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김광열 교수
레포트: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 1부 / 독후감 A4 5매정도- 요약말고 느낀점 위로로 / 10월 21일 23시59분까지 홈페이지에...
Hgospelm.com -> 신학대학원
구원론: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사역을 신자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님의 역사
구원론을 미국신학에서는 Doctrine of Holy Spirit 라고 부른다.
교리공부의 필요성:
1. 나의 믿음에 대한 개신교회 강조점의 중요성
개신교회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고백을 따르는 무리들이다. 물론 그 안에도 다양한 교파들이 있다. 공통점은 ‘나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로마 카톨릭은 blind faith 교회에서 결정하는 것을 믿음. (교황 무오설등...)
우리의 믿음은 가족이나 교회, 조직의 도움이 아니라 Personal faith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나의 믿음을 공고히 해 주고 체계화 하는 것이 바로 교리연구, 조직신학이다.
2. 성경의 명료성
성경의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명료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것.
하지만, 근본주의적 성서주의 / Biblicism 즉 문자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성경의 명료성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것이지 한 번만 읽으면 금방 금방 이해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문자적으로, 어떤 부분은 문학적으로,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원어공부, 교회연구, 배경연구등이 필요하다.
3. 기독교는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극단적 오류를 낳기도 한다. 실천적 삶이 열렬하더라도 그 실천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지 못하게 된다면 안된다.
1) 소극적 답변: 성경에 대한 건전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올바른 경건에 이를 수 없다. (많은 이단들을 보라/ 웃사의 예)
2) 적극적 답변: 우리의 신앙지식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지배한다. (직접적 영향을 준다.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과 징계의 하나님이라는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아니면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만 생각한다면? - 신구약 모두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속성을 다 가지고 계신다. / 즉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생활이 달라지게 된다. 성경관, 신론, 기독론, 종말론등에 따라 모두가 다 달라진다.)
4. 복음의 통일된 증거
우리 신앙을 체계화 시켜준다. 통일될
5. 오늘의 이단들을 판단할 기본적 안목을 세울 수 있다.
교리연구(조직신학)의 자세
1. 성경을 성경연구(신학)에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개인적 경험과 체험으로 한정하여 해석할 수 있다.
반대로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성을 더 중요시 한다.
이들은 눅 5장의 두 배에 가득 찬 물고기 이적을 합리적으로 해석- 물고기가 몰려올 때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다.
코넬리우스 반틸: 전제주의(성경을 궁극적 권위로 삼는) 변증학
웨.민의 변증학 교수/ 일관성있는 변증학의 태도는 변증학의 내용도 성경적이어야 하지만, 방법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전통적인 변증학은 알미니안적이라고 말함.
J.E 아담스: 반틸의 전제주의를 기독교 상담학에 접목시킴/ 상담학의 방법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성경무오교리: 성경무오교리를 성경에 의해 믿는다.
2. 성경적인 세계관속에서 신학을 들여야 보아야 한다.
인간에 관한 설명: 1) 피조물 / 2) 죄인
1) 겸허한 자세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겸손해야 한다.
2) 회개의 자세
죄인으로서의 위치를 자각해야 한다.
칼빈: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그리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참된 구도자는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시는지를 듣기 위해 나온다.
3) 경배의 자세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신앙과 신학이 양극화 되는 경향이 있다. 신학을 공부하며 가슴이 차가워 질 수 있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야다/ 기노스코)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단순히 지식적으로 모른다가 아니다. 인격적인 교제의 앎이 없음.
성령론의 역사는 생략
- 애릭슨의 구원론 참조
성령님의 사역
구분:
1) 구약에서의 사역
2) 예수님 생애에서의 사역
3) 신자의 삶에서의 사역
1. 구약
신약만큼 정면에 부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있었다. 용어상의 차이가 있다. 신약에서는 성령/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신
요엘 2:28 - 내 신을 만민에게...
창 1:2 - 여호와의 신...
1)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 동역
창 1:2 / 천지 창조시에 성부하나님과 함께 사역
2) 성경을 기록함, 예언을 주시는 사역
선지자들의 예언서등을 보면.. 겔2:2, 8:3 - 여호와의 신이 선지자 에스겔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이사야도 마찬가지... 이렇게 구약의 성경들이 기록될 때 성령이 임함.
벧후 1:21 -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3) 임무를 맡기시고
회막을 지을 수 있는 일꾼을 세움 - 브살렐, 오홀리압: 여호와의 신
슥 4장 - 스룹바벨 성전 재건 시에
행정적 능력을 부여. 요셉에게 주신 - 창41:38
민 11:25 - 모세에게 임했던 신이 70 장로들에게 신이 임함
신 34:9 - 여호수아에게 임했던 지도력
4) 카리스마적 능력
사사들의 능력 - 삼손, 기드온, 옷니엘의 초자연적 능력이 여호와의 신이 임해서...
5)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삶속에서 역사하심.
도덕적인 능력, 영적인 성품들을 일으켜 세워주심. - 느 9장 이나 시편 을 보면 - 성령을 선한 신(Good Spirit)
사 32:15-20 의, 평화, 헌신의 마음을 만들어 내시는 분
겔 37의 환상 - 마른 뼈들이 새 생명을 부여받음 - 신약에서 성령의 중생의 역사를 예표 -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을 성령의 중생케 하심을 통해 살아남.
구약의 성령의 사역은:
이 모든 것은 아직 불완전. 앞으로의 영적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될 성령의 사역
사 61장 이후에는 성령의 사역을 메시아의 사역으로 묘사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2.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
1) 성령 충만한 삶
성육신 사건(성령으로 잉태되심)
세례요한의 증거- 성령으로 세례 받음/ 성령으로 세례 줌
공생애의 시작도 성령충만한 삶 - 요단강에서 세례 줄 때
눅 4장 - 광야로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 - 마가복음에서는 성령의 이끌려서 가심. 성령에 이끌려 사탄의 시험을 받으러 감. 성령충만 하다고 하는 것은 사탄의 시험에서 면제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아 세상 속으로 들어가 시험을 이기는 것이 성령충만한 삶이다.
눅 4:14 에도 시험 후 갈릴리 오실 때도 성령에 이끌려 오심.
갈릴리 회당에서 공생애 시작하면서 이사야 61장을 읽으심 - 성령의 임하심
2)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삶
귀신을 쫓아냄 - 귀신의 왕이 졸개들을 괴롭히지 않는다. 내가 귀신을 쫓아낸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성령에 의해서 모든 이적들을 이루심.
눅 10:17,21 예수님의 감정조차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짐. 제자들의 선교사역후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인도하셨던 성령님
3. 신자의 삶에서의 사역
중생- 하나님의 시각 / 회심- 사람의 시각
1) 신자의 삶의 시작에서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인간적 행위는 전혀 개입되지 못한다. 성령의 비밀스런 사역이다. 회심은 인간의 반응이다. 회심 안에는 믿음과 회개가 있다.
요 3:5-6 물과 성령으로 주어지는 사건이 바로 중생이다.
물 - 중세시대에는 물세례라고 생각. 깨끗하게 씻음 디도서: 중생의 씻음과.... 즉 이것도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성령의 주권적 비밀한 역사가 중생이다. 믿음도 성령의 은사이다. 하나님의 선물(엡 2)/ 회개(요 16:8)도 선물이다. 죄를 깨닫게 하시는 일을 성령님의 역사이다.
2) 신자의 삶의 과정에서
능력을 입히신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14장과 16장을 연계해 보면 주님이 가셔서 성령님을 보내주실 때 제자들이 큰 능력을 행함.
베드로의 3000명 회개시킴 - 예수님보다 더 큰 일.
신자들 가운데 내주하심
요 14: 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심. 옛날에는 외적으로 가르쳐 주심. 이제는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심.
성령의 가르치시는 사역
요16:13-14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심 -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전달하심.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경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예언이 성취됨
- 오늘날 신자들의 삶 속에서 성취됨. 성령은 여전히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 큐티할 때.
성령의 대언사역
로마서 8장 ;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고생할 때
신자의 성화의 삶
롬 8:13 성령을 좇아 행함. 성령으로 육신의 행위를 제어. 성령을 좇아 행하면 옛사람의 습성이 없어짐.
성령의 은사
애릭슨의 구원론 1장 참조
구원의 서정
서론
구원의 서정: 구원에 포함된 영적 축복들의 여러 가지 요소들 사이의 내적 질서와 그 일관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구원의 서정에 관한 논의는 18세기의 개신교 스콜라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성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갈라디아서 2장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너희의 행위인가.... 하는 대목에서. 중생이 율법의 행위가 아님. 성화 이후에 중생이 오는 것인가? 회심 이후에 중생이 오는 것인가? 에 대한 질문: 구원의 서정에 관련된 질문이다.
중세 로마 카톨릭 신학: 예전주의, 성례주의 / 구원이 성례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주권적 역사가 제도의 틀 속에 묶여 버린다. 구원의 서정 문제가 발생된다.
예를 들어, 칭의- 로마 카톨릭은 칭의의 과정에 대해 말한다. 세례- 원죄가 해결, 이후의 죄는 고해성사를 통해 해결, 그렇다면 칭의는 의로워지는 과정 - 미완성 / 근본적 문제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한 것. 칭의는 예수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는 법적 용어인데 카톨릭은 잘못됨. 종교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가 불가분 관계있지만, 칭의는 법정에서 선언되어지는 것과 같은 순간적 상황이며 성화는 지속적으로 신자의 삶의 과정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주장함.
18세기 개신교 스콜라 신학
구원의 순서 order of salvation 구원의 서정에 대한 본격적 논의 시작됨.
1724부터... 1730년대.... 야콥 카르콥.... 종교개혁시대는 일종의 <운동의 시대> 그 후 17, 18세기는 종교개혁자들의 다양한 주장들을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논의, 정리한 시기.
유의점 - 융통성을 가지고 봐야 한다.
1) 용어 사용에 있어서 유의해야 함. 용어의 의미가 신학자들 사이에서 다르다.
중생: 칼빈의 개념과 오늘날 우리의 개념은 다르다. 칼빈은 신자의 삶 전체를 커버하는 것. 신자의 삶의 초기의 경험이라고 보지 않았다. 성경 안에 중생(팔링케니시아)은 딱 2회 나옴. 그래서 정확한 의미를 말하기 어렵다.
디도서 3:5 - 물로 씻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
마 19:28 -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역사 :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것 보다 좀더 포괄적. 전 우주적인 재창조의 역사
즉, 중생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획일적 개념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우리도 유연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2) 배열 순서에 있어서도 다양성이 있다.
유효적 소명과 중생이 거의 하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으나, 벌코프는 중생이 먼저, 존 머리는 반대.
아브라함 카이퍼는 영원으로부터의 칭의라 말하지만, 후크마나 존 머리는 칭의는 주관적 적용이라고 비판한다.
3) 신학자 사이 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구원의 서정의 순서가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로마서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나오지만,
고전 6: 11 은 성화 다음에 칭의
우리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관심에 시간상 보다는 논리상의 순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칭의 -> 양자 가 시간보다는 논리적 일관성의 차이임을 알아야 한다.
구원의 서정 논의의 필요성
1) 복음 선포의 시급성과 긴박성 때문에 이 논의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복음전도의 행위 속에서 우리 나름대로의 구원 서정 개념의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에 올바른 개념을 정립한다면 복음 전도에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알미니안 주의자와 칼빈주의자의 전도의 자세는 달라진다. 이왕이면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좋다. 복음 선포 행위에 기초와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2) 나의 개인적 신앙생활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성령께서 객관적 구속사역을 주관적으로 적용시키실 때 우리가 적절히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왜곡된 시각을 갖는다면 쓸모없는데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 카톨릭은 마지막까지 고해성사를 하지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성도의 견인에 문제가 생길수 있다.
3) 고전 14:34 - 성령은 질서의 영. 아무렇게나 신자의 삶을 이루어 가신다고 볼 수 없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본적인 원리가운데서 이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적절히 반응할 수 있다.
구원의 순서
존 머리의 구속론: Redemption Accomplished & Apply
1부: 성취된 구속(기독론) & 2부: 적용된 구속(구원론)
79Page 2항에 나옴.
윌리암 폴킨스: Golden chain 도 좋다. 4단계로 설명: 1유효적 소명 2칭의 3성화 4영화 / 그러나 존 머리가 더 최근이고 자세히 나온다.
존 머리:
1. 영화에서 출발 할 수 없다.
2. 중생이 성화보다 앞선다는 것도 확실하다.
3. 요 3: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볼 수도 없다. - 믿음과 회개의 행위는 중생 때문에 가능하다. 즉, 중생 -> 회심
4. 요일 3: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음 : 중생 -> 성화
5. 요 1: 12 그를 믿는 자 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회심 -> 양자
6. 롬 8: 28-30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예정 - 소명 - 칭의 - 영화
7. 롬 3장 / 갈 3장: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 : 회심 -> 칭의
정리해 보면 : 예정 - 소명 - 회심 - 칭의 - 양자 - 영화
8. 중생이 빠졌다. 요 6: 44 아버지께서 먼저 이끄셔야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다. 성령의 중생의 역사가 없으면 믿음으로 주께 반응할 수 있다.
예정 - 소명 - 중생 - 회심(믿음)
9. 중생과 유효적 소명의 논리적 관계를 보면. 중생은 유효적 소명의 결과라 볼 수 있다.따라서 소명 다음에 중생을 넣을 수 있다.
10. 회개와 믿음은 쌍둥이와 같다. 함께 간다. 회개는 하지만 예수 안 믿는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진실된 회개는 예수를 믿는다. 정말 믿으면 회개한다.
11. 양자와 칭의 관계: 칭의는 하나님과의 법적 관계. 양자는 법적 관계를 넘어선 신분상의 변화이다. 즉 더 높은 관계라 할 수 있다. 칭의 -> 양자
12. 성화는 양자 다음에 영화 전에 온다.
결론: 예정 소명 중생 회심(믿음) 칭의 양자 성화 영화
성도의 견인이 빠졌는데 중생이후부터 영화에 이르기 까지 전체적 포괄적 개념이다.
이외에도 여러 문제제기와 답변들 있지만, 여기서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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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연합
교재 28P참조.(기독교강요 3권)
성령의 사역의 핵심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케하는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
구원은 곧 성령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I.연합의 개념들(29p)
1. 구약
1) 대제사장
2) 사 53장: 고난당하는 종 - 예수님
3) 창 2:24 - 결혼제도 (엡 5장에서 부부와 교회를 비교)
2. 신약
1) 마 25:31 - 양과 염소: 지극히 작은 자들과 예수님의 연합
2) 요 15:1-11 - 포도나무와 가지 / 열매를 맺는 것에만 강조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면 자연히 열매가 맺힘. 반대로 하면 율법주의
3) 요 17 - 대제사장적 중보기도 / 21-22절 ‘주가 내안에 내가 주님안에....’
4) 바울서신에는 좀 더 체계적으로 나타남
행 9장의 회심사건 - 교회와 주님을 동일시. 성도를 핍박한 것은 교회머리되신 주님핍박
골 1:27 - 성령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비밀 곧 그리스도
전치사 휘페르(위하여/ 롬5:6-8...) 그리스도와 성도가 연합되었기에
전치사 순(함께/롬 6:4-8, 엡 2:6, 골3:4, 갈)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살리심, 장사됨, 영광
전치사 엔 (안에 IN / 바울서신안에서 164회) 칼빈의 주석서에 에라스무스의 주석을 반박 고전 1:5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구별과 지식에 풍족하게 되었다: IN HIM을 BY 로 사용한 에라스무스, 그리스도로 인해 풍성케 됨. 하지만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케 됨. 그리스도와 연합을 강조.
아담과 그리스도의 평행: 대표개념 - 고전 15:21-22 / 예수와 아담 - 언약적 연합의 틀
5) 요 15:4 등에는 그리스도안에 우리,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라는 표현이 상보적
II.연합의 성격
* 시간적 특성
1) 창세전에 -> 영원전의 연합
2) 이천년전의 구속 사건
3) 신자의 삶에서 실존적 차원에서의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
1. 영원한 연합
그리스도안에서의 연합은 영원성을 내포.
창세전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제외하곤 있을 수 없다.
롬 8:31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끊을 수 없다.
2. 언약적 연합
롬 5:12, 고전 12:
3. 육체적 연합(성육신 사건)
인간의 대표로서 중보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었어야 했다.
히: 대제사장은 사람가운데서 취해야 함. 2학년 2반의 대표자는 2-2 구성원중에서.
4. 공동체적 연합
개인적 신비체험 정도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인격적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공동체)임을 알아야 한다.
5. 성령의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은 성령의 사역의 결과이다.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연결고리가 성령님.
요 14:17 저는 너희와 함께 하심이요(현재), 너희 속에 계실 것(미래)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계시던 성령과 함께 하셨고, 앞으로 (오순절) 너희 속에 계실 것
요 14:20 그 날(오순절)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6. 전포괄적 연합
대속적 죽음만 연합 아님:
예수께서 계셨을 때 구속사역의 모든 순간들을 공유: 세례, 십자가, 고난, 부활, 재림, 의로움, 거룩함....
롬 6:1이후 참조
골 3:4 , 고전 1:30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7. 종말론적 연합
신약시대의 특징은 already but not yet
연합이 앞으로도 이루어져야 함.
연합의 중요성 - 강의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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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아브라함, 모세, 집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게 된다.
보편적 부름, 유효적 부름 모두가 ‘특별계시’로부터 온다.
1) 보편적 소명(부름): 모두에게 열려 있다. 개방적 성격
2) 유효적 소명: 그 부름을 받은 자에게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부름
행 17:30 모든 사람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그런데 여기서 유효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다. 롬 6:7.... 이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유효적 소명속에 나타난 하나님
1.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조건적 선택이다. 인간의 조건과는 상관없다.
2. 하나님의 능력..
우리를 끝까지 이끄신다.
3. 하나님의 선하심
중생
1. 중세 로마 가톨릭: 세례의식 아래 중생이 있다고 생각. 예전주의, 성례주의. 현재 가톨릭은 7성례. 우리는 세례와 성찬 두 가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리라... 의 해석: 물은 세례의식- 가톨릭 / 종교개혁자들은 씻음(딛 3:5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Ex opere operato = from the work performed :예전주의를 잘 나타내는 문구. 성례가 시행됨을 통해 중생..... 목욕탕에서 신부가 물 틴 것 까지.
2. 알미니안이 말하는 중생:
인간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3. 개혁주의 안에서의 차이
1) 구개혁주의 (칼빈): 신자의 삶 전체를 커버하는 것
2) 현대 개혁주의: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역사의 첫 번째 사건
3) 딛 3:5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건- 새롭게 됨: 마 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우주적 새창조의 차원. 그리스도의 부활을 첫열매라고 표현했다. 우주적 재창조의 첫 열매가 예수님.
중생의 필요성
1. 육적 존재의 상태에서는 천국 갈 수없다. . 요 3: 5-6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2. 영적인 맹인의 삶을 살기에 비밀들을 깨닫지 못함
영적인 시각을 밝혀야
3. 전적 무능력: 자연인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 행할 뜻 없다.
참고: 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메시야를 믿고, 신약의 성도들은 오신 메시야를 믿어 구원받음.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 안 믿었다. 과연 수천년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믿었을까?
중생과 회심과의 관계
1. 중생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같음: 성령의 주권적 역사. 사람은 모른다. 신비함. 미스테리)
2. 인간은 수동적이다. 중생과 회심은 한 사건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훼손될까봐 둘을 분리하는 사람도 있다. 하자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노력을 분리해 버릴 수 있다. 하나님 역사할 때까지 인간은 가만히 있어야 되는가? 반대로, 준비주의(부흥집회처럼)... 내가 어떤 사람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준비해서 그 사람이 믿게 되었다는 공로주의로 환원된다.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인데 준비주의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우린 열심히 노력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의 주권이다.
3. 중생과 회심은 시간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의 양면이다.
인간편에서는 회심, 하나님 편에서는 중생의 역사.
인간은 새롭게 되는 이 사건 가운데 수동적으로만 있지는 않다. 성령에 의해 시동걸어지고 출발되지만, 현실에서 경험될 때 인간은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7. 중생후의 변화
1. 내부의 변화
가. 마음이 새롭게 된다. - 지적인 회복
noetic effect of sin 죄로 인한 지성의 타락. 영적인 시야가 닫혀져 버린 상태
롬 3:11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다. (지적 영역의 불구)
나. 중생자의 양심을 깨끗게 씻어준다.
무디어진 양심, 화인받은 양심,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케 함.
요 3:5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물은 씻는 기능이 있다.
딛 3:5과 일맥상통 -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
다. 의지의 해방
노예의지(죄에 노예됨)-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줌.
하나님께로 나아갈 의지적 결심을 못한다. 의지적 불구.
중생은 바로 그 의지적 불구로부터 해방시켜줌.
라. 감정과 욕망의 회복
감정과 욕구가 새로운 방향성을 가지게 됨. 세속적 욕망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 전도와 구제 등으로 욕구가 달라짐. 에덴동산에서 처음가졌던 기능이 회복됨. 하나님 뜻 이루는 일에 관심.
즉, 중생은 새피조물의 역사이다.
2. 외적인 관계상의 변화
가. 죄와의 관계성 변화
요일 5: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이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예수님)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 예수께서 자녀들을 지켜주신다. 중생자는 죄의 통치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의의 통치로.
이제는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여전히 도전은 있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대항할 수 있는 위치 변화가 생겼다. 의의 통치 아래로 옮겨졌다. 죄와의 새로운 관계성이 설정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죄 안 짓는다는 말이다.(죄의 지배 아래의 관계성 측면에서)
믿은 후 죄 짓는 것- 우리 맘의 불편함이 있다. 예전에 죄 지을 때는 아무런 부담이 없다. 이젠 예민해 진다.
이런 고민 가진 사람들 많다. 하지만 이런 고민하는 사람들이 중생의 표시이다. 괜찮다고 하기보다는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나. 새로운 사랑의 관계(교회와의 관계변화)
요일 4: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중생한 자는 사랑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한다. 형제와 지체의 관계로.
다. 세상과의 관계 변화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라. 예수님과의 관계 변화
주님과 가족, 형제의 관계
중생 역사와 말씀과의 관계.
중생은 성령의 주권적 역사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지 않는다. 말씀 안에서 역사
말씀으로 거듭남. 기독교는 신비주의이다. 하지만 차이점은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역사하신다. 하나님 말씀과 동행하면서...
벧전 1: 23
약 1: 18
요 14장- 16장의 성령의 사역은 진리 가운데... 내 것(예수님)을 가지고 알려주리라. 복음에 기초하여서 역사하심.
회심의 역사
- 믿음, 회개
믿음과 회개와의 관계
가롯유다와 베드로: 둘다 고민했다. 진정한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안타깝게 여길 뿐 아니라 죄의 상태에서 일어나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포함한다.
회개는 신앙과 함께 가는 것이다. 성경신학적으로는 같은 사건. 모든 참 믿음은 회개하는 자만, 참 신자는 회개하는 자. 한 사건의 양면이다.
믿음과 회개의 선후관계
1. 둘은 불가분의 관계:
칼빈(믿음으로부터 회개가 나온다.)
존 머리(불필요한 질문이다. 믿음과 회개 그 둘은 같은 근원- 중생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2. 쉐드(믿음이 먼저 온다.)
- 중생 역사에 있어서 믿음은 수단이고 회개는 목표이다.
- 하나님을 향한 회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 회개가 먼저 온다고 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주께 나올 수 없다. 믿음을 주고 나서 회개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율법주의적 회개가 될 수 있다. 회개의 능력은 믿음으로부터.
3. 루이스 벌콥 (회개가 우선이다.)
벌콥의 ‘회개’는 성령의 책망하시는 역사라는 의미이다.
로마 가톨릭의 의미는 아니다. 먼저 회개하고 그 다음에 칭의가 온다는 율법주의적 관점 아님.
요 16:8 이하-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일차적으로 성취된 사건: 오순절 사건
베드로의 설교 후, 37절 ‘어찌할꼬....’ 죄에 대한 책망을 들음.
38절에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
그러므로 회개가 먼저온다. 회개는 성령의 책망하는 역사이고 그것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 이전에 온다.
4. 뎀니(회개와 신앙은 쌍둥이와 같다.)
심리학 전공자.
심리학적 원리들을 신학에 접목.
회심자의 심리적 상태속에서 죄의 부분이 강하게 나타나면 회개부터, 그리스도의지하는 부분이 나타나면 믿음의 반응이 먼저 오게 된다.
결론: 신앙과 회개는 분리될 수 없다. 두 가지는 하나의 뿌리(중생)로부터 나오는 열매이다.
믿음의 성경적 어원
믿음 - 구약에서는 ‘아만’ 신약에서는 ‘피스티오’
구약: 언약에 대한 신뢰. 히 11장 구약의 언약적 약속에 대한 신뢰.
신약: 언약적 약속의 구체적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임이 드러남.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믿어야.
믿음의 3요소
1. 지적
믿음의 내용
복음의 내용에 대한 믿음. 믿음에는 내용이 있다. 자기 확신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 내용을 듣고 믿는다.
2. 마음으로 동의함(확신)
우리의 마음으로 확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3. 실천에 옮기는 헌신의 삶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동적 믿음. 헌신의 부분
믿음의 본질
1. 믿음의 근원은 예수님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 되는 것이지 나의 신앙생활이 기준이 아니다.
믿음의 근원은 우리가 아니다.
2. 믿음 자체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엡 2: 8
3. 믿음은 인격적으로 참여한다.
우리의 인격적인 참여가 있다.
빌 1: 29 고난과 믿음/ 고난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
믿음이나 고난을 주머니에 넣을 순 없다.
회개
성경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두가지로 나뉜다.
1) 히브리어
*나함: 심리적으로 애통함, 후회함
눅 18장 23절 부자관원에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했을 때 근심하며 돌아가는 것. 마음의 근심과 애통하는 감정.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슈브: 실제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사용됨. 실제적인 회개는 단순히 의식적 행동, 금식, 눈물등의 외적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언약속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분께로 돌아오는 것이 포함될 때 참 회개이다.
자신의 죄 문제를 내어던짐의 요소
자비로우심을 깨닫는 요소
하나님께 나아오는 요소
2) 헬라어
*메타멜로마이: 나함과 같다.
*메타노에우, 에피스트레포: 슈브와 같다.
회개의 필요성
인간의 타락성을 감안할 때 그 성품의 변혁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악된 성품들이 변혁, 변화되어야 한다.
회개는 이러한 과정의 인간차원의 작업이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의 단회적 사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 땅에서 행해져야 하는 성화의 차원에서 회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자들도 이런 차원에서의 회개를 말한다.
루터: 회개는 1회적인 것이 아니다. 전 생애를 걸쳐 이뤄져야 할 작업이다.
칼빈: 신자의 생애는 회개로서 특징 지워진다.
개혁주의는 완전주의 신학을 비판한다. 칼빈: 아무리 큰 성자라도 회개해야 한다.
두 번째 성령의 축복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완전주의를 이야기 한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점점 더 예민하게 작은 죄까지 고백해야 하는 운명의 존재이다. 우리가 경건해 지면 더 경건해 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더 겸허해 진다. 세상의 종교와 다르다.
회개의 도구(수단)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회개의 도구이다. 회개를 회심의 부분이라 볼 때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성령의 주권적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역사.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율법을 듣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회개가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낙심케 만든다. 죄인임을 깨닫게 함.
롬 3: 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 주는 힘은 없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 붙잡혔을 때만 돌아올 수 있다.
회개는 전인격적인 사건이다.
지적 요소
정적 요소
의적 요소
회개자
죄에 대해 적대적 시각과 태도를 가지게 됨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새로운 태도를 가지게 됨: 죄인으로서만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 - 죄의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 자비, 용서의 하나님
칭의
칭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 사항이다. 이 세상의 다른 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해 보았을 때 타종교는 자력종교이다. 인간 쪽에서 신에게로 나아가려는 종교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우리의 실적이 필요없다.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성을 강조하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이다. 이것을 잘 드러내는 교리가 ‘이신칭의’ 교리이다. 오직 믿음으로.
칭의 교리에서의 의는 ‘법정적 의’ 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속에서 이야기 되는 법정적 선언의 의미이다.
로마카톨릭은 칭의와 성화를 뒤섞어 놓았다. 내부적 존재의 변화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이다. 우리 인간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는 관점이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선언되느냐 하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도덕적 변화는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칭의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일 뿐이다.
인수합병처럼.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갈)
칭의는 죄인의 용서. 종말론적 의이다. 마지막 심판때 선언될 의가 이미 확보되었다는 뜻이다.
그 때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시는 근거가 지금 칭의받은 의이다. 어떤 이는 예수로 말미암은 의와 우리의 의를 합해서 이해한다. 개혁주의는 종말론적 의=예수님의 의. 우리가 아무리 이땅에서 성공적으로 신앙생활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는 없다.
칭의에 대한 역사속에서의 오해들
1. 인간의 책임(역할)을 높였던 오류
1) 펠라기우스의 구원관(자력구원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음
- 예수님의 모범적인 생애를 모방함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게 됨. 예수님을 구속주로서 받아들이기 보다 모범으로 받아들임.
2) 알미니안적 오류: 인간의 부분적인 선함(자연인의 능력+하나님의 은혜= 신인협동주의)
3) 로마카톨릭의 칭의: 유아세례시 원죄문제 해결, 자범죄는 고해성사를 통해. 공덕과 선행을 통해. 이때 인간의 역할이 강조됨.
2. 하나님의 주권을 임의로 높였던 오류
1) 스콜라주의-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로만 찾으려 함.
하나님은 객관적 근거없이 칭의를 선언한 것 아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의 구속사건
화장실 감
칭의의 수단- 믿음
믿음: 창 15장의 아브람 사건. 합2:4
믿음은 도구적 수단이다. 비공로적 수단일 뿐이다. 우리의 공덕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이암는다. 믿음은 통로일 뿐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다. 나의 공로는 없다.
영원으로부터의 칭의
하나님의 은혜성을 강조하기 위한 교리.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교리.
1) 영원에서의 칭의- 아브라함 카이퍼. 하나님의 은혜성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 인간의 믿음의 행위보다 더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혜성 강조하기 위한 동기.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것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높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속성들간의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 거룩, 공의등....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오류에 빠진다.)
웨민 신앙고백서 11:4 선택자는 성령님께서 정하신 때에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들에게 적용하기 까지는 칭의 받은 것이 아니다.
문제점:
성경안에는 영원으로부터의 칭의개념이 확연히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영원부터의 작정은 있다. 성경의
롬 4:25 -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 의롭다 하심을 위해 살아나셨다. 우리의 칭의의 복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 축복이다.
롬 3:26 -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 - 의롭다 하심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칭의의 축복이 주어진다. 믿음의 행위와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은 영원전 보다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잠재적 위험성:
하나님의 은혜성에 대한 강조 뿐 아니라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도 동시에 강조한다. 믿음의 수단성에 대한 강조가 있다. 두 가지를 균형있게 다루어야 한다.
믿음의 수단성을 이야기 하면 하나님의 은혜성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호도한다.
믿음은 나의 공로나 상태를 말하는 것 아니다. 믿음을 정의할 때 하나님의 선물이요, 수단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침해하지 않는다.
칭의는 단순한 선언이상의 변화를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근거로 한 사건이다. 또한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전개되는 우주적 차원의 변화의 한 측면으로서 칭의가 주어진다. 단순한 픽션이 아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칭의 사건
3) 신자의 삶속에서 구원론적 칭의
칭의와 선행과의 관계
믿음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율법과 선행,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성과 상충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선행은 칭의받은 사람에게 필수 불가결하게 나타나는 증거로서.
바울 VS 야고보서 2:24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다.
야고보는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 창 15장의 사건, 22장으로 이어지는 관계성을 연결시킨다. 아브라함이 받은 의와 그 확증.
창 15장은 믿으매 의로 여기셨다. 22장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드리는 것으로 확증됨.
야고보는 ‘믿음이란 아브라함처럼 행함으로 확증되는 것이다’ 라고 말함. 믿음으로만이 아니다.에서 믿음이란 ‘죽은 믿음’을 말한다. 행위가 결여된 믿음.
행위가 수반되는 참믿음을 행함으로 말한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을 대비시키는 것 아니라, 참믿음과 거짓믿음을 대비시킨다.
바울은 갈 5:6 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이야기 한다.
창 15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떠한 행위가 첨가된 믿음이 아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참 믿음임을 알고 계셨기에 의롭다 하셨다. 하지만 사람은 그것을 모른다. 나중에 그 믿음은 창 22로 이어져서 확증한다.
칭의-믿음-선행
믿음은 진공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컨텍스트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에서 가지게 됨을 성경이 말한다.
전통적 구원의 서정이 직선적 접근이라면 그리스도 중심적 구원의 서정이 되어야 한다. 믿음이 어떻게 선행과, 칭의가 어떻게 성화와 연결되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개념을 활용하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믿음은 진공속에서의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칭의도 마찬가지. 성화도 칭의와 연결된다. 그리스도와 연합속에서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내가 의롭다함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면 다양한 축복을 받게 된다. 칭의는 단독적으로 주어지는 것 아니라 성화와의 불가분의 관계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주어지는 영적 축복이다.
양자교리
칭의를 생각할 때-의로우신 재판장의 하나님을 만난다.
중생- 새생명의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만난다.
양자- 우리의 영적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만난다.
즉, 칭의, 중생, 양자는 구분 할 수는 없지만 구별은 할 수 있다.
중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내적인 변화를 말한다면 양자는 우리의 내적 변화라기보다는 외적 신분의 변화를 말한다.
칭의는 법적 관계상의 회복을 말한다면 양자는 그 이상의 풍성한 가족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훨씬 더 가까운 교제의 길을 열어주는 교리이다. 양자교리를 더 계발해야 한다.)
확신
나중에 살펴보라.
성화
그리스도를 배제하고는 성화를 말할 수 없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화. 성화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 수 없다.
고전 1:3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다.
예수님이 곧 우리의 구속이다.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화
히 2:10 예수는 구원의 주/ 히 12:2 예수는 믿음의 주
주(主): 아르케고스 αρκηγοσ 의 뜻 pioneer author
우리 성화의 선구자.
예수님은 공생애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계명과 요구를 지키셨다. 거룩한 삶을 사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선구자되신 예수님을 모범으로 따라 살 수 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의 원제: In His Step
우리 성화의 원천.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19 )
그리스도와의 연합속에서 성화가 가능하다. 성화는 인간의 노력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성화도 그리스도안에서 가능하다. 우리의 참여도 있지만, 그리스도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성화
웨민 신앙고백서 13장 1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효력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인격적으로 성화된다.
신자의 성화의 수단은 말씀과 성령이다. 단순한 도덕적 노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롬 6:1-3]
(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았다.
우리가 죄 사함 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한다.
우리와 연합한 그리스도는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으므로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안에 거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칭의의 은총은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축복이다. 우리와 연합한 그리스도가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우리도 죄에 대해 죽은 존재이다. 더 이상 죄의 통치 아래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죄에 거하는 삶을 살 수 없다. 은혜를 더 하게 한다는 핑계로 죄 지을 수는 없다.
젊은 청춘 남녀가 사랑에 빠졌는데, 한 쪽이 첫 사랑을 다시 하기 위해 절교한다고 제안할 수는 없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의 성화에 끼친 결과
- 죄에 대해 죽는 죽음을 가져왔다.
죄에 대해 죽음에 대한 완전주의자들의 오해: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더 이상 죄의 도전과 영적 갈등이 없다. 영적 무풍지대. second blessing, 웨슬리의 완전성화)
반론: 로마서 6장은 죄에 대해 죽음은 앞으로 발생할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라 말한다.(과거형)
바울의 관점: 우주적 죄의 세력이 무너진 것이다. (사망이 왕노릇, 6:17-20 죄의 종 등의 표현을 보라) 아담의 타락이후에 죄의 통치 아래 살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의 통치가 무너진 결과를 힘입게 된다. -> 의의 병기로서의 삶을 살아라. 6:14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 1948. 8.15 해방의 시점. 시골의 한 청년은 일본 왕의 항복 소식을 못 들었다. 일본 순사에게 굴욕적 삶을 살았다. 어느 날 친구가 와서 소식을 전해줌. 이젠 항거할 수 있다. 이젠 주권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 더 이상 신자의 삶을 좌우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자의 성화의 삶이 가능해 졌다.
죄로부터의 자유함
1) 죄책으로부터 자유함
2) 죄책의 단계를 뛰어넘는 자유함. 롬(6-7)은 단순히 죄책뿐 아니라 죄의 통치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됨을 말함. 죄에 대해 죽는 죽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함의 결과 = 위의 1), 2)
존 머리- 결정적 성화(점전적 성화를 위한 기초와 동기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따라서, 긴장속에서의 성화
개혁주의 성화관 이해의 기본 개념:
live out what we are in Christ
inv(명령) ind(선언)
->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칭의. 죄의 통치에서 벗어남은 성화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된다. -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가는 삶, 거기에 알맞은 삶을 사는 것이 점진적 성화관이다.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ind(인디커티브)
골 3: 5이하 음란과 정욕과 탐심.... 벗어버리고... 위에 것을 찾으라:inv
-> 전제는 골3:1-4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므로....
고전 3:16-17 등등.... 바울은 성화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동일한 구조로 말한다.
-> 긴장속에서의 성화
루터교는 은혜의 선포는 강조하나, 점진적 성화는 약하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를 확인하고, 거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가 움직이도록. 영적싸움의 동인이 되는 것. 지속적인 영적 훈련을 쌓아야 한다.
영적싸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순례자와 같이, 끊임없이 영적싸움을 싸워야 한다.
1) 우주적 전쟁: 사단은 그의 졸개를 통해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듦.
2) 내적싸움: 자신과의 싸움(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게으름등....)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롬 7:14이하처럼 비명을 계속해서 지를 수 밖에 없다. 그럴때마다 좌절할 것이 아니라, 7장 마지막처럼 그리스도께 의탁해야 한다. 그 과정을 회복해야 한다.
영적훈련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 훈련을 해야 한다.
존 칼빈: 성화의 삶을 두 가지로 나눔 ->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어지기 까지.
mortification: 옛사람을 죽이는 작업
곧 자기부인, 십자가를 지는 삶. 극기와 고행.
잘못 이해하면 율법주의적 고행을 연상하기 쉽다. 중세의 고행과 개혁주의적 고행은 차이가 있다. 고행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공덕을 쌓아 의를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시도이다.
vivification: 새사람을 살리는 작업
주를 본 받는 삶. 제자들의 발을 씻는 모습등..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삶.
성화의 수단
1) 하나님의 율법
: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 3 기능 -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안내책자. 성화의 수단.
2) 하나님의 섭리
: 시119:6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 고난 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
3) 성도의 교제
4) 성례
: 성찬예식과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의 표시. 성례시에 하나님의 인디커티브의 축복들을 확인하는 상징이요 표시이다. 단순한 상징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사건이다.(교회에서 습관적으로 하면 안 된다. 개혁자들은 성례는 visible word라고 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례에 참예하게 되면 은혜를 받는다.)
성도의 견인
중생에서부터 영화로 나아가는 과정을 직선적 그래프로 그릴 수 없다.
영화
중생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성도를 견인하신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 시작하신 이가 마지막까지 이루실 줄 확신
신학자들이 책상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성경의 수많은 교리들과 맞물려 있다. 성도의 견인교리만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것과 맞물려 피해를 볼 수 있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성도의 견인과 연결된 교리
1) 칭의 교리: 종말론적 의. 그 의가 현재에도 유효하지만, 마지막때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섰을 때도 유효한 의. 지금 이 땅에서도 의롭다함을 얻지만, 장래에도.... 왜냐하면,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기 때문에 지금이나, 그때에도 동일한 근거로 의롭게 된다. 따라서 이 종말론적 의는 성도의 견인을 보장해 준다.
2) 선택 교리: 인간의 근거와 뜻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한 선택. 인간의 상태와 공덕과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선택이다. 엡 1:11-12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기에 성도의 견인을 보장해 준다.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기에
3) 예수님의 중보사역의 효과의 항속성. 유효성
헌재사역: 우리를 위한 재물되심: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계속해서 간구하심
대언사역: ..
4) 성령의 사역
성령이 오시면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중생된 존재인 하나님의 백성안에 영원토록 계심.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어도 성령이 떠나시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피곤하다. 성령이 더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불순종하면 피곤한 인생을 살게 된다.)
5)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
롬8:31-39 사망이나 생명이나 현재 일이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견인교리를 보장해 준다.
현실에 대한 답변
교리적으로 이해된다 해도 현실적으로 이해 안 될 수 있다. 실재적으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다. 목사중에서도 떠난 사람이 있다. ->견인교리에 반대하는 교리들이 있다.
어떻게 설명하는가?
1) 성경 안에도 신자들이 타락하는 듯한 사실을 말하는 구절있다. 히3:14, 6:4-12
: 조직신학적인 객관적 진술과 목회적 상황에서 언급된 표현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타락한 사람이 지옥갈 가능성:이론적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 하다. 성령이 더 강하시기 때문에. 목회적 상황에 대한 언급 때문에 성도 견인 교리를 부인할 필요는 없다.
2) 타락한 이들은 사실, 명목상의 신자일 수 있다.
3) 영적 체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 - 그들의 참 믿음을 보장할 수 없다. 마7장 이하의 거짓선지자들처럼
4)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 인간의 이해정도의 차이가 있다. ex) 가룟유다
결론: 하나님의 이해와 인간의 이해는 다르다.
결국, 우리 인간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견인의 사실과 타락 사이의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신자의 차원에서는 긴장관계를 느끼게 된다. 우리가 아직 최종적 단계까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견인교리를 말한다고 해서 낮잠자고 뒷짐지게 되면 안 된다. 성도의 견인교리가 나태한 신앙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늘 자신을 돌아보며 노력해야 한다는 측면이 동시에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차원에서는 최종적 종착역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의 삶 속에는 늘 긴장관계, 죄와의 싸움이 있을 수 있다. 현실적 긴장관계와 싸움이 확실한 미래가 없는 불안한 싸움은 아니다.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싸울 수 있다. 하지만 싸움을 배제시키는 견인의 교리는 안 된다.
영화
1)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신자에게 적용되어지는 구원의 완성 단계. 잘못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죽을 때 영화의 단계로 들어간다는 것. 영적차원 뿐만 아니라 육신까지 포함하는 전인적인 구원이다. 우리의 육신까지 회복되어지는 시기는 예수님의 재림시기. 즉 재림시기가 영화의 시간이다. 롬8장 몸의 구속. 예수님의 구속은 영혼 포함 육신까지 구속. 영화의 단계는 죽음의 시점이 아니라 부활의 시점이다.
2) 이 영화는 전우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신자들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이 새로워지는 우주적 차원의 축복이다. 또한 선택된 백성들 모두에게 동시에 주어지는 역사. 주님의 재림과 함께 주어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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