문의 보도를 통해서 유추하기로는 현대의 부모들이 거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 같습니다. 부모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존경심을 갖도록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존경을 요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늘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모델로 추천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존경의 요소는 하나님께 대해서는 절대적인 중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입에 발린 천박한 하나님 사랑 표현은 영적이지 못함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술에 걸맞는 실속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친숙함을 나타낼 필요가 있는 것같이 하기는 하지요. 이유는 숨기고 있지만, 사실은 실속이 없는 천박한 정신구조에서 나온 것입니다.그러나 신약에서 ‘좋으신 하나님’(Dear God)이라는 표현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성의 진정성에 대한 표지는 바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고 아주 쉽게 친밀해지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그러한 식의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들 되신 그리스도께서도 기도하실 때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했고, 우리에게 합당한 표현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랑’과 ‘존중’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존경함이 없이 사랑만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천박한 정신구조의 소치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욕입니다. 그것은 병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존경도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해 자녀가 되는 진정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존경합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거룩한 관계를 떠나서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능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분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존경합니까? 바로 거기에 거룩한 두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비겁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런 두려움은 이제 가버렸습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은 갔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맙시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라고 말할 때의 그러한 두려움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담대함과 경건한 두려움에는 아무런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하듯 사랑과 존경에도 여전히 서로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외경심과 친숙함 사이에는 서로 모순이 없습니다. 이 둘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만일 그 둘을 분리하게 되면 반드시 방황하게 됩니다. 사랑은 존경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그리스도인의 긍지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긍지에 대한 의식입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로 적용하는 시금석입니다. 자녀는 자기가 자기 가문에 속하여 있다는 것을 늘 자랑합니다. 거기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가 건전한 긍지를 가지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자식은 자기가 영광스러운 가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늘 자랑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뽐내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아름답게 하는 것은 악하고 죄악적이며 미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긍지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나라에 대한 자연스러운 긍지를 죄악적으로 정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나라로부터 모든 것을 생각하고 그것만 생각하면 잘못이며 죄악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가문에 속하게 되고 어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면 그 가문과 나라에 속한 자긍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에 태어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랑합니다.
내가 이 아침에 살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기독교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사실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을 정말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바로 이 사실을 자랑합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그 사실이 정말 위대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자하는 것이 자녀의 소원
그 점은 이제 여섯 번째의 시금석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을 더 잘 알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의 무리들과 함께 있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녀는 매일 밤 부모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면, 아버지께로 달려갑니다. 자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본능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그것을 바꾸어 생각해도 같은 진리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이 시금석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싶어 합니까?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더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말하고 그들에 관해서 자랑하고 그들을 더 잘 알기 위해서 돈도 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더 알기 위해서 더 애를 쓰고 갈수록 더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연적인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더 잘 알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 분 앞에서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합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의 영광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손해 볼 각오도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 속에서 성도들이 기도회로 모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또한 서로 교제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표현, '아바 아버지'
이 아침에 이제 마지막으로 적용할 시금석을 알아보겠습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의 말을 통해서 표현하고, 미소로 표현합니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가진 사랑을 표현하듯이 말입니다. 그보다 부모에 대한 사랑을 가지는 자녀에게 있어서 더 좋은 표현이 없을 것입니다. 정말 정직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표현해서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랑을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이 표현합니까? 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아들은 마음이 늘 성령에 감동을 받아 여러분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미소를 더 많이 보기 위해서, 여러분을 향하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온 세상과 모든 소유를 다 드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영원히 여러분을 사랑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 어떤 방식으로도 그 사랑을 능가할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에게 알게 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시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만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그렇게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녀는 하나님을 알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종의 두려움의 영을 갖지 않고 아바 아바지라 부르짖는 양자의 영을 갖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아멘.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구원 이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속죄론의 발전과 현대적 의미 연구 ...2. 현대의 맥락에서의 속죄론 (0) | 2017.04.08 |
---|---|
[스크랩] 구원에 관한 아홉 가지 용어들 (0) | 2017.04.08 |
[스크랩] 구속 언약이란? (0) | 2016.09.09 |
[스크랩] 구원받은 영혼에 관한 195 가지 사실 (0) | 2016.08.12 |
[스크랩] 구원사역에 대한 신구약 비교 (0) | 2016.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