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 님의 글입니다.
설교신학개론 (1) 설교자 (Preacher) 2007-09-29 23:27:19, view [7]
<font class=list_eng><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style="table-layout:fixed;"><col width=100%></col><tr><td valign=top class=list_han> 설교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르심 (calling) 을 받은 자이다.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밝힌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使徒 된 바울”. ‘사도’ (apostle) 라는 말은 헬라어 ‘apostolos’ 에서 그 뜻을 분명히 한다. 즉,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 뜻이다. 고린도 후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말한다고 밝혔다. 영어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 (a man sent from God)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보내심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보내시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어진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이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지목되고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 질문은 설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설교가 자신이 연구한 글인가? 아니면 설교가 주께로부터 받은 (Givenness; being given) 주님의 말씀인가?” 바울은 이런 면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신’ (고후 5:20), ‘하나님의 일꾼’ (a servant of God-고전 4:1; 고후 6:4)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롬 1:1) 이라 했다. 사신은 오늘날 말로 ‘대사’ (Ambassador)를 말한다. 대사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다. 대사는 오직 국가 또는 국가의 한 원수로부터 부름 받아 국가 원수로부터 받은 메시지만을 대신 전한다. 종이든, 일군이든, 사신이든, 대사든, 이 모든 직함들은 자신을 부르신 자, 택하신 자, 구속한 자, 고용한 자의 뜻을 받들어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는 사도됨이 자신의 원함이나 자격이나 노력이나 남의 추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모든 서신의 초두에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힌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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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로 (설교자로) 부르심에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요적 요소가 포함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음 사람은 설교 이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복음전파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그러니 (첨가)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16) 바울은 비록 자기 자신은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고 부적당한 사람이라고 느낄지라도 부르신 분을 따라 이 복음 전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는 연약함과 주저함 속에서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br />
<br />
“내 논점은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을 자신 있게 생각하는 사람, 전혀 주저함이나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이 설교하는 자는 결코 ‘설교자’로서 부르심을 받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그 일이 움치러 지도록 끔찍한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강박관념, 또는 강요가 설교자로 하여금 말씀을 증거하게 한다.” <br />
<br />
부르심을 받은 설교자는 먼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고 뒤에 하나님의 말씀을 양떼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전력 투구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교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소명이다. 계속해서 윌리암 스틸 (William Still)은 권면한다. <br />
<br />
“만일 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면, 너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며 확실히 너의 아내의 것도 아니고, 너의 아이들의 것도 아니며, 더욱이 회중의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도록 힘쓰라. 이것을 대체할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혹시 너에게 충고를 할 수 있으나 그들이 너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너와 같지 않다면 그들의 충고는 아무 가치가 없다.” <br />
<br />
둘째로 설교자는 교회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로마서 10:13-15) 설교자는 개인적인 소명을 교회에 의해서 확인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교회는 설교자의 자격과 자질에 대해 성서가 지시하는 객관적인 면들을 검토해야 한다. 교회는 후보자가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사람인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인가? 경건한 삶을 사는가? (딛 2:6-8) 그의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가?(딤후 2:24) 구변의 은사가 있는가? 논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훈련과 준비가 된 사람인가? <br />
<br />
셋째로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 <br />
하나님의 사랑, 영혼을 사랑, 진리의 지식, 우리 안에 내재하신 성령 하나님, 이것들이 설교가를 만든다. 이 점을 특히 로이드 존스는 강조한다. <br />
<br />
“만일 설교자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만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갖고 있다면, 그가 사람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성경의 진리와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이 계시면, 그는 설교할 것이다.” <br />
<br />
존 스토트 (John Stott)는 그의 저서 ‘설교자의 얼굴’ (The Preacher’s Portrait) 에서 설교자를 다섯 가지로 묘사한다. 그 다섯은 첫째, 청지기 둘째, 대사 셋째, 증인 넷째, 아버지 그리고 다섯째, 종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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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청지기 (Steward)는 설교자의 메시지와 권위에 관련된다. <br />
고린도전서 4장 1절로 2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청지기는 남의 재산을 맡아서 돌보고 관리, 집행하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비밀의 청지기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이제 성서 안에 보관된 자기 계시들에 대한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메시지는 한 때 계시되고 이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br />
<br />
하나님의 신비란 하나님이 노출시켜서, 감추어진 것을 열어놓아서 알려진 진리이다. 하나님의 신비는 하나님의 열린 비밀이요 성서 안에서 형성된 자기 계시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비밀들을 알게 하는 청지기이다. <br />
<br />
청지기 비유는 설교자의 메시지의 내용을 알려준다. 즉,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메시지를 받는다. 청지기가 자기의 것으로 주인의 집을 섬기지 않듯이 설교자도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임무는 그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br />
<br />
청지기 비유는 설교자의 권위의 성질에 대해 가르쳐준다. <br />
설교자는 권위를 갖는다. 이 권위는 겸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겸손은 확신을 배제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권위는 “성경이 말한다”고 외칠 때 온다. 다시 말하면 성서의 권위로부터 주어지는 간접적 권위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한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스토트는 이 점을 힘주어 말한다.<br />
<br />
“설교자가 더욱 하나님 말씀 앞에서 스스로 떨수록, 그리고 자신의 의식 속에서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강하게 느낄수록 그는 청중 앞에서 더욱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br />
<br />
설교자의 권위는 그가 다루고 있는 본문에 충실하고자 하는 친밀성과 본문을 이해해온 정확성과 설교자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강력한 힘에 달려 있다. 설교는 그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이런 권위있는 말씀 선포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첫째는 성경공부요 둘째는 본문을 놓고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성서의 궁극적 저자시오 최고의 해석자이시기 때문이다.<br />
<br />
둘째, 대사 (Herald)는 설교자의 선포와 호소에 관련된다.<br />
대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 받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장 21, 23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keryssomen, we herald)” 이 위임된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고 한다. 대사는 청지기와 다른 네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br />
1) 청지기의 직무가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이는데(feed) 있다면 대사는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복음선포는 도시에서 외치는 자 (the Town Crier)에 의해서, 대 낮에, 트럼펫 소리와 같이, 지금 이순간까지, 모든 자들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다.<br />
2) 선포의 내용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알림, 즉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청지기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의 대사이다. 설교는 하나의 관점이나, 사상이나, 의견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를 선포하는 것이다.<br />
3) 대사는 청중의 반응을 기대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화해를 선포한 대사는 청중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기대한다.<br />
4) 청지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양떼들 사이에서 활동하지만 대사는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한다. 대사란 공적 권위를 자지고 왕의 명령을 나르는 메신저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고후 5:20) <br />
<br />
셋째, 증인 (Witness)은 설교자의 경험과 겸손에 관련된다.<br />
신양성서에서 발견되는 세번째 설교자에 대한 단어는 ‘증인’이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증명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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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지기가 가정에 대한 비유이고 대사가 정치적 비유이라면 ‘증인’은 법적 비유이다. 증인은 재판장과 피고와 변호사가 있는 법정에서 일어난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자는 증인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대 앞에 서있고 세상을 그를 심판하고 사탄은 수많은 거짓말로 고소하고 수많은 거짓증언들을 집결한다. 주 성령께서는 보혜사- 변호사-가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예수 사건에 증인 되라고 부르신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증언하고, 그리스도를 변호하며, 그리스도를 칭찬하며, 세상이 판결을 하기 전에 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고 생각해야 될 증거들을 법정 앞에 가져오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br />
<br />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다. 설교자는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 되심에 증인이다.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으로 순교자의 자리에 가서라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증인은 자신이 전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고 듣고 죄용서 받은 체험이 바탕이 된다. 증인은 자기에 대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해야 하므로 바로, 능력있게 전하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없이 설교할 수 없다.<br />
<br />
넷째, 아버지 (Father)는 설교자의 사랑과 온유에 관련된다.<br />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버지’로 불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고린도교인의 아버지요, 갈라디아교인의 아버지요, 데살로니가교인의 아버지요 몇몇 개인들의 아버지라 서슴없이 말했다. 의심할 것도 없이, 바울이 언급한 온유와 사랑을 겸비한 아버지의 자질은 설교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는 의무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돌본다. 일보다는 관계에 중심을 둔다.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들의 개인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설교자는 아버지요 회중은 그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 설교자는 사랑으로 자녀들이 성숙하도록 돕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긴다.<br />
<br />
어떻게 설교자가 회중의 아버지가 되는가? 설교자가 전한 복음을 통하여 낳은(회심한)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거침없이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녀’라 불렀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녀를 권면하고, 훈계하고, 교육하고, 훈련하고 용기를 준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 설교자는 성도들의 모든 환경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에 뿌리를 둔다. 피터 마샬 (Peter Marshall)은 말하기를 “너는 (설교자는) 많은 문제들- 의심들, 두려움들, 믿음을 잃어버린 걱정들-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면서 너의 설교를 반듯이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사랑과 온유함이 성도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며 그들의 본이 되고자 노력하는 아버지 같은 설교자가 되야 한다.<br />
<br />
다섯째, 종 (Servant)은 설교자의 능력과 동기에 관련된다.<br />
헬라어에는 종을 나타내는 여러 단어들이 있다. Oiketes 가정의 종, doulos 나면서부터 종, 법적 권리가 없고 주인에게 속한 소유물, huperetes 전쟁시 선창에서 노를 짓는 노예, 그리고 diakonos 주인의 명을 받들어 수행하는 종이 그것들이다. Diakonos는 명령과 권위에 따라 섬긴다는 뜻으로 왕의 수행원, 즉 음식으로 섬기는 종을 묘사한다. 그는 권위있는 왕의 명령과 사명을 이행하는 왕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그는 왕의 이름으로 행하고, 그의 왕은 그를 통해 일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종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서 믿음을 창조하도록 그를 통해서 강력하게 일하시지 않는다면 그의 섬김은 소용이 없다. <br />
<br />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긴급히, 간절히,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설교에 무관심하고, 자신과 별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낡아빠진 유물로 생각하는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의 설교를 통하여 회심하는가? <br />
<br />
설교자는 하나님의 능력(dynamis Theou)이 필요하다. (고전 1:17-2:5)<br />
1) 하나님의 말씀 안에 능력이 있다. (렘 23:29)<br />
2)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다. (고전 1:18, 21, 23)<br />
3) 주 성령님 안에 능력이 있다. (고전 2:4,5; 살전 1:4)<br />
<br />
설교에 있어서의 능력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다. Dynamis Theou,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이 나타내시고 확증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하여 선포될 때 나타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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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포사이드(Peter T. Forsyth)는 설교자들에게 경고한다.<br />
“기독교가 살고 죽는 것은 설교에 달려 있다. 성경이 최고의 우위에 있을 때마다 설교는 예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웅변가는 사람을 부추겨 즐겁게 하려 하나 설교자는 그들을 구속 받도록 초청한다. 웅변가는 형제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촉구하나 설교자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 할 것을 추구한다. 설교와 함께 기독교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복음의 선포이며 아니 더 나아가 선포하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br />
<br />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서커스의 외줄타기(Tightrope) 곡예사와 같다. 외줄은 성령의 줄이며 중심을 잡는 바는 과거와 현재를 균형 잡히게 한다. 외줄타기는 또한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균형을 잡게 한다. 성령의 외줄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구원하기 위해 오셨던 죄인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의사소통의 긴장이다. 외줄타기 곡예사인 설교자의 위험은 과거로 곤두박질할 수도 있고 헛되고 목적 없는 현시대로 곤두박질 할 수도 있다. 설교자는 현실 없는 과거의 기록된 성경에만 집착하거나 진리(말씀)없는 현세만 집착할 위험에 있다. 성령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함은 이 두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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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르심 (calling) 을 받은 자이다.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밝힌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使徒 된 바울”. ‘사도’ (apostle) 라는 말은 헬라어 ‘apostolos’ 에서 그 뜻을 분명히 한다. 즉,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 뜻이다. 고린도 후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말한다고 밝혔다. 영어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 (a man sent from God)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보내심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보내시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어진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이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지목되고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 질문은 설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설교가 자신이 연구한 글인가? 아니면 설교가 주께로부터 받은 (Givenness; being given) 주님의 말씀인가?” 바울은 이런 면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신’ (고후 5:20), ‘하나님의 일꾼’ (a servant of God-고전 4:1; 고후 6:4)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롬 1:1) 이라 했다. 사신은 오늘날 말로 ‘대사’ (Ambassador)를 말한다. 대사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다. 대사는 오직 국가 또는 국가의 한 원수로부터 부름 받아 국가 원수로부터 받은 메시지만을 대신 전한다. 종이든, 일군이든, 사신이든, 대사든, 이 모든 직함들은 자신을 부르신 자, 택하신 자, 구속한 자, 고용한 자의 뜻을 받들어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는 사도됨이 자신의 원함이나 자격이나 노력이나 남의 추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모든 서신의 초두에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힌다.
사도로 (설교자로) 부르심에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요적 요소가 포함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음 사람은 설교 이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복음전파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그러니 (첨가)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16) 바울은 비록 자기 자신은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고 부적당한 사람이라고 느낄지라도 부르신 분을 따라 이 복음 전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는 연약함과 주저함 속에서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내 논점은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을 자신 있게 생각하는 사람, 전혀 주저함이나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이 설교하는 자는 결코 ‘설교자’로서 부르심을 받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그 일이 움치러 지도록 끔찍한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강박관념, 또는 강요가 설교자로 하여금 말씀을 증거하게 한다.”
부르심을 받은 설교자는 먼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고 뒤에 하나님의 말씀을 양떼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전력 투구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교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소명이다. 계속해서 윌리암 스틸 (William Still)은 권면한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면, 너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며 확실히 너의 아내의 것도 아니고, 너의 아이들의 것도 아니며, 더욱이 회중의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도록 힘쓰라. 이것을 대체할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혹시 너에게 충고를 할 수 있으나 그들이 너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너와 같지 않다면 그들의 충고는 아무 가치가 없다.”
둘째로 설교자는 교회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로마서 10:13-15) 설교자는 개인적인 소명을 교회에 의해서 확인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교회는 설교자의 자격과 자질에 대해 성서가 지시하는 객관적인 면들을 검토해야 한다. 교회는 후보자가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사람인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인가? 경건한 삶을 사는가? (딛 2:6-8) 그의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가?(딤후 2:24) 구변의 은사가 있는가? 논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훈련과 준비가 된 사람인가?
셋째로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
하나님의 사랑, 영혼을 사랑, 진리의 지식, 우리 안에 내재하신 성령 하나님, 이것들이 설교가를 만든다. 이 점을 특히 로이드 존스는 강조한다.
“만일 설교자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만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갖고 있다면, 그가 사람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성경의 진리와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이 계시면, 그는 설교할 것이다.”
존 스토트 (John Stott)는 그의 저서 ‘설교자의 얼굴’ (The Preacher’s Portrait) 에서 설교자를 다섯 가지로 묘사한다. 그 다섯은 첫째, 청지기 둘째, 대사 셋째, 증인 넷째, 아버지 그리고 다섯째, 종이다.
첫째, 청지기 (Steward)는 설교자의 메시지와 권위에 관련된다.
고린도전서 4장 1절로 2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청지기는 남의 재산을 맡아서 돌보고 관리, 집행하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비밀의 청지기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이제 성서 안에 보관된 자기 계시들에 대한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메시지는 한 때 계시되고 이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신비란 하나님이 노출시켜서, 감추어진 것을 열어놓아서 알려진 진리이다. 하나님의 신비는 하나님의 열린 비밀이요 성서 안에서 형성된 자기 계시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비밀들을 알게 하는 청지기이다.
청지기 비유는 설교자의 메시지의 내용을 알려준다. 즉,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메시지를 받는다. 청지기가 자기의 것으로 주인의 집을 섬기지 않듯이 설교자도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임무는 그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청지기 비유는 설교자의 권위의 성질에 대해 가르쳐준다.
설교자는 권위를 갖는다. 이 권위는 겸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겸손은 확신을 배제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권위는 “성경이 말한다”고 외칠 때 온다. 다시 말하면 성서의 권위로부터 주어지는 간접적 권위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한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스토트는 이 점을 힘주어 말한다.
“설교자가 더욱 하나님 말씀 앞에서 스스로 떨수록, 그리고 자신의 의식 속에서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강하게 느낄수록 그는 청중 앞에서 더욱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의 권위는 그가 다루고 있는 본문에 충실하고자 하는 친밀성과 본문을 이해해온 정확성과 설교자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강력한 힘에 달려 있다. 설교는 그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이런 권위있는 말씀 선포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첫째는 성경공부요 둘째는 본문을 놓고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성서의 궁극적 저자시오 최고의 해석자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대사 (Herald)는 설교자의 선포와 호소에 관련된다.
대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 받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장 21, 23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keryssomen, we herald)” 이 위임된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고 한다. 대사는 청지기와 다른 네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
1) 청지기의 직무가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이는데(feed) 있다면 대사는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복음선포는 도시에서 외치는 자 (the Town Crier)에 의해서, 대 낮에, 트럼펫 소리와 같이, 지금 이순간까지, 모든 자들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다.
2) 선포의 내용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알림, 즉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청지기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의 대사이다. 설교는 하나의 관점이나, 사상이나, 의견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를 선포하는 것이다.
3) 대사는 청중의 반응을 기대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화해를 선포한 대사는 청중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기대한다.
4) 청지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양떼들 사이에서 활동하지만 대사는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한다. 대사란 공적 권위를 자지고 왕의 명령을 나르는 메신저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고후 5:20)
셋째, 증인 (Witness)은 설교자의 경험과 겸손에 관련된다.
신양성서에서 발견되는 세번째 설교자에 대한 단어는 ‘증인’이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증명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청지기가 가정에 대한 비유이고 대사가 정치적 비유이라면 ‘증인’은 법적 비유이다. 증인은 재판장과 피고와 변호사가 있는 법정에서 일어난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자는 증인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대 앞에 서있고 세상을 그를 심판하고 사탄은 수많은 거짓말로 고소하고 수많은 거짓증언들을 집결한다. 주 성령께서는 보혜사- 변호사-가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예수 사건에 증인 되라고 부르신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증언하고, 그리스도를 변호하며, 그리스도를 칭찬하며, 세상이 판결을 하기 전에 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고 생각해야 될 증거들을 법정 앞에 가져오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다. 설교자는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 되심에 증인이다.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으로 순교자의 자리에 가서라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증인은 자신이 전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고 듣고 죄용서 받은 체험이 바탕이 된다. 증인은 자기에 대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해야 하므로 바로, 능력있게 전하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없이 설교할 수 없다.
넷째, 아버지 (Father)는 설교자의 사랑과 온유에 관련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버지’로 불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고린도교인의 아버지요, 갈라디아교인의 아버지요, 데살로니가교인의 아버지요 몇몇 개인들의 아버지라 서슴없이 말했다. 의심할 것도 없이, 바울이 언급한 온유와 사랑을 겸비한 아버지의 자질은 설교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는 의무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돌본다. 일보다는 관계에 중심을 둔다.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들의 개인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설교자는 아버지요 회중은 그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 설교자는 사랑으로 자녀들이 성숙하도록 돕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긴다.
어떻게 설교자가 회중의 아버지가 되는가? 설교자가 전한 복음을 통하여 낳은(회심한)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거침없이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녀’라 불렀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녀를 권면하고, 훈계하고, 교육하고, 훈련하고 용기를 준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 설교자는 성도들의 모든 환경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에 뿌리를 둔다. 피터 마샬 (Peter Marshall)은 말하기를 “너는 (설교자는) 많은 문제들- 의심들, 두려움들, 믿음을 잃어버린 걱정들-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면서 너의 설교를 반듯이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사랑과 온유함이 성도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며 그들의 본이 되고자 노력하는 아버지 같은 설교자가 되야 한다.
다섯째, 종 (Servant)은 설교자의 능력과 동기에 관련된다.
헬라어에는 종을 나타내는 여러 단어들이 있다. Oiketes 가정의 종, doulos 나면서부터 종, 법적 권리가 없고 주인에게 속한 소유물, huperetes 전쟁시 선창에서 노를 짓는 노예, 그리고 diakonos 주인의 명을 받들어 수행하는 종이 그것들이다. Diakonos는 명령과 권위에 따라 섬긴다는 뜻으로 왕의 수행원, 즉 음식으로 섬기는 종을 묘사한다. 그는 권위있는 왕의 명령과 사명을 이행하는 왕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그는 왕의 이름으로 행하고, 그의 왕은 그를 통해 일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종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서 믿음을 창조하도록 그를 통해서 강력하게 일하시지 않는다면 그의 섬김은 소용이 없다.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긴급히, 간절히,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설교에 무관심하고, 자신과 별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낡아빠진 유물로 생각하는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의 설교를 통하여 회심하는가?
설교자는 하나님의 능력(dynamis Theou)이 필요하다. (고전 1:17-2:5)
1) 하나님의 말씀 안에 능력이 있다. (렘 23:29)
2)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다. (고전 1:18, 21, 23)
3) 주 성령님 안에 능력이 있다. (고전 2:4,5; 살전 1:4)
설교에 있어서의 능력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다. Dynamis Theou,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이 나타내시고 확증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하여 선포될 때 나타난다.
피터 포사이드(Peter T. Forsyth)는 설교자들에게 경고한다.
“기독교가 살고 죽는 것은 설교에 달려 있다. 성경이 최고의 우위에 있을 때마다 설교는 예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웅변가는 사람을 부추겨 즐겁게 하려 하나 설교자는 그들을 구속 받도록 초청한다. 웅변가는 형제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촉구하나 설교자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 할 것을 추구한다. 설교와 함께 기독교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복음의 선포이며 아니 더 나아가 선포하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서커스의 외줄타기(Tightrope) 곡예사와 같다. 외줄은 성령의 줄이며 중심을 잡는 바는 과거와 현재를 균형 잡히게 한다. 외줄타기는 또한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균형을 잡게 한다. 성령의 외줄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구원하기 위해 오셨던 죄인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의사소통의 긴장이다. 외줄타기 곡예사인 설교자의 위험은 과거로 곤두박질할 수도 있고 헛되고 목적 없는 현시대로 곤두박질 할 수도 있다. 설교자는 현실 없는 과거의 기록된 성경에만 집착하거나 진리(말씀)없는 현세만 집착할 위험에 있다. 성령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함은 이 두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신다.
설교신학개론 (1) 설교자 (Preacher) 2007-09-29 23:27:19, view [7]
<font class=list_eng><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style="table-layout:fixed;"><col width=100%></col><tr><td valign=top class=list_han> 설교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르심 (calling) 을 받은 자이다.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밝힌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使徒 된 바울”. ‘사도’ (apostle) 라는 말은 헬라어 ‘apostolos’ 에서 그 뜻을 분명히 한다. 즉,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 뜻이다. 고린도 후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말한다고 밝혔다. 영어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 (a man sent from God)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보내심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보내시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어진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이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지목되고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 질문은 설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설교가 자신이 연구한 글인가? 아니면 설교가 주께로부터 받은 (Givenness; being given) 주님의 말씀인가?” 바울은 이런 면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신’ (고후 5:20), ‘하나님의 일꾼’ (a servant of God-고전 4:1; 고후 6:4)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롬 1:1) 이라 했다. 사신은 오늘날 말로 ‘대사’ (Ambassador)를 말한다. 대사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다. 대사는 오직 국가 또는 국가의 한 원수로부터 부름 받아 국가 원수로부터 받은 메시지만을 대신 전한다. 종이든, 일군이든, 사신이든, 대사든, 이 모든 직함들은 자신을 부르신 자, 택하신 자, 구속한 자, 고용한 자의 뜻을 받들어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는 사도됨이 자신의 원함이나 자격이나 노력이나 남의 추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모든 서신의 초두에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힌다. <br />
<br />
사도로 (설교자로) 부르심에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요적 요소가 포함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음 사람은 설교 이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복음전파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그러니 (첨가)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16) 바울은 비록 자기 자신은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고 부적당한 사람이라고 느낄지라도 부르신 분을 따라 이 복음 전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는 연약함과 주저함 속에서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br />
<br />
“내 논점은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을 자신 있게 생각하는 사람, 전혀 주저함이나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이 설교하는 자는 결코 ‘설교자’로서 부르심을 받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그 일이 움치러 지도록 끔찍한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강박관념, 또는 강요가 설교자로 하여금 말씀을 증거하게 한다.” <br />
<br />
부르심을 받은 설교자는 먼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고 뒤에 하나님의 말씀을 양떼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전력 투구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교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소명이다. 계속해서 윌리암 스틸 (William Still)은 권면한다. <br />
<br />
“만일 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면, 너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며 확실히 너의 아내의 것도 아니고, 너의 아이들의 것도 아니며, 더욱이 회중의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도록 힘쓰라. 이것을 대체할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혹시 너에게 충고를 할 수 있으나 그들이 너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너와 같지 않다면 그들의 충고는 아무 가치가 없다.” <br />
<br />
둘째로 설교자는 교회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로마서 10:13-15) 설교자는 개인적인 소명을 교회에 의해서 확인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교회는 설교자의 자격과 자질에 대해 성서가 지시하는 객관적인 면들을 검토해야 한다. 교회는 후보자가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사람인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인가? 경건한 삶을 사는가? (딛 2:6-8) 그의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가?(딤후 2:24) 구변의 은사가 있는가? 논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훈련과 준비가 된 사람인가? <br />
<br />
셋째로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 <br />
하나님의 사랑, 영혼을 사랑, 진리의 지식, 우리 안에 내재하신 성령 하나님, 이것들이 설교가를 만든다. 이 점을 특히 로이드 존스는 강조한다. <br />
<br />
“만일 설교자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만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갖고 있다면, 그가 사람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성경의 진리와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이 계시면, 그는 설교할 것이다.” <br />
<br />
존 스토트 (John Stott)는 그의 저서 ‘설교자의 얼굴’ (The Preacher’s Portrait) 에서 설교자를 다섯 가지로 묘사한다. 그 다섯은 첫째, 청지기 둘째, 대사 셋째, 증인 넷째, 아버지 그리고 다섯째, 종이다.<br />
<br />
첫째, 청지기 (Steward)는 설교자의 메시지와 권위에 관련된다. <br />
고린도전서 4장 1절로 2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청지기는 남의 재산을 맡아서 돌보고 관리, 집행하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비밀의 청지기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이제 성서 안에 보관된 자기 계시들에 대한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메시지는 한 때 계시되고 이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br />
<br />
하나님의 신비란 하나님이 노출시켜서, 감추어진 것을 열어놓아서 알려진 진리이다. 하나님의 신비는 하나님의 열린 비밀이요 성서 안에서 형성된 자기 계시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비밀들을 알게 하는 청지기이다. <br />
<br />
청지기 비유는 설교자의 메시지의 내용을 알려준다. 즉,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메시지를 받는다. 청지기가 자기의 것으로 주인의 집을 섬기지 않듯이 설교자도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임무는 그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br />
<br />
청지기 비유는 설교자의 권위의 성질에 대해 가르쳐준다. <br />
설교자는 권위를 갖는다. 이 권위는 겸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겸손은 확신을 배제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권위는 “성경이 말한다”고 외칠 때 온다. 다시 말하면 성서의 권위로부터 주어지는 간접적 권위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한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스토트는 이 점을 힘주어 말한다.<br />
<br />
“설교자가 더욱 하나님 말씀 앞에서 스스로 떨수록, 그리고 자신의 의식 속에서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강하게 느낄수록 그는 청중 앞에서 더욱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br />
<br />
설교자의 권위는 그가 다루고 있는 본문에 충실하고자 하는 친밀성과 본문을 이해해온 정확성과 설교자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강력한 힘에 달려 있다. 설교는 그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이런 권위있는 말씀 선포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첫째는 성경공부요 둘째는 본문을 놓고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성서의 궁극적 저자시오 최고의 해석자이시기 때문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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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대사 (Herald)는 설교자의 선포와 호소에 관련된다.<br />
대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 받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장 21, 23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keryssomen, we herald)” 이 위임된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고 한다. 대사는 청지기와 다른 네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br />
1) 청지기의 직무가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이는데(feed) 있다면 대사는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복음선포는 도시에서 외치는 자 (the Town Crier)에 의해서, 대 낮에, 트럼펫 소리와 같이, 지금 이순간까지, 모든 자들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다.<br />
2) 선포의 내용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알림, 즉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청지기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의 대사이다. 설교는 하나의 관점이나, 사상이나, 의견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를 선포하는 것이다.<br />
3) 대사는 청중의 반응을 기대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화해를 선포한 대사는 청중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기대한다.<br />
4) 청지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양떼들 사이에서 활동하지만 대사는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한다. 대사란 공적 권위를 자지고 왕의 명령을 나르는 메신저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고후 5:2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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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증인 (Witness)은 설교자의 경험과 겸손에 관련된다.<br />
신양성서에서 발견되는 세번째 설교자에 대한 단어는 ‘증인’이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증명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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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지기가 가정에 대한 비유이고 대사가 정치적 비유이라면 ‘증인’은 법적 비유이다. 증인은 재판장과 피고와 변호사가 있는 법정에서 일어난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자는 증인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대 앞에 서있고 세상을 그를 심판하고 사탄은 수많은 거짓말로 고소하고 수많은 거짓증언들을 집결한다. 주 성령께서는 보혜사- 변호사-가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예수 사건에 증인 되라고 부르신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증언하고, 그리스도를 변호하며, 그리스도를 칭찬하며, 세상이 판결을 하기 전에 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고 생각해야 될 증거들을 법정 앞에 가져오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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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다. 설교자는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 되심에 증인이다.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으로 순교자의 자리에 가서라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증인은 자신이 전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고 듣고 죄용서 받은 체험이 바탕이 된다. 증인은 자기에 대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해야 하므로 바로, 능력있게 전하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없이 설교할 수 없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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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아버지 (Father)는 설교자의 사랑과 온유에 관련된다.<br />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버지’로 불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고린도교인의 아버지요, 갈라디아교인의 아버지요, 데살로니가교인의 아버지요 몇몇 개인들의 아버지라 서슴없이 말했다. 의심할 것도 없이, 바울이 언급한 온유와 사랑을 겸비한 아버지의 자질은 설교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는 의무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돌본다. 일보다는 관계에 중심을 둔다.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들의 개인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설교자는 아버지요 회중은 그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 설교자는 사랑으로 자녀들이 성숙하도록 돕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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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설교자가 회중의 아버지가 되는가? 설교자가 전한 복음을 통하여 낳은(회심한)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거침없이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녀’라 불렀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녀를 권면하고, 훈계하고, 교육하고, 훈련하고 용기를 준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 설교자는 성도들의 모든 환경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에 뿌리를 둔다. 피터 마샬 (Peter Marshall)은 말하기를 “너는 (설교자는) 많은 문제들- 의심들, 두려움들, 믿음을 잃어버린 걱정들-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면서 너의 설교를 반듯이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사랑과 온유함이 성도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며 그들의 본이 되고자 노력하는 아버지 같은 설교자가 되야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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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종 (Servant)은 설교자의 능력과 동기에 관련된다.<br />
헬라어에는 종을 나타내는 여러 단어들이 있다. Oiketes 가정의 종, doulos 나면서부터 종, 법적 권리가 없고 주인에게 속한 소유물, huperetes 전쟁시 선창에서 노를 짓는 노예, 그리고 diakonos 주인의 명을 받들어 수행하는 종이 그것들이다. Diakonos는 명령과 권위에 따라 섬긴다는 뜻으로 왕의 수행원, 즉 음식으로 섬기는 종을 묘사한다. 그는 권위있는 왕의 명령과 사명을 이행하는 왕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그는 왕의 이름으로 행하고, 그의 왕은 그를 통해 일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종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서 믿음을 창조하도록 그를 통해서 강력하게 일하시지 않는다면 그의 섬김은 소용이 없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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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긴급히, 간절히,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설교에 무관심하고, 자신과 별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낡아빠진 유물로 생각하는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의 설교를 통하여 회심하는가?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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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는 하나님의 능력(dynamis Theou)이 필요하다. (고전 1:17-2:5)<br />
1) 하나님의 말씀 안에 능력이 있다. (렘 23:29)<br />
2)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다. (고전 1:18, 21, 23)<br />
3) 주 성령님 안에 능력이 있다. (고전 2:4,5; 살전 1:4)<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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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 있어서의 능력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다. Dynamis Theou,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이 나타내시고 확증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하여 선포될 때 나타난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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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포사이드(Peter T. Forsyth)는 설교자들에게 경고한다.<br />
“기독교가 살고 죽는 것은 설교에 달려 있다. 성경이 최고의 우위에 있을 때마다 설교는 예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웅변가는 사람을 부추겨 즐겁게 하려 하나 설교자는 그들을 구속 받도록 초청한다. 웅변가는 형제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촉구하나 설교자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 할 것을 추구한다. 설교와 함께 기독교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복음의 선포이며 아니 더 나아가 선포하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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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서커스의 외줄타기(Tightrope) 곡예사와 같다. 외줄은 성령의 줄이며 중심을 잡는 바는 과거와 현재를 균형 잡히게 한다. 외줄타기는 또한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균형을 잡게 한다. 성령의 외줄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구원하기 위해 오셨던 죄인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의사소통의 긴장이다. 외줄타기 곡예사인 설교자의 위험은 과거로 곤두박질할 수도 있고 헛되고 목적 없는 현시대로 곤두박질 할 수도 있다. 설교자는 현실 없는 과거의 기록된 성경에만 집착하거나 진리(말씀)없는 현세만 집착할 위험에 있다. 성령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함은 이 두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신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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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르심 (calling) 을 받은 자이다. 고린도후서 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대해 밝힌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使徒 된 바울”. ‘사도’ (apostle) 라는 말은 헬라어 ‘apostolos’ 에서 그 뜻을 분명히 한다. 즉,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 뜻이다. 고린도 후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말한다고 밝혔다. 영어성경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 (a man sent from God)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보내심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보내시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어진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이다.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지목되고 부르심을 받았는가? 이 질문은 설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설교가 자신이 연구한 글인가? 아니면 설교가 주께로부터 받은 (Givenness; being given) 주님의 말씀인가?” 바울은 이런 면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신’ (고후 5:20), ‘하나님의 일꾼’ (a servant of God-고전 4:1; 고후 6:4)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 (롬 1:1) 이라 했다. 사신은 오늘날 말로 ‘대사’ (Ambassador)를 말한다. 대사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다. 대사는 오직 국가 또는 국가의 한 원수로부터 부름 받아 국가 원수로부터 받은 메시지만을 대신 전한다. 종이든, 일군이든, 사신이든, 대사든, 이 모든 직함들은 자신을 부르신 자, 택하신 자, 구속한 자, 고용한 자의 뜻을 받들어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는 사도됨이 자신의 원함이나 자격이나 노력이나 남의 추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모든 서신의 초두에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밝힌다.
사도로 (설교자로) 부르심에는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요적 요소가 포함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음 사람은 설교 이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복음전파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그러니 (첨가)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 2:16) 바울은 비록 자기 자신은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고 부적당한 사람이라고 느낄지라도 부르신 분을 따라 이 복음 전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는 연약함과 주저함 속에서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내 논점은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을 자신 있게 생각하는 사람, 전혀 주저함이나 두려움이나 떨림이 없이 설교하는 자는 결코 ‘설교자’로서 부르심을 받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과 그 일이 움치러 지도록 끔찍한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강박관념, 또는 강요가 설교자로 하여금 말씀을 증거하게 한다.”
부르심을 받은 설교자는 먼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고 뒤에 하나님의 말씀을 양떼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전력 투구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교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소명이다. 계속해서 윌리암 스틸 (William Still)은 권면한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면, 너는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며 확실히 너의 아내의 것도 아니고, 너의 아이들의 것도 아니며, 더욱이 회중의 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도록 힘쓰라. 이것을 대체할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혹시 너에게 충고를 할 수 있으나 그들이 너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너와 같지 않다면 그들의 충고는 아무 가치가 없다.”
둘째로 설교자는 교회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로마서 10:13-15) 설교자는 개인적인 소명을 교회에 의해서 확인되고 증명되어야 한다. 교회는 설교자의 자격과 자질에 대해 성서가 지시하는 객관적인 면들을 검토해야 한다. 교회는 후보자가 성령과 지혜로 충만한 사람인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인가? 경건한 삶을 사는가? (딛 2:6-8) 그의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가?(딤후 2:24) 구변의 은사가 있는가? 논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훈련과 준비가 된 사람인가?
셋째로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
하나님의 사랑, 영혼을 사랑, 진리의 지식, 우리 안에 내재하신 성령 하나님, 이것들이 설교가를 만든다. 이 점을 특히 로이드 존스는 강조한다.
“만일 설교자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만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갖고 있다면, 그가 사람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성경의 진리와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이 계시면, 그는 설교할 것이다.”
존 스토트 (John Stott)는 그의 저서 ‘설교자의 얼굴’ (The Preacher’s Portrait) 에서 설교자를 다섯 가지로 묘사한다. 그 다섯은 첫째, 청지기 둘째, 대사 셋째, 증인 넷째, 아버지 그리고 다섯째, 종이다.
첫째, 청지기 (Steward)는 설교자의 메시지와 권위에 관련된다.
고린도전서 4장 1절로 2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청지기는 남의 재산을 맡아서 돌보고 관리, 집행하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비밀의 청지기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맡기시고 이제 성서 안에 보관된 자기 계시들에 대한 청지기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메시지는 한 때 계시되고 이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신비란 하나님이 노출시켜서, 감추어진 것을 열어놓아서 알려진 진리이다. 하나님의 신비는 하나님의 열린 비밀이요 성서 안에서 형성된 자기 계시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비밀들을 알게 하는 청지기이다.
청지기 비유는 설교자의 메시지의 내용을 알려준다. 즉, 설교자는 자기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메시지를 받는다. 청지기가 자기의 것으로 주인의 집을 섬기지 않듯이 설교자도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임무는 그에게 주어진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청지기 비유는 설교자의 권위의 성질에 대해 가르쳐준다.
설교자는 권위를 갖는다. 이 권위는 겸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겸손은 확신을 배제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권위는 “성경이 말한다”고 외칠 때 온다. 다시 말하면 성서의 권위로부터 주어지는 간접적 권위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한 권위가 주어지지 않는다. 스토트는 이 점을 힘주어 말한다.
“설교자가 더욱 하나님 말씀 앞에서 스스로 떨수록, 그리고 자신의 의식 속에서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강하게 느낄수록 그는 청중 앞에서 더욱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의 권위는 그가 다루고 있는 본문에 충실하고자 하는 친밀성과 본문을 이해해온 정확성과 설교자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강력한 힘에 달려 있다. 설교는 그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이런 권위있는 말씀 선포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첫째는 성경공부요 둘째는 본문을 놓고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성서의 궁극적 저자시오 최고의 해석자이시기 때문이다.
둘째, 대사 (Herald)는 설교자의 선포와 호소에 관련된다.
대사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 받은 자이다. 고린도전서 1장 21, 23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keryssomen, we herald)” 이 위임된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고 한다. 대사는 청지기와 다른 네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
1) 청지기의 직무가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이는데(feed) 있다면 대사는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복음선포는 도시에서 외치는 자 (the Town Crier)에 의해서, 대 낮에, 트럼펫 소리와 같이, 지금 이순간까지, 모든 자들에게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다.
2) 선포의 내용은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알림, 즉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알리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청지기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의 대사이다. 설교는 하나의 관점이나, 사상이나, 의견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를 선포하는 것이다.
3) 대사는 청중의 반응을 기대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화해를 선포한 대사는 청중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기대한다.
4) 청지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양떼들 사이에서 활동하지만 대사는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활동한다. 대사란 공적 권위를 자지고 왕의 명령을 나르는 메신저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고후 5:20)
셋째, 증인 (Witness)은 설교자의 경험과 겸손에 관련된다.
신양성서에서 발견되는 세번째 설교자에 대한 단어는 ‘증인’이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증명된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청지기가 가정에 대한 비유이고 대사가 정치적 비유이라면 ‘증인’은 법적 비유이다. 증인은 재판장과 피고와 변호사가 있는 법정에서 일어난다. 어떤 의미에서 설교자는 증인이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대 앞에 서있고 세상을 그를 심판하고 사탄은 수많은 거짓말로 고소하고 수많은 거짓증언들을 집결한다. 주 성령께서는 보혜사- 변호사-가 되시어 우리로 하여금 예수 사건에 증인 되라고 부르신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증언하고, 그리스도를 변호하며, 그리스도를 칭찬하며, 세상이 판결을 하기 전에 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고 생각해야 될 증거들을 법정 앞에 가져오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다. 설교자는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 되심에 증인이다.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으로 순교자의 자리에 가서라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증인은 자신이 전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고 듣고 죄용서 받은 체험이 바탕이 된다. 증인은 자기에 대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해야 하므로 바로, 능력있게 전하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없이 설교할 수 없다.
넷째, 아버지 (Father)는 설교자의 사랑과 온유에 관련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버지’로 불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고린도교인의 아버지요, 갈라디아교인의 아버지요, 데살로니가교인의 아버지요 몇몇 개인들의 아버지라 서슴없이 말했다. 의심할 것도 없이, 바울이 언급한 온유와 사랑을 겸비한 아버지의 자질은 설교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는 의무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돌본다. 일보다는 관계에 중심을 둔다. 설교는 설교자와 청중들의 개인적인 관계를 포함한다. 설교자는 아버지요 회중은 그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 설교자는 사랑으로 자녀들이 성숙하도록 돕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긴다.
어떻게 설교자가 회중의 아버지가 되는가? 설교자가 전한 복음을 통하여 낳은(회심한)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거침없이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녀’라 불렀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녀를 권면하고, 훈계하고, 교육하고, 훈련하고 용기를 준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 설교자는 성도들의 모든 환경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에 뿌리를 둔다. 피터 마샬 (Peter Marshall)은 말하기를 “너는 (설교자는) 많은 문제들- 의심들, 두려움들, 믿음을 잃어버린 걱정들-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면서 너의 설교를 반듯이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사랑과 온유함이 성도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며 그들의 본이 되고자 노력하는 아버지 같은 설교자가 되야 한다.
다섯째, 종 (Servant)은 설교자의 능력과 동기에 관련된다.
헬라어에는 종을 나타내는 여러 단어들이 있다. Oiketes 가정의 종, doulos 나면서부터 종, 법적 권리가 없고 주인에게 속한 소유물, huperetes 전쟁시 선창에서 노를 짓는 노예, 그리고 diakonos 주인의 명을 받들어 수행하는 종이 그것들이다. Diakonos는 명령과 권위에 따라 섬긴다는 뜻으로 왕의 수행원, 즉 음식으로 섬기는 종을 묘사한다. 그는 권위있는 왕의 명령과 사명을 이행하는 왕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그는 왕의 이름으로 행하고, 그의 왕은 그를 통해 일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종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서 믿음을 창조하도록 그를 통해서 강력하게 일하시지 않는다면 그의 섬김은 소용이 없다.
설교자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긴급히, 간절히,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설교에 무관심하고, 자신과 별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낡아빠진 유물로 생각하는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우리의 설교를 통하여 회심하는가?
설교자는 하나님의 능력(dynamis Theou)이 필요하다. (고전 1:17-2:5)
1) 하나님의 말씀 안에 능력이 있다. (렘 23:29)
2)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다. (고전 1:18, 21, 23)
3) 주 성령님 안에 능력이 있다. (고전 2:4,5; 살전 1:4)
설교에 있어서의 능력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다. Dynamis Theou,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이 나타내시고 확증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하여 선포될 때 나타난다.
피터 포사이드(Peter T. Forsyth)는 설교자들에게 경고한다.
“기독교가 살고 죽는 것은 설교에 달려 있다. 성경이 최고의 우위에 있을 때마다 설교는 예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웅변가는 사람을 부추겨 즐겁게 하려 하나 설교자는 그들을 구속 받도록 초청한다. 웅변가는 형제들 간에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촉구하나 설교자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 할 것을 추구한다. 설교와 함께 기독교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설교는 복음의 선포이며 아니 더 나아가 선포하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서커스의 외줄타기(Tightrope) 곡예사와 같다. 외줄은 성령의 줄이며 중심을 잡는 바는 과거와 현재를 균형 잡히게 한다. 외줄타기는 또한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의 균형을 잡게 한다. 성령의 외줄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구원하기 위해 오셨던 죄인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유지되는 의사소통의 긴장이다. 외줄타기 곡예사인 설교자의 위험은 과거로 곤두박질할 수도 있고 헛되고 목적 없는 현시대로 곤두박질 할 수도 있다. 설교자는 현실 없는 과거의 기록된 성경에만 집착하거나 진리(말씀)없는 현세만 집착할 위험에 있다. 성령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함은 이 두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주신다.
출처 : 나의 흔적
글쓴이 : 흔적stigma153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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