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바로알기 조재훈

[스크랩] 교리설교 진리바로 알기 - 66. 선악과는 왜 만들었는가 ?

하나님아들 2016. 8. 24. 11:51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

 

2: 15 - 17.

 

우리의 삶이 고단하고 또 사단의 시험에 빠지면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만들지 아니하셨으면 인간이 고생을 하지 아니할 것이며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한번쯤은 하게 된다.

그리고 선악과를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죄라면 따먹은 인간이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그 만드신 분인고로 간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내가 범죄하고 죄 책을 하나님께 전가하는 이중 죄를 범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는 배은망덕한 생각이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 하시며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임을 믿는 믿음으로 출발해야 한다. 이 믿음으로 생각할 때에 전지 하신 하나님께서 그 계명 나무를 세우실 때에 아무 생각 없이 세우신 것이 아니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저주하려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과 선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분명한 선하신 뜻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 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은 법이다.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법으로 구분한다. 그러므로 선악을 알게하는나무라 함은 법이라는 말이다.

 

  인간이 번성하여 함께 살아 가는데는 법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 법 질서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류가 살아 가는데는 하나님의 말씀인 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법인 것이다그 법을 어길 때 죄인이 된 것이다.

1. 인간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다.

참 자유는 인간에게 가장 귀한 축복이다. 그러기에 선악과를 주심은 인간에게 귀한 축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창설하신 에덴동산에는 육신의 삶에 관계된 먹기에 좋은 나무와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었고. 영에 관계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생명나무는 먹으면 먹을수록 사는 나무였으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으면 죽는 나무였다. 이 두 가지 나무를 놓고 생각할 때에 인간에게 생사(生死0의 선택의 自由를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로 만들지 아니하셨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 만드셨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유로이 먹을 수 있도록 다스릴 수 있도록 자유를 선언하셨다. 자유가 없는 삶은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재산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에덴(세상)에기에 인간이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도록 자유를 선언하신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기계처럼 창조하여 먹을 것 모두 먹이시고 걸음걸이 일일이 하나님 마음대로 하신다면 인간의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사시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창조의 의미가 없는 것이고 창조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인데 만약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지 않으시고 기계처럼 만들었다면 인간이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신에게 돌리게 되는 것이므로 창조의 목적의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계명 나무를 마련하신 것은 여러 먹기에 좋은 나무, 보기에 좋은 나무 실과는 삶에 구애 없는 자유의 즐거움을 주시기 위함이며 생명나무는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며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죽음을 지배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다. 즉 완전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선악과 자체가 인간을 저주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과일을 먹었을 때에 바로 죽지 않았음이 증명한다. 하나님께서 형벌을 선언했을 때에 저주의 삶이 시작되었다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을 어긴 자의 책임 이행으로 자신이 선택한 죽음의 선언이었다.

 

혼돈과 자유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혼돈 속에는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질서안에 자유가 있는 것이다. 질서는 곧 법이다. 법은 내가 스스로 지켜야 하는 약속이다. 아담에게 선악과는 하나님과의 약속 곧 법이었다.

 

자유를 가진 인간에게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아담과 하나님과의 언약은 한사람 아담과의 언약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인류를 향한 언약이었다. 그러기에 인류가 사는 데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주는 모두 질서 정연한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질서는 바로 존재이며 삶이다. 이 질서는 생명을 보전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자동차의 면허증이 없으면 자유로이 운전할 수 없다. 또 이 세상에 나 혼자 살고 혼자 자동차가 있다면 규범이 필요가 없다. 여러 인간이 살기에 안전을 위하여 규범이 필요한 것이다. 규범이란 내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는 법과의 계약이다.

운전의 자유인 면허증을 가진 사람은 마음대로 운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면허증을 받을 때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따르며 범하면 범법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자유로이 운전을 하되 법규를 어기고 사고를 내면 그것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 법을 만든 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든가 면허증을 준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든가 하는 말은 말이 안 된다.

 

바로 사단에게 붙잡힌 아담과 하와가 그랬다. “아담아 네가 어데 있느냐하고 부르시자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숨었나이다했다. “누가 너더러 벗은 것을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과일을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하나님께서 함께 한 여자 그가 내게 주었기에 먹었나이다했고 하와는 들짐승이 꾀므로 먹었나이다라고 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솔직하게 회개하지 않고 핑계돼는 이중 죄를 범한 것이다. 아담의 변명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여자가 나에게 주므로 먹었다는 말이며 하나님께서 창조한 뱀이 내를 꾀므로 먹었다는 말이니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시지 않았으면 내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이며 여자도 뱀을 창조하시지 않았으면 내가 꾀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여자를 창조하시고 뱀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도 약간의 책임이 있으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을 사랑하시기에 창조물을 거저 주신 하나님에 대한 은혜의 배반이며 사랑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짐승과 언약하신 것이 아니고 여자에게 언약하신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언약 자인 아담을 부르셨다. 그리고 아담이 핑계하고 책임을 전가하자 형벌을 선언하신다. 아담 하와의 핑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한 은혜를 배신한 죄악이었다. 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사단의 말을 들었을까? 하나님께서는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했고 사단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했다.

 

그런데 사단의 말을 들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아니하고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사단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는 말은 인격을 불신했다는 말이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자를 창조하여 주신 하나님이신데 모든 창조물을 은혜로 거저 주신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단의 말을 믿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짓된 분으로 나타내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범죄 한 이들을 벌하지 않으셨다면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 되고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거짓된 분이 된다. 그러기에 벌을 내리셔야 했다.

 

자유를 가진 인간이기에 규범이 있어야 하고 규범에는 반드시 댓가가 있어야 한다. 법에 댓가가 없다면 무력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운전자가 법을 지키다가 피해를 입으면 법을 제정한 자가 보상을 하지만 규범을 범하고 범법하여 피해를 입으면 그 법으로 하여금 자신이 댓가를 치러야 했다. 하나님의 법인 언약을 어긴 인간은 보상을 치러야 했다. 그 보상은 사망이었다. 생명을 위한 법이기에 사망이다. 법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법을 지키셔야 하기에 공의롭게 심판을 하셔야 했다. 아담 하와는 공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우리는 조상을 하고 원망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는 인간을 끝가지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공의의 선악과가 필요 없게 되자 새로운 계명 나무를 세우셨다. 그 계명 나무는 공의의 계명 나무가 아니고 사랑의 계명 나무이다.

 

오늘 우리에게 이 사랑의 선악과를 주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계명 나무가 갈보리 언덕에 십자가이다. 에덴의 선악과는 먹으면 죽고 먹지 아니하면 살았다. 오늘 우리의 십자가도 믿으면 살고 믿지 아니하면 죽는다고 선언하셨다. 인간에게 누구나 자유가 있다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자유의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이 계명 나무를 약속받고 믿음으로 살았고 우리는 역사 중앙에 세워 주신 계명 나무인 십자가를 믿고 사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십자가는 위대한 것이다.

 

여호수아 시대에 살았던 기생 라합의 창문에 매달린 붉은 줄은 언약이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줄에 불과하였고 거치장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라합에게는 생명 줄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 줄이라 하면 이해가 안 되기에 우스운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라합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 줄이었다. 물론 줄 자체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탐꾼과 언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멸망을 당할 자의 눈에는 형틀에 불과하고 나무토막에 불과 하지만 구원을 얻는 약속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생명의 나무이다.

 

2. 인간의 참 행복을 위함이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인간 창조 이 전에 타락한 천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단은 인간 창조 이전에 창조된 피조물인 천사 장을 중심하여 천사의 한 무리가 타락하여 일부는 지옥의 중심부인 탈다로스(ταλδαροs)에 결박되어 있고 부부가 자유로이 놓임을 받아 하나님의 정하신 기간까지 인간을 시련하고 연단한다고 앞서 말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또 선하신 분임을 잘 알고 믿는다. 이 믿음으로 살펴 볼 때에 그 사단의 일부를 놓아두심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계심을 믿고 이해하여야 한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데 먼저 사단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단은 여러 가지 명칭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타나스. 파괴하는 피괴 자 아폴리온. 신험하는 자 벨리알이라고 했다.

 

에덴 동산은 행복의 동산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되어 사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도 타락한 사단에 대하여 알고 계실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단을 경계시키는 일 또한 당연한 일이다. 유혹하여 따먹도록 할 것을 예상하셨을 것이다.

 

그러기에 먹으면 죽는다고 단언하셨다. 관연 사단은 속였다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고 속이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속였다. 이 때에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켜야 했다. 그런데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사단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사단의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에 재미를 봤던 사단은 예수님이 오시자 예수님께도 나타나 시험하려 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즉 사단의 말을 믿을 리 없고 따를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에덴의 행복을 인간이 누리도록 계명 나무 울타리를 치셨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세우신 언약이었다.

 

지금도 사단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유혹한다. 거짓 선지자들을 광명한 천사로 과장시켜 그릇 되이 가르치고 심지어 이적과 기사를 내세워 말씀을 슬쩍 뒤로 가리운다. 그리고 세상에서 잘되게 해준다고 속이고 세상의 것 다 준다고 속인다. 또 지어낸 말을 가지고 진리 비슷하게 가르쳐 진리의 말씀을 혼란하게 한다.

 

3. 자신이 창조한 인간과 영원한 관계를 가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창조한 인간을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관계를 가지려 하셨다. 그 관계를 가지시려고 언약을 맺으셨고 그 언약을 맺었다는 증거물이 계명 나무였다.

 

인간이 살면서 그 나무를 바라봄으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신 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며 살게 하시려고 하셨다.

 

왜 하나님께서 관계를 가지시려 하셨는가? 자신이 창조한 창조물에게 영광을 받으시려 하심일 뿐 아니라 인간을 영생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나무 가지가 원목을 떠나는 것과 같이 생명의 근원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15:1-4)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인데 그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 인간이 하나님과 떨어지면 죽기 때문에 떨어지지 말자고 언약을 맺으시고 그 증거물로 중앙에 계명 나무를 주셨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셨다.

 

4.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창조된 인간은 창조자를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근본을 알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통하여 창조자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것을 기억하게 하신 것이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너희가 임으로 자유대로 먹되 한 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마음대로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하셨다. 이 한 나무는 자연히 먹지 말라하신 분을 기억하게 한다.

 

이 언약을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 맺으셨음을 주의하기 바란다. 그러기에 하와가 따먹었을 때에 하와를 부르지 아니하시고 아담이 먹었을 때에 아담을 불렀다. 그렇다면 아담이 여자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모든 나무의 실과는 우리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저 중앙에 있는 한 나무는 안 된다고 하였을 것이다. 하와가 왜 마음대로 따먹을 수 없느냐 하고 물으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셨기 때문이라 할 것이며 하나님이 누구냐 물으면 당신과 나를, 그리고 이 세상을 만드신 분, 만 유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상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알게 하려 하신 것이다.

 

선악과를 왜 만드셨는가에 대하여 네 가지는 완전한 자유를 준 인간이기에 생명을 보호하여 완전한 삶을 살게 하시려 하신 것이며, 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기에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한 것이며,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시기에 떨어지지 말라는 언약의 증거물이며, 인간이 에덴에 살고 있지만 주인이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려 하신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우리도 자유가 있다. 또 역사의 중앙에 새 생명의 선악과를 세우셨다. 에덴의 계명은 말씀을 믿고 지켜 먹지 아니하면 영원히 살고 먹으면 죽는 공의의 계명 나무였다. 역사 중앙에 있는 새 선악과인 십자가는 믿으면 살고 믿지 아니하면 죽는 사랑의 계명나무이다. 하기에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조상 아담을 탓하지 아니하고 역사 안에 십자가를 붙들고 소망 가운데 산다.

 

구원받은 자의 생활이란? 영생의 계명 나무인 십자가를 귀하게 알고 붙드는 것이며. 사단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따르는 것이며. 나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떨어지게 하려고 훼방하는 사단과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사는 것이며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신 것을 바로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구속받은 자의 삶이다.

 

 

 

출처 : 조재훈목회자료
글쓴이 : daum jhoon29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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