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김지찬) 설교학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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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찬(캄펜신학대학 구약학 전공, 현 총신대학원 교수)
1 구속사적 설교와의 운명적 만남
필자가 대학과 신대원을 다니던 시절(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설교 모델은 구속사적 설교였다. 당시 필자는 모범적이고 예화 중심적인 한국 교회의 설교 형태에 식상함을 느끼고 있었기에, 처음 1 년은 구속사적 설교가 지향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과 광대한 구속사적 전망, 성경 신학적 접근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필자는 구속사적 설교에 대해 왠지 모를 아쉬움과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대원 2학년에 접어들면서는 구속사적 전망과 성경 신학적 접근은 사랑하면서도, 설교 형태 만큼은 소위 구속사적 설교의 패턴을 벗어나고 있었다. 결국 신대원에서 "설교 연습" 시간에 필자의 설교는 내용도 "구속사적" 이 아닌데다가, 전달의 어조마저 박력이 없어 "복음에 열정이 없다" 는 선언과 함께 "그렇고 그런" 성적을 받기에 이르렀다. 필자와 구속사적 설교의 만남은 열애로 시작하였으나, 이렇게 급속히 식기 시작했다. 물론 점수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여러 교회에서 전도사들이 설교를 하면, 당회장이 불러다 "자네 설교는 구속사적 설교가 아니라" 고 질타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건 아닌데" 라는 반응과 함께 소위 "한국식" 구속사적 설교와의 결별은 어쩌면 필자에게는 필연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구속사적 설교의 문제점을 이론적으로 정확히 지적할만한 능력은 없었다. 단지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에 대한 막연한 아쉬움, 한국 교회 안에서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접하고 난 후에 느끼는 지루함과 배타성에 대한 불만이 있을 뿐이었다.
2 구속사적 설교의 오랜 유행
필자는 6 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93년에 귀환하면서, 구속사적 설교 운동의 한계를 한국 교회가 느끼고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을 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구속사적 설교 운동은 그 기세가 조금도 죽지 않고 있었다. 실제로는 구속사적 설교를 비판하는 시드니 크레이다누스(S. Greidanus) 의 박사 학위 논문인 "오직 성경만으로" 가 한국에 번역 소개되면서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 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나,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를 다룬 베이커(D.L. Baker)의 "두개의 언약, 하나의 성경"(Two Testaments one Bible)을 "구속사적 성경 해석학"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 것을 보면 한국 교회 내의 구속사적 설교가 아직도 인기를 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최근에는 구속사적 설교 운동이 약간의 내부적 교정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은 듯한 느낌마저 든다. 1998 년 11 월호 "그 말씀" 잡지의 특집이 "구속사적 설교를 말한다"로 잡혀 있고, 그 안에 실린 여러 편의 논문들은 기존의 구속사적 설교를 그대로 유지하고 약간의 변화와 수정만을 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런 오랜 인기와 유행은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구속사적 설교는 1930-40년대에 화란에서 주로 있었던 해석학적-설교학적 논쟁에서 파생한 것이나, 화란에서는 1944년 이후에는 소멸된 논쟁이다. 물론 1986년에 화란의 한 교단(Vrijgemaakt)의 설교학 교수(C. Trimp)가 소멸된 논쟁에 새로운 불씨를 댕겼다. 그러나 화란 자체에서는 별반응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에서 더 큰 반향을 보이고 있는 것은 구속사적 설교가 한국에서야 비로서 제철을 만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3 구속사적 설교의 문제점
물론 구속사적 설교가 지향하는 원리인, "창조-타락-구속" 의 큰 틀과, "그리스도에 의해 이 구속의 역사가 성취되었다"는 강조점은 구약과 신약을 해석할 때 포기해서는 아니되는 개혁주의적 해석 방법론이다. 그러나 실제로 화란과 한국 교회에서 지금까지 시행되어 온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는 기존의 패턴을 그대로 유지하고 약간의 수정만을 가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내장적"(內藏的)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흔히 이야기되는 구속사적 설교의 문제점인 "모범적 요소의 배척," "그리스도에 대한 지나친 직접 언급" 을 해결한다고 해서 내장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구속사의 틀이 너무 빠르게 본문 주해의 1차 단계에 들어오는 것이 내장적인 문제이다.
개혁주의적 성경 해석학은 "문법적(문예적)-역사적-신학적(정경적)" 방법이다. 성경 해석자는 먼저 주해할 본문의 범위를 정한 후에 본문의 장르를 결정해야 한다. 본문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서 본문이 속한 더 큰 단락들 안에서 어떤 기능을 갖는지 살피고, 본문 자체의 구조 분석을 통해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의 관계를 찾아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며, 중요한 단어들의 의미론적 특성을 살피는 문법적-문예적 해석에 주력해야 한다. 그 후에 본문의 역사적-지리적-사회적 배경을 살피고, 본문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찾아보는 역사적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후에 마지막으로 현 설교 본문이 다른 성경 본문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특별히 신약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이 정경적-신학적 해석이다.
위의 과정에서 보면 구속사적 설교 원리는 정경적-신학적 해석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속사적 설교 원리는 본문에 대한 1차적 주해, 즉 문법적-역사적 주해가 끝난 후에, 2차적인 수준(구약과 신약과 관계)에서 본문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 교회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보면, "구속사"라는 틀(때로는 온당하지 않은 잘못된 구속 개념을 가지고)이 1차적 본문 주해를 집어삼킴으로서 본문의 문법적-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4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고신대에서 가르쳤던 화란인 고재수 교수의 창 12:10-20을 본문으로 한 "아브람의 거짓말"이란 설교(구속사적 설교의 실제 [CLC, 1991], 16-22)를 실제적인 예로 살펴보자. 거짓말에 대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구속사적 설교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고재수는 위 본문이 세가지 요점을 지니고 있다고 피력한다.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다. 둘째, 아브람의 거짓말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사래의 몸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약속이 위태롭게 되자 사래를 구해내셨다. 고재수는 결론적으로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미 삼천년 전에 우리의 구원을 내다보시면서 사래를 바로의 왕궁에서 건지셨다"라고 주장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삼천년 후에 믿음의 후손들의 구원을 위해 사래를 왕궁에서 구해내신 분"으로 믿었다는 것이 과연 창세기 기자의 메시지인가? 오히려 근접 문맥인 창 12:1-3 의 약속과 연결시켜야 하지 않은가? 여호와께서 사래를 바로의 궁에서 건져낸 사건을 통해, 아브람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겠다고 하신 약속을 성취하는 하나님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은가?
5 오직 성경만으로
앞뒤의 근접 문맥에 주의를 충분히 기울이면서 먼저 본문 자체를 문법적-문예적-역사적 방법으로 해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절정에 이르는 구속사를 너무 "빠르게" 본문 안에 읽어들인 (reading into) 결과 이런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는 성경 본문의 해석을 관장하는 "전체적 태도와 자세"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1차적 주해의 과정에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서 본문을 오해하게 만드는 데 가장 큰 문제점이 있다. 이런 내장적 문제가 있는 한, 약간의 교정과 수정만으로 기존의 구속사적 설교를 지속시킬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오직 성경 본문만으로" 라는 종교 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이 아닐까? 모범적 설교든, 구속사적 설교든간에 성경 본문의 목소리에 먼저 귀를 기울이여 한다면 계속해서 구속사적 설교를 고집하기 보다는 본문 중심의 설교로 돌아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성경 본문은 "구속사적 틀"로 해석해야 비로서 살아나는 해석의 객체가 아니다. 성경은 이미 여호와의 "구속의 계획" 에서 나왔고, "구속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의 충성과 복종을 요구하며 다가오는 살아있는 말씀으로서 오늘의 "인간의 구속에 기여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 본문 자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선포하는 설교를 진정한 의미의 "구속사적 설교" 라고 함은 지나친 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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