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 사도신경!! 십계명!신앙고백

[스크랩] 사도신경 강해 10: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1): / 이승구교수

하나님아들 2014. 9. 17. 23:02

사도신경 강해 10: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1): 이승구 교수

 

 

사도 신경 강해 10: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1):

"성령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이승구 교수


본문: 누가복음 1: 26-38


이제부터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삶을 사시고, 그 삶 가운데서 어떠한 일을 하여 나가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일, 흔히 우리가 성육신이라고 부르는 일에 대한 생각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성육신'의 사건은, 게할더스 보스가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선재하시는 메시아가 인간성(human nature) 안에 들어오시며, 초역사적인 분이 역사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시는"[1] 놀라운 일입니다. 그가 이처럼 이 세상과 역사 가운데로 오실 때 그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드님[聖子]께서 우리들의 인성(human nature)을 취하실 때 그는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는 방식을 취하셨고, 따라서 그녀의 몸 안에서 다른 어린아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10달 동안 자라시다가 마리아에게서 낳아지신 것입니다.

이런 잉태와 출생 방식의 의미와 그 유익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경륜 가운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이 일어난 후에야 이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고찰이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건이 이미 발생한 후에야 우리가 이 일의 의미와 유익을 생각해 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육신의 사실은 우리의 성찰에 앞서 이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밀 부룬너 같은 이와 같이 "동정녀 탄생 사상은 성육신의 기적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말해서는[2]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 가운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육신 하도록 하셨는가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할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고찰과 성찰에 따라서 이 사건이 바뀌거나 그 의미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이들과 같이 성육신에 대해서 생각한다거나 어떤 식으로 이 일이 발생하는 것이 더 은혜스러울 것이라든지, 더 하나님의 의도를 잘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의 의미는 이미 이 사건이 발생할 때부터 그 사건에 붙박혀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모든 성찰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 시대와 같이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저버리는 시대에 아주 필수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3]

1. 성육신의 사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자, 구원자가 이 세상에 올 것이며, 그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시원적(始原的) 형태로나마 계시된 것이고, 신실한 성도들은 그 계시를 믿고 계시에 따라 구속자의 오심을 대망해 왔습니다.[4] 그러나 실제로 이 사실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그 구원자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던 이들조차도 그 메시아가 오신 것과 그가 오신 방식을 보면서 놀라며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의 기이함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그것을 아시고, 당신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그 일을 이루어 가신 것입니다.

그 계획에 따라 어느 날 갈릴리 나사렛에 다윗의 자손(다윗의 집안에 속한, ִՎ ՏיՊՏՕ ԤՁՕԿՄ)[5] "요셉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정혼한"(ִՌՍՇՓՔՅՕՌԽՍՇՍ ֢ՍՄՑו ٖ ׬ՍՏՌՁ ԚՙՓԾՖ)[6] 처녀(ՐՁՑՈԽՍՏՒ)에게[7] 천사 가브리엘이 이르러 그녀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눅 1:26, 27 참조). "은혜를 받은 자여(ՊՅ՗ՁՑՉՔՙՌԽՍՇ), 평안할찌어다(՗ՁזՑՅ).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ץ Ԫ՝ՑՉՏՒ ՌՅՔ֤ ՓՏ׷)"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인사말은 마리아를 놀라게 하였고, 그녀를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하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왜 나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가?' 또 '주께서 함께 계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등의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의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이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되어질 일을 설명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보라 수태하여 이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8]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ՔשՍ ՈՑ՜ՍՏՍ)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영원히 야곱의 집, 즉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영원한 왕이 자신의 몸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이런 소식을 듣고 그 사실도 놀랍지만, 처녀인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 의아해 하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은 다시 이렇게 설명하여 줍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ՐՅՋՅ՝ՓՅՔՁՉ ִՐו ՓԽ)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ՐՉՓՊՉԼՓՅՉ ՓՏՉ)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9](눅 1:35). 여기 사용된 "임하다"(ִՐԽՑ՗ՏՌՁՉ)는 말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표현하는 것과 같은 용어가(행 1:8) 사용되고 있고, 이 배후에는 아마도 이사야 32:15절과 같은 말씀이 있는 듯합니다. 또한 "덮는다"(ִՐՉՓՊՉԼՆՙ)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의 신현적 임재를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되던 말입니다(출 40: 35; 시 91:4; 140:7 참조).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마리아에게 있게 되고, 그 결과 그녀는 아이를 잉태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가운데서는 그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10] 그러나 이 가브리엘의 설명에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가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미래사가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등의 표현이 바로 수태의 순간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11]

또한 마리아가 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되는 일을 조금은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여자) 친척(ՓՕՃՃՅՍԿՒ) 엘리사벳에게 되어진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능치 못하는 일이 없다는 것의 하나의 예증으로 언급합니다: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 36-37). 이 모든 대화 가운데서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마리아에게 아이가 수태된 것이 다 하나님의 성령의 크신 능력으로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우리는 주로 누가 복음에 근거해서 진행하였습니다. 누가가 그의 복음서 서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그 바로 뒤에 동정녀 탄 생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누가는 동정녀 탄생이 사실이라고 믿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12] "동정녀 탄생에 대한 마태의 보도는 누가 복음의 기사와 독립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도 역시 동일하게 동정녀 탄생 사상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다".[13] 이처럼 거뜨리는 마태와 누가가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여진 사건(as an accepted fact)으로 제시하려고 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합니다.[14]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태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후에 요셉에게도 주의 사자는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20). 이는 아마도 마리아가 요셉에게 전하여 준 말을[15] 확언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 이야기 가운데서 마리아의 처녀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눅 1:27; 마1: 27절과 34절 등) 처녀성 자체를 높이 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이 얼마나 큰 이적으로 이루어지는가를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16] 더구나 많은 주석가들은 이이야기 속에서 마리아 자신의 가치가 강조되어 있지 않은 것에 주목합니다.[17] 성육신은 하나님의 크신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지 인간의 가치와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간 부모된 마리아와 요셉은 천사들로부터 이 아이의 수태가 성령으로 된 것임을 고지 받고 그 일을 받아들이고서 이 아이의 부모 역할을 하기로 합니다.[18] 그리하여 요셉은 이 고지 후에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와서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한 것"입니다(마 1:24-25). 이 말은 예수님의 수태가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일어난 가이사 아구스도의 '본 동리에 가서 호적하라'는 명에 따라(눅 2:1-4) 호적하러 베들레헴에 내려가서 그 다윗의 동리에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된 것입니다.


2.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는 사실의 의미


이렇게 되어진 사실 가운데서 성령님으로 잉태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성육신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선언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요 1:13). 하물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께서 참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지 아니하시고 인간성(the very nature of man)을 취하시는 일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이것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힘과 능력으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되어진 일 가운데서 세상의 창조와 더불어서 가장 초자연적인 일이 바로 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잉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성자께서 우리의 인간성을 당신님께로 취하여 들이신 삼위일체적인 사건입니다. 따라서 이 일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가운데 있던 일이 그 정해진 때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라고 말했던 것입니다(갈 4:4). 이 일은 우연히 되어진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되어진 일이란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잉태에서 성령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따라서 타락한 인간성이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죄의 죄책과 오염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간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는" 분이십니다(히 7:26).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타락한 이후로 가지게 된 연약해진 인간성, 따라서 죽을 수 있는 인간성을 취하셨지만 죄의 부패와 오염은 가지지 않은 인간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잘 언급하고 있는 것이 로마서 8:3의 어려운 표현인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ԽՍ ץՌՏՉ՞ՌՁՔՉ ՓՁՑՊשՒ ֠ՌՁՑՔԿՁՒ)라는 말의 정확한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르시온의 생각 같이 그저 육체를 가진 것과 같이 나타났다는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가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모양(ץՌՏԿՙՌՁ)이라는 말은 피상적인 유사성이나 외적인 유사성을 뜻하는 말이 아니고, "형태"(form)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과 죄된 육체를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을 막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19]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의 하나로 머레이의 다음 설명을 주목해 보십시오:


성부께서 성자를 죄와 비참과 죽음의 세상에로 보내실 때, 그 자신은 죄된 존재가 아니게 되면서도 그에게 가능한 한도 내에서 죄된 인간성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보내셨음을 나타내는 일에 관심을 나타내면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자신은 거룩하고 더렵혀지지 않으셨다 - '모양'이라는 말이 이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in the same human nature) 오셨다. 그것이 바로 '죄된 육체'라고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이런 의미를 온전하게 표현해 낼 다른 단어의 조합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20]


같은 시리즈의 로마서 주석을 대체한 더글라스 무(D. Moo)의 다음 설명도 역시 비슷한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아주 조심하여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is walking a fine line).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인간적 조건에 들어 오셨고, "육화되셨다"(in-fleshed, in-carnis). 그리고 그런 존재로서 자신을 죄의 세력에 노출시키셨다(6:8-10 참조)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 영역에 참여하심으로 그가 육체에 갇히시고 그럼으로써 그 자신이 죄책이 있을 정도로 죄에 종속하게 되었다는 시사를 피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호모이오마(ץՌՏԿՙՌՁ)는 "육체"라는 말에 "죄된"이란 말을 덧붙인 것이 너무 한 방향으로 치우쳐 나가지 않도록 균형잡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21]


이와 같이 성령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예수님께서는 죄를 제외하고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할 수 있는 인간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와 함께 우리는 그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히 4:15).


3.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의 의미


그러나 가장 초자연적인 일은 그저 초자연적인 일로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자연과의 밀접한 조화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즉,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수태될 때에라도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뼈로부터 인간성을 취하며, 그 아이가 태중에서 자라 갈 때에도 마리아의 모든 인성을 다 사용하면서 자라 가며, 다른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로써 초자연이 초자연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함을 잘 보여 줍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마리아가 감당한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옳다. 이를 강조하면서 도날드 맥클라우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8장 2절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ex Maria), 즉 마리아의 실체로부터 창조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22] 더 나아가 이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아주 구체적인 언급까지를 합니다: "마리아는 어떠한 인간 어머니가 자기 자식에게 기여하는 바(난자, 유전자, 보통 수정체의 성장과 정상적인 분만)를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기여하였다."[23] 이런 맥클라우드의 생각은 그 이전에 이미 "자기의 태의 열매와 관련하여 다른 어머니들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것이라도 마리아에게 부인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말했던 죤 피어슨(John Pearson)의 생각을 유지하면서 발전시키는 것인 것이다.[24] 가장 초자연적인 일의 성취가 이렇게 자연과의 묘한 조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면, 다른 일이 이루어지는 일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자연과 초자연의 절묘한 조화는 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보도 이후에 그의 인성의 성장과(눅 2:40) 이 땅의 부모님들(복수!)에게 순종하신 일(눅 2:51) 등을 언급하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납니다.[2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초자연의 독자적인 행사만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잘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에서는 초자연은 대부분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요셉을 양부로 하여 나셨다는 것은 마리아와 요셉의 족보가 모두 다 다윗 왕가의 족보라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과거에 영원하신 왕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나타날 것이고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하신 약속에 (예를 들자면, 삼하 7: 13-16) 따라서, 그 태어난 아이가 그 '다윗의 자손(씨)'임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이런 역할을 감당할 이들을 미리 준비하셔서 그리스도의 인간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26]


4. 이 사실들의 우리에게 미치는 유익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줍니까? 이 질문은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36문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수태와 탄생으로부터 당신은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이에 대해서 요리 문답은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라는 것과 그의 순수하심과 온전한 거룩하심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타고난 (내가 그 안에서 난) 나의 죄를 덮으시는 유익을 얻습니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대답이요, 동시에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는 목회적인 대답이기도 합니다. 영원하신 성자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무흠하게 취하셨기에 그는 인성과 신성을 한 인격에 가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고, 그가 취하신 인간성은 참으로 순수하고 거룩한 것이기에 그로서 그가 이루신 구속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실 수 있다는 이 고백은 함께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정확한 이해와 큰 위로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우리의 유일하신 중보자의 존재와 그의 사역에 대한 장엄한 진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생각할 때에도 우리의 생각의 지침이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어 구속을 이루시고 율법과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성취하셔서 (1) 이 세상에 본래 아담이 이르러 소유해야 했던 그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영생을 주심) 본래의 인간성의 본래적 구현을 이루도록 하시고, (2) 신약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세워지도록, 그리하여 (3) 그의 거룩한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워 발전시켜 결국 극치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27] 이 고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시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를 바라보는 우리도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와 기적을 놀라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주님을 높이고 그의 능력과 영광을 찬양하며, 그가 이루신 이 놀라운 일이 지향하는 바 구속과 우리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삶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인간성을 취하셔서 이루신 십자가에서의 구속에 근거하여 살고, 우리의 인간성을 취하여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본받아 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註)-------------------------------------------------------------

[1] 1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54), 졸역, {성경신학} (개정판;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2000), 354.

[2] 2 Emil Brunner, The Mediator (London: Lutterworth Press, 1934), 325.

[3] 3 Emil Brunner, Hans Küng, W. Pannenberg, Edward Schillebeeckx, William Barclay, John Robinson 등을 포함한 현대 신학에서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적대감에 대해서는 Donald Macleod, The Person of Christ (Leicester: IVP, 1998), 김재영 역, {그리스도의 위격} (서울: IVP, 2001), 28-29; David Wells, The Person of Christ (Illinois, Westchester: Crossway Books, 1984), 졸역, {기독론: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서울: 엠마오, 1994), 87을 보라.

동정녀 탄생 기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더 광범위하다. 예를 들어서 폰 캄펜하우젠은 마태의 족보가 그 자신의 동정녀 탄생 제시와 일관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H. von Campenhausen, The Virgin Birth in the Theology of the Ancient Church, E.T., 1964, 10ff.). 그런가 하면 테일러는 Proto-Luke 가정에 근거해서 누가 복음 1, 2장은 본래의 복음서에 속하지 않는 후대의 삽입 부분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Vincent Taylor, Behind the Third Gospel [1926], 164ff.). 그리고 케어드는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이야기가 희랍 세계에 전달되었을 때 일어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G. B. Caird, Luke [1968], 31). 불트만도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유대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R.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291ff.). 그의 제자인 콘첼만은 이를 다신론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교에서의 신현과 성육신 이야기들은 언급하고 있다(Conzel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78).

[4] 4 구속자에 대한 계시의 진전과 이런 대망에 대한 좋은 설명으로 Anthoney A. Hoekema, The Bible and the Future (Grand Rapids: Eerdmans, 1979), 제 1 장과 Francis Nigel Lee, The Origin and Destiny of Man, 졸역, {성경에서 본 인간} (서울: 엠마오, 1983), 제 3 장을 보라.

구속자에 대한 계시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보스의 다음 지적을 유의하라: "구약 계시는 개인적 메시아 개념에로 점진적으로 접근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Vos, {성경신학}, 68).

[5] 5 이 말로서 누가는 예수께서 그의 법적인 아버지가 되는 요셉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이다. Cf. I Howard Marshall, Commentary on Luke, NIGTC (Exeter: Paternoster Press; Grand Rapids: Eerdmans, 1978), 64.

[6] 6 대개 당시의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13세 정도의 소녀들이 정혼하여 그 때부터는 법적으로 혼인한 자로 여겨지고, 대개 1년 후에 신랑의 집으로 취하여 그 때부터 혼인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고 한다. 신랑의 집으로 취하여 지기 전의 성적인 관계는 혼인 규례를 깨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와 같은 것들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이나 John Nolland는 이에 대한 문헌적 정보를 잘 소개하고 있다. Cf. John Nolland, Luke 1- 9:20, Word Biblical Commentary 35A (Waco, Texas: Word Books, 1989), 49. 또한 Marshall, 64; Joachim Jeremias, Jerusalem in the Time of Jesus (London, 1969), 364-67의 정보도 보라. 그러나 Marshall이 잘 말하고 있듯이(64) 이 당시 마리아가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고 하는 것이 옳다.

[7] 7 눅 1:27과 마 1:23의 강조를 보라.

[8] 8 이에 대한 가장 높은 이해의 하나로 E. E. Ellis, Luke, New Century Bible (1968), 53을 보라: "이 칭호는 동정녀의 아이라는 것 이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독특하고 신비한 하나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9] 9 "클레떼세타이"(ՊՋՇՈԾՓՅՔՁՉ)라는 이 수동태는 소위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의 한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Cf. Marshall, 67. 그리고 이는 단순히 수양론적인 표현으로 보기보다는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선지자"임에 비해서, 나실바 거룩한 자의 독특하고 지고한 성격을 잘 드러내고자 하는 표현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도 Marshall, 67f.을 보라.

[10] 10 이상 몇 문장에 대해서 Marshall, 70f.를 참조하라.

[11] 11 Cf. Marshall, 65.

[12] 12 이 점을 지적하는 같은 논의로 Donald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Leicester: IVP, 1981), 366을 보라. 그는 누가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수태라는 단순한 진술뿐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주어진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도 참된 것으로 여겼다고 강조한다(366f.). 동정녀 탄생의 사실성에 대한 강한 주장의 하나로 Marshall, 76f.도 보라. 이전의 J. Orr (The Virgin Birth of Christ [London, 1907])와 J. G. Machen (The Virgin Birth of Christ {London, 1930])의 고전적인 저술도 보라.

[13] 13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367.

[14] 14 Guthrie, 367.

[15] 15 성령으로 잉태된 사실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천사의 고지로 자신이 알게 된 이 사실을 마리아가 요셉에게 말하였으리라는 좋은 논의로 김홍전, {그리스도께서 오심} (서울: 성약, 19943), 119, 159f., 187-90 등을 보라.

[16] 16 이 점에 대한 좋은 강조로 Nolland, 49.

[17] 17 Pace 김홍전. Cf. Marshall, 65, 66: "강조점은 인간의 수용성보다는 하나님의 선택에 있는 것이다".

[18] 18 요셉의 양부 역할에 대해서는 졸고, "예수라고 불리우시는 하나님의 아들", {현대 종교} 325 (2001년 9월), 43과 그에 인용된 다른 문헌들을 보라. 또한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367, n. 473도 보라.

[19] 19 Cf. Douglas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6), 479.

[20] 20 John Murray, Rom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59), 280.

[21] 21 Moo, 479f.

[22] 22 MacLeod, 50.

[23] 23 Ibid., 50.

[24] 24 John Pearson, Exposition of the Creed (6th edition, Oxford: 1877), 297, cited in Macleod, 50.

[25] 25 이 점에 대한 같은 관찰과 지적으로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367을 보라.

[26] 26 때로는 인간 요셉과 마리아의 숭고한 덕을 너무 높인다는 면에서 조금 지나치긴 하지만 주께서 이들을 잘 준비하셨음에 대한 논의로 김홍전, {그리스도께서 오심}, 106f., 113, 123, 143, 150-53 등을 보라.

[27] 27 이 점들에 대한 좋은 목회적 강설로 김홍전, {그리스도께서 오심}, 제2강, 3강, 8강, 11강,, 12강을 보라. 특히 11강이 전체를 잘 요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생명나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