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스크랩] 기독교 구원론의 구조와 핵심진리

하나님아들 2015. 12. 23. 14:57

 기독교 구원론의 구조와 핵심진리

 

 

하나님의 인격적인 말씀은 순결하고 단순하다. 계몽주의 회의주의자들은 성경에 대해서 의심하였고, 그들에게 영향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오직 성경에 제시된 대로 한가지 뿐이다. 바울과 실라 일행이 빌립보 성에 이르자 한 여인이 “구원의 길” (행 16:17)을 증거하는 귀한 분들이 오셨다고 소리쳤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그 여인을 회복케 하였다. 구원을 얻는 길은 마음을 열고 주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에게나 유대인에게나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을 구원하시고 생명과 영생을 주셨다. 성령께서는 구원의 복음을 전 세계에 증거하도록 사도들에게 강림하여서 힘과 능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들은 박해와 고난을 뚫고 다니면서 전파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구원이다. 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것은 죄악된 인류문명이다. 썩고 부패한 인간의 본질을 외면하고 호도하는 현대인들은 독선과 오만과 아집에 빠져있다. 사이비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서 엉터리 확신을 가지게 된 사람들도 많다. 구원의 방법과 내용과 구성에 대해서 거짓된 허상을 주장하는데도 분별하지 못하고 따라가는 자들이 많다.

모든 기독교 교회는 구원에 대해서 정확한 깨달음을 갖춰야 한다. 첫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증거해야 한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합된 삶으로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교통하는 축복이다. 둘째, 구원의 복음에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하나님의 지혜로 준비되고 집행된다는 사실이다. 구원의 길은 사람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수도자들이나 명상이나 득도해서 가는 길이 아니다. 셋째, 구원을 받기 위해서 인간이 선행과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만 한다.

필자는 우리 한국교회가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기원한다. 한국교회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다시금 회복하고 발견해서, 역동적이며 감동이 넘쳐흘러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감격스러운 나날이 속회 오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지금 한국교회는 종교다원주의와 평화주의가 물결치듯이 넘나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포용주의와 변질된 혼합주의에 빠진 이들이 “만인구원론” “보편속죄론”과 같은 헛된 구원론을 퍼트리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왜곡하고, 무지하고 아집에 빠진 자들은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 마치 부실공사로 세워진 건물이 무너지듯이, 어느 날 큰 소동과 함께 끝이 나고 만다.

한국에서는 사이비 구원론을 가르치는 소위 “구원파”가 퍼져있는데, 권신찬, 유병언 계열, 이요한 (이복칠), 박옥수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안상홍 증인회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여자 교주 장길자의 지도하에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신천지의 이만희 교주는 잘못된 예언 해석으로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변질시킨 사이비 기독교가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가짜 구원론을 가르치는 불건전한 종파들은 너무나 다양하여 그 수를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변칙적으로 기생하는 이단들의 횡설수설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최근에는 현대신학자들이 보편속죄론, 만인구원론, 종교다원주의, 신사도운동 등이 구원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흔들고 있어서 철저한 경계가 필요하다. 

요즘 한국 기독교계에서 널리 읽히는 책들은 거의 다 간증이나 고백에 해당하는 체험담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체험담들은 세상적으로 크게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서 호기심을 끌기도 하지만, 매우 자극적이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복음의 핵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다 빠져버리고 성공한 주인공들이 쏟아내는 영웅주의  에 찬사를 보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개념에도 맞지 않는 이 시대의 탁류를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주시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맛보게 되기를 소망한다

1. 구원 역사의 기본구도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핵심 진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구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독교는 인간의 구원에 초점에 두고 역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것이다. 인간의 지위와 존엄성은 매우 고귀한 것이지만, 타락의 비극으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내적인 본성에 엄청난 변질이 초래되었다. 인간은 깨트려진 꽃병과 같이 부서지고 말았다.

구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참된 지혜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들이 있다 (요 9:39).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믿고 성경에 기록된 바를 받아들이는 참된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 행복한 삶을 누리는 사람이다. 두 번 째 부류의 사람들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면서 자율성을 주장하지만 공허한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는 불신자들이다. 영적인 맹인들이다.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과 사이비 유사 기독교에 속한 자들도 여기에 속한다.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자들은 무엇을 믿는가?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 두 가지 선택밖에는 없을 것이다.

 

1) 첫째 부류의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이 세상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막연하게 짐작하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진리는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인생은 어떤 목적도 없으며, 우연히 존재하게 된 것이므로 우리가 창조적으로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으므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윤리마저도 순간적인 선택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런 절대 진리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아서 너무나 “비이성적인” 세상만 남게 될 것이다.

2) 또 다른 하나의 선택은 기독교의 하나님 대신에 다른 여러 신들 중에서 하나의 신을 택하여 숭배하는 길이다.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빠져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엄청나게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과연 어떤 신이 가장 참되고 훌륭한 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경우에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택한 신이 최고라고 옹호하고 주장할 것이다. 종교를 가졌다고 하지만 이런 이기적인 자기주장에 빠져 버리게 된다. 혹자는 자기의 합리성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들은 이성주의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에도 결국은 사람 중심의 자율성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결국 신에 대한 결정들이 각자 사람의 생각에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고, 사람의 판단에만 의존하게 되고 만다.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만, 비이성주의나 이성주의나 간에 인간은 피곤하기만 하고 자기 방어적이 되나, 인간은 결코 자율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다. 사람은 진리에 대한 최종적인 기준을 갖고 있지 못하여서 각자 자기의 주장을 거듭할 뿐이며 계속되는 대립과 논쟁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특히 현대인들은 극심한 개인주의에 빠져있다.

개인적인 만족을 추구하지만, 과연 남보다 엄청난 성취를 했다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남보다 많은 돈이나 높은 명예나 학벌이나 직위를 얻었을 때 희열과 성취감을 느끼지만, 이런 것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성적인 쾌락도 마찬가지여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은 행복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오히려 인생은 시합을 앞둔 선수처럼,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는 수험생처럼 내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가, 뜻밖에 벌어지는 사고와 죽음 앞에서 절규하는 것이 인간이다. 한층 더 높은 영적인 차원의 관계가 맺어져 있어야만 안심하게 되고, 내적인 여유와 평안함을 갖게 된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오묘한 부분이 많다.

 

1.1. 창조하신 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낙원이요, 이름은 에덴동산이다 (창 2:10). “에덴”이라는 명칭은, 고대 아카디아어에 남아있는데, 고대 근동지방의 대중언어 아람어에는 “열매가 풍성하고, 물이 풍족한 초원” (fruitful, well-watered)이란 뜻으로 통용되었다. 최근에 히브리어 학자들은 “에덴”이라는 단어는 원래 아카디아어 “에딘누” (Edinnu)가 아람어를 거쳐서 히브리어로 변형된 것으로 본다. 에덴은 푸른 동산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낙원이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최초 상태는 떼를 지어 노는 동물들과 자라는 식물들이 그들의 창조주께 찬양하는 모습이었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시65:13).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누리게 되었던 축복은 자연적인 풍성함으로 그치지 않는다. 에덴 동산의 축복 중에 핵심은 하나님과의 자연스럽고 인격적이며 영적인 교제의 특권을 누렸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시고, 대화하시고, 가르쳐 주시는 자기계시를 보여주셔서 진리를 맛보았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에서 살던 사람은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류를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복종하여야 하는 피조물의 위치를 지켰더라면,  인격적으로 말씀을 듣는 자에게 생명의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류를 맺고 살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과 인간은 언약관계로 맺어져 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고 사람은 불순종하고 배반하며 약속을 깨트리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생활, 천국생활의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있었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사이에는 내면적으로 영적인 교통이 있으며, 마치 호흡이 통하고 피가 흘러가므로 영향을 공급받는 것과 같다. 하나님과의 교통하고 영적으로 교류하는 삶이 영원한 생명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재창조의 과정 속에서 모든 만물을 진행하시려는 뜻과 계획을 세우셨고,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준비된 대로 집행하고 있다 (엡 1:1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혜로 세상과 인간을 향하여 계획을 세우셨고, 작정하신 대로 자유롭게 선하심과 은혜를 펼치신다.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와 작정을 펼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드러내어 펼치고자 아무 것도 없는 우주 속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만드셨고, 최종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명령하셔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지으셨다 (창 1:24).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이다 (롬 11:36).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며 오직 창조주만을 경배하게 하고자 지으신 것이다 (시 19:1-4, 사 66:1).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이며, 자신의 뜻대로 통치할 권리를 가진다 (시 24:1-2).

피조세계의 구원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에서 나왔다. 본성이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살려주시고, 모든 위험한 상황에서 건져내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선하심을 베푸셔서, 영적인 축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벌어지는 위험과 특별한 상황에서 건져주시고 구출해 내신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사람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시는 것을 표현하고자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구원자”가 되신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다”는 뜻이다 (마 1:21).

최초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한 이후로, 죄인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저주와 심판이었다. 그러나, 아담 이후로 참된 성도들은 회개하므로 죄의 용서와 사하심을 얻어서 저주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죄와 진노로부터 구출된 사람들이요, 건져냄을 받은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살아야 할 인간의 도리에 대해서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개념이라고 배척한다. 안타깝게도 보이는 것 외에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결국, 인류의 궁극적 미래에 대해서 무지하며, 소망이 없는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을 향한 지식을 거부하고 싫어하므로 인해서 영적으로는 죽은 생명이다. 그저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이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두려움과 불행한 마음을 갖고 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헛된 우상으로 섬기고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자신이 우매하지 않다는 허망한 착각에 빠져있다 (롬 1:18-25).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지금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역에 대해서 의심하고 불신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 사람들의 행동들이 과연 어떠한가를 냉정하게 돌아보자. 이 세상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에 혈안이 되어있고, 더 유명해지고 싶어서 인기나 명예를 얻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지식적으로 우월해보려 하고, 남들을 호령하고 명령하는 높은 권세를 얻기 원한다. 젊은이들은 육체적으로 즐기는 오락과 쾌락의 만족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도박이나 마약이나 술에 취하여 사는 사람들도 허다하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 사람들이 벌이고 있는 일들이란 모두 이와 같은 것들이다. 모두 다 일시적인 것들이요, 사람을 파괴하는 것들에 빠져있는 것이며, 영원한 행복을 얻기에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20세기에 치러진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 1950년대 한국전쟁, 월남 전쟁, 경제적인 소용돌이와 각종 테러 사건들, 중동 국가들과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혼돈과 내전, 각처에서 지속되는 권력다툼과 살상들,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들, 원자로 유출 사건, 지진과 쓰나미 등 인류역사는 암흑과 의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그런데도 정직하지 못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기독교의 진리를 거부하는 세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현대 신학자들마저 기독교를 인간의 종교로 전락시키고, 초월하신 하나님을 불신하는 일을 부채질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선하심과 사랑을 누리고 살면서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함이었다. 하나님과의 교류가 없으면 불행하게 되는데도, 사람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거듭해서 반항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다. 구원이란 반항하고 거역하는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반항하고 거역하는 죄를 범하여 영원히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자기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대속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완성해 놓으시고 그로 인한 특별한 효력을 발생하는 믿음의 행동들을 일으키신다.

기독교의 기본진리이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여 천하 만민에게 회개케 하고 구원을 주신다는 소식이다 (눅 24:25-27, 46-47).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모든 계획을 행하셨고, 성령께서 지금 그것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보존하신다. 기독교의 핵심 교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의 역사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파악해야만 한다. 성경에는 인간을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담겨있다.  

하나님께서 왜 구원을 베푸시는가? 하나님의 속성과 인격에서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을 동시에 가지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아름답고 좋은 세상을 지으셨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에는 어떤 결함이나 흠결이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완벽하신 손으로 하신 작품이었기에 보기에도 선하고 아름답고 좋았다.

1.2.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

 

아담의 후손들이 인간 사회를 형성하여 땅위에서 번성토록 하셨지만, 죄에 대한 형벌은 피할 수 없다. 죄에 대한 가장 과격한 형벌이 죽음이다.

죽음은 상실이요 단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형벌을 내리신다고 정해 놓으셨다 (시 5:5, 나훔 1:2, 출 34:7, 민 14:18, 신 7:9-10, 시 7:11, 11:5-7, 사 5:16, 10:22, 59:16-18, 단 9:14, 계 16:5-7). 이 형벌은 사탄에게도 동일하게 그가 범한 일에 대해서 내려졌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4-15)

하나님이 처음 지으신 세상에는 아름답고 선한 것이었다. 이제 죄가 들어온 후에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 영원한 원수관계가 설정되었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요, 대립이요, 다툼이다. 그 누구도 예외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 다 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어졌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기 전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만 초점을 맞춰서 살았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두 가지 권세가 대립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이요, 다른 하나는 사탄과 그 세력들이 지배하려고 하는 힘이다. 물론, 사탄의 세력이나 권세는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다. 결코 하나님과 동등한 세력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싸움은 역사가 종결될 때까지 지속되면서 심각한 댓가를 만들어나간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언약의 머리와 연계되어져 있다. 이제는 오직 두가지 입장 중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졌다. 사람은 이 두 가지 입장에서 어느 쪽이는 한 편에 가담하여 살아가게 되어졌다. 하나는 범죄한 아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저항하며 반항하며 거부하는 자들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자신의 죄를 사함 받고 영생을 상속받는 자가 된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악과 싸우며, 지속적으로 뒤꿈치를 물려고 하는 하나님의 대적들과 맞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주어진 언약적인 지위이다.

아담의 죄는 죄의 근원이자, 모든 인류의 죄악이며, 모든 사람이 각각 참여하는 죄악이다. 아담의 죄악에 물든 본성이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끼쳐서 태어날 때부터 죄의 상황 하에서 후손을 낳고, 살아있는 동안에 죄를 범한다.

로마서 5장 12절로부터 19절을 주목하여 보면, 아담의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죄의 실체를 뿌리고 있음이 선포되어있다. 초대교회 신학자 어거스틴의 해석을 계승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은 원죄 (original sin)과 원천적 부패 (original pollution)가 긴밀하게 연관을 맺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아담과 연계된 모든 인간은 원천적인 부패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서 원천적인 죄책을 벗어날 수 없다.

원죄의 영향 하에 살아가는 인간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저주 받은 자로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보면, 원죄나 원천적 부패함이나 하등 차이가 없다. 굳이 두 가지를 나누어서 분리시킬 필요가 없다. 부패함에서 원죄가 나온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미 하나님의 통찰력 앞에서는 더럽고 불결하여서 심판 앞에 놓여있다. 

로마서 12장 5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2절을 통해서 아담과 후손들 사이에는 단순히 육체적인 후손이 될 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구조와 인류의 구속을 포함하는 연속되어지는 통일성의 본질이 있음을 지적한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아담 안에서” 원천적인 죄와 근본적인 부패 가운데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속한 자들은 다시 일으킴을 받게 될 것이다 (마 25:32, 요 5:28, 행 24:15, 고후 5:10, 계 20:12-13).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미혹하려는 순간에 파멸시키지 않았던가? 철저하게 박멸해 버렸더라면 이처럼 하나님과 대립하면서 싸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대립적으로 맞서서 공격하는 사탄의 세력을 함께 존재하도록 허용하셔서 이렇게 불순종하며 반항하는 세상으로 변질되도록 놓아두시는가? 언제라도 하나님께서는 모조리 다 멸망시킬 수 있지 않는가? 이런 의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사람의 지식으로는 충분히 다 이해할 수 없다.

자기 모순에 빠진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해답을 얻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초월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와 섭리가 진행되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모든 만물의 진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도록 조치되어져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통제하고 있다 (롬 11:36).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완벽하신 계획대로 진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어떤 영적인 세력과의 싸움이라도 방치하지 않고 직접 간섭하시며, 통치하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격려와 지원을 받는다 (엡 6:10-18). 그 싸움에는 믿음의 변호와 옹호가 포함된다 (벧전 3:15, 유 3).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 (요나서 2:9). 구원이란 하나님이 베푸시는 죄사함을 받아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죄를 범한 사람은 죽음과 파멸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동물의 피를 속죄 제물을 바치고,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해주셨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어 죄 값을 치루시고, 그의 백성들을 사망의 형벌로부터 건져주셨다. 음행한 여인도, 세금을 착취한 관리도, 강도와 살인범이라도 죄를 회개하고 뉘우친 후에 용서해 주셨다. 구원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데,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눅 18:17).

구원은 죄와 그 형벌로부터 건져주시는 것이다. 구원은 사람이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이다. 사람은 부패하여서 어리석고 무지하나, 하나님은 자애로운 분이셔서 그런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신다 (약 5:11). 구원이란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람을 죽음과 위험한 상태에서 구출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와 저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다양하게 예비하신 것들을 드러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대적자들로부터 놓임을 얻게 하고, 배고픔이나, 빈곤이나,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살려내셨다.

성경에 담긴 인류 구원의 역사 속에 중요하게 취급된 사건들의 배후에는 영적인 의미가 포괄적으로 들어있다. 구원이란 당장 시급한 단순히 전쟁이나 기근이나 질병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이 세상에 살도록 얼마동안 더 연장시켜 주신 것만이 아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를 범하여 멸망당할 인간을 영원한 파멸과 죽음에서 건져내어서 영생으로 인도하는 포괄적인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구원사건들이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것들을 보여준다.

 

첫째, 출애굽 사건은 인류 구원 역사의 사건들 가운데 가장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구원 사건이다.

압박과 모욕과 처절한 속박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다. 구원은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이 받아야 마땅한 처참한 멸망과 죽음, 형벌과 저주로부터 건져내는 것이다.

시편 3편 8절에,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고 하였다.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 53:6).

“구원하였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특별히 하나님께 서 자기 백성들을 주변 강국들의 침략과 압박에서 살려주신 것을 의미하였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백성들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바로 구원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전개된 구원의 사건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출애굽을 통해서 드러났다. 광야 40년 동안에 모세와 백성들은 매일 극한 상황 속에서 목숨의 위험을 느끼고 있고 있었는데, 절묘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거의 모든 수단들을 다양하게 동원하여서 그들을 살려내시고 보호하셨다.

둘째, 전쟁으로 멸망당할 위기의 상황에서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는 것을 가리켜서 “구원하신 행동들”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을 그의 대적들로부터 건지셨다는 것이 가장 기본인 구원의 의미다. 정복과 침략의 야욕을 가진 이웃 나라들이 전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대적자들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였다 (시 44:7). 구원이란 파멸의 위기에서 구출해 내는 것이다 (시 3:8). 수없이 많은 전쟁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신 기적적인 역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앗수르가 침략하자,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고 간구하였다 (왕하 17:19). 그 기도를 들으시고 “내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고 구원하리라” (왕하 17:34)고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천사가 앗수르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명을 멸망하였다. 오만 방자하던 앗수르 왕 산헤립을 치신 것이다.

신구약성경에서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축복들을 포함하면서 훨씬 더 큰 것을 포괄하는 단어이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대하심과 그 효과들을 일컫는 말이다.

셋째,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질병에서 놓임을 얻도록 치유하였는데, 그것을 구원이라고 단순하게 말하고 있다. 병이 깊어져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가, 고침을 받아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을 구원을 받았다고 하였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단지 죽은 후에 얻는 천국행 티켓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에게 구원을 간청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막 5:23).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는 항상 질병에서 살려주시는 일이 벌어졌다. 죽은 자를 세 번이나 살려내시고, 마침내 주님 자신이 부활하신다. 생명의 주인이심을 알려주시다가, 예수님이 친히 최초로 부활체를 보여주셨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과 아픔에서 놓임을 얻는 것이다. 오랫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성이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병고침을 받고자 열망했다. 그녀는 남다른 믿음을 갖고서 실행에 옮겼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막 5:28).

1.3. 구원은 죄사함과 영생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병고침을 받으려고 몰려들어서 혼잡스러운 상화에서도 이를 파악하시고 구원을 베푸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 5:34).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믿음으로 간구하던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병고침과 함께 얻은 새 생명의 축복을 구원이라고 하였다. 병에 걸렸던 사람들이 그저 몸에 가졌던 질병에서 놓임을 얻었다고 해서 모든 필요를 다 얻었다거나 행복을 되찾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육신의 병을 안고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짓눌린 영혼의 공포와 두려움, 영적인 아픔과 고통에서도 동시에 놓임을 얻게 되어졌다.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단순히 질병을 고침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육체의 아픔과 함께 짓눌린 영혼과 인격과 삶이 해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에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많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들을 믿으며, 사람의 힘을 의지하였다. 마음에 있던 오만과 교만을 버리고 고침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 17:14)
 
사람들에게는 육체의 질병과 거의 유사하게 영혼의 부패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겉으로 나타나는 육신의 질병, 개인의 질병에서 놓임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하지만, 마음에 자리잡은 질병, 목이 곧은 백성들로서 하나님께 저항하며 반항하는 오만과 교만한 심령들과 음욕, 탐욕, 악한 생각, 더러운 이를 탐하는 욕심, 질투, 쟁투, 경쟁심 등등 먼저 치료를 받아야하는 심령의 불순물들이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일어서 빠져 죽을 것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제자들을 살려주셨다 (마 8:25).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긴박한 순간에 제자들을 구원하였다. 하나님과 예수님 모두에게 “구원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딤전 1:1, 딤후 1:1).

다섯째, 구원은 하나님과의 단절된 교제가 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추방될 때에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와 임재를 시작하는 새로운 길로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평화와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시대가 열리기를 소망하지만, 전쟁과 복수로 얼룩진 사람들에 의해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단절이 회복되어야만 가능하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이 연결시켰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나누는 효과와 열매가 바로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가 넘쳐흐르는 정의로운 사회이다.  

인간은 이 가장 절박한 영적인 구원의 필요성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나 손으로 만지는 것이나 느끼고 맛보는 것에만 사로잡혀서 초월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전쟁과 죽음의 위기와 절망을 순간 순간 맛보면서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싫어한다. 만물의 주인 되셔서 놀라운 능력과 가르침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다 (마 13:5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한이 없으셔서 회개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맺은 사람들에게 화해를 허용하신다. 계속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한, 결코 인간들 사이의 평화가 주어지지 않는다. 근본적인 왜곡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이 무너지고 평화가 있을 때에만, 이 세상 사람들 사이의 평화가 지속되어질 수 있다. 이 세상에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전쟁과 경쟁과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다 포함되어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얻게 된 것이 총체적 구원, 전인격적인 구원, 우주적 구원,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2.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자기 노력으로 사망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 어떤 종교나 사상이나 철학으로 해결할 수 없다. 구원의 얻는 방법은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대로 따라야만 가능하다. 구원으로 인도해 주시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존귀하신 구세주로 믿고, 온 마음으로 신뢰하며 의존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다.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초대하신다. 하지만 그를 따라가는 길은 좁은 길이어서, 찾는 사람이 적다고 하였다. 외뢰운 길이지만, 진리와 생명이 있는 구원의 길이다. 이 길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통해서 주셨던 것들의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길을 열어놓으셨다.

 

2.1.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종교적인 방법을 찾아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구원이 가능하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세주로서 나타났다 (눅 1:47).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구원을 시행하는 “구세주” (savior)다 (눅 2:11, 딤전 1:1, 딤후 1:1).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구세주가 되신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뜻이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냈다. 예수는 구원자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시행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해서 예비하신 은혜를 베푸신다는 메시야 사상을 왜곡하고 말았다. 기독교의 구원체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어떻게 고백하느냐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결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핵심으로 작용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열어놓은 새로운 길로 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명칭은 “구세주”이다 (헬라어로 “쏘테르”이고, 영어로 “Savior”로 번역되었다, 눅 2:11, 딤후 1:10, 딛 1:4, 2:13). “구세주” 혹은 “구원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신 일은 구원 (헬라어로 “쏘테리아”, “쏘테르”) 이다 (요 4:22, 행 4:12, 엡 1:13, 히 1:14, 계 12:10). 성경에서 이 구원자의 개념은 하나님의 이름과 연계되어 있을 만큼 매우 중요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헬라어 “그리스도”와 히브리어 “메시야”는 같은 뜻을 가진 단어인데, 두 단어 모두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서 권위를 가진 자이며, 독특하게 구별된 직분자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그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서 약속하신 일들과 거룩한 사명들을 수행하게 하였다 (눅 4:18-19). 누가복음 24장 26절과 로마서 9장 5절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한 구원 사역을 감당하는 직분자로 지명되었음을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자 “인자”로서 오시는 분을 구별된 명칭으로 알려주셨다. 이런 명칭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쉽게 알려주셨다. 구원의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드러났다. 오랫동안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해 오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더 탁월한 방법을 보여주셨다. 죄인들에게 다가올 궁극적인 운명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구출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9-10)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주권을 드러내어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자비로우신 행동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구원의 길”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지식이 아니다. 사람이 찾아서 만들어 낼 수 없다.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기다리시는 인자하신 아버지 같으신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되어졌다.

예수님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주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라고 그들의 정체성을 인식시켜 주셨다 (마 3:2, 막 1:14-15, 행 1:3).  이 땅위에 살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백성이다.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된 사람들, 구원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되어서 경건하게 살아간다. 구원은 개인적인 이익이나, 특권이나, 욕심을 만족시켜 주는 사건이 아니다. 구원이란 인간의 욕망과 욕구와 절실한 바램을 채워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게 된 인간의 존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서 서로 사랑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서 절망과 죽음의 인간사회에 빛과 진리와 자유함을 시행하는 데 목적을 둔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행 16:17)

 

그리스 땅 빌립보 지역에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던 바울과 실라를 소개하는 이 단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 선교이며, 복음을 듣고 먼저 이 길에 들어선 자들이 감당해야할 임무이다.  

기독교의 진리를 공부하고 연구해온 성도의 사명은 “구원의 길”을 열어주어서, 사람에게 참된 행복과 사랑을 맛보게 하는 일이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구원의 감격을 맛보게 하며, 날마다 새 힘을 주셔서 주님의 뜻 안에서 살도록 해 주신 것들을 소개하는 일이다. 성령의 도우심과 감동하심으로 그리스도의 통치와 보호 가운데 참여하도록 함께하신다.

 

사람들은 인생의 전부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믿고 의존하는 것에만 매달려서 먹고 살아가는 것에 매달려 있다. 가정에서, 전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혹은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 안에서, 혹은 직장이나 공장 안에서, 모두들 나름대로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보다 나은 생활, 더 좋은 것과 더 바람직한 목표를 성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전통과 관습에 젖어서 바쁜 행실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실력에 대한 과신과 자만심에 가득 차서, 자기가 듣고 생각하대로 살아가고자 할 뿐,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헛된 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신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죄수들이 감옥에 잡혀 들어간 후에야, 피눈물을 흘리면서 반성하는 것과 유사하다. 순간적으로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인죄를 범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과오를 왜 그때에 좀 더 깨우치지 못했던가를 나중에 가서야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죄 값을 치루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듭 반복되는 자신의 판단 착오와 행동의 실수와 말의 오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만을 믿고 붙잡으려 한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어떤 것이 참된 진리인지 분명히 구분치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인생이다. 마침내, 하나님을 거역한 죄 값을 치르게 된다.

“길”이라는 낱말에는 수단, 방법, 방편 등의 뜻이 들어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열린다. 구원의 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교단이나 교리의 전통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기도 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구원의 길을 사람이 선행과 공로를 채워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은혜인데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성취해 낸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개신교회에서는 성경에 따라서 오직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의 공로만을 의지한다.  

최근에 미국 침례교회 신학자 레인보우는  「구원의 길: 칭의 안에서 기독교인의 순종」 에서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 양쪽 모두에 대해 인간의 선행과 노력을 바르게 취급하라고 주장한다. 절충주의 입장에 선 레인보우는 칭의와 성화와의 관련성을 다루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기에 로마 가톨릭에는 칭의론이 왜곡되었음을 비판한다. 하지만 개신교인들을 향해서 무분별한 반율법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인간의 행동과 노력을 결코 축소시키지 않는다는 입장을 바울서신과 야고보서, 루터와 칼빈의 저술에 근거해서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절충주의는 오히려 모호한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열어 놓은 구원의 길은  과연 어떤 길인가? 예수님은 세상의 성공이나, 행복이나, 물질적인 축복을 얻는 길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면, 이 땅위에서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출세와 권세와 영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의 절실한 기도와 절박한 소원을 들어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적인 인기와 성공을 보증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은 다 실망하고 말았다. 예수님의 길은 세상의 방식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영원한 진리 가운데 인도함을 받아 살다가 영생을 누리게 되는 길이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이 제시하고 열어놓으신 길을 따라가는 방법은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약 2:1)라고 하였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믿음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용서의 방법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돌아가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2.2. 구원으로의 초대

 

예수를 믿고 죄를 고백하여 사함을 얻어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전도와 권유와 권고의 초청을 통하여 전인류에게 알려진다. 전도라는 것은 사람의 입으로 수고를 통해서 실행하는 것이기에 매우 더디고 느린 방법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채택하실 수 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강요와 강압을 사용하진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무시당하고 외면당하신다. 천재지변을 일으키거나, 가공할만한 자연현상을 통해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구원을 호소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더디고 어리석게 보이는 방법을 택하신다.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들을 보내셔서 사람의 말로 귀에 들려주시고, 그들을 건져내셨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행 2:21)고 말씀하셨다. 듣지 못한 자를 어떻게 고백하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래서 누군가 전파해야만 한다. 전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달려가야 가능한 일이다. 보냄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증거하고 전파할 것인가. 그래서 먼저 들은 사람들 중에서 선발하여서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특수하게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백성들에게 나가서 하나님을 대표하도록 하였다. 사람의 수준에서 같은 이해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증거하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전도의 말씀을 대체로 잘 받아들이지 않지만, 이 방법 외에는 달리 사람을 감동시키는 길이 없다. 한없이 어리석게 보이고, 무식하게 취급되기도 한다. 왜 자꾸만 전도하러 찾아오느냐, 귀찮게 그러느냐고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증거하는 일을 쉬거나 멈출 수 없다. “예수 믿으세요”라고 권유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다시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인생의 전부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믿고 의존하는 것에만 매달려서 먹고 살아가는 것에 매달려 있다. 가정에서, 전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혹은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 안에서, 혹은 직장이나 공장 안에서, 모두들 나름대로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보다 나은 생활, 더 좋은 것과 더 바람직한 목표를 성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전통과 관습에 젖어서 바쁜 행실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 실력에 대한 과신과 자만심에 가득 차서, 자기가 듣고 생각하대로 살아가고자 할 뿐,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라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헛된 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신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죄수들이 감옥에 잡혀 들어간 후에야, 피눈물을 흘리면서 반성하는 것과 유사하다. 순간적으로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인죄를 범한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과오를 왜 그때에 좀 더 깨우치지 못했던가를 나중에 가서야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죄 값을 치루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듭 반복되는 자신의 판단 착오와 행동의 실수와 말의 오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만을 믿고 붙잡으려 한다.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어떤 것이 참된 진리인지 분명히 구분치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인생이다. 마침내, 하나님을 거역한 죄 값을 치르게 된다.

“길”이라는 낱말에는 수단, 방법, 방편 등의 뜻이 들어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열린다. 구원의 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교단이나 교리의 전통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기도 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구원의 길을 사람이 선행과 공로를 채워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은혜인데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성취해 낸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개신교회에서는 성경에 따라서 오직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부활의 공로만을 의지한다.  

최근에 미국 침례교회 신학자 레인보우는  「구원의 길: 칭의 안에서 기독교인의 순종」 에서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 양쪽 모두에 대해 인간의 선행과 노력을 바르게 취급하라고 주장한다. 절충주의 입장에 선 레인보우는 칭의와 성화와의 관련성을 다루면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기에 로마 가톨릭에는 칭의론이 왜곡되었음을 비판한다. 하지만 개신교인들을 향해서 무분별한 반율법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인간의 행동과 노력을 결코 축소시키지 않는다는 입장을 바울서신과 야고보서, 루터와 칼빈의 저술에 근거해서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절충주의는 오히려 모호한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열어 놓은 구원의 길은  과연 어떤 길인가? 예수님은 세상의 성공이나, 행복이나, 물질적인 축복을 얻는 길이 아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면, 이 땅위에서 사람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출세와 권세와 영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의 절실한 기도와 절박한 소원을 들어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적인 인기와 성공을 보증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은 다 실망하고 말았다. 예수님의 길은 세상의 방식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영원한 진리 가운데 인도함을 받아 살다가 영생을 누리게 되는 길이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이 제시하고 열어놓으신 길을 따라가는 방법은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약 2:1)라고 하였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믿음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용서의 방법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돌아가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는 마음으로 믿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유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 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9절-13)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방에서 전도를 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선교사역을 방해하고 간수의 외마디에서 구원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간단히 설명한다. 그 때 간수는 갑작스럽게 닥친 놀라운 환경적 변화로 인해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질책으로 두려웠다. 자신이 지키던 감옥이 무너져 내리고, 죄수들이 도망치는 참담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나 살고자 하는 방도를 찾았다. 지진이 나서 감옥에 갇혀있던 죄수들이 다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는 죄수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선한 사람들이 죄수라고 할 수 있는가! 간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죄수들이 도망가지 않고서 태연하게 자신을 도와주는 장면에서 엄청난 영적인 변화를 느꼈다. 빌립보 감옥이 무너진 현장에서 간수가 외쳤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행 16:30-31)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고, 무능력과 절망감을 인정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갖게 된 사람이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

 

2.3. 구원의 혜택들과 효과

 

구원의 복음에 따라 부름과 초청을 받고,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구원을 얻는다. 영혼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게 되어서 신분이 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는 놀라운 변화들이 지속된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룩한 구원의 혜택들 (benefits)과 효과들 (fruits)이 각 사람의 심령에 적용시킬 때에 아홉 가지 측면으로 일어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것이다. 소명 (부르심),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성화, 양자됨, 성도의 견인, 영화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성취하신 구원의 혜택들을 주저없이 아낌없이 모든 성도들에게 베푸시고 적용하시기를 원하신다. 이런 혜택들을 받은 성도들은 성령의 교통과 임재 속에서 효과적인 열매를 거두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 작동하고 역사하고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들을 적용한다. 소명, 중생, 믿음, 회개 등 네 가지 혜택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지는 새언약의 축복들을 받아들이도록 사람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첫 번째 그룹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구원의 혜택들 가운데서 두 번째 그룹에 속하는 성화, 칭의, 양자됨, 견인, 영화 등 다섯 가지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삶에서 지속적으로 즐거워하며 누리는 부분들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신분과 그로 인한 형벌에서 벗을 수 없는 책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주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의인이라는 신분이 주어진다. 성화는 성도가 처한 상황 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변화된 생활을 실천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견인은 변화무쌍한 세속의 물결에서 지켜주시고 인내케 하시는 은혜다. 영화는 현재에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 주어져 있지만, 장차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아홉 가지 혜택들이 주어지는 전 과정은, 성령의 임재와 강권적인 역사를 통해서 사람의 심령을 다시 살려내는 것을 하고 있는데, 각각 느끼는 자각 반응이 천차만별이다. 구원파에서는 각 사람이 구원을 받은 일시, 정확한 내용, 장소 등을 기억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정말 구원받은 확신이 있느냐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미처 대답할 말을 준비하지 못한 성도들은 우물쭈물 거리다가 그들의 논리에 휩쓸리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만나지 못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라고 확신하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8-9)

한 번도 눈으로는 목격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믿음과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구원을 받은 증거가 확실하다. 마음 속에 가장 신뢰하고 따라가야 할 생명과 진리를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믿음이 작동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런 마음은 신비롭게도 성령께서 주시는 까닭에 지워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게 되면서,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즐거움과 기쁨과 영적인 구원을 베푸신다.

다소 특수한 분들의 체험이 남다르게 주어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던 자였다. 그러나,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중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눅 5:1-11).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히자,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압도당했다.

이제 베드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제자들이 다 이런 체험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바울 사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자신이 핍박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셨다 (행 9:1-9). 그러나 그 밖에 많은 성도들은 결코 그러한 사건들이나 초자연적인 체험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초월적인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시는 것은 아니다. 부르심의 목적와 그릇의 크기에 따라서 사람마다 다 각각 다르게 임하신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하며 살아가는 동일한 믿음을 받게 된다.

베드로전서 1장 8-9절의 설명을 잘 새겨보면, 믿는 자의 마음과 영혼에는 큰 변화가 일어난다. 예수님을 전혀 본적도 없고, 만져보거나,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그분의 관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성도들은 참된 진리를 찾은 흥분이 있고, 평안과 사랑을 받은 감격과 흔들리지 않는 신뢰심, 변함없는 믿음 등이 생겨나서 마음속으로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랑하게 된다. 2천 년 전에 계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며, 영원 전부터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며 주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벧전 1:10) 소개하여 주셨다고 말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제시해 놓았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다 멸망당하지 않도록 구원하여 내고자 세상에 보내셨다.

그 사랑이 너무나 넓고 크고 오묘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많다.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을 통해서 읽고 파악해 나가게 되는 감동을 가지게 되면 구원의 감격과 확신이 가득하게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17)

예수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그 믿음이 견고하고 강력하게 될 수 없으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즉시 일어나는 완성된 축복이기도 하고,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진행형이기도 하다.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옛사람의 흔적들과 욕망들이 남아있다. 기독교 신자가 되겠다고 하지만, 한번에 다 완전히 뒤바뀌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죽이고 버리는 반복적인 회개가 일생을 통해서 이루어가야 할 성화의 과정으로 주어지는 바, 성령의 감동과 위로하심으로 구원이 적용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간다.

때로는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서, 혹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주변에서 충격적인 실수를 하기도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별로 구별되지 않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도 있다.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존경을 받아온 목회자들이 실망을 주기도 한다. 과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핀잔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진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면 혼란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다시 회개하고 뉘우치면서 인간의 범죄와 타락을 벗게 된다.

또한 들판에는 추수할 곡식들 중에 “알곡”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다. 진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구별하여 알고 있다. 하지만, 진실하게 거듭난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서 증거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구원의 확신을 철저히 가지게 된다.

그러면 성도들이 구원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고, 절대적으로 가져야할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었다 (엡 1:4). 참된 성도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로 간주된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계속해서 복음을 듣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들은 참된 회개와 믿음의 고백을 한 자들이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 십자가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은 모두 다 구원을 받은 자이다 (고전 1:18, 고후 2:15). 성도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엡 2:5,8).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각각 개인적으로는 회개하고 돌이키는 회심의 순간이 곧 구원의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

따라서, 사람이 다 알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성령의 신비로운 사역이 있다. 성령이 하시는 시간과 시점을 사람이 다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이단들은 집요하게 이런 성령의 초월성을 파고들어서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혼란을 부추긴다.

2.4.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가 관련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간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구원은 영원 전에 이미 확정되었고, 현재에 이루어져 가고 있으며, 장차 완전히 받게 될 것이다. 구원자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주관하고 있기에 이와 관련하여서 시간적인 표현도 사용된 것이다.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간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구원의 시기는 현재, 과거, 미래에 모두 다 관련되어 있다. 나는 이미 (already) “구원받았다”는 과거완료형 표현도 가능하고,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다는 현재형도 가능하며, 아직 완전치 않아서 (not yet) 장차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는 미래형도 가능하다.

구원의 시기와 시점을 말할 때마다, 과거완료형태보다 더 크고 확실한 시점이 제시되어졌다. “창세 전에”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가운데서 이미 결정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모두 다 이루어졌다 (엡 1:4-9). 이미 믿는 성도는 구원을 받았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믿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원사건들을 통해서 이미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임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성도들이 다 함께 연결되어 있고, 영적으로 머리가 되신 분을 통해서 다 참여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예수님의 구원사역 안에서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의로운 백성들의 머리, 대표, 첫 열매, 예표가 되시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5-6).

예루살렘에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났음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을 일컬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루어졌으므로, 구원받는 것도 과거형 동사가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성령의 적용사역을 통해서 나에게 구원이 모든 시간마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이루어지는 중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고 권고한다. “이 큰 구원을 등한이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히 2:3). 이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장차 완성될 것을 모두 다 기다리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요, 동시에 장차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자들이다. 미래의 시점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완전한 개념이자 기본적인 것이다. 동시에 현재 구원을 얻었다는 개념도 들어있다. 다음의 성경 말씀은 장차 올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믿음을 지키고, 예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구원의 날까지 은혜를 베푸셔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

구원은 미래에 완성된다. 사도 바울은 아직 완전히 이룬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고자 달려나간다고 하였다. 종말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구원은 장차 미래에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것이다 (빌 3:11-13).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미래적인 관점을 가지게 된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롬 13:11);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전 5:5);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8);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벧후 2:15).

현재나 장래에나 사람의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요 진노의 원인이다. 구원은 현재 오늘의 시점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과 희생으로 용서하시는 길을 열어놓으셨고, 회심의 순간이 바로 구원의 때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딛 3:5-6)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역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미래에나 영원토록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구원사건의 시점은 과거, 현재, 미래에게 다 적용이 되는 동사들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구원을 이미 받았다고 말하는 과거형도 가능하고,

현재 구원을 받아서 살고 있다는 표현도 있으며,

장차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적인 비전도 성경에 제시되어있다.

하나님은 처음이요 나중이며, 알파요 오메가요, 인류 구원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통치하고 조종하시는 분이시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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