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사상적 배경-
헬라적인가? 유대적인가?
기독교학부 200012018 라황용
서 론
요한복음서는 오랫동안 학자들의 전쟁터가 되어 왔다.1) 요한의 독특한 가르침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어리둥절하리만큼 다양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 견해를 가진 자들에 따르면 요한이 예수의 입에서 나온 가르침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가르침은 그의 것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며 다른 복음서들의 증거와 될 수 있는 한 가깝게 조화되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성취하기가 불가능한 임무로 나타나며 요한이 예수의 것이라고 돌리고 있는 가르침은 사실상 그로부터 온 것이 아닌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2) 그러나 이러한 것이 인정된다 할지라도 요한의 가르침 가운데 그로부터 오지 않은 것들의 자료들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이 여전히 남게 된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요한에게 있어서 가르침의 자료는 거의 완전히 다른 곳에서부터 왔다고 생각하려 한다.
따라서 최근의 요한복음의 논쟁의 관심 즉, 요한복음서의 사상은 그 배경이 영지주의인가? 유대교인가?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전적으로 헬라적 배경인가? 아니면 원래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일어난 역사적 예수 운동을 헬라적 사상 배경을 가진 저자가 헬라적으로 재해석하고 변경시킨 것인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은 요한에게 끼친 사상적 배경이 전적으로 헬라적 배경인지, 아니면 유대적 배경인지를 논증하고자 한다.
본 론
1. Hellenism 배경
여러 해 동안 요한복음은 헬레니즘계 사람들의 복음서였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3) 다시 말해 요한복음은 그리이스인들을 위해서 그리이스 사상가에 의해서 씌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요한복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헬레니즘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와 2세기에 사람들과 사상들은 빠른 속도로 멀리까지 교류되었으며 제의들과 철학들은 함께 뒤섞여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었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쓸 당시의 그리이스 전통은 그리이스 황금 시대의 고전 철학과는 다른 것이었다. 순수하게 헬라적인 것들은 이제 헬레니즘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기원전 5세기의 화려했던 자부심은 무너져 버렸다. 합리적인 사상은 신비주의와 타협했다. 철학과 종교 영역 모두에게 절충주의가 그 시대의 유행으로 되었다.4) 당시는 한마디로 말하면 절충주의(syncretism)의 시대였다.5)
지중해 주변 세계의 옛 종교들은 많은 경우 회의주의로 말미암아 해체되었다. 그러나 보다 새로운 신앙들이 동방으로부터 흘러들어왔고 그것들은 점점 더 종교적으로 되어가는 후기 그리이스 철학에 어느 정도 근거하면서 스스로를 확립시켜가고 있었다.
요한복음에는 플라톤 사상, 스토아 사상. Philo6)의 글들 Corpus Hermetica7) 또는 영지주의등과 일부 사상구조에 있어서 어휘에 있어서 비슷한 점들이 꽤있다. 가장 근본적으로 헬라적 이원론의 사상구조와 어휘가 요한복음에 잘 반영되어 있다. 플라톤에 의해 잘 정리된 그러나 전문적인 의미로 플라톤 사상뿐만 아니고 헬라세계 전체의 근본적인 사상 구조인 이원론8)의 사상구조가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9) 요한 복음의 근본적인 사상구조는 말씀이라든지 또는 진리 또는 암흑 등과 같은 이원론적인 구조 외에 조금 더 헬라적 사상적 영향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요한복음에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영지주의적 주장은 R. Bultmann에 의해 옹호되어 왔다. 곧 요한은 영지주의적인-근원적으로-계시 연설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수용해서 예수를 위로부터 오는 신적인 지식의 최종 계시자로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10)
좀더 최근에는 E. Kasemann은 요한복음이 영지주의 복음서로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대담하게도 자기시대의 기독교를 영지주의로 대치했다고 하면서, 그래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따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으로 그려져 있다고 말한다.11) 더구나 그는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선언이 강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선언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본다”는 선언에 압도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는 “다른 인간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며 인간의 영역가운데 내려와 거기서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말한다.12) 이런 점을 염두해 볼 때 요한복음서는 가현설(Docetism)13)이 나타나는 초기 단계를 넘어선 시기의 기독교를 대변한다고 하는 주장을 전개시켜왔다. 따라서 케제만은 1:14a(“말씀이 육신이 되어”) 보다 1:14b(“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가 전체 요한복음서의 중심 사상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서에 나타난 사상 및 표현과 이집트의 나그 하마디(Nag Hammadi)에서 1946년에 발견된 영지주의 도서관의 서적들 사이에는 몇 가지 놀라운 평행 구조가 존재한다.14) 또한 언뜻 보기에는 요한복음이 지식을 굉장히 강조한다(‘안다’는 말. ‘하나님을 앎’등). 요한복음서에서 믿음이 앎(지식)으로 표현되고 있음은 사실이다(‘영지주의’란 용어는 지식을 의미하는 희랍어 ‘그노시스’에서 유래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지식’이라는 말과 ‘믿음’이라는 말이 상호교환용으로 또는 같은 의미로 쓰인다. ‘하나님을 믿는다’ = ‘하나님을 안다’이다. 영지주의에서는 지식이 구원의 수단이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헬라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헬라적 세계관을 전제하면 인생관을 물질인 몸, 육신 속에 영의 세계에 속하는 영혼이 타락해서 갇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영혼의 무덤 혹은 감옥이라 한다. 영혼은 원래 진리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 영원의 세계에 속한 것인데, 그것이 물질인 몸, 육신에 타락해서 갇혀 있다.
또는 무덤에 시체로 누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영혼은 이 세상이 자기의 본향이 아니고 영원의 세계가 자기의 본향인 것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한다. 그러나 많은 영혼들은 이 몸 속에서 그냥 잠자고 있거나 아니면 죽은 상태로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이 세상의 현상의 세계의 가짜 가치들, 육신적인 가치들을 높게 평가하면서 그것을 추구하고 산다. 이런 식으로 인생관이 결정된다.15)
그러면 이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구원론은 당연히 몸에 갇혀 있는 영혼이 몸에서 해방되어 영혼의 세계 (영의 세계, 본질의 세계, 빛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구원이다. 몸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고 몸은 본질적으로 물질의 세계, 암흑의 세계에 속한 악한 것이다. 영혼이 몸에서 해방되어 영혼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구원이다. 어떻게 귀환하느냐면 지식을 통해서 귀환한다.16)
플라톤의 철학17)에 의하면 - 플라톤의 대화록 중 Phaedo (혹은 Phaedrus)에 보면 자세히 플라톤적인 구원론이 설명되어 있다. 철학을 함으로써 곧 지식을 얻어서, 이 세상은 현상의 세계, 시간의 세계, 변화의 세계(늙고 쇠퇴하고 죽는 고통이 다 여기서 온다)인 것을 알고 본향, 영원의 세계, 진리, 빛에 대해서 자꾸 깨우침으로써 영혼을 붙들고 있는 (가두고 있는) 몸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져서 영원의 세계로 귀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적인 구원이다. 이것이 대중화된 형태가 영지주의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에서는 철학활동을 통해 지식을 얻어 구원을 얻는데, 영지주의에서는 이 지식이 아주 천박하게 되어 철학적인 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우침에 의해서 영혼이 자유로워져서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영지주의 Sect들 (파벌들)에 소속하면 그곳 자기들 단체에서만 전수되는 비밀 지식을 얻게 되어 영혼이 몸으로부터 이 세상의 시간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구원을 얻는다 하는 것이다.18)
그런데 Bultmann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영지주의에 구원자 신화가 있었다고 한다.19) 영원의 세계에 속하는 원래 빛의 몸으로 되어 있던 Anthropos 가 암흑의 세계와 싸워서 져서 그 몸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조각들이 몸속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의 영혼이 되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영혼들은 태초의 인간(Urmensch)의 파편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파편을 많이 받아서 아직도 본향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고 어떤 사람들은 파편들을 조금 받아서 영혼의 세계 본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이런 사람들은 땅에 속한 자들로서 구원에 대한 가망이 없다. 본향에 대한 기억이 있는 자들만 영지주의적 인간들로서, 지식을 얻어서 다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다시 Anthropos 가 물질의 세계에 와서 암호(비밀지식)을 말하면 자기 몸의 파편을 가진 자가 모두 이 암호를 알아듣고 다시 모여들어서 산산조각 난 Anthropos가 원래의 몸을 빛의 몸을 이루어 이들을 이끌고 영원의 세계로 귀환한다. 이것이 영지주의의 구원받는 ‘스스로 구원받음으로써 남을 구원하는 신화(the redeemed redeemer myth = erloser mytos)'이다.20)
불트만은 요한이 바로 이런 구원자 신화를 빌려서 예수에게 적용해서 신약의 기독론을 형성했다고 한다. 태초에 말씀이 인자로서 위에서 아래로 와서 우리를 데리고 같이 하나님의 우편에로 귀환시키는 3단계 기독론(선재한 그리스도, 성육신한 그리스도, 고난받고 다시 영광으로 승귀하는 그리스도)도 전부 영지주의 신화의 역사화라는 것이다. 즉 영지주의의 신화를 빌려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원자로 하나님의 계시자로 선포했다고 주장했다.21)
바로 이런 주장으로 불트만은 유명한 요한복음 주석을 썼다. 1960년대까지 한동안 이 설이 유행했다. 불트만은 R. Reitzenstein 이나 W. Bousset 같은 사람들의 종교사적 연구에 근거해서 그의 영지주의 신화를 재구성했다.
그러나 1950년대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C. Colpe, H, M, Schenke, R. Mcl. Wilson) 불트만과 그의 선생들이 고수하는 고대문서(이란, 인도, 바빌로니아, 헬라, 이집트)들을 다 점검했을 때 이런 신화가 존재하지 않은 것을 밝혀냈다. 즉 불트만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이런 엉터리 영지주의의 신학에 호소해서 요한신학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다만 AD 2c이후 헬라 유대교(지혜신학, 말씀의 신학, 천사신학)와 기독교의 영향(바울과 요한의 기독론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에서 간혹 조금 비슷한 신화가 나타난다. 그것은 원래적 헬라적 이원론에 있어서의 영이 타락해서 물질의 세계인 몸에 갇혔다가 다시 해방되는 과정을 객관화하고 극화(dramatize)한 결과가 이른바 영지주의적 신화이다. 그런데 이 영지주의 자체내에서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유대교의 지혜신학이라든지 신약의 기독론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영혼의 물질에의 타락과 물질로부터의 해방의 과정을 객관화하고 극화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요한복음이나 바울 신학에서 영지주의에로 영향이 끼쳐졌다. 그러기 때문에 최근의 학자들은 발아기적(배타기적) 영지주의(Incipient Gnosticism)이라 한다.
이것은 불트만이 이야기하는 영지주의적 신화가 아니라 그런 신화를 가진 하나의 사상체계가 아니고 헬라세계의 근본적인 이원론과 인도 동방계의 이원론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 영지주의라고 대개 책들에 쓰여졌는데 그게 맞는 말이겠지만 사실은 인도 사상이 플라톤 사상과 똑같다. 그것은 원래 일원론(Monism)에서 이원(Dualism)으로 전개되는 과정에 있어서 세계관 인생관이 꼭 이렇다. 인도철학에서도 원래 신인, 우주적 본질이 형상으로 Projection된 것이 우주이다. 이것을 수레바퀴로 표현한다. 그래서 우주의 본질은 바퀴의 기하학적인 축과 같다. 바퀴의 기하학적인 축은 돌지 않는다. 즉 변화가 없다. 영원의 세계이다. 본질의 세계, 진리의 세계이다. 그런데 그것의 투영된 상태, 그것은 바퀴의 겉과 같은데 그것은 현상의 세계이다. 즉 하나의 본질이 삼라만상으로 만가지의 현상(Phenomena)으로 나타나는 것이 시간의 세계이다. 그래서 윤회한다. 변화한다. 이 변화가 바로 인간의 고난의 근본이다. 낳고 늙고 병들고 죽고 낳고 ... 이 윤회의 변화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본질의 세계로 뛰어듦으로 그래서 변화없는 우주의 본질과 합일된다. 이것을 열반이라 한다. 즉 현상으로서의 자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무아, 적멸, 입적)가 된다. 그런데 그것은 지식으로서 가능하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구원의 수단은 1)깨달음, 자각 즉 지식, 2)선행, 3) 요가 , 참선이다.22) 이와 같이 플라톤적인 세계관이나 Monosm에서 Dualism에로의 전개과정에 있는 세계관이나 인도철학에서의 세계관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본질적으로 같다.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의 수단은 지식이다.
역사적으로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러한 근본적으로 같은 사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인도철학과 플라톤 철학과 또는 그런 철학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성들이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 영지주의이다. 힌두교의 중요한 경전 veda(지식이라는 뜻)는 헬라어의 αιδα(안다)와 같은 말이다. 이런 영지주의 경향이 즉 영지주의적 신화를 발달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이와같은 이원론적인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구원론을 가지고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강조하는 그런 종교적 경향을 Incipient Gnosticm 이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특히 요한일서)이 일부 반영되어 있다.23)
이러한 요한복음의 사상적 배경이 이와같은 헬라적인 이원론, 그리고 그것의 좀더 대중화된 천박한 형태로의 영지주의 그러나 그때의 영주주의는 불트만이나 E. Kasemann이 이야기 한 대로 발달된 영지주의가 아니고, 이제 배태되는 이런 이원론적인 세계관 인생관에 근거해서 육을 무시하면서 영혼의 구원만을 꾀하여서 지식을 강조하는 그런 종교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언어를 써서 선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사상적인 언어와 구조가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앙고백과 위배 될 때 그것들을 배격하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을 요한복음에서 보여준다.
2. 유대적 배경
최근에는 요한복음에 대한 구약성서와 유다교의 중요성을 보다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요한복음은 철저히 팔레스틴적인 것이다. 어떠한 의미에서건 이 복음서가 헬레니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서의 전체적인 방향에 어긋나는 것이다.”24) 그리고 나아가서 요한복음서 안에 전적으로 유다교적인 자료들이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25)
요한의 세계에는 유대교적 세계가 주류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이 보고하는 모든 사건은 유대인 예수와 그의 유대인 제자들의 갈릴리와 유대 땅에서의 사건이다. 특히 남부 유다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사건들을 보고한다. 요한복음에 이방인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내에 유대교와 상호작용이 현저하다. 유대교의 제도, 관습, 신학적 범주, 개념이 풍부하게 나타난다.26) 특히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묵시문학의 흐름과 랍비적 사상의 흐름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27) 아마도 묵시문학은 구약성서 중 예언자적인 것을 계승했고 랍비적 사상은 법적인 것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율법과 예언서들을 서로 떼어놓을 수 없듯이 묵시문학과 랍비 문학은 분리 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비유다교적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얼핏 보기에 요한은 묵시문학적 문헌들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28) 먼저 묵시문학이 오로지 미래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묵시”(Apocalypse)란 비밀의 베일을 벗기는 것을 의미한다. 매우 자주 이 비밀은 미래의 사건을 드러내준다. 그러나 때로는 현재적인 사실들, 특별히 천적인 삶이나 신적 존재, 혹은 그와 유사한 존재들에 관한 사실들을 알려준다. 이 두 종류의 비밀은 서로를 넘나드는데 그 이유는 천상에서 영원히 현재하는 것의 베일을 벗기는 것은 지상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지적해주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의 묵시문학은 대개가 미래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예컨대 비록 요한계시록이 천상의 예배를 생생하게 그대로 묘사하고 있을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현실의 배일을 벗겨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묵시문학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언어들을 고찰해보면 묵시문학과의 유사성이 드러난다. 그는 예수를 메시야(반드시 묵시문학적 언어만은 아니다), 왕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묵시문학 작품 외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칭호이다)로서도 말할 수 있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와 동시에 그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물론 그 모두가 피안적인 나라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3:5, 18:36). 인간들을 위해서는 먼저 부활이 있고 (말그대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 나오는 것 5:28, 참조 11:43-44) 그 뒤에 심판이 있다.(5:29). 요한이 현재적인 부활과 현재적인 심판 모두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고 해서 그가 미래적인 부활과 심판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사상이 묵시문학적 틀 위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의 종말론이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110-13면을 참조하라). 사람의 아들인 예수에 의해 심판이 행해질 것이다. (5:27), 따라서 그는 아버지에게로 떠난 뒤에 다시 오리라는 점도 분명해진다(14:3, 18:21,22).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준 축복은 “영원한 생명”(ζωη αιωνιος)이며, 또 묵시문학의 기본 개념인 다가오는 “세대”(αιων) 생명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묵시문학적 언어들에 덧붙여서 자라나는 씨(12:24)라든가 무르익은 추수(4:35-38)와 같은 은유들이 사용되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요한의 사고유형이 매우 독특하고 그리스도교적 통로를 통해 지식을 습득했다 하더라도 그는 유다교 묵시문학적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는 않았음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그가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철저하게 수정하면서 받아들였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요한복음서의 배경에 관한 논의는 사해 사본들이 발견된 후 그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사해 근처의 Qumran, 이른바 사해문서를 발견함으로써 얻은 가장 중요한 점은 초대 교회의 최초의 발상지였던 1세기 팔레스틴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매우 풍부해졌다는 사실이다.29) 요한복음서 가운데서 지난 한 세기 이전에는 영지주적 또는 희랍적이라고 분류되어 왔던 바로 그런 용어들을 쿰란(Qumran) 공동체가 쓰고 있었던 것이다.30)
Qumran 문서들의 이원론적 사상구조나 그 언어들이 요한복음의 이원론적 언어들과 사상들과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다.31) 빛과 어둠의 대조 ‘진리를 좇는다’라는 구절(3:21), 신자들을 ‘빛의 자녀’로 묘사하는 것(12:36)등은 모두 다 쿰란 문서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32)
요한복음에도 원래 구약 유대교의 종말론적 이원론33)과 헬라적 이원론34)이 같이 조화되어 나오는 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이다. 이것은 분명히 구약 유대교적 배경(이세대/오는 세대)가 헬라배경(위/아래)에서 온 것이다.35) 그런데 Qumran문서도 시간적인 이원론과 공간적인 이원론이 같이 나타난다. 이와같은 이원론에서 온 언어들, 빛-암흑, 진리-거짓, 영-육, 빛의 자녀들-암흑의 자녀들, 이런 언어들이 Qumran 문서에 다 나온다.
유대교는 그것이 팔레스타인에서 실행된 유대교든 다아스포라에서 실행된 유대교든 무조건 헬라적 종교와 문화의 영향을 받은 헬라 유대교라 할 수 있다. 그것의 증거가 Qumran문서이다. 요한복음도 팔레스타인 유대교에서 나타난 현상이지만 얼마든지 헬라적인 사상구조와 언어들을 반영할 수 있었다. 어찌 되었건간에 지금은, 요한복음서에 사용된 언어와 이미지가 팔레스틴의 유대교에 기초한다는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와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어 있다. 요한복음서의 근본적인 배경은 1세기의 팔레스틴 유대교이다.36) 우리는 요한복음서가 탄생한 근본적인 사고의 세계는 구약과 유대교라는 것을 많은 현대의 학자들과 더불어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사상이 당시의 유대교의 안팎에서 끼쳤던 영향력들의 산물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결 론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은 부인할 것 없이 헬라적 배경과 유대적 배경이 둘 다 있다.37)근본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당시 유대교가 오랜 헬라의 영향으로 헬라적 요소를 수용하고 있다. 이와같이 함으로써 헬라인에게 또는 헬라세계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기 위해서 일부 헬라적 사고 구조와 어휘들을 쓰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배경을 가지고 요한복음의 역사성을 부인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두 가지 사상적 흐름의 공존은 보다 이전에 헬레니즘계 유다교에서 이루어졌던 둘 사이의 결합을 생각나게 한다. 그러나 어떠한 선례에 호소하든지간에 본인은 요한에게 끼친 사상적인 배경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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