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 이단성! 사이비성!

[스크랩] 4. 영적 부흥과 죽은 정통

하나님아들 2014. 10. 5. 21:06


 

4. 영적  부흥과 죽은 정통


 


 


 

  예수님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향하여 잘한 점은 칭찬하시고 잘못한 점에 대해서는 회개를 촉구하신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일곱 교회를 교회사의 시대순으로 배열하여, 처음의 에베소교회는 초대교회이고 마지막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말세지말의 교회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더 이상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일곱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이기 때문이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각 교회가 교회사의 어느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시대 전체에 걸쳐 각 시대의 전체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묘사한다. 따라서 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묘사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는 오늘날의 교회상태는 에베소교회, 사데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에베소교회는 첫사랑의 뜨거움과 감격을 잃어버린 교회이다.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행동으로는 죽은 교회이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교회이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교회이다.


 


 

죽은 정통이란?


 

  이 세 교회의 여러 징후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정통’이다. 죽은 정통이란 말 그대로 교리는 바른데 행위로는 죽어 있는 교회를 말한다.

  한국의 많은 신자들은 신비주의라는 말에는 익숙해 있지만 정작 죽은 정통에 대해서는 말을 들어본 적이 드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횔르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일부 신비주의자들이 아니라 정통을 표방하는 교회들 내에 무수하게 포진되어 있는 죽은 정통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가인 루터와 칼빈은 기록된 성경을 성령의 도구로 이해했지만 17세기에 이르러 정통교회들은 자신들의 신학적인 입지를 고수하기 위해 교조적이고 사변적인 교리체계 확립과 고백주의에 매달려 기록된 문자 안에 성령의 역동성을 가두워 두었고, 그 결과 영적인 체험이나 바른 삶은 등한시 한 죽은 정통을 초래했다.

  이러한 악영향을 전수 받은 일부 죽은정통주의자들은 오늘날에도 교회의 상태를 각성시키기 위한 성령의 역동성에 의한 하나님의 부흥을 외면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급성장한 한국교회가 지금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입한 주된 원인은 죽은정통 탓이라는 인식이 늘고 있다.

  한국 교계도 지금 죽은 정통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금세기말 한국 교회에 찾아 들고 있는 커다란 문제 중에 하나는 소위 보수적인 교회들의 화석화 현상이다. 죽은 정통이라고 불리워지게 되는 이같은 병적인 현상은 아직 뚜렷한 해결책없이 부심하는 보수교회에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20세기 한국교회의 에이즈(AIDS)라고 할 수 있는 이 화석화 현상은 교회의 생명력의 퇴조와 교회의 공동화 현상, 교인 수의 감소, 신앙이 형식화, 생명이 없는 울법주의 , 구령에 대한 열정이 상실, 회심의 급격한 감소, 형식적인 예배, 이에 따른 윤리적 타락, 현실에 민감한 젊은 세대가 가지는 교회 생활에 대한 회의 등을 주요한 증상으로 하는 이 기독교적인 병폐는 전염병처럼 만연해 가고 있다.

  정통적인 교리를 따르고 있는 보수주의 교회들은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노선을 따른 교회들의 화석화 현상에 대해 생각하기를 교리에 대한 자유스럽고 인본주의적인 태도가 교회르르 그처럼 무기력화시켰다고 흔히들 생각해 왔다.

  그러나 금세기 말에는 이같은 교회의 화석화 현상이 합리주의적인 입장에 선 자유주의 교회를 비판하며 개혁신학의 교리를 고수하던 보수적인 교회에서도 일반화되었다. 교리적으로 진리에서 이탈할 때 교회의 화석화 현상이 찾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러한 기독교회의 전염병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교리란 무엇인가? 교리는 교회의 생명을 어디까지 보장해 주는가? 기독교에 있어서 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교회가 믿는 교리는 회중이 믿는 신앙의 내용들을 구성하고 그 신앙의 내용에 따라서 공동체가 성경의 토대 위에 서있는 여부가 결정되고 심하면 이단 여부에 대한 판단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아무리 공들여 만든 훌류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교리라는 다리를 통해서 죄인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생명의 역사가 없다면 화려하고 크긴하지만 인적이 끊긴채 버려진 다리나 다름이 아닐 것이다.

  교회가 정통 교리를 붙들고 있다는 그 자체로서 위대한 부흥이나 말씀에 의한 대각성이 저절로 오게 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1) 


 


 

죽은 정통의 증상


 

  로이드 존스2)는 교리는 바르면서도 감정을 무시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결함있는 정통’(Defective Orthodoxy)과 ‘죽은 정통’의 특징을 이렇게 진단한다. 


 

  먼저, 기독교의 필수 교리인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에 결함이 있는 주로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들에는 좀 처럼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역사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결함있는 정통이다. 결함 있는 정통 교회에서는 부흥이 일어날 소지가 없다. 결함있는 정통이란 바른 교리는 가졌는데 생명력이 없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바른 교리의 고백에 그치는 교회이다. 교리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인 예수께로 우리를 인도하여서 그분을 알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어 삶이 변하고 그로 ㅇ니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바른 교리의 정의(definitions)에만 치중하는 교회는 생명이 없는 교회이므로 쓸모가 없다.


 

  둘째, 이러한 교회에는 균형이 결핍되어 있다. 바른 교리가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교만하게 만드는 경우이다(고전 8:1). 그래서 메마르고 건조하고 무용지물이 된다. 이러한 결함들이 실질적인 신앙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

  첫째, 교만이다. 생활에서의 교만이 생기고 지적인 교만이 생긴다. “나는 이러 이러한 책을 모두 보았다“, ”나는 이러 이러한 교육을 받았다”는 교만이 생긴다.

또한 이해의 교만이 생긴다.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다 안다“고 한다. 그 결과 비판적이 된다.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아니라 비판적으로 대한다.

  둘째, 논쟁을 좋아한다.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교리가 아니라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교리 때문에 서로 분쟁하고 나누어져서 성령을 소멸시킨다.

  사실 한국 교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일부 이단 사이비 논쟁도 이런 바탕에서 연유하는 것들이 많다. 서울 Y 교회에 대한 Y 목사의 이단논쟁이 대표적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개혁주의 신학윈리를 따르지 않는 목회자들은 아무리 영력이 뛰어나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Y 목사와 소속한 교단의 목사들까지 항의하고 나셨고 수많은 교계지도자들의 성명서로 불씨는 꺼졌지만 이로 인한 영적 에너지의 낭비는 너무나 심하다.


 

  이에 덧 붙이는 말은 “교리에는 완벽하면서도 삶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행위로는 죽은 사데교회이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그 다음은 죽은 정통이다. 죽은 정통은 우리 모두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위험스러운 것이다. 죽은 정통이란 교리는 바른데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것을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죽은 정통의 문제점들을 이렇게 지적한다.


 

  첫째, 편안한 만족감이다. 교리에 확실하고 신앙고백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만족해 있는 자체가 문제이다. 대표적인 예는 모든 것에 만족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에 나타난 것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눅 19:8-14). 하나님은 자기 의에 찬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로 인해 얼굴도 쳐 들지 못하고 회개하는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다.

  이들은 모든 것이 잘되고 만족스럽기 때문에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들은 모든 면에 옳으므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것을 방어하는 것 뿐”이라는 자세이다. 그래서 변증학이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방어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는 단지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할려는 죽은 정통의 일부분이다.

  “시온에서 안일한 자”(암 6:1)가 가지는 태도를 말한다. 수많은 종교 행사를 가짐으로써 편안하고 안일한 마음을 가질려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행사와 조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일반적인 메시지를 좋아한다. 일반적인 활기를 제공하는 메시지를 좋아하며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또한 이들에 예배에는 활기가 없다. 그들은 활력을 기대하지도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잘 짜여져 있고 예측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편안한 안도감이 있다. 예배를 통해 두렵고 놀라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사실 외국인들이 지적하는 한국인의 단점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이만하면 신앙생활 잘 한다”면서 자기만족에 차 있다는 것이다.


 

  둘째, 죽은 정통은 첫번째의 당연한 결과로서, 열정(enthusiam)을 싫어한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열정을 싫어하는 것은 곧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교회사를 볼 때 부흥기 때마다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퍼부어진 비난이 바로 지나친 열정이다.

  특히 정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질러기 쉬운 위험한 함정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한 가지 중요한 법칙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


 

  먼저, ‘모든 것을 적당하게 질서대로 하는 것’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지 혼란의 하나님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의 문맥은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할 때 한꺼번에 시끄럽고 무질서하게 하지 말고 질서대로 하라는 것다. ‘나에게 예언이 임했으니 나는 주체할 수 없다’(고전 14:32)는 행위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짓 기쁨이나 흥분을 제어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영적이라기보다는 육적이기 �문이다. 또한 감상주의(emotionalism)를 조심해야 한다. 감상주의는 감정이 지나쳐서 미친듯이 흥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에 특히 인위적인 감상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을 살펴보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첫번째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기울이다보니까 이것을 소홀히 한다. 혼란을 두려워 하다보니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한다.

  이런 사람들은 부흥기에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거룩한 무질서’와 혼란을 혼동한다. 그러나 부흥기에는 항상 신약에 기록된 대로 단순하게 된다. 말하자면, 성전에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호수가의 배에 타고 앉으신 예수님과 함께 드리는 예배의 차이라고 할까? 으시대는 것, 예전적인 형식, 순서, 가운이나 정장이 필요 없이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에 맡기는 예배를 말한다.

  교회가 부흥기에 있지 않을 때에는 성가대 특히 유급 성가대나 독창자를 강조하여 회증들은 앉아서 그들을 감상한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적당하고 질서대로 하라’는 말이 더 필요가 있을까?


 

  필자가 아는 어느 예배학 교수는 사도 바울이 오늘날 정통교회가 드리는 예배를 보았다면, “좀 더 무질서하고 시끄럽게 하라”고 했을 거라면서 지나치게 예전을 중시하는 정통교회들을 책망한다. 심지어 모 정통 교파에 속한 어느 신자는, “나는 00전통의 교파에서 신앙생활해 왔기 �문에 통성기도는 맞지 않다”면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배척했한다.

  특히 프로그램을 중시하다가 보면 성령을 소멸하기 쉽다. 또한 인위적인 흥분 상태를 지나치게 두려워 할 때 성령을 소멸하기 쉽다. 물론 지나친 것은 지양해야 하지만 정통교회이면서도 죽어 있는 이유는 가짜 흥분과 감정의 표현을 지나치게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상주의자도 되지 말고 감정을 지나치게 두려워 해서도 안된다. 이 모든 것은 가짜 지성주의 때문에 생긴 현상들이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지성인인 동시에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의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라”(살전 5:19-22).


 


 

죽은 정통의 나쁜 결과


 

  그러면 이러한 죽은 정통이 어떠한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가?


 

  첫째, 진리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데 실패한다. 말씀을 듣고 읽고 깨우치 기는 하지만 실 생활에 적용은 하지 못한다. 아니 적용할 능력이 없다. 예배 때에 받은 은혜는 교회 밖에 나가자 마자 잊어 버린다.

  그 다음에는 너무나 바쁘다는 핑계로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봉사나 활동에 더욱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묵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깊이 살펴볼 기회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살피기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둘째, 죽은 정통의 결과 실제 생활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은 예수님의 초림과 성령의 강림으로 ‘이미’ 우리들의 마음 속에 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세의 능력과 기쁨과 평강을 체험해야 한다(롬 14:17). 이러한 천국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부요해 보이나 영적으로는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셋째, 그 결과 하나님께 진정한 영광을 드리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짝하여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애통해 하고 슬퍼해야 한다. 그 결과, 구원을 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긴박하고 간절한 기도를 하지 않는다. 이들이 다니는 교회는 주말에는 북적거리지만 주중에는 텅텅 빈다. 모든 것에 만족하고 모든 것을 다 알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없어, 예배를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려는 갈증이 없다.

  오늘날 정통교회는 편안한 안락감에 빠져 있다. 진정한 부흥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갈증,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갈증이 더하여 져서 그의 영광과 능력과 존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사모할 때 일어난다.


 


 

신학 방법의 문제


 

  종교개혁 당시 막강한 로마 교회를 대적하기 위해 칼빈이나 루터는 인문주의의 꽃인 헬라 논쟁법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플라톤이 주창한, 인간의 이성을 감정이나 의지보다 우위에 놓는 스콜라주의의 영향으로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경시하는 신학체계를 정립시켰다.

  미국의 대각성 운동기간 중에 반부흥파인 찰스 촌시와 부흥파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결도 한 마디로 부흥의 현상, 즉 하나님의 사역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정리된다. 이성주의자인 �시는 이성을 중시하여 부흥 기간 중에 나타나는 격한 감정과 열광을 ‘가짜’로 단정해 버렸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이성은 물론 감정과 의지의 영역까지 결부시키는 전 인격적인 접근법을 옹호하였다.

  서구 정통 신학의 산실인 프린스톤 신학교는 미국의 제1차 영적 대각성운동의 산물이다. 초대 학장인 아키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nader, 1772-1851)는 에드워즈의 설교와 저서를 통해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프린스톤의 학장이 되었을 때 그는 에드워즈의 신학체계를 따르지 않았다.

  시드니 올스트롬은 이렇게 기록한다.


 

“장로교회의 신학적인 역사는, 이처럼 영향력이 있는 스콧트란드 및 아일랜드 인(아키볼드 알렉산더를 가르킴)이 그가 필요한 지적이고 교리적인 안내를, 뉴 잉글랜드의 에드워즈의 신학 전통(비록 알렉산더가 에드워즈의 저서를 통하여 회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에서도 아니고, 후기 청교도인들의 새로운 신학에서도 아니고, 위더스푼(Witherspoon)의 스콧틀랜드 철학적인 전통(비록 이 요소가 프린스톤 신학에 필요적인 요소로 가미되어 뚜렷한 자취를 남겼지만)에서는 더군다나 아니고, 프랜시스 튜레틴(Franscois Turretin, 1623-87)의 17세기 스콜라주의에서 찾았고 또한 발견하였다. 튜레틴은 제네바에 거주하면서 무엇보다도 엄격한 예정론과 문자적인 성경의 영감이론을 수정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공격한 정통이론의 방어자이다.

  1873년에 알렉산더의 존경하는 후계자인 찰스 핫지(Charles Hodge)의 “조직신학”으로 대체될 때까지, 튜레틴의「논쟁적인 신학강요」(Institutes of Electic Theology)(제네바, 1679-85; 에딘버그에서 1847-48에 4권으로 재판됨)는 스위스 신앙고백과 웨스터민스터 공식과 나란히 수백명의 신학교 졸업생들이 미국 전국은 물론 많은 외국의 선교의 현장에까지 들고 간 메세지를 위한 구조와 내용을 제공하였다. 특히 프린스톤 신학은 챨스 핫지에 의해 전개되고 방어되어서 미국 개혁정통신학의 기준이 되었다. . . 그래서 에드워즈의 신학조차 부당하게 모험성이 있는 신학으로 간주되었다.“3)


 

  튜레틴의「논쟁적인 신학강요」는 제목이 밝히듯 논쟁신학의 정수이다. 필자도 읽어 보았지만 신학을 하고 지적 도전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기쁨(?)을 주는 책이다. “야, 정말 똑똑 소리나게 잘도 썼다”는 감탄사가 연발로 나온다.

  튜레틴은 “정확하고 완전한”(precise and complete) 교리적인 위치를 확고하게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밝은 빛은 있지만 따뜻한 열이 없어 이성과 교리를 중시하는 반면 감정과 체험을 경시했다.

  튜레틴의 아들조차 장로교를 분리시키는 정확한 교리들의 사용을 지양하고 연합을 장려하기 위해 사도신경같은 기본적인 신앙고백들만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프린스톤의 찰스 핫지는 튜레틴의 전통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이후 튜레틴의「논쟁적인 신학강요」가 정통 장로교인을 훈련시키는 중요한 교과서가 되었다.4)


 

  신자는 비록 ‘계시의존사색’ 즉 성경을 근거로 한 사고를 하지만 죄인이기 때문에 왜곡되는 면이 많이 있다. 더군다나 서구의 신학 논리전개 자체에 결함이 많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경험을 잠시 말하겠다. 필자는 신학교에 가기 전에 미국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과대학원인 로 스쿨(Law school)을 일년 정도 다닌 적이 있다. 로 스쿨 첫 1년은 소위 말하는 “법률문서작성법”(Legal Writing)으로 거의 한 해를 보낸다.

  Legal Wrting은 모든 정당한 논쟁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법을 배우는 과목이다. 이 과목에서는 첫 번째 과제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건 수임을 결정하기 전에, 고객이 의뢰한 사건에 대한 ‘법률의견서’(Memorandom)를 작성하는 것이다.  

  법률의견서는 사건을 수임했을 경우 승산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기존 법률의 범위 내에서 원고와 피고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작성한다.

  그러나 법률의견서에 근거하여 이 사건을 일단 수임하기로 결정한 후, 법원에 제출하는 ‘변론서’(Advocate)는 법률의견서와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한다. 내 편의 약점은 가능한 한 숨기고 조그만한 장점이라도 침소봉대하는 반면에, 상대편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취해, 장점은 약화시키고 약점을 부각시킨다.

  법정에서는 이런 일들이 매일 일어난다. 한쪽에서는 무죄를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중범죄라고 주장한다.


 

  로 스쿨에서 법정 변호 훈련을 받은 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저는 신학이론의 전개가 불행하게도 ‘법률의견서’ 방식이 아니라 ‘변론서’ 방식이라는 사실을 즉각 감지하였다.

  이후 관심을 가지고 조사해 본 결과, 필자의 생각이 틀림이 없었다. 이러한 전통에 의한 신학 방법은, 성경이 분명히 밝히지 않는 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정의하여 반대파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영과 마디와 골수를 쪼개는 것이 아니라 반대파를 치는 몽둥이로 둔갑하기가 쉽다. 자신들의 주장은 침소봉대하고 반대파의 주장은 ‘설명하여 제거해버리는 경우’(explain away)가 허다하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소질이 있다. 나의 들보는 티로 격하시키고, 남의 티는 들보로 과장하는 것이 죄인된 인간의 당연한 습성이다. 윌리암 데아르테가는 개신교 신학이 이런 법정변론적인 방법에 의해 전개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바리새인의 주장과 미국의 법원 체계는 재미 있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 미국의 신자들은 논쟁할 때 법정 변론 방식과 율법주의에 익숙해 있다. 수십년 동안 미국의 TV극의 주인공들은 변호사가 아니면 소송검사였다.5)

법정 변론의 특징은 상대방의 약점을 과대포장하고 자신의 약점을 숨기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인간의 법정에서는 유효하기만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파괴적이다. 이 방식은 논쟁의 초점이 된 단체나 인물에게도 진리의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어떤 기독교 단체나 지도자들의 단점만 무수하게 나열해 놓고 그들의 장점이나 강점은 하나도 열거하지 않음으로써 바리새적인 논쟁상의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는 형제로서의 책망과 바리새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전자는 자비와 애틋함이 있지만 후자에는 자기 의에 찬 만족과 ‘내가 이전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라는 교만이 깔려 있다.“6)


 

  그러면서 데아르테가는 미국 제1차 영적대각성 기간 중에 반부흥파로 활약한 찰스 촌시, 오늘날 반부흥의 선봉장 노릇을 하는 미국의 존 맥아더7)를 전형적인 바리새주의자로 꼽으며, 미국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의 행크 해인그라프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이해


 

  하워드 라이스8)는 윌리암 보즈마가 지은 칼빈의 전기를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개혁신학의 원조인 칼빈에 대해 가지는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을 분석한다.

  한 측면은 칼빈을 중세기의 스콜라주의 전통의 입장에 선 확고한 원칙의 사람으로 보는 견해이다. 칼빈을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란 정적인 정통성을 지향하는 것이며, 신자는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받은 사람이다. 칼빈의 이러한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칼빈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질서와 이성을 중시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칼빈의 또 다른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삶의 역설을 인정하며, 그 모호성을 이성화하기를 거부하며, 신앙의 핵심에 있는 신비성(mystery)을 환영했다.

  보즈마에 의하면, 칼빈은 ‘신학에 대한 경험과 실천의 우위성을 주장했으며 개인적인 자유에 대해 상당히 관대했다’고 한다. 이러한 측면의 칼빈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역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평생에 걸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는 사람이다. 이들은 교리의 정확성보다는 믿음과 삶의 질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은 칼빈주의자들로는 유럽 대륙의 경건주의자들,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들, 미국의 영적 대각성의 지도자들―조지 휫필드 및 조나단 에드워즈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바른 교리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인들의 실제적인 체험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원했기 때문에, 정통 교리의 공식화를 거부했다. 이들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신비 체험을 허용했으며 자신들의 경험들을 표현하기 위해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용어를 주저하지 않고 사용했다.


 

  하위드 라이스에 의하면, 양측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칼빈을 강조하다보니 부흥기 때마다 대립과 분열이 고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성적인 칼빈을 지지하는 측들이 너무나 우세한 위치를 고수해 왔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개혁 신학이라고 하면 종교적인 경험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을 경험적인 측면에서 이해할려는 시도가 최근에 들어서 시작되고 있다고 하워들 라이스는 말한다.

  문제는 칼빈이 말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식'(knowledge)을 어떤 측면에서 이해하는가 이다. 자주 이 말은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무감정하여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소요리 문답서에서 처럼, 하나님의 특징을 제대로 정의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래서 아직도 칼빈의 전통을 따르는 많은 교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소요리문답을 통한 성경공부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보즈마는 주장하기를, 신자들이 살아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안다’(know)라는 말보다는 ‘체험한다’(experience)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말한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은 지성적이고 이지적인 것은 물론 인격체와 인격체를 체험적으로 아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지적이고 명제적인 지식을 강조하여 감성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을 경시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필자는, 정통 개혁 신학이 이성을 강조하는 전통을 이어받아, 지금도 이성과 교리를 중시하고 감정과 경험을 경시하는 신학을 존속시켜 온 것으로 본다. 이성과 논쟁을 중시하는 신학방법론은 ‘중산층 백인신학’(White Middle Class Theology)이란 비판을 면치 못한다.

  한국의 장로교 신학도 많은 경우 이러한 반부흥파적인 구학파(Old School)인 프린스톤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개인의 경건시간이나 목회 현장에서 가슴은 뜨거우면서도 편견적인 신학의 영향으로 인해 뜨거운 가슴을 애써 무시하는 기현상을 속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부흥기에는 언제나 동반되는 감정이나 열광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같이 균형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온 것이. 그 결과 목회현장에서 나타나는 감정과 열광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매도하여, ‘적당하고 질서는 지킬지 모르나’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질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감정이나 체험을 중시한 나머지 이성을 경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성―사고력 추리력 종합력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다. 오늘날 프린스턴 신학은 개혁 신학의 중추를 이루며 그 공적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통교회에서 너무 지성적이고 질서있고 점잖한 것을 추구한 나머지 성경에서 가르치는 여러가지 긍정적인 감정들―사랑, 기쁨, 환희, 평강 비애 등―을 지나치게 소홀히 취급해왔기 때문이다.


 

  한편, 은사주의자들은 견제가 필요할 정도로 감정과 주관적인 체험을 중시하고 이성과 교리를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않는 균형’(마 23:23)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필자는 다만 개혁보수신학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등한시 해 왔던 ‘종교적인 감정’에 대해 균형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할 따름이다. 더군다나 산업화 기계화로 비 인간화 되고, 사회가 복잡 다단하여 많은 스트레스와 소외감이 가중되는 현대인들에게 감정의 문제는 더 없이 중요한 것이 되었다.

  포이트레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전통적인 서구의 신학은 오랫동안 대부분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을 기울여 왔다. 즉, 죄인인 내가 어떻게 완전하고 거룩한 우주의 심판주로부터 정죄를 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러한 문제보다는 외롭고 일견 보기에 비인간적인 이 우주에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어떻게 찾을까 하는 것이 더욱 현대인들이 필요로 하는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법적인 죄책감을 중심으로 전개된 언약신학보다는 깊은 개인적인 범주에 속하는 자녀 또는 양자의 신분(sonship and adoption)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가족신학(familial theology)이 보다 더 그들의 문제를 잘 해결해 줄 지도 모른다. 언약신학이나 가족신학 모두 중요하지만 처음으로 불신자들을 접촉할 때는 가족신학이 보다 효과적이 될 것이다.“9)  ♡

출처 : 발의 무리
글쓴이 : 발의무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