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설교 - 김지찬 교수의 재반론 설교학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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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유 교수가 본인의 글의 논지를 잘 요약하고 그 기본 명제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를 한 것에 대해서는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유교수가 제대로 본 것처럼 구속사적 설교의 큰 틀과 방향에 대해서는 본인도 확고한 지지를 보낸다. 그러기에 글의 제목도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 라고 붙인 것이다. 유교수의 말대로 구속사적 설교를 "해체" 하려고 했다면, 이런 제목을 붙이지 않고, "구속사적 설교는 이제 그만" 이라고 달았을 것이다. 기존 구속사적 설교의 양태에 들어 있는 큰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급히 개선되기를 바란 것뿐이다.
유 교수는 기본 명제에 대한 찬성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문제 제기와 전개 방식에 이견을 제기하였다. 우선 유 교수는 한국 교회에 한국식 구속사적 설교가 정착된 적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구속사적 설교 "논쟁" 이 한국에 제대로 소개되었는가라고 묻고 있다. 그렇다! 한국에는 "논쟁" 이 객관적으로 소개되기 보다는 "구속사적 설교" 운동의 일방적 소개로 그친 감이 적지 않다. 1989 년에 한글로 번역 소개된 크레이다누스의 학위 논문(1970 년에 자유대학에서 신학 박사 취득을 위해 제출한)인 "오직 성경만으로"는 비교적 이 논쟁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면서, 모범적 설교와 구속사적 설교를 뛰어넘어 제 3의 길, 즉 "성경 본문 중심의 설교"를 이미 제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라고 붙였을 뿐 아니라, 고재수 교수는 이 번역서의 추천서에서 크레이다누스의 방법론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번역서는 충실하게 원 저자의 의도에 따라서 번역-소개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제목을 바꾸고, 책의 방법론을 비판하는 내용의 추천서를 원저자의 동의 없이 번역서의 첫머리에 실음으로서, 한국 독자들이 구속사적 설교 논쟁과 그 이후의 학계의 발전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1989년에 이런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 이전에는 구속사적 설교 운동이 일방적으로 소개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본인의 글은 이런 점에서 구속사적 설교를 좀더 객관적인 역사적 시각에서 볼 것을 주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본인이 구속사적 설교를 "유행" 과 "인기"를 추구하는 운동으로 보았다고 유교수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오해이다.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가 원 발상지인 화란과 비교해 볼 때 오랜 동안 외부의 비판이나 내부의 심각한 문제 제기 없이 진행되어 온 현상을 대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부분은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보기 바란다. 게다가 이 글은 평신도들도 많이 보는 대중적인 신문에 실린 글인데다가 지면에 제한이 있었다. 따라서 표현상 더 정확할 수 없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더욱이 본인이 "구속사적 설교의 인기와 유행의 허를 제대로 밝히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적임자로 은연중 부각시키는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면 이는 실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지적한 구속사적 설교의 문제점과 대안은 앞서 언급한 크레이다누스의 논문에 이미 다 밝혀져 있다. 필자는 단지 이것을 우리식 정서에 맞게 지적한 것 뿐이다. 신문에 실린 짧은 글 안에서의 필자의 문제 제기를 가지고 "구속사적 설교의 폄하, 왜곡"으로 보는 것은 감정적인 과잉 반응은 아닌가 묻고 싶다.
셋째, 고재수 교수의 구속사적 설교의 한 예인 "아브라람의 거짓말"이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제대로 한 후에 결론부에서 신학적 해석을 제대로 했는데 본인이 "근접 문맥을 무시하고 설교의 결론을 마치 본문의 주해 과정인 양 너무 빠르게 읽어들였다"고 유 교수는 비판한다. 그러나 고재수 교수의 설교를 자세히 읽어보라. 그의 설교 가운데 문법적-역사적 주해 과정이 얼마나 되는가? 물론 짧은 설교이기에 이를 잣대로 재는 것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더라도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드러나기에 여기서 언급하려고 한다.
고 교수의 설교는 총 151줄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그는 본문에서 도덕적 교훈을 찾아내서는 안된다는 논지로 모범적 설교를 비판하는데 61줄을 할애하고 있으며, 구속사적 접근을 옹호하는데 10줄을 쓰고 있다. 그리고는 바로 교훈으로 들어간다. 첫째 교훈은 그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것(필자가 볼 때는 아브라함의 이전 생애와 연관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준 사건이 없기에 이전 문맥과 관계 없는 주해로 보임)이라면서, 28줄을 배려하고 있다. 둘째 교훈은 창 12:1-3 의 약속과 연관해서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18줄을 할애한다. 셋째 교훈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사래를 구원한 것을 보여준다면서 25줄을 할애하고, 결론으로 6줄을 언급하고 있다. 유 교수가 말하는 문법적-역사적 주해 과정은 기껏해야 총 151줄 중에 18줄밖에 되지 않는다(물론 설교 작성 이전에 고 교수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드러난 설교 본문으로 볼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심술이 없는 한 우리의 논의의 대상은 드러난 설교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교수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필자가 의도를 가지고 고 교수의 설교의 근접 문맥을 무시했다고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화란에서 제대로 문법적-역사적 주석을 공부한 고 교수는 설교 이전에 이미 (확실치 않으나 그럴 가능성은 충분?) 건전한 주해 위에서 구속사적 접촉점을 찾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유 교수 말대로 제대로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바로 할 수 있는 신학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한" 한국 설교자들이 고 교수의 설교를 보고 문법적-역사적 주해 과정을 거친 후에 구속사적 접촉점을 찾는 구속사적 설교의 과정을 제대로 따라할 수 있을까?
넷째 유 교수는 "오직 성경만으로"와 함께 "오직 그리스도로"도 강조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필자가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구속사적 설교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은 기존 구속사적 설교가 그리스도를 강조하려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의 풍성함을 가리운다고 본 때문이다. 구약 본문을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문법적-문예적으로 해석하는 심오한 분석이 없이, 너무 빨리 구속사적 접촉점을 찾으면 소위 "설교학적 합선"을 일으키게 된다. 심층적 분석이 없이 너무 빨리 복음을 이야기하면 복음은 그 깊이를 상실하고 "뻔한 대답"(pat answer)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뻔한 대답"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필자는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본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문법적-역사적으로 심도있게 해석을 한 후에 본문의 정경적 의미를 신약과 연결시켜보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로 연결되는 강한 구속사적 전류를 느끼게 됨을 본문을 주해하며 한두번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필자의 접근은 그리스도를 더 강하게, 더 자연스럽게, 다양하고 영롱한 빛 가운데서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님을 유념해 주길 바란다.
다섯째, 유교수는 필자가 문법적-역사적 설교와 구속사적 설교의 의도적인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유교수가 오히려 아직도 모범적-구속사적 설교의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한국 교회가 아직도 모범적인 설교가 횡횡하고 있기에, 차라리 그 병폐를 먼저 논의하고 구속사적 설교의 단점을 지적했어야 한다는 유교수의 지적은 한국 교회의 상황으로 볼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필자도 유교수가 말한대로 양자택일의 길 밖에 없다면 모범적 설교보다는 구속사적 설교의 편을 들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범적 설교나 소위 구속사적 설교냐를 떠나서 "본문을 중심으로 하는 설교"로 통합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본문 안에 모범적 요소가 있을 때에는 모범적으로 설교하면서, 매 설교마다 본문 스스로가 자연스레 구속사적 흐름을 드러내도록 구속사적 전망과 적용을 해내는 소위 "본문 중심의 설교"로 통합이 되어야 한다. 모범적이냐, 구속사적이냐를 가지고 오랜 입씨름을 벌일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을 때에는 종교 개혁의 정신에 따라 다시 "원천 (성경 본문) 으로 돌아가"(ad fontes)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여섯째, 유교수는 필자의 한국 교회의 설교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유교수와 필자 사이에는 한국 교회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설교의 문제점은 인기와 유행에 편승하는 모범적 설교에도 있지만 역사성과 시간성을 무시한 지나친 신학적 해석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무시하고 소위 "4중 의미"를 내세우며 신학적 해석을 통해 구약과 신약을 체계적으로만 보려고 했던 중세교회가 얼마나 심각한 성경의 곡해를 가져왔는지 교의학자인 유교수는 잘 알 것이다. 그러기에 루터와 칼빈은 성령은 "문자적 의미" 안에서만 역사한다고 강조하며,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지지한 것이다. 성경 본문은 신학자나 설교자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필자도 지지하는 구속사적 설교의 틀이라 하더라도 그 틀을 가지고 본문을 해석해서는 아니된다. 해석은 본문에 의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유교수가 제안한대로 필자는 건설적 비판을 위해 글을 기고한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를 개혁 대상 1호로 삼아서가 아니라, 역사적 본문을 어떻게 설교하면 좋을지에 대해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고민해 보자는 뜻에서 언급한 것이다. 신문의 속성상 재미있게 글을 쓰려다보니 개인의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보니 일부 인사들의 마음에 아픔을 주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 해석은 개인의 과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과제이기에 생기는 아픔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양해될 수 있는 것이라 자위하며, "반론"에 대한 "재반론"을 마친다. 벽에 공던지기, 아니면 무차별 인식공격의 무대로 종종 느껴지던 한국 교회 안에 비교적 "점잖게" 반박하며 "되돌아오는 벽"도 있음을 기뻐하면서 네덜란드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유교수를 부러워하며 지면으로나마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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