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교회사!!

[스크랩] 세계장로교회사 요약

하나님아들 2014. 11. 19. 00:11

세계장로교회사 요약
(A Brief History of the Presbyterians)


저자:레펄쳐 A.로에춰

역자:김 남 식

출판사:성광문화사 1986년 증보판



서언

본 요약은 한권의 책 속에 있는 많은 이야기 중 극히 일부만을 발췌하여 17장의 대부분을 언급하고 책의 줄거리를 옮겨봄으로 저자와 역자의 저작 의도를 이해하고자 하며 17장을 6장으로 통합하여 간략히 정리해 본다.


제1장 사도들로부터 두 사람의 위대한 개혁자들까지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은 그리스도를 부인 하라는 강요를 받았을 때 두려움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팔십년 하고도 육년동안을 나는 그를 섬겨 왔고,그는 내게 아무런 잘못도 행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시는 나의 왕께 불경스러운 언사를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그 당시의 이교도 속의 기독교회의 위상을 간접으로 알 수 있다.

콘스탄틴누스는 왕권에 도전하는 그의 한 경쟁 상대자와의 싸움 직전에 "이것을 사용해서 정복하라"는 말이 새겨진 빛나는 십자가를 밝은 대낮의 하늘에서 보았다.라고 전해오면서 기독교가 제왕의 권위아래서 비로소 공인 받게 된다.

< 신학>은 기독교인의 신앙에 대하여 가능한 한 정직하고 분명하게 생각하려는 노력이다.

325년 콘스탄틴누스는 니케아 종교회의 소집하여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피조되지 않았으며,언제나 존재하시고,아버지 자신과 같은 하나님으로써 동일한 신적이며 영적인 본체시다]라는 결론 내렸다.

그레고리 대교황은 노예로 팔려 온 3명의 앵글로 섹슨인을 보고 "노예가 아니고 천사다" 라고 한 뒤부터 영국에 어거스틴(신학자와 구별)등 선교사를 각지에 보내어 외방 선교가 열리게 되었다.

11세기의 그레고리7세 교황은 [자신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했으며 독일의 황제가 눈속에서 3일 동안을 자신 앞에 나아와 용서를 구하도록 권위를 내세웠다. 또한 교황권은 13세기 초의 인노센트3세 때 최고 절절을 이룬다. 그 후부터 각국 국가들이 로마의 지배에서 탈피하기 시작한다. 한편수도원의 시작은 안토니라는 사람이 에집트의 사막에서 산 것을 본 받아서 독실한 기독인들이 독거하면서 이루어졌다.

2세기의 순교자 저스틴은 "그들이 주일에 모여서 구약이나 어떤 복음서를 읽고 설교 하는 것을 들었다 그 다음에 성찬식을 거행하고 이어 기도하기 위해 모두 일어 섰다"

십자군 운동은 기독교의 변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별도 리포트 )

"가장 고귀한 것은 가장 심각하게 타락할 수 있다"는 말처럼 게르만인의 침입으로 나타난 수도원이나 무법과 무정부의 강력한 저지력으로 강화된 교황권은 철저하게 부패하고 타락하여 탐욕 배반 간음 살인등이 교회(알렉산더6세 교황) 안에서 자행되어졌다. 이는 교회의 개혁을 요청하게 된다.

*마르틴 루터(1486-1546)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기위해서는 인간이 그의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여야 하고,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새 생명의 선물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진리가 종교개혁의 서막을 울리는 말씀이 된다.
로마서1:17<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517년에 면죄부와 카톨릭의 전 제도를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당에 게시하고 교황은 그를 파문하였지만 교서를 불태움으로 정면 도전하게 된다.
한편 신실한 결혼 생활이 동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 42세 때 카터린 보라와 결혼하여 진리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입증했다.

*죤 칼빈(1509-1564)
1536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방대한 저서 [기독교 강요]를 출간한 칼빈은 제네바에서 장로교회 통치제도를 발전시켰다. 그는 교회 직분을 목사,교사,장로,집사로 규정했다.그리고 <장로법원>에 따라 교회 교육 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다.
장로법원은 모든 종류의 도덕적 또는 교회에 관련된 범죄를 견책하는 역활을 담당했고 때로는 시정부가 그러한 자들에게 벌금형을 가하거나 구속하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제2장.초기 장로교와 장로회주의

*유럽 대륙의 장로교인들

종교개혁을 외친 루터의 추종자에 의한 당시의 유럽 각국은 중세교회에 남아 있을 것인가? 아니면 권력과 온갖 교권으로 부터 보호없이 종교개혁자들을 따를 것인가?라는 화두에 지면하게 된다.

1555년 최초의 신교 회중이 획기적인 방법으로 모인다. 이들은 세례를 집례할 목사와 장로 집사들을 자기들이 구성하고 선출하여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그후 4년 뒤에는 개혁파교회의 장로주의 기초를 놓게된다.즉 장로법원(정기회의),콜로키스(노회),지방회의(Synods:대회),국가적 종교회의(총회)의 4급 재판제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위그노로 알려진 프랑스 신교도들은 1572년 성 바돌로매의 날로부터 수천명이 죽음을 당한다.

루터파 보다 칼빈파 등에 의해 개혁교회가 자리잡은 네들란드는 거지들(Beggars)이라고 불리웠을 정도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오렌지공 윌리암으로 인하여 프로테스탄트는 자유로운 신앙의 권리를 찾게되며 북부 네들란드 중심으로 화란이 탄생하게 되고 남부 네들란드는 카톨릭에 얽메여 지금의 벨기에로 탄생한다.
당시 화란은 신앙의 자유로 인하여 주변 국가들로부터 박해를 피해 오는 자들의 보금자리 역활을 하였다.

보헤미안(현재 체코)은 루터 보다 1세기 앞서서 중세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항변하고 있었으며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 개혁주의자들이 있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의 장로회주의

신교 개혁자들이 무르익어 가는 스코트랜드의 여왕 메어리는 프랑스와의 인연으로 카톨릭인이었고 이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개혁의 영웅 존 낙스는<하나의 미사는 이 땅에 침범한 일만여명의 군대보다 더 두려운 것이다>라고 노골적으로 여왕 메어리에게 반기를 들어 의지를 관철시켰다.
제임스왕과 그의 아들 찰스에 의한 감독주의제도를 스코틀랜드는 <국가계약>,<신성동맹계약>등으로 맞서며 장로회주의를 존속 발전시켰다.
평신도 후원회에 의해 발전한 스코틀랜드 장로주의 교회는 분열과 통합을 거쳐 스코틀랜드교회와 연합자유교회로 양분 되었다가 1929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로 합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장로교와 초기의 대영제국

.잉글랜드-윌리암 틴데일은 1525년 신약성경 영어로 번역 출간했는바 그는 초기 청교도인이었다. 청교도에 호감은 없었지만 헨리8세는 1534년 영국의회를 설득하여 영국교회가 교황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것을 선언하도록 했다.
청교도란 이름은 엘리자베드1세 치하에 성직자들이 카톨릭적 의상과 카톨릭적 의식을 배척함으로써 그들의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예배의 청순<purity>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에서 연유하였다. 이들은 감독인 로마 교황의 파송 성직자보다는 목사와 장로에 의해서 교회가 다스려져야 한다는 장로교인이 많았다.
.웨일즈-1811년 웨일즈 칼빈주의적 감리교교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정치 형태면에서 완전히 장로회주의였다.
.캐나다-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한 캐나다 교회는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으나 1875년에 단일한 <캐나다 장로교회>를 결성한다.
.기타-영연방은 영국,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및 세계 각지의 영연방 나라에 장로교주의 중심의 선교를 전개한다.


제3장. 미국의 장로교 체제

*식민지와 노회

.남부식민지는 버지니아를 중심으로 정착한 영국의 장로교,청교도인들이다.
프랑스의 위그노들도 남캐롤라이나에 교회를 형성하였다.
.뉴 잉글랜드에는 회중교회주의가 주류이었지만 장로주의와 서로 호의적이었다.
.중부식민지는 화란 개혁주의교회가 가장 오랜 장로교회였으나 정확한 장로주의적 교회로 볼 수는 없었다.
.프랜시스 마케비는 미국 장로회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울 만큼 최초의 노회를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아래에서 부터 위로 자발적 교회의 참여가 이루어진 장로교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대회(Synod)

.18세기 초부터 불기 시작한 미국의 복음 사역은 개혁 신교교단의 왕성한 선교의 결과를 가져 왔는데 그중 가장 폭발적인 사건은 대각성(The Great Awakening)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 갈망은 통나무 대학이라는 곳에서 부터 시작하여 오늘날 프린스톤 대학이라는 유수한 교육기관들을 양산하였으며 죠나단 에드워드로 부터 시작한 대각성 물결은 온통 미국 전역을 하나님의 나라로 선포하게끔 하였고 이는 오늘의 기독교 국가로의 미국이 있게끔 하였다.
.유럽 각국으로 부터 들어오는 이민들은 각기의 개혁정신에 따라 광할한 신천지에 선교의 기치를 올리며 동서남북 요로에 노회와 이를 관장하는 대회를 조직하였다.

*총회(General Assembly)

.영국 국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의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겨올 수 밖에 없었던 장로교인들은 비대해지는 노회와 대회를 위한 감독을 세워 종교적인 혁명을 가질려는데 경악을 금치 못하며 이는 미국 혁명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바 이것이 곧 총회의 결성이다.
.장로교회와 장로교인은 미국의 독립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저명한 목사인 뉴저지 대학 학장 죤 위터스푼은 <독립선언서>의 서명자이기도 하였다.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위한 운동은 정치와 맞물려 1786년 제퍼슨에 의해 기초되고 주정부에서 채택하여 미국 총회의 결성에 그 준비가 마무리 되었다.
.1788년 뉴욕과뉴저지,필라델피아,버어지니아,케롤라이나의 4개 종속하는 대회와 16개 노회,177명 목사,111명 목사후보생으로 총회를 결성하였다.

*통합계획

장로교회와 조합주의교회는 같은 칼빈의 교리와 간단한 청교도적인 예배 형태를 사용함으로 통합의 조건은 외견상 맞추어진듯 했으나 서로 다른 두개의 구별된 정체의 유지는 새로운 획기적 교파가 탄생하지 않는 한 <장로조합주의교회>란 조롱만 받은 체 결국 실현 불가능 하게 된다.
그러나 교파간의 선교 열정은 1812년 최초의 미국인 선교사를 배출하여 인도로 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다.
한편 미국내 선교도 서부의 개척지로 떠나는 개척자와 더불어 왕성하게 서부와 남서부 일대로 확장한다.
또한 급속히 확대 되는 교회의 사역은 심각한 목사의 부족을 가져와 신학교의 문제점을 태동하기도 했지만 장로교회는 전통적인 목사 교육의 높은 기준을 흐트려뜨리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제4장 미국 장로교의 분열과 재통합

*4개의 장로교로 분리

미국의 장로교회는 노예문제에 대한 신앙적 도전에 결국 자유스럽지 못하게 되어 각자의 입장 차이로 분열하게 된다.
존 홀트 라이스 목사의 설득에도 부구하고 교회정치와 교리문제로 보수파(Old School)와 진보파(New School)로 1837년 분리된다.
웨스턴 리저브,유티카,제네바,제네스 등 4개의 노히로 구성된 보수파에 속하지 못한 교회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총회를 구성하였는데 두 진영 모두 <미 합중국 장로교회>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하였다.
남과북의 경제적인 문제는 내란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교회는 1861년 보수 진보 각각 두개로 분리하여 4개의 장로교 체제로 나누어 진다.

*남장로교회
노예문제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남부 장로교회는 1861년 12월4알 47명이 모여 [미국 남부 연방정부 장로교]를 결성하였고,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있다가 1864년 남부 진보장로교는 남부 보수파에 편입되어 세개의 장로교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으로 인한 1865년의 북부 보수파의 남부에 대한 정죄(전쟁의 댓가)로 말미암아 북부와 남부의 장로교는 돌이킬 수 없는 선을 긋고 말았다.
북부보수와 진보는 1870년 재결합이 이루어졌지만 남부와는 1세기 이상 이루어 지지 않았다.

*북부의 재통합
4년의 남북전쟁은 초교파적인 사역을 불러오게 되고 북부의 보수와 진보는 통합하게 된다. 한편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기원>부터 불기 시작한 과학과 새로운 가치관은 교리의 패러다임을 불러 일으켜 교회는 각종 신학적인 도전을 받게 되며 이에 따라 장로교는 서로 이질적인 교회적 역사에도 불구하고 서로 통합한다.흑인만의 분리된 노회와 웨일즈 칼빈주의감리교 노회는 미 합중국 장로교회와 통합한 대표적인 예이다.

*북아메리카 연합 장로교회
이들의 뿌리는 스코틀랜드의 계약자(Covenanters)와 아일랜드의 탈퇴자(Seceders)에서 찾을 수 있다. 1858년연합 양 개혁교 대표가 합동하여 미국 장로교와 별도의 장로교를 형성했다.그리고 1세기가 지난 1955년 미합중국 장로교회와 합동하여 미합중국 연합 장로교회가 탄생한다.



제5장 1950년대 이후의 장로교회

*흑인폭동과 베트남 전쟁이 사회 문제로 대두 되면서 교회도 각자의 입장을 취하며 인종차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특히 미국인들에게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대하여 그 위험성을 깨닫게 된다.

*흑인 총회장의 등장과 1956년 여 목회자의 출현이후 여성 총회장의 선출등으로 혼란한 교회는 1967년 그동안 일치된 교회 교리적 문제에 대하여 중대한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에배와 크리스챤의 사회적 의무를 규정하는데 사용하게 된다.

*1958년 교황 요한 바오르2세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통합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며 장로교회도 1963년 총회를 기점으로 크리스챤 연합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발표한다.

*1983년 6월 수 많은 의견 대립과 갈등 속에서 양대 미국 장로교는 미합중국 장로교회로 재결합하여 [공허한 슬로건이나 의미없는 논쟁으로 부터] 거듭나는 하나의 장로교로 탄생하였다.



제6장 한국장로교회의 역사

*복음이 이땅에 전래 되고 성경이 전파된 이래로 선교사에 의한 한국 교회는 자체적인 신앙의 토대 위에 단기간에 선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보기 드믈게 왕성한 교세의 확장이 일어 났으며 그 한가운데에 장로교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일제하의 고난과 동족상잔의 내란으로 인하여 교회는 상처를 입고 분열된다.1차분열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 문제로,2차분열은 36회 총회중 신학 방법론 문제로,3차 분열은 44차 총회 중 총대권 문제로 각각 분열되어 잠시 합동하는 모습도 없지 않았지만 점차 사분오열 되고 말았다.



결론

장로교의 난립은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 교회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종교의 자유에 대하여 선구자적 자리를 감당하였다.

 

출처 : 중국. 세계 새물결교회(연구-자료실)
글쓴이 : 주의 머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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