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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럽의 정치변화

하나님아들 2015. 8. 27. 11:41

유럽의 정치변화

2007년 11월 28일 오후 9:25공개조회수 3 0

5. 정치변화
(1) 영 국
① 노동당의 집권(1945-1951)
1945년 7월 영국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양당 제도를 이루게 되었다. 수상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 1883-1967)는 두 번에 걸친 정권을 통하여 강력한 국가주도의 국유화정책과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경제학자 케인즈를 통하여 국가간섭정책을 실시했는데, 자유시장 원칙에 어긋나는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실효를 거두었으며, 반공주의, 미국과의 동맹, 탈식민지정책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잠재적인 우월의식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SCS)와 유럽연합(EU)의 불참으로 고립의 길을 걷게 하였다. 때마침 일어난 한국전쟁은 미소의 팽창을 가속하였고, 유럽의 경제증강과 이란과의 석유문제 실패는 노동당 정부의 실각을 가져왔다.

② 보수당의 집권(1951-1964)
한국전쟁과 냉전으로 다시 처칠이 수상직에 오르면서 원자탄 실험의 성공, 엘리자베스 2세의 등극(1951) 등으로 영국인들의 자존심은 고양되었다. 처칠은 노동당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가면서 철강, 도로, 방송국 등을 민영화하여 영국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처칠 정부는 현상유지에는 성공하였으나 미소 등 선진국들과의 경쟁에서 앞질러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55년 이든(Anthony Eden; 1897-1977)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긴축정책으로 주택공급이 축소되고 국유산업의 투자가 중단되는 등 구매력마저 떨어지자 국민의 원성은 높아갔다. 특히 유전지대인 중동지역의 주도권을 지키지 못하면서 이든은 1957년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맥밀런(Harold Macmillan; 1894-1866)의 정치 스타일은 매우 자유주의적이며 현실적이었다. 그는 국방비를 과감하게 줄이고 국내투자에 신경을 집중함으로 1950년 후반의 맥밀런 시대는 전후 가장 부유한 시기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풍요 뒤에는 빈부의 격차, 노사갈등의 어려운 문제들의 사회적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었다. 특히 1961년의 포틀랜드 스파이 사건과 국방부의 존 프로뮤머 섹스 스캔들 사건으로 맥밀런은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흄(Hume)은 맥밀런의 정책을 따랐으며 교육분야에서 대학과 고등학교의 수준을 높이고 교육평등의 위상을 드러냈다. 그러나 윌슨의 노동당 집권과 히드의 보수당 집권 그리고 다시 윌슨의 노동당 집권 등으로 이어졌으나 통화위기, 대대적인 파업, 실업자 속출,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문제 등으로 영국은 깊은 곤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③보수당의 대처리즘(1979-1989)
1970년대 불안정시대를 정리한 사람은 소위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Margaret H. Thatcher; 1925- )였다. 대처는 국가지출을 감소하고 노동조합의 권한을 줄이고 세금을 낮추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함으로써 소위 영국병에 걸려있는 영국인들을 치유하려고 하였다. 그녀를 뒷받침 한 경제연구소는 애담스미스 연구소와 케이스조세프 정책연구소였다.
대외적으로는 아르헨티나가 일으킨 포틀랜드 전쟁(1981)에서 승리함으로써 국민의 인기를 고양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강제적인 인두세 입법, 유럽통합에 대한 미온적 태도, 자본주의화에 따른 빈부격차 등은 걸림돌이 되어 반대파에 의해 축출되었다.
존 메이저(John Major; 1943- )는 대처보다는 실질적이며 개방적인 정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영국은 30억 파운드의 재정적 손실을 입게 되었고, 보수당 내의 각종 스캔들과 반대파의 움직임으로 1997년 총선에서 패배함으로 노동당에 자리를 내주었다.

④ 노동당의 집권(1997- )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한 40대 초반의 노동당 당수 토니 블레어(Tony Blair; 1953- )는 존 프레스코의 좌파노선에서 벗어나서 “신노동정책”의 개혁노선을 채택하였다. 영국 언론은 그를 비전과 결단력을 겸비한 새 시대의 지도자로서 “영국의 케네디”, “영국의 클린턴”이라고 격찬하였다. 그는 교육, 복지, 기술발전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노선을 밟는 반면에 법률, 질서, 가족윤리에 대해서는 보수주의 노선을 택하고 있다.

(2) 프 랑 스
① 제 4 공화국(1945-1958)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은 쟌 다르크와 같은 구국적 인물로 자신을 간주하였다. 그러나 악성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어려웠고, 장 모네을 내세워 국가현대화작업을 추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드골은 결국 자신의 뜻대로 집권할 수 없게 되자 1947년 1월 대통령직을 스스로 사임하였다.
뒤를 이은 사회당의 펠릭스 구엥은 3당 연립정부를 이루고 석탄, 가스, 전력, 은행 등을 국유화하는 한편 건강보험, 연금을 포함하는 국민보험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인도차이나, 베트남 사태와 1957년부터 야기된 알제리 폭동으로 1958년 제 4 공화국은 무너지고 드골이 다시 프랑스 총리로 임명되었다.

② 드골의 제 5 공화국(1958-1969)
드골은 1958년 9월 국민투표로 새 헌법을 만들고 신공화국연합의 세력을 신장시켰으며, 미셀 드브레를 총리로 임명하고 대통령 중심으로 국사를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또한 식민지로 하여금 완전독립과 프랑스공동체의 양자택일을 하게 하였고, 1960년 남부아프리카 식민지를 모두 독립시키고 에비앙 협정(1962)에 의해 알제리 문제를 해결하였다.
드골은 국제적으로 러시아, 중국, 동유럽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NATO에서의 지위를 굳혔으며 핵무기 개발로 국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1968년 대학생들의 데모와 베트남전쟁 항의, 좌파들의 준동,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1969년 4월 국민투표에서 패배하게 되었다.

③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와 지스카르
퐁피두정권(1969-1974)은 좌파들의 분열에 힘입어 승리하였으며, 자크 사방델마스를 총리로 임명하고 IMF의 차관으로 경제회복을 시도했다. 경제안정과 세계 4대강국의 위상을 지켰으나 1973년 유가인상으로 프랑스의 경제는 악화되고 그는 1974년 사망했다.
지스카르 데스탱(Giscard d`Estaing)은 중도파의 지지로 재정안정과 개혁주의로 군주의 역할을 시도하려는 자유주의자로 국민의 인기를 얻었다. 드골파의 인물들을 기용하여 국면에 대처하였으나 경제 불황으로 좌파연합의 사회당의 미테랑에 의해 실각했다.

④ 미테랑의 사회당(1981-1989)
미테랑(F. Mitterrand)은 경제통제, 국유화 등 일련의 사회주의 정책을 통하여 민심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통신, 금융, 화학공업을 국유화함으로 국내총생산고(GDP)의 증가를 이루었지만 교역의 적자와 대외부채의 격증으로 재정적 압박력이 가중되었다. 지방분권화를 촉진하였으며 사형제를 폐지하고 주당 노동시간을 39시간으로 줄이는 등 획기적인 사회개혁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1988년 재당선 되었으나 외교적 실패와 경제적 긴장을 풀지 못해 밀려나고 말았다.
1996년 자크 시라크(J. Chirac; 1932- ) 대통령은 핵실험, 사회보장제개혁을 통한 강국화를 구상하였다. 2002년 재선된 그는 좌우동거에서 벗어나 강력한 통합당으로 출범하게 되었으며 내무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우범지역의 경찰무장강화를 통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는 앞으로 공기업의 민영화, 소득세 5%인하, 주당 35시간 노동제. 미국과의 관계. 중동저책의 방향노선 등 풀어야 할 과제들을 안고 있다.

(3) 독 일
① 서독의 단독정부(1945-1949)
1948년 런던회의에서 서방점령지구의 입법의회와 헌법제정을 결의하자 소련은 베를린을 봉쇄하였다. 독일은 서독만의 정부를 원하지 않았지만,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잠정적으로 기본법 제정을 위한 의회협의회를 구성하고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를 택하였다. 가장 유력한 정당은 사회민주당이었으며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반자본주의적 지도자 쿠르트 슈마허를 지도자로 옹립하였다. 기독교민주당과 기독교사회당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지지를 받고 비사회주의적인 개혁운동을 모토로 하였다. 기독교민주당의 지도자들은 아데나워와 에르하르트 등이 유명하다.


② 아데나워 집권(1949-1963)
1950-1960년대 서독의 번영은 아데나워(Konard Adenauer; 1876-1967)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이었다. 1949년 동부독일은 소련 주도의 독일민주공화국이, 서독은 독일연방공화국이 되었다. 아데나워는 IMF의 차관으로 무역적자와 실업자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였으며, 에르하르트를 기용하여 낮은 세금, 통화안정, 자유무역 등의 정책을 펼쳤다. 친서방적 자유민주주의에 기초를 두고, 유대인들의 피해를 보상하며,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결성하여 독일의 주권을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전후 독일을 경제부흥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공로가 컸지만, 지나친 권위주의적 통치스타일과 친서방적 반공주의 정책, 친미주의 정책 등은 말년에 에르하르트와의 불화, 강압적인 슈피겔지의 탄압사건 등과 함께 그를 더 이상 권좌에 있게 하지 못하였다.
에르하르트(Ludwig Erhard) 정권(1963-1974)은 토론을 통한 합의를 중시함으로 결단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독과의 인적교류와 무역교류를 통해 인기를 누렸지만, 외교적으로는 미숙한 점을 드러냈다. 1966년 미국, 영국과의 독일주둔비 분담문제에 실패하고 사임했다. 쿠르트 키징거는 사회민주당과의 연립정부(1966-1969)를 세웠으며, 외무장관에 빌리 브란트를 임명하여 동유럽국들과의 “동방정책”에 실효를 거두었다.

③ 브란트(Willy Brandt)의 사회민주당(1969-1974)
빌리 브란트는 국가간섭과 동방정책을 정치골격으로 삼았다. 사회복지, 문화, 교육분야에 예산을 치중하고 보다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려고 하였다. 1972년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입지를 굳히는 듯 했으나 반미감정, 동방정책의 답보화, 1974년 동독간첩으로 체포된 비서사건 등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tdt)의 사회민주당 정권(1974-1982)은 통화긴축, 테러리즘 차단 등으로 사회안정에 성공하였다. 외교적으로는 1975년 미, 영, 프, 서독,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로 구성된 “7개국집단(G7)”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79년에는 프랑스의 지스카르와 협력하여 유럽통화제도를 만드는데 기여했으며 1982년 사임했다.

④ 콜(Helmut Kohl)의 기독교민주연합(1982-1998)
콜은 국가간섭정책으로부터 벗어나 기업의 자본주의적 활동을 장려하였다. 무역은 호전되고 인플레이션도 안정세를 찾게 되었다. NATO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 고르바초프의 화해정책을 따랐으며 1987년 동독의 호네커가 서독을 방문하였다. 1990년 10월 분단 41년만에 독일을 통일하는 역사적 과업을 이룩하게 되었지만, 흡수통일에 대한 부담은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oeder)에게 정권을 넘기게 하였다. 슈뢰더가 앞으로 어떻게 독일의 현안문제를 잘 해결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4) 미 국
① 트루먼(Harry S. Truman)과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민주당의 트루먼 대통령(1945-1953)은 전쟁의 종료로 인한 군수중단으로 생긴 실업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부주도의 간섭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어려운 문제는 노동자들 속에 침투한 소련의 공산주의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공화당이 우세한 의회가 만든 태프트-하틀리 법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막는데 효과적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을 막으려는 “견제정책”과 유럽의 원조를 목표로 하는 마샬플랜을 전개했으며, 개혁정책 “페어딜(Fair Deal)"로 공평한 사회를 추진하였다. 1951년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매카디이즘(Mc Carthyism)"이라는 반공소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공화당의 아이젠하워(1953-1961)는 자유방임의 모토를 원리로 내세웠다. 테네시개발공사(TVA)를 중단시키고 원자력발전사업을 민간기업에 넘겼으며, 행정부의 권한을 축소하는 지방분권화 방침과 흑인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민권정책을 실행하였다. 흐루시초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중산계층의 가치와 문화가 폭넓게 지배하는 번영과 안정의 시기를 가져왔다. 이 원동력은 존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교육과 사회정책, 신문, 텔레비전, 언론 등의 정보매개체의 영향이었다. 한편 개성 잃은 비인간화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의 반항집단 “힙스터(hipsters)"와 "비트닉스(beatniks)" 등이 일어났다.

②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와 존슨(Lyndon B. Johnson; 1908-1973)
케네디가 내건 모토는 윌슨과 루즈벨트의 이상주의와 자유주의를 다시 일으키려는 “뉴프런티어” 정책이었으며, 개혁정신은 빈곤퇴치와 민권운동에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하여 교통수단과 학교 등지에 흑인보호를 구호로 내세웠다. 대외적으로는 약소민족의 민족주의 옹호와 신생국의 경제지원의 일환으로 “평화식량계획”과 노동을 제공하는 “평화봉사단”을 만들었다. 1961년 쿠바사건을 겪었고, 1963년 소련과의 핵실험금지조약, 아폴로 계획등을 추진했으나 1963년 11월 달라스에서 총격사건으로 사망하여 집권시대를 마감했다.
존슨은 케네디의 정책을 계승했다. “위대한 사회”를 모토로 빈곤퇴치운동을 전개했다. 1965년 초, 중등교육법과 고등교육법을 각각 제정하여 예산을 실업자들에게 배정하여 빈곤퇴치운동의 실효를 거두었다. 그러나 1965년 월남전의 개입은 “위대한 사회”를 위한 사회개혁을 중단하게 만들었으며 반전여론을 형성하게 하였다. 더구나 1964년 시작된 흑인폭동은 1968년 마틴 루터 킹이 테네시에서 피살되는 결과를 빚었고, “블랙파워운동”과 “블랙 내셔널리즘”은 어려운 과제로 남게 되었다. 또한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체제반항운동은 “신좌파”운동으로 번지게 되었으며, 기존체제로부터 이탈하려는 1950년대의 “비트닉스”를 닮은 비정치적 “히피파”가 생겨났다.

③ 보수주의의 복귀
1960년대의 미국이 개혁의 시대라면 1970년대의 미국은 보수주의 시대였다.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1968-1974)은 법을 지키는 사회를 만들려 하였으며, 자유방임정책으로 국가간섭주의를 물리쳤으며, 지방분권화를 통하여 예산을 줄이려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헨리 키신저를 기용하여 실용주의적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워터게이트사건(1972)과 월남의 항복(1975)으로 인기가 하락하였으며 탄핵으로까지 번져 사임했다. 제랄드 포드(Gerald P. Ford; 1974-1976)도 닉슨의 정책을 계승했으나 닉슨의 사면으로 곤욕을 치루었다.
1977년 지미 카터(James Carter; 1924- )는 대체에너지 개발을 촉진하였으며, 닉슨의 현실정치 대신 “인권정치”를 내세웠으며 1979년 임기를 마쳤다. 1970년대의 미국사회는 “자기중심적” 혹은 “자기도취적"문화의 시대였다. 개인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동방의 치료법이나 비교(秘敎)가 등장하였으며, ”거듭난 기독교인“운동이 나타났다.
로널드 레이건(Ronard W. Reagan; 1980-1988)은 국방비를 제외한 정부지출을 박고 기업을 장려하여 “레이거노믹스”의 자유방임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실업률과 인플레를 줄였지만, 달러의 가치가 높아지고 국가채무가 느는 사상최대의 채무국을 전락하기도 하였다. 결국 1986년 “이란-콘트라”사건이 터지고 행정부의 각종 비리로 더 이상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80년대 미국은 인구감소, 백인수감소, 불법이민사면, 실업인증가, 도시위기, 마약, 에이즈 등의 문제들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조지 부시(George Bush; 1924- )는 걸프만 사건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경제적 실정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1992년 빌 클린턴(William J, Clinton; 1946- )은 최강의 군사력과 적극적인 경제정책으로 미국을 새롭게 탄생시킨다는 기치를 세웠다. 공화당의 보수적 노선에 민주당의 색깔을 가미한 “뉴데모크라트”는 재정을 흑자로 바꾸고, 최장기 경기호황을 누리게 하였다. 그러나 1998년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탄핵을 받았지만 70%에 이르는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과감한 실용적인 경제정책과 유화적인 대외정책 때문인 것으로 평가된다.
조지 부시의 아들인 부시(G.W.Bush; 1946- )는 대선공약인 미사일 방어체제(MD)를 구축하여 “불량국가”들의 테러리즘에 대처했다. 2001년 9월 11일 빈 라덴의 뉴욕 무역센터의 테러리즘 이후, 북한, 이라크 등을 “불량배국가”로 규정하고 “악의 축”을 제거하는데 힘을 모을 것을 역설하였다. 2002년 5월 28일 “로마선언”으로 나토와 러시아의 새로운 안보협력시대를 열어 그의 정책을 더욱 다지고 있다.

(5) 소 련
① 스탈린, 후루시초프, 브레즈네프
1929년 스탈린(1879-1953)은 마르크스주의에 오리엔트식 전제주의를 가미한 스탈린식 공산주의를 정치기조로 삼았다. 비밀경찰과 강제수용소의 통제방식으로 일국사회주의의 초인인 “지도자 동지”로 군림하였다. 지배세력과 중산층 유태인들을 숙청하였으며, “외연적 성장”에 치중하는 제4차 5개년 계획(1946-1950)을 실시하였다. 동구권 구가들로 소련 위성국을 형성하였으며, 1949년에는 공산권경제협력기구(COMECON)을 만들어 세력을 과시하였고 1953년 사망함으로 소련의 스탈린화는 마감되었다.
후루시초프(1953-1964)는 공산주의자이면서 개혁자의 꿈을 가진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스탈린 격하운동을 펼쳤으며, 대외적으로 데탕트를 내세워 서방으로부터의 환심을 유도하였다. 또한 경제적 분권화를 통해 중공업을 육성하고 주택건설, 연금제개선, 농가소득향상 등에 주력하며 민중의 대변자로 자처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소련인들의 생활은 이전에 비해 상당히 좋아졌으나, 7개년 농업계획과 공업계획의 차질, 당의 분권화 정책등으로 신뢰를 잃어 가던 중, 1962년 쿠바미사일위기로 지지기반을 잃고, 결국 1964년 비밀경찰(KGB)의 알렉산더 쉘레판의 쿠데타에 의해 실각했다.
브레즈네프 시대(1964-1982)는 관료조직과 군비조직이 발달하고 완전고용과 낮은 물가가 유지된 안정된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군비와 핵무기보유로 미국과 어깨를 겨누면서 데탕트를 시도하였으며 당과 군부, 비밀경찰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소련인들의 생활수준은 향상되었으나,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비능률적인 차질이 나타나, 획일적 사회체제로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1982년 사망했다.

②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치
미카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의 “새로운 사고”로 표현되는 모토는 “공개(glasnost)”와 “재편성(perestroika)이었다. 이것은 서유럽적 의미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소련에 대한 비판의식과 사회조직의 개편을 시도하려는 내용이었다. 그는 금주운동, 부패추방운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사고를 국민에게 보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 움직임은 여러 가지로 시기상조였다. 노멘클라투라로 불리우는 지배계층은 특권을 누리는 반면에 노동, 농민층은 생활이 더욱 어려워만 갔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운동 이후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연방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주의운동이었다. 아제르바이젠을 비롯하여 발틱 3국 등이 독립을 요구하였으며, 이는 보수파를 중심으로 하는 1991년 8월 쿠테타로 연결되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대통령 옐친의 개입으로 공산당을 70여년만에 해체하는 개가를 올렸지만, 결국 고르바초프는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옐친(Boris Yeltsin; 1931- )은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족 공화국인 우크라이나, 백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을 결성하고 자유주의체제국가로 다스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랜 공산독재체제에 물들어 있는 체제의 변화는 쉬운 과업이 아니었으며, 경제파탄과 건강악화는 소련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푸틴(Vladimir Putin; 1952- )은 재정문제를 완화시키고 서방에 강경노선을 펼치며 체첸사태를 유리하게 수행하는 등 일련의 국민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1999년 옐친의 사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다음해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나토와의 신안보안협력시대를 이끌어내고(로마선언),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 동안 경직된 문제를 해결하고 자유민주주의로의 순항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고갈로 누적된 공산주의자들과 국민들의 불만을 얼마나 신속하게 푸느냐가 난제로 남아 있다.

(6) 이탈리아, 그리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이후 반파시스트 전선에 앞장서고 사회개혁을 기치로 내건 기독교민주당이 가장 활발하였다. 알치데 데가스페리(Alcide de Gasperi)는 1946년 군주제 대신 공화제를 택하였다. 반공을 내세워 NATO와 결속하고 유럽통합운동에 적극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1950-1963년 산업화와 도시화에 성공하였으며, 사회당, 공산당과 제휴하여 난국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폭동(1968), 과잉인구, 인플레이션, 석유파동(1973), “붉은 여단”과 같은 과격도시테러집단, 남부지역의 마피아조직 등의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파쇼의 독단과 1970년대의 어려운 격동기를 잘 견뎌냈으며 정치적인 극단주의를 넘기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스의 경제는 파탄 그 자체였다. 조지 2세의 왕당정부는 공산당의 반발로 매우 어려웠다.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그리스내전이 동서냉전의 요지로 떠오르고 마샬계획의 원조를 받게 되자 3년여에 걸친 내전이 종식되었다. 1967년 군부의 쿠테타가 계기가 되어 공화제(1973)가 이루어졌다. 그리스는 결국 사회당과 신민주당의 양당제도에 의해 자유주의적 정치체제가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7)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총통은 1937년 무솔리니의 법인형 국가주의를 모방하였지만, 독재자가 아닌 신의 은총에 의한 중재자가 되려고 하였다. 극단적 민족주의에 의해 일당독재를 실시한 프랑코 정권은 경제 현대화로 농업의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내각의 새로운 기술관료화로 자본주의의 장점을 도입하여 국민수준의 향상과 중산층의 증대를 이루었으나 불만이 팽배하게 되었다. 1975년 11월 사망하였다.
아돌포 소아레즈 총리의 민주중도연합(UCD)은 1981년 소텔레의 무능으로 사회민주당과 기독교민주당으로 분열되었고, 1982년 사회당에게 패해 중도좌파의 길을 열어주었는데, 이는 스페인의 민주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사회당의 곤잘레스는 1989년 10월 다시 집권함으로 스페인은 어려운 난국 끝에 안정된 정부를 유지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1932년 군부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은 살라자르(Antonio O.Salazar)에 의해 다스려졌다. 포르투갈은 농업에 종사하는 후진국으로 국민 대부분이 문맹에 속하여 공산세력의 침투가 심하였다. 도시게릴라의 폭동과 아프리카 식민지들의 반발, 그리고 73, 74, 75년의 세 차례에 걸친 정치적 폭동을 거쳐 소아레즈의 자유주의 정권이 형성되었다. 1987년 아니발 카바소 실바 대통려은 사회당의 협조로 헌법에서 마르크스적 요소를 삭제하고 재산의 사유화, 시장경제 등의 조항을 집어 넣음으로 서방세계의 대열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8) 동부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
제2차 대전후 소련은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화하였다. 각 국가 안에 연립정부를 수립하고, 코민포름(1947)을 통하여 공산화를 시도하였다. 스탈린화 정책은 1949년 공산권경제 협력기구(COMECON)의 창설로 더욱 구체화 되었다.

① 소련공산체제의 도입
폴란드는 최초로 소련의 점령국이 되었다. 2차대전에서 700만의 희생을 치른 폴란드는 나치즘과 러시아에 대항했지만 1944년 공산주의자 고물카에 의해 지배되다가 1952년 스탈린의 축소판 비에루트에 의해 지배되었다. 루마니아는 1952년 게오르규-데쥐가 루마니아의 스탈린이 되었으며, 불가리아는 전쟁 전부터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헝가리는 1952년 라즐로 라짓을 축출한 라코시가 권좌에 올랐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동유럽에서는 가장 자유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로서 소련의 팽창정책이 잘 먹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1948년 고트발트가 실력자가 되었다. 알바니아는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세르비아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우세한 입장에 있었던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체제로부터 점차로 독자노선을 걸었다. 티토(Marshal Tito;1892-1980)는 발칸동맹을 결성했으며, 집단농장폐지, 공장경영의 이익을 노동자에게 주려는 노동자협의회 결성 등과 같은 혁신적 경제정책을 실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② 소련공산체제에의 반발
1953년 스탈린의 사망으로 동유럽에 변화가 일어났다. 소련의 “새로운 노선”은 동유럽국가들에게 현실주의적 이해관계로 인한 괴로움을 주었다. 민족주의 의식은 그들의 자아의식을 자극했으며, 권력층 내부는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1956년 후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연설과 56-58년 중·소 이념분쟁은 동유럽 국가들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폴란드에서는 1956년 에드워드 오합이 후루시초프의 개혁을 따랐다. 정치범을 사면하고 의회의 정치적 토론을 허락하였다. 노동자들은 유고의 노동자협의회를 모방한 조직을 만들었으며, 1956년 포즈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고물카가 다시 등장하면서 스탈린주의를 배격하였다.
헝가리는 1956년부터 정치적 자유운동이 임레 나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0월초 30만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부다페스트에서는 학생들의 과격시위가 벌어져 스탈린 동상을 끌어 내리고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의 진압과정에서 4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났으며 다시 소련의 충복인 까다르가 들어섰다.
헝가리 사태 이후 후루시초프의 권위와 동유럽의 결집은 상당히 약화되었지만 동독의 울브리히트, 체코의 노보뜨니, 불가리아의 지브꼬프, 알바니아의 호자 등은 강력한 독재자로 자처하면서 경찰국가와 토지집단화를 더욱 강화하였다. 알바니아는 중·소 이념분쟁으로 소련과의 관계를 끊고 중공과 관계를 가졌으며, 동독은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로 소련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③ 자유화 운동의 전개
1964년 후루시초프의 실각으로 동유럽은 다시 한번 자유화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브레즈네프의 국내문제 집중으로 동유럽 국가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다. 서서히 서방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들어오려고 하였다.
동유럽의 자유화 운동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다. 1968년 두브체크는 공산당의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지식인들의 개혁을 실시하려고 하였다. 두브체크는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로 “프라하의 봄”을 꿈꾸고 있었다. 이에 소련은 “5개국 집단”을 결성하여 두브체크에 제재를 가했으나 유혈충돌은 없었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는 동유럽의 드골로 행세하였다. 그는 COMECON의 개편에 바나대하고 서독 등 서방과 외교를 가지면서 독재체제를 지켰다. 헝가리는 1956년 이후 신경제원리의 도입, GATT와 IMF 가입 등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폴란드는 1980년 레흐 바웬사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조합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자유노조가 결성되는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다.
소련 고르바초프의 출현은 소련은 물론 동유럽의 공산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견인차가 되었다. 그것은 1989년 동유럽에서는 처음으로 헝가리에 복수정당을 허용하였으며, 바웬사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노조에 이어 비공산정권을 탄생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1989년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바르샤바 조약에서 폐기되었고 1990년 10월 동·서독 통일에 이어 소련의 공산당도 1991년 전면 해체되었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독립하였으며, 유고슬로바키아는 내전을 통하여 분해되었다. 1991년 유고연방에서 크로아티아인(가톨릭)과 세르비아인(그리스정교)의 충돌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슬로베니아(가톨릭)와 크로티아가 독립하고 다시 세르비아인들이 터키인들은 공격하는 과정에서 내전이 격화되었다. 유엔군이 파견되었으나 해결의 실마리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 이 상 -

출처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
글쓴이 : 오직 성경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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