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바로알기 조재훈

[스크랩] 교리설교 진리바로 알기 - 63. 아담은 구원 받았는가?

하나님아들 2016. 8. 24. 11:50

아담은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 ?

 

3: 15.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14: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그리스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버지께 올자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아담은 구원받았는가? 성경에 아담이 형벌 받는 사실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구원받았다는 말씀이 없다. 과연 아담이 구원 받았는가 구원 받았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

 

아담의 구원을 논한다면 구약시대 사람들의 구원도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 우리는 간혹 제사를 통하여 구원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제사는 장차 오실 구주 예수그리스를 계시한 것이다. 그래서 구약 시대 사람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고 신약 시대 사람들은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두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버려두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에게 찾아 주시고 그에게 구원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속 사역은 에덴에서부터 시작한다.

 

1. 형벌 받은 사탄의 침묵은 인간의 구원의 계시였다.

(3: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여자와 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만약 사단과 친구가 되도록 하셨다면 영원히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을 것이고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수가 되게 하여 격리시킴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은 관심이다. 관심을 가지신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범죄 한 인간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셨음을 증명한다.

 

형벌 받을 때의 사단의 침묵은 구원받은 자들의 승리를 계시한다. 사단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 그런데도 변명 한마디 못하고 움츠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중죄인이 재판장의 엄중한 선언 앞에 말 한마디 못하는 죄수처럼 움츠려 있다. 하나님의 형벌의 선언 앞에 말 한마디 못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 장면을 보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지상의 지배자, 공중 권세 자, 정사와 권세와 어두운 세상의 왕들의 지배자, 암흑의 왕, 사단이 만유의 주제이신 빛의 왕, 하나님께 정죄를 받고 형벌을 받는 이 광경은 내 영혼의 힘이며 찬양이 아닐 수 없다.

 

범죄 한 인간에게는 네가 어데 있느냐.” “누가 너더러 벗었음을 고하였느냐” “내가 먹지 말라 한 실과를 먹었느냐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사단에게는 한마디 심문도 없이 형벌을 선언하는데도 한마디 변명도 못하는 사단을 보라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다른 피조물들 보다 더 저주를 받으라하였는데도 한마디 말도 못하는 사단이다,

 

너는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으리라하신 선언에도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대답을 못하는 사단,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하신 말씀을 들으면서도 한마디 대꾸를 못하는 사단, 사단은 하나님 앞에 아무 힘이 없는 존재임을 역력히 보여 주고 있다.

 

연약한 인간에게 접근 할 때에는 그렇게 강한 척 하던 사단, 죄로 연약한 인간에게 위세 당당하고 능력을 과시하였던 사단, 마치 갓난아기 앞에서 팔을 걷어 올리고 고함을 지르는 거인과 같은 비겁하고 조잡한 사단의 작태를 볼 때 얼마나 가슴 벅찬 기쁜 일인가! 최후의 우리의 승리를 생각하면서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이 장면이 아닌가?

 

그러기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실감나는 말씀인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하신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이며 우리의 영혼이 용솟음치는 말씀이 아닌가?

 

애굽 제국 바로왕의 노예인 연약한 이스라엘 민족들, 그들을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 위세 당당하고 여유 있는 우리 하나님! 입으로 큰소리치고 반항하고 발악하던 바로 왕이 보기 좋게 무너져 가는 지난날의 출애굽 역사를 덧 붙여 생각하면 더 신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비겁한 유혹 자, 야비한 포악 자, 음산하고 어두움의 지배자, 저 지옥의 패배자 사단이.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땅에 내던져지는 이 처참한 모습을 우리가 생각해 볼 때 과연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생각하게 된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그 승리의 노래가 온 땅에 울릴 그날을 바라보면서 쉼 없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용사가 되어야 하겠다.

 

2. 여자의 후손 약속은 장차 구원의 약속이다.

(3: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선언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했다.

 

여기에 여자의 후손은 장차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계시하심이고 또한 그 안에서 우리 성도를 계시하신다. 후손은 한 사람만을 말함이 아니고 한 사람을 중심한 무리를 말한다. 사단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그 안에 성도들의 발을 물어 괴롭게 할 것이지만 여자의 후손은 그의 머리를 상하여 멸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은 본질상 사람은 서서 다니므로 발을 물어 아프게 하여 괴롭힌다는 말이며 그 발을 물린 여자의 후손은 그 머리를 부수게 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대로 여자의 후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땅에 던져진 사단은 땅에 붙어 예수님의 육신을 물어 십자가에 못 박아 괴롭게 하였지만 그는 죽으심을 이기시고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은 심판의 주님으로 원수인 사단의 머리를 쳐부술 것이다. 거짓의 아비, 악의 지배자의 머리를 멸하신다는 말씀이다

 

지금 우리들은 영혼은 구원받아 소망 안에 있어 기쁘지만 육신은 땅에 붙어 있기에 사단은 우리의 행위의 발을 물어 아프게 하고 넘어지게 하지만 우리 주님 오시는 그날 우리의 부활의 몸의 발로 사단의 머리를 여지없이 부순다는 사실을 믿게 하신다. 최후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 할 때에 우리에게 소망이 넘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했다.

 

(2:7-9)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사도 요한을 통하여 이렇게 말했다.

(요일5:4)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 이니라.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고후2: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3. 생명과를 먹지 못하도록 지킨 것은 영원한 관계를 가지시려는 뜻이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그들을 쫓아내셨다. 그들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 해서이다. 이유는 악인으로 영원히 존재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악인으로 영원히 존재하다면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지극히 극악한 악인만 존재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차 인간을 구원하여 함께 하시고 또한 인간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에덴에서 쫓아 내신 것이다.

 

아담에서 역사의 종말 까지 우리 인간들에게는 긴긴 역사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긴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은 정해진 기간을 통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시고 그 가운데 선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영원한 나라를 형성하신다. 그러기에 악인으로 생명과를 먹고 영원히 존재한다면 인간은 형벌의 삶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되고 하나님과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악인으로서 생명과를 먹지 못하도록 추방하신 것이다.

 

4. 황량한 땅에서 수고하게 한 것은 에덴에 소망을 두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과 하와를 공의의 법에 의하여 벌을 내리셨지만 사랑의 법으로 은혜를

베푸셨다.

(3:21-2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황량한 곳으로 추방하셨다.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가져도 만족하지 아니하는 황량한 땅. 그 황량한 땅으로 추방하신 것은 거기에 정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뒤에 두고 온 에덴을 그리워하고 생각하여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15:16-20)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탕자의 비유는 우리의 영혼을 위한 삶을 교훈한 말씀이다. 탕자는 행복한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를 내버려두셨다. 탕자는 황량한 세상에서 자신이 주려 죽을 것을 알았다. 그 고난은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5. 생명나무 실과를 없애지 아니고 감추어 둔 것은 훗날의 허락 약속이다.

하나님은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을 없애지 아니하시고 사람을 쫓아 내셨다. 인간을 영원히 버리셨다면 에덴을 없애 버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없애지 아니하시고 감추어 두셨다. 왜 무엇하시려고 감추어 두셨을까? 하나님 자신을 위헤감추신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 자신에게는 생명과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생명과를 감추어 두신 뜻이 있었다.

 

그 뜻은 훗날에 다시 주시려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계셨다. 그 생명과를 잊어버리고 절망한 인간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다. 그러기에 주님은 길이며 진리이시고 생명이신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알레테이아(αληθεια)는 감추인 것을 들어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에덴동산에 감추어진 생명과이다. 그 생명과를 역사 안에 감추어 두셨다가 때가 되어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그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6.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은혜란 말은 거저 주시는 선물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하와에게 가죽옷을 선물하셨다. 그 가죽옷은 수치를 가리우기 위함이었다. 범죄 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추해 보였다. 그 추한 모습을 가리우시려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원히 버리셨다면 옷을 입힐 필요가 있었을까? 아무리 추해도 아무 관심이 없으시다면 가리워 주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죄를 범하고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에게 옷을 입히신 것은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죄를 가리우기 위하여 가죽옷을 입혔다.

 

이 가죽은 양의 가죽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로부터 이어 받은 아벨의 제사 제물이 양인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가죽옷을 얻기 위해서는 짐승이 죽어야 했다. 죄를 범하기 전에는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죄 때문에 옷이 필요하였고 그 옷을 얻기 위해서는 짐승이 죽어야 했다. 아담의 죄 때문에 짐승이 희생된 것이다.

 

이 가죽옷을 입히신 뜻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인간이 지어 입은 나뭇잎 옷 보다 영구적인 옷이기에 가죽옷을 입히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른 이해가 아니다. 아무리 영구적이라 해도 가죽옷 한 벌로 930년은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은 930년을 살았다. 가죽옷을 입히신 하나님의 뜻은 아담의 죄를 생각하게 하여 회개하게 하려 하심이다.

 

선하고 착한 아담은 자기의 허물을 가리우기 위하여 죽은 양을 볼 때마다 자신 때문에 희생되었기에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 930년을 살았으니 1년에 한 벌씩 계산하면 930벌의 옷이 있어야 하고 930벌의 옷을 얻으려면 930마리의 짐승이 죽어야 했다. 이 양을 바라볼 때마다 자기를 죽이지 아니하시고 양을 희생시켜 허물을 가리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희생의 제사의 기원이 되었다.

 

이 양의 희생은 장차 인간을 대속 할 참 어린양 구주를 계시하신 것이다. 장차 구주가 오셔서 이 양처럼 희생함으로 인간의 죄를 속하고 감추어 놓은 에덴을 다시 개방하여 우리의 생명과 삶을 회복시키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었다.

그러기에 이 계시를 알고 믿은 아담과 그의 후손 아벨과 셋. 그의 후손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스라엘 민족들, 이들은 희생의 제사를 생명처럼 간직하였고 자신들의 죄 때문에 희생되는 양을 보면서 약속된 구주가 장차 오셔서 이 양처럼 죽음으로 속죄할 것을 믿었고 이 믿음의 표현이 감사의 제사로 드려졌던 것이다,

 

그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전에 믿었던 자들의 법적 구원이 이루어지고 에덴에서 추방된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이방인들도 부르셔서 그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하신 것이다. 그 구주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인간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 사람들은 장차 구주가 오셔서 양처럼 희생하심으로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을 믿었고 우리 신약 시대 사람들은 오신 주님이 이미 용서하여 주신 것을 믿는 것이다, 구약시대 성도들이 오실 구주를 믿고 감사하며 섬기는 것이 제사이었고 우리는 오신 구주를 믿고 감사하여 경배하는 것이 예배이다, 에덴에서 계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해결하시고 그 감추어 두신 에덴의 길을 알려 주시고 따라오는 자에게 생명나무의 실과를 약속하시고 그 사랑을 거부하는 자들은 정하신 마지막 날에 오셔서 심판하시고 심판 받은 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될 것을 선언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죄를 범한 아담을 공의의 법으로 형벌을 선언하셨지만 사랑은 변하지 아니하시고 악인으로 영존하지 않게 하시려고 생명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게 추방하시고 에덴을 생각하고 돌아오게 하시려고 황량한 곳으로 추방하시고 다시 주시려고 에덴을 없애지 아니하시고 감추어 두시고 또한 양을 대신하여 허물을 가리우시고 양의 희생을 통하여 구속의 계획을 알려 주셨다, 오실 구주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구약시대 성도들 오신 구주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약시대 우리들이나 모두 그 구주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출처 : 조재훈목회자료
글쓴이 : daum jhoon29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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