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강
선악과 금령법
(창2:16-17, 3:1-6)
1.도입
우리는 지난 1강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창1:28의 언약적 복의 내용을 통해, 그 내용 속에 담긴 세 가지 요소(백성, 땅, 왕적 통치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최종단계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사실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이는 다니엘서 기자가 단2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의 내용을 다니엘을 통해 해석하게 하신 내용과, 그 계시적 성격과 내용과 방향성에 있어서 동일한 목표에 이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성경계시의 총체적 주제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돼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역사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성취와 실현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을 그 핵심적 내용으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이 세상역사를 현장과 무대로 삼아 진행되는 것으로 인해 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이 성립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종말론적 완성에 이르게 될 때, 세상역사로서 인간의 통치역사 또한 대하드라마로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그때가 되면 가시적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입니다(계21:1-7).
본 절(창1:28)을 흔히 신학적으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문화명령'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문화란 본질적으로 창조원리에 입각한 인간의 본래적 삶의 양태(樣態)로서, 그 실제적 내용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문화활동의 최종적인 국면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최후적 명제를 추구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처음 창조원리에 입각한 문화로서의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창조원리에 의해 인간이 마땅히 행할 바의 존재의미와 생명적 활동목표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의를 그 분의 선하신 뜻을 좇아서 세상 가운데 현시하고,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세워나가는 일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전도서 기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기록(전12:13)한 배경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가장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받들어 나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그 본의대로 정당하게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생명의 도리와 생활의 원칙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 천상적 나라의 가치와 권세를 가장 왕성하게 세상 가운데 발휘해 내게 되는 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 에덴동산에서의 삶(창1-2장)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가장 구체적이고 현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 강의에서 살펴보려는 선악과 금령법의 내용적 성격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다름 아닌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 속에서 찾아지며,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적 활동이 본의대로 바르게 전개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증시켜 주는 계시적 사건기록입니다.
*문제 : 창1:28을 통해 태초의 창조계시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에 있음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어서 주신 조건적 행위언약으로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과는 상호 어떤 관계가 성립되는 것인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성경적 언약의 연속성 및 동질성
2.최초의 행위언약(생명과 죽음)
3.인간의 본분
4.마귀의 시험
5.인간의 범죄
6.속죄의 필요성
2.전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죄가 유입되기 전 에덴동산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총체적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사실(창2:1-3)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안식은 모든 창조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계획대로 차질 없이 이루어진 사실을 전제로 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만물과 만사의 존재와 운행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작정대로 창조됐을 뿐 아니라 경영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래적 영광과 능력이 그 본의대로 피조물 가운데 반영되며 현시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과 실상을 가장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하에서 이스라엘이 신정적 왕국으로서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을 때의 상황을 지적하면서 열왕기서 기자는 이를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연히' 살았다는 표현은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으로 비로소 '안식'을 취하게 됐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통일 이스라엘이 신정적 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제 안식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마12:8, 눅6:5)를 모시고 있는 신약백성들의 심령 속에서 실체로 적용되는 것으로 인해 사실상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의 교회공동체 안에서 현재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마12:28, 눅17:20-21).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선취적으로 누리고 있는 성도들의 현재적 삶의 성격은 무엇에 앞서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권세 있게 받들어 나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최고 통치권자이십니다. 지금 그 분이 피조세계를 총체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에덴동산에 임재해 계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에덴동산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각종 피조물들과 더불어 창조의 면류관이며 언약의 당사자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대면해 있습니다.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들로 말입니다. 이상의 사실들은 에덴동산이 나라의 삼 요소인 백성과 땅과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음을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음으로 해서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금령법에 순종해서 보다 고차원의 하나님의 의와 영생의 단계로 나아갔다면, 창1:28에 약속된 문화명령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아담의 후손들을 통해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한 방법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일련의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절대주권 하에서 작정하고 계셨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엡1:4-6).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분 안에서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며, 이들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이 구원과 영생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으로 인해 더욱 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엡1:7, 12, 14, 롬11:32). 그렇다면 본 주제로 돌아가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성경적 언약의 상호 연관성
성경의 계시된 언약들은 그 성격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으로 해서 동질성을 띠고 있으며, 역사의 진행에 따라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갱신되는 것을 통해 동일한 연속선상에서 상호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본 강의에 핵심 주제인 선악과 금령법(아담언약) 본문(창2:16-17)도 이와 같은 원리에 근거해서, 이보다 먼저 주신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과의 관계 속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나중 약속이나 명령은 앞서 주신 그것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 약속은 자연히 창1:28의 문화명령적 언약과의 관계 속에서 그 본질적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선악과 금령법은 어떤 의미로 창1:28의 문화명령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약속과 언약적 연속성과 동질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미 앞 강의에서도 살펴봤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세상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가 권세 있게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을 마음에 품고 계셨습니다(단2장, 엡1:4-7). 그래서 이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특별하게 지으신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인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시키고자 저들에게 언약적 복의 형식을 빌려 명령하셨습니다(창1:28). 소위 '문화명령'이라고 일컬어지는 내용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명령은 내용적 성격상 피조물에 관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권의 양도라는 의미에서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가 독자적 능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조주로서의 절대주권과 통치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이 아담의 대리적 통치를 통해 이면적으로 역사 될 것이었습니다(롬11:36). 이런 의미에서 창1;28은 문자적으로 복의 형식으로 주신 명령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간섭해 주심으로 마침내 이루어 주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창조언약은 전체적 특징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방식으로 주신 것으로 인해 최초의 은혜언약으로 간주되기에 족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창1:28의 창조적 은혜언약이 어떻게 창2;17의 선악과 행위언약과 연관성과 연속성이 성립될까요. 우리는 위에서 성경에 나타난 언약이 그 본질적 성격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는 당위성과 필연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창1:28의 은혜언약은 창2:17의 행위언약과 성격상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상호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두 언약의 관련성은 창1:28의 문화명령적 은혜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창2:17의 선악과 행위언약에서 조건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전제(前提)적 요구 속에서 찾아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을 관장하기 위해 제도적이며 동시에 계시적인 방편으로 주신 것이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이란 말씀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본래적 생명보존과 사명감당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 순종해 의존하는 것을 통해서만 성립된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지금 에덴의 아담과 하와에게는 저들이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자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통치권이 대리적으로 위임된 상태입니다. 이는 사실상 엄청난 특권이며 존귀에 처해진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복과 상급을 한 몸에 모두 받고 있는 입장입니다. 가히 '창조의 면류관'이라 일컬음 받기에 족한 이유가 이에서 성립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본질적으로 피조물이며 종의 신분일 뿐입니다. 무죄자(無罪者)이기는 하지만 완전자(完全者)는 아닙니다.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는 연약함이 이들의 내면세계에 잠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자만과 교만은 금물입니다. 따라서 오직 창조자를 경외하며 그 분에게 절대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피조물로서의 가치와 존재의미와 본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전12:13). 이런 이유로 창1:28의 구체적 성취의 일환으로 선악과 금령법의 행위언약을 경계와 조건으로 주신 것입니다. '네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바르게 알라'고 말입니다. 이는 시험적 조치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배려입니다. 실족을 미연에 방지하고 사전에 경계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선악과 금령법의 조건적 행위언약을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창1:28의 문화명령, 곧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성취를 전개시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두 언약사이에는 진행상 피차 불가분의 연속적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궁극적 목적상 동질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적(試驗的) 사건으로서 선악과 금령법의 내용 속에 담긴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선악과 행위언약
선악과 행위언약은 성격상 시험적(試驗的) 사건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그 자체 속에 선악과 실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양면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먹으면 죽음에 처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단절로 말미암는 사실상의 육체의 죽음 말입니다. 반대로 순종하면 보다 높은 차원의 하나님의 의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 결국은 영생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가능성을 자체 속에 함의(含意)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산 중앙에 선악과나무와 함께 생명나무가 공존해 있었다(창2:9, 계2:7)는 사실이 이를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행위언약 앞에서 순종과 불순종의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하는 시험에 직면하고 있는 셈입니다. 선악과 사건을 시험적 상황으로 묘사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한편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창2:17의 선악과 행위언약은 창1:28의 창조언약과 짝을 이루어 이 언약이 최종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전제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권세 있게 받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으로 운반해 가는 자들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악과 금령법은 그 본질적 성격상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 인간의 수준과 한계를 인정하는 절대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를 불순종한다는 것은 스스로 피조물이기를 외면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도전하는 월권행위가 성립된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신을 지존자(至尊者)와 자존자(自存者)로 삼으려는 일종의 사단적 역모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후에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시험에 미혹돼 선악과를 따먹은 사실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창3:22)라고 말씀하시는 배경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성도가 주님을 따르면서 철저히 자기(自己) 곧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서 성립됩니다(마16:24). 자아(自我)는 자존(自尊)의 원인(原因)으로서 곧 자신을 지존자로 삼으려는 부패한 옛 사람적 의식을 가리킵니다. 때문에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미덕이며 본분입니다. 따라서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경외와 공경과 사랑의 표식입니다. 이로서 선악과 금령법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율법의 총체적 효시(嚆矢)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과 인간의 범죄
창1:28의 창조적 은혜언약과 창2:17의 선악과 행위언약은 그 언약의 당사자가 아담과 하와로 인해 일반적으로 아담언약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대리적 통치권자들로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하는 것을 통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히 성취되는 일에 선용돼야 했습니다. 과연 순종의 여부는 하나님을 향한 저들의 충성심과 공경심을 가늠하는 척도와 시금석으로 작용하기에 족한 기준입니다. 선악과 행위언약이 시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관점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선악과 행위언약 내용을 기록한데 이어서 이내 뱀을 통한 사단의 시험사건과 이로 인한 인간의 범죄경위를 동시적으로 소개합니다(창3:1-6). 본래의 뱀의 영특함이 악용됨으로 사단의 간교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과정을 기록하면서(계20:2) 이 뱀이 먼저 하와에게 접근함으로 미혹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이는 창1:28의 문화명령적 언약의 최종적 성취를 위해 이 땅위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권세 있게 펼쳐나가야 할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하와에게는 여간 심각한 도전과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의 순수한 준수여부가 시험대 위에 올려진 셈입니다. 사단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하나님의 권좌를 향한 도전(유6, 벧후2:4)을 하나님의 친 백성을 도구삼아 재 시도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법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직접적인 시험거리로 제시됩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이런 사단의 시험에 어떻게 대처해야만 했을까요. 이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철저히 순종하는 것을 통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뿐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본분이 말씀만을 의지하고 의존하는 데 있음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증거해야 했습니다(마4:4, 신8:3). 이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저들의 신앙과 충성과 경외를 입증해 내며(욥1:8) 동시에 보다 높은 차원의 의와 생명의 단계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창1:28의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사상은 능력 있게 에덴 동산을 중심으로 보다 넓게 온 땅으로 확장돼 나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창3:1-6의 내용을 보면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인류의 시조가 어떻게 마귀의 시험적 올무에 빠지게 되었는지의 경위를 소상하게 밝힘으로서, 동일하게 현재의 성도들이 빠질 수 있는 시험의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해 동시적으로 경고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 됨의 특징과 성격은 오직 시종일관하게 말씀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만 검증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며 준거(準據)로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신앙과 열심은 오직 성경적 지식의 체계를 바르게 인식하는데서 나와지는 정당한 믿음과 순종력의 발휘로 가늠될 것입니다(롬10:2-3, 17). 반대로 자의적 열심에 근거한 신앙은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종교심의 발동과 충동에 자극 받음으로 필연적으로 왜곡과 변질로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이런 식의 기독교 신앙관은 비록 외적 형식이 기독교로 치장돼 있을지라도 내용과 성격과 방향성은 부단히 이기적 욕심을 충족시키려는 유혹에 이끌려 마침내 타락과 멸망으로 결말짓게 됩니다(마7:21-23). 소위 '여로보암의 길'(왕상15:34)로 대변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의 실상이 이랬습니다(왕상12:25-33). 이들의 결국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해 마침내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받기에 이릅니다(왕하17;6-8).
이제 창3;1-6의 내용을 통해 인류의 시조가 시험에 빠져 타락하고 범죄한 경위를 살펴봅니다. 본문에서 뱀의 간교성은 마귀의 거짓된 속성을 대변합니다. 뱀의 첫 질문은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1절)로부터 접근함으로써, 하와가 선악과 금령법 내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총체적으로 바르게 숙지(해석)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먼저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악과 금령법은 먼저 아담에게 주신 것으로(창3:16-17과 18절 문맥 비교), 하와는 아담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을 것이 확실하며, 그로 인해 그 중차대한 심각성을 아담만큼 절감하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아담이 아닌 하와를 일차 시험의 대상으로 표적삼은 이유가 이런 사실에 있었음을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충분히 추론할 수 있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 할 수 있다는 전략 말입니다.
마귀의 시도는 정확했습니다. 뱀의 질문에 하와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2-3절)고 답변합니다. 이는 본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함으로 본질적 의미를 변질시키고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됐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처음부터 하와가 선악과 금령법에 대한 내용을 본의(本意)를 좇아서 충분하게 숙지(熟知)하지 못했음을 지적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내용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임의대로 가감하고 과장시켜서 답변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말씀에 대한 곡해가 얼마나 본질을 그릇되게 해침으로 마귀를 이롭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사단의 시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극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이후 간교한 뱀이 하와의 말씀에 대한 부족과 결핍을 놓치지 않고 더욱 공격적으로 접근해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4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뿐이 아닙니다. 왜곡된 해석의 말씀을 왜곡되게 적용시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경건(말씀)을 인간의 이익의 재료로 삼는 파멸의 단계로 이끌어 갑니다. 5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미 마귀의 시험의 덫에 걸려든 하와는 분별력과 자제력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창1:28)로서 자신에게 부과된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절감하지 못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하나님의 말씀의 준엄함과 영생케 하는 생명적 가치를 외면한 채, 오직 자신의 내적 욕심만을 발동시킴으로 불순한 이익에만 사로잡힙니다. 이렇게 한 순간에 욕심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하와의 눈에 비친 선악과는 더 이상 금기(禁忌)된 실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공을 보장하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하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허황된 명예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급기야 서둘러 선악과를 따먹고는 남편 된 아담에게도 적극 권하여 결국 아담과 하와 모두가 선악과 금령법을 어기는 결과를 초래합니다(창3:6).
신약성경의 기자는 이부분과 관련해서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2:1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담이 하와의 범죄에 동참해 동일하게 사단의 미혹에 빠진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뼈 중의 뼈이며 살 중의 살인 한 몸 된 하와를 너무도 사랑하는 나머지 그 결국이 어떻게 될 줄을 알면서도 기꺼이 죽음의 저주와 심판에 자원해서 동참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범죄자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첫째 아담의 실체로 오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에 대한 저주와 심판을 자원해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무한하신 사랑을 극명하게 나타내신 것(롬5:8, 고후5:21)을 예표적으로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는 인간의 총체적 비극은 이렇게 불순종의 대가로 지불된 죽음을 핵심적 내용으로 해서 시발됩니다. 이들의 행위는 범죄의 성격상 단순히 잠간의 부주의와 실수로 인한 불순종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지음을 받은 자가,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와 권좌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역적 행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소위 역모죄(逆謀罪)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본래적 의미인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불순종적이고 독립적인 관계로 파괴시킴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림과 동시에 원수 된 관계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사건은 이후 창1:28의 창조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일과 관련해 결정적인 장애요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조차 이미 상실해 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이제 죄 문제의 선결이라는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은 창1:28의 창조언약의 지속적인 진행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으며 궁극적 성취는 더더욱 불가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유입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화목을 일순간에 단절시켰을 뿐 아니라, 원수관계로 확대 전락시켰으며,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적대시해 보다 적극적으로 불순종의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입장에서 보면 희망은 절벽입니다.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과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행과 공덕을 쌓는 것이 결코 죄를 도말하거나 하나님의 의를 보상받을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며 하나님의 규례입니다(롬3:28). 따라서 피조물이 아닌 절대타자에 의한 적극적인 개입을 통하지 않고서는 죄의 해결이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인간의 죄 문제 해결은 영원히 미제(未濟)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는 인간의 범죄행위는 창조의 면류관이며 만물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인간의 극한 영광을 한 순간에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시켜 버린 참담한 실패사건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실제로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던져주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악과 금령법이라는 조건적 행위언약(창2:17)에 앞서 은혜언약의 성격으로 창1:28의 창조언약을 먼저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선악과 금령법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의 죄를 극복하는 방식을 통해 창1:28의 창조언약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성취돼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창1:28은 조건 없이 복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성격을 자체 속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은 어떤 이유로라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성취돼야만 할 필연성과 당위성이 내재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대두되는 심각한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죄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담의 죄는 스스로의 힘과 능으로는 극복과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피에 있고 피가 죄를 속(贖)하기 때문입니다(레17:11). 구약의 속죄제사가 이를 예표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래서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음이 성경의 증언이며 하나님의 법도입니다(히9:22). 이는 누군가에 의한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만 죄사함이 가능하다는 얘깁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속(代贖)의 죽음을 의지하는 길이란 사실 말입니다. 이 방식을 통해 창2:17의 계명을 범한 이들의 죄는 사면될 뿐 아니라, 그 결과로 창1:28의 창조언약의 내용(문화명령)은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런 식으로 창2:17을 어긴 아담의 범죄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창1:28의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으로 주신 사실상의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전형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관련해 예민한 독자는 한 가지 필연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절대 주권자로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는 마귀의 시험을 사전에 막아주시지 않고 허용하셨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서 그 분의 영원하신 목적에 근거한 작정과 무관하게 피조물 스스로 행해지는 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롬9:16). 이와 관련해 심지어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마10:29). 만물과 만사가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11:36)고 성경은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 명백히 증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의 범죄사건을 보다 광의적이며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계시적 관점에서 접근해 해석해 본다면, 아담과 하와의 시험 또한 만사의 진행과 만물의 존재를 당신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접근과 해석의 관점에는 나름대로 제기되는 문제점이 없지 않음을 전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성경역사가 자증하는 자취를 좇아 해석(성경 신학적 관점=언약적 구속사의 관점)하게 될 때, 이런 불가피한 문제점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오묘하심의 역사'(신29:29)의 영역으로 넘겨드려야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신 역사를 백 퍼센트 우리의 한정된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오묘함'을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둬야 할 것입니다. 이 영역에 속한 신지식은 모름지기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끝나고 주께서 우리를 아신 것 같이 우리 또한 온전히 알게 되는 그날에 그 실질이 온전히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고전13:12).
다만 우리는 아담의 범죄(창2:17, 3:6)와 구원(창3:15)의 필연적 당위성과 관련해 한 가지 중요한 명제를 시사 받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시험과 범죄가 하나님의 긍휼(구원)을 입는 은혜의 수단과 방편으로 작용하게 될 뿐 아니라(롬11:32), 결과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기능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엡1:6, 12절, 14절). 이는 이런 일련의 구원의 경륜들이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서 그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이미 협약됐음(엡1:3-5, 11절, 3:11, 딤후1:9, 딛1:2, 롬16:25-26, 고전2:7)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만사의 진행과 만물의 존재 및 보존, 관리, 섭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입니다(롬8:28). 성도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감사함으로 믿음의 인내를 발휘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현재상황은 언제나 하나님의 최선이란 사실을 생명처럼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창2:17의 행위언약(아담언약=선악과 금령법)을 위반한 아담을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구원하심으로 창1:28의 창조언약(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언약적 구속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강의에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왜곡시킴으로 아담과 하와를 시험에 빠뜨리는 이상의 사건 내용을 통해, 말씀에 대한 정당한 해석과 바른 적용(순종)이야말로 올바른 성경적 신앙관을 정립하는 척도가 됨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반대로 말씀에 대한 부족과 결핍은 이것이 쉽사리 극복되고 개선되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왜곡을 초래하게 되는 바, 마귀의 역사를 자초하여 마침내는 시험에 빠짐으로 사단에게 종노릇하는 단계에까지 전락하게 됨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성도를 시험하는 마귀의 시험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하여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통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이익에 집착해 말씀을 방편으로 이용하려 하면 대개의 경우 말씀의 그릇된 해석과 적용에로 빠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이렇게 사단은 성도를 시험하거나 어두운 인격들을 미혹할 때 말씀에 대한 그릇된 해석과 적용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그 진리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말씀 자체의 어려움에 있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오히려 대개의 경우 말씀을 대하는 사람의 영적 게으름과 무관심한 태도로 말미암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3.결론
선악과 행위언약의 중심 내용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을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창2:17). 이는 저들의 생명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순종에 의존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입니다(벧전1:22, 롬1:16). 비록 저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본래적 영적 교제와 사귐은 단절됐지만(창3:8, 사59:1-2), 즉각적인 육체적 죽음을 유보해 주시는 것을 통해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저들에게 베풀어지고 있음을 창세기 저자는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즉각적인 육체적 죽음이 보류된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일환으로 성립되는 것일까요. 이는 지속적으로 아담의 자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통해 마침내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된 셈이며, 이런 사실로 인해 인류를 향한 구원의 길이 열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적 언약의 연속성과 동질성이라는 특수한 관계로 인해 창1:28의 창조언약은 창2:17의 행위언약과 불가분리의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창2:17의 선악과 언약을 신실히 수행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창1:28의 언약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는 일에 자신들의 생애가 정당하게 드려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시험에 빠져 선악과 금령법을 어김으로 인류를 죄와 죽음에로 내어 모는 일에 원인을 제공하기에 이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사단은 끊임없이 말씀의 왜곡과 부당한 적용으로 인간의 어두운 인격을 미혹해서 하나님께 범죄자로 만드는 일에 혈안이 돼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소원성취와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기만하는 행위도 없습니다. 바른 성경적 신앙의 실질은 언제나 말씀의 정당한 해석과 바른 적용으로부터 비로소 성립되며 출발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과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자로 살아간다는 구원의 실질은 하나님의 통치를 권세 있게 받아 누리는 삶을 통해 확인되는 법입니다. 이는 정당하게 해석된 말씀에 우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말씀이 내게서 응해지고 내가 성령으로 말씀을 응해드리는 삶을 통해 실제화 될 것입니다(마4:4, 7, 10).
선악과 금령법
(창2:16-17, 3:1-6)
1.도입
우리는 지난 1강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창1:28의 언약적 복의 내용을 통해, 그 내용 속에 담긴 세 가지 요소(백성, 땅, 왕적 통치권)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최종단계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사실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이는 다니엘서 기자가 단2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의 내용을 다니엘을 통해 해석하게 하신 내용과, 그 계시적 성격과 내용과 방향성에 있어서 동일한 목표에 이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성경계시의 총체적 주제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돼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역사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성취와 실현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을 그 핵심적 내용으로 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이 세상역사를 현장과 무대로 삼아 진행되는 것으로 인해 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이 성립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종말론적 완성에 이르게 될 때, 세상역사로서 인간의 통치역사 또한 대하드라마로서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바야흐로 그때가 되면 가시적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입니다(계21:1-7).
본 절(창1:28)을 흔히 신학적으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문화명령'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문화란 본질적으로 창조원리에 입각한 인간의 본래적 삶의 양태(樣態)로서, 그 실제적 내용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문화활동의 최종적인 국면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최후적 명제를 추구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처음 창조원리에 입각한 문화로서의 정당한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렇게 창조원리에 의해 인간이 마땅히 행할 바의 존재의미와 생명적 활동목표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본의를 그 분의 선하신 뜻을 좇아서 세상 가운데 현시하고,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세워나가는 일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전도서 기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기록(전12:13)한 배경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가장 하나님의 뜻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받들어 나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그 본의대로 정당하게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생명의 도리와 생활의 원칙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 천상적 나라의 가치와 권세를 가장 왕성하게 세상 가운데 발휘해 내게 되는 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 에덴동산에서의 삶(창1-2장)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가장 구체적이고 현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오늘 강의에서 살펴보려는 선악과 금령법의 내용적 성격은,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다름 아닌 말씀에 대한 적극적인 순종 속에서 찾아지며,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적 활동이 본의대로 바르게 전개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증시켜 주는 계시적 사건기록입니다.
*문제 : 창1:28을 통해 태초의 창조계시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에 있음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어서 주신 조건적 행위언약으로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과는 상호 어떤 관계가 성립되는 것인지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성경적 언약의 연속성 및 동질성
2.최초의 행위언약(생명과 죽음)
3.인간의 본분
4.마귀의 시험
5.인간의 범죄
6.속죄의 필요성
2.전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죄가 유입되기 전 에덴동산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총체적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에 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는 사실(창2:1-3)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안식은 모든 창조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계획대로 차질 없이 이루어진 사실을 전제로 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만물과 만사의 존재와 운행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작정대로 창조됐을 뿐 아니라 경영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래적 영광과 능력이 그 본의대로 피조물 가운데 반영되며 현시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과 실상을 가장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하에서 이스라엘이 신정적 왕국으로서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을 때의 상황을 지적하면서 열왕기서 기자는 이를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연히' 살았다는 표현은 태평성대를 누리는 것으로 비로소 '안식'을 취하게 됐다는 설명입니다. 이는 통일 이스라엘이 신정적 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제 안식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마12:8, 눅6:5)를 모시고 있는 신약백성들의 심령 속에서 실체로 적용되는 것으로 인해 사실상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의 교회공동체 안에서 현재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마12:28, 눅17:20-21).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선취적으로 누리고 있는 성도들의 현재적 삶의 성격은 무엇에 앞서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권세 있게 받들어 나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최고 통치권자이십니다. 지금 그 분이 피조세계를 총체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에덴동산에 임재해 계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에덴동산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각종 피조물들과 더불어 창조의 면류관이며 언약의 당사자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대면해 있습니다.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들로 말입니다. 이상의 사실들은 에덴동산이 나라의 삼 요소인 백성과 땅과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음을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음으로 해서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금령법에 순종해서 보다 고차원의 하나님의 의와 영생의 단계로 나아갔다면, 창1:28에 약속된 문화명령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점진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아담의 후손들을 통해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한 방법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일련의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절대주권 하에서 작정하고 계셨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엡1:4-6).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분 안에서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며, 이들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시기를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이 구원과 영생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으로 인해 더욱 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엡1:7, 12, 14, 롬11:32). 그렇다면 본 주제로 돌아가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중은 무엇일까요.
성경적 언약의 상호 연관성
성경의 계시된 언약들은 그 성격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으로 해서 동질성을 띠고 있으며, 역사의 진행에 따라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갱신되는 것을 통해 동일한 연속선상에서 상호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본 강의에 핵심 주제인 선악과 금령법(아담언약) 본문(창2:16-17)도 이와 같은 원리에 근거해서, 이보다 먼저 주신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과의 관계 속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나중 약속이나 명령은 앞서 주신 그것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있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 약속은 자연히 창1:28의 문화명령적 언약과의 관계 속에서 그 본질적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선악과 금령법은 어떤 의미로 창1:28의 문화명령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약속과 언약적 연속성과 동질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미 앞 강의에서도 살펴봤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세상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가 권세 있게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을 마음에 품고 계셨습니다(단2장, 엡1:4-7). 그래서 이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특별하게 지으신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인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시키고자 저들에게 언약적 복의 형식을 빌려 명령하셨습니다(창1:28). 소위 '문화명령'이라고 일컬어지는 내용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명령은 내용적 성격상 피조물에 관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권의 양도라는 의미에서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가 독자적 능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조주로서의 절대주권과 통치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이 아담의 대리적 통치를 통해 이면적으로 역사 될 것이었습니다(롬11:36). 이런 의미에서 창1;28은 문자적으로 복의 형식으로 주신 명령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간섭해 주심으로 마침내 이루어 주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창조언약은 전체적 특징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방식으로 주신 것으로 인해 최초의 은혜언약으로 간주되기에 족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창1:28의 창조적 은혜언약이 어떻게 창2;17의 선악과 행위언약과 연관성과 연속성이 성립될까요. 우리는 위에서 성경에 나타난 언약이 그 본질적 성격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는 당위성과 필연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창1:28의 은혜언약은 창2:17의 행위언약과 성격상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상호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두 언약의 관련성은 창1:28의 문화명령적 은혜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창2:17의 선악과 행위언약에서 조건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전제(前提)적 요구 속에서 찾아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을 관장하기 위해 제도적이며 동시에 계시적인 방편으로 주신 것이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이란 말씀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본래적 생명보존과 사명감당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 순종해 의존하는 것을 통해서만 성립된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지금 에덴의 아담과 하와에게는 저들이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자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통치권이 대리적으로 위임된 상태입니다. 이는 사실상 엄청난 특권이며 존귀에 처해진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복과 상급을 한 몸에 모두 받고 있는 입장입니다. 가히 '창조의 면류관'이라 일컬음 받기에 족한 이유가 이에서 성립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본질적으로 피조물이며 종의 신분일 뿐입니다. 무죄자(無罪者)이기는 하지만 완전자(完全者)는 아닙니다.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는 연약함이 이들의 내면세계에 잠재해 있습니다. 그래서 자만과 교만은 금물입니다. 따라서 오직 창조자를 경외하며 그 분에게 절대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피조물로서의 가치와 존재의미와 본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전12:13). 이런 이유로 창1:28의 구체적 성취의 일환으로 선악과 금령법의 행위언약을 경계와 조건으로 주신 것입니다. '네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바르게 알라'고 말입니다. 이는 시험적 조치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배려입니다. 실족을 미연에 방지하고 사전에 경계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선악과 금령법의 조건적 행위언약을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창1:28의 문화명령, 곧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성취를 전개시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두 언약사이에는 진행상 피차 불가분의 연속적 관련성을 맺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궁극적 목적상 동질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험적(試驗的) 사건으로서 선악과 금령법의 내용 속에 담긴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선악과 행위언약
선악과 행위언약은 성격상 시험적(試驗的) 사건으로 간주됩니다. 이는 그 자체 속에 선악과 실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양면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보다 구체적으로 먹으면 죽음에 처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단절로 말미암는 사실상의 육체의 죽음 말입니다. 반대로 순종하면 보다 높은 차원의 하나님의 의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 결국은 영생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가능성을 자체 속에 함의(含意)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산 중앙에 선악과나무와 함께 생명나무가 공존해 있었다(창2:9, 계2:7)는 사실이 이를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행위언약 앞에서 순종과 불순종의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하는 시험에 직면하고 있는 셈입니다. 선악과 사건을 시험적 상황으로 묘사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한편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창2:17의 선악과 행위언약은 창1:28의 창조언약과 짝을 이루어 이 언약이 최종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 전제조건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권세 있게 받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으로 운반해 가는 자들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악과 금령법은 그 본질적 성격상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로서 인간의 수준과 한계를 인정하는 절대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를 불순종한다는 것은 스스로 피조물이기를 외면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도전하는 월권행위가 성립된다는 의미로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신을 지존자(至尊者)와 자존자(自存者)로 삼으려는 일종의 사단적 역모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후에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시험에 미혹돼 선악과를 따먹은 사실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창3:22)라고 말씀하시는 배경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성도가 주님을 따르면서 철저히 자기(自己) 곧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서 성립됩니다(마16:24). 자아(自我)는 자존(自尊)의 원인(原因)으로서 곧 자신을 지존자로 삼으려는 부패한 옛 사람적 의식을 가리킵니다. 때문에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피조물로서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미덕이며 본분입니다. 따라서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경외와 공경과 사랑의 표식입니다. 이로서 선악과 금령법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율법의 총체적 효시(嚆矢)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과 인간의 범죄
창1:28의 창조적 은혜언약과 창2:17의 선악과 행위언약은 그 언약의 당사자가 아담과 하와로 인해 일반적으로 아담언약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된 신분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은 대리적 통치권자들로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순종하는 것을 통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히 성취되는 일에 선용돼야 했습니다. 과연 순종의 여부는 하나님을 향한 저들의 충성심과 공경심을 가늠하는 척도와 시금석으로 작용하기에 족한 기준입니다. 선악과 행위언약이 시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관점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선악과 행위언약 내용을 기록한데 이어서 이내 뱀을 통한 사단의 시험사건과 이로 인한 인간의 범죄경위를 동시적으로 소개합니다(창3:1-6). 본래의 뱀의 영특함이 악용됨으로 사단의 간교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는 과정을 기록하면서(계20:2) 이 뱀이 먼저 하와에게 접근함으로 미혹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이는 창1:28의 문화명령적 언약의 최종적 성취를 위해 이 땅위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권세 있게 펼쳐나가야 할 막중한 사명을 띠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 하와에게는 여간 심각한 도전과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의 순수한 준수여부가 시험대 위에 올려진 셈입니다. 사단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하나님의 권좌를 향한 도전(유6, 벧후2:4)을 하나님의 친 백성을 도구삼아 재 시도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법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직접적인 시험거리로 제시됩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이런 사단의 시험에 어떻게 대처해야만 했을까요. 이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철저히 순종하는 것을 통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뿐 아니라, 사람의 생명과 본분이 말씀만을 의지하고 의존하는 데 있음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증거해야 했습니다(마4:4, 신8:3). 이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저들의 신앙과 충성과 경외를 입증해 내며(욥1:8) 동시에 보다 높은 차원의 의와 생명의 단계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창1:28의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사상은 능력 있게 에덴 동산을 중심으로 보다 넓게 온 땅으로 확장돼 나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창3:1-6의 내용을 보면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인류의 시조가 어떻게 마귀의 시험적 올무에 빠지게 되었는지의 경위를 소상하게 밝힘으로서, 동일하게 현재의 성도들이 빠질 수 있는 시험의 가능성과 위험성에 대해 동시적으로 경고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 됨의 특징과 성격은 오직 시종일관하게 말씀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만 검증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며 준거(準據)로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신앙과 열심은 오직 성경적 지식의 체계를 바르게 인식하는데서 나와지는 정당한 믿음과 순종력의 발휘로 가늠될 것입니다(롬10:2-3, 17). 반대로 자의적 열심에 근거한 신앙은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종교심의 발동과 충동에 자극 받음으로 필연적으로 왜곡과 변질로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이런 식의 기독교 신앙관은 비록 외적 형식이 기독교로 치장돼 있을지라도 내용과 성격과 방향성은 부단히 이기적 욕심을 충족시키려는 유혹에 이끌려 마침내 타락과 멸망으로 결말짓게 됩니다(마7:21-23). 소위 '여로보암의 길'(왕상15:34)로 대변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의 실상이 이랬습니다(왕상12:25-33). 이들의 결국은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해 마침내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받기에 이릅니다(왕하17;6-8).
이제 창3;1-6의 내용을 통해 인류의 시조가 시험에 빠져 타락하고 범죄한 경위를 살펴봅니다. 본문에서 뱀의 간교성은 마귀의 거짓된 속성을 대변합니다. 뱀의 첫 질문은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1절)로부터 접근함으로써, 하와가 선악과 금령법 내용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총체적으로 바르게 숙지(해석)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먼저 확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악과 금령법은 먼저 아담에게 주신 것으로(창3:16-17과 18절 문맥 비교), 하와는 아담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었을 것이 확실하며, 그로 인해 그 중차대한 심각성을 아담만큼 절감하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아담이 아닌 하와를 일차 시험의 대상으로 표적삼은 이유가 이런 사실에 있었음을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충분히 추론할 수 있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 할 수 있다는 전략 말입니다.
마귀의 시도는 정확했습니다. 뱀의 질문에 하와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2-3절)고 답변합니다. 이는 본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함으로 본질적 의미를 변질시키고 희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됐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처음부터 하와가 선악과 금령법에 대한 내용을 본의(本意)를 좇아서 충분하게 숙지(熟知)하지 못했음을 지적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내용을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임의대로 가감하고 과장시켜서 답변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말씀에 대한 곡해가 얼마나 본질을 그릇되게 해침으로 마귀를 이롭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사단의 시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극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이후 간교한 뱀이 하와의 말씀에 대한 부족과 결핍을 놓치지 않고 더욱 공격적으로 접근해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4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 뿐이 아닙니다. 왜곡된 해석의 말씀을 왜곡되게 적용시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경건(말씀)을 인간의 이익의 재료로 삼는 파멸의 단계로 이끌어 갑니다. 5절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미 마귀의 시험의 덫에 걸려든 하와는 분별력과 자제력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창1:28)로서 자신에게 부과된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절감하지 못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하나님의 말씀의 준엄함과 영생케 하는 생명적 가치를 외면한 채, 오직 자신의 내적 욕심만을 발동시킴으로 불순한 이익에만 사로잡힙니다. 이렇게 한 순간에 욕심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하와의 눈에 비친 선악과는 더 이상 금기(禁忌)된 실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공을 보장하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하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허황된 명예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급기야 서둘러 선악과를 따먹고는 남편 된 아담에게도 적극 권하여 결국 아담과 하와 모두가 선악과 금령법을 어기는 결과를 초래합니다(창3:6).
신약성경의 기자는 이부분과 관련해서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딤전2:1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담이 하와의 범죄에 동참해 동일하게 사단의 미혹에 빠진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뼈 중의 뼈이며 살 중의 살인 한 몸 된 하와를 너무도 사랑하는 나머지 그 결국이 어떻게 될 줄을 알면서도 기꺼이 죽음의 저주와 심판에 자원해서 동참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범죄자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첫째 아담의 실체로 오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에 대한 저주와 심판을 자원해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무한하신 사랑을 극명하게 나타내신 것(롬5:8, 고후5:21)을 예표적으로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는 인간의 총체적 비극은 이렇게 불순종의 대가로 지불된 죽음을 핵심적 내용으로 해서 시발됩니다. 이들의 행위는 범죄의 성격상 단순히 잠간의 부주의와 실수로 인한 불순종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지음을 받은 자가,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와 권좌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역적 행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소위 역모죄(逆謀罪)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본래적 의미인 순종적이고 의존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불순종적이고 독립적인 관계로 파괴시킴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깨뜨림과 동시에 원수 된 관계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사건은 이후 창1:28의 창조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일과 관련해 결정적인 장애요인으로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조차 이미 상실해 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이제 죄 문제의 선결이라는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은 창1:28의 창조언약의 지속적인 진행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으며 궁극적 성취는 더더욱 불가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유입은 하나님과의 교제와 화목을 일순간에 단절시켰을 뿐 아니라, 원수관계로 확대 전락시켰으며,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적대시해 보다 적극적으로 불순종의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의 입장에서 보면 희망은 절벽입니다.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과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행과 공덕을 쌓는 것이 결코 죄를 도말하거나 하나님의 의를 보상받을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며 하나님의 규례입니다(롬3:28). 따라서 피조물이 아닌 절대타자에 의한 적극적인 개입을 통하지 않고서는 죄의 해결이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인간의 죄 문제 해결은 영원히 미제(未濟)사건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순종으로 말미암는 인간의 범죄행위는 창조의 면류관이며 만물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인간의 극한 영광을 한 순간에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시켜 버린 참담한 실패사건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실제로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던져주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악과 금령법이라는 조건적 행위언약(창2:17)에 앞서 은혜언약의 성격으로 창1:28의 창조언약을 먼저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선악과 금령법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의 죄를 극복하는 방식을 통해 창1:28의 창조언약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성취돼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창1:28은 조건 없이 복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성격을 자체 속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은 어떤 이유로라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성취돼야만 할 필연성과 당위성이 내재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대두되는 심각한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죄를 극복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담의 죄는 스스로의 힘과 능으로는 극복과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피에 있고 피가 죄를 속(贖)하기 때문입니다(레17:11). 구약의 속죄제사가 이를 예표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래서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음이 성경의 증언이며 하나님의 법도입니다(히9:22). 이는 누군가에 의한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만 죄사함이 가능하다는 얘깁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대속(代贖)의 죽음을 의지하는 길이란 사실 말입니다. 이 방식을 통해 창2:17의 계명을 범한 이들의 죄는 사면될 뿐 아니라, 그 결과로 창1:28의 창조언약의 내용(문화명령)은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런 식으로 창2:17을 어긴 아담의 범죄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창1:28의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代案)으로 주신 사실상의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전형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관련해 예민한 독자는 한 가지 필연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절대 주권자로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는 마귀의 시험을 사전에 막아주시지 않고 허용하셨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서 그 분의 영원하신 목적에 근거한 작정과 무관하게 피조물 스스로 행해지는 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롬9:16). 이와 관련해 심지어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마10:29). 만물과 만사가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롬11:36)고 성경은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 명백히 증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의 범죄사건을 보다 광의적이며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계시적 관점에서 접근해 해석해 본다면, 아담과 하와의 시험 또한 만사의 진행과 만물의 존재를 당신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접근과 해석의 관점에는 나름대로 제기되는 문제점이 없지 않음을 전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성경역사가 자증하는 자취를 좇아 해석(성경 신학적 관점=언약적 구속사의 관점)하게 될 때, 이런 불가피한 문제점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오묘하심의 역사'(신29:29)의 영역으로 넘겨드려야 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신 역사를 백 퍼센트 우리의 한정된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오묘함'을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둬야 할 것입니다. 이 영역에 속한 신지식은 모름지기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끝나고 주께서 우리를 아신 것 같이 우리 또한 온전히 알게 되는 그날에 그 실질이 온전히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고전13:12).
다만 우리는 아담의 범죄(창2:17, 3:6)와 구원(창3:15)의 필연적 당위성과 관련해 한 가지 중요한 명제를 시사 받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시험과 범죄가 하나님의 긍휼(구원)을 입는 은혜의 수단과 방편으로 작용하게 될 뿐 아니라(롬11:32), 결과적으로 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기능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엡1:6, 12절, 14절). 이는 이런 일련의 구원의 경륜들이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서 그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이미 협약됐음(엡1:3-5, 11절, 3:11, 딤후1:9, 딛1:2, 롬16:25-26, 고전2:7)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만사의 진행과 만물의 존재 및 보존, 관리, 섭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입니다(롬8:28). 성도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감사함으로 믿음의 인내를 발휘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현재상황은 언제나 하나님의 최선이란 사실을 생명처럼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 창2:17의 행위언약(아담언약=선악과 금령법)을 위반한 아담을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구원하심으로 창1:28의 창조언약(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언약적 구속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강의에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왜곡시킴으로 아담과 하와를 시험에 빠뜨리는 이상의 사건 내용을 통해, 말씀에 대한 정당한 해석과 바른 적용(순종)이야말로 올바른 성경적 신앙관을 정립하는 척도가 됨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반대로 말씀에 대한 부족과 결핍은 이것이 쉽사리 극복되고 개선되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왜곡을 초래하게 되는 바, 마귀의 역사를 자초하여 마침내는 시험에 빠짐으로 사단에게 종노릇하는 단계에까지 전락하게 됨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성도를 시험하는 마귀의 시험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위하여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통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이익에 집착해 말씀을 방편으로 이용하려 하면 대개의 경우 말씀의 그릇된 해석과 적용에로 빠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이렇게 사단은 성도를 시험하거나 어두운 인격들을 미혹할 때 말씀에 대한 그릇된 해석과 적용을 수단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그 진리성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말씀 자체의 어려움에 있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오히려 대개의 경우 말씀을 대하는 사람의 영적 게으름과 무관심한 태도로 말미암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3.결론
선악과 행위언약의 중심 내용은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을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창2:17). 이는 저들의 생명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순종에 의존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입니다(벧전1:22, 롬1:16). 비록 저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본래적 영적 교제와 사귐은 단절됐지만(창3:8, 사59:1-2), 즉각적인 육체적 죽음을 유보해 주시는 것을 통해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저들에게 베풀어지고 있음을 창세기 저자는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즉각적인 육체적 죽음이 보류된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의 일환으로 성립되는 것일까요. 이는 지속적으로 아담의 자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통해 마침내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된 셈이며, 이런 사실로 인해 인류를 향한 구원의 길이 열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신적 언약의 연속성과 동질성이라는 특수한 관계로 인해 창1:28의 창조언약은 창2:17의 행위언약과 불가분리의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창2:17의 선악과 언약을 신실히 수행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창1:28의 언약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는 일에 자신들의 생애가 정당하게 드려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시험에 빠져 선악과 금령법을 어김으로 인류를 죄와 죽음에로 내어 모는 일에 원인을 제공하기에 이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사단은 끊임없이 말씀의 왜곡과 부당한 적용으로 인간의 어두운 인격을 미혹해서 하나님께 범죄자로 만드는 일에 혈안이 돼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소원성취와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이상으로,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기만하는 행위도 없습니다. 바른 성경적 신앙의 실질은 언제나 말씀의 정당한 해석과 바른 적용으로부터 비로소 성립되며 출발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과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자로 살아간다는 구원의 실질은 하나님의 통치를 권세 있게 받아 누리는 삶을 통해 확인되는 법입니다. 이는 정당하게 해석된 말씀에 우리 자신을 적극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말씀이 내게서 응해지고 내가 성령으로 말씀을 응해드리는 삶을 통해 실제화 될 것입니다(마4:4, 7, 10).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김유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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