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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2강의: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16. 3. 23. 21:35

 

제2강의: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변증학 (학부)
소피스트 | 조회 150 |추천 0 | 2010.09.06. 08:52

 

 

 

제2강: 기독교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변증학은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되어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는《종교철학 담론》-5장을 참조하라). 우리는 왜 세계관을 공부해야 하는가?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한번 정의를 내려 보라. 뉴욕의 무역빌딩 폭발 사건인 911사건도 일종의 세계관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 세계관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믿음과 신념은 세계관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사고에서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다양한 종교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세계관에 의해서 인간의 삶이 결정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관에 대한 정의, 신을 믿는 세계관 그리고 세속적 세계관으로 구분하여 공부해 보려고 한다.

 

 

(1) 세계관이란?

 

넓은 의미에서 세계관은 세계를 보는 관점이다. 어떻게 세계를 보는가에 따라서 한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에 따라 삶의 방향과 목적을 설정한다. 마치 선글라스의 색상과도 같아서 어떤 색상으로 세계를 보는가에 따라 세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이다. 세계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이에 의해서 달라지는 것이다. 원래 세계관(Weltanschauung, view of world)이란 말은 1780년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unel Kant)가 <판단력 비판>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세계관은 “본체를 그 근저로 삼고 있는 단순한 현상과 그것에 대한 직관”으로 정의된다. 칸트 이후 다양한 철학자들이 세계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그들 중, 괴테, 훔볼트, 셸링 등의 철학자들이다. 쾌테(Goethe)는 세계관을 “세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는 세계관을 세계에 대한 시각적인 직관으로 이해했다. 훔볼트가 시도한 정의는 일종의 “세계상”이라고 보인다. 그리고 셸링은 세계관을 “보편적이거나 객관적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이고도 주관적인 것”으로 보았다. 철학자들에 의해 시도된 세계관을 종합하자면, 세계관이란 일종의 인생관, 사고방식, 철학, 관점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보인다. 그러면 세계관은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

 

첫째, 세계관이란 삶의 방향을 제공한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결정하기에 중요하다. 그래서 세계관이란 우리의 삶을 일관성 있게 한다. 마치 그것은 항해자의 나침반이나 운전자의 로드 맵과 같은 역할을 한다.

둘째, 세계관은 세계에 대한 시각이나 관점이다. 말하자면 세계에 대한 이해는 사고의 지침을 제공한다고 보인다. 이런 점에서 세계관이란 일종의 지적구조나 신념 체계다. 로날드 내쉬(Ronald Nash)가 지적하듯이, “모든 사람에게는 지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지적 구조란 한 인격이 믿고 있는 모든 것의 총체를 말한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나 신념은 어떤 명제, 즉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명제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세계관을 구성한다. 따라서 내쉬는 “옳은 세계관과 그릇된 세계관”을 선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밝힌다.

 

 

“정확한 세계관이라면 그와 같은 (세계를 보다 분명히 볼 수 있는) 기능을 할 수 있다. 잘못된 세계관을 통해 세계를 보는 사람에게는 세계가 무의미하거나 중요한 측면에서 볼 때, 사실 그가 의미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올바른 개념 틀을 입는 것은 세계를 정확한 세계관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이성과 신앙》, p. 33).

 

 

셋째, 세계관은 우리의 행위와 밀접한 관련을 짓는다. 행동이란 자신이 믿는 신앙이나 신념 혹은 그것의 사고에 의해서 나타나는 행위다. 간략히 말하자면,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요구하는 행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선택이나 결정은 언제나 자신의 세계관에 근거되어 있다.

 

 

(2) 신에 대한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에 나타난 다양한 세계관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으며, 그들과의 대조와 대비를 통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어떤 점에서 다르며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세계관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신을 믿는 세계관과 신을 믿지 않는 세계관이다.

 

 

첫째, 신을 부정하는 세계관이 있다. (종교철학담론, pp. 139-147). 신을 부정하는 세계관은 무신론, 불가지론(회의론) 그리고 자연주의 등인데, 이러한 견해들도 세계관의 일종이다. 무신론-관념적 무신론과 실제적 무신론이 있다. 무신론자들의 주장은 신을 믿지 않아도 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신을 믿음으로서 더욱더 삶이 구속되어질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가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의식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고안품이다. 게다가 종교란 집단적 노이로제이며 민중의 아편이다. 따라서 종교란 인간이 두렵고 불안할 때 신을 찾는 지극이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다.

 

자연주의(혹은 세속적 인본주의)는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현상인 기적과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 (종교철학담론, pp. 148-154). 말하자면, 자연주의란 초자연주의와는 반대 개념이다. 자연주의는 궁극적 실재가 자연이다. 자연은 스스로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다. 자연은 스스로의 해명이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며, 자연은 그저 그렇게 존재했다는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과 데이비드 흄은 이 자연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들이다.

 

 

둘째, 신을 긍정하는 세계관이 있다. 이 세계관에서는 범신론, 이신론, 범재신론 그리고 유신론이 있다. (종교철학담론, pp. 154-169). 신을 긍정하는 세계관에서는 그 내용에서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의 경우에는 자연 즉 신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말하자면, 자연 속에 신의 양태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신론은 낭만주의 전통의 근대철학의 한 세계관으로 이 세계가 기계적으로 완벽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신의 역할이 없다고 보았다. 이 우주는 정해진 법칙에 따라서 잘 움직이고 있다는 견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이신론의 신을 믿었던 사람인데, 이는 그가 “하나님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God does not play a dice with the universe)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신론은 이 세계를 거대한 기계로 이해했다. 범재신론은 과정철학의 우주관이자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유기적 세계관으로서 모든 사물이 변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이다. 신도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영향을 주면서 영향을 받는 존재다.

 

몇 가지특징들을 열거하자면, 유신론적 세계관은 창조주의 신관, 사랑의 신(인격적 존재), 거룩한 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 요약하자면, 이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 창조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우주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인격적이고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 삼위일체에서 말하는 것은 세 분의 인격적 존재를 가리킨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은 거룩한 하나님을 믿는다. 거룩하다는 것은 도덕적이라는 말이다. 이 세계는 도덕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신앙도 도덕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너희들도 거룩하여야 한다”는 말씀은 도덕적 행위를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유신론은 보편적인 도덕 법칙이 있다고 믿는다. 법칙이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법칙은 객관적이다. 누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3) 기독교 세계관의 세 가지 특징들

 

첫째, 기독교 세계관은 성서적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성경의 규범에 따라 바라보는 세계관이다. 만일 신앙의 실천과 행위가 성서적 원리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다.

 

 

둘째, 기독교 세계관은 유신론적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의 절대주권을 포함하여 그를 인생의 주로 받아들이는 세계관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고, 살아계시며 참되며 그 존재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측량할 수 없으신 전능한 존재다.”

 

 

셋째, 기독교 세계관은 실천적이다. 특히 기독교 세계관은 사랑의 실천에 의해서 특징짓는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친히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하기 위해 오신 성육신의 실천을 믿는 세계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요3: 16). (《철학에 관한 신앙적 ․ 신학적 성찰》, pp. 186-91 참조).

 

 

(4) 세속적 세계관

 

첫째, 유물론적 세계관이 있다. 유물론적 세계관은 칼 마르크스의 세계관으로서 물질이 정신을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질이란 환경에서 우리의 정신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물질이나 환경이 우리의 정신을 만드는 일차적인 출발점이다. 마르크스는 세계를 가진 자(the Haves)와 못가진자(the Have's not)로 구분했다. 원래 헤겔의 철학과 사유의 중심 내용인 관념론(idealism)과 대립되는 개념에서 비롯된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은 무신론에 근거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원칙적으로 헤겔을 반대하고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의 편을 든다. 하나님을 “기득권에 이바지하는 위안”으로 간주했던 포이에르바하는 새로운 인본주의를 주창했고, 마르크스는 여기에 동조하면서 “무신론은 종교의 말소를 통해서 전체성을 매개하는 인본주의이다”고 단언했다. 관념론이 인간의 의식이나 정신이 일차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유물론은 인간의 의식 외부에서 의식이나 정신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 인간의 의식이 사물을 바꾸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관념론이며, 인간의 환경이나 주변의 물질적 존재들이 의식이나 정신을 만든다고 한다면 그것은 유물론이다. 말하자면, 유물론은 세계에 있어서 물질(환경)이 일차적이며 정신이나 의식은 이차적이다. 이런 점에서 물질로서의 세계는 시공간적으로 영원하고도 무한하다는 것이다. 유물론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신에 의해서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에 의해서 세계가 창조된다는 것인데, 이는 정신과 의식은 물질에 근거하여 성립하기 때문이다.

 

 

둘째, 숙명론적 세계관이 있다. 숙명론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숙명론이 운명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운명은 일종의 결정론이다. 우리가 이미 태어나면서 결정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운명을 그래도 받아들여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숙명론은 인간의 운명 때문에 숙명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숙명론은 인간의 노력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운명에 자포자기나 복종으로 미래에 운명적이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숙명론적 세계관은 미래에 대한 인간의 예측이 불가능하고 또 그러한 예측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만일 무엇이 일어나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심리적인 속박을 느끼지 말고 해방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어날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숙명론적 세계관은 허무주의나 염세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철학에 관한 신앙적 ․ 신학적 성찰》, pp.182-6)

 

 

셋째, 허무주의 세계관이 있다. 허무주의의 기본 생각은 절대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허무라는 개념을 “현재 대상이 주어져 있지 아니한 공허한 개념”과 “모순되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전자는 실재적이고도 절대적인 어떤 개념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현재 존재하는 개념이나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허무를 “개념화할 수 없는 무의 의식”이라고 단순히 정의했다. 제임스 사이어에 따르면, 허무주의의 탄생은 자연주의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본다. 그에 따르면, 허무주의는 “물질은 존재의 전체이자 영원히 존재한다”는 자연주의의 제1명제와 “우주는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서 일관적으로 움직인다”는 자연주의의 제2명제에 따른 결과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의 의식과 느낌을 질식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에도 속박을 가하게 될 것이다. 자기 의식적이고 느낌의 주체인 인간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주거나 의미 있는 일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운명이나 인과율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는 삶의 형태를 갖는다. 그것이 속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허무주의적 세계관은 삶의 분명한 목적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의미를 상실하는 삶을 살아간다.

 

 

넷째, 뉴 에지 세계관이 있다. 흔히 뉴 에지 운동으로 알려진 이 세계관은 어디서 시작이 되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마릴린 퍼거슨의 《물병좌의 음모》와 프리초프 카프라의 《전환점》에서 뉴 에지 운동의 근거를 갖는 듯하다. 이들 책들은 인간의 정신적인 현상이 전환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1980년대에 뉴 에지 잡지와 요가 잡지 등에서 새로운 정신 현상에 대한 전환을 언급하면서 우리 시대의 뉴 에지 운동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뉴 에지 세계관의 특징들은 무엇인가. 사이어가 열거한 네 가지를 참조해 보자. (1) 존재의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 자아만이 실재다. 어느 것도 이 실재를 대신할 수 없다. 유신론의 하나님도 물질적 환경이나 우주도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내(자아)가 실재다. 마치 유아론적 세계관과 매우 유사한 것처럼 말이다. 존재하는 것은 나(자아) 밖에 없다는 것이다. (2) 그러다 보니깐 우주는 항상 자아 속에서 통합이 된다. 즉 우주는 보이지 않는 우주인 자아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3) 뉴에이지의 핵심적인 경험은 우주 의식인데 그 안에서의 공간과 시간 그리고 도덕성과 같은 보통의 범주들은 사라져간다. (4) 육체의 종말은 자아의 종말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 의식에 대한 경험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5) 기독교 세계관과 문화(세속성)와의 관계

 

첫째, 기독교 문화는 반문화적인가?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것만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기독교 문화는 세속적 문화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 이것은 성(聖)과 속(俗)의 오래된 논쟁이다. 원래 ‘거룩한’ 또는 ‘영적인’이라는 어휘는 ‘세속적’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이 세상에 속한 것과 저 세상에 속한 것의 구별은 신앙전통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고, 세속적인 것에서 거룩한 것을 지켜야 할 의무를 느끼는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의 오래된 작품인《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에서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들을 네 가지로 도식화한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 이 입장은 세상과 그것의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태도를 갖는다. 초대교회들은 이 입장에 동조했다. ‘12사도의 교훈,’ ‘헤르마스의 목자,’ ‘바나바의 편지,’ 그리고 ‘클레멘트의 제1편지’와 같은 2세기 기독교 문서는 세상과 세상의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태도를 통해서 문화에서 그리스도를 분리시키고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교부신학자는 터툴리안(Tertullian)일 것이다. 그는 아덴과 예루살렘을 날카롭게 구분함으로써 세상과 교회의 영역을 도시화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죄가 가장 많은 장소는 문화의 영역”이었다. 이 문화가 우리의 신앙을 부패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정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분명히 세상과 세상의 것들을 미워하고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사랑하는 일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은 동일시될 수 없었다. 니버에 따르면, 이 입장에서의 문제는 “이성과 계시의 문제”와 “죄의 본성과 죄의 만연성의 문제” 그리고 “율법(자기의지)과 은혜(하나님의 의지)의 문제”였다.

 

(2) 문화의 그리스도 (The Christ of Culture): 이 입장은 교회와 세상 간의 크나큰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특히 이 입장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문화를 해석하고 설명한다. 그래서 문화에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는다. 만일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가 초월적이라면, “문화의 그리스도”는 현세적이다. 이 입장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츨에 이르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주창되었다. 리츨의 경우에서는 계시와 이성이 주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문화가 더 큰 문제였다. 만일 우리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기초가 아니라면,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가 된다. 이것은 교회의 창설자인 그리스도의 인격이 더 중요한 것이지 교회의 교리와 전통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이란 자연과 분리할 수 없고, 자신이 태어난 문화에서 분리할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문화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저항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궁극적으로 이 입장은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전체를 말하는 것이지 교회만을 지칭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화적 기독교(cultural Christianity)를 주장한다. 이미 그리스도는 문화 속의 그리스도이다.

 

(3) 문화에 위에 있는 그리스도 (Christ above Culture): 이 입장은 그리스도와 문화를 종합하려는 입장인데,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either/or)의 방식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의 양자포함(both/and)의 방식을 옹호한다. 흔히 이 입장에 있는 사람을 종합주의자라 부른다. 종합주의자를 옹호하는 성경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여기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노라”(마5: 17-18);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 (마22: 2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세상권세)에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이 명하신 바라……. 권세는 하나님의 일이니라” (롬 13: 1, 6). 교부신학자 가운데서는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자로서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가장 대표적이다. 저스틴과 클레멘트는 스토아학파와 당시의 주류의 철학적 사유를 신앙에 접목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적대적 관계가 아님을 말했다.

 

(4) 역설적인 관계로서의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이 입장은 이원론의 입장이라고 부른다. 니버에 따르면, 이 유형의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가 마틴 루터였다. 이 세계에는 두 나라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세상의 나라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와 자비의 나라인 반면에 세상의 나라는 진노와 잔인함의 나라다. 문제는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유형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양자를 구별하긴 하지만 그것들을 분리시키지는 않았다. 다만 이 두 영역에서 있을 양자 간의 상반적인 문제를 긍정한다는데 있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 반드시 사회의 법에 불복종하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도덕이나 법과 하나님의 도덕과 법에 동시에 복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세상적인 것은 세속적인가? 일부이지만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세속 문화를 세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세속 학문을 이 세상의 지혜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수도원 운동의 출발점은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수도원들이 학문의 중심지였고 고대 필사본의 저장소였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문화적 퇴보와 후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문화적 반발이나 저항이 반드시 기독교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도의 경유학파는 정치와 경제 제도에 환멸을 느꼈고, 그래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복과 건물을 배척하고 단순한 삶을 통해 자연으로 복귀하려고 했으며, 한동안 미국과 유럽에서 유행한 히피문화도 반문화 운동이었다. 이처럼 기독교 내에서도 세상에 대해 반문화적 태도를 견지하는 삶의 형태들이 존재했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와 인디애나의 아미쉬(Amish) 집단은 어떤가. 자동차 대신 말을 사용하고, 전기 대신 기름등잔을 사용하며, 현대적 의상과 초등교육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회피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세속적인 문화를 배격한다는 말인가?

 

여기서 우린 문화란 무얼까 하는 근원적인 물음 앞에 선다. 니버는 문화를 “인간의 성취”로 정의했다. 말하자면, 문화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현존하는 관행이나 제도를 부정할 수 있지만 문화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인간이 바로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악한 자)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my prayer is not that you take them out of the world but that you protect them from the evil one). 모세는 이집트의 학문적 교육과 수련을 받았고, 다니엘은 바빌로니아의 학문을 수학했으며, 바울은 랍비 학교에서 가말리엘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다른 문화의 신념이나 관행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학문과 문화에 적대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세상은 기만적일까. 우리가 배운 것은 세속적인 것이 아닐까.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는 우리에게 무얼 가르치는 걸까.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세속화 하신 행위는 아닐까. 그러면, 현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옳은 걸까. 우리는 항상 의를 갈망하는 거룩한 불만의 상실을 그대로 방치해야 할까.

 

셋째, 기독교 안에서의 세계관의 차이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한 세계관의 차이들을 발견한다. 이러한 차이들은 어디서 유래했으며, 어떤 기준들이 제시되는가. 절대적인 차이일까. 아니면 상대적인 차이일까. 획일적이고도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세계관이란 사상과 행동에 대한 기준 혹은 준거 틀(frame of reference)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의 사상과 행동이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에 대한 입장이 니버가 지적한 것처럼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세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있다. (1) 배타적 입장: 이 입장은 준거 틀을 성서적 근거에서 바라본다. 이 입장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성서다. 성서적 근거는 종종 세상과 분리를 요구하는 사상과 행동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이 세계에는 두 왕국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의 왕국(국가)이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한 첫 3세기 동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국가 서로 대립되었고, 문화적으로는 반문화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2) 다원적 입장: 삶의 경험을 준거 틀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은 성서보다는 경험이 우선적이다. 인간의 삶이 중요하다. 성서의 이야기들이 형성된 것은 그들의 신앙적 순례 길에서 느끼고 체험된 것들이 글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문화적 요소를 기독교 세계관에 가미하는 작업을 행했다. 그러다 보니 성서도 결국에는 인간의 삶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3) 동일적 입장: 기독교 문화나 세속 문화는 똑 같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는 이원론적 사유가 매우 위험하다. 세상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을 분리하려는 시도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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