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 13: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4): "십자가 사건의 유익"
이승구 교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본문: 골로새서 3장 9절-10절
우리는 지난번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결국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과 저주를 그가 당하신 것이라는 논의를 했습니다. 이것을 좀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표현한다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의 죽음"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00년전에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가 마땅히 받고 당할 형벌을 다 받고 죽으셨을 때에 아주 신비하게도 우리의 옛사람이 그 사건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신비한 하나됨'(unio mistica, mystical union) 가운데서 발생한 것입니다.[1]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과 오랜 시간적 거리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놀라운 일이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 가운데서 옛사람의 죽음이라는 이 사실과 그 의미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리 '옛사람'의 죽음이란 사실 자체
우리의 '옛사람'이란 말로써 우리는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살던 존재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존재가 되기 "이전의 존재와 그 존재 방식 전체"를 지칭하여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하나님과 관련 없는 사람이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입니다(엡 4:22). 그런데 성경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옛사람의 죽음은 십자가와 관련하여 각 개인에게서 오직 한 번 발생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옛사람이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다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9-10). 이 구절에 의하면 우리는 이미 옛사람과 그 옛사람에게 속하는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것입니다. 즉,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관련하여 일어난 영적이고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된 것입니다(롬 6:8, 4). 즉,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고, 새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역 성경의 번역 때문에 우리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우리를 오도(誤導)하기 쉬운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말씀도 지금까지의 논의의 빛에서 새롭게 해석하며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는 여기 나오는 동사를 명령형으로 보고서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명령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부정사를 명령형으로 사용한 예가 있으므로(예를 들자면, 롬 12:15; 빌 3:16) 이런 번역이 아주 있을 수 없는 번역은 아닙니다만, (1) 22절에는 부정사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정사가 목적격과 함께 나오고 있기 때문에 명령형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가 있으며[2], (2) 또한 이렇게 번역하면 우리는 항상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야 하든지,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된 후 적어도 한 번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여 성경의 전체 가르침과 괴리를 가져오는 생각을 하도록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문제 속으로 들어가는 해석을 하기보다는 다른 설명의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법적으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의 또 하나는 이를 설명의 부정사로 보고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설명의 부정사로 보고서 앞의 주동사와 연결하여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옮기면 전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해석을 할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3] 이를 생각하면서 프란시스 폴크스(Francis Foulkes)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영어 개정역(RSV)에서 22, 23, 24절의 시작에 있는 명령형은 희랍어에서는 부정사들이고, 22-24절은 21절과 연관되도록 구성되어 다음과 같이 옮겨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는 너희가 [옛사람을] 벗었고,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입었다는 것이다.'"[4] 그리고 이미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분명히 말하는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골로새서 3장 9-11절의 병행 구절의 말씀과 비교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5]
이런 주해를 잘 드러내고 강조한 이들의 선구자로 우리는 죤 머레이(John Murray)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6] 그는 이 부정사를 결과의 부정사(the infinitive of result)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안토니 후크마도, 머레이의 주해를 따르면서, 이 문장 속에 있는 세 가지 부정사(즉, (1) "벗어버리다"는 뜻의 "아포떼스따이"[֢ՐՏՈԾՓՈՁՉ], (2) "새롭게 되다"는 뜻의 '아나네우스따이'[֢ՍՁՍՅՏՓՈՁՉ], 그리고 (3) "입다"는 뜻의 "엔두사스따이"[ִՍՄ՝ՓՁՓՈՁՉ]를) 많은 영역본이나 한글 개역과 같이 명령형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머레이가 제시하는 것처럼, 결과를 나타내는 부정사 혹은 설명형의 부정사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크마는 이 세 부정사 모두가 주동사인 21절의 "너희가 가르침을 받았다"(ԽՄՉՄՁՈՇՔՅ)에 의존한다고 설명합니다.[7] 따라서 이 구절은 NIV와 같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새롭게 되어 ...... 새사람을 입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원론}에서는 이 문제를 좀더 길게 논의하면서 왜 머레이와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옳은지를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8] 이는 결국 신자 안에 새사람과 옛 사람이 현존하고 있어서 싸움하고 있다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의 견해에[9] 반하며, 이를 주해를 통해 교정하는 것입니다.[10]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함을 받은 새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일입니까! 이 일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유익을 주는 것일까요?
2. 옛사람의 죽음의 소극적 유익
먼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옛사람이 죽었다는 그 사실은 소극적으로는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는 죄의 형벌과 관계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과 죄의 세력과 관계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씩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의 옛사람은 죄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죽어야만 하는 형벌로서의 그 죽음을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의 가장 큰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와 함께 죽은 우리 옛사람의 죽음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다 내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옛사람의 죽음에 어떤 공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사하는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만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새사람인 우리는 더 이상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옛사람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그리스도를 믿는 새사람은 죄에 대한 형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결국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을 진정으로 믿지 않는 것이고, 그 일에서 발생한 옛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가 어떤 일에 대해서 혹시 하나님의 벌이 임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나,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또 그런 저주의 위협 때문에 바른 생각과 바른 길 가는 것을 못하고 하는 것은 모두 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을 온전히 믿지 아니하는 불신앙적인 처사입니다.
둘째로, 옛사람의 죽음과 함께 "육의 소욕"(ִՐՉՈՕՌԿՁ ՔׄՒ ՓՁՑՊ՜Ւ)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속에서 일어난 옛사람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만이 아니라, 죄의 지배(the reign of sin)로부터도 원칙적으로 해방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사람은 원칙상(in principle)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여 우리로 죄를 짖지 않을 수 없게 하던 일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신약 성경이 때때로 "육" 또는 "육체"(ՓԼՑՎ)라고 표현하는 부패한 인간성의 잔재가 새사람 안에도 남아 있어서 우리가 끊임없이 이 육[부패한 인간성]과의 투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전투하는 그리스도인이지, 결코 죄를 전혀 범하지 아니하는 승리한 그리스도인, 영광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성도는 성령께 의존하면서 항상 부패한 인간성의 죄의 소욕과 투쟁하여 가고, 때때로 실패하여 죄를 범할지라도 항상 죄 중에 있거나 즐거이 죄를 짖지는 않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요한은 "그[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Տ״ ֠ՌՁՑՔԼՍՅՉ)"(요일 3:6), 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짖지 아니하나니(Տ״ Մ՝ՍՁՔՁՉ֠ՌՁՑՔԼՍՅՉ)"(요일 3:9), 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니니"(요일 5:18)와 같이 강력하게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즉 중생한 새사람은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식의 완전주의를 한번도 시사하지 않는 것입니다.[11]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단적인 예를 들어 말하자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짖지 아니하나니"(요일 3:9)라는 그 말을 하는 요한이 바로 요한 일서 초두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거하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하면서 우리의 죄 고백을 권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현세에서 우리가 죄가 전혀 없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여기 현재형으로 "죄를 짖지 않는다"라고 쓴 것이 습성적 상태(habitual state) 또는 반복되는 행위(repeated action)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12] 그렇다면 요한이 말하는 말의 본의는 결국 "진정한 성도는 항상 죄 가운데 거할 수는 없다." "죄를 죄로 알면서 거기 계속 머물러 있는 상습적인 죄의 상태 가운데 있을 수 없다", "계속 죄를 지을 수 없다"(cannot continue to sin)는 것을[13]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죄를 지으면 그것을 불법이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며 그것을 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14] 이런 해석이 성경의 일반적 가르침에 가장 일치하는 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15]
다시 한번 더 강조하자면, 성도는 이런 의미에서 원칙적으로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하기 전에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죄와의 투쟁, 육의 악한 소욕과의 투쟁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투쟁에서 때때로 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가 참으로 중생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한 성도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고, 그 승리의 방도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잘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 5:16, 17). 즉,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 성령의 가르침을 따르고,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서 행하되, 성령이 주시는 힘으로 그리하는 것이 우리의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 것만이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승리의 방도입니다.
3. 옛사람의 죽음의 적극적 유익
우리는 이미 새사람의 죄와의 투쟁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이것과 연관해서 좀더 적극적인 유익을 말한다면, 이제 새사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a sacrifice of thanksgiving)로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는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죄를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가 아니고, 자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 그렇게 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힘씀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인(골 3:10) 새사람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는 이제 하나님의 경륜과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서, 그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 자신을 드려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드릴 수 있다는 것도 그러하지만, 우리의 드리는 바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것은 아주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된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야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진정한 의미에서 왕같은 제사장들이 된 것입니다.[16] 루터와 칼빈 등의 개혁자들이 강조한 만인 제사장주의(Universal priesthood of believers)의 근거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 우리의 그 일상을 다 주께 드리고, 그 시간과 노력을 사용해서 주께서 시키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살아 나가는 것이 이렇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산 제사(living sacrifice)를 주께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싸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므로 사실 우리의 애씀과 힘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받음직한 것이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도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합니다(벧전 2:5).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신령한 제사를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ՄՉ֤ ԚՇՓՏ ՑՉՓՔՏ)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희생 제사의 공로에 근거해서만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힘씀과 노력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나 찬송, 그리고 예배도 그 자체가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께 드려 질 수 있는 것이고, 우리의 삶과 매일의 행보도, 또 그것을 대표로 표현해 내는 우리의 헌상 예식도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께 드려 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섬김과 봉사의 삶을 받으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죄인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고, 주를 위해 힘써 드리고 난 후에 우리의 마음은 주께서 이를 그리스도의 공로로 써서 받아 주셨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큰 감사와 감격으로 넘쳐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하고 주께 유익한 일을 하여 드렸다는 공로 의식이 있을 수 있는 여지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께 드리는 삶의 열매는 결국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드신 주님께 대한 감사의 표이므로, 감사의 제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우리를 구원하신 일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효능이나 능력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저 구원받았음을 감사함으로 표현하는 기능을 할뿐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들의 삶에서 항상 이런 감사의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고찰한 바를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43문답은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제43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희생 제사와 죽음에서 우리는 또한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답) 그의 능력으로 우리의 옛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고 장사지낸 바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육의 악한 소욕들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감사의 제사로 그에게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신비한 연합에 대한 좋은 개혁파적 설명들로 다음을 참조하라: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II. i. 1, 2;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447-53; John Murray, Redemption - Accomplished and Applied (Grand Rapids: Eerdmans, 1955), 201-205; Lewis Smedes, Union with Christ (Grand Rapids: Eerdmans, 1983); 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9), Chapter 4.
2 이 점에 대한 지적으로 T. K. Abbott,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Epistles to the Ephesians and to the Colossians, ICC (Edinburgh: T. & T. Clark,, 1897), 136; Andrew T. Lincoln, Ephes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42 (Dallas, Texas: Word Books, 1990), 283을 보라.
그런데 링컨은 다음에 제시하는 머레이나 폴크스 등의 견해를 취하지 않고, 이를 21절의 가르침의 내용에 대한 설명으로 보면서도 그 내용이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고 부정사를 epexegic으로 보면서 해석한다. 그는 명령형의 의미를 어느 정도 생각하는 것이다. (비슷한 해석으로 Francis W. Beare, "Exegesis to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in The Interpreter's Bible [Nashville, Abingdon Press, 1953], 698을 보라).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그런 가르침을 받은 것이므로 내용상 이미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음에 언급할 결과의 부정사로 보고 머레이 등의 해석에 좀더 접근해 가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링컨은 아마도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부루스와 의견을 같이하는 듯하다. 부루스는 골로새서 3:9-10은 이 벗음의 "이미"를 말하고, 에베소서 4:21-24은 "아직 아니"를 함의하는 명령이라고 설명한다(F. F. Bruce, The Epistles to the Colossians, to Philemon, and to the Ephesi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84], 357). 그러나 여기서 "이미"와 "아직 아니"를 찾기보다는 골로새서의 가르침과 일치시킬 수 있는 해석에로 나아가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3 이렇게 22-24절의 말이 다 21절과 연관되게 구성되었다는 것은 20절부터 24절까지가 다 한 문장임을 아는 모든 신약학자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이 한 문장 됨에 대한 지적으로는 C. Leslie Mitton, Ephesians, The New Century Bible Commentary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3; reprinted, Grand Rapids: Eerdmans, 1989), 164, 22-24절과 21절의 연관성에 대한 지적으로는 Francis Foulkes, Ephesians, Revised edition,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IVP & Grand Rapids: Eerdmans, 1989), 137을 보라.
4 Foulkes, Ephesians, 137.
5 이와 비슷하게 골로새서 3:9, 10과의 연관 관계에서 명령형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논의로 John Stott, The Message of Ephesians: God's New Society, BST, 전영근 역 (서울: 기독지혜사, 1986), 219f.를 보라.
6 John Murray, Principles of Conduct (Grand Rapids: Eerdmans, 1957), 214-19.
7 Anthony Hoekema, Created in God's Image (Grand Rapids: Eerdmans, 1986), 26f.
8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9), 209-13.
9 그런 견해들로는 다음을 보라: Herman Bavinck, Magnalia Dei (Kampen: Kok, 1909), 561-62; John Calvin, The Epistle to the Romans and Thessalonians, trans. Ross Mackenzie (Grand Rapids: Eerdmans, 1979); Charles Hodge,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Grand Rapids: Eerdmans, 1950); William Hendriksen, The New Testament Commentary on Ephesians (Grand Rapids: Baker, 1967), 213-24, n. 124; Gordon Girod, The Way of Salvation (Grand Rapids: Baker, 1960), 137-38; Berkhof, Systematic Theology, 533.
10 우리 나라에서는 김광렬 교수가 머레이와 후크마를 따르며 이 점을 강조하고 있고(김광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0), 162), 또한 졸고, "20세기 후반 북미 개혁신학의 동향: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의 특성과 그 기여를 중심으로", {신학지평} 제8집(1998 여름, 가을호): 191-227, 특히 199-200도 보라. 졸저, {성령의 위로와 교회} (서울: 이레서원, 2001), 184f.도 보라. 또한 {교회와 문화}에 실린 김광렬 교수의 책에 대한 필자의 논평도 보라.
11 Cf. B. B. Warfield, Perfectionism (Philadelphia, 1931-32); Berkhof, Systematic Theology, 537-40.
12 Cf. Amos N. Wilder, "Exegesis to the First Epistle of John," in The Interpreter's Bible, vol. 12 [Nashville, Abingdon Press, 1957], 258; Kenneth Grayston, The Johannine Epistles, The New Century Bible Commentary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 Grand Rapids: Eerdmans, 1984), 105: "the habit of sinning";
13 사실 NIV의 번역이 그런 해석을 반영한 것이다: "no one who lives in him keeps on sinning." 또한 이런 설명의 하나로 Glenn W. Barker, "I John,"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2 (Grand Rapids: Zondervan, 1981), 332; John R. W. Stott, The Letters of John, Revised Edition,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IVP, 1998), 127, 130을 보라.
14 Barker, 332.
15 그런데 하월드 마샬은 이점을 기꺼이 인정하면서도 그 보다는 이런 말씀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절대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라는, 그러므로 이는 "용서할만한 과장"(pardonable exaggeration)이라는 해석을 선호하면서 제시한다(I. Howard Marshall, The Epistles of John,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78], 180f., 184). 이는 전통적인 웨슬리의 해석과 다르니, 마샬은 그 어떤 죄도 짖지 아니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것이 우리에게 죄와 상관없는 삶의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전형적 알미니안 해석을 제시한다(182).
16 다음에 언급할 베드로전서 2:5과 관련해서 이 점을 특히 강조한 예로 Wayne Grudem, 1 Peter,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IVP and Grand Rapids: Eerdmans, 1988), 101을 보라. Contra J. H. Eliott, The Elect and the Holy, NovTSup 12 (Leiden: Brill,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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