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지식
들어가는 말:
오늘을 알려면 역사를 알아야 하고 유럽을 알려면 로마를 알아야 한다. 유럽과 더불어 현대사의 주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북아메리카, 즉 미국은 바로 유럽 문명의 후예이므로 결국 로마의 역사는 서양 문명 전체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로마시대부터 세계는 남북 아메리카를 제외한 전체가 교류를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세계와 유럽, 중동 세계는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로마의 역사와 함께 ‘지구촌의 역사’도 시작된 것이다.
신약성서의 역사적 배경은 바로 이러한 헬라 문화의 옷을 입고 로마라는 모자를 쓴 채 방랑하는 유대민족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신구약 중간기의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그들의 변천사를 통해 오늘의 신약을 이해해야 한다.
** 이스라엘 민족의 변천사 – 디아스포라 유대인 **
헬라어로 디아스포라(Diaspora)의 뜻은 ‘흩어진 사람들’로, 특히 팔레스타인과 그 이외의 땅에 분산, 이주되어 있는 유대인, 또는 그 거주지를 가리키는 용어다. 신약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남북지역이나 각국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만날 수 있다.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인과 상종도 하지 않던 남유다의 유대인들이 신약시대에 오면 북부 사마리아인들의 땅에 살기도 하고, 사마리아인들이 남유다의 땅에 살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모압, 암몬 등의 이방 땅은 물론 지중해 연안과 이집트 땅, 그리스, 터키, 로마와 심지어 메소포타미아, 러시아 땅에도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유대인들은 갑작스레 신약에 등장한 인물이 아니라 신구약 중간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 흩어진 유대인들이다. 과연 어떻게 그리 되었을까?
1) 북이스라엘 시대의 유대인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하여 19명의 왕들이 역사를 이어오다가 BC 722년 호세아 때,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망하여 포로로 잡혀갔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북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사라져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앗수르의 정략적인 결혼정책에 의해 이방인들과 결혼을 하고 이방신들을 섬기면서 점차 이스라엘 민족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변질되어가는 북이스라엘 사람들에 비해, 당시 신앙의 정통성을 이어간 남유다 사람들은 변질되어가는 그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조롱하며 자신들과 구분하기 시작했고, 그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 함께 자리도 하지 않고 서로 상종조차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2) 남유다 시대의 유대인
남유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르호보암으로부터 시작하여 20여 명의 왕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왔지만, BC586년 시드기아 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망하여 포로로 잡혀갔다. 이것 역시 남유다라는 국가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들은 포로로 잡혀갔다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다시 민족적 중흥을 꿈꾸었으나, 여전히 그들은 바벨론 속국에 불과했을 뿐 국가적인 조직체는 아니었다.
3)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 이후의 유대인들
북이스라엘 멸망 이후, 성경은 유다 중심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여러 문헌들과 성서의 내용들을 바탕으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북이스라엘이 완전히 이방신을 섬기며 이방 민족화 되어 간 것은 아니었음을 발견한다.
그들은 바사제국의 말기 즈음에 오랫동안 폐허가 되어 갔던 세겜(그리심산)을 중심으로 그들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믿는 종교와 문화의 꽃을 피워갔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포로시기를 마감하고 귀환한 백성들이 나름대로 살 곳을 찾아 여기저기 흩어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
-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서로 혼합되어 갔다.
이 때 남유다의 예루살렘에 살았던 유대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북쪽 이스라엘 지역으로 흩어져 나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열강들에 의해 통치의 역사가 바뀌는 신구약 중간 시대의 400여 년을 거치면서 남북 이스라엘은 함께 핍박 받는 한 땅덩어리가 되었다.
그 400년의 역사가 흐른 뒤 우리는 신약성서를 대하고 있다. 신약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곳은 북방 이스라엘의 땅인 갈릴리였으며, 신약에 자주 등장하는 요단 동편의 베뢰아지역(모압), 데가볼리(갈리리 북동쪽 이방땅), 지중해 연안의 두로와 시돈 지역까지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음을 알 수 있다.
-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과 사마리인들은 서로 교제하지 않았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여겨졌다(눅17:18). 심지어 사마리아인이란 말이 미친사람에게 붙여지는 모욕적인 단어로 사용될 정도였다(요8:48).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그들의 조상이라 불렀으나(요4:12) 유대인들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심없이 이웃 사랑에 대한 예로 유대인의 행위가 아니라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위를 든 것은 실로 엄청난 선언이었으며, 그 비유는 민족적인 증오심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배경이었음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러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뿌리깊은 반목으로 인한 분열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 극복 되었고, 이것은 사도 바울 신학의 정수인 로마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 외국으로 퍼져나간 디아스포라 유대인
북이스라엘 멸망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유대인들의 흩어진 공동체는 BC 586년 남유다의 멸망으로 그 세계를 넓히게 되었다. 국가의 몰락과 함께 유대인들은 포로가 되어, 혹은 보다 나은 삶의 환경을 쫓아 자진해서 바벨론으로, 애굽으로, 다른 이방의 나라들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흩어진 유대인들이 400여 년이 지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지중해 전 영역에 그들의 독자적이고 독특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게 된다.
특별히 디아스포라 유대인 사회의 영향력은 로마에서 실로 강력한 것이었는데, 이는 그들이 당시 로마사회에 편입하여 들어옴으로써 그 힘이 증대되었고, 또한 유대인들은 자녀가 많은 것을 축복으로 알고 자녀를 유기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엄격하게 금지했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 보다도 훨씬 더 급격하게 숫자가 증가되었다.
- 외국으로 퍼져나간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문화를 형성함
이들 디아스포라의 중심지는 로마제국의 3대 도시인 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이다. 신약시대에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보다도 더욱 많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이방 세계에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안으로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과 헬라의 문화를 결합한 내적인 통치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밖으로는 로마제국의 통치라는 이중적인 구조 속에서 살면서 본토 유대인 공동체보다 훨씬 문명화된 헬라문명 속에서 살게 되었다.
바울이 쓴 로마서의 수신자들은 바로 이들이었고 빌립보, 고린도 등도 바로 이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다.
- 시대적 상황
1) 로마의 치하
기원전 63년 팔레스타인은 폼페이우스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편입된다. 로마는 각 원주민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해 주면서 이 다양함을 전제로 전체를 포용하는 고도의 정치술을 쓴다.
그래서 유대교도 계속 허용되었고 (유대인들은 심지어 병역도 면제 받았다), 이에 따라 아직까지 유대교 내의 작은 분파로 여겨졌던 기독교는 로마의 그러한 관용정책 덕분에, 그리고 로마가 확보한 정치적인 안정(Pax Romana), 통일국가, 잘 발달된 도로망, 대도시들을 이용하여 급속히 전파된다.
2) 유대전쟁과 성전 멸망
유대땅에서는 AD 50년대 이후부터 열심당을 중심으로 로마에 항거하는 저항의 물결이 점차 거세진다. 결국 AD 66년 유대 전역에서 로마에 대항하는 전면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 항쟁은 로마의 군사력 앞에 처참히 분쇄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예루살렘 성전 파괴: AD70년).
그 후 3년을 끌며 최후까지 저항했던 사해 근처 마사다 전투를 끝으로 팔레스틴 지역에서 저항운동은 비극적으로 종결된다. 이로 말미암아 팔레스틴 본토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이 당시 로마 전 제국으로 흩어진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에 본부를 둔 유대인 중심의 기독교는 급속히 초대 교회사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방인 중심의 기독교가 상대적으로 기독교 전파의 중심이 된다.
3) 바리새인 중심을 재편된 유대교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종교적, 정신적 지주였던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AD 70년 이후부터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면서, 그 율법이 유대교를 계속 결집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율법해석의 문제에서 원래 평신도 운동이었던 바리새인파들이 주도권을 잡고 향후 유대인 사회의 핵심적인 계층으로 등장한다. 또한 여러차례의 독립전쟁으로 자신들의 입장과 유익을 따라 이합집산으로 파당을 형성했고 AD70년 성전이 파괴되면서 독립을 추구했던 유대교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기독교 간의 민족적 갈등이 심화되어 서서히 유대교와 기독교가 나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유대교가 당시의 회당에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축출하면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초대 기독교의 형성은 유대교, 헬라, 로마가 결정적인 배경이 되어 형성되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팔레스틴 유대인을 시작으로 하고 헬라의 인물들을 바탕으로 결국은 로마를 통하여 유럽 전체로 뻗어나간 것이다.
- 정치적 상황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강대국 가운데 다섯번째인 대제국 로마는 강력한 법으로 통치하는 법치주의 국가였다. 이러한 로마의 통치하에서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는 정치적으로 단호했지만 그 외의 면에서는 자치권을 많이 부여하는 문화정치를 폈으며 그런 맥락에서 비교적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소지가 적은 지역에는 분봉왕(예: 헤롯)을 두어 다스리게 했고, 나머지 지역에는 총독(예: 빌라도)을 파견해서 강력하게 통치하였기 때문이다.
- 사회적 상황
이스라엘의 사회적 상황을 보면 로마에게 정복당한 지역으로 복잡한 인적 구성을 가진 혼란한 사회였다.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만 구분될 뿐이지 정치적으로는 주변 다른 민족과 똑같은 식민지 백성이었다.
하지만 돈이나 혹은 다른 방법을 통하여 로마 시민권을 산 사람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사회는 한마디로 갈등 그 자체였다. 그 갈등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 정치적 갈등: 로마 권력층과 독립투쟁 세력 간의 갈등
- 경제적 갈등: 부유층과 가난한 계층 간의 갈등
- 종교적 갈등: 기득권세력(사두개파)과 비판세력(바리새파) 간의 갈등
- 문화적 갈등: 본토 유대인과 헬라파(디아스포라) 유대인 간의 갈등
- 영적인 상황
종교적 형식주의가 굳어져 가는 한편 영적 갈망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 상황이다. 헬라의 통치자(셀류크스)를 몰아내고 성전을 회복했던 마카비안들은 왕이 되어 ‘하스몬 왕조’를 창설하고 이스라엘의 지배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무너진 대제사장의 전통을 아론의 후손도 아닌 자신들이 잇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면서 왕권을 당시의 거부였던 에돔의 후예인 헤롯에게 넘겨주면서 정치권은 헤롯에게 넘어갔고, 유대인들은 로마가 비교적 자치권을 인정해 주었던 종교권을 거머쥐고 기득권을 유지해 나갔다.
이들을 옹호하던 무리들이나(대제사장, 사두개파, 서기관), 비판하는 무리들이나(바리새인) 모두 세속주의, 형식주의로 변해갔고 백성들은 영적, 심적, 육적으로 굶주리고 목말라 하던 때였다.
- 문화 및 사상적 상황
전통적인 히브리적 사고와 이와는 전혀 다른 헬라적 사고가 부딪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유대주의가 헬라사상에 의해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고 이 두개의 전혀 다른 문화와 사상이 서로 부딪치는 가운데 지중해 연안의 각 민족들의 사상까지 가세해서 큰 혼돈이 일어나고 있었다.
- 히브리적 사고: 신 중심, 관계 중심, 느낌 중심, 의미 중심, 동적인 사고
- 헬라적 사고: 인간 중심, 개체 중심, 논리 중심, 사실 중심, 정치적, 공간적 사고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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