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로서의 조각목
뿌리(שׁ??-소레쉬): 성막을 짓기 위해서는 이리저리 벋어난 뿌리를 자르지 않으면 재목으로 가져올 수 없습니다. 아직도 세상에서의 옛날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항상 성막바깥 뜰에만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성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아닙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함과 같이 나무 잎들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나무가 뿌리가 잘리면 죽습니다. 뿌리가 잘라질 때 그것이 나무일지라도 생명이 끊어지는 고통을 겪습니다. 아플지라도 하나님이 자기를 쓰신다면 기쁨으로 이 고통을 이기고 내가 죽어야지 합니다.
나무는 뿌리가 잘라지면 죽고, 죽은 나무는 나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뿌리가 잘리어진 부분을 보면 맑은 진액이 방울방울 배어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나무의 진액은 생명이 끊어지면서 울었던 눈물을 말합니다. 그 아픔과 고통을 이겨내면서 하나님이 쓰시겠다면 죽어야 된다고 울며 흘렸던 나무의 눈물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쓰시겠다면 내가 지금까지 세상에 얽혀있던 모든 것을 잘라내는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더라도 그러한 것이 잘라버려야만 성전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겠다면 기꺼이 나를 죽여야지! 이렇게 자원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뿌리가 잘리어진 아카시아 나무가 죽음으로서 쓰임을 받듯이, 사람도 자기가 죽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쓰일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과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두멍에서의 씻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었으므로 구원됐다고 합니다만, 성경은 그러한 사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순서적으로 봅시다. 모든 작업을 끝내고 물두멍에서 씻은 다음에 제사장에게 옷을 입히라하셨지, 작업을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세마포를 입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부분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의로워졌다. 그러므로 ‘주님이 죽으시면서 나를 의롭게 하셨다’는 잘못된 인식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의롭게 된 것은 주님 자신의 의지, 우리들의 의는 아니라고 성경에 일렀으되,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12)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6)
예수님의 의는 주님 자신의 의이지 우리의 의는 아닙니다. 의로움은 누구든지 자기가 행한 선으로 나타나는데 자기는 선행이 없으면서 어떻게 의로울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은 자기는 선을 행하지도 아니하고 예수님의 의를 도적질하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의롭게‘하려’라고 하였지 의로워‘졌다’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일에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하나님께 합당치 않다고 성경에 일렀으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이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하나님의 성막자재와 기구들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하여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들판에서 자라는 조각목은 그것의 뿌리를 자라내서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성막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 곧 세상적인 지혜에 억매여 있는 사람은 성막을 지으려고 나아오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속적인 것을 잘라버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가지(רי?אָ-아미라): 뿌리가 잘려진 나무는 가지들이 있는 그대로 운반하지 않았습니다. 가지를 처리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세워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가지들은 이사람 저 사람의 옷에 걸려서 옷을 찢고, 상처를 주어서 피를 냅니다. 또한 마른 잎사귀들의 와싹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워집니다. 동서남북으로 벋어나서 마음대로 흔들어대던 가지들은 다 쳐내고 쓸 만하게 만들어서 운반합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의 성전에 쓰임을 받는 과정도 이러해야 합니다. 세상에 얽매어 살던 그러한 세속적인 명예와 재물과 나를 부각시키면서 자기를 과시하며 자랑하던 여러 가지 가지들을 잘라버려야 하나님의 성막에서 자재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무슨 회장, 어느 대학, 사회의 어떤 직함 같은 자기를 나타내는 이런 것들은 내부적으로 바람(말썽)을 일으키는 요소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아프게 찌르는 가시들은 더더욱 고약합니다.
가시(ןוֹלּ?-실론): 가시는 길고 짧은 것이 있습니다. 굵고 짧은 것이 있습니다. 딱딱하고 부드러운 것이 있습니다. 오래된 고목일수록 가시가 짧으면서도 딱딱합니다. 그렇지만 단년생에서 돋아난 가시는 길지만 부드럽습니다. 이런 것을 뜯어내지 않으면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피를 흘리게 함으로 뜯어내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가시가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피를 흘리는 가시는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시를 뜯어내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됨으로 뜯어내야 됩니다.
단년생 나무에 붙어있는 부드러운 가시처럼 초신자일 경우에는 별로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혹 상처를 준다할지라도 아픔을 주거나 눈물을 자아내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교회생활을 오래한 사람, 곧 직분 자들은 고목과 같아서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신자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말썽은 초신자에게가 아니라 교회의 고목들입니다.
이러한 가시들을 뜯어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고 아픔을 준다면 그런 사람은 자기의 거듭남을 거부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막으로 자기를 거듭나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바깥뜰에서 예배하는 사람이요, 이기주의자요, 예수의 의를 도적질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물두멍 주위에만 맴돌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껍질(נ?-작): 나무의 껍질은 얇은 것과 두터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단년생 나무의 껍질은 얇으나, 오래된 고목나무가 껍질이 두껍습니다. 이러한 껍질을 벗겨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성막의 그 어느 곳에도 쓰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껍질들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또 껍질을 벗기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란 진액은 미끄러워서 잡으며 미끄러지고 때로는 손에서 빠져나가면서 껍질을 벗기는 사람의 발등에 떨어져서 아픔과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해당되는 껍질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나’라는 자아(Ego)입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을 잘못받아들인 직분 자들이 그러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는 사람일수록 자아라는 껍질을 벗기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잘못 받아드리고 자기가 원하는 해석으로 인하여 발생된 자아는 어느 제사장도 그 껍질을 벗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짓는 종들의 눈에서 눈물을 짜내는 존재가 됩니다.
바른 인식으로 지각을 지성적인 자신으로 형성 또는 성장시켜 나아가지 아니하고 그릇된 형성으로 성장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감정은 항상 불쾌지수로 받아들이고 좋지 못한 방향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불쾌한 판단이 결국은 모든 면에서 부정적인 사려(思慮)로 굳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껍질을 벗기는 것이 거듭남의 한 부분입니다. 자기를 성화시키는 과정에서 항상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치우치기 때문에 거듭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로는 거듭났다고 하지만 옛날의 세속적인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라는 껍질을 벗겨주려 할 때,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ㅡ이것이 난데 왜 내가 이것을 벗기움을 당해야하나? 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가 없나! 길거리에 깔려있는 것이 교회인데! 다른 교회로 가면 그만이지! 내 맘에 맞는 교회로 가겠다.ㅡ 그리고 다른 교회로 가버립니다.
이것이 교만한자의 말이요 이기주의자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행동입니다. 이미 먼저 있던 교회의 물두멍에서 죄가 씻어졌는데, 어째서 또 다른 교회의 물두멍에서 씻김을 받으러갑니까? 거듭났다고 스스로 고백했으면서 어째서 또 거듭나려고 다른 물두멍을 찾아갑니까? 그 자체로서도 자신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시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항상 물두멍 주위만 맴도는 것은 뒤로 물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침륜에 빠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성막을 지어가듯이 자신을 변화시켜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또한 강제적으로 잘려왔을 지라도 자기 가시와 껍질은 벗기려하지 아니합니다. 그것들이 벗겨져야 말릴 수 있습니다.
말리 움(שׁ??-피일): 껍질이 벗겨지고 가시가 뜯겨진 나무를 말리어야 됩니다. 햇볕에 말리면 빠르기는 하지만 갈라지고 휘어져서 쓸만한 것이 없습니다.(예; 부흥회나 산기도 등에서 갑작스런 변화 등임) 그러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늘에서 기름을 바르면서 말리면 갈라지지 않고 휘지않으므로 여러 곳에 쓰이기에 적합합니다. 자기교회 목사로부터 말씀으로 양육 받는 것이 그늘에서 기름칠을 하며 말리는 과정입니다. 나무가 휘어지거나 갈라지면 성막의 자재로는 쓰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틀어지고 행동이 굽어지고 조직에서 갈라지기 잘하는 사람은 아직도 옛사람의 성품이 그대로 있는 것은 거듭나지 않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품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막자재로 쓰이지 못합니다. 휘어지고 갈라진 나무들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밖에 버리던가 아니면 불에 태웁니다. 밖에 버리는 것을 ‘성전 바깥마당은....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계11:2)’는 말입니다.
이렇게 버려지는 나무는 이사람 저사람의 발에 걸려서 사람을 넘어지게 합니다. 교회에서 남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이 이런 부류에 해당됩니다. 제사장은 이러한 쓸모없는 나무는 불로 태우는 것입니다. 불에 태워진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유황불 못에서 태움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온전히 거듭나게 성화되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성경에 일렀으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당시 모세가 명령할 때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이 싫어서 모두 물러갔던 그때와 같이 오늘날도 믿는다는 신자들의 태도를 보면 그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무리들이 42개월이라는 대환난에 남겨지는 자이며 그 숫자는 믿는 자들의 ⅓이고, ⅔는 멸절된다고 스가랴선지가 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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