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9): 그리스도의 칭호(4): "주" | 본문: 고전 6: 19, 20; 마 7: 20-29
이승구 교수
이번에는 그리스도께 적용된 칭호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주"(the Lord, ץ Պ՝ՑՉՏՒ)라는 칭호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는 스타우퍼가 "가장 풍성한 기독론적 칭호"라고 부른 바 있는 매우 중요한 칭호입니다.[1] 신약 성경에서는 다양한 상황 가운데서 다양한 의미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일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 "주님"(Պ՝ՑՉՏՒ)이라는 칭호가 사용되던 다양한 의미를 반영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주님"이라는 칭호는 단일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이를 알기 위해 먼저 "주님"이라는 호칭의 일반적인 의미부터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주님"이라는 칭호의 일반적 용례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정중한 표현을 하고자 할 때(a title of courtesy) "주님"(Պ՝ՑՉՏՒ)이라는 호칭이 사용된 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부를 때도 "주여"(Ԫ՝ՑՉՅ)라고 부른 일이 있으며(마 27:63), 또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동산 지기로 잘못 알고 부를 때도 그를 "주"라고 부른 일이 있습니다(요 20:15). 이처럼 신약 성경 시대 당대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이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그 폭도 매우 다양했다고 여겨집니다. 로마 황제도 이런 의미에서 "주"(Պ՝ՑՉՏՒ)라고 불려졌습니다.[2] 예를 들자면, 네로가 "세상의 주"(Lord of the World)로, 도미티안이 "우리 주와 신"(our Lord and God)으로 언급된 일이 있었습니다.[3] 또한 노예들의 주인도 "주님"(Պ՝ՑՉՏՒ)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제자들은 그 선생님을 "주님"(Պ՝ՑՉՏՒ)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지극히 존경하며 존대하여 말할 때도 이 칭호를 사용한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가 그 남편을 이런 칭호를 사용하여 부른 예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나타납니다(벧전 3:6). 그러므로 "주"라는 칭호는 가정에서도 사용된 칭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해서도 그를 그저 선생님이라는 의미로 부를 때에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표현한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유대인의 "관원"(눅 18:18)인 부자 "청년"은(마 19:16)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고 있습니다(막 10:17//눅 18:18).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선생님이여"라는 말을 유지합니다(막 10:20). 일반적으로 "선생님"이라는 말이 예수님께 적용된 경우에는 "주님"이라고 즐겨 표현하는 마태복음서에서도 이 청년의 말은 그대로 "선생님이여"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마 19:16). 물론 우리가 "주님"(Պ՝ՑՉՏՒ)이라고 부르는 예수님께 나아와 가르되 '선생님이여'라고 했다는 시사를 주면서 말입니다(마 19:16). 이 경우에는 이 청년이 예수님을 매우 존숭하지만("달려와서 끓어 앉아 묻자오되"- 막 10:17) 그는 예수님을 그저 인간적 수준의 선생님으로만 생각하면서 질문하고 대화한 것으로 시사되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선생님"이라는 말은 "크다"(great)라는 히브리어 "랍"(rab)에서 온 "나의 크신 분"이란 뜻의 '랍비'(Rabbi)의 번역서로서 대개 주전 2세기부터 선생님들에 대해 "랍"(rab)이란 말을 사용했고, 따라서 선생님에 대한 호칭이 "나의 선생님"이란 뜻의 "랍비"가 되었다가 후에 "나의"라는 접미사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랍비"가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에 대한 공식 명칭이 되었다고 합니다.[4] 성경에서는 이것이 그저 하나님의 뜻을 잘 가르치시는 선생님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38과 20:16에서는 이 용어를 이방 독자들을 위해 친절히 설명해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의 표현들을 비교해 보면 같은 사건에 대해서 어떤 복음서에서는 "선생님이여"라고 표현한 것을 다른 복음서에서는 "주여"라고 표현한 곳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귀신들려 말못하고 간질병의 질환을 나타내던 아이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 사건에 대한 보도에서 마가는 그 아버지가 예수님께 "선생님(ԤՉՄԼՓՊՁՋՅ)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당신님께, ՐՑשՒ ՓԽ] 데려 왔나이다"라고 하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막 9:18). 그런데 같은 사건을 보도하면서 마태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주여", 즉 "쿠리에"(Ԫ՝ՑՉՅ)라는 호칭을 계속 사용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마 17:15). 이는 복음서 기자들의 차이로 설명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는 수준에서 말할 때도 "주님"이라는 호칭을 쓴 예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의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같은 맥락에서 주와 선생님이라는 말이 호환적으로 사용된 예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주 높은 의미의 "주" 칭호를 예수님께 돌렸는지, 아니면 그저 일반적인 수중에서 "주"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인지가 모호한 것입니다. 이처럼 공관복음서에 있어서는 상당히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예수님을 "주님"(Պ՝ՑՉՏՒ)이라고 부른 그 의미가 모호하게 나타납니다. 즉,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게 높임을 표현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이 칭호가 사용되었는지가 모호하다는 것입니다.[5] 그러므로 예수님께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저 예수님을 인간적 수준의 선생님으로 말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가 나를 선생(ץ ՄՉՄԼՓՊՁՋՏՒ)이라 또는 주(ץ Պ՝ՑՉՏՒ)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3:13, 14). 이럴 때에는 예수님의 의도 중에 이 둘을 거의 동일시하면서 언급하고 계신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나 서신서에 예수님을 그저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분명히 아주 높은 의미에서 "주"(Պ՝ՑՉՏՒ)로 부른 예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들이 이 논의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됩니다.
2.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의 가장 높은 의미
가장 높은 의미로 예수님을 "주님"(Պ՝ՑՉՏՒ)이라고 부를 때는 부활로부터 높아지신 구주에 대한 특별 명칭으로 이 칭호가 사용된 때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행 2:36). 도마도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께 대해서 그가 진정 부활하셨음을 믿고서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요 20:28). 이는 모두가 신적인 칭호들(titles of deity)입니다.[6] 당대의 유대인들은 이를 신성 모독으로 생각했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 도마는 아무 거리낌없이 가장 신적인 칭호를 주님께 돌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는 참으로 죽은 자와 산 자의 "주님"이십니다(롬 14:9). 부활과 승천으로 높여지신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것입니다(빌 2:9).[7]
예수님을 이렇게 높은 의미로 부르던 "주"라는 칭호는 당대에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일컬어 "나의 주"(adonai)라고 부르던 것과 연관된 것입니다. 이를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던 관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말 성경에 "여호와"로 음역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명칭을 부르는 일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 칭호가 나타날 때마다 "나의 주님"(adonai)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피조계와 관련하여 주권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분이심을 지칭하기 위해 하나님께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일이 일반화되었습니다(마 1:20, 마 11:25, 눅 4:18 참조). 그래서 웰즈가 잘 지적하듯이, "70인 경에서는 6,000번 이상이나 '쿠리오스'(Պ՝ՑՉՏՒ)가 YHWH에 대한 대치어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8]
그렇기에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것의 가장 높은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이후의 주님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히 이런 뜻의 "주" 칭호가 사용되었음을 확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이 "주님"이라는 명칭은, 보스가 잘 지적하는 바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셔서 들어가신 새로운 수준의 메시아적 주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여지신 그리스도는 아주 뛰어나신 주님(the Lord)이셨던 것이다".[9]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시하는 의도로 이 "쿠리오스"라는 칭호를 예수님께 적용하여 썼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사용하였던 어귀들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인용하는 일도 흔히 발생하고 있습니다(마 3:3, 23:39; 막 1:3; 롬 10:13, 14:11; 빌 2:11f.; 히 1:10; 벧전 2:3, 3:15 등 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을 이런 높은 의미에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며(행 7:59, 60; 고전 16:22),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행 9:42, 11:24). 또한 그런 주님으로 그는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시며(계 19:16), 특히 교회의 주님이십니다. 그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주님으로 불리신 분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섭리자요 주재자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뜻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고,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고백은 최초의 신앙 고백 형식의 하나가 되었습니다(행 8:16, 19:5; 고전 12:3 참조). 이 때 그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을 주님으로 불렀던 그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눅 1:43 참조). 그러므로 사도 시대의 교회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이런 신적인 의미에서 "주"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일반화된 명칭이 이것을 잘 드러내어 줍니다(행 1:21; 4:33; 7:59; 8:16; 11:17; 15:11, 26; 20:21, 24, 35; 28:31). 예를 들어, 마가복음의 뒷부분에서는 "주 예수께서 ...... 하늘로 올리우사"라고 말하고(막 16:19) 사도들의 사역에 대해 "주께서 함께 역사하셨다"고 합니다(막 16:20).[11]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라고 말합니다(눅 24:3).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을 이런 의미에서 "주"라고 부르며 주께서 하신 일을 진술해 가는 것은, 거뜨리가 표현하는 대로, "즉각적이고 거의 자동적이고 ...... 자연스러운 것입니다."[12] 또한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께서 임하시느니라(Marana tha).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 할지어다"(고전 16:22-24). 이 말씀은 예수님을 "우리 주"라고 부르던 아람어 표현(mãranã)이[13] 그대로 사용되면서 주의 재림에 대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는 "주권자로서 그의 현재 지위에 대한 외침도" 같이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14]
이처럼 초대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면서 그를 "주"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웰즈의 다음 요약을 유념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말하는 것은 그를 여호와와 존재론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이고, 그에게 오직 하나님에게만 옳게 속하는 경배를 돌리는 것이고, 그가 교회와 피조계에서 주권적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를 세상에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내신 분으로 보는 것이다."[15]
3.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 중에 주님으로 불린 일들과 그 의미
그런데 예수님을 이런 높고 지극히 고귀한 의미에서 "주님"으로 부른 일들은 그가 부활하신 뒤에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서부터 나타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고, 많은 이들은 이런 생각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여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자연스럽게 읽는 이들은 그가 지상 생활을 하실 때도 때때로 이런 높은 의미의 주님이심을 시사하시고, 그런 칭호를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는 몇 가지 예만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말을 따라 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은 후 베드로가 보인 반응과 그의 말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여기엔 하나님 앞에 선 죄인 된 인간의 반응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이는 그저 고귀하신 종교적 선생님이나, 선지자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 사용된 "주여"라는 말도 고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그 칭호의 최고의 신적인 취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16]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는 "기적으로 시사된 예수님의 신성에 대조되어 베드로는 그가 죄인이며 따라서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자격이 없다고 느낀 것"이라고 말하는 메릴 씨 테니(Merrill C. Tenney)의 요약적 진술은 매우 옳고도 적절한 것입니다.[17]
둘째로, 예수님께서 시편 110편의 의미를 가지고 메시아의 성경에 대해서 사람들과 논쟁하신 곳에서도(마 22:41f.//막 12:36f.//눅 20:42-44)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언급된 메시아가 시편에서 다윗의 "주"라고 언급되어 있음을 친히 지적하신 것이 드러납니다.[18] 그렇게 다윗이 '나의 주'라고 언급하고 있는 그 표현은, 리펠드가 잘 지적하듯이, "위엄감을 전달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대체어로 자주 사용된 것"입니다.[19]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이 논의의 주된 취지는 ......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에 서기관들이 부여한 현세 중심적 개념에 항거하여, 메시아는 초월적 주권의 위치에 있음을 분명히 하는 데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보스(Vos)의 논의는[20] 매우 옳고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실 때에 하신 말씀인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에서의 "주"의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마 21:3//막 11:3//눅 19:31, 34). "그의 임자들"(Տב Պ՝ՑՉՏՉ Ձ״ՔՏ)을 언급하는 누가복음 19:33의 빛에서 보면 누가복음 19:31과 34의 "쿠리오스"(Պ՝ՑՉՏՒ)는 그 나귀의 소유주라는 뜻이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을 지칭하되,[21] 그를 좀더 포괄적인 의미의 "주인"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입니다.[22] 그러므로 이 표현에는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 할 수 있는 분으로서, 또한 포괄적인 주권을 가진 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의도가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23] 그렇다면 이 경우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면서 "주"라는 칭호를 사용한 예입니다.[24]
넷째로, 산상수훈에서 "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시는 것(마 7:21)에는[25] 최소한으로 말해도 이 "쿠리오스"(Պ՝ՑՉՏՒ) 칭호가 정중한 표현 이상이라는 것이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26]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이 이 칭호에 가장 깊은 의미를 부여할 것을 미리 준비하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카슨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7]
마지막으로, 주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한 것에도(눅 2:11) 분명히 신적인 주되심에 대한 함의가 전달되는 것입니다.[28] 모리스는 이 구절과 관련해서 여호와를 지칭하는 용어까지를 사용해서 그리스도 주라고 한 것은 아기를 최고의 가능한 용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29]
그러므로 부활 이전에는 예수님께 지고한 의미의 '쿠리오스' 칭호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드물게나마 예수님의 신적 주님 되심에 대한 시사와 인식과 이를 인정하는 표현들과 이에 대한 시인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30] 그는 제자들을 떠나 그들을 위한 사역을 하러 가시시기 전에도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31]
4.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위치
이렇게 가장 높은 의미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자신들을 그 주님의 "노예"라고 기꺼이 인정하는(willing bond-slaves)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그 주님에게 속하여 그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활동하며, 자신들의 삶을 살아 나가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자의식을 표현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까? 그가 "금이나 은으로가 아니라, 그의 보배로운 피로써 우리를 죄와 마귀의 모든 세력에서 구속하시고 사주셔서 그분 자신의 것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34 문답). 바울은 이를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고전 6:19,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구속함으로 받은 자들로서 우리의 존재 전체를 사용해서 우리 주님의 뜻을 잘 행해 가야 합니다.[32]
그러한 우리는 이 높으신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며(롬 12:11), 자신들의 삶을 그에게 합당하게 정돈해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11:27).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님의 뜻을 아는 일이 아주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 분의 뜻을 잘 살펴서 그 뜻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그를 잘 받들어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이심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그의 진정한 종인가를 깊이 있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 계신 주님과 깊이 있는 교제를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과 고귀하고도 깊은 교제를 가지고 있는 주의 종들인가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그 그렇지 않음이 우리 생애 끝까지 계속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그 일을 헛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헛되게 "주여"라고 하는 이들을 향하여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 엄중한 경고를 우리는 귀기울여 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그의 뜻을 무시하고, 그의 말을 행하지 않는 이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마 7:23), "어리석은 사람"(마 7:26)인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주님은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엄중하게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자들이고, 어떠한 자들이 될 것입니까? 헛되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는 이들입니까, 아니면 진정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진정한 예수의 종들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매순간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Wminb@hitel.net
(홈 페이지: www.my.netian.com/~wminb)
**********(주석)**************************************************************
1 Cf. E. Stauffer, New Testament Theology, E.T. (London: SCM Press, 1955), 114.
2 황제 숭배에서 이 "쿠리오스"(Պ՝ՑՉՏՒ) 용어의 사용에 대한 논의로 A. Deissmann, Light from the Ancient East, E.T. 1927, 338ff.을 보라.
3 David F. Wells, The Person of Christ (Illinois, Westchester: Crossway Books, 1984), 이승구 옮김, {기독론} (서울: 엠마오, 1994), 161.
4 F. Foulkes, "Rabbi, Rabboni," in New Bible Dictionary, eds., J. D. Douglas et al., 2nd Edition (Leicester: IVP, 1982), 1006f.
5 그래서 모울 같은 이는 호격으로 "쿠리에"(Ԫ՝ՑՉՅ)가 나타난 경우는 기독론적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제쳐놓기까지 한다(C. F. D. Moule, The Origin of Christolog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 35f.). 비록 모울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웰즈도 같은 입장에서 논의한다(Wells, 160). 그러나 우리가 논의할 바와 같이 이는 좀 지나친 경계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6 Merrill C. Tenney, "The Gospel of John,"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9 (Grand Rapids: Zondervan, 1981), 195.
7 그것이 바로 "주"(Պ՝ՑՉՏՒ)라는 칭호를 뜻한다는 논의로 다음을 보라: F. F. Bruce, The Acts of the Apostles, The Greek Text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51), 96.
8 Wells, 160.
9 Geerhardus Vos, The Self-disclosure of Jesus (Phi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78), 이승구 역, {예수의 자기 계시} (서울: 엠마오, 1986), 132, 136.
10 용례를 잘 살펴 가면서 이 점을 잘 지적한 논의로 Vos, 146을 보라.
11 고대의 권위 있는 사본들에는 한글 개역 성경의 난하주에서 명시하고 있듯이 막 16:9-20의 [ ]내 구절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영감 여부는 논란거리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을 "주 예수"라고 부르던 초대 교회의 언어 습관을 잘 예증해 주는 것이다.
12 Guthrie, 294.
13 이에 대한 시사로 Bruce, Acts, Greek Commentary, 96을 보라.
14 Wells, 161. 그는 이 점을 강조하는 Matthew Black, "The Maranatha Invocation and Jude 14, 15 (1 Enoch 1:9)," in Christ and Spirit in the New Testa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4), 188-98도 언급하고 있다.
15 Wells, 164f.
16 Cf. Vos, 147. 또한 John Nolland, Luke 1-9:20, Word Biblical Commentary 35 A (Dallas, Texas: Word Books, 1989), 222: "여기서 '쿠리에'는 아마도 누가 복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Sir의 뜻이 아니고, 누가복음 1:43과 2:11의 '지고한 주' - 그리고 누가가 예수님을 '주'로 지시하는 기사적 지칭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또한 이사야 6장과 이 장면을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Walter L. Liefeld, "Luke,"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8 (Grand Rapids: Zondervan, 1984), 877도 보라. 또 이와 비슷한 시사를 보이는 Leon Morris, Luke,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Revised Edition (Leicester: IVP, 1988), 125도 보라.
그러나 일반적인 말보다는 좀더 깊은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 신성과 같은 엄밀한 함의가 아직 있던 것은 아니라고 지나가는 말로 언급하는 I Howard Marshall, Commentary on Luke, NIGTC (Grand Rapids: Eerdmans, 1978), 204와 대조해 보라. 그는 대체로 지고한 의미의 "주"라는 의미는 부활 이후에로 돌리려고 하는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 보인다. 마샬의 이런 소극적 태도와 양보는 좀 의아스러운 것이다.
17 Merrill C. Tenney, "Luke," in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Chicago: Moody Press, 1962), 1037.
18 이 점에 대한 좋은 논의로 Guthrie, 292f.; Vos, 139를 보라.
19 Liefeld, "Luke," in Expositor's Bible Commentary, 8:1018.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이 구절과 시편 110:1로부터 이끌어 내어 강조하는 해석으로 J. Knox Chamblin, "Matthew," in Evangelical Commentary on the Bible, ed. Walter A. Elwell (Grand Rapids: Baker, 1989), 750; Thomas R. Schreiner, "Luke," in Evangelical Commentary on the Bible, 834; Donald W. Burdick, "Mark," in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1015; 또한 시사적인 Morris, Luke, Tyndale NTC, 320; R. Alan Cole, Mark, Tyndale NTC, Revised Edition (Leicester: IVP, 1989), 269 등을 보라.
20 Vos, 139.
21 이 점을 유의하면서 제시하는 주해로 Walter W. Wessel, "Mark," in Expositor's Bible Commentary, 8: 724; Marshall, "Luke," NBC, 917을 보라.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레온 모리스는 아마도 이는 이미 준비된 암호(password)로 작용해서 이런 말을 들으면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되도록 되었을 것이라는 좀 합리주의적 해석을 취한다(Morris, Luke, Tyndale NTC, 304;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520). 모리스와 비슷한 해석으로 Tenney, "Luke," in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1061; Schreiner, "Luke," in Evangelical Commentary on the Bible, 832를 보라.
22 앞선 요점을 지적하면서 이 점까지를 언급하는 논의로 Liefeld, "Luke," in Expositor's Bible Commentary, 8:1011을 보라. 마샬은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이 구절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존재하고 있었는지가 불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Marshall, Luke, NIGTC, 713).
23 이를 잘 강조하는 논의로 Liefeld, "Luke," in Expositor's Bible Commentary, 8:1011. 이런 점에 대한 강조와 더 나아가서 그 나귀의 임자에게 "주님"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의 함의까지를 논하는 Vos, 138f.을 보라. 비슷하게 나아가는 C. E. Graham Swift, "Mark," in NBC, 875도 보라.
24 이를 시사하는 해석들로 다음을 보라 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8:437;
25 이 말의 진정성에 대한 논의와 변증으로 D. A. Carson, "Matthew,"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8 (Grand Rapids: Zondervan, 1984), 192를 보라.
26 Cf. Guthrie, 292; Carson, 192. 그 보다 좀더 강하게 보는 입장으로 Vos, 147을 보라.
27 Carson, "Matthew," 192.
28 이 점에 대한 좋은 강조로 Donald Guthrie, New Testament Theology (Leicester: IVP, 1981), 292; Vos, 140을 보라.
29 Morris, Luke,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Revised Edition (Leicester: IVP, 1988), 94.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지상 생애 기간에 대해서는 가장 높은 의미의 "주" 개념을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마샬도 여기서는 이는 "메시아와 주"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배후에는 "'메시아-여호와'로 여겨질 구주 개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Marshall, Luke, NIGTC, 110).
30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존 기간이나 예루살렘 모교회는 예수님께 대해 '쿠리오스' 칭호를 사용한 일이 없고 바울 이전의 헬레니즘 교회에서 당대의 밀의 종교들의 영향 가운데서 기독교 밀의 종교의 대상자를 '쿠리오스'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부세트(W. Bousset, Kyrios Christos, [1913], trans. John Seely [Nashville, 1970])의 논의는 옳지 않은 것임이 드러난다.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역시 Vos, 154-57을 보라.
31 이 점에 대한 좋은 강조로 Vos, 142를 보라. 보스는 이를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집주인'(ץ Պ՝ՑՉՏՒ ՔՇՒ ՏדՊԿՁՒ 또는 ץ ՏדՊՏՄՅՓՐ՜ՔՇՒ)으로 비유하시면서 비유를 베풀고 계신 것과 연관시키고 있다(마 24:45-51, 25:14-30, 막 13:34-37; 눅 12:35-38, 41-46; 눅 13: 25-28). 이것은 이런 비유들을 예수님의 주님 되심과 연관시키는 매우 시사적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32 이 본문의 의미에 대한 논의로 이승구, {진정한 기독교적 위로} (서울: 여수룬, 1998), 26-3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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