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가지 罪-① 교만 죄
누가복음 18:9-14/ 이동원 목사
금세기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C.S 루이스 라는 평신도는 오늘 우리 시대를 가리켜 구도 정신을 상실한 시대라고 말했습니다. 구도 정신을 상실한 그 구체적인 증거중의 하나는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현대인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의 감격을 얻고 또 죄를 이기는 성숙의 환희가 있으려면 먼저 자기 죄에 대해서 아파하고 또 괴로워하는 그런 진지한 죄에 대한 대면이 있어야 하는데 현대인들 가운데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죄악'이라는 단어는 단어조차 실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은 ' 죄'라는 단어를 싫어한 나머지 환경에의 부적응, 정서 장애, 습관적인 어떤 집착 이런 등등의 심리학적인 용어들의 안개속에서 '죄'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도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칼메닝거라는 정신 의학자는 이런 경향이 인간의 정신건강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아주 예언자적인 증언을 했습니다.
죄에 대한 해결은 죄를 죄로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할 수가 있습니다. 예컨 대 우리 집안에 독약병이 하나 있다 고 하십시다. 이것은 특별한 케이스를 위해서만 쓰여지는 아주 중요하고도 값비싼 그런 독약이 하나 있는데 독약이라고 쓰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아서 병에다가 sugar(슈가)라는 그런 레뗄을 붙인다고 하십시다. 이것이 도움이 되겠어요? 더 위험할 수가 있지요. 독약은 독약이라고 써 붙여야 하고, 그 아래 아주 명확하게 위험이라는 경계 표지를 붙여야 할 것입니다.
danger!(땡기얼) 위험! 그런데 이 위험 표지를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어떤 중학생 하나가 그 독약을 먹고 죽을 뻔한 그런 사고가 있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아버지가 야, 너는 중학생이 되어서 이 danger라는 영어 단어 하나 못 읽냐? 그러니까 아빠 잘 읽어보라고 그게 단거지, danger. 독약은 독약이라고 말해야 되고, 죄는 죄라고 말해야 됩니다. 저는 우리 시대의 영적인 각성은 이 죄에 대해서 진지한 대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성경이 지적하고 있는 일곱가지의 커다란 죄악에 대한 말씀을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일곱가지 죄악! 본래 일곱가지 죄악이라는 리스트는 그레고리 대제라는 사람이 이것을 리스트화했다는 데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사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4세기부터 일곱가지 죄악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묵상, 그리고 죄에 대한 메세지들이 있어왔습니다.
왜 하필이면 일곱가지인가?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첫째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숫자이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를 일곱 가지 죄가 대표하고 있다. 그런 의 미에서 일곱가지 리스트로 요약한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이들구요, 두 번째는 한주간이 일주일인데 중세기에 보면 경건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매일 한 가지의 죄를 생각을 하면서 그 죄를 이기려는 경건의 실천을 해왔다고 합니다.
자, 일곱가지의 죄가 뭐냐?
첫째는 교만이에요. 두 번째는 질투, 세 번째는 분노, 네 번째는 탐심, 다섯 번째는 탐식이 있어요. 그것도 리스트에 들어가더라구요. 여섯 번째 게으름, 일곱 번째는 정욕. 일곱 가지를 가리켜서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seven deadly sins, seven cardinal sins - 그래서 일곱가지 가장 커다란 죄악이다. 이런 표현으로 불러왔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그 첫 번째 죄악인 교만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교만은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 고 하는 사람은 이 교만을 가리켜서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모든 죄악의 어머니가 된다. 다시 말하면 교만이외의 다른 모든 죄들은 바로 교만이라는 죄 때문에 파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죄악들은 교만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만이 분노를 낳고, 교만이 탐심을 낳고, 교만은 모든 죄악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위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그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비유를 통해서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교만의 죄악을 폭로하고 계십니다.
교만의 죄, 그 특성은 무엇일까요?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자, 첫째로 교만의 죄의 특성을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떠한 죄일까?
첫째,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 중심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극단적인 자기 중심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오 늘 본문의 비유의 교훈이 베풀어진 대상을 먼저 주목하십시오. 자, 본문이 시작되는 9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이 비유가 말씀되어진, 베풀어진 대상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 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자기를 존중히 여긴다. 자기를 귀히 여긴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 건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의 심리학자들도 자존감의 중요성, 소위 self esteem이 인간의 정신건강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역설합니다.
건강한 프라이드는 죄가 아닙니 다. 건강한 프라이드는 병적 프라이드와 구별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귀히 여기는 것은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만 사랑하는 것은 죄입니다. 자기만 사랑하는 것! 여기 그 비유가 베풀어진 대상이 누군가하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거기서 끝나지가 않아요.
자기 이기심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비난하고 파괴하기 시작할 때 이것은 자존감의 영역을 넘어선 구체적인 죄악의 모습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의 시작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일종 의 자기 숭배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교만을 정의하기를 교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만 이 즐길 수 있는 병이다. 아주 재미있는 말이예요.
15세기의 설교자중 에 사보나 롤라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자, 당시는 카톨릭세계였으니까 성당에, 어느 날 아침에 산책을 하다 보니까 거기에 마리아 상이 있었는데 마리아 상앞에 어떤, 꽤 나이가 들어보이는 부인 하나가 경건한 모습으로 참배를 하면서 아주 진지하게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이튿날 산책을 하다 보니까 똑 같은 시간에 그 부인이 오더라구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결같이 같은 시각에 와서 마리아상 앞에 참배하는 이 부인을 보았습니 다.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아주 신앙심이 귀한 분이로구나.
어느 날 이 사보나 롤라가 자기 동료사제와 산책을 하다가 만나서 그 부인을 가리키면서 여보게 내가 저 부인을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이 없소.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꼭 같은 시간에 와서 저렇게 기도를 한단 말이야. 참 신앙심이 유별하지?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제가 껄걸 거리면서 웃는거예요 자네 모르는구만. 그래서 뭘 모르나? 그랬더니 자네 스토리 모르나? 무슨 스토리? 우리 옛날에 이 성당에 이 마리아상을 처음 조각할 때, 그 조각가에게 위임을 했을 때 그 대상, 모델을 찾았을 때 그 모델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저 부인이 처녀시절에 저 부인이 뽑 혔다네. 그래서 저 여인을 모델로 해서 마리아상을 만들어 놓은 이후로 그 다음 이튿날부터 출근해서 지금까지 빠진 일이 없다네.
그 부인은 자기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인은 거기서 자기 얼굴을 보 고 자기를 엔조이하고 자기를 숭배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원죄의 뿌리입니다. 사단은 에덴동산 처음 사람 아담에게 찾아와서 첫 번째 유혹을 이렇게 던졌습니다.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네가 하나님이 될 수가 있다. 교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절대화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절대화한다든지 혹은 나의 주장을 절대화시킬 때 바로 이것이 교만의 모습이예요. 인간은 언제나, 범죄하는 인간은 항상 잘못 될 수 있습니다. 겸손히 자기를 상 대화시키고...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주장을 절대화시키는 그런 이기심의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바로 이런 극단적인 자기 중심의 죄악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교만은 이웃과 나 사이에 벽을 쌓는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웃과 나 사이에 벽을 쌓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자, 오늘 11절에 보시면 바리새인이 기도 하는 모습을 예수님은 이렇게 보도 했습니다. 자, 1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절"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자, 우선 11절에 보시면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 기도하던 위치가 어떻게 되었다고 성경은 강조합니까? 세리들과 따로 자기가 기도하는 자리조차 구별해서 서서 따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두 번씩 반복되는,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반복되죠? "같지 아니하고"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 하는 자들과 나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다릅니다. 나는 세리와도 같지 아니합니다. 나는 다릅니다. 강조되요. 아마도 바 리새인들은 이 세리족속들을 봤을 때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 자, 그러나 그 밑바탕에 숨어있는 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우월감이지요? 우월의식이예요. 그것은 바로 교만의 뿌리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생각해 보세요. 이 바리새인들이 저 세리들도, 비록 로마에 아부하고 민중들의 피를 빨아먹고 착취하는 사람이라고,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돌림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저들을 지으실 때 나와 꼭같 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주신 사람들이다. 저들 안에도 하나님의 혼이 있다. 하나님의 생기가 있다. 하나님의 인격이 있다. 하나님의 숨결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다라고 생각했었더라면 어떻게 그 사람들을 대했을까요? 우리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할 때 인간은 모두가 다 타락했으며 모 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면 나도 죄인이고, 저 사람도 죄인이고 저 사람 안에 있는 부패성이 꼭 같이 내안 에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동일한 하나님앞에 죄인됨을 인지할 수가 있었더라면 이 바리새인이 세리들을 어떻게 접근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이웃들과 지나치게 선택적으로만 교제의 폭을 좁히는 것을 좀 조심할 필요가 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저런 사람들과 교제않겠다. 종종 이런 선언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의식의 밑바탕에는 숨겨진 우월감이 있습니다. 교만이예요. 그것은 교만입니다. 또 우리가 이웃들에게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아주 비판적인 자세를 갖는 것을 또한 우리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일종의 교만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남을 비판할 때는 아주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말하고, 또 남들에 의해서 자기가 비판을 받을때는 그것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비판이라고 종종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의 병인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가정에 있으면 가정 전체가 고통을 받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한 공동체에 있으면 공동체 전체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 교만한 사람들 그들의 공통점은 벽을 쌓는 것입니다. 이웃들과 나사이에 계속해서 벽을싸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패를 이루면서 계속 파벌의 벽을, 단절의 벽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들은 이웃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우리 공동체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bridge maker가,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셨듯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교만은 이웃과 나 사이에 벽을 쌓는 것, 이웃과 나 사이를 단절시키는 죄악인 것입니다. 자, 교만은 왜 경계해야 할 죄악인가? 교만은 둘째로 이웃과 나 사이에 담을 쌓는 혹은 벽을 쌓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교만은 어떤 죄악인가? 교만은 하나님앞에서도 자기를 속이는 죄악이다. 세 번째로 교만은 하나님앞에서도 자기를 속이는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본문은 기도의 비유입니다. 자, 이 기도의 내용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11절에 바리새인이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자, 기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단어가 무슨 단어같아요? '나는' 우리말에는 두 번밖에 안 나오지만 원문에는 훨씬 더 많이 '나' 라는 단어가 계속적으로 출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나는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기도예요? PR이예요? 뭐 기도의 형태를 빌리고 있지만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앞에서도 자기 선전, 자기 자랑에 몰두하고 있는 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기도의 주어는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죄인이 주 앞에 왔습니다. 하나님!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구요 당연히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야 할 이 기도에 있어서 주어가 뒤바뀌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의식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있는 이 바리새인, 그리고 자기의 그 아픔을, 자기의 어두움을 숨김없이 노출하여 주의 도우심을 구하기 보다도 자기 PR에 분주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도 자기 PR에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변화됩니다. 저는 깊이 기도하는 사람들, 참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기도하면 사람이 변하더라구요 진지하게 기도하면서 인생이 변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 은 기도해도 안 변하더라구요 그것은 기도가 뭔가 잘 못 되었을거예요. 자, 기도속에서 자기를 노출할 줄 아는 사람, 내 속에 있는 부조리, 내가 숨기고 있었던 내 속에 있었던 상처를 살아계신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자비와 긍휼을 구할 때 어떻게 이 사람의 삶속에 변화가 없겠어요? 그러나 변화 안되는 사람들은 기도 속에서도 자기를 카바하고 있는 사람, 자기를 하나님앞에서도 자기를 숨길 수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포기하지 않은 교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어떤 자매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자매는 결혼할 때 자기 남편하고 약속을 했대요. 우리는 잠자기전에 꼭 둘이서 함께 기도하고 자자. 그래서 남편은 끌려가다 싶이 했지만 어쨌든 결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둘이 꼭 잡고 대부분 아내가 기도하는 것이 보통이고 이따금씩 남편도 몇 마디 기도하고 둘이 손 잡고 기도하고 항상 잠자리에 들었답니다.
하루는 남편이 아주 술에 만취해서 들어왔어요 '그래도 여보 약속대로 오늘도 기도해야지' '아이 뭐 기도하냐'고... '아니 오늘도 기도하자'고... 남편의 손을 잡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보시다시피 오늘 밤 우리 남편이 만취했습니다. 술 취한 우리 남편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이 남편이 술김에 그러더래요. '여보, 주님앞에 술 취했다고 그러지 말아. 아프다고 그래 그냥 아프다고 그래'... 그 뭐가 차이가 있어요? 그 속에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자존심, 우리 속에 뿌리 깊은 교만의 정체를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앞에 서서도 자기를 속이는 죄악인 것입니다. 자, 이 교만은 어떤 결과를 가져 옵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교만의 결과는 기도가 응답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는 상태에 전락하게 됩니다. 자, 14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 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내가 너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이것은 비교급은 아닙니다,
사실은. 본문의 문장이 그렇게 들려옵니다만 사실은 이 사람이 바리새인이 아닌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아니, 세리는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13절에 보시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주님의 결론은 뜻밖에 이 세리가 의롭다함 을 받았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고 인지하고 그 죄를 털어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 제가 주님만 의뢰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저를 새롭게 하세요.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고 십자가앞에 나와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분의 도움과 용서를 구하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순간 성경은 선언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신다고 간주하십니다. 믿으세요,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죄인됨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십자가앞에 나와서 예수를 믿는순간 오히려 그가 의롭다하심을 받습니다. 여기 복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반면에 나는 의롭다고 자기 PR 에 분주하고 바빴던 사람, 하나님을 그를 외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두 가지의 측면에서 접근해서 정리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신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불신자가, 믿지 않는 사람이 교만하다면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태가 무엇일까요? 구원받을 수가 없어요. 교만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가 자기의 구세주예요. 자, 자기 당당한 자기 의를 자랑하고 있는 이 사람, 이 사람의 구세주는 자기 자신이란 말이지요.
예수 믿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 저 유명한 산상수훈의 팔복에 보면 첫 번째 축복이 어떤 축복이라고 말합니까?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누가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가 있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 내 안에 있는 부족함을 알고, 자기의 빈곤을 주앞에 드러 내는 사람. 그가 오히려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자기의 부요를 자랑하는 사람, 하나님이 도와주실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구원의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우리가 신자의 입장에서 접근해 보면, 어쩌다가 이 사람이 복음을 깨닫고 예수를 믿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사탄은 신자들 의 마음속에도 여전히 교만을 심을 수가 있습니다. 신자들이 교만하면, 성도가 교만하면 어떤 상태가 일어 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더 깊은 은혜, 하나님의 더 깊은 축복을 경험할 수 없는 사람이되고 맙니다.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단절된 생애를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은 주님의 도움이 별로 필요없는 사람입니다.
옛날 라오디게아 교회,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가운데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요하여, 나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쓸 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는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네 눈 먼것과 네 벌거벗은 것과 그리고 네 가련한 상태를 너는 스스로 알지 못한다. 착각입니다. 하나님 눈앞에 비춰진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내 버림받은 모습, 내 모순과 갈등속에 주저 앉아 있는 모습, 내 포장된 모습이 아니라 내속에 감춰진 신음하고 고통하고 있는 내 존재의 모습을 바라 보십시오. 어찌 주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를 긍휼히 여겨주세요... 이런 사람이라야 주님의 더 깊은 은혜, 더 깊은 사랑, 더 깊은 자비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교만은 이런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거부하게 만드는 죄악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 하십니다. 자, 본문에 보시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어떻게 된다고 하셨어요? 낮아지고! 이것은 양호한 표현이구요. 다른 성경에 보시 면 교만한 사람을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미워하신다. 아니,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에게는 뭘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또 교만한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은 대적하신다. 아니 대적하실 필요까지 있어요? 하나님이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교만은 사탄의 본질이에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사탄이라는 존재, 마귀의 존재의 본질이 바로 교만입니다. 왜 마귀가 마귀가 되었습니까? 마귀는 본래 천사장이었습니다. 루시퍼였어요. 천사장이 마귀가 되어 타락한 이유, 성경은 말하기를 그가 어느날 내가 저 높은 곳에 올라가 하나님과 비기겠다. 하나님과 맞먹겠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출발이었습니다. 마귀가 된 시작이었습니다.
교만이 마귀를 마귀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도 마 귀는 끝끝내 회개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마귀에게 영원한 심판이 결정 됩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 영원한 심판을 향해 가면서도 끝끝내 회개를 거절하고 그리고 영원한 파멸의 운명으로 함께 갈 자기의 동료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안에, 인간안에서 교만을 충돌질 하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사탄의 공작이고 역사인 것을 여러분이 잊지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교만의 죄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세리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세리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세리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세리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것이 세리의 기도예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겸손은 사람의 도움도 받을 줄 사람. 이것이 겸손한 사람이예요. 누군가가 겸손한 사람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했습니 다. '겸손한 사람은 한 손으로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의 손을 붙들고 또 한 손으로 내 이웃의 손을 붙들고 인생을 따뜻하게 걸어가는 사람, 이것이 겸손한 사람이다' 교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그리고 이웃들의 손도 뿌리치고 그리고 고독한 파멸을 향해 서 달려가는 사람.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이 교만을 넘어서서 주 앞에 참 겸손한 자로 은혜를 받으려면, 세리의 자리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배우셔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런데 이 불쌍히 여긴다는 단어가 희랍어에서는 아주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희랍어에서는 '힐라 스테리온' 이라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 옛날 대제사장들이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릴 때 법궤, 언약궤앞에 서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언약궤앞에 판이 하나 붙어있어요. 그 판을 시은소, 혹은 속죄소, mercy seat, 자비의 보좌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피를 뿌리고, 제물에 피를 뿌리고 그 앞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 대제사장의 기도를 받아주시고, 또 대제사장을 열납해 주시고 받아 주십니다.
그 피뿌린 은혜의 보좌를 나타내는 단어가 바로 불쌍히 여긴다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 저는 기도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저는 입술을 열어 기도하기에도 부끄러운 추악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를 대신해서 속죄의 제물이 피를 흘렸습니다. 하나님이 피를 보시고 저를 용납해 주시고 제 기도를 들어 주세요.
오늘 저와 여러분은 동일한 방법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오늘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의 피를 붙 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 도를 십자가에 매달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나아와 기도할 때 하나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입니다. 그가 나 때문에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배로운 피로 저를 씻어주시고 교만한 저를, 하나님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 때 그리스도의 보혈로 적시우면서 일어나는 나!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열려오는 새로운 삶, 그것이 바로 구원의 삶이고 은혜의 삶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때 내 앞에 새로운 삶이 열려옵니다. 은총의 삶이, 안식의 삶이, 그리고 아름다운 주께서 예비 하신 겸손한 새로운 삶이 예비될 수 가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바로 이런 세리의 자리에 서서 이런 기도를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어떻게 세리의 자리에 서요? 이 질문은 아직도 우리를 괴롭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끝나는 대목을 보면 자, 본문이 14절에서 끝나는데, 14절 바로 다음 절은 몇절입니까? 15절이죠? 15절을 보시면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이 꾸짖는 사건이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때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불러 세우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가 내게로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 사건이 바로 뒤따라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겸손한 사람의 표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겸손한 사람을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교만을 넘어선 진정한 겸손의 모습,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는 겸손의 사실 과 비교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특성이 있다면 첫째는 단순성, 어린 아이는 단순하잖아요. 두번째는 솔직성, 어린 아이는 아주 솔직합니다. 배 고프면 배고프다고 말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합니다. 괜히 자기를 커버하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세 번째 어린아이는 의존할 줄 압니다. 부모를 의존할 줄 알아요. 저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quality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리에 설 때, 단순해질 때 - 좀 단순해 지세요. 복잡하게 인생을 살지 말고 단순하게 그리고 솔직하세요. 하나님 나 아파요, 하나님 나 괴로와요. 나 외로와요, 아파요. 하나님 내가 혼란해요. 자기의 문제, 자기의 아픔을 주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낼 줄 아는 자, 그리고 하나님, 나 도와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의존할 때,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어린아이와 같이 의존할 때 주의 피가 우리를 씻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거기 나는 주의 피로 용서함을 받아 일어 나면서 얼굴을 들 수 없는 감격속에 오! 하나님 나를 받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여기서 열려지는 새로운 생애, 이 생애속에 교만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삶의 행진을 볼 수 가 있다고 믿습니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 교만의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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