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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브라함언약1-언약의 일방성

하나님아들 2015. 4. 8. 16:55


언약의 기본적인 세 가지 성격

우리는 노아언약을 통하여 성경에 나오는 언약들의 기본적인 세 가지 성격들을 알아 볼 수 있다.

첫번째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들을 인간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세우신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먼저 노아언약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세우신 것은 홍수 이후의 인류가 죄가 없어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세우신 것을 보았다. 이것을 일명 '언약을 체결하심에 있어서 일방성'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언약의 일방성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의 일방성이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창8:21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세우시게 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후에 정결한 짐승의 제사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인류의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구체적인 언약적 언명은 9장에 나오지만 앞서 8장 21절에서도 노아언약의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류(인간)와 언약을 맺으실 때 인간과 하나님사이에 아무런 조건없이 언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에게 노아언약을 베푸실 때 정결치 못한 짐승을 위하여 죽어지는 정결한 짐승의 희생에 근거하여 언약을 베푸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언약이 체결되어지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이지만, 하나님의 측면에서 보면 "정결한 자의 대신적 희생"이 조건이 되어 언약이 베풀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이후의 언약체결 양식을 볼 때도 이러한 것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창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베푸실 때에도 쪼갠 고기사이로 불이 지나 가는 형태로 언약을 베푸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출24장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체결식을 할 때도 피를 뿌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새언약을 베푸실 때도 당신의 "대속적 피"를 통하여 언약을 베푸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로벗슨은 언약을 피로 맺은 약정으로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언약의 일방성을 구원의 언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언약을 베푸실때도 예수의 피에 근거하여 선택된 자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우신 언약들을 반드시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일명 '언약의 신실성'이라 한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들을 위해서 일하시거나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세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언약아래 들어온 자들에게 언약아래 있는자로서 지켜야 할 명령들을 주신다이것을 일명 "언약의 예속성 혹은 명령성"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창9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인류들에게 하신 명령들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는 일명 문화명령이다. 우리가 만일 자연보호사상과 생명보호(낙태반대)사상의 성경적인 근거를 든다면 바로 노아언약의 명령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언약의 기본적인 성격들을 노아언약에서 뿐 아니라, 앞으로 나오는 구원의 언약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언약

구약에 나오는 최초의 구원의 언약은 아브라함언약이다. 아브라함 언약이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언약이다. 그 내용의 핵심은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창17:7)"는 약속이다. 그 외에도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하셨고, 또한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도 하셨고, 또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창12:2-3,15:18-21).

이러한 아브라함의 언약은 결국 창조때 나타난 하나님나라를 회복시키시고 이루시기 위한 언약이다.

이 아브라함의 언약 중에서 제일 핵심적인 내용은 "나는 네 하나님이 되리라"는 약속이다.

아브라함언약에 있어서 일방성

우리가 유년주일학교에 다닐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본토, 아비, 친척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켰고, 또한 하나님께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까지도 잘 순종하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고 배웠다. 그러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약속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의 행위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하는 말이 구약시대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시대이고, 신약시대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은혜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창12:1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세 가지의 명령은 본토(갈대아우르),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 처음의 명령을 어떻게 지켰느냐를 살펴보겠다.

창11:31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본토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여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데라가 하나님의 명령을 먼저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모를 따러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된 것이다.

그 다음에 보면 그의 아버지 데라가 아브라함을 데리고 가다가 하란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하란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11:32).

이로써 아비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자동적으로 해결된 셈이다. 그리고 이제 데라가 죽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2장 1절의 명령을 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명령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의 친척을 떠나는 문제였다. 그런데 이것은 창세기13장 6절에서 해결되어진다. 아브라함과 롯의 재산이 많아서 어쩔수 없이 헤어지게 되었다(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세 가지 명령을 다 지키게 된 셈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순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히11:8에는 분명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나아갔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순종은 결코 아브라함의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인간적인 열심에서 나온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환경적으로 순종하도록 하신 순종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구원의 언약을 받게 된 것이 아브라함의 행위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창12장에 보면 처음에 부르심을 받았을때 아브라함의 본래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는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땅으로 가게 되었다. 또한 그는 애굽 땅에서 그의 아내를 누이로 속이기까지 해서라도 육신적으로 잘 살아보겠다고 한 파렴치한 사람이었다(창12:13).

그런데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삼기 위한 언약을 베풀기 위해 그를 부르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또 그에게 구원의 언약을 베풀어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아무 이유가 없다.

아브라함은 한 마디로 말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부르신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 삭

성경을 찾아보자.

마1:1∼2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이것은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족보이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이삭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고,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중에 야곱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말해 준다. 여기서 볼때 아브라함이 받았던 구원의 언약의 축복을 최초로 이어받은 사람은 이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이삭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약속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성경을 찾아보자.

창11: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창세기11장 30절에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불렀는가? 하나님은 그의 아내가 잉태치 못하는 사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불렀다. 또한 하나님은 잉태치 못하는 여인인 사라를 통하여 네 씨가 태어나리라고 말씀하셨다(창17:16,롬9:7-9). 그러나 사라는 원래 잉태치 못하던 여인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창16:15). 그러나 이스마엘도 하나님의 자녀되는 유업을 이어받지 못했다. 또한 아브라함은 육신적인 다른 자녀를 통하여 하나님 자녀의 대를 이어가려고 했다(창15:2,16).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결국 하나님은 사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다(창17:17). 그러면 왜 이삭만이 약속의 후손되게 되었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 이삭이 어떻게 출생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아브라함-사라(불임여성)-이삭
요셉-마리아(동정녀)-예수


여기서 보면 이삭이 어떻게 태어났나? 여기서 이삭이 태어난 것이 아브라함의 혈통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다. 혈통 때문이라면 이스마엘이 약속의 후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삭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의 혈통과 관계없이 태어났다. 이 이삭의 출생은 예수님의 출생과 같이 같이 위로부터 태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위로 부터 태어났다는 말은 인간의 육체와는 상관없이 태어났다는 말이 아니다. 위로부터 태어났다는 말은 인간의 혈통적인 조건으로는 태어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 가운데서 태어났다는 말이다).

성경을 찾아보자.
갈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이삭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을 서로 비교해 주고 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육체적 접촉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 부터 태어난 존재이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요셉의 자손으로 다윗의 계통을 이은 것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다(롬1:?). 그 이유는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사이기 때문이다(정혼이란 법적으로는 부부관계이다). 이삭도 마찬가지로 아브라함과 사라사이에 죽은태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가운데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이삭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의 축복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불임여성인 사라의 씨를 통해서 언약의 대를 이어가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모든 여인들에게 아이를 낳게 해주신다는 말씀으로 보면 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의 축복은 인간의 혈통적인 조건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의 축복은 인간의 혈통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계시하기 위해 이삭의 출생의 기사가 있는 것이다(창15장-17장).

이와같이 구원의 언약은 인간의 혈통적인 조건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문/1. 이삭의 출생을 통하여 볼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유아세례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하나?

야 곱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원래도 본래 불임여성 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우심으로 아이를 베었는데 쌍둥이를 베었다. 그러면 이 쌍둥이 중에 누가 하나님의 자녀되는 언약의 유업을 받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야곱이다. 그러면 야곱만이 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의 축복을 받았는가? 리브가가 아이를 베었을때 하나님께 물었다. "왜 내 뱃속에 두 아이가 뛰어놀고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큰 자(에서)는 어린자(야곱)를 섬기리라" 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작은 자인 야곱을 언약의 대를 이을 장자(후손)으로 삼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나님은 어떤 상황 가운데 하셨나? 그것은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태속에 있을 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롬9:) . 태 속이라고 하는 곳은 인간이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다. 두 아이가 나올 때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하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면 야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의 악착같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셔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러면 이렇게 야곱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이유가 무엇인가? 야곱에게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야곱이 언약의 축복을 받
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이었다. 이것이 바로 선택사상이다. 선택이란 인간의 어떠한 조건을 보시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주권에 의해서 되어지는 행위이다(롬9:14-24).

그러므로 이상의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약속을 받게 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때문도 아니고(아브라함), 혈통때문도 아니고(이삭),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하심(야곱)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롬9:6-13,요1:12-13).

성경을 찾아보자.

요1:12∼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이니라

롬9:6∼13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9:14∼2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고 무슨 말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유다

야곱의 택함받은 열두 아들 중에서 누가 대표인가? 또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속사를 이어가시는가? 그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유다이다. 마태복음의 족보에 보면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마1:2)"라고 되어있다. 이것을 통해서 택함 받은 12형제의 대표가 유다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창49:10). 그러면 유다는 어떤 인물인가? 유다에 관한 기사는 창38장에 기록이 되어 있다. 창38에 보면 유다의 큰 아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 그래서 당시의 계대결혼(시형제결혼법)에 따라 둘째 아들이 큰 며느리에게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그래서 만일 아들을 낳으면 첫째 아들의 자식이 되며 집안의 대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이것을 거부하고 그 결과 죽게 되어진다. 세째 아들은 나이가 너무 어리다. 그래서 며느리 다말은 유다와 관계하기 위해서 창녀로 분장한다(다말이 음란한 여인이 아니다. 다만 그녀는 대를 잇기 위해서 분장한 것이다). 왜 다말이 창녀로 분장했겠는가? 그 이유는 시아버지인 유다의 평소 소행을 다말이 잘 알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창녀로 분장했다. 그랬더니 정확하게 유다가 걸려든 것이다. 나중에 다말이 임신했을때 유다가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 그때 야곱이 준 약조물을 내밀자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택함받은 12형제의 대표인 유다, 예수님의 조상인 유다가 이런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당신이 택함을 받았다고, 선민이라고, 그렇다면 당신의 본질이 무엇인줄 아는가? 택함받은 당신의 본질은 유다와 같이 그런 인간이라는 것이다. 뭐 그렇게 심한 말을 하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런데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중심적으로 설명하는 바가 이것이다. 구속사는 끊임없이 인간의 별수 없음, 죄악됨을 고발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사는 인간의 죄악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에 의해서 진행되어진다(베레스와 세라,라합, 룻, 다윗,고멜).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서 볼 때 아브라함 언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1)요1:12-13을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은 것은 결코 우리의 혈통때문(믿는 가정)이 아니고, 또 우리의 마음이 좋아서, 예수를 내가 믿어 줘서 그렇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위로부터 난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어진 것이다. 또한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약속을 받는 것은 인간의 행위때문도 아니고(아브라함), 혈통때문도 아니고(이삭),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하심(야곱)에 의해서 되어진 것을 보았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인간적인 자랑을 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3장에서 바울은 육체의 자랑이 오히려 해이며, 배설물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자랑할 것은 우리를 선택해주신 성부 하나님과 우리에게 언약을 세우시기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로 하여금 믿도록 역사해주신 성령 하나님만을 자랑해야겠다.

질문(적용및 나눔)/1. 우리가 언약백성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쉽게하는 인간적인 자랑은 어떤 것인가? 그런 자랑들때문에 생기는 문제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았을 때 배설물로 여겨야 대상은 어떤 것이 있는가?
질문(연구)/2. 바울은 빌 3장에서 왜 육신적 자랑들을 해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는가? 우리의 육신적인 자랑이 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가?

두번째 우리가 이와같은 사실을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사랑하신다"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날 한 자매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상담을 요청해 왔다. 이유를 물으니까 하는 말이 자기는 요즈음 하나님이 살아계신지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선교단체 활동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서 중,고등부교사도 하고, 대학부 부회장까지 하던 자매가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의심을 할 정도니 굉장히 심각한 문제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봤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 자기는 요즘에 똑같은 일을 4번씩이나 당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언가하면 한 번은 차를 타고 가다가 지갑을 잃어버렸고, 한번은 길을 가다가 지갑을 잃어버렸고, 한 번은 학교에서 지갑을 잃어버렸고, 한 번은 화장실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왜 이리 심각한 문제인가 하면 돈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똑같은 일을 4번씩이나 당했는데도 하나님은 왜 가만히 있었느냐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고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일이 반복해서 4번씩이나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들은 대부분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일상적인 삶속에서 격게 되는 일들을 통해서 판단하게 될 때가 많다. 그래서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함께하신다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대부분 하나님을 원망할 때가 많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하신다는 기준을 일상적인 삶속에 두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물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속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도 한다(시94) 그런데 우리가 만일 임마누엘과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를 단순히 일상적인 삶속에서만 찾으려할 때 우리의 신앙은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밖에 없고 환경에 얽매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아브라함언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불렀는가? 그것은 그에게 육신적인 복을 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함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함께 하신 것은 그에게 구원의 언약을 베풀어주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령한 복이다.엡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신 근거는 다른 데 있지 않고 그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심에 있는 것이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서 환란가운데 지키시는 이유도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풍요가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다.(창12장) 이러한 결론은 결코 감상적인 신앙교훈이 아니다. 마1장 23절에 보면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마1:21에 보면 예수의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 가운데 구원할 자"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이름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사실은 성경에 나오는 임마누엘의 사상의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적인 형편을 낫게 해주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심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롬8장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근거가 우리에게 어려운 환난을 면케해주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롬8:28-39)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해주시는 구원의 사역에 있다. 롬8:35절에서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냐 칼이랴" 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세상적인 어려운 일들을 단순히 면케해 주신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롬8장36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도 불구하고(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 구원해 주심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이 모든 일(환난,적신,기근)에 우리를 사랑(구원의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이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하박국서 초반에 하박국은 이스라엘에 닥친 여러가지 재난들을 보면서 과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사랑하시는가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결론이 어떠한가? 그것은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를구원해 주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기뻐한다는 것이다.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다.

성경을 찾아보자.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질문/1.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와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본래 불임 여성이었다. 또한 야곱의 본처 라헬도 불임 여성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가운데 약속의 자녀들을 낳게 되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또한 이러한 사실이 창3장15절에 나타난다. 여자의 후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질문/2(연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왜 하나님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약속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과 하나님나라의 회복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은 하나님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또한 가나안땅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은 하나님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하셨는데 이 약속은 앞에서 나열한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설명인가? 아니면 새로운 복에 대한 설명인가?


출처 : 김광석 목사와 함께 하는 성경 공부
글쓴이 : 김광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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