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스크랩] 속죄론 연구

하나님아들 2012. 7. 25. 15:28

 

속죄론 연구

 

 

 

  Ⅰ. 서   언           
  Ⅱ. 안셀므스의 전통적인 견해의 객관적 속죄론
  Ⅲ. 아벨라르(Peter Abelard)의 주관적 견해의 속죄론
  Ⅳ. '고전적', '극적' 견해의 속죄론 및 아울렌의 합리적 이론의 가능성
  Ⅴ. 결   언

 

 

 

Ⅰ. 서  언

 

  속죄라는 정의는 그것의 용어를 해석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속죄라는 용어는 '카바르'이다. 이말의 뜻은 '덮는다' 혹은 '숨긴다'는 의미르 ㄹ지니고 잇다. 이 말이 명사로 사요오딜 때에는 '덮는일'을 의미한다. 한편, 이말을 신학에서 사용할 때에는 배상이나 혹은 보상이라는 개념이 의미를 지닌다. 한편 헬라어로 속죄라는 용어는 칼탈라게(katallage)이다. 따라서 이말의 뜻은 '화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를 말하는 것이다. 한편, 영문에서 속죄라는 단어는 '둘을 하나로 만든다'(atonement)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결합시킨다', '화해시킨다는', '공식적으로 사과하다', 그리고 '형벌을 타인에게 대치하라'는 뜻이 포함된다. 따라서 구약의 용어에서 해석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창3:21)서 하체를 덮으므로 수치를 면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히브리어의 속죄에 대한 용어는 그 용어 자체가 속죄의 정의를 잘 해석해주고 있다.
  속죄 (atonement)는 앵글로 색슨어의 기원을 지닌 몇 안되는 신학용어 가운데 하나로 그 뜻은 '한가지 결과에'(at-one-ment)라는 뜻이며, 사람의 죄라는 비극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사59:2),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놓은 뒤(골1:21) 그 둘을 다시 하나로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실제로 헬라어의 속죄에 대한 해석은 화해(the reconciliation)의 뜻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화해는 상호간에 조건을 보고 그 조건에 따라서 화해를 결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속죄의 정의는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된 것을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사역을 통해서 화해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화해시키는 사역을 속죄라 부른다. 따라서 이 교리가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이러한 속죄의 방법으로 구약시대는 제사장제도를 두고 동물을 통해서 속죄제를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림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죄로 인하여 원수가 되었던 것을 화해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속죄를 바라보는 어느 특정한 방식을 정통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속죄교리에는 기독론의 두 본성 교리와 비슷한 데가 없다. 그 결과 "그렇게 오래전에, 그리고 그렇게 먼 지역에서 발생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오늘날 이곳에 있는 나를 구원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리스도인들의 대답하는 방식도 여러가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사 20세기 동안에 나타난 다양한 속죄이론들은 대체로 다음 세가지 경향으로 요약될 수 있다.
 
Ⅱ. 안셀므스의 전통적인 견해의 객관적 속죄론

  켄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므스(1033경-1109)는 이탈리아 아오스타에서 태어나 청년시절에 집을 나와 몇년동안 방랑을 한 그는 26세에 노르망디에 있는 베크대수도원에 정착하여 란프랑쿠스의 영향으로 수사가 되었다. 60세에 그 대수도원을 떠나 켄터베리 대주교가 되었으며, 생을 마칠때까지 그 직책에 있었다.
  전통적인 견해로 속죄론을 철저히 사색에서 교리로 서술한 시작은 칸터베리의 안셀므스에게서 찾을 수 있고 그는 교리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느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e?)란 책에서 전개한 만족설(滿足說)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업적은 마귀를 이긴 일이라는 견해를 전적으로 극복할 수는 없었을 지라도 진압할 수 있었다. 안셀므스는 구원을 육체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더 오랜 견해 대신에 죄책에서의 구원이라는 그의 가르침을 전개시켰다. 특히 그는 "객관적인" 속죄론을 가르쳤는데 그것에 의하면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속죄행위의 대상이라는 것과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서 만족시킴으로써 하느님께서 화해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안셀므스 그는 죄를 하느님의 엄위에 대한 모욕으로 보았다. 그리고 신인(神人)이 십자가에 달여 이 모욕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와 비슷한 노선에서 생각하기를, 죄인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어김으로써 초래한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치렀다고 하였다. 이 안셀므스 이론의 강점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점과, 사죄의 과정에서 도덕법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Ⅲ. 아벨라르(Peter Abelard)의 주관적 견해의 속죄론

  안셀므스와 그의 젊은 동시대인 아벨라르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며 후자를 속죄론의 소위 "주관주의"적 견해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오랜동안 교리사 공부의 정석이었다. 이런 주장은 대체로 건전한 것이다. 아벨라르에게 있어서 흥미있는 일은 라틴형의 속죄론이 완전한 신학적 서술을 얻지마자 비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같이 하여 시작된 논쟁은 오늘날까지 줄곧 계속되는 것이다.
  아벨라르(1079-1142)는 스콜라 철학자, 신학자로 브르타뉴팔레에서 태어나 유명론자 로스켈리루스, 극단적인 실재론자 샹포의 월리엄, 랑의 안젤므스에게서 차례로 수학하였다. 뛰어난 논쟁가이며 강연자로서 처음에는 변증학으로, 나중에는 신학으로 많은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아벨라르는 안셀므스의 이론과 함게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의 표상들과 그 이원론적 전망을 공격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속죄사상을 어던 모양으로든지 악마와 관련시키는 것을 거부하였다. 다른 편으로, 그는 만족 행위란 사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만일 아담의 적은 허물이 그런 만족행위를 요구한다면 그리스도를 반항한 죄는 더 큰 만족행위를 요구할 것이 아닌가. 이같이 그는 다른 각도로 연달아 생기는 무제를 공격하였다. 그는 특히 그리스도가 사람의 마음속에 응답적 사랑을 일으키는 큰 교사요 모범이라고 강조한다. 이 사랑이 화해와 용서가 의거하는 근본이라고 한다. 그는 여기서 눅7:47을 인용한다. "사랑함이 많은 자에게 용서함이 많다." 사람들 안에 촉발된 이 사랑은 아벨라르에게는 공로를 지우주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도 역시 공적이라는 전통적 라틴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비록 그의 가르침이 이같이 주관적주의적성격을 띠지만 그가 이선을 시종 일관하게 견지하였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벨라르는 그의 말대로 하면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중재했기 때문에 사람의 공로를 완성하게 된 그의 공로를 중요한 지위에 두어야 한는 것이라고 느꼈다.
 아벨라르는 속죄를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끼친 효과라는 면에서 본다. 하느님이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사랑을 묵상할 때 사람음 감동을 받아 회개를 하고 다시 그분을 사랑하게 되고, 이로써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것이 주관적이다.

Ⅳ. '고전적', '극적' 견해의 속죄론 및 아울렌의 합리적 이론의 가능성
 
  아울렌은 속죄론을 '고전적', '극적'견해로 부른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속죄를 속전(ransom)으로 말하는 성경 본문들에 크게 의존하며, 죄인들이 그들의 죄 때문에 당연히 사탄에게 예속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기 아들의 죽음으로 그들의 구속의 값을 지불하셨으며, 사단은 죄인들 대신에 예수를 받았지만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부활절에 예수는 원래의 포로들이나, 또한 그들을 위해 치른 속전도 사탄에게 남겨두지 않은채 당당하게 살아나셨다. 아울렌은 교부들이 이 이론을 표 현할 때 기괴한 표현을 쓰기는 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진정에서 우러난 승리에 대한 언급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속죄의 본질을 죽음과 악의 모든 세력에 대한 승리의 과정으로 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승리가 중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이것을 이야기 전체로 보지는 않는다.
  아울렌은 객관적 견해와 주관적 견해의 형식에서 합리적인 성격의 비교를 첨가하려 하였다. 고전적 견해는 고립해 있고 나머지 객관적, 주관적 두 견해는 서로 대립일련의 개념이지만 이 두 견해는 이율배반의 대립된 사항을 신학적이거나 심리학적인 방향으로 합리적인 해결점을 갖음을 말하였다.
 고전적 견해는 많은 반박을 받게되는데 그 첫번째 이유는 18,19세기의 신학논쟁 배후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계몽주의 시대의 신학자들은 정통주의의 공인된 적으로 그들의 첫 공격대상은 속죄론의 만족설이었다. 그것을 기독교 안에 존속하게 된 유대주의의 잔재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 논쟁이 속죄의 교리사를 바로 해득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두번째 이유는 신학자들이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를 라틴적 견해와 혼동하게 되면서 이다. 고전적 견해와 라틴적 견해를 이같이 구별하지 못하게 된것은 둘이 함께 같은 계통의 개념이나 비유등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죄론에 사용된 "희생", "만족", "그리스도의 공로"등의 술어를 사용하려면 면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세번째 이유는 정통신학을 변호하는 보수신학자나 그것을 공격하는 자유주의신학자는 함께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속죄론이 단지 낮은 차원의 신학적 견해요, 비유나 상징적인 표현을 제공할 뿐 잘 다듬어진 신학적 체계에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끝으로 18,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원론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기에 고전적 속죄론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고전적견해의 속죄론은 '이원론적'이고 '극적'이었다.
  고전적 견해의 그 모순이 루터에게서 가장 심한것을 본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 모든것을 지배하는 자이시며 동시에 악한 세력과 투쟁한다는 점에서이다. 이 세력들은 악한 세력들이고 동시에 하느님의 죄에대한 심판을 수행하는 자다. 하느님은 동시에 화해하는 자며 화해받으시는 자다. 사람도 그의 것이고 진노도 그의 것이다. 사랑은 진노를 이기지만, 또한 사랑이 죄를 정죄하는 것도 절대적이다. 사랑은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고 이성과 법에 반대해서 움직이며 사람을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거나 인간의 공로를 고려하는 일 없이 의롭다 인정하신다. 그런데 동시에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요구는 극단에까지 철저화시킨다. 이것들은 논리적 모순을 이룬다. 예를 들면, 루터가 그리스도인을, 동시에 의인이요 또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라고 말할때 그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같은 때와 같은 의미에 있어서 무죄하고 유죄하다는 것이 아니다. 두 다른 원칙이 그 사람에게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두 관점에서 관찰된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을 항하여 살며 의로다 인정 받았다. 다른편으로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을 가치없는 자다. 그가 깊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는 자기의 죄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루터가 다시 말한것 같이 "누구든지 더 경건할 때에 큰 투쟁을 느끼는 것이다".
  이 개념을 순전히 합리적 사상체계에 억지로 맞추어 넣으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것은 종교적인 깊이를 빼았지 않고는 성공하지 못한다. 신학은 외견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대립을 결합시키고서 살며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부시대의 논쟁에서 성육신의 교리와 구속의 교리가 신학을 사변적인 형이상학이나 관념론 철학으로 변질시키려고 했던 당시의 경향을 막는 방벽과 같이 엄연히 서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루터에게서 이 기독교 신학의 구조가 더 명확한 형태로 나타났다. 모든 논점에서 루터의 신학은 합리주의적 스콜라주의를 강하게 배격하였다. 그에게는 계시된 하느님은 이성의 하느님과 전혀 동일시 할 수 없었다. 이 논점은 우리가 계시된 하느님은 동시에 "숨어계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입중하였을 때 가장 밝히 이해되었다. 숨어계신 하느님은 인간 사상의 범주로는 해득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틴교회는 전혀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함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을 집중한다. 하느님의 정의의 지시를 받으며 정의가 지시하는 한계 안에서 행동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성과 법, 합리성과 정의는 함께 제휴해 간다. 그러나 루터가 기독교 신앙에 관한 사실에 있어서 최후 결정적인 것이라고 인정하기를 거절한 것이 바로 이 둘이다. 이것은 스콜라 신학이 변증법적 합리적 기초위에 건설되었다는 것을 단지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 문제에서 변증법적 방법이 최후의 단언을 말할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란 말이다. 하느님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포괄적인 설명을 마련해 주며 이 세상뿐 아니라 장차올 세계의 모든 문제를 대답하고 모든 수수께기를 풀어줄 신학을 건설하려는 기도가 스콜라 신학자들로 진행되었다.
  자유주의 프로테스탄트즘의 자유주의 신학은 속죄론의 견해를 배경으로 하는것인데, 그것이 공격하는 스콜라주의적 신학에 여러 방면으로 대립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스콜라주의의 합리주의적인 이념은 용납하였다. 그것은 속죄론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고전적 견해에 많이 나오는 대립된 사상들을 완화시켜 버렸다. 모든것이 합리적으로 명백하게 설명되었다. 하느님의 사랑까지도 합리화 되었다. 그 이상으로 이 자유주의신학은 철두철미적이요 진화론적인 세계관의 빛 아래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을 관찰하여야 한다. 이 사실은 형의상학을 불러드리는 일을 한 릿츨과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마차가지로 신학을 억지로 합리주의적 세계관의 형틀에 넣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합리적 세계관은 보편주의의 인기가 지시하는대로 장래의 세계도 포섭하려고 한다.
  이런 고려는 왜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가 억제와 경멸을 받게되었는가 하는 최후의 이유를 우리에게 해명하여 준다. 신학이 만사를 전적으로 합리적인 설명으로 설명해 보려고 나선다면 그것을 모순 투성이요 조잡하고 원시적 지식으로 진리를 표현하려는 것이라고 하여 저 고전적 견해를 밀처버릴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더 정확하고 적당한 신학 서술과 바꾸어 놓으려고 한것이 아울렌의 합리적 이론의 시도였다.
 
Ⅴ. 결  언
 
  위 세가지 이론은 각각 가르쳐 주는 바가 있다. 각 이론은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특히 아벨라르의 주관적 견해는 그리스도가 모범을 보이신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으로 보며, 참된 구원은 죄인들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세가지 이론을 합쳐 생각하면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위해 하신 위대한 사역을 조금이나마 아는데 도움이 된다.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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