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에르케고르
(Søren Kierkegaard)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였던 키에르케고르는 1813년 5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루터파에 속한 가정의 일곱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납니다. 태어날 때부터 빈혈이 있었다고 단정할 만큼 허약 체질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 나무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친 뒤로는 신체적인 열등감마저 있어 그의 우울증은 어렸을 때부터 대단한 것이었어요. 그러나 재능은 남달라서 영특하다고 자타가 인정했고 때문에 친구들에게도 비뚤어진 오만을 부렸죠. 이런 그의 어린 시절을 그는 이렇게 요약했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이미 두뇌가 우수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보다 훨씬 완력이 있는 아이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장점이었다. 또 어릴 때부터 심한 우울증에 걸려 있었지만, 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가하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특히 아버지의 강렬하고 깊은 종교적인 인격, 특징 있는 그리스도교적인 인격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답니다. 그리하여 그가 15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고로 견신례를 받았지만, 대주교의 경건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을 뿐, 그 마음에 믿음의 확신은 없었어요. 1831년. 18세 때 대학에서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신학과 문학을 공부하였는데, 특히 괴테, 호프만, 세익스피어, 헤겔 등에 심취되었어요. 이런 대단한 사람들의 사고를 가까이 했지만, 그러나 학생 시절과 청년 시절은 그의 인생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주고 있었다는 게 맞을 거예요.
특히, 나이 많은 아버지의 엄격한 지적 교육은 그를 점점 고독하게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미카엘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는 우울했고, 걱정이 많았으며, 종교심이 깊었고, 지독할 정도로 총명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는 결코 밝아질 수 없는 어두운 그늘을 갖고 있었답니다. 그것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젊은 시절의 괴로운 과거 때문이었어요. 아버지의 지난날을 자세히 알게 된 키에르케고르는 아버지의 피를 받은 이유로 자기도 죄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죠.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선두에 섰던 나치의 자식들이 겪는 고통과 같았었다고나 할까요? 그는 죄의 대가가 반드시 자기와 온 가족에게 내려질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이런 불안은 현실로 나타났고 가정에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고, 결국 맏아들 페터와 맨 끝의 자신만이 남았습니다. 모두들 서른네 살을 넘지 못하고 청춘에 죽었어요. 이런 설명할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인해 아버지의 시련은 엄청나게 짙어 갔고, 키에르케고르도 더욱 더 우울의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정말 이 가족은 소멸되어야만 하며, 하나님의 손에 말살되어 가야만 하는 것인가!
그는 스스로를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했어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지만, 그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결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 저주의 비극에 그녀를 끼워 넣을 순 없었기 때문이죠. 그는 절규했어요. "눈물 없이 보낸 날은 하루도 없었다." "만일 나의 무덤 위에 묘비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바로 고독한 자일 것이다." "나의 일생은 영원한 밤과 같다." "내가 농담을 하면 사람들은 웃는다. 그러나 나는 울고 있다." "목표는 저 높은 꼭대기에 있다. 나는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돌아볼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괴로운 나날 속에서 당시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제일 큰 문제는 ‘영과 육’ ‘시간과 영원’의 이원화 문제였습니다. 그의 죄의식은 갈수록 심화되었고, 이런 것이 자신의 우울과 혼합되어 나중엔 폭음까지 하게 되었어요. 마침내 허랑방탕한 생활로 빚쟁이가 되었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다행이었어요. 미수에 그쳤으니까요. 그는 아버지에게서 떠나갔고, 나아가 그리스도교에서도 떠났습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지탱할 수 없었겠죠. 떠나온 자리에서 그는 종교적 실존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신에게 귀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신 앞에 단독자로서 선 그는, 언제라도 죽고 살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처절하게 고뇌했죠.
"비록 세계 전체가 무너질망정 내가 고집하는 내 영혼의 가장 깊은 뿌리와 연결된 그 무엇에다, 나는 내 실존의 생활 터전을 마련해야만 한다. 이것이 내게 결핍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찾기 위해 나는 노력하고 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심한 우울증의 깊은 계곡 속에서 그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었고, 그러자 그리스도의 음성이 그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 주는 기적 같은 일이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어요. 그는,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았을 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 2:10) 고 했던 것처럼, 그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무한한 기쁨을 일기 속에 적었습니다.
1838년 5월 19일 오전 10시 30분. "내 마음에 일어나는 무한한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한 사도바울의 환호성이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것은 내 마음과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완벽한 환호성이다. … 나는 내 기쁨에 대해 기뻐하고, 내 기쁨과 더불어, 기쁨을 통하여, 기쁨에서, 기쁨 안에서, 기쁨으로 말미암아, 기쁨에 기쁨을 기뻐한다. 사람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든지, 그 노래를 당장에 그치게 하는 하늘의 노래 소리다. 나는 참된 기쁨을 얻어 이제 기뻐한다.
이제 그를 이 기쁨의 궤도에서 탈선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붙잡힌 것이었어요. 나면서부터 우울했던 그의 생활에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기쁨이 들어 온 뒤로, 사람들은 그의 말과 행동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는 자신이 권위에 관계없이 말한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선교의 사명을 띤 인물로 인식되는 것을 싫어하여, 자기에게 굴러온 목사직까지 거절했고 그리고 자기의 저서를 익명으로 간행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론이 아닌 삶의 주체자로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그의 다각적인 연구는 현대 철학의 기저가 되었던 것이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오류는 자기를 신뢰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만은 이기주의에서 나온다. 그것의 유일한 치료제는 절망이다. 사람은 극도로 비참한 궁지에 빠졌을 때에야 자기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기 신뢰라는 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위기 속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음을 알게 되어서야 인간은 뉘우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자기의 무력함과 자신이 무엇엔가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실존의 순간’이라고 했어요. 그에게 있어서 실존은 신 앞에서의 단독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체, 현실의 자기는 죽고 신앙적으로 다시 사는 것, 곧 신앙적인 실존이었습니다. 그는 차원 높은 자기 긍정을 위한 자기 부정을 실제로 체험했고 이런 죽음에 이르는 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는 절망이라고 표현하고 있죠.
이렇듯 실존하는 주체적인 사상가로 살았던 그는 그의 인생의 결정적인 체험을 한 후, 많은 핍박과 시련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정통만을 주장하고 형식만 남은 여러 교파들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웠고,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준다는 미명하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고 그리스도교를 날조한다고 날카롭게 힐책했죠. 1855년 11월 11일. 그가 사망하기 까지 그는 신앙적인 실존에 입각한 많은 저작 활동에 심혈을 다하고 갔어요. 그중 하나만 소개할게요.
"… 그런데 그들의 생활 속에서도 아마 이것이 그들의 최선의 때라 해도 좋겠지만, 그들이 내면으로의 방향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첫째 난관 언저리까지 찾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방향을 바꿔버린다. 그들에게는 그 길이 삭막한 황야로 통하고 있으며, 그런데도 주위에 아름다운 푸른 목장이 있다고만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쪽으로 향하고, 이윽고 저 그들의 최선의 때를 잊는다. 그들은 동시에 기독교도들이기도 하다. 목사님으로부터 자기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안심을 얻고 있는 것이다…"
☆ 약력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1813.5.5. 코펜하겐에서 출생
1831. 코펜하겐의 대학에서 신학, 철학 공부.
1838. 거듭남을 경험함.
1855.11.11. 코펜하겐에서 사망
* 저서 : [이것이냐 저것이냐]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외 다수.
*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사르트르, 니체)와는 달리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적 실존주의자로 알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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