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은사 와 통역 은사.
사도행전 2장 4절-8절
1. 방언의 은사.
방언이란 말은 라손(ןֹוׄשלָ ), 솨파(ההפָשָ ), 글로싸(γλωσσα)디알렉토스(διαλεκτο ς )란 말인데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여러 민족의 언어 히브리 인들의 입장에서 각 나라의 언어를 의미한다. 하나는 격렬한 감정에서 비롯된 자기 이성이나 감정으로 통제할 수 없는 언어로 황홀경이나 무아지경에서 난잡한 말이라는 의미이다. 공동 번역에서는 이상한 언어라고 번역했다.
구약성경에도 방언(글로싸 γλωδδα)이란 말이 많이 나타나고 신약 성경에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모든 방언은 각 나라의 언어 각 지방의 언어를 의미했다. 고린도 전서에 나타난 방언이란 말은 글로싸(γλωδδα)말인데 글자의 의미로는 신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고린도 전서 14장에 방언에 대해서 설명한 바울의 말을 살피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제제를 요했다.
신약에 접어들면서 새 방언이 나타나는데 이 새 방언은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막16: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했다.
여기에 새 방언이란 하나님의 나라 메시지를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새 방언이란 구약의 율법이 아닌 새로운 언어 즉 신약의 복음을 말한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방언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행26:14)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21:40)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위의 말씀은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실 때에도 히브리 방언으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
(행19: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고전14:39)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행2:4-8)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행2: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강림 직후 베드로의 설교에서 나타난 방언은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언어의 기적이다. 베드로와 각 제자들이 자기 나라 언어로 설교하고 복음을 전했는데 각 나라 사람들이 자기들의 방언으로 듣게 되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자들이 하는 말이 “저들은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우리가 각 사람의 난 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했다.
갈릴리 사람들은 어부들이고 교육 수준이 낮은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다른 민족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놀란 것이다.
이 언어의 기적이 계속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이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이 오실 것을 예언하셨는데 성령을 받지 못한 이들은 이 언어의 기적이 성령강림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는 어디에서도 이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바울을 사도로 세운 이유가 있다. 바울은 히브리인이면서 로마인이다. 그러기에 히브리 언어도 유창하고 헬라의 언어도 유창한 사람이다. 또한 언어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하여 히브리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히브리말로 이방인이 있는 곳에서는 헬라말로 설교하였다. 그 당시에 헬라 언어가 세계적인 통용어이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수제자이다. 그렇다고 베드로를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쓰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의 방언은 각 종 민족의 언어 뿐 아니라 종교적인 신비적인 언어를 말한다. 성령강림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성령이 강림하심을 인식하고 체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고 영적인 분별 기준이 없는 때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은사들을 주셔서 성령이 함께 일하심을 인식하여 힘 있게 일하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성경이 기록되어 있기에 얼마든지 분별할 수 있고 성령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한 때에는 신비주의자들로 하여금 방언이 교회의 문제의 하나였다. 심지어 방언을 받지 아니하면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한창 방언의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심지어 인위적인 방언 훈련을 시켜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이 바른 가르침이 아니다.
인위적인 방언 운동은 오히려 성령을 속이는 일이며 성도를 속이는 거짓 행위인 것이다. 방언과 구원과 연관시키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잘못된 것이다.
첫째: 방언은 은사중의 하나이다. 이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에 내가 구한다 해서 구하는 사람마다. 모두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기에 영적인 욕망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둘째: 방언을 받아야 성령 받았다고 말하는 주장도 그릇된 주장이다. 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여러가지(고전 12:7-11)이다 이 모든 은사는 성령께서 주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방언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방언도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 예수님의 제자들을 모두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 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기도하게 하신 것도 아니다. 병자를 위하여 기도한 것도 그 나라 방언으로 기도하였다. 베드로도 자신의 나라 언어인 히브리말로 설교 하였다. 제자들 가운데도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은 제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주님께서도 기도하실 때에 방언으로 하지 않으셨다.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은사가 가장 충만한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주님의 기도는 인간에게 본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제자들도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방언과 구원과 관계가 없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어도 방언을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거나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를 은사 중에 가장 쉽게 나타나기 때문에 쉽게 접하는 은사이다.기도하는 즉시 받는 은사이다. 그러기에 성령이 함께 하심을 쉽게 확신할 수 있다. 지금도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하는 성도들에게 이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를 주시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기 위한 기도의 직분임을 알아야 한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은사는 거두어 가신다. 방언뿐 아니라 어떤 은사든지 그 받은 은사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거두어 가신다.
(행19:2-7)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이르렀을 때에 이들은 성령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 바울이 성령을 받았느냐 물으니 듣지도 못했다고 했다. 바울이 성령에 대하여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고 안수하였더니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고 했다. 성령을 받는 증거가 방언으로 나타나고 예언으로 나타났다. 그 때에 성령을 받은 사람의 약 12사람쯤 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은사 문제 때문에 시끄러운 교회가 고린도교회이다. 특히 고린도 교인들이 이 방언의 은사로 자랑삼아 교회를 시끄럽게 하였다. 교만하여져서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멸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분열의 요인이 되고 믿음이 약한 성도는 신앙이 위축이 되었다. 그러기에 방언의 은사를 어떻게 관리 할 것인가를 교훈 한다.
고전12:7.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4: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12.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모든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것이며 주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므로 교회에 유익하도록 힘써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방언은 믿는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덕을 세워야 한다. 덕을 세운다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신앙에 해를 끼치지 않고 유익을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익이 없으면 말할 것이 없고 덕을 세우지 못하면 잠잠하여야 한다.
고전14: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9.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고전14:11.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고전14: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 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일만 마디 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 다섯 마디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허공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다고 했고 또한 성도들에게 야만인이나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 야만인이란 말은 영적인 언어폭력 자라는 말이다. 그리고 교회에 처음으로 나온 영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은 사람이 모처럼 왔을 때에 그들로 하여금 미친 사람들이라는 평을 받게 되므로 성령의 신령한 은사가 나의 영적인 무지와 부도덕한 행동으로 모독이 된다는 말이다.
고전14: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고전14:25.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방언의 기도는 영이 기도하기는 하지만 마음에 열매가 없다고 하였다. 즉 신앙에 유익을 위한 인격적인 변화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 마음 안에 숨어 있는 말 못할 비밀이나 다른 사람의 말 못하는 비밀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기 위하여 방언을 주셔서 받으신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를 주실 때에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죄악을 숨길 수 없는 하나님이심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이다.
(고전14:27-28)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만약 교회에서 방언을 말하려 하거든 무질서하게 하지 말고 두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할 것이요 반듯이 통역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인데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잠잠하라고 하였다. 민족적 방언이나 신비적 방언이나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방언을 한 사람이 통역하면 잘못될 소지가 있으니 두 세 사람이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통역의 은사 받은 사람이 없으면 통역 자 주시기를 기도할 것이요 통역 자가 없으면 잠잠하라고 하였다.
고전14:39-40.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그러나 누구든지 사모하는 자가 있으면 금하지 말고 예언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금하지 말라고 하였다. 다만 질서 있고 규모 있게 어지럽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신비적인 방언기도를 할 때가 있다.
(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마음도 헤아리고 계신다. 그런데 방언으로 말한다고 해서 들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실상 방언기도를 요구할 이유가 없다. 방언 기도이든 일반 기도이든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비적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할 때가 이다. 그것은 기도하는 자의 비밀을 말할 때에 다른 사람이 알아들어서는 안 되는 기도가 있다. 그러나 기도하는 자가 자기 절제를 못하고 말하게 되면 덕이 안 되기 때문에 그 때에 언어를 절제시켜 방언을 말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신비적인 방언 기도는 하나님께 비밀을 말할 때에 필요하기에 주시는 은사이다. 그러기에 이 방언의 은사로 진문 직임으로 삼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2. 통역의 은사.
통역이란 말은 에레메네이아 (ερημηνεια)란 말인데 통역, 번역. 해석, 등을 말한다.
바벨탑 이후 역사는 어느 시대나 언어가 서로 달랐다. 한 나라에서도 언어가 서로 달랐다. 초대 교회 당시 로마 제국 안에서 많은 민족이 속국 되어 살았다. 그러기에 각각 민족 언어가 달랐다. 히브리 인들도 히브리 언어를 했다. 그 여러 민족인 한 교회에 모이게 되므로 언어 통일이 될 수 없고 가르치는 것도 기도 하는 것도 혼잡스러웠다. 그래서 가르치는데 남에게 전하는데 통역 자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통역의 은사가 있었다. 그러나 통역사가 없으면 예언도 잠잠하라고 했다.
여기에 통역의 은사는 신비적인 방언 통영이 아니라 각 나라 민족 방언을 말한 것이다. 그러기에 같은 어를 상용하여 의사소통이 되는 곳에서는 통역의 은사가 필요가 없다.
[고전 14:26-30]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이 아랍인들의 언어로 기도한다고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며 한국 민족이 영어로 기도한다고 들어 주는 것이 아니며 지상에 사는 인간들이 천사의 언어로 기도한다고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기도의 실력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기도의 지식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실한 믿음의 간절한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통역자 까지 두어서 기도하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통역자는 언어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필요한 은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기도한 기도를 인간들에게 통역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는 더욱 그렇다 오히려 하나님께 통역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당시 세계는 제국에 속해 있고 고린도는 로마 제국 안에 속한 대 도시이기 때문에 각종 민족들의 모여 살았다. 그러기에 교회에도 여러 민족이 모였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통역자라 필요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회 방언은 각 지방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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