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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 변증학의 역사 / 초대교부편

하나님아들 2016. 3. 23. 21:33

 

제3강의: 기독교 변증학의 역사-초대교부편
소피스트 | 조회 135 |추천 0 | 2010.09.13. 09:04

 

 

제3강의: 기독교 변증학의 역사

 

어느 학문이든 그것이 발전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변증학도 예외는 아니다. 기독교 변증학이 학문으로 대두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초대교부들이 이단에 대한 입장과 그들의 믿음을 고수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이번 강의에서 우리는 초대교부들의 기독교 변증학을 저스틴, 클레멘트, 오리겐, 터툴리안의 사상들에서 찾아 볼 것이며 그리고 최근에 루이스, 반틸, 크레이그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의 기독교 변증학의 의미를 찾아 볼 것이다.

 

1. 성경교육

성경은 본질적으로 교육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은 기록된 책을 통해 스스로 계시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신비적이고도 영적인 체험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즉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이 말씀은 직접적이고도 인격적인 교제를 공유하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이자 축복이다.

 

첫째, 교회는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회는 항상 글을 읽도록 독려해 왔다. 물론 그 글이란 성경이지만 대체로 교회 강단은 성도들에게 글을 읽도록 독려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비록 의무적인 사항은 아니지만, 대체로 교회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글을 읽도록 가르쳤다. 문맹률이 감소된 것은 교회의 노력이 있었다. 삼일 운동에서 한국의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가 알듯이, 고대에서는 권력가, 사업가, 사제 계급만이 글자를 독점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히브리 소년들은 주변의 많은 민족들이 글자 체계를 갖추지 못했던 고대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탈무드를 읽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둘째, 중세의 수도원은 문자에 치중한 시대였다. 우리가 알듯이 중세시대에는 책을 손으로 필사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귀하기도하고 갋도 매우 비쌌다. 심지어 부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글을 읽을 줄 몰랐다. 하지만 중세시대에는 성경사본을 손으로 정성들여 만들었다. 옥스퍼드와 소르본 대학들은 본래 교회의 성직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설립된 학교였다. 중세시대에 교회들이 미신에 빠지고 맹종한 신앙으로 전략한 이유는 다름 아닌 성경을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문맹에서 깨지 못하게 한다면, 성직자들은 그들을 잘 다룰 수 있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존의 가치에 저항하는 힘을 갖게 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당시 성직자들이 교육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것을 최상의 가치로 삶았기 때문에 교회는 미신에 빠지고 오류를 범하는 일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종교개혁자 루터의 삶에서 읽을 수 있다.

 

셋째, 현대의 성경공부의 범람은 글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운다. 현대의 성경공부는 이미 다양한 교회 구성원들이 고등교육을 통해서 배운 세속적 학문 등을 근거로 하여 성경을 본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다양하게 읽혀질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늘의 양식이라고 하는 성경은 하나의 근거이자 지침이지만, 그것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이는 성경이 문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변증학은 이런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보인다.

 

2. 초대교부들의 기독교 변증학

2세기의 기독교의 분위기는 교리적으로 영지주의(Gnosticism)와 몬타너스주의(Montanists)그리고 이교도의 공격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로마정부에 의해서 위협을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초대교부들의 기독교 변증은 이교도에 대한 공격에 맞서는 것이었다. 특히 육체부활교리가 가장 큰 쟁점이었는데, 이것이 이교와 영지주의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에서도 기독교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우리가 알듯이, 로마정부는 법적인 의미에서는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간주했다. 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적대적 감정은 네로 박해 당시(64년)에 확연하게 분리되었다. 널리 알려진 것은 기독교 박해에서의 희생자가 받은 혐의는 (1)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방화에 대한 것이었다. 그로인해 기독교 신앙을 공공연하게 고백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처벌 대상이 되었다. 베드로 전서(90년경)에서 우린 이 사실을 어느 정도 추론해 볼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if anyone suffers as a Christian)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 16). 교회 역사가들은 기독교인들을 수색하는 일은 없었고, 신앙의 포기하는 경우에는 처벌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백적 행위가 신앙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고 결국에는 순교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250년 이전에는 대대적인 박해는 없었다. 기독교에 부여된 혐의는 (2) 무신론과 무정부주의였다. 기독교인들은 이전에 숭배한 신들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무신론자로 간주되었고, 황제 숭배의 거부가 정부에 반역하는 행위였다. 폴리캅이 156년 서머나(지금 이름은 이즈밀)에서 순교당할 당시에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이 반역적 행위로 간주된 경우였다. 변증가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했다고 해서 그들이 시민으로서의 불충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변호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에 부여한 또 다른 혐의는 (3) 기독교인들이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과 관련해서 식인의 관습을 행한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의 사랑의 언어는 난잡한 섹스 파티를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초대교부들의 변증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에 맞서는 것이었다. 이들이 한 것은 당시의 지성적 세계에 로마정부의 적대적 태도와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알리고 호소하는 일이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순교자 저스틴이었다. 필립 샤프에 따르면, “그리스 변증가들은 헬라 문학, 특히 플라톤 철학과 스토아 철학에 진리의 요소가 있음을 인정했으며, 그것이 유대교의 율법과 예언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위한 준비였다고 보았다. 유스티누스(저스틴)는 이교에 존재하는 모든 선한 요소가 신적 로고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로고스가 성육신 전부터도 진리의 씨앗을 뿌렸으며,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생활을 자극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독교와 그리스 철학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이고, 그리고 기독교 진리의 논박이나 변증을 위해 그리스 철학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보인다. 나중에 저스틴의 입장이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인 클레멘스와 오리겐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다.

 

이 시대의 변증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문필적 변증이었다. 말하자면, 변증가들은 서신이나 글을 통해서 기독교의 정당성을 제시했다. 둘째, 적극적 변증이었다. 기독교 변증의 방식에는 일반적으로 적극적 변증과 소극적 변증으로 구분한다. 소극적 변증은 쟁점에서 회피하면 언젠가는 그들이 기독교를 진리로 인정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적극적인 변증은 보다 명확한 언어로 그들의 비판에 답변을 준비하여 저항하는 태도다. 이런 점에서 초대교부들은 철학적이고도 역사적인 논증을 통해서 유대교나 이전의 교리들을 논박하기 위해 적극적인 논쟁을 선택했다. 말하자면 적극적 변증은 옛 종교나 교리들을 논박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었다. 예언, 기적, 도덕적인 문제, 기독교의 합리성 등을 논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이교의 윤리보다 더 못하다는 비판에 대해서 교부 변증가들은 기독교의 윤리성이 더 탁월하다는 것을 논증했다. 저스틴의 말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우리가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 그리스도를 성부 다음의 하나님으로 예배한다는 이유로 우리를 지각없는 자들로 생각한다. 하지만 만일 십자가의 비밀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열매들을 보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우리도 한때는 방탕하게 살았던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정절을 배운다. 우리도 한때는 점을 보러 다녔지만, 이제는 선하시고 창조의 하나님께 우리를 거룩하게 구별해 드린다. 우리는 한때는 돈과 재산을 무엇보다 사랑했으나, 이제는 보편의 유익을 위해서 재산을 내놓으며, 궁핍한 사람들과 공유한다. 우리도 한때는 서로 싸우고 죽이던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원수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증오에 휩싸여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우리는 친절하게 마음을 달래주려고 노력한다. 그들도 우리가 누리는 복을 함께 누리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독교 변증은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설득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1.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저스틴을 순교자로 명명한 것은 165년경 로마에서 집정관 루스티커스(Rusticus)의 박해가 있을 때에 영웅적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죽은 데 기인한 말이다. 그는 팔레스틴(사마리아)의 세계에서 태어났지만 에베소에서 한 동안 살았다. 그 자신의 개종이 일어난 지역이 에베소였다. 그는 순수한 철학도였는데,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 피타고라스 사상, 플라톤의 사상 등을 체계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그가 신앙체험을 통해서 기독교 안에 가장 오래되고 참되며 가장 신적인 철학이 있다고 확신했다. 후에 그는 로마에 거주하면서 살았는데, 거기서 그는 153년경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그의 양아들들에게 보내는 “변증론”(Apology)을 저술하여 정부의 적대감정과 이교도의 비판으로부터 기독교를 변호했다. 특히 로마서 13: 1-7을 통해서 저스틴은 기독교인들은 시민의 도리에 대해 모범적이고, 그들의 세금을 지불했으며, 그리고 법을 지켰지만 그러나 시저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는 없었는데 왜냐하면 예수는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주님이기 때문이라고 논증했다. 그러므로 저스틴은 그릇된 소문에 의존해서 기독교를 위협하고 협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변론했던 것이다.

 

첫째, 저스틴의 변증적 방식은 철학(이성)을 신앙에서 배제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속에 있는 이성이 우주적 로고스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고, 이것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로고스가 육신이 될 수 있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출생이라고 가르침을 받았고 그가 모든 인류가 함께 받아먹는 말씀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이성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신론자일지라도 그들은 기독교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스틴은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했다.

 

둘째, 그의 변증의 방식은 문헌을 통한 변호였다. 그는 세 작품을 통해서 기독교를 변론했다. 그의 변증은 주로《첫 번째 변증론 》(First Apology),《두 번째 변증론》(Seoncd Apology) 그리고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록 》(Dilogy with Trypho the Jew)을 통해서다. 《첫 번째 변증론 》은 155년경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에게 보내는 대답이었다. 그가 변론한 것은 기독교가 합리적 신조를 가진 종교라는 것과 기독교의 침례와 성만찬을 포함시켰다. 《두 번째 변증론 》은 로마 의회에게 기독교의 불멸성과 시민으로서의 충성심과 관련된 내용으로 하는 변호였다. 그는 훌륭한 기독교인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논증했다. 말하자면 훌륭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좋은 사회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려진 것은 오해에 기인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 》에서는 유대랍비인 트리포와의 논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의 메시야라는 사실을 밝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의 교육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변증은 맹목적 주장이나 맹신적 신앙의 결과가 아니라 일정한 전문적 훈련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점을 교부 신학자 저스틴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먼트(Clement of Alexandria, c. 150?-211/215)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지도적 구성원이면서도 가장 뛰어난 선생이었다. 그에 대한 평가에서 클레멘트는 기독교 신앙의 지적 요소와 그것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한 인물이었다. 클레멘트는 150년경에 아테네(Athen)에서 이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그는 이미 철학에 심취한 상태였고, 소아시아, 시리아,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이집트까지 여행을 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그의 인생의 전환기는 180년경에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성서 해석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었던 판티아노스(Pantianos)를 만나면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성서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른바 그곳에 세워진 일종의 신학교였던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미 터득한 철학적 사유를 근거로 진리를 사모하는 지성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다. 이곳에서 클레멘트는 훌륭한 제자를 가르치는데, 그가 바로 오리겐이다. 오리겐의 활약으로 알렉산드리아는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현존하고 있는 클레멘트의 저서들은《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권면》(Protrepticus),《교사》(Paedagogus),《논설집》(Stromateis)이다.

 

그의 변증론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그의 변증론은 철학을 통한 기독교 신앙을 표현했다. 그렇지만 이 철학이 절대적 진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철학은 일종의 몽학선생과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은 주께서 오시기 전에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도되기 전에,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게하고 의로 인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의 원인자로서 어떤 사람에게는 구약이나 율법을 우선적으로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우선적으로 철학을 주셨다. 왜냐하면 율법이나 구약이 히브리인들을 교육하여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것 같이, 철학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옮고 그름을 변별할 수 있도록 교육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준비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철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사람이 될 때까지 길을 예비하고 준비해 준다는 말이다.” 이처럼 클레멘트는 하나님의 계시가 다양하기 때문에 철학은 로고스의 활동과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보았다. 한번은 그가 “어린이들이 가면을 보고 놀라듯이 헬라의 철학에 놀라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고 말한 적이 있다.

 

둘째, 그의 변증론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이라는 구조 틀에서 신앙과 앎을 추구한다. 신플라톤주의는 저급한 등급에서 완전한 등급으로 상승해 가는 원리를 강조한다. 이를테면 물질이라는 낮은 단계는 항상 정신이라는 높은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클레멘트는 기독교 신앙을 변론하는데 사용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두 종류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단순한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다. 단순한 그리스도인은 성서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는 자이며, 신앙을 두려움과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반면에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내용과 복음의 깊은 진리를 깨달아 아는 완숙한 신앙인으로서 영적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지자”(gnostic)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의 기독교 변증이 아는 일(epistemology)이 믿는 일(fideism)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믿음에서 이러한 앎의 단계로 나아갈 때에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플라톤주의의 방식은 영적 성장에 관한 논의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영적 성장은 3 단계가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들은 (1)마음의 정화 단계(purification), (2) 영적 조명 단계(illumination) 그리고 (3) 합일의 삶 단계(life of unity)들이다. 마음의 정화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죽이고 포기하는 단계로서 그 속에 있는 욕망을 제어하고 극복하는 일을 말한다. 영적 조명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함께 순결한 도덕적인 삶을 통해서 영혼을 깨끗이 하고자 하는 단계를 말한다. 말하자면, 신앙의 지식을 가짐으로서 이 단계는 영적인 눈이 열리고 내면의 세계가 신적 광명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일의 삶의 단계에서는 우리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연합되는 단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즉 영적 성장의 최고의 단계이다. 이 모든 것이 신플라톤주의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3. 오리겐(Origen, c. 185-254)

오리겐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의 근명하고 순결한 인격으로 인해 ‘아다만티우스’(Adamantius), 즉 강철 같은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기 작가이자 역사가인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데스는 202년 세베루스의 박해시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오리겐도 순교한 아버지를 따라 순교의 삶을 살려고 했다. 203년에 18세의 젊은 나이에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교리문답학교의 교장이 되었다고 한다. 일화에 의하면, 그가 젊었을 때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다가 스캔들에 휘말렸다. 이것을 안 오리겐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스스로 고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전기 작가인 유세비우(Eusebius)에 따르면, 소년시절부터 오리겐은 “거룩한 말씀들을 단순히 문학적인 자세로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어떤 것을 추구했으며, 그 나이에 스스로를 깊은 사색에 몰두시켰고, 또한 성경의 영감에 대한 보다 깊은 의미를 묻는 문제로 그의 아버지를 혼란스럽게 했다.”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 학파 출신의 위대한 차세대 저술가로 평가된다. 흔히 오리겐을 니케아 이전시대의 가장 탁월한 지식인이자 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그를 “그리스 교회의 플라톤 내지 슐라이어마허”라고 부른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성경을 읽을 때에 문자적인 것을 넘어서 알레고리한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부의 성서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안디옥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다. 전자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성서를 알레고리로(allegorical)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논쟁했고 그의 사후에는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일찍이 헬라어를 구사하는 기독교계에 그처럼 영향을 끼친 신학자는 없었을 정도였다. 그의 알레고리한 해석은 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저녁과 아침이 태양과 달과 별 없이 존재한다고 믿겠는가? 하나님이 농부의 방법처럼 ‘에덴의 동쪽에 낙원을 창설했다’고 믿을 만큼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셨다’고 했을 때, 나는 이것들이 역사와 비슷하면서도 실제적인 사건이 아닌 어떤 신비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오리겐의 기독교 변증학은 지성인들에게 보다 깊은 성서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성서주석가로서 오리겐은 신학원리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1) 문자적 의미, (2) 도덕적 의미, 그리고 (3) 영적인 의미이다. 문자적 의미는 인간의 육신에 해당하고, 도덕적 의미는 영혼에 해당하며 그리고 영적인 의미는 인간의 심령에 해당한다. 그에 의하면, 성서는 신비하고 지고한 영적 진리들로 가득 찬 숲과 같다. 그래서 성서의 깊은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깊은 철학적 사유와 사색을 필요로 하고, 그러한 통로로 영적인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오리겐은 플라톤주의의 핵심적 내용인 우주의 근원을 밝히면서 모든 우주 만물은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종국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세계나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image)과 하나님의 인상(impress)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리겐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지성과 영성 그리고 사랑이며, 이 세 요소는 분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의 삶에서 오리겐은 기독교와 플라톤주의를 연결시키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종합은 영혼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드러났다. 그는 영혼이 우리의 참된 자아이고, 우리는 새로운 육체를 입고 거듭해서 태어난다는 플라톤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플라톤이 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다고 주장했다. 결국 오리겐은 모든 영혼들이 구권을 성취한다는 생각했다. 후에 이러한 생각이 그를 이단자로 정죄 받게 된다.

 

4. 터툴리안(Quintus Tertullian, c. 150?-220)

터툴리안은 로마의 역사적 경쟁 도시인 카르타고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아프리카 총독 휘하에서 로마 군단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그 덕에 그는 그리스와 로마 교육을 받았다. 그의 저서에서는 역사, 철학, 시, 고전 문학, 법률용어에 대한 어휘들이 자주 등장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를 “로마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했다. 삼사십대에 그는 이교적 맹목과 방종에 빠져 지냈다. 2세기 말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깊은 확신과 영혼의 뜨거운 열정으로 회심했던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다소 모가 나고 거칠고 괴팍했다고 한다. 교부신학자들 가운데 터툴리안은 라틴어로 글을 쓸 수 있었던 최초의 탁월한 기독교 변증가로 간주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헬라철학과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일은 터툴리안에 의해서 저지당하게 된다. 200년경의 북아프리카의 기독교 변증가인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둘러싼 사회와 무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변증가들처럼,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백성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변증가들과는 달리,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참여자로서가 아니라 관찰자로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사랑과 평화에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군대에 가담하고 배심원이 되고 또한 누군가를 감옥이나 사형에 처하도록 투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리스도는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하셨다....이러한 사실은 여러분이 모든 세상의 권력이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한 영혼이 두 주인―하나님과 가이사―을 섬길 수 없으며 가이사의 형상은 동전 위에 새겨져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 위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진정 돈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에게는 여러분 자신을 드리라. 그렇지 않고 모든 것이 가이사의 것이라면, 무엇이 하나님의 것이 되겠느냐?”

 

그의 변증적 방식은 한마디로 배타적이다. 이것은 헬라의 방식과 라틴의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헬라의 변증은 보다 학구적이고도 철학적인 것인데 반해 라틴의 변증은 내용과 문체가 보다 실천적이고도 법적인 것이다. 전자는 기독교가 진리이며 인간의 지적인 부족함을 채워주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강조를 두었다. 반면에 후자는 기독교가 존재할 권리가 있음을 호소하고 주로 기독교가 도덕적으로 탁월하며 사회에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강조했다. 라틴 신학자들은 이교 사상을 보다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터툴리안은 철학과 신앙이 일치한다는 헬라의 변증가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덴과 예루살렘이 실로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학문과 교회 간에 어떤 일치가 있는가? 스토아적이고 플라톤적이며 변증법적인 조합으로 된 잡종의 기독교를 만들어 내려는 모든 시도를 치워버려라.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우리는 더 이상의 신념을 원치 않는다.” 그는 매우 단호했다. 믿음은 철학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기독교가 왜 이성적으로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를 물으면서 “하나님의아들이 죽으셨는데 그것이 반드시 믿어져야 하는 것은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 사실이 확실한 것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터툴리안은 우리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며, 부활의 사실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단언적으로 잘 알려진 그의 명제,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est)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위대한 자연적 선물인 이성을 서슴없이 멸시하는 의미로 사람들은 받아들인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을 철학적 방식으로 조화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논박은 주로 이성에 의해서 수행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극단적 태도가 199-203년에 해당하는 기간에 몬타누스파(the Montanists)에 가입하게 된다. 몬타누스파는 종말적 사상에서 그 특징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인의 엄격한 순결을 강조하는 종파였다. 터툴리안은 세상에 대한 경멸과 엄격한 금욕주의, 엄격한 권징, 순교 열정, 몬타누스판의 천년왕국설에 마음이 끌렸고, 세상과 점차 동화되어가던 로마 교회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단과 싸울 때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내의 육에 속한 사람들과 맞서 싸우게 되었다. 몬타누스파가 로마 교회에서 나가게 된 계기는 교리보다는 도덕과 권징 문제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터툴리안은 로마교회를 신랄히 비판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들에 대한 비판의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의 변증에 관한 저서는 《변증학》(Apologeticus 혹은 Apologeticum)이다. 이 책은 이교도들과 유대인들을 겨냥한 책이면서 기독교 세계 전체의 견해를 대변하는 저서로 주목을 받고 있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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