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란 무엇인가?
Ⅰ. 이끄는 말
Ⅱ. 일반적 개념
Ⅲ. 의의 어의
Ⅳ. 의의 분류
Ⅴ. 의의 속성
Ⅵ. 의의 정의
Ⅶ. 맺는 말
10.의란 무엇인가?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의 곧 주의 의
만 진술 하겠나이다 (시 71:15-16)
Ⅰ. 이끄는 말
어느 글에 있어서나 용어 하나에 대한 오해의 여파는 단순하게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 여파는 한 문장에까지 미치고, 나아가서는 그 글 전체 내용에까지 미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글에 있어서 용어 하나에 대한 오해가 결과적으로는 그 글 전체에 대한 커다란 오해를 낳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어떤 글의 내용 가운데 오해된 용어의 비중이 크면 클수록 그 여파는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이는 용어 하나 하나가 논리적으로 엮어져서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문중들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글 전체 내용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통하여 자기 의사를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깊고 복잡한 경우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성경은 다양한 용어들에 의하여 표현된 종교적인 진리 내용이다.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들을 가지고 신적인 계시 내용을 표현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오해 없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을 종교적으로 정통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렇게 용이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단순한 언어로 표현된 성경 내용을 종교적인 신적 계시의 내용으로 숙고 내지는 승화해서 이해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서 사용한 많은 용어들 중에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사전적 의미만으로는 이해가 충분하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많은 오해와 억측이 따르게 마련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대한 본래의 근본 뜻은 하나이며 그 외에 다른 뜻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성경 내용에 대한 해석이 해석하는 자의 견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 마치 장님들이 코끼리의 한 부분만을 만져보고 그 모양을 각각 다르게 설명하듯이 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 하나에 대한 오해에 의하여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심오한 신적 계시서(啓示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인간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통하여 스스로를 계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성경을 단순한 인륜적인 도덕적 교훈 내용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도덕적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스스로에 대한 계시하는 사실을 전제하고 해석을 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도덕적 해석에 의한 교훈의 결과로 기독교가 철저한 인륜적인 도덕종교로 전락(轉落)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 가운데 하나가 성경에서 사용된 ‘의(義)’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이다.
성경을 보면 ‘의(義)’라는 용어가 많이 나타난다. 구약은 물론 신약에도 흔하게 나타난다.
‘의’라는 용어가 성경에 흔하게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 용어가 성경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그렇게 큰 비중을 가지고 있는 용어에 해한 뜻을 오해하기 때문에 신적 계시인 성경을 인륜적인 도덕적 교훈 내용으로 해석하며 가르치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적 계시인 성경에서 말하는 ‘의’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오는 기독교 진리를 인륜적인 도덕적 교훈 내용으로 변질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성경적인 기독교를 인륜적인 도덕종교로 변질시켜 기독교 자체에 대한 파국을 초래하는 엄청난 결과까지 가져온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라는 용어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이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중요성이 담겨져 있다.
이 주제에 대한 해답은 반드시 명쾌하게 얻어져야 한다. 혹자는 이 주제가 단순한 것이며 지엽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가볍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기독교 교리는 물론, 기독교 신앙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는 중대함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먼저,
‘의’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살펴본 다음,
어의에 대하여 알아보고,
이어서 그 분류와 속성, 그리고
그 정의에 대하여 차례를 따라 알아보기로 한다.
Ⅱ. 일반적 개념(槪念)
일반적으로 ‘의’에 대한 개념은 매우 다양하다.
시대나 지역적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은 물론이지만, 특히 종교적인 배경에 따라서는 그 차이가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종교가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이 내세우는 교리가 종교마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의’에 대한 현대 철학사조의 입장은 매우 두드러진 견해를 가지고 있다.
실존주의(實存主義)에 있어서의 ‘의’에 관한 견해는 상황윤리적(狀況倫理的)이다.
실존주의는 개인적인 현실존재를 중시하는 주의인데, 의에 관한 현대적 논의에 있어서 그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실존주의라는 용어 자체는 어렵고 까다로워 보이기는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의로운 결단에 관해서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그에 대한 이해가 아주 용이하다.
실존주의는 결단(decision)이 행해지는 ‘실존의 계기(moment of exstence)'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결단이 그때 그때 현존재가 실존하는 바로 그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어떠한 결단도 결단을 내리는 개인의 주체적 자세와 결단이 행해지는 전체적인 시간적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예컨데 도덕적 결단에 있어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언뜻 보아 동일한 상황에 처하여 정반대의 결단을 내리는 것이 가능한데, 그 두 사람의 결단이 각각 동시에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동일한 인물이 어느 날 올바른 도덕적 결단을 내리고는 그 다음 날 여전히 도덕적으로 정반대의 결단을 내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결단은 흔히
‘상황윤리(Situational Ethics)'라는 용어로 설명 된다 (성서대백과, 기독지혜사).
이와 같은 실존주의적 견해는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의에 대한 가치기준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주관적이며 상대적인 의에 대한 가치기준만을 인정한다.
‘의’에 대한 종교적 입장은 실존주의와 그 견해는 달리한다.
유교에 있어서의 ‘의’는 국가나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공통규범에 합치하는 행동을 스스로 취하는 것을 말한다.
곧 공자의 인(仁)에 해한 더욱 구체적이고도 명석한 실천방안이라고 이해 할 수 있다. 유교에 있어서의 의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째는 적의(適宜), 곧 알맞고 마땅함을 의미한다. 중용(中庸)에서는 “의란 마땅함이다. 어진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중요하다 (義者 直也 尊賢爲大)”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희(朱熹)는 “의(宜)란 사리를 분별하여 각각 마땅한 바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유가(儒家)의 도리에 합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이(利)와 상대하여 이야기되는 것으로서, 초기 유가에서는 의(宜)를 중시하고 이(利)를 경시하였다. 논어 이인(里仁)에서는 “군자는 의(宜)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고 하였다.
셋째는 도덕규범으로 항상 인과 연결되어 종형(從兄). 경장(敬長). 존현(尊賢)등의 의미를 갖는다.
맹자 이루(離婁) 상(上)에서 “인의 실상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요, 의의 실상은 형(兄)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 것이나, 진심(盡心) 상(上)에서 “어버이를 친히 하는 것은 인이요,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의다”라고 하였다. (세계백과사전, 동서문화) 결국 유교에 있어서의 의는 인간을 비롯한 사회집단의 윤리적인 도덕성에 기초를 둔다.
불교에 있어서의 ‘의’는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전혀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부처는 사람들에게 우주의 질서에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릇된 행동은 벌을 낳으며 올바른 행동은 보답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단지 불교에 귀의(歸依)하지 않은 사람이나 입문한 지 오래지 않아 배움이 얕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득도(得道)한 불교 신자의 경우에 있어서, 의의 실행은 인생의 최종적 해탈(解脫)에 있어 무의미하다.
부처는 불교에 있어서의 ‘구주(救主)라는 입장에서 그 미묘하고 복잡한 신앙으로 가능한 최상의 구원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부처가 제시하는 구원은 이승, 곧 금세(今世)에서의 주의 깊은 수도(修道)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세(來世)에 서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존의 수레바퀴로부터 완전히 도피하기 위한 것이다.
구원은 존재의 대해(大海)가운데서 소멸되거나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생부정적(生否定的)인 종교이다. 인생을 해탈하는 길은 비교적 의식이나 죽음을 통한 인생으로부터의 도피뿐이다. (성서대백과,기독지혜사). 결국 불교의 있어서의 ’의‘는 궁극적으로 인생을 해탈하는 자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것으로 본다.
앞에서 살펴본 의에 대한 일반적 개념은 그 차이가 너무도 뚜렷하다. 현대철학사조인 실존주의는 의가 개인의 주체적 자세와 결단이 행해지는 전체적인 시간적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는 상황 윤리적 견해를 주장하였다.
그런가 하면, 유교에서는 의가 국가나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공통규범에 합치하는 행동을 스스로 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의가 우주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인생을 해탈하는 자에게 있어서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성경이 말하는 의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해답을 얻기 위하여 먼저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의 뜻을 알아보기로 한다.
Ⅲ. 의의 어의(語義)
‘의(義)’라는 말은 신.구약성경에서 큰 비중을 가지고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를 얼핏 살펴보면, 의에 대한 구약에서는 의미와 신약에서의 의미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인다.
구약에서는 계명을 기초로 한 의처럼 보이고,
신약에서는 은혜를 기초로 한 의처럼 보인다.
그래서 의에 대한 성경적 의미가 매우 복잡하고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누구나 받게 마련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우선 의에 대한 어의부터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살펴 보기로 한다.
구약에서는 ‘의’라는 말이 히브리 원문으로 ‘체테크( )’또는 ‘테다카( )’라고 한다. 그런데 ‘체테크( )’는 남성형 명사로서 ‘공의’또는 ‘공정’이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체다카( )’는 여성형 명사로서 ‘공의’ 또는 ‘의’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들 용어 사이에는 그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 뜻이 비슷하다.
그리고 의를 표현하는 용어 가운데 ‘차데크( )’ 또는 ‘찻디크( )’라는 말이 있다.
‘차데크( )’는 동사로서 ‘공의롭다’ 또는 ‘의롭다’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고, ‘찻디크( )’는 형용사로서 ‘공의로운’과 ‘합법적인’ 또는 ‘의로운’이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용어들은 어근( )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도덕적 표준과의 부합을 내포한다고 한다. 그리고 혹자는 이 어근의 본래 의미는 ‘곧다’라는 뜻인데, ‘기준’이라는 뜻으로 대용되었다고 주장한다.(성서원어 구약신학사전).
이를 종합하여 살펴보면, 본래 ‘곧음’을 뜻하는 용어가 ‘기준’이라는 뜻으로 대용되다가 도덕적 용어로 발전하여 사용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약에서는 ‘의’라는 말이 명사로서는 헬라어 원문으로 ‘디카이오쉬네( )’라고 하는데, 이는 ‘의’또는 ‘바름’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형용사로 ‘디카이오스( )’라고 하는데, 이는 ‘올바른’ 또는 ‘의로운’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동사로서는 ‘디카이오오( )’라고 하는데, 이는 ‘옳다고 하다’ 또는 ‘옳다고 간주하다’ 그리고 ‘의롭다고 선언하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 용어들은 모두 ‘디케(dike)’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는데, 이는 ‘징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혹자는 이 어원 명사가 본래 ‘여교사’ 또는 ‘가르침’을 의미했다고 한다.
‘디케(dik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Zeus)의 딸이다.
신화에서 그녀는 제우스(Zeus)가 세상을 통치하는데 함께 참여한다. 제우스(Zeus)는 인간에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도록 자기 딸 ‘디케(dike)'를 부여한 다. 그래서 그리스 종교에서는 신적인 것들로 생각되었던 모든 것들과 공통적으로, "디케(dike)"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도록 가르치는 여교사로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징벌을 가하는 신적 존재로 생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의’라는 용어에 대하여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사전적인 의미와 그 어원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이것은 ‘의’라는 성경적 의미를 탐색하는데 그 출발에 불과한 것이다.
언어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의사를 소통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이러한 수단은 사상이나 이념, 또는 교육이나 문화적 환경에 따라 의미를 달리하여 사용되는 예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어떤 용어에 대한 단순한 사전적 의미나 그 어원에 대한 고찰만으로 그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용어가 종교적인 계시 내용을 전달하는데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인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의’라는 용어를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사전적인 의미와 그 어원만을 살펴보는 것으로서 그 의미를 완벽하게 파악하려는 생각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의’에 대한 분류를 통하여 구체적인 분석을 꾀하기로 한다.
Ⅳ. 의의 분류(分類)
성경적인 ‘의’에 대한 올바른 개념에 대한 이해는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성경에서 ‘의’라는 말이 때로는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택한 백성 곧 성도와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의’에 대한 분석과 깊은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선 그에 대한 분류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성경적인 ‘의’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성도의 의다.
그런데 이들 의는 서로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종속적 관계를 유지한다.
바울은 이스라엘 택한 백성이 “하나님이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10:3)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의 의”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명하신 율법을 준행하여 세운 의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의와 택한 백성이 모세의 율법을 준행하여 세운 의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와 성도의 의로 분류하여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창조주 하나님의 의
영원자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영원히 의로우시다.
그 영원한 하나님의 의는 성경에 나타난 창조섭리는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섭리를 통하여 계시되었다.
그래서 구약 시편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찬양을 드리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시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시 119:142)라고 찬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시97:6)라고 찬양하였고,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시98:2)라고 찬양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을 따라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작정하신 뜻을 따라 이스라엘 열조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 사실에 대한 찬양이다.
그렇게 창조와 역사 섭리를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스스로의 기쁘신 뜻을 따라 작정하신 것을 이루심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뜻대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심으로 하나님 스스로의 의를 계시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과 주관하시는 역사 섭리에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정하신 뜻을 실현 하심으로 스스로의 의를 계시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의로운 것이며, 의로운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작정하신 영원한 뜻을 따라 택하신 백성에게 언약을 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운 뜻은 언약대로 이루심에 의하여 계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신 섭리가
곧 하나님의 의의 표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택한 백성이 하나님께서 그 열조와 언약하신 말씀대로 이루어 주신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보았다고 찬양한 것이다.
(시 97:6 하늘이 그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윤리적인 도덕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2. 피조된 성도의 의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구약시대의 택한 백성이나 신약시대의 성도는 모두가 의로운 자다.
그들의 의는 그들 스스로의 도덕적인 의로운 행위의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거저 주어진 믿음에 의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분명하게 밝혀 준다.
구약시대에 아담의 아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히 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에녹 역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데려가심을 받은 것이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있지 아니하였더라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노아도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였다.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는 노아가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입고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믿음을 좇아서 의의 후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삭과 야곱,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등도 모두가 마찬가지다.
(히 11:8-40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 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나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아니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악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벌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 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것이니라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 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내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의 용맹되어 이방 사름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은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특히 구약 시가서에서 ‘의’나 ‘의인’이라고 표현한 내용은 대부분 이스라엘 선민과 관계되거나 이스라엘 선민을 가리키고 있다.
(시 1:5 그러므로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잠 10:3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
(전 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신약에서도 특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성도의 의에 대하여 자 주 언급하였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화목 제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 스스로의 의를 나타내셔서 하나님 스스로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롬 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나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다.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그러므로 성도의 의는 성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모세의 율법이나 윤리적인 도덕적 규범을 수행한 결과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능력에 따른 구속의 은총에 의한 결과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안다고 하였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뿐만 아니라, 성도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고 하였다.
(갈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성도의 의는 하나님의 의와 엄연히 구별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Ⅴ. 의의 속성(屬性)
성경적인 ‘의’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를 하려면 그 속성을 자세히 알아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 하면 그 속성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그에 대한 올바fms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적인 ‘의’ 에 대한 속성과 성도의 의에 대한 속성이 서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의는 창조주의 절대적인 의가 되는 것이고,
성도의 의는 피조물의 상대적인 의가 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속성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의 구분에 따라 차례로 그 속성을 알아보기로 한다.
1. 하나님의 의의 속성
하나님의 의의 속성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하게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언급을 한다면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영원성이며, 다른 하나는 절대성이다.
첫째, 영원성이다.
하나님의 의는 영원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스스로가 영원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 역시 근본적으로 영원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서는 영원이라는 것을 시간과 관련하여 이해한다.
그래서 영원을 “끝없는 세월” 또는 “시간에 좌우되지 않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영원성이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성질”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성는 시(時). 공(空). 형(形)의 존재인 피조물의 속성과 영원적으로 초월하여 구별되는 속성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시간과 공간과 형상으로 이루어진 피조물의 속성을 내재적으로 포함하는 초월적 속성을 말한다.
시간과 공간과 형상으로 이루어진 피조물은 모두가 유한(有限)하다.
그것은 피조세계가 물질로 이루어진 형상에 의하여 공간이 이루어지고 그 공간에 의하여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물질은 유한한 것이다.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리고 유한한 공간을 영원적으로 초월한 상태는 저기와 여기, 또는 위와 아래가 하나 된 상태를 말한다.
(마 24:23-27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그리고 유한한 형상을 영원적으로 초월한 상태는 작은 것과 큰, 또는 적은 것과 많은 것이 하나인 상태를 말한다.
(눅 9: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막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유한한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한 상태로서의 속성인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의’의 표본이며 근거이고 본질인 것이다.
둘째, 절대성이다.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스스로가 절대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 역시 근본적으로 절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절대라는 말은 아무 것도 대립되거나 비교될 것이 없는 상태로서 어떤 구속이나 제약(制約)을 받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성질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절대성은 상대적 존재인 피조물의 속성과 영원적으로 초월하여 구별되는 속성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절대성은 상대적 존재인 피조물의 속성을 내재적으로 포함하는 초월적 속성을 말한다. 상대적인 피조물은 모두가 대립되어 있어 어느 것 하나도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서로 상대를 이루어 존재하는 것이다. (창 1:1-31).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것들을 영원적으로 초월한 상태는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 또는 밤과 낮 그리고 흑암과 빛이 하나된 상태를 말한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시 139: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상대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것을 영원적으로 초월한 절대성을 가지고 있는 ‘의’의 극치(極致)이며 유일하고 완전한 절대가치(絶代價値)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의’는 영원성과 절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실유(實有)와 더불어 신성(神性)에 수반(隨伴)하는 신적인 특유성(特有性)이다.
2. 성도의 의의 속성
성도의 의의 속성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하게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근본적으로 언급을 한다면,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상대성이며, 다른 하나는 은혜성이다.
첫째, 상대성이다.
성도의 상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성도 스스로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성도의 의의 속성 역시 근본적으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상대성이란 일반적으로 모든 사물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물과 의존적 관계를 지니고 있는 속성을 말한다.
그러나 신학적 견지에서 말하면, 상대성이란 절대적인 하나님의 속성에 유한적으로 내재하여 구별되어 있는 속성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상대성과 절대성이 각각 서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상대성이 절대성 안에 유한적으로 내재하여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의는 그 자체가 한 개인에게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존재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에 의존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가 성도에게 부여되게 되면, 그 성도의 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에 의존하는 상대적인 의가 되기 때문이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따라서 성도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를 힘입지 않고서는 스스로가 독자적으로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가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하였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둘째, 은혜성이다.
성도의 의는 은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성도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은 존재이기 때문에 성도의 의의 속성 역시 근본적으로 은혜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은혜를 자연이나 타인에게서 받는 고마운 혜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저 베풀어 주시는 고마운 혜택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성도를 예정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는데 이는 성도에게 거저 주시는바 은혜의 영광을 친미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엡 1:4-6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따라서 은혜성은 성도 스스로의 노력의 대가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성도에게 사랑으로 거저 베풀어 주시는 성질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의는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윤리적인 도덕적 행위와는 무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로 거저 주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은혜를 베풀어 거저 의롭다고 칭하여 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도의 의로운 생활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심령에 내주하게 하신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가능하게 하신다.
그래서 성도의 의로운 생활의 열매를 가리켜 “성령의 열매”라고 일컫는 것이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그러므로 성도의 의는 본질적인 면에서나 생활에서 나타나는 행동적인 면에 있어서 모두가 은혜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도의 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방적 사랑에서 기인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무조건성을 동반하는 것이다.
Ⅵ. 의의 정의(定議)
성경적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그 정의를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정의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문제의 해답을 얻는 데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적인 ‘의’에 대한 정의는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정의와 성도의 의에 대한 정의가 서로 차이가 있다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의의 정의는 근본적이고, 성도의 의의 정의는 지엽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의 정의와 성도의 의의 정의를 나누어서 차례로 알아보기로 한다.
1. 하나님의 의의 정의
하나님의 의에 있어서, 그 정의는 하나님의 절대가치(絶對價値)라고 할 수 있다. 절대가치는 절대자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나 하나님 정신의 목표를 말하는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뜻이다.
일반철학에서는 가치를 인간의 감정이나 요구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 또는 인간 정신의 목표가 되는 보편타당의 당위(當爲)라고 말한다.
곧 호오(好惡)나 선악(善惡), 또는 진(眞). 선(善). 미(美) 따위와 같은 것을 말한다.
이는 철학적인 인간의 상대가치(相對價値)에 대한 정의다.
이러한 상대적이어서 언제든지 변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인 하나님의 절대가치는 절대적이어서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가치는 인간의 철학적 가치인 호오(好惡)나 선악(善惡), 또는 진(眞). 선(善). 미(美) 따위를 초월하는 가치이다.
절대가치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전유물(專有物)이다. 따라서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도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좋다 나쁘다, 또는
참되다 거짓되다,
선하다 악하다,
아름답다, 추하다, 그리고
옳다 그르다라는 가치 판단을 통하여 가치결정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시면 좋은 것이 되고,
나쁘다고 하시면 나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옳다고 하시면 옳은 것이 되고,
그르다고 하시면 그른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스스로 가지고 계시는 절대기준에 의한 판단에 따라 하나님 스스로가 결정하신 절대가치인 것이다.
2. 성도의 의의 정의
성도의 의에 있어서, 그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하므로 의인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결과로 의롭다함을 얻어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 시편을 인용하여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지만
(롬3:11-12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은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성도의 의는 하나님의 절대가치인 의의 결과,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결과이다.
다시 말하면, 성도의 의는 하나님의 절대가치인 의에 따른 의로운 사역,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의하여 얻어진 결과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의를 본질적(本質的)이라고 한다면, 성도의 의는 우유적(偊有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성도의 의가 없이도 그 자체만으로 완전하게 존재할 수 있으나,
성도의 의는 하나님의 의가 없이 그 자체만으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도의 의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에 철저히 의존해서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절대가치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성도가 스스로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성도 스스로는 어느 누구라도 좋다 나쁘다, 또는 참되다 거짓되다, 선하다 악하다, 아름답다 추하다, 옳다 그르다라는 가치판단을 통하여 가치결정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시는 것이 성도에게도 좋은 것이 되고, 나쁘다고 하시는 것이 나쁜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옳다고 하시는 것이 옳은 것이 되고, 그르다고 하시는 것이 그른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가치판단을 하시는 그대로 성도에게 있어서도 그 가치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도의 의는 성도 스스로의 판단에 의하여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판단에 의하여 결정된 의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의는 하나님의 절대가치인 의에 따른 의로운 사역, 곧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의하여 얻어진 결과인 것이다.
Ⅶ. 맺는 말
기독교의 성경적인 ‘의’에 대한 견해는 철학에서나 일반종교에서 가지고 있는 견해와 판이하게 다르다.
그 까닭은 견해의 중심을 달리하는 데 있다.
전자의 경유는 견해의 중심을 하나님께 둔 것이고, 후자의 경유는 견해의 중심을 인간에 둔 것이다.
곧 전자는 의의 근원이나 본질 그리고 실제에 있어서 그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있으나, 후자는 그 모두를 인간에 두고 있는 것이다.
1. 의의 근원(根源)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성경적인 ‘의’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의’의 근본적인 원천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누구로부터 의를 부여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의로우시다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다.
철학에서나 일반 종교에서는 의의 근원을 인륜(人倫)에 두고 있다.
‘의’의 근본적인 원천이 인간의 윤리적인 도덕성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신론에 기초한 인본주의적 발상에 자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의롭다고 해서 의로우신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 스스로를 의롭다고 평가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의 근원이 되시는 것이다.
2. 의의 본질(本質)은 하나님의 절대가치다.
성경적인 ‘의’의 본질은 하나님의 절대가치다.
‘의’의 근본적인 성질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가치라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누구로부터 가치를 평가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스스로 평가하신 가치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다.
철학에서나 일반 종교에서는 의의 본질을 도덕적 가치로 알고 있다.
‘의’의 근본적인 성질이 인간의 윤리적인 도덕성에 의한 가치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신론에 기초한 인본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누가 의롭다고 평가를 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 외에는 하나님의 의를 의롭다고 평가할 자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의를 의롭다고 스스로 평가하신다.
그래서 하니님이 의의 본질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가치이다.
3. 의의 실제(實際)는 구속사역의 결과다.
성경적인 성도의 ‘의’의 실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결과다.
성도의 ‘의’의 사실 그대로의 상태나 형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해 주신 사역의 결과라는 말이다.
이는 성도의 자율적 능력으로 이룩한 도덕적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결과라는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다.
철학에서나 일반 종교에서는 의의 실제를 인간의 윤리적 행위의 결과로 알고 있다.
성도의 ‘의’의 사실적인 상태를 인간의 윤리적인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시 무신론에 기초한 인본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성도의 의는 성도 스스로가 자율적 능력으로 도덕적인 의로운 행위를 행한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 외에는 성도를 의롭다고 평가할 자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성도를 의롭다고 스스로 평가하신다.
그래서 성도의 의의 실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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