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무엇인가?
Ⅰ. 서 론
대개의 경우 "누구는 믿음이 좋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리고 "모태신앙"이라는 말도 많이 듣
는다. 신앙의 연륜이 오래 되었다는 말이다. "성도"라는 말도 흔히 사용한다. 교회에 출석하면
흔히 듣는 말이다. "상급"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이 한다. 헌신과 봉사가 뛰어나다는 말이다. 이
와같은 것들을 믿음에 대한 바른 평가로 흔히들 생각한다. "믿음"이 좋다"라는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데, 이는 열심, 교회출석, 봉사와 헌신, 헌금 등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들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데 잘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으로도 맞지 않다.
그럼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말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지 믿음에 대한 논리와 연구가 그렇
게 필요한 것인가?
믿음이란 영어로 Faith로서 이것은 '믿는다'라는 동사에 해당하는 명사로서 이에 대한 히브리어
동사는 헤에민이며, 헬라어는 피스튜오로서 신약성경에 사용된 핵심적인 단어로서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는,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다방면의 신앙적인 관계를 가리키
는 데 언제나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면 누구와의 관계이며 과연 그 믿음의 본질과 믿음이 갖고 있는 깊은 의미는 무엇인가?
Ⅱ. 본 론
ⅰ. 믿음의 대상.
1. 먼저 어떤 믿음인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이 말에, '믿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성경에는 믿는다'는 말이 반
드시 구원을 받게 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이 그렇게 믿었으니까 구원받았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믿는다는 말이 성경에 여러 번 있어도 그 믿는다는 말이 참으로 구원에 이
르게 하는 믿음의 의미를 가졌을 때에는 그것을 '구원의 신앙'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상당한 조
건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구원의 신앙을 소유해야 하는데 그 구원의 신앙의 내용 가운데는 세 가지 중요한 조건
들, 즉 지적인조건, 정적인 조건, 의지적 조건들이 있다.
지적인 조건이라는 것은 무엇을 믿어야 구원을 받느냐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
들이라고 믿는다면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할 것이다. 과연 많은 귀신 들린 사람
들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마8:29)라고 하
여서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모르고 있을 때에 귀신 들린 사
람들은 먼저 알고 소리쳤다. (마8:29;막1:24,5:7;눅4:33-34)그로 인하여 그 귀신이 구원을 받았는가?
그런 것으로 귀신이 구원받은 것은 아니다. (고전15:2)은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헛된 믿음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
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마7:21) 그러면 어떤 믿음이 구원
얻는 성경적인 믿음인가?
2. 믿음의 본질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믿음이다.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께
서 그리스도 안에 이루신 구원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이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수단
인 것이다. 이 믿음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구원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
야 할 것은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따내기 위한 인간의 종교적인 업적으로서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이룬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다는(곧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는)의미에서 조건
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믿음이 이 구원을 받는 꼭 필요한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조건이다.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
라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
이 없느니라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4) 그
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
느니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
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려 하심이니 (롬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5,26절을 통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릿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하시기 위해 어떻게 구
속의 사건을 이루셨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 불의와 타협치 않으
신 채 죄인을 의롭다 하실 수 있는가?
진정으로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죄인들을 기꺼이 용서하시길 원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공의로
우신 하나님은 죄인을 용서하는 의로운 방법 즉 자신의 공의로움에 걸림이 되지 않는 방법으로
용서를 해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삼으시고 그에게 죄인들에게 마
땅히 떨어져야 할 하나님의 진로를 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이런 구원의 방법은 그때까지 그가
과거의 죄인들의 죄를 간과해 오심으로(롬2:14, 행17:30) 제기된 의문의 답변으로 그의 공의로움을
증거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또한 지금 현재에 그의 의를 나타내시는 데
도 필요하며 그것은 예수를 믿는 죄인들이 의롭다 하시는 것도 그의 의로우신 행위임을 중거하시
위함이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로운 본성의 양보함 없이 의로우신 방법으로 죄인
들에게 의롭다 함을 주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하나님께서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
음으로 이루셨는가 이고 그 구원의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덧입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다. 그러면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의 사건을 德
입을 수 있는가? 우리가 무턱대고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좀 더 믿음의 성격을 분석함
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신약성경의 특수한 믿음의 의미를 깨달
을 때 더욱 믿음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믿음의 본질적인 의미는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포된 복음(kerygma)을 받아들이
는 것이 믿음이다. 신약성경에 보면 믿는다는 동사가 항상 that절과 연결되어 있다. To believe
+that Christ died for us. That 이하에는 Christ died for us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예수님이 우
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 이것이 복음의 구원론적인 정의인데 이것은 고린도전서 15장3절에서
볼 수 있는 복음의 요약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선포된 복음이 무엇이냐? "예수님이 主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기독론적으로 말할 수 있지만,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라고 구원론적으로 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구원론적으로 선포된 복음을 표현했을 때 믿음을 설명하기 쉽다.
3, 믿음의 내용
이제 구원론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정의하고 믿음을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믿음의 본질을 다루
었는데 믿음의 본질은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
활했다" 이것이 선포된 복음인데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덕입는 것이
다. 왜 그러냐? "우리를 위해서(for us)라는 말 속에 그 비밀이 들어 있다. "우리를 위해서 "라
는 말은 우리말로서는 한 가지 의미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즉 "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기 위해서"
그런데 원래는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헬라어에서는 이 말에 적어도 세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①우리 대신에, ②우리의 대표로, ③우리에게 이득을 가져오기 위해서 이다.
대신( substitution)이란 말은 일대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뜻이고 대
표(representative)라는 말은 일대 모두(all)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대표했
다는 뜻이다.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되어서 벌을 받을 상태에 있었는
데 예수님이 내 대신 벌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가 45억명인데 45억번 죽었느냐, 그렇지
않고 한 번에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죽었느냐 이 두 가지 개념을 합치면 내포적 대신(inclusive
substitution)이라는 개념으로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적 죽음, 대표적 죽음이 '내포
적 대신'이라는 말로 종합될 수 있다. 그 성격은 죄없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
받음을 받고 우리의 죄가 초래한 우리의 죽음을 우리 대신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죽음의 대표적 성격은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해서 원칙적으로 우리의 죽음이 그의
죽음 안에 내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
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곧 예수님의 죽음은 그 자체 안에 우리의 죽음을 내포한다. 예수님이 죽음은 죄없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에 우리 입장에 서서 죽었으므로 대신적이고 또 우리를 위한 대표적인 죽음이어서 그
안에 우리의 죽음을 내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음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면, 곧 믿는 이들은 믿음으로 이 구원의 사건을
자신들에게 적용하여 효력을 발생하게 한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믿는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그들을 위한 대신적 대표적 죽음이라고 곧 그 안에 자기들의 죽음을 내포하는 것으로 인정함으로
써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게 한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스스로를 자신의 대신이고 대표
인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 되게 한 (연합되게 한)자는 그의 부활에서도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연합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했다고 한다.
믿음은 선포된 복음 곧 kerygma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우리의 내포적 대신인 그리스도와 그
의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되게 하고 연합시킨다.
ⅱ, 믿음과 세례
지금까지는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 보았는데 이 믿음의 내용을 劇으로 표현한 것이 세례이
다. 세례를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의 劇化라고 볼 수 있다. 믿음을 하나의 극(drama)으로 표시
한 것을 세례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
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고 그의 부활에 연합된 그 사건을 극으로 나타낸 것
이 세례이다. 물에 빠짐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장사 지낸 것을 상징한다. 그리고 물에서 다시
나옴은 깨끗이 씻긴 새로 창조된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함을 상징한다. 그런데 세례는 이와 같은
의미를 단독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음 안에 내포된 의미를 극으로 표시하는데 그 중요성
을 가진다. 상징의 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같은 상징적인 세례가 필요하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
을 알지 못하느뇨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
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
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는 믿는 자가 되어 가는 종결이다. 그래서 믿음은 세례 후에도 필요하다. 세례로써 우리
의 믿음이 끝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다만 믿는 자가 되어가는 종결일 뿐이다. 세례를 받음
으로써 확실히 믿는 자가 되었다고 문서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우리가 먼저 복음을 받고 그
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데 그래서 그것에 확신이
가면 그것을 극으로 표시함으로 말미암아 세례 때 그 믿음을 모든 사람에게 고백하고, 내가 확실
히 믿는 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는 믿는 자가 되어가는 과정의 종결이다. 그
러므로 믿음이 없는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는 믿음의 극화이므로 믿음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믿는 자는 세례를 받아
야 한다. 믿음을 극으로 표시해서 문서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고백하고 스스로에게도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롬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
을 알지 못하느뇨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
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
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ⅲ. 믿음의 결과
1. 의 인 됨 (justification;稱義)
의인됨이란 법정에서 온 그림이다. 심판관에 의해서 무죄 석방을 받는 것이 의인됨이다. 심판
관에 의해서 무죄 석방을 받는 것이 의인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사랑하시며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올바른 관계인에 이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죄이
다. 그 죄에 대해서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의인됨이다. 다시 말
해 과거의 죄에 대해서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 의인됨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
라"(롬4:25)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관계를 가져다
준다.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이 우리의 순종이 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
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예수님 안에 우리가 내포되어서 그의 됨
됨(what is he)에 우리가 참예하고 그의 하신 일(what he has done)이 우리가 한 일이 되는 것이
다. 그래서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나의 순종이 되고 예수님이 죄를 짊어짐과 거기에 대한 하나
님의 정죄(심판)와 율법의 저주를 받음이 우리의 받음이 된 것이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자기주장하며 거스리는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한 곧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갖는 인간들이 된다. 이것이 의인됨
이다. 즉 의인이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사람이다.
2. 화 해 함 (和解;Reconciliation)
화해함이란 인간 관계에서 온 그림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적대하는 관계였는데 이제 하나님과
인간은 친구의 관계로 회복되었다. 불화가 더 이상 없고 평화가 있다. 이 객관적인 화평의 상태
에서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주관적인 평안함이 유래된다. 또 하나님로
부터 분리된 자의 불안함으로부터 해방감이 있다.
구원이란 자기의 제한된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원에 힘입어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이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실재이다.
3. 하나님이 아들됨(入養;Adoption)
하나님의 아들됨은 가족 관계에서 오는 그림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약속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 또는 아들들이라고 불리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존하고
순종치 않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됨에 실패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7:13이하와, 사42:6, 49:8, 53장
의 예언을 성취하는 분으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대속적
인 죽음을 하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야 최후의 만찬 때에
이 떡은 너희를 위해서 부서진 나의 몸이고 이 잔은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한 피라고 말씀하셨다.
(눅22:19,20)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됨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아주 독특하게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하나
님을 "아바"라고 부르면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게 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막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
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
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4.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은 옛 존재와 같이 스스로를 하나님께 닫아버리는 존재가 아니라 원래의 하나님
의 뜻대로 하나님께 열린 존재로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를 갖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 (고후
5:17).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되는가? 그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
을 받아들임으로 그가 나의 대신이 되고 대표라는 것을 인정함으로 그의 안에 있게 된다. 그러
면 그의 됨됨이에 참예한다. 그의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함에 참예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관계에 참예하게 되는데,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전혀 새롭게 창조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ⅳ. 믿음과 율법
1. 바울의 가르침(1)
바울은 로마서 1장-2:16까지 이방인들이 범하는 죄는 하나님이 정하신 사형에 이르게 되어 있
으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길 없이는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유대인은 율법을
받았으므로 구원 문제에 있어서 이방인보다 낫고 또 구원에 이르게 되었느냐? 롬2:17-3:18에서
유대인도 이방인처럼 하나님 앞에 동일한 것은 그들이 율법을 받았으나 지킬 수 없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는 동일하다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
속하신 의의 길을 믿음으로 받는 것뿐이라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2. 갈라디아서를 통한 가르침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가르치고, 증명하고, 책망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구원의 길로
정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는데,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후에 할례를 받으므로 구원의 길로서 율법을 지킬 의무를 스스로 지녀 절기를 지키
고, 여러 규례들을 지키고 있음에 대하여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하다는 논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갈라디아인들의 경우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다시 지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無化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율법이 구원의 길이라고 믿게 된 것은 특히 포로 귀환 후 에스라가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을 지
킬 것을 강권한 후부터 유대인들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고 메시야 시대의 도래
를 앞당기려고 하였다. 더욱이 저들의 나라가 망한 것은 모세의 손을 통해서 주신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통한과 회개는 율법의 준수에 사력을 다할 각오를 갖게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정반대였다. 율법은 지킬 수 없고 또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다.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고 그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가르
친 바울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을 다 준수하고 성취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획득하였고 믿음으로 그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전달되었으므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다시 지키
려고 율법 준수의 노력을 반복할 필요가 전혀 없어지게 되었다. 또 본래 율법은 사람이 지켜 하
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충족해 드릴 수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알게 해 주는 것이
율법의 임무이다. 율법을 지켜야 의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살 생존권을 허락받으므로 영생에 이
르지만, 죄성 때문에 사람은 결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 즉 율법을 지켜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3. 바울의 가르침(2) : 로마서 3:19-31; 갈2:16-21)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이 시내산 언약을 통해 율법을 주신 것은 백성들이 지켜서 의롭다 선언을
받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더하시므로 범죄가 더하게하여 온전한 구속주, 곧 자기들을 대
신하여 자기들의 자리에서 자기들을 위해 율법을 온전히 지켜 주실 율법의 완성자이신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한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율법은 지키기보다 범함이 많고 따라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뿐만아니라 그 율법을 범함
은 곧 그 율법이 선언하고 정한 형벌 곧 사망밖에 기다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때닫게 한
다. 그러면 또 다시 분발하고 일어서서 율법을 더 잘 지키려고 하지만 오히려 더 범해질 뿐이다.
그러면 율법을 범할수록 율법의 요구는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되고 정죄 선언은
더욱 준엄해져 결국 절망밖에 다른 길이 없다. 율법은 그 자체가 선하고 의로우며 거룩하여도 인
간의 타락의 심각성 때문에 전적 타락으로 인간은 연약하여 율법을 지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 곧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자 웅변이다.
구원은 믿음의 길이고, 율법의 길이 아니다. "구원의 길로서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뿐
이요 그 이후 율법은 전적으로 무력해졌다는 것"이 갈3장에 나타난 바울의 주장이다.
또한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고 구원은 하나님이 내신 의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뿐이
다.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믿음만이 구원의 길이다. 이것이 바울의 중심 가르침이다.
4, 바울의 가르침(3)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다. 이 진리는 그리스도 이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 의
하면 율법 시대에도 율법은 죄만 깨닫게 한다(롬3:20). 또 바울에 의하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모
든 세상으로 삼판 아래 있게 하려 하심이다(롬3:19).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여
타락한 인류를 사람의 종교적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방식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
그를 믿은 믿음의 방식으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 모든 족속을 불신앙 아래에 가두시고, 죄
의 권세 곧 율법의 정죄 아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한 의의 길을 내셨는데 그냥 예고없이 이
구원의 길을 내신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를 받아 예비되었다.(롬3:21).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의의 길이다(롬3:22-24) 이것은 순전
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로 율법의 행위로 될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공로를 세우는 것은 전적
으로 배제되었다.(롬3:24-30)
율법이 가장 잘 지켜지던 다윗시대에도 율법에 의하지 않고 의롭게 되는 길이 있음을 다윗이
고백하였고, 율법의 범함을 용서받고 율법을 지킴없이도 의롭게 되는 행복을 말하였다.(시32:1,2)
다윗뿐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하였다(롬3:21. 따라서 하박국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
미암아 살리라"(합2:4)고 절규하였다.(롬1:17;갈3:1;히10:38)
또한 유대민족의 시작이 은혜로써 구원을 얻는 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는
데 율법을 구원의 길로서 시비할 때 바울이 모세를 말할 것 같으나, 오히려 아브라함을 말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시작한 조상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시작하고 율법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창15:6), (창17:10), (롬4:1-25),
(갈3:1-22)
5. 왜 바울을 통한 가르침인가?
바울은 다소의 히브리부모 아래에서 태어났고 예루살렘에서 당대 최고 학자였던 힐렐의 제자
가말리엘의 밑에서 수학하면서 바리새인으로, 그는 토라와 장로들의 유전에 반하는 어떤 변절자
라도 심히 핍박할 정도로 헌신하여 율법의 기준으로 보면 흠이 없는 자이던(빌3:6) 그가, 유대교
안에서 토라와 조상들의 유전에 대해 그렇게도 커다란 열정을 가졌던 한 바리새인이 이제는 이방
인들에게 토라와 할례에의 순종은 제쳐두고 예수 그리스도 아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사
건을 선포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갈1:11) 받은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한 보고를 통해 이 기본 내용을 증명한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의 깨달음인 것이다. 예수님이
명분으로나 실제로 보나 죄가 없으신 (고후5:21, 롬8:3)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인 이상 율법은 예수
님께 잘못 저주를 내린 것이다. 이 사실은 율법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존
재할 수 없다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볼 때 예수님은 실제로 율법의 저주 아래
떨어졌으며 그로 인해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은 예수님은 그 저주를 우리를 위해 for us o
리의 입장에서 in our place 우리의 유익을 위해 for our advantage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자신
의 생명을 속죄물로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는 우리에게 마땅
히 떨어져야 할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다.
이와같이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 곧 우리의 구원을 위한 속죄의 제사였다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해
석을 받아들이게 된다.(고전11:24, 15:3, 롬3:25)그리고 바울은 이 해석을 자기 신학의 핵심으로 발
전시켰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원사적 중요성을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여 선호하였다.
(갈3:13;롬8:3;고후5:21;갈4:4;롬4:25,5:6-10;갈1:4)
Ⅴ. 믿음과 삶
1, 그리스도인의 윤리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사탄과 이 세상을 거부하고 이 세상의 도 즉 자기 중심적인 의지의 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살겠다는 결단을 믿음으로 했다. 그러나 여
기가 종착역은 아니다. 구약 출애굽에서 홍해가 끝이 아니듯이 성도의 삶도 구원사적으로도 머
나먼 여정이 남아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나온다. 실천적인 삶의 자태가 어
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윤리의 부분이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
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너희는 이 세상(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것이 제일 중요한 말씀인데, 이 세상에 돌아가지 말라이 세상에 동조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주장하려는 의지로 종합되는 이 세상의 도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하고 너희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고 구원을 은혜로 받은 자로서 사는 것, 이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윤리이다.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를 설명한다. 그리고 12장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대해 발씀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세
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정신에 순종해서 사는 이 세상의 시민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라
는 것이다.
2. 믿음과 행위(그러면 야고보서는 믿음보다 행위인가?)
주지한 바와 같이 사도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기초한다는 사도 요
한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고 말
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바울은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의로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논
쟁을 벌였다. "사람이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갈2: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고 분명히 못을 박고 있
다. 또한 믿음의 내용을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살아나게 하신 주님이시다"라고 말
하고 있다.
야고보는 참된 믿음과 행함이 없는 지적인 믿음을 대조하여 보여준다. 이 야고보서는 믿음을
가장 중요시하는 로마서의 '以信得義'와 맞서는 것처럼 보일만큼 행위적인 측면 즉 실천적인 측면
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믿음의 가치를 부인하고 율법적인 행동만을 강조하는 것 같아서
루터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스데반의 순교 이후 대박해 속
에서 온전한 믿음의 행실로부터 이탈하는 자가 많았고 '이신득의'를 오용하여 성도다운 삶을 전연
이행하지 않는 그릇된 모습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야고보는 믿음을 증명하는 행위를 보일 것을 요
구하며 구체적인 삶의 행동 양식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신득의'의 의미를 온전하
게 이해하고 실천적인 면을 돕는 서신인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도록 행했던 것처럼 분명히 믿음의 결과가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만이
참된 행함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고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함을 받은 것이다 (약2:23)
믿음과 행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행위는 믿음의 외적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신득
의'와 '이행득의'는 반대가 아니라 같은 내용을 말하는 것이며 믿음을 온전히 세우는 것이다. 또
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시련을 불러오고 이것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게 하시는 은혜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것도 믿음과 행함이 같이 이루
어질 때 진정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
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2:22)
3,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라
빌1:27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한 말씀이다. 빌립보는 지금의 터어키와 그리이스가 맞닿는 곳에 있다. 사도
행전 16장을 보며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라고 되어 있다. 일찍이 알렉산더 대왕이 아버지
빌립이 트라시아인들로부터 그 도시를 빼앗아 거기에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이름을 붙였다. 그래
서 이름이 빌립보가 되었다. 나중에 로마시대에 로마 사람들이 그 도시를 재건해서 전쟁에 공로
를 세운 장교들을 거기에 정착시켰다. 그래서 빌립보는 그리스 제국 당시에 트라시아 이방 사람
들에게 그리스인의 문명을 보여주는 전시장 구실을 했듯이 로마시대에는 로마제국 저편 변경 사
람들에게 로마인의 문명과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전시장과 같은 구실을 했다. 빌립보는 로마 제
국의 식민지 중에서도 특수한 식민지로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시내에 사는 시민들과 똑같은 대
우를 받았다. 이곳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했다.
빌립보가 이방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이방인들에게 로마의 문화와 로
마 시민의 긍지를 보여주듯 교회는 썩어져 가는 세상에 들러 싸여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로
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라는 의미이다.
바로 여기에 한국 크리스챤의 문제가 있다. 믿음에 윤리를 내포하지 않은 것이다. 윤리에 믿
음을내포하지 않은 믿음은 구조상 헛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
고 화해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능력과 자
원으로 살게되었다는 실재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없이 의존이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 의존한
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께 순종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마25:31-46)
4.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고난에 대한 문제의 접근이 왜 필요한가? 세상 사람 누구나 예외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고
난이 필연적으로 있다. 왜인가? 타락 이후 인간에게 고난의 삶이 던져졌고 무엇보다도 그리스
도인에게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도를 따르지 않으므로 고난이 필연적이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동조하지 않고 오는 세상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삶을 "제자도"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제자도가 무엇인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
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 제자도가
없고 미신화되어가는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세상 사람들과 달리 그리스도인의 의 고난은 믿음에서 일어난 옛 죄에 대한 벌받음, 옛 죄인의
죽음, 이 사건이 실제 생활에서 펼쳐지는 실재화되어 가는 (actualize)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
도바울은 믿음의 삶을 통해 겪는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으로 날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이며(고후3:18) 예수의 부활의 새생명이 우리의 썩어져 가는 몸에 나타나져 가는 과정이다(고
후4:10이하;빌3:10). 바울은 이 고난을 겉사람이 후패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곧 십자가에서
일어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 구원의 사건이 실재가 되는 과정이라고 한 것이
다.
ⅵ. 히브리서에 나타난 믿음
히11:1-3까지는 구약 전체 연구와 비등하다. 히11장의 구약 사람들이 구약 전체의 역사이기 때
문이다. 히11:1은 믿음의 정의이기 보다는 믿음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무엇인가라기 보다는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전체 구조를 살펴보면 첫째부분은 1:1-10:18의 교리적인
면을 다루는 것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참 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의 중보자가 되셨는가?를 물으며 한 인격으로서 누구보다 탁월하신 분으로 말씀하고 있다. '보다
좋은', '보다 낳은'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다.
둘째 부분은 10:19-마지막까지로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
온 백성들의 믿음의 생활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실천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리
스도를 믿는 믿음의 우월성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믿음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이며 얼마나 탁월
하며 얼마나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누
려야 할 삶, 즉 그리스도의 인격의 영향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롬1:17은 칭의의 원리에 대해 말하고 있고, 갈3:11은 칭의의 원리를 율법적인 원리와 비교하고
있다면 히10:38은 칭의의 적용이라고 볼 수 있다.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의 삶이란 어떠한 것인
가? 3세기 유대인 랍비인 시말리아는 구약 율법의 613계명 중 365계명이 하지 말라, 248계명이
..을 하라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것을 함축성있게 줄여서 십계명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사야는 6개의 교훈 안에 미가는 3개의 교훈으로 그러나 하박국은 한마디 '믿음으로 살아라'는
말로 압축하고 있다. 그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의미를 설명키 위해 그 선
진들의 생애를 보여 준다. 그 사건 들을 통해 보여 주는 믿음의 주관적인 성격이 무엇인가?
첫째는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실상'이라는 말은 휘포스
타시스(hupostasis)는 아래로부터 받혀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기초라는 뜻이다. 구약
위인의 대부분이 믿음으로 살면서 믿음의 기초를 이루었다.
둘째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증거'란 엘렉코스(elechos)로서 내적인 확신을
나타낸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외적인 확신을 말한다. 세상은 보는 것을 믿지만 믿음의 삶이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보는 것이다. (고후5:7)
셋째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해 준다. 말튜레오(martureo)는 '증거'의 또다른 말로 "법적인 증
거', 확실한 것, 심증이 아닌 물증을 뜻한다. 곧 믿음은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를 가져온다는 것이
다.
ⅶ. 4복음서에 타나난 믿음
지금까지는 바울의 서신서를 중심으로하여 바울을 통해 계시하신 믿음의 본질과 내용을 죽 살
펴 보았다면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 예수님과 함께 다니시던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음에 대해
책망하시던 말씀들을 볼 수 있다.
(마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
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16:8)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
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마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
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
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막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
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 칭찬시던 사람들을 복음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로마의 한 백부장이랄지(눅7:1-10), 한 중풍병자의 믿음(눅5:17-26)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마15:21-28)은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도다'고 칭찬하신 믿음임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과연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어떤 것이기에 이 믿음을 칭찬 하시는 것일까? 지면서 몇 사람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믿음이라는 것을 놓고 볼 때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어떤 종류의 믿
음이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얼마만한 믿음이냐 하는 것이다. 주님도 믿음의 크기뿐만 아니라 믿
음의 종류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뿐 아니라 "이런 믿음을 내가 만나 보지
못했다"고 사힘으로써 믿음의 종류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다.
그 중에 눅7:1-10에 나타나 있는 한 백부장의 믿음은 이스라엘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라고
주님이 칭찬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말씀을 잘 살펴보면 그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다. 그
러나 말씀을 잘 살펴보면 2절에 '사랑하는 종', 5절에는 그가 이방인임에도 유대인을 사랑하여 회
당을 지어주었음을 보여준다. 율법을 공부하고 지켰던 바리새인들도 가질 수 없었던 참된 신앙
을 전인격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단순하게 맹목적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유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포착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유일한 계시종교였던 당시의
유대 종교 속에서 백부장은 구약을 예수님께 연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언약을 갖고
있지만 그 언약 속에서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수많은 유대인과 구별된 것이었
다. 예수님이 행하신 것과 말씀하신 것을 주의깊게 지켜보면서 예수님을 바로 알고 안 그것에
의지한 백부장은 진정 말씀만으로도 자신의 사랑하는 종을 치유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었다. 그
것은 예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임에 대한 신뢰가 아니었을까? 예수님은 이 믿음을
이스라엘 가운데 놓이심으로 우리에게 바로 어떠한 믿음인가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 사람은 마태목음15:21-28에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다.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의뢰
한 이방여인(수로보니게, 수리아페니키아)에게 주님은 또 한 번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
씀하신다. 이 여인이 한 말들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 속에서
그리고 '개들도 그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말 속에서 볼 수 있는 이
여인의 신앙에서 집요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집요함의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이해 때문이라는 것이다. 은혜가 아직은 이스라엘에 한정됨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그 절망적인 듯한 말에서 빛을 발견해 내고야 만다. 당시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 개취급
을 받던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민감하게 추리하고 그의 본성에 호소함을 통해서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신다. "어두워갈 때에 빛이 있으리라"(슥14:7)는 말씀이 이 여인
에게도 해당됨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저 열심만 있고 간절히 구하면 되는 맹목적인 믿음이 아
닌 것을 예수님은 보여 주고 계신다. 믿음은 올바른 신지식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주고 계신다.
Ⅲ. 결 론
이상을 통해서 과연 믿음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았다. 믿음은 신.구약 모두에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지 또는 신뢰로 나타난다. 즉 기독교의 믿음이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육신으로'오셨고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보내신 바 되었음을 믿는 것이다. 또한 하나
님 안에 계시며 하나님도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은 맹목적인 자기확신이 아니다. '지식이 없는 신앙은 맹목이요, 신앙이 없는 지식은
이데올로기이다'라고 말한 어느 학자의 말처럼 믿음은 믿음의 분명한 대상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
어야 함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증거한다.
이상 바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연약하여서 언제라고 쓰러질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전지하
신 주님은 이것도 알고 계심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인간이라 할지라도 성도가 연약하여 할 수 없
는 그것 곧 인간의 현재 속에서 승리하게 하는 원천이신 성령을 보증으로(롬8:2) 보내셔서 우리를
완성시킬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부르신 그 때부터 완성의 그 때까지 주님은 전적으로 역사하신다. 그러기에 믿음이 선물일 수
밖에 없고 은혜일 수밖에 없다. 자랑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침륜에 빠질 것도 아니다. 부지런히
이 믿음을 상고하고 연구함과 함께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며 헛된 믿음 속에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이 세대 가운데 하나님의 대사요 사신으로 살면서 바른 믿음의 자태를 좇아가고 또한 후세에 이
믿음을 물려주는 또하나의 믿음의 선진들로 살기를 주님은 오늘도 바라신다.
1순 주제발표 : 믿음이란 무엇인가?
1순:김기태,강형선,임진아,이미경,임영란,김헌옥
Ⅰ. 서 론
"믿음"이 좋다"라는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데, 이는 열심, 교회출석, 봉사와 헌신, 헌
금 등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들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데 잘못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
경적으로도 맞지 않다. 그럼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말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지 믿음에 대
한 논리와 연구가 그렇게 필요한 것인가? 누구와의 관계이며 과연 그 믿음의 본질과 믿음이 갖
고 있는 깊은 의미는 무엇인가?
Ⅱ. 본 론
ⅰ. 믿음의 대상.
1. 먼저 어떤 믿음인가?
(고전15:2)은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
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헛된 믿음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마7:21) 그러면 어떤 믿음이 구원 얻는 성경적인 믿음인가?
2. 믿음의 본질
믿음의 본질적인 의미는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선포된 복음(kerygma)을 받아들이
는 것이 믿음이다.
3, 믿음의 내용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적 죽음, 대표적 죽음이 '내포적 대신'이라는 말로 종합될 수 있다. 그 성
격은 죄없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 받음을 받고 우리의 죄가 초래한 우리의 죽
음을 우리 대신에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죽음의 대표적 성격은 그의 죽음에서 예수
님이 우리를 대표해서 원칙적으로 우리의 죽음이 그의 죽음 안에 내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선포된 복음 곧 kerygma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써 우리의 내포적 대신인 그리스도와 그
의 십자가의 죽음에 하나되게 하고 연합시킨다.
ⅱ, 믿음과 세례
지금까지는 믿음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 보았는데 이 믿음의 내용을 劇으로 표현한 것이 세례이
다. 세례를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의 劇化라고 볼 수 있다. 믿음을 하나의 극(drama)으로 표시
한 것을 세례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
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되고 그의 부활에 연합된 그 사건을 극으로 나타낸 것
이 세례이다.
ⅲ. 믿음의 결과
1. 의 인 됨 (justification;稱義)
2. 화 해 함 (和解;Reconciliation)
3. 하나님이 아들됨(入養;Adoption)
4. 새로운 피조물
ⅳ. 믿음과 율법
. 바울의 가르침(1,2,3) : 로마서 3:19-31; 갈2:16-21)
구원은 믿음의 길이고, 율법의 길이 아니다. "구원의 길로서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뿐
이요 그 이후 율법은 전적으로 무력해졌다는 것"이 갈3장에 나타난 바울의 주장이다.
또한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고 구원은 하나님이 내신 의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뿐이
다.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믿음만이 구원의 길이다. 이것이 바울의 중심 가르침이다.
왜 바울을 통한 가르침인가?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갈1:11) 받은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한 보
고를 통해 이 기본 내용을 증명한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의 깨달음인 것이다.
Ⅴ. 믿음과 삶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고 구원을 은혜로 받은 자로서 사는 것, 이
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윤리이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대박해 속에서 온전한 믿음의 행실로부터
이탈하는 자가 많았고 '이신득의'를 오용하여 성도다운 삶을 전연 이행하지 않는 그릇된 모습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야고보는 믿음을 증명하는 행위를 보일 것을 요구하며 구체적인 삶의 행동 양식
을 제시했던 것이다.
ⅵ. 히브리서에 나타난 믿음
히브리서 사건 들을 통해 보여 주는 믿음의 주관적인 성격이 무엇인가?
첫째는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둘째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셋째는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해 준다.
ⅶ. 4복음서에 타나난 믿음
그 중에 눅7:1-10에 나타나 있는 한 백부장의 믿음은 이스라엘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믿음이라고
주님이 칭찬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또 한 사람은 마태목음15:21-28에 등장하는 수로보니
게 여인이다.
Ⅲ. 결 론
이상을 통해서 과연 믿음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았다. 믿음은 신.구약 모두에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지 또는 신뢰로 나타난다. 즉 기독교의 믿음이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육신으로'오셨고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보내신 바 되었음을 믿는 것이다. 또한 하나
님 안에 계시며 하나님도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분이심을 믿는 것이다.
암송성구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
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
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
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
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롬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
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
라
(롬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며 (롬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
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
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
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
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라
(롬15: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롬16:5)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
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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