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말기(13-15세기)
오상호
중세교회사를 개인적으로 정리해 놓은 글입니다.
A.들어가는 말
하루 중에는 불어로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라는 시간이 있다. 해가 거의 기울어져 가고 땅거미가 바다로부터 잦아들기 시작할 무렵, 저만큼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미묘한 시간을 말한다.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가축이 문득 어두운 숲에서 내려오는 야생의 짐승처럼 낯설어 보이는 저 섬뜩한 시간, 그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중세말기의 시간이다.
중세말기는 보통 13세기-15세기까지의 기간으로 잡는다. 이 기간은 그 이전 중세 1000년의 긴 기간의 축적된 여러 요인들과 힘들이 동시에 다양한 영역에서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치면서 연쇄적으로 반응을 일으켜 중세 말기의 상황을 형성하였고 결정적으로 종교개혁에서 폭발하였다는 점에서 초대교회의 다이나믹한 상황이 형성되었던 상황과 유사한 측면들도 없지 않아 있다.
역사를 살펴보는 작업은 언제나 모호함 안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작업이다. 역사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우리는 어쩌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역사라는 모호함투성이의 무대위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이 바로 역사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역사이기 때문이리라. 레싱은 "인류의 교육"이란 책에서 이런 감동적인 문구로 대단원을 내리고 있다:"알아차릴 수 없는 그대의 걸음을 걸어가시라, 영원한 섭리여! 다만 내가 이처럼 그대 발걸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대에게 절망케 하지 마시라 - 내게는 그대 발걸음이 뒷걸음질로 보일지라도, 내가 그대에게 절망케 하지 마시라!"
이 글은 앞선 중세 1000년의 흐름을 다양한 측면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다양한 측면과 관련된 복잡한 사실들이 동시적으로 서술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분야별로 나누어 서술할 것이고 마지막 부분에서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작업을 할 것이다.
B.전개
1. 후기 스콜라주의: 둔스 스코투스와 오캄의 월리엄
a. 스콜아주의의 흐름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대학의 등장, 탁발수도원의 학문적 열정 등은 13세기의 절정기 스콜라신학을 형성하였는데, 사실상 1250-1350년 사이의 모든 신학자들은 탁발수도원의 회원들이었다. 이러한 탁발수도원을 대표하는 두 집단은 프란체스코 수사단과 도미니쿠스 수사단이다. 프란체스코 수사단은 1219년 파리에 입성하였고 Alexander of Hales(1186-1245), Giovanni di Fidanza(흔히 Bonaventura로 불리움, 1217-1274), John Duns Scotus(1265-1308), Peter Auriole(1280-1322)등이 있고 도미니쿠스 수사단은 1219년에 조금 늦게 파리에 입성하였는데, Albertus Magnus(1200-1280), Thomas Aqunas(1224-1274)등이 있다. William of Ockham(1285-1349)은 원래 프란체스코 수사단 출신이지만, 그의 사상은 독특하다. 13세기는 토마스주의가 절정이었고 14세기는 스코투스주의와 오캄주의가 절정이었다.
b. 후기 스콜라주의
스코투스와 함께 토마스주의와 스콜라주의의 전승기가 결정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하는데, 14, 15세기 스콜라 학자들은 더 이상 거대한 사변적인 신학 체계를 만들지 못하였고 그 대신 명제집에 대한 정교한 주석이나 단일한 주제에 대한 비판적인 해설을 저술하였다.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 분석을 주장들에 대한 논리적인 분석이 대체하였고 자연적 이성의 영역에 점점 더 많은 제한이 부과되었고 반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전망이 확대되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순수 행동이며 최초의 부동의 동인으로 보는 개념을 통하여 자연적 질서와 초자연적 질서를 통합하려한 토마스주의의 시도를 하지 않고 대신에 자연적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둔스 스코투스는 오캄의 via moderna와 토마스의 via antiqua의 중간에 위치한다.
요한 둔스 스코투스(1265-1308)는 스코틀랜드의 맥스톤에서 출생하여 1281년 프란체스코회에 가입, 1291년 사제서품, 옥스퍼드와 파리에서 공부하였다. 옥스퍼드와 파리에서 명제집(Sentences)을 강의하였고 1305년 교수가 되었고 1308년 쾰른에서 사망하였다.
스코투스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토마스주의의 증거들은 단지 동인들의 위계 속에 있는 최고동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뿐이지 성경의 독특하고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증명한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즉 이러한 우주론적인 증거들은 물리적인 세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스코투스는 존재론적인 증거들을 제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투스는 형이상학은 오직 무한한 존재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뿐이며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자비하신 존재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못박는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내용은 엄격하게 계시와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학에서도 스코투스는 아퀴나스의 지성이 최고의 자질이며 맹목적인 의지는 지성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스코투스는 의지가 지성에게 그 대상들을 지적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지는 사랑이 소재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 더 위대한 것이며. 이러한 의지는 지성과는 달리 자유로운 힘이기 때문에 의지가 더 고상하다는 주지론(voluntarism)을 제시한다.
마리아와 관련하여 토마스는 마리아의 영혼이 창조된 순간 이후 거룩하게 되었다고 하였지만 동시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의 구세주라는 견해를 유지하기 위해 마리아도 인류의 원죄를 공유한다고 가르쳤다. 이에 대하여 스코투스는 마리아가 예견된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원죄의 오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즉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를 주장하였다.
하나님과 관련하여 아퀴나스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지하시는 것은 그것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스코투스는 지극히 선하신 자신의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의지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자유를 가르쳤다. 즉 어떤 것이 선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지하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유와 권능은 어떠한 유한한 피조물에 의해서도 제한 될 수 없다. 따라서 심지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까지도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택하시고 그것에 부여하신 가치만을 가질 뿐이다.
특히 은혜와 구원의 문제에 있어 스코투스는 토마스에게 날카롭게 대립한다. 즉 스코투스는 구원은 오직 개인들과 그들의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용납'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들 영혼의 어떠한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누구를 구원하고 구원하지 않으실 지를 자신의 절대적 의지에 따라 결정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연적인 힘에 의하여(ex suis naturalibus) 가능하며 따라서 구원은 자유로운 의지에 따른 도덕적인 선행에 의해 가능한데, 그 행동은 인간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존재로 만드는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자연적으로 선한 행동은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수여받기에 합당한 진정한 '가치있는 공로'(meritum de condigno)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적합한 공로'(meritum de congruo), 즉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은혜의 선물로 보답하시기로 선택하신 '준공로'이다.
오캄의 월리엄(1285-1349)은 둔스 스코투스를 포함하여 그 이전의 스콜라 신학의 진정한 종합이며 비판자이며 동시에 진정한 새로운 길의 선구자이다. 윌리엄은 영국 런던 부근의 오캄에서 출생하였고 1310년경 옥스퍼드에서 신학연구를 시작하였다. 1319년경 이미 롬바르드의 명제집을 강의할 자격을 갖추었지만 그의 교수자격은 보류되었다. 왜냐하면 존 러터에 의해 교리적 오류의 문제로 고소되었기 때문이다. 1324년 그는 아비뇽으로 소환되었다. 혐의는 사소한 것으로 처리되었지만 그는 결코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고 이후 '존경할 만한 학위취득자'(venerablilis inceptor)라 칭해졌다.
1324-1328까지 아비뇽에서 당시 프란체스코파의 청빈에 대한 논쟁에 개입하여 교황 요한 22세에 반대하여 프란체스코회 총장인 케세나의 미카엘을 지지하였고 1328 교황이 정죄하려 하자 뮌헨으로 도망하여 황제인 바바리아의 루드비히(1314-1347)의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후 1349년경 흑사병으로 사망.
구원론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제정하신 의지에 따라서 최선을 다하는(facere quod in se est)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자연 상태 속에서 준공로(de congruo)로서의 은혜를 획득함으로써, 그런 후에는 은혜의 상태 속에서 충분한 공로로서(de condigno)의 구원을 얻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하나님께서는 자신들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거부하시지 않는다"(facientibus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는 오캄주의자들의 격언의 의미이다.
오캄과 스코투스는 모두 자연적인 능력으로 은혜와 협력하며, 최선을 다하는 원칙을 주장하였지만, 오캄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들의 예견된 공로들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을 영원히 예정하신 다고 주장한 스코투스의 가르침을 거부하였다. 오캄에게 선택된 자들에 대한 영원한 예정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예지에 따르면 그들의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post praevisa merita)에 조건지워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유기에 있어서도 그들의 과오에 대한 에지에 조건지워져 있었다. 즉 예정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와 동일하다.
오캄의 급진성은 인식론(지식론)과 자연신학에 대한 입장에서 두드러진다. 그 이전의 기독교 사상에서는 개별자에 대한 지식은 보편자에 의해 전해진다고 주장하였다. 즉 지성은 오직 보편적인 개념(인간)을 통하여 개별적인 것(소크라테스)을 안다. 물론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하다.(즉 어거스틴적 입장의 초자연적 조명에 의한 직접적 전달,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의 감각경험으로부터 오는 추상화를 통한 전달 등) 또한 보편자들이 개별적인 것들과는 구별되는 독립적인 본질이든지(극단적 실재론) 혹은 사물들 속에 고유하게 존재하고 있는 추상적인 본질이든지(온건한 실재론) 초정신적인 실체를 가진다는 것은 동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오캄은 자신의 유명한 '면도칼' 혹은 설명의 경제 원칙을 휘둘렀다. 즉 "복수성은 필연성 없이 주장되어서는 않된다." 혹은 "좀더 적은 전제들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나 더 많은 전제들을 사용하면 실속이 없어져 버린다." 따라서 이제는 오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만이 실재적이며 개별자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매개되지 않은 지식(그는 이를 직관적 지식-intuitive cognition)이 가능하다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단일한 사물에 대한 인식을 독립적인 본질들(어거스틴, 안셀무스, 보나벤투라), 혹은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아퀴나스), 혹은 공통의 본성들(스코투스)과 같은 존재들을 가지고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직관적 인식이 모든 지식이 토대이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파악만이 지성으로 하여금 대상의 존재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이 실재와 지식에서 우선한다. 보편자는 오직 정신의 내용으로만 존재하며 많은 사물들을 상징하기 위하여 고안된 관례적인 상징들인 인간의 언어 내에서만 작용한다.
그러므로 보편자들은 지성과 언어의 관습 밖에서는 아무런 존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초월적인 실재에 대한 창문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신학과 형이상학적 신학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연신학은 전적으로 계시와 믿음에 근거를 둔 새로운 실증적인 신학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이러한 오캄주의는 이후 계속적으로 긍정적 반응이든 부정적 반응이든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중세 말기의 과학적 지식에 경험주의적 성격을 부여하였고 신학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의 저서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주석을 추구하도록 하였다. 특히 오캄주의는 가브리엘 비엘(1420-1495)를 통하여 루터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점에서 중세 후기의 사상은 단순히 중세의 몰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via moderna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교황권의 전성과 쇠퇴
1122년 보름스회의를 통해 교황과 황제 사이의 경쟁은 일단락 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는데, 호헨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1152-1190)는 샤를마뉴를 자신의 모범으로 삼고 실제적으로 독일 주교들의 임명을 주관하였다. 그에 반대하여 등장한 교황은 알렉산더 3세(1159-1181)인데, 그를 선출할 때 추기경단이 분열되어 신성로마제국을 지지하던 일단의 추기경들은 경쟁교황을 선출하였는데 그가 빅토르 4세이고 프리드리히 1세는 빅토르 4세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1176년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도시 연합에게 패퇴되었고 따라서 그는 알렉산더3세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프리드리히 1세는 1186년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상속녀와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 6세를 결혼시켜 남과 북에서 교황령을 위협하는 성과를 얻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3차 십자군 전쟁 중 사망하고, 하인리히 6세가 즉위하였고 1194년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에서 부인의 유산을 얻었고 이로써 교황령을 매우 큰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요절하고(1197), 1198년 가장 강력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3세(1198-1216)가 즉위하면서 역전되었다.
한편 교황 알렉산더3세는 영국왕 헨리 2세와의 경쟁관계에서도 승리하였다. 1162년 헨리 2세는 대법관 토머스 아 베케트(1118-1170)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하였는데, 베케트는 일단 성직에 임명되자 교화적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헨리2세는 클라렌던 헌장을 제정하여 교회적 사건에 있어서 로마에 호소하는 권리를 제한하고 파문의 위력을 감소시키고 성직자들을 시민법정에 복종하도록 하고 주교의 선출을 왕의 지배 아래 두었다. 그러자 베케트는 공개적으로 헨리2세와의 관계를 끊었고 1170년 말 헨리2세의 노르만 기사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자 알렉산더3세는 그 사건을 이용하였고 헨리2세는 클라렌던 헌장을 포기하고 베케트의 무덤에서 공식적으로 참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노센트 3세는 로마귀족집안 출신으로서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교회법 전문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삼촌이었던 교황 클레멘트 3세에 의해 30세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37세인 1198년 1월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노센트 3세에게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과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성지의 회복과 교회의 개혁이었다. 그는 이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권력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세속에 대한 교황권을 확립하였고 세속권력에 대한 영적 권위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구약의 신정체제를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였고 "교회는 태양이며 세상은 달과 같다. 제왕들은 자기왕국만 통치하지만 베드로는 세상 전체를 다스리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대리인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시며 하늘과 땅과 지옥의 만물들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하므로 그 대리인에게도 복종해야 한다. 마치 영혼이 몸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신부들은 왕들보다 더 귀중하다"고 말하였다.
하인리히 6세의 죽음이후 독일은 두 개의 당으로 분열되었는데, 하나는 하인리히 6세의 형제 스바비아의 필립을 지지하였고 다른 한 당은 경쟁가문인 벨프 가문의 브룬스비크의 오토를 지지하였다. 이노센트 3세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오토를 지지하는 대가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큰 양보를 확인받았지만, 상황은 필립이 점자 우세하게 되었고, 그러자 이노센트 3세는 경쟁적인 권리주장들은 교황이 주재하는 법정의 판결에 복종해야 한다는 동의를 양당으로부터 얻어내었다. 그러나 1208년 필립이 암살되자 이러한 이노센트 3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주도권은 오토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노센트 3세는 오토로부터 교황령의 경계에 대한 보증과 독일 주교의 선출에 대한 지배를 포기한다는 약속을 받고 그 대가로 1209년 오토를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오토는 즉위하자 곧 자신의 약속을 무효화시켰고 이에 화가 난 이노센트 3세는 하인리히 6세의 어린 아들 프리드리히 2세(1212-1250)를 앞세웠고 프리드리히 2세는 오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독일 왕으로 추대되었고 오토가 이노센트 3세에게 한 약속을 갱신하였다. 오토는 1214년 프랑스 왕 필립 2세(1179-1223)에게 부비네에서 패배하였고 결국 프리드리히2세가 제국을 계승하였다. 이로써 이노센트는 교황의 권리를 단순히 보호하는 것을 넘어 황제의 계승을 명령한 것처럼 보였고 따라서 교황이 합법적 최고 권위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이노센트 3세는 프랑스 왕 필립 2세가 그의 왕비 잉게보르그와 부당하게 이혼하고 다른 여자를 취하자 수찬금지령을 내려 다시 본 부인을 취하도록 하였고,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 임명문제와 관련하여 존 왕(1199-1216)과 대립하였다. 존 왕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고자 시도하였는데 이노센트 3세는 자신의 친구인 스테판 랭톤을 임명하였고 존 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노센트 3세는 영국을 수찬금지령 아래 두었고 왕은 그를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쫓아 내었고 교황은 1209년 그를 파문하고 1212년 그의 왕위가 몰수되었다고 선언하고 그에 대해 십자군을 공포하였다. 이렇게 되자 영국 왕 존은 교황에게 굴복하고 사죄를 간청하였다. 이에 교황은 1213년 복권하여 주고 영토를 다시 내려주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존 왕을 실지왕 존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권이 약화된 존 왕은 1215년 왕권을 제한하는 문서인 Magna Charta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서는 근대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문서인데, 그 내용은 왕권의 제한, 의회권한의 확대, 조세문제, 외교, 국방에 있어 왕권을 제한하는 것 등이다. 이외에도 이노센트 3세는 제 4차 십자군운동(1202-1204), 이단들 특히 알비조파를 박멸,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의 소집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이노센트 3세에 의해 황제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2세는 오히려 교황권에 대한 최대의 적대자가 되었고 그레고리 9세(1227-1241)와 이노센트 4세(1243-1254)와 권력 다툼을 하였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파문되었고 그의 죽음이후 그의 아들인 콘라드 4세(1250-1254)는 결국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빼앗겼고 교황은 이 영토를 영국 왕 헨리 3세의 아들인 에드먼드에게 주었다. 콘라드 4세의 아들 콘라딘은 무력으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였는데, 결국 그도 교황 클레멘트 4세(1265-1268)에 의해 파문되었고 앙주의 샤를에게 패퇴하여 참수되었다(1268).
이런 과정 가운데 신성로마제국의 힘은 매우 약화되었고 종교개혁까지 하나의 강력한 단일한 통치권이 아니라 연약한 국가들의 집단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 교황권을 견제, 제한하였기 때문에 교황권이 이노센트 3세와 같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세력 가운데 첫째는 민족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었는데, 이것은 사람들에게 프랑스인, 영국인으로 그들이 교황까지 포함하는 모든 외국인들에 대항하여 자신들만의 이익을 갖게 하도록 자극하였다. 둘째는 도시 중산층의 증진된 교육, 부, 정치적 영향력이었다. 도시들은 세속적 사건에 대한 교회의 간섭에 대하여 반항적이었다. 이런 경향과 관련된 것이 평신도 법률가들의 성장과 로마법에 대한 새로운 연구인데, 이들은 왕의 측근이 되어 로마법에 호소함으로 왕의 권력을 점진적으로 강화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 동안의 교회와 교황권이 추구한 세속적 권력이 교회의 참된 목적이 되지 못함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교황권은 결정적으로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점차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붕괴로 교황의 간섭이 지속되었는데 1273년 교황 그레고리 10세(1271-1276)는 독일의 선제후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1273-1291)를 선택하도록 하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의 상황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카페왕조의 세력이 급격하게 커졌다. 즉 과거 독일을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이 교황권과의 관계에서 가졌던 역할이 이제는 프랑스의 왕들에게로 넘어갔다. 이러한 현상에는 교황 우르바노 4세(1261-1264)가 전환점이 되었는데, 그는 프랑스인으로 추기경들을 프랑스사람들로 임명하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프랑스 국왕 루이 9세(1226-1270)의 형제인 앙주의 샤를에게 넘겨주었다. 그 다음 교황인 클레멘트 4세 역시도 프랑스인이었다.
공정왕(the Fair) 필립 4세(1285-1314)부터는 국왕의 권위에 대한 최고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당시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1294-1303)과 대립을 하게 되었다. 1295년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상황에 돌입하게 되자 영국 왕 에드워드 1세(1272-1307)는 평민들의 대표를 의회에 등원하도록 하여 모든 시민들의 지지를 규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비용의 조달을 위한 목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성직자들에게도 과세를 부과하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따라 성직자들은 교황에게 호소하였고 보니파키우스 8세는 1296년 교서 "교직과 평신도(Clericis laicos)"에서 교황의 허가없이 성직자의 재산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거둔 사람은 파문에 처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필립 4세는 프랑스에서 금괴수출을 금지시켜 교황과 이탈리아의 은행에 타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이탈리아 은행가들이 교황을 설득하여 자발적인 세금의 형식을 인정하도록 하였다.
어느 정도의 평화가 있은 후 1301년 필립 4세는 교황청의 대사인 파미에르의 주교 베르나르 사이세를 반역죄로 체포, 고소하였다. 이에 대해 보니파키우스 8세는 베르나르의 석방을 명하고 프랑스 주교들과 프랑스 왕까지도 교황청으로 소환하였다. 이에 대해 필립 4세는 첫 프랑스 국회-성직자, 귀족, 평민-를 소집하여 대항하였고 보니파키우스 8세는 유명한 우남 상탐(Unam sanctam)으로 응수하였다. 이에 대해 필립 4세는 다시 의회를 소집하여 교황을 이단과 도덕적 타락 등의 죄목으로 고발하였고 그를 재판할 교회의 총회를 열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유능한 법률가인 기욤 드 노가레를 이탈리아로 보내어 보니파키우스의 정적인 스키아라 콜로나와 동맹하였고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아나그니에서 체포하였다(1303). 보니파키우스는 친구들에 의해 곧 석방되었으나 석달 후 사망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교황권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는데, 그것은 단순히 교황을 구금하였다는 정도가 아니라 민족감정이라는 새로운 힘이 등장하였다는 사실에 있어 중요하다. 이제 세속사에 대한 교황의 영적 권위에 의한 정치적 지배는 영구히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보니파키우스의 후계자인 베네딕트 11세(1303-1304)의 사망 후 추기경들은 프랑스인 베르트랑 드 고(Bertrand de Got)를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그는 클레멘트 5세(1305-1314)로 즉위하였다. 그는 연약한 성품과 빈약한 경험, 연약한 건강을 가진 자로서 보니파키우스 8세에 대한 필립 4세의 공격을 무죄로 선언하고 수찬금지령과 파문을 취소하고 우남 상탐을 수정하였다. 나아가 그는 거처를 아비뇽으로 정하였으며 이후 1309-1342까지 소위 교회의 "바벨론 유수"라는 아비뇽 유수가 시작되었다.
아비뇽교황청과 대분열, 그리고 교회회의
아비뇽유수 기간동안 교황은 당연히 프랑스인들이었고 추기경들 역시도 거의 프랑스인이었다. 이 기간 중 중요한 교황은 요한 22세(1316-1334)이다. 1314년 독일에서는 황제의 이중선출이 있었는데, 이에 따라서 루이(Louis Bavarian, 1314-1347) 지지파와 프리드리히(1314-1322) 지지파로 나누어졌고 요한 22세는 필립 5세(1316-1322)의 지원을 힘입어 이탈리아에서 독일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그는 두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승인하기를 거부하고 나아가 황제의 공석 중에는 교황이 제국을 다스릴 권한을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루이가 이탈리아 내정을 간섭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였고 그 과정에서 독일 선제후들은 "선택된 제국의 수반은 그 취임이나 공식 임무의 수행을 위해 교황으로부터 인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1338년의 선언을 렌스에서 발표하였다. 이로서 사실상 제국은 교황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
한편 프랑스 도미니칸 수상인 파리의 존(?-1306)은 우남 상탐으로 대표되던 교황권에 대한 주장을 논박하면서 교회와 국가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두 개의 자율적 권력들로서 각각의 통치자는 그 고유한 영역만을 다스린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평행주의는 단테(Dante Alighueri, 1265-1321)에 의해 옹호되었다. 단테는 "하나의 보편적 제국, 특히 로마 황제의 제국만이 문명화된 행동의 본질인 저 평화적 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 교황의 통치가 영원한 축복에 필수적인 것처럼, 이런 제국의 힘은 인간의 세속적 행복에 필수적이다. 이 각각의 권위는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각자의 고유영역에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1280-1343)는 좀더 급진적으로 나아갔다. 그는 그 시대의 으뜸가는 왕권 변증가였는데, 1313년 파리대학의 총장이 되었고 1324년에는 "평화의 옹호자(Defensor pacis)"라는 논문을 완성하였다. 이 논문의 급진적 성격으로 마르실리우스는 황제 루이 바바리안에게 피난처를 제공받았다. 그는 1327년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파문당하였고 1334년 클레멘트 6세는 그 책이 자신이 읽었던 가장 이단적인 책이라고 단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권에 대한 옹호는 계속 지속되었는데, 1265년 교황 클레멘트 4세가 모든 기독교국가에서 교회의 모든 공직에 대한 교황의 임명권을 주장하였는데, 이 선언은 거의 무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왕과 국회가 성직임명법을 제정해서 교황의 모든 임명을 금지하였고(1351), 나아가 상소금지법을 정하여 왕국 밖으로 호소하는 것을 공민권박탈의 벌칙으로 금지시켰다(1353). 그후 1366년 영국 국회는 영국 존 왕이 교황의 봉토로 영국을 바친 행동을 무효화시켰다.
특별히 아비뇽 교황청의 모습과 압제적인 징세는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반대와 비판에 대한 교황청의 대응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하였다. 아비뇽교황청으로의 이주로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으로부터 세금이 대부분 끊어지게 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아비뇽교황청은 중세에서 가장 복잡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를 발전시켰고 이러한 관료주의적 체제는 교황과 교황청의 수입확보에 몰두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임명세(annates)"-성직임명자의 첫해 수입 모두를 세금으로 하는-제도였다. 동시에 교황의 독점적인 임명을 위해 임명보류가 늘어났고 공석중인 성직록은 모두 교황의 수입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전체적인 상황의 결과로 교황의 징세가 성직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한 대중들에게 점점 무겁게 부과되었다. 이런 상황가운데 체납자에 대한 파문과 같은 교회적 견책이 사용되어 대중의 교황청에 대한 감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또한 중앙집중화는 주교들의 권위를 하락시켰고 그로 인해 전통적으로 교회생활의 중심이었던 주교구의 중요성은 사라져갔다. 이런 와중에 교황청의 분열은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었다.
그레고리 11세(1370-1378) 때, 시에나의 성 케드린과 스웨덴의 성 브리제트는 교황청이 로마로 복귀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코라 디 리엔초에 의한 1347년 로마를 향하던 대중 혁명의 여파는 로마를 고통스럽게 하였고 이런 상황가운데 교황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 교황은 로마에 있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그레고리 11세는 1377년 1월에 교황청을 로마로 옮겼다. 그레고리 11세가 죽었을 때(1378년 5월) 추기경들의 대부분은 로마에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프랑스인이었고 따라서 아비뇽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로마시민들은 교황청이 로마에 있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탈리아인 교황을 요구하였다. 추기경들은 파리의 대주교인 바톨로메오 프리그나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그는 우르바노 6세(1378-1389)로 즉위하였다. 그는 곧바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교황청을 개혁하려 시도하였으나 추기경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12명의 추기경들은 아나그니에서 제네바의 추기경 로베르를 교황 클레멘트 7세(1378-1394)로 선출하여 아비뇽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분열은 그 이전의 분열보다 심각하였는데, 왜냐하면 각각의 교황이 정당하게 선출되었고 그들 사이에서 분명한 결정을 내릴 세력이 없었으며,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독일의 대다수 지역,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는 로마의 교황을 지지하였고, 프랑스, 스페인, 스코틀랜드, 나폴리, 시칠리아, 독일의 일부는 아비뇽의 교황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분열은 또한 세금의 악폐를 더욱 증가시켰고 무엇보다도 교회는 가시적으로 하나여야 한다는 생각을 손상시켰다.
로마의 교황: 우르바노 7세, 보니파키우스 9세(1389-1404), 이노센트 7세(1404-1406), 그레고리 12세(1406-1415)
아비뇽의 교황: 클레멘트 7세, 베네딕트 13세(1394-1417)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양한 개혁적 노력이 시도되었다. 특히 파리의 교사들이 노력하였는데, 그 최고의 방안은 공의회의 길(via concili)였다. 교회회의는 3가지의 뚜렷한 목적을 가졌는데, 그것은 교황청분열의 해결, 교회내부의 개혁, 이단처리문제이다.
양 교황의 추기경들은 렉호른에서 만나(1408) 1409년 3월 25일에 피사에서 모일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여기에는 추기경들, 주교들, 대교단의 수장들, 지도적 수도원장들, 신학 박사들, 교회법 박사들, 평신도 군주 대표들까지 포함되었다. 그러나 교황들은 참석치 않았고 공의회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공의회에서는 양쪽 교황 모두를 분열과 이단의 죄목으로 해임시켰는데, 이것은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이었다. 공의회는 새 교황으로 알렉산더 5세를 선출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것으로 더욱 나빠졌다. 세 교황 모두 각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는 교회가 하나임을 보여주었고 나아가 공의회가 분열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니임의 디트리히(1340-1418)는 만약 한 명의 교황이라도 승인한다면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하는 것은 초기 교회전통에서 볼 때 정당하다고 주장하였고, 이것은 신성로마제국황제인 지기스문트(1410-1437)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지기스문트는 알렉산더 5세의 후계자인 교황 요한 23세(1410-1415)를 인정하고 있었고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승인을 얻고자 희망하였기 때문에 1414년 11월 1일 콘스탄스 공의회(1414-1418)가 개최되었다. 투표의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공의회는 그 자체를 네 개의 민족들-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조직하여 각 민족은 하나의 투표권을 가졌고 추기경들에게도 하나의 투표권이 배당되었다.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인가를 단념하고 도망함으로 회기를 깨뜨리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공의회는 1415년 4월 6일 유명한 포고문 Haec sancta synodus(혹은 Sacrosancta)를 선포하였다.
5월 29일 공의회는 요한 23세를 해임하였고, 7월 4일 그레고리 12세가 사임하였다. 한편 베네딕트 13세는 사임을 거절하였는데, 지기스문트는 스페인을 다섯 번째 민족으로 가입시키는 대가로 베네딕트 13세를 부정하도록 만들었고 1417년 7월 26일 베네딕트는 해임되었다.
1417년 11월 추기경들은 각 민족 대표 6명씩과 함께 로마 추기경 오도 콜론나를 마르틴 5세(1417-1431)란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공의회는 또 다른 유명한 포고문 Frequens(1417.10.9)를 선언하여 새 교황이 5년 안에 다시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마르틴 5세는 1423년 피비아에서 공의회를 열었지만 전염병 등 여러 상황으로 공의회는 1424년 초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후스파의 전쟁 등으로 바젤에서 새로운 공의회가 개최되었는데, 2달이 되지 못하여 마르틴 5세가 사망하고 유게니우스 4세(1431-1447)가 새 교황이 되었다. 1431년 7월에 공의회(1431-1449)가 개회되었다.
한편 동방제국은 터키족으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고 서방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황제 요한 8세 팔라에오로구스(1425-1448)는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요셉 2세(1416-1448)와 니케아 대주교 요한 베사리온과 함께 교회연합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려하였다. 공의회와 교황은 이를 각자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기 위해 공의회는 협상장소를 바벨이나 아비뇽으로, 교황은 이탈리아 도시를 제안하였다. 그리스인들은 교황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케사리니를 비롯한 공의회주의자는 탈퇴하였다. 유게니우스 4세는 공의회를 페라라(혹은 피렌체)로 옮겼고 곧 다시 1439년 피렌체에서 플로렌스로 옮겼다. 이 때 논의된 주요 문제는 Filio Que의 문제, 연옥문제, 성찬식의 떡, 교황의 권위문제였다. 이러한 타협안에 동방교회는 반대하고 협상단을 정죄하였다. 이후 결국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바젤 공의회는 사실상 상당기간동안 동방교회와의 협상에 관심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자체의 문제해결은 상당기간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니게우스 4세는 의장 케사리니를 정죄하고 12월에 휴회하고 볼로냐에서 속개할 것을 명령하였다. 공의회는 휴회를 거절하고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라는 콘스탄스 공의회의 결의를 다시 재확인하였고 이로써 교황과 공의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공의회는 "민족들" 사이의 질투가 콘스탄스에서의 개혁을 죄절시켰음을 염두에 두고 그런 집단화 대신 네 개의 큰 위원회(개혁, 교리, 공공의 평화, 일반적 질문들)로 구성하였다. 공의회는 몇 가지를 결정하였는데, 대회의는 교황보다 우위에 있으며 교황청을 위한 강제징세를 제한하고 교회체재를 회의체재로 전환하고(예를 들면 각 교구는 매년 대회를 소집하고 2년에 한번씩 교권의 남용과 성직자의 타락여부를 심사하고 총회는 10년마다 모인다) 성직자의 독신제도의 재확인, 교회구내에서 오락과 연극금지, 교인들의 도박, 댄스금지, 마리아의 무오설 재확인등이다. 그리고 1433년 중도 후스파와 화해점을 찾았다.
1439년 6월 25일 제34차 회의에서 유니게우스 4세 교황은 교회의 평화를 교란시킨 분열자요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반수도사인 평신도 사보아공 아마데우스를 펠릭스 5세란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유게니우스 4세는 교황직을 고수하다 죽었고 그의 뒤를 이어 니콜라스 5세(1447-1455)가 1447년 즉위하였다. 이런 가운데 1448년 회의 장소를 로잔으로 옮긴 뒤 1449년4월 25일 니콜라스 5세를 합법적 교황으로 인정하고 교회회의론자들은 교황에게 승복하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이런 승리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는데, 왜냐하면 각 나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에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438년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성직자들과 귀족들과 함께 소위 브르제의 국본원칙을 채택하여 교황의 억압적 세금징수를 금하였다.
이상의 대분열과 공의회의 기간은 민족의식이라는 새로운 힘이 등장하는 공간을 제공하였고 특별히 공의회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자 각 민족들은 민족적 행동에 의해 공의회의 이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3. Devotio Moderna과 신비주의, 그리고 이단
14세기에는 내적인 경건을 세상 속에서의 그리고 세상으로의 적극적인 봉사의 생활로 표출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대중적 경건이 출현하였고 동시에 신비주의가 꽃을 피웠다. 이러한 모습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영혼이 신비적으로 하나님과 연합됨을 통해서든지 혹은 실제적으로 신비적인 체험을 포함하지 않는 내적인 삶을 가꾸는 것을 통해서든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인격적 접촉을 추구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교회와 사회의 갱신을 위해서는 개인의 종교적인 생신 즉 외면적인 전례들과 의식들에 대한 단순한 대응이 아니라 참된 영적인 신앙이 필요하다는 기본적인 확신이었다.
요한네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 는 15세 때 도미니크파 수도원에 입단하였고 1293년 파리에서 공부하여 1302년 신학석사, 1311년 신학박사가 되었다. 그는 저명한 신학자였고 교회 내의 여러 가지 중직도 역임하였지만,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한 그의 지나친 추구는 범신론적 경향을 띤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후 자신이 지나치게 과장해서 말했다는 과오를 인정하였고 어거스틴과 토마스에 근거하여 정통적인 설명을 제공하여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신론에서 그는 인격적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님(Gott)과 그 배후에서 그 기초가 된 신성(Gottheit)를 구별하여 만물에 있는 참 실제는 신이고 사람의 영혼 속에는 신의 불꽃이 들어 있으며 따라서 사람은 자기 영혼 속의 불꽃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삼위일체에 관하여서는 신성이 그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는 방법으로서 Gottheit가 Gott로 나타나는 구체화된 인격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가르쳤다.
에크하르트의 탁월한 제자는 요한네스 타울러(1300-1361)인데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내주 장소인 불꽃을 영혼 속에서 파악했다. 그러나 그는 이 불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영혼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영혼이 그 원천으로 돌아감은 은혜의 활동이며 인간 의지와 신적 의지의 연합을 동반한 것이지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에게로 흡수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는 주님의 고난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취한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즉 날마다의 삶 속에서 주님과의 내적 연합을 외적인 행위로 보여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자기 직업에 대해 충실하는 것이 교회에 충실한 것 못지 않게 가르쳤는데 "내가 성직자가 아니라 제화기술자라면 나는 내가 만든 구두가 모든 구두의 본이 되도록 할 것이다"고 말했다.
제랄드 흐로테(1340-1384)는 중세 말 가장 널리 퍼진 운동, 곧 Devotio moderna를 전개하였는데 이는 공동생활 자매회, 공동생활 형제회, 어거스틴 참사회공동체를 포괄하였다. 흐로테는 파리에서 법학, 의학, 신학을 공부하였고 교수로 지내다가 13070년경 회심을 체험하고 카르투지호회 모니쿠이첸 수도원에 들어가 신비주의 사상을 공부하였다. 이후 그는 설교자로서 당대의 부패들,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원의 부도덕성을 비판한 이유로 1383년 설교자격을 박탈당했다.
흐로테는 죽기 전에 데벤터에 있는 자기 가문의 저택에 여성들을 위한 신앙공동체를 세웠는데 그것이 공동생활 자매회의 핵을 이루었다. 그가 원래 추구하였던 이상은 세속 사회를 떠나지 않은 채 신앙을 실천하는 공동생활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가장 가깝게 실현한 것이 공동생활 형제단으로서 이들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신앙을 돌보는 일을 주로 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관계에 대한 각성에 그 기초를 두었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을 강조하였으며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의식들로부터 자양을 얻었다. 비록 이들은 신비주의적이었지만 반성례적이거나 반제도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내면적 열정에서 우러나오는 경건을 가르침으로써 신앙의 형식주의와 교회의 부패를 극복하는데만 목표를 두었다. 이들은 본격적인 신비주의를 수용하지 않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열매 중 가장 큰 소득은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의 Imitatio Christi이다.
에크하르트와 타울러, 흐로테 등은 이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특히 14세기 후반 익명의 단체가 나타났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친구들(Gottesfreunde)이라고 불렀는데 이 단체에서 신비주의 논문인 "독일신학"이 나타났고 이 책은 1516과 1518년 자신이 서문을 써서 출판한 젊은 루터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16세기 재세례파와 영성주의자들은 이 책을 기본적 '개혁'문헌으로 널리 사용하였다.
4. 선교의 실패
1250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이슬람 세력은 그라나다 왕국으로 제한되었고 결국 1492년 쫓겨났다. 스페인의 기독교왕국은 약했고 그 실제적 세력은 카스틸과 아라곤이 연합되어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가 공동으로 통치할 때(1479)에야 비로소 분명해졌다.
동방에서는 1208년 중국 북부의 정복으로 시작된 대 몽고 제국이 1238년과 1241년 사이에 남주 러시아를, 1258년에는 팔레스타인의 국경에 도달하였다. 이 정복으로 중앙 아시아에서 번성하던 네스토리우스파는 소멸되었다. 1260년 베니스 상인 니콜로와 마페오 폴로가 북경까지의 여행을 하였고 1269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가 다시 니콜로의 아들 마르코와 함께 1271년 북경으로 여행한 후 1295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이때쯤 프란체스코파 수도사 몬테 코르비노의 존이 북경으로 출발하여 북경에 교회를 하나 세웠고 교황 클레멘트 5세(1305-1314)는 존을 대주교로 임명하고 다섯 명의 주교를 두게 하였다. 이 사역은 명 왕조가 들어서 몽고가 쫓겨났을 때 중단되었다.
회교도에게 있어서는 거의 소득이 없었는데,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1219년 이집트에서 술탄과 만났고 선교사로는 마조르카섬 원주민 출신 라몽 룰(1232-1315)이 터키(1293), 아프리카(1307), 튀니스(1314)등에서 사역하고 순교하였다.
이 시기의 특징은 한 때 기독교 지역이었던 곳의 상실인데, 1291년 팔레스틴을 상실하였고 오스만 터키는 1300년경 소아시아에서 독립국가를 이루었고 1354년 동로마제국을 침략하였고 첨차 발칸반도에서의 지배력을 확장했다. 이후 1454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동방지역은 완전히 이슬람의 세력권이 되었다. 터키족은 종교개혁시대에는 비엔나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런 지역에서도 기독교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동방신학의 신앙으로 새롭게 성장하였다.
5.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대중적 종교지도자들
이러한 시대에서 가장 특징적인 움직임중의 하나는 르네상스였다. 14, 15, 16세기의 누적된 결과로 사실상 세계관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변화에는 미래의 삶보다는 현세의 삶의 기쁨과 만족과 존엄을 강조하며, 영구한 구원이나 저주의 대상으로서보다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더 많이 부과했고 특별히 고전정신에 대한 평가가 변화되었다.
이 운동이 일어난 원인으로는 첫째 9세기 찰스대제의 문예장려, 둘째 13세기의 대학의 발달, 셋째 십자군의 결과로 동방과 서방의 교류, 넷째 동로마의 멸망과 함께 학자들의 서방이주, 다섯째 활판술과 지식의 보급(성경의 보급은 1477-88 불어성경, 1471 이태리어 성경, 1478 스페인어 성경, 1521 독일어 성경이 출판)등이다.
고전에 대한 열정은 13세기말부터 복잡한 도시문화가 발전한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는데, 인문주의(studia humanitatis. 인간연구, 즉 liberal arts-문예)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였다. 그리고 보카치오(1313-1375)는 필라투스를 데려와 피렌체에서 그리스 연구에 관한 강의를 하게 하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고전문헌뿐만 아니라 고대 기독교 문헌들도 다시 살려내었고 특히 로렌조 발라(1406-1457)는 유명한 "콘스탄틴 증여"가 8세기에 나온 조작임을 밝혔다.
르네상스는 단순히 이교사상에 대한 부흥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전윤리와 가독교윤리간에 근본적인 모순점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실제로는 개혁적 성향을 지닌 스콜라주의자들이었다. 피치노, 피코, 쿠사의 니콜라스 등은 기독교와 플라톤주의를 종합했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적 성향을 가졌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대중적 종교지도자들이 호응을 얻었는데, 이들은 성 빈센트 페레르(1350-1419),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1380-1444), 시에나의 성 케드린(1347-1380), 카푸아의 라이몬드(1300-1399),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 제노아의 성 케드린(1447-1510) 등이었다.
이들과 함께 북부 유럽의 현대신심운동들과 관련하여 확산된 영성과 개혁의 흐름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과 카톨릭 종교개혁으로 알려진 종교부흥운동으로 합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흐름에 교황은 제외되어 있었고 따라서 효과적인 지도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들과 대립하는 상황에 있었다는 점은 중세교회에 있어 불운이라 할 있다
.
6.위클리프와 후스
종교개혁이전의 개혁자들은 교리적인 개혁자들(Waldeness, Hus, Wycliff), 실제적인 개혁자들(Savanarola), 신비적인 개혁자들(Eckhart)등이 있다. 이미 13세기 이전에도 개혁운동이 있었는데 7세기 중엽의 바울파, 10세기의 보고밀파(Bogomils-하나님의 친구들), 12세기의 베그하르트파(Beghards-기도하는 사람들), 12세기의 알비조파와 왈도파 등이 있었다.
알비조파는 남부 프랑스에서 당시 성직자들이 부패하였다고 보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닌 그들이 집행하는 성례들이 무가치하다고 보았으며 화상예배를 반대하고 자유로운 성경읽기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노센트 3세 휘하의 시토의 감독 시몽드 몽포르의 탄압으로 거의 전멸되었다.
왈도파는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로도 칭해지는데 왈도는 자신의 재산으로 성경과 기독교문서를 일반대중의 언어로 번역하였고 마19장의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읽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전도복음단체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전대나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전도를 하였고 월, 수, 금은 금식을 하였고 연옥을 부인하고 사자를 위한 기도를 반대하고 성경만을 유일한 권위로 주장하였다. 1184년 루시우스 3세에 의해 이단으로 파문 받았고 왈도는 1197년 보헤미아에서 사망하였다.
존 위클리프(1324-1384)는 종교개혁의 새벽별로 불려지는데 1372년 신학박사학위를 얻어 옥스퍼드에서 대학교수로 지냈다. 그는 교황의 지상권을 반대하고 교회의 세속지배와 교회와 성직자의 재산소유를 비판하였다. 그는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임을 주장하였고 라틴 벌게이트를 영역하여 보급하였다.(1382-84) 성례에 있어서도 그는 화체설을 부인하였다. 철학적으로 위클리프는 극단적 실재론자로 오캄에 의한 유명론(nominalism)을 반대하는 '옛 길'의 옹호자였다. 그의 가르침은 소위 Lollard파(중얼거리는 자들)을 형성하였고 그의 사후 헨리 4세와 5세는 그를 정죄하였고 콘스탄스교회회의(1414)에서 파문과 동시에 그의 시신을 화형에 처하도록 하였고 1428년 실행되었다.
얀 후스(1369-1415)는 보헤미야에서 출생하여 1400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교수생활을 하였고 프라하대학의 총장을 지냈고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교황절대권을 반대하여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 교황과 감독들의 교리적 오류와 부도덕을 비판, 칠성례와 연옥설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비판, 성찬식 때 잔을 평신도에게 베풀지 않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는 1414년 콘스탄스 공의회에 소환되어 1415년 7월 6일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당했다. 후스는 마지막으로 "그대들은 지금은 작은 새를 불사르지만 이제 100년 후에는 큰 황새가 날 터인데 그때는 아무도 그를 처형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하였고 이 예언적 선언이후 꼭 102년 만인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95개조"를 붙였다.
위클리프와 후스는 흔히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칭해져왔다. 그들의 주장을 고려하면 이러한 평가는 타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의 근본적 신조들을 그 본질 중 어느 것도 위클리프와 후스의 신조에 빚을 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은 전통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더욱 급진적이었다. 그럼에도 위클리프와 후스는 종교개혁자들이 직면하였던 동일한 문제들에 직면하였고 그 해답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의 선구자라 칭해질 수 있다. 즉 대답의 연속성은 약하지만, 질문의 연속성은 있다.
7.새로운 민족 세력들
1450-1500까지 서부유럽에서는 왕권과 민족의식이 급성장하였다. 영국과의 백년전쟁(1337-1453)에 의해 거의 몰락한 것 같은 프랑스는 봉건귀족들이 이 전쟁으로 몰락하고 강력한 군주정치로 거듭났다. 성 잔다르크는 프랑스에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국왕 루이 11세(1461-1483)는 왕권을 강화하였고 샤를 8세(1483-1498)는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끌었고 전체 종교개혁 시대의 정치적 배경을 결정하게 될 경쟁들의 기원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중앙집권화는 루이 12세(1498-1515), 프란시스 1세(1515-1547) 때 더욱 강화되었다. 1516년 볼로냐 협정은 성직임명, 성직자에 대한 과세, 교회법정에 대한 왕권의 지배를 강화하였고 한편으로는 교황에게는 그가 원하던 세금을 주었다. 교황청으로서는 대분열이래 이탈리아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고 공의회들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다시 얻기 위해, 그런 협약들에 기꺼이 협상하였다. 종교개혁 때까지 프랑스 교회는 일종의 국가교회였다.
영국에서는 요크 가문과 랭카스터 가문 사이의 장미전쟁(1455-1485)은 왕권에 유리하게 귀족세력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영국인들 가운데에는 시민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따라 강력한 정부를 원하였다. 영국 군주들은 이미 종개개혁 이전에 상당한 수준의 권위를 얻었고 영국교회는 15세기 말경 이미 하나의 국가교회를 이루었다.
이런 민족주의화 과정은 스페인에서 가장 잘 발전하였다. 스페인에서는 종교적 각성의 형태를 취했는데, 그 각성은 궁극적으로 유럽의 절반을 정화된 로마 교회에 충성하게 할 개혁 방식의 전형을 만들었고 흔히 그 움직임은 반동 종교개혁이라 칭해졌다. 이베리아 반도는 중세유럽에서 변두리였고 이슬람의 멍에를 벗는 험난한 길을 걸었다. 그 결과 네 개의기독교왕국-카스틸, 아라곤, 포르투갈, 나바르-가 세워졌지만 이 왕국들은 무력하였고 왕권은 봉건 귀족들에 의해 제한되었다. 1469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아라곤의 상속자 페르디난드(1479-1516)와 카스틸의 상속녀 이사벨라(1474-1516)가 결혼하여 두왕국이 합쳐진 것이다. 이들의 공동지배 아래서 귀족들이 억제되었고 효과적인 왕권제도가 설립되었다. 1492년 그라나다가 정복되어 합병되었고 같은 해에 콜롬부스는 이사벨라의 지원으로 신세계를 발견하였다. 이것은 왕권을 강화하는 재정적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프랑스의 이탈리아 원정(1494)에 스페인은 개입하였고 이로 인해 스페인은 1503년까지 나폴리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곧 이탈리아 전체에 스페인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페르디난드의 사후 그의 손자 찰스 5세(1519-1556)가 즉위하였는데, 그는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의 계승자로 스페인은 갑자기 유럽의 첫째가는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482년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는 교황 식스투스 4세에게 고위 성직 임명권을 왕의 지배 아래 두는 협정에 강제로 동의하게 하였다. 그 정책은 곧 확대되어 교황의 교서도 반포를 위해서는 왕권의 승인이 필요했고 교회법정은 왕권의 감독을 받았고 성직자들은 납세를 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는데, 중앙집권화의 움직임이 없었고 황제의 위는 1438-1740까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가졌는데, 이들은 단지 세습토지의 소유자로서의 권력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16세기초에 85개에 달했던 제국의 도시들은 황제의 무력한 지배 외에는 다른 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도시들은 상업적으로 번성하였고 몇몇은 인문주의 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그들의 상업정신과 최고의 신성한 공화국들로서의 자기 이해는 성직자들과 영주들의 가혹한 세금에 저항하도록 하였다. 개혁자들의 종교적인 호소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영적 동등성이라는 교리로 시민적 권리와 자유에 열망이었던 이 도시들에게 매력적이었다.
농민과 평민들은 엄청난 동요 가운데 있었는데, 1476-1493년 폭동이 일어났고, 1513-1517에는 반란이 일어났다. 14세기 말 이래 흑사병과 전염병들로 인구의 대변동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농민들은 이주와 혼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제한에 복종해왔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소작농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종 또는 농노로 전락하였다.
한편 지역적인 영지들은 점점 더 강력하게 되어 준 독립적 국가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곳들의 통치자들은 중앙집권적 행정기구들을 발전시키고, 주교와 대수도원장을 임명하고 성직자들에게 과세를 하고 교회의 관할권을 제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지역은 유럽의 다른 어느 곳보다 교회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국토의 1/5이상이 강력한 영주주교들의 지배아래 있었고 수도회들 역시 대지주들이었기 때문이다.
1477년 부르고뉴 지역과 네덜란드 지역의 상속녀인 마리가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자 프랑스 루이 11세는 불만을 품고 상부 부르고뉴를 점령하였고 이런 싸움은 1756년까지 지속적이었다. 막시밀리안과 마리의 아들인 필립은 다시 스페인의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의 상속녀인 화나와 결혼했고 그들의 아들인 찰스는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페인의 영토를 소유하는 대 통치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1519년에는 황제칭호를 받았다.
8.사회경제적 배경
12-13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상업과 도시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왔고 15세기말에는 부르조아 집단이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등장하였다. 교회 역시도 이러한 경향에 발을 맞추어 자본주의적 수단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500년대의 유럽에는 6천5백만-8천만의 인구가 있었는데, 약 60명 이상의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주교들 등의 교회지도자들이 지배계급으로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토지의 1/3은 교회의 소유 내지는 교회의 통제 아래 있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생산물 중 70-80%를 지대와 세금, 헌금 등으로 바쳐야 했다. 당시의 설교가였던 존 게일러 폰 카이저베르그(1445-1510)는 "성직자들이 영혼을 낚는 어부 대신 영지를 낚는 어부로 전락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빈번한 기근, 유럽인구의 2/5 가량의 생명을 앗아간 흑사병(1347-48), 100년 전쟁, 후스전쟁, 장미전쟁,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등은 사회적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러한 상황들 가운데 소위 마술적 경건이라 불리우는 성자숭배, 성물이나 성골숭배, 성지순례 등의 미신적이고 이교적인 신앙이 유행하였다.
9.결론
14세기초 기독교 국가의 대부분은 안정적이었는데, 그것은 A. Lewis가 지적했듯이, "프론티어의 종말"(fin de la frontiere)이라 할 수 있다. 중세세계의 팽창은 끝났다. 팽창이 15세기에 획기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현상이었다. 1241-1243년간의 몽고족의 침략은 폴란드와 헝가리에 가공할 흔적을 남겼다. 13-14세기에는 더 이상 토지를 개간하지 않았고 오히려 삼림은 점차 황폐되었고 토지와 심지어 촌락까지도 폐기되기 시작하였다. 인구곡선은 하강하기 시작하였다. 경기침체가 시작하였고 일련의 파업, 도시봉기와 반란이 13세기 후반을 장식하였다. 성전건축이 중단되기 시작하였고 화폐의 평가절하와 화폐개혁이 단행되어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의 은행들이 도산하였다. 1315-1317의 일기불순은 흉작을 가져왔고 곡물가격이 등귀하였고 총체적 기근이 재발하였다. 예를 들면 브뤼쥬에서는 인구 3만 5천명중 2천명이상이 기아로 죽었다. 영양실조의 뒤를 이어 흑사병이 등장하여 위기를 대파국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와 하락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고 곧 회복되는 징조를 보였다. 지리적이거나 경제적인 분야는 타격을 받았지만 그 외의 분야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져 손실을 보상하였다. 예를 들면 전통 직물업은 타격을 받았으나 새로운 직물업은 위기를 타고 상승하였다. 한동안의 혼란 후 영주계급은 이에 적응하였고 전통적인 경작 대신에 목축을 광범위하게 실시하였고 화폐경제에 적응하였고 농민을 다루는 방법을 익혀나갔다. 페스트로 인한 인구감소는 임금상승을 초래하여 생존자들은 더 부유해졌다. 이러한 위기에서 탈출하고자 손쉽게 전쟁에 기대를 걸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백년전쟁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국가의 중앙집권화를 촉진시켰고 부르조아의 등장은 예술과 제품의 대량생산 경향을 가져왔고 인쇄술 등의 기술발전은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 나아가 14세기의 이러한 위기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결국 근대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C.나오는 말
중세에서는 인간이 세계의 모방 내지는 축도, 즉 소우주였다. 그러나 이제 그 관계는 역전되었다. "인간은 세계의 모형이다"(L'homme est le modele du monde)라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썼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섰다. 그 길은 다양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로 대표되어진다. 하나는 종교개혁, 또 다른 하나는 프랑스혁명. 이러한 두 가지 길은 근대이후 끊임없이 추구되어왔고 지금도 추구되어지고 있다. 후자의 길은 프리드리히 횔더린(1770-1843)의 "허나 친구야! 우린 너무 늦게 왔어. 신들은 살아 계시나, 우리의 머리 위 저 세상 높이 머물고 있을 뿐이야"란 시를 통하여 20세기의 게오르그 루카치에게서 "비극은 하나의 놀이이다-신이 구경하는 놀이이다. 신은 단지 관객일 뿐, 배우들의 대사와 움직임에는 결코 끼어들지 않는다"에서 다시금 드러났고, 전자의 길은 1662년 8월 9일 파스칼이 불과 39세의 나이로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외친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소서."를 통하여 쌩시랑의 "인간이 아무리 미천해도 인간은 위대해서, 자신의 위대함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 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의 노예도 될 수 없다."에서 다시금 드러났다.
'세계 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해하기 쉬운 종교개혁의 역사 (0) | 2015.05.04 |
---|---|
[스크랩] 성경연대와 세계사 비교 (0) | 2015.04.23 |
[스크랩] 세계교회사 (0) | 2015.04.11 |
[스크랩] 니케아회의 시대 (313-590년)(교회사) (0) | 2015.04.11 |
[스크랩] 교회사정리 (0) | 2015.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