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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에 반론한다 / 유해무 교수

하나님아들 2016. 3. 12. 13:45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에 반론한다(유해무) | 설교학과 설교

산곡당 2008.08.25 18:17   http://blog.daum.net/vorgott/16957308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교수)

기독신문은 개혁주의 신학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글을 연재하면서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를 첫 주제로 게재하였다(1998년 11월 4일). 실천신학 전공자가 아닌 구약신학 교수의 설교에 대한 글은 교의학(조직신학)을 가르치는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계속되는 토론을 원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나는 여러 부분에서 김 교수의 주장에 동의한다. 특히 구속사적 설교의 원리는 성경본문의 해석을 관장하는 전체적 태도와 자세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일차적 주해 과정에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써 본문을 오해하게 만든다는 그의 지적에 전적으로 찬동한다. 성경본문은 '구속사적 틀'로 해석할 때 비로소 살아나는 해석의 객체가 아니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구속사적 해석이 체계(틀)가 될 위험은 얼마든지 있으며, 나 역시 그러한 '체계'를 거부한다.

그러나, 기본 명제에 대한 찬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제제기와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견이 있다. 그의 글에 있는 소제목들을 뒤집어서 살펴보겠다.

김 교수는 학교에 다니던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설교 모델이 구속사적 설교였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 모델을 '열애'로 받아들였으나 그것은 급속히 식기 시작했다. 여러 당회장들이 전도사들에게 '자네 설교는 구속사적 설교가 아니라'는 질타를 하는 상황에서 그는 급기야는 '한국식' 구속사적 설교와 결별했다.

구속사적 설교와의 만남?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한국교회에서 '한국식' 구속사적 설교가 정착된 적이 있었는가? 과연 70년대 말에 도대체 어떤 경로를 통하여 구속사적 설교가 한국과 김 교수가 다닌 학교에 도입되었는지는 그의 글에 나타나 있지 않다. 김 교수에 따르면, 구속사적 설교는 주로 화란에서 있었던 논쟁에서 파생된 것이었는데, 과연 그 논쟁이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었는가? 

유학 전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구속사적 설교가 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도 "오랜 유행"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김 교수는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다. 김 교수의 평가대로라면, 본산지인 화란에서도 별로 반응을 얻지 못하고 지나간 주제인데 한국에서 제철을 만났으니 실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 교수의 이러한 냉소적인 평가에는 열애가 식어 증오로 발전한 인상까지 받게 된다. 물론 절제된 글로 표현되었기에 필자의 인상이 부정확할 수도 있겠지만.

인기와의 연결은 부적절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다른 나라의 교회와 신학계에 대해서 싸잡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손쉽게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김 교수의 글을 읽으면, 귀국 후 이 문제를 제기하는 자신을 마치 구속사적 설교의 인기와 유행의 허를 제대로 밝히고 대안을 제시할 수있는 적임자로 은연중에 부각시키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렇게 평가하는 발언으로 김 교수는 예상하지 못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런 투의 이야기는 학자답지 않은 방식일 뿐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논쟁이 화란에서 1944년 이후 소멸되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있는 인기라는 말에서 나타나듯 성경해석에 유행이 있다는 주장인데, 이를 필자는 경계한다. 소멸된 것이 다른 곳에서 제철을 만났다는 표현도 합당하지 않다. 이는 결코 가령 주체성을 상실한 논쟁은 아니다. 설교가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교회와 설교자들의 왕성을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구속사적 설교가 유행과는 관계없이 논의의 주제가 된 것은 반길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구속사적 설교를 인기와 연관시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또 구속사적 설교가 소멸되거나 불을 댕겼으나 별 반응을 얻지 못한다는 말로 구속사적 설교를 폄하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논쟁이나 유행과는 관계없이 화란의 구속사적 설교를 기본으로 하면서 이에 대한 지속적인 반성을 한다고 말한다면 차라리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사실상 구속사적 설교는 인기와 유행을 추구하는 운동이 아니지 않는가?

김 교수의 화란 교회에 대한 언급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으며, 인기와 유행이라는 말을 사용한 평가의 방식도 그릇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 교회에 대한 지적도 부정확하다. 과연 한국에서 구속사적 설교가 "오랜 유행"을 누리고 있는가? 한국교회 안에는 아직도 여전히 '인기와 유행'에 편승하여 그리스도가 설교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도덕적 훈화와 인간 중심적인 설교가 주도하고 있지 않는가? 두 권의 번역서 제목과 어떤 잡지의 특집 기사를 근거로 새로운 계절의 도래와 오랜 유행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너무 빠르게 읽어들인 본문"

김 교수는 구속사적 설교가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경시하는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그 실제적인 예로 화란인 선교사 고재수(N.H. Gootjes)의 {구속사적 설교의 실제}를 언급하였다. 이 맥락에서 고재수 목사는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하지 않는 자로 이해된다. 그런데 화란에서 공부한 김 교수는 화란 신학교육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이 김 교수가 말하는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제대로 못할 만큼 맹목적일까?

김 교수는 "아브라함의 거짓말"이라는 고재수 목사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결론을 인용하면서 고 교수가 근접 문맥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구속사를 너무 '빠르게' 본문 안에 읽어들인(reading into) 결과 이런 식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가 쪽까지 지적하면서 비판한 설교의 본문을 읽으면, 근접 문맥의 창세기 12:2의 언약을 언급하고 있으며(20쪽), 그 다음에 나오는 "이삭의 거짓말"에 대한 설교를 읽으면 그것과 아브라함의 거짓말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도 본문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김 교수가 비판적으로 인용한 부분은 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즉 김 교수가 개혁주의적 해석 방법론이라고 주장하는 문법적-역사적-신학적/정경적 해석에서 앞의 두 부분을 한 후, 신학적/정경적인 맥락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음을 결론으로 이야기하는 문장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들어서 근접 문맥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구속사를 너무 '빠르게' 본문 안에 읽어들였다고 할 수 있을까?

김 교수는 비판하는 사람의 글의 근접 문맥을 무시하고 설교의 결론을 마치 본문 주해의 과정인양 너무 빠르게 읽어들였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학문훈련을 받은 이가 전후 문맥을 경시한 채 이러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학문적 논의 이전에 있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김 교수는 구속사적 설교는 본문을 오해하게 만드는 내장적(內藏的) 문제점이 있으므로 지속시킬 필요가 없고 오히려 '오직 성경 본문만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미 여호와의 '구속의 계획'에서 나왔고 '구속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의 충성과 복종을 요구하며 다가오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오늘의 인간의 구속에 기여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경의 자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선포하는 설교를 진정한 의미의 구속사적 설교라고 주장한다. 결론의 이 말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이면 모두 동의할 것이고, 구속사적 설교를 옹호하는 이들 모두도 이 말에 대해서 동의할 것이다.

"오직 성경만으로"?

그런데 김 교수는 글의 중간 부분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이 구속 역사가 성취되었다는 것은 '포기' 해선 안될 개혁주의적 해석 방법론이다"고 이야기했다(강조는 필자). 물론 맞는 말이지만 상당히 부족한 말이다. 신약성경을 보면 구약이 어떻게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는가를 매우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지, 당시의 유대 랍비들의 압력 때문에 구약을 기독론적 성취로 해석하는 것을 '포기'할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적극적성의 배후에는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는 말씀이 있다.

동일한 적극적인 정신으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함께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의 기치를 선양했다. 우리 역시 머뭇거리지 말고 두 가지를 함께 주장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 구약을 상고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여 그리스도에게 오기를 거절했다(요 5:30-41). 그리스도에게 나오지 않는 한 유대인들의 영생이라는 말도 공허한 말이다. 김 교수는 성경을 "인간의 구속"을 위한 말씀으로 바르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 말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 더 보강되어야 할 것이다.

의도적인 대립 구도의 "문제"

김 교수의 글은 유려하고 읽기 쉽다. 그러나 무엇이 빈 것 같다. 다시 찬찬히 읽으면 그 글이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비판하면서 대립 구도로 전개됨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김 교수는 일차적인 문법적-역사적 주해를 끝낸 후 이차적으로 신학적/정경적 해석을 해야 하는데, 구속사적 설교에서는 이차적인 작업이 일차적인 주해를 "너무 빠르게" 집어 삼키는데 내장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문법적-역사적 주해를 먼저 철저히 하자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나 역시 동의한다. 그러나 성경해석은 오직 김 교수가 말하는 일차적 주해로부터만 시작해야 하는가? 문법적-역사적 주해를 하면 모든 주해자가 결국 동일한 해석의 결과를 얻게 된다는 말인가? 이러한 객관주의를 김 교수가 주장한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김 교수는 그러한 단계론적 구분을 비판하기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점에 있다. 

일차적인 작업만 하고 이차적인 작업을 하지 않는 해석은 없다. 두 단계의 상호의존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구속사적 설교에서도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하며, 근접 문맥이 아니라 성경의 장르를 중시하면서 정경적인 맥락에서 주어진 본문을 살핀다. 그가 거명하면서 비판한 고재수 교수의 {교의신학의 이론과 실제}(디다케, 1992)에 실린 구속사적 설교에 대한 논의를 보면 이러한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김 교수는 구속사적 설교 원리가 정경적/신학적 해석법에 속한다고 전제하고 비판을 한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가 없는 두 번째 단계는 없는 것이다. 사실 김 교수도 "너무 빠르게"라는 표현을 쓴 것처럼, 이것은 정도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정도의 문제'로 보지 않고 두 가지의 대립되는 것으로 보면서 글을 전개한다. 말하자면 그는 상상적인 대립 구도를 전제하고서 이를 부수는 해체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김 교수는 구속사적 설교를 "너무 빠르게" 비판한다. 마치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사전 정지 작업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표현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건설적 비판을 제안하면서

이 논쟁이 좀더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는 한국 교회의 설교의 상황을 좀더 직시 할 필요가 있다. 과연 개혁주의신학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연재에서 "'구속사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가 첫 주제로 취급해야 할만큼 구속사적 설교가 개혁의 대상인가?

필자가 보기에는 김 교수가 염려하는 식의 내장적 문제를 지닌 구속사적 설교가 한국에는 아직도 정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도리어 그런 내장적 문제를 지닌 설교라도 정착이라도 하기를 필자는 염원한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설령 내장적 문제를 지닌다 하더라도, 모범적이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가 선포되기를 갈망한다. 한국 교회 안에는 아직도 여전히 '인기와 유행'에 편승하여 설교의 주인공이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도덕적 훈화와 인간 중심적인 설교가 강단을 가히 장악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의 대다수의 설교자들이 김 교수가 비판하는 구속사적 설교를 '제대로'라도 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랄 뿐이다. 이런 상황이 형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병폐를 논의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사실상 구속사적 설교는 인기와 유행을 추구하는 운동은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내장적 문제'를 지닌 구속사적 설교는 한국 설교강단의 중심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버려져 있다. 그것은 정말로 '내장적' 문제의 연고가 아니라, 많은 설교자들이 김 교수가 추구하려는 문법적-역사적 해석을 바로 할 수 있는 신학교육과 훈련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설교에서 그대로 추구하고 있는지를 살피면 왜 필자가 이런 안타까움을 표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비록 주경학자가 아니지만 문법적-역사적-신학적 주석을 기초로 하여 설교하려고 애쓴다. 교의학자인 나는 이런 주석에 기초하여 구약의 본문도 기독론적일 뿐아니라 '성령론적'으로 해석하고 설교할 수 없을까를 궁리하고 있다. 즉 '내장적' 문제를 탈피한 구속사적 설교를 나 역시 추구한다. 어차피 김 교수 역시 구속사적 설교를 추구하는 이상, 용어상의 이해 차이를 무슨 엄청난 문제를 내포한 개혁의 대상이라도 되듯 구속사적 설교를 취급하는 인상을 지양할 수는 없을까. 마치 무슨 큰 토론의 내용이라도 있는 듯이 구속사적 설교 일반을 죄인 취급하는 것은 아직도 설교가 여전히 바뀌어져야 하는 한국교회에 의구심만 가중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비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건설적인 비판만이 교회와 설교자들에게 유익을 끼칠 것이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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